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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7/12)

5장

기댈 곳을 찾은 몸뚱이는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듯 열이 올랐다. 한번 오른 열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조지현의 몸을 조심조심 닦아주었다. 손에 쥐면 깨지는 보석을 다루듯, 다정하고 조심스런 손길에 그가 자신을 얼마나 귀애하는지 흐릿한 의식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었다. 목이 붓고 아팠다. 기침을 하면 피를 토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목은 타들어가는 것처럼 뜨거운데 몸은 손끝까지 얼어붙을 만큼 춥다. 어떤 고통을 호소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럽다. 아파. 몸을 웅크렸다. 시트에 몸이 스칠 때마다 칼날이 살갗을 저미는 것 같았다. 한계를 넘어선 고통은 정신을 너덜너덜하게 다져냈다. 단단한 손이 머리를 받친다. 차가운 것이 입술에 닿지만 거의 대부분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입 벌려 봐.

목소리가 뜻하는 바를 머리로는 인지하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결국에 손가락이 강제로 입을 벌려 물을 흘려 넣는다. 급작스럽게 흘러들어온 차가운 물에 기관지가 경련한다. 간신히 들어간 물을 고스란히 뱉어냈다. 이번에는 좀 더 조심스럽게 물을 흘려 넣었다. 염증으로 부은 목 때문에 물을 삼키기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끈질기게 조금씩 흘러들어오는 물이 목을 적셨다. 그걸 몇 번이고 반복하고 나서야 상대의 손이 물러섰다. 숨소리가 한결 가벼워졌지만, 여전히 눈을 뜨는 것도 버거울 만큼 열이 뜨겁다. 그냥 이대로 의식이 스러졌으면 하고 바랄 만큼. 입가에서 목까지 흘러내린 물을 닦아준다. 그러다 커다란 손이 뺨에 닿는다. 가만히 뺨을 그러쥔다. 그게 무어라고 단단히 붙든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버린다.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마디가 굵은 손이 조심스럽게 뺨을 어루만진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몇 번이나 떠올린 기억이다. 

선배님.

자신이 가졌던 유일한 온기를 입 밖에 내어 부른다. 

선배님. 선배님. ……선배님.

소리는 나오지도 않는다. 바싹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몇 번 달싹인 게 전부다.

아파요, 너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온전하지 못한 모습을 남자에게는 내보인다. 뺨을 쥔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고통을 어루만진다. 강석원이 괜찮아, 하고 어린애한테 하는 것처럼 속삭인다. 괜찮아, 나을 거야. 강석원의 목소리는 불안을 다스리는 힘이 있었다. 열과 통증으로 흐릿해진 정신이 반갑다. 앞으로 닥칠 일은 생각지 못하고 그에게 마음껏 기댈 수 있어서. 강석원의 옷자락을 움켜쥔 채, 조지현은 잠에 빠져들었다.

강석원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꼬박 조지현을 지켰다. 옆에서 잠시 누워있다가도 조지현이 불편해하는 기척을 내거나 기침을 뱉으면 몸을 일으켜 조지현을 살폈다. 조지현의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강석원은 물을 나누어 마시게 했다. 열이 오른 몸을 닦아주고, 통증으로 빳빳하게 굳은 팔다리를 주물렀다. 가물가물한 의식 사이에도 조지현이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면 강석원은 그로써 족하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조지현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잦아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그는 맨바닥에 모로 누워 눈을 감았다.

새벽녘에 쿵, 하는 소리에 강석원은 눈을 떴다. 조지현이 바닥에 넘어져 있었다. 강석원은 놀라서 바로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야.”

강석원이 조지현을 일으켜주었다

“토할 거 같으면 바닥에 해도 돼. 무리해서 움직이지 마.”

강석원의 말에 조지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조그만 목소리로 화장실에, 라고 대답했다. 

아무리 땀을 많이 흘렸다 하더라도 그동안 마신 물의 양이 있었다.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몸이 체온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강석원은 조지현을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갔다. 강석원이 바지를 내려주려 하자 조지현이 화들짝 놀라 몸을 틀었다.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조지현이 그를 밀어내려다 한쪽 무릎이 꺾여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두 손 모두 붕대가 감겨 있고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강석원이 조지현을 바로 세운다. 

“가만히 있어.”

강석원은 조지현의 바지를 헤집어 속옷 사이로 손을 넣었다. 퍼뜩, 굳는 조지현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고 강석원이 말한다.

“안 볼게.”

“제가 할 테니까, …….”

급박한 요의가 아래를 바싹 조인다. 조지현은 발가락 끝까지 예민하게 파고드는 날카로운 감각을 참아내며 강석원을 밀어내려 했다.

“괜찮아.”

재촉하듯 성기를 쥔 손이 위아래로 슬쩍 움직인다. 결국, 조지현은 참지 못하고 그대로 아래를 조이던 긴장을 풀고 말았다. 처리까지 깔끔하게 해준 후에 강석원은 조지현을 방에 눕히고 손을 씻고 돌아왔다.

벽을 보고 누운 조지현은 시트로 몸을 온통 가리고 있었다.

“열 올라.”

강석원이 시트를 끄집어 내렸다. 조지현은 도로 그걸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간신히 내렸잖아.”

강석원의 단호한 말에 조지현은 아주 조금 시트를 내렸다. 목덜미에 붉은 기운이 번져 있다. 강석원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모로 누워 조지현을 살폈다.

얼마간의 침묵 뒤에, 조지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자신이 미친 게 아니라면 분명 그에게 전화를 건 기억은 없다. 동전 하나 들고 나오지 못했다. 그런데도 강석원은 그 자리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나타났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알고 간 거 아니야.”

강석원이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그 뒤로 네가 학교에도 나오지 않고, 편의점에도 안 나온다고 해서. 나 때문에 그런 거라면 사과해야 하니까. 그래서 그냥 집 근처로 가서 기다렸어. 네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돌고, 돌아, 결국에는 제자리로 돌아온다.

강석원이 그때 그거, 하고 어렵게 말을 꺼낸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지현은 시트를 작게 움켜쥐었다.

“그냥 서로 사고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내 생각까지 단정 짓지 마.”

강석원의 단단한 음성이 제 마음을 바로 세운다. 감았다 뜬 눈에 열기가 어린다. 어떻게 하면 좋지. 시간이 더해질수록, 그가 좋아질 뿐이다. 

문득 우울해졌다.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는데 강석원이 왜, 하고 묻는다. 그는 짐승보다 예민하게 조지현을 향해 모든 감각을 세운 채였다.

“……,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운명 같은 거, 믿으십니까.”

그날, 정신을 잃고 눈을 뜬 날부터 모든 게 새로 시작되었다. 새하얀 도화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걸 다시 쓸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지현은 결국 이전의 일들을 고스란히 밟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엔 운명을 벗어날 수 없을까.

“응.”

짧고 단순한 대답이 돌아왔다. 강석원다웠다. 조지현은 몸을 반대로 돌렸다.

“어떻게 그걸 확신하실…….”

강석원이 머리에 팔을 괴고 누워 자신을 바라본다. 언제부터 그런 눈을 하고 있었을까.

“믿어. 운명.”

그가 담담히 제 마음을 드러낸다. 그는 늘 단도직입적으로 본론만을 내놓았다. 그걸 겉치레로 번드르르하게 꾸며내거나, 에둘러 말하지도 않는다.

“너는.”

강석원이 되물었다. 조지현은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꾸했다. 강석원의 시선이 조지현의 표정을 쫓는다. 미묘한 거리낌을 읽고 강석원이 말을 잇는다.

“운명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

“분명, 괜찮을 거야.”

그의 느슨한 목소리에 조지현은 긴장의 끈이 툭 풀리고 만다. 열이 살짝 다시 오르는 기분이었다. 조지현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손등으로 제 뺨을 쓸어내리자 강석원이 손을 뻗는다. 큼직한 손이 이마를 짚어 보고는 떨어진다. 

“자. 다시 열나면 안 되니까.”

남자의 목소리에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눈을 떴다. 옆에 누운 강석원이 잘 잤어, 하고 묻는다. 온전한 회복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근육이 쑤셨다. 그런데도 그의 아침 인사를 듣는 순간,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강석원이 이마를 짚어 열을 재고는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웅크리고 있던 커다란 짐승이 기지개를 켜듯 그의 체고가 조금씩 올라갔다.

“뭐 먹을 수 있겠어?”

조지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석원이 그래, 하고는 부엌 싱크대 앞에 가서 선다. 그가 능숙하게 쌀을 씻고 주전자를 올린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에 가슴께가 간지러웠다. 강석원이 쌀죽을 끓여왔다. 조지현은 몸을 반쯤 일으켜 벽에 기대어 앉았다. 작은 상에 죽 그릇과 숟가락 하나를 얹어온 그는 조지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강석원은 숟가락에 적당한 분량의 죽을 담아 후우, 하고 작게 불어 내밀었다. 조지현은 조금 당황한 눈으로 숟가락과 강석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가 먹겠습니다.”

“손 다쳤잖아.”

두 손 모두 여자가 휘두른 칼에 베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붕대가 감긴 채라 움직이는 게 조금 힘들었다.

“할 수 있습니다.”

강석원은 대답 대신 숟가락을 조지현의 입술에 댔다. 온종일이라도 이러고 있을 수 있겠다는 태세였다. 조지현은 하는 수 없이 입을 벌려 그가 내어주는 죽을 받아먹었다. 오랜만에 들어가는 곡기가 다디달게 느껴졌다.

“먹을 만해?”

강석원이 묻는다. 조지현은 맛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린다. 조지현은 결국 그가 주는 대로 죽 한 그릇을 모두 비워냈다. 강석원이 자신을 어린애처럼 대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새벽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강석원이 이유를 묻듯이 눈썹을 휘어 올린다.

“폐 끼치는 거 같아서 죄송합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도와줄게.

강석원은 그렇게 말하며 단서를 붙였다. 

다시는 나 안 만나줘도 좋으니까. 제발.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수발을 들고 있는지 떠올리자 가슴이 욱신거렸다. 마치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강석원은 신경 쓰지 마, 하고 덧붙인다.

그가 상을 무르고 큰 컵을 가져왔다. 따끈한 김에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보리차였다.

“마셔.”

“감사합니다.”

조지현은 조금씩 보리차를 나눠 마셨다. 강석원은 옆에서 그 모습을 내도록 지켜보았다. 물까지 모두 마시고 나자 배가 불렀다.

“바로 누우면 소화 안 되니까.”

강석원이 쿠션을 가져와 조지현의 등에 받쳐주며 말한다.

“운동 안 가셔도 됩니까.”

“가끔 쉬어야지.”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은 서툴다.

“다음 주부터 방학이라 다행이다.”

강석원의 말에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조지현을 데려와 씻기고 피를 닦아주고 상처를 소독해서 붕대를 감아준 강석원은, 누구의 짓인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집에서 입는 옷차림 그대로 맨발로 도망치듯 나왔다. 폭력의 주범이 누구인지 바보가 아닌 이상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조지현을 바로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미성년자의 모든 행동에는 부모라는 제약이 뒤따랐다. 

“방학동안 여기서 지내. 난 체육관에서 지낼게.”

강석원의 말에 조지현이 눈을 크게 뜬다.

“제가 나갈게요.”

“아니. 그러지 마.”

강석원이 단호하게 조지현의 말을 잘라낸다.

“내가 하자는 대로 하기로 했잖아.”

“…….”

조지현이 대답하지 않자 강석원이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마주보게 한다.

“걱정하지 마. 낮에는 여기 있다가 밤에만 체육관으로 건너갈 거니까. 부담 갖지 않아도 돼.”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분에 넘치는 애정을 받는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밤에 제가 편의점에 가서 자면 됩니다.”

조지현이 고개를 들고 강석원을 보며 말을 잇는다.

“저번에도 그렇게 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저번에는 점장이 마침 지방 교육을 갔던 터라 가능했던 일이다. 아니, 며칠 동안 말 한마디 없이 무단으로 결근을 한 알바생을 다시 써준다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조지현은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에 담지 않았다.

강석원이 한숨을 내쉰다.

“원래 고집이 그렇게 세?”

“…….”

“다른 거라면 다 받아주겠는데, 이건 고집부릴 일이 아니잖아. 내가 하자는 대로 해.”

다른 거라면 다 받아주겠다는 강석원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그가 얼마나 관대하게 자신을 대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진솔하게 와 닿는다.

“쉬고 있어.”

강석원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한 순간, 조지현은 저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불안이 빚어낸 어린 태도에 조지현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당장은 나도 체육관에서 못 지내. 너 나을 때까지.”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것들 좀 사올 거야.”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려던 강석원은 조지현의 이마에 손을 댄다. 열을 재어본 후에 그는 중얼거린다.

“갔다 올게.”

이마에서 멀어지는 온기가 못내 아쉬웠지만 조지현은 애써 티내지 않는다. 현관문이 닫혔다. 그가 나간 자리가 벌써 쓸쓸하다.

조지현은 벽에 몸을 기댄 채, 앞으로의 일들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강석원은 매일 재료를 조금씩 달리해서 죽을 쑤었다. 조지현의 몸 상태가 더 나아지자 그는 밥을 해주었다. 모두 소화가 잘 되고 담백한 음식들이었다. 이제는 숟가락을 들 수 있을 만큼 상처를 회복했는데도 강석원은 제 손으로 조지현에게 밥을 떠먹였다. 그가 숟가락에 반찬을 얹어 건넬 때마다 조지현은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왜.”

강석원이 조지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진 것을 보고 묻는다.

“저 어린애 아닙니다.”

“알아.”

그가 숟가락으로 밥을 뜨며 대꾸한다. 조지현은 포기한 듯이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버릇 나빠집니다.”

강석원이 입술을 당겨 웃는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잔뜩 나빠지면 좋겠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조지현은 목덜미까지 달아올랐다. 본전도 찾지 못할 말이었다.

밥상을 물리고 나자 강석원은 창고에서 꺼낸 라디오를 연결시켜주었다. 먼지를 털어낸 라디오에서는 지직거리는 백색소음이 간간이 들렸지만 들려오는 음악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녁에는 샤워를 했다. 그것만은 죽어도 자신이 하겠다고 조지현이 우기는 바람에 강석원은 머리를 감겨주는 선에서 물러서야 했다. 강석원은 이 모든 일이 제 의무인 듯, 열렬하게 조지현을 간호했다. 털털거리는 선풍기 앞에서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며 조지현은 책을 읽었다. 강석원이 도서관에서 빌려다준 책들이 책장 옆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공부가 목적이 아닌 독서는 매우 오래간만이었다. 잊었던 즐거움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재미있어?”

강석원이 묻는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말이 없는 편이었다. 그와 지내는 시간은 놀라울 만큼 평화롭고 상냥했다. 강석원은 조금의 욕심도 부리지 않고 조지현을 배려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조지현이 움직이는 대로 따르는 그의 시선은 무심코 그 열기를 드러내고 만다.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걸 모른 척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나가시게요?”

강석원이 운동복을 챙겨들자 조지현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응. 아침에 올게.”

조지현의 거동이 가능해지자 강석원은 그날부터 체육관에서 밤을 보냈다. 그러지 말라고 붙들고 싶었지만 강석원이 밖으로 나가는 이유를 알기에 조지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강석원은 핸드폰을 구해 조지현에게 건넸다. 그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는 강석원뿐이었다. 덕분에 일방적인 통신기계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상관없었다. 그를 제외한 누구하고도 대화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녀오세요.”

조지현은 현관으로 그를 배웅했다. 신발을 신은 강석원이 몸을 돌렸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안다. 조지현은 천천히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큼직한 손이 이마를 짚는다. 열은 떨어진 지 오래다. 하지만 강석원은 늘 이렇게 조지현의 열을 직접 확인했다. 이때가 유일하게 두 사람의 몸이 닿는 순간이었다. 

“됐어.”

그가 느슨하게 웃는다. 강석원이 손을 거둔다. 조지현은 강석원이 손을 떨어트리는 방향대로 시선을 내린다.

“낯선 사람 오면 문 열어주지 말고.”

조지현은 애매하게 웃었다. 일곱 살 어린애한테도 하지 않을 말들을 가끔 남자는 건네곤 했다.

“저 정말 어린애 아닌데요.”

“알아.”

그러면 큰일이게. 열없는 말이 덧붙는다. 조지현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강석원이 간다, 하고는 문을 닫는다.

그가 나가고 난 뒤의 집은 싸늘한 고요가 감돌았다. 조지현은 자리로 돌아와 책을 폈다. 몇 장을 넘기지 못하고 덮었다. 이상하게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노래도 색을 잃은 듯이 귀에 거슬린다. 

이불을 깔고 불을 끈 다음, 자리에 누웠다. 이불에서 희미하게 남자의 냄새가 났다. 조지현은 시트를 끌어안은 채 몸을 뒤척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강석원이 준 핸드폰을 가져와 머리맡에 놓고 다시 누웠다. 그러고 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어머니가 이곳에 찾아올 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혼자 있을 때는 죽음처럼 밀려드는 공포를 어쩌지 못했다. 공황장애는 말 그대로 장애였다. 다리가 불편한 사람의 어긋난 걸음걸이 같이 제 의지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정신의 불균형이다.

조지현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팔을 얹었다. 

아버지에게는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당분간은 친구네 집에 있겠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그 친구가 누구인지, 언제 돌아올 것인지 묻지 않았다. 두 번째 겪는 일이라 이제는 대수롭지 않았다. 아버지는 결정적인 순간에 어머니의 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마지막 편지 같은 실수는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애초에 미국으로 가지 않으면 된다. ……그럴 수 있는 걸까.

조지현은 옆으로 몸을 돌렸다.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이 든다. 이곳으로 돌아온 의미가 처음에 자신이 믿은 방향과 전혀 다를 수도 있다는. 그냥 같은 일을 한 번 더 겪으며 네 손으로 어쩌지 못하는 운명을 지켜보라는, 신이 내린 벌인지도 모른다.

그냥 다 말해버릴까. 강석원이라면 믿어줄 수 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그가 믿을 수 있을까.

조지현은 기억을 잃기 전에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던 커다란 달과 하늘을 긋던 수많은 별들. 갑자기 시야가 일렁이고 몸이 무거워졌다. 거스를 수 없는 중력이 몸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간신히 눈을 떴을 때 조지현은 이질감을 느꼈다. 뺨에 닿는 바닥이 차고 단단하다. 분명 베개를 베고 누워 있었는데, 어째서……. 눈을 깜빡인다. 어둠이다. 하지만 자신이 알던 그 어둠이 아니다. 커튼을 통해 들어온 가로등 빛이 물건과 배경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어주던, 따스한 어둠이 아니었다. 차갑고 무기질적인, 아무것도 없는 어둠. 구웅, 구웅, 하는 기계음에 컨베이어벨트가 올라오는 소리가 뒤따른다.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어디인지 깨닫는 순간,

“……!”

조지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났다. 눈앞이 까마득하다. 식은땀이 흐르고 숨이 막힌다. 꾸덕한 진창에 처박힌 기분이다. 손으로 어둠을 더듬어 옆을 확인했다. 천 재질의 부드러운 시트가 손에 잡힌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들이 현실인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그 어느 것도 알지 못한다. 불을 켜려고 했지만 전등의 위치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조지현은 벽을 더듬어 일어서려다 발끝에 닿는 단단한 물건을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핸드폰이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실제로는 단 한 번도 그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강석원에게 기대는 마음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던 참이라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한번 전화를 걸면 멈추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지. 두려움에 머리가 굳어버린다. 자칫 한 발이라도 잘못 내디뎠다가는 도로 그 어둠으로 끌려가버릴 것 같은 불안이 목을 조른다. 단순한 환영이 아니다. 소름끼칠 듯이 뚜렷하고 구체적인 감각은 병든 정신이 꾸며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떴을 때, 그날의 마지막 기억이 고스란히 이어졌다. 구웅, 구웅, 울리던 소리. 차가운 바닥.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던 창백한 달이……. 싫어, 돌아가고 싶지 않아. 안 돼. 강석원을 두고 이대로 사라지고 싶지 않아. 이제 갓 사랑에 빠진 소년의 눈빛이 떠오른다. 강석원이 보고 싶다. 다시 그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칠 듯이 두려워진다. 조지현은 핸드폰을 움켜쥐고 몸을 웅크렸다.

“너 왜 요즘 이 시간마다 체육관으로 오냐.”

체육관 문을 닫을 즈음해서 나타나는 강석원을 보고 관장이 한마디 했다.

“쟤 요즘 여기서 자고 가는 모양이던데요?”

“왜 집 놔두고 여기서 자.”

강석원은 대답하지 않고 손에 밴딩을 시작했다.

“자꾸 저놈이 안 하던 짓을 하네. 야, 너 요즘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그러냐. 설마 연애하는 건 아니지?”

“관장님. 연애는 아무나 합니까. 강석원이 누구랑 두 마디 이상 하는 거 본 적 있으세요? 대화가 가능해야 연애를 하죠.”

강석원은 마저 반대편 손에도 밴딩을 했다. 저를 두고 떠들어대는 이야기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저번에 딴 생각하다가 진 것도 그렇고. 야, 너 약 하는 건 아니지? 그런 거 하면 절대 안 된다.”

관장이 강석원에게 오만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강석원은 네, 하고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샌드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육중하게 울리는 타격음에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선수들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다.

“저건 괴물이야.”

단순한 체격의 문제가 아니었다. 체격이 좋으면 격투기 선수로서는 민첩성과 유연성의 부족이라는 필연적인 단점이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강석원에게는 애초에 그런 단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동일 체급의 선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스피드뿐만 아니라 힘도 압도적일 만큼 타고난 것이다. 게다가 그는 지독한 노력가였다. 아무리 힘든 연습을 주문해도 묵묵히 거기에 따른다. 다른 선수들은 감히 강석원에게 열등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신은 쟤한테 대체 뭔 짓을 한 걸까.”

“다 주고 언어를 삭제했지.”

“감정도 삭제한 거 아니야?”

강석원을 두고 키득거리던 녀석 중 하나가 문득 뭔가를 발견하고 강석원에게 손짓한다.

“강석원. 너 핸드폰 울리는 거 같은데? 가방에.”

그 한마디에 강석원이 글로브를 빼서 바닥에 내던졌다. 그가 핸드폰을 꺼내들고 체육관 밖으로 나갔다.

체육관의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거기에 대한 대답을 누군가 추측하기도 전에 강석원이 안으로 들어와 가방을 집어 들고 뛰어나갔다.

“야! 강석원!”

글러브 한쪽도 미처 벗지 못하고 나가는 강석원을 관장이 다급하게 불렀지만 그는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난 후였다.

“무슨 일 난 거 아니에요? 얼굴이 완전 새파랗게 질려있던데. 쟤 저러는 거 처음 봐요.”

그중 하나가 관장에게 다가와 말했다.

“하, 저놈 진짜.”

관장이 팔짱을 끼며 쓰게 입맛을 다셨다. 몇 년간 강석원을 데리고 운동을 시켜온 그조차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핸드폰에 조지현의 번호가 떴을 때, 반가운 기분보다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먼저였다. 지금까지 조지현은 단 한 번도 전화를 걸지 않았다.

……선배님, 어디 계세요?

금방이라도 숨이 꺼질 듯한 희미한 목소리로 그렇게 묻던 조지현은 이상할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

내가 바로 갈게.

그대로 체육관을 나와 달렸다. 피가 바싹 마르고 머릿속이 하얗게 번진다. 피투성이가 된 채 공중전화 부스에서 떨던 조지현을 발견했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그 어떤 이성적인 판단도 할 수 없었다.

“조지현!”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강석원은 소리쳐 조지현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방에도 욕실에도 조지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미칠 것만 같았다. 현관에 놓인 자신의 신발도 그대로였다. 조지현에게 일부러 신발을 사다주지 않았다. 그가 어디도 가지 않았으면 하는 이기심이었다. 맨발로 쫓겨나온 아이였다. 혹시라도 조지현이 지금 맨발로 길바닥을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짓이겨지는 기분이었다. 강석원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눌렀다. 더럽고 치졸한 제 집착과 이기심에 혐오가 밀려들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야에 어긋난 채 닫힌 옷장 문이 들어온다. 옷장 문을 열어 젖혔다. 조지현이 몸을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떤다. 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다. 손에는 자신이 준 핸드폰이 들린 채다. 그 참혹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강석원은 무표정하게 내려다본다. 무사함을 확인하기 위해 손을 뻗자 조지현이 흠칫 놀라 몸을 젖힌다. 조지현의 눈동자가 텅 비어 있다. 강석원이 입술을 깨물고 공중에 손을 내민 채로 숨을 죽인다. 당장에라도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삼킨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간신히 정신을 차린 조지현이 숨을 토해내듯 입술을 움직였다. 

“선배님…….”

바싹 말라붙은 입술이 달싹인다. 강석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조지현은 안아든다. 조지현이 강석원의 목을 붙든다. 자신을 끌어안는 그 미약한 힘에 강석원은 소름이 돋았다. 뜨거운 숨을 삼키며 강석원은 조지현의 머리카락에 고개를 묻었다. 겁에 질린 작은 동물의 냄새를 한껏 들이켠다. 그제야 숨을 쉴 수 있다. 폐에 산소가 돌고 심장이 뛴다. 파들파들 떠는 몸을 끌어안고, 강석원은 숨을 몰아쉬었다. 조지현을 안아들고 이불에 앉힌다. 그러고는 조지현을 살폈다. 귀밑, 얼굴, 손톱 하나하나, 다친 곳을 세세하게 찾는다. 

“다치지 않았습니다.”

강석원은 그 말을 듣고도 조지현의 몸을 계속 살핀다. 소중하고 소중한 자신의 온전한 구슬(完璧)에 흠이라도 생긴 것은 아닌지, 강박증 환자처럼 몇 번이고 확인한다. 그렇게 한참을 성에 찰 때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강석원은 입을 열었다.

“다행이다.”

그 담담하고 깊은 감정이 순식간에 조지현에게 밀려든다. 강석원의 이마가 온통 땀으로 젖어 있다. 자신의 전화 한 통에 그는, 달려온다. 다행이었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서, 그를 다시 볼 수 있어서, 그와 만날 수 있어서, 모든 게 다행이다. 

“괜찮아.”

고개를 끄덕이는 조지현의 몸이 아직도 벌벌 떨렸다. 강석원은 시트를 가져와 조지현의 몸에 둘러주었다. 무슨 일인지, 왜 그곳에 들어가 있었는지 묻지도 않고 강석원은 조지현을 시트째 끌어안아 준다. 그는 조지현의 등을 도닥였다. 익숙한 손의 움직임에 조지현은 눈물을 삼켰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강석원의 나직한 음성이 정수리에 닿는다. 

“죄송……, 합니다.”

“뭐가.”

“이런 일로 전화 드려서.”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불안이다. 잠시 정신을 잃은 순간, 미래에서 눈을 떴다가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말은 할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한 상태인데 정신병으로밖에 치부되지 않을 것이다.

“잘했어. 앞으로도 이런 일이면, 전화해.”

강석원이 아니, 하고 말을 덧붙인다.

“아무 일 없어도 전화해도 돼.”

그가 조지현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이 물러난다. 조지현은 천천히 불안을 토해냈다. 자신이 속한 현실이 이제야 제 모습을 찾아간다. 

귓가에 그의 심장소리가 들린다. 단조롭고 규칙적인 울림이다. 조지현이 무심코 강석원에게 기댔다. 강석원이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 도닥이기 시작했다. 조지현은 문득 허리 부근에 닿는 단단한 살덩이의 감각에 숨을 삼켰다. 그의 흥분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조지현의 기척을 분명히 눈치 챘을 텐데도 강석원은 여전히 지극히 무감한 표정으로 조지현을 도닥여준다. 그러나 조지현은 한번 의식을 하고 나자 감각이 온통 아래로 쏠렸다.

“저……, 이제 괜찮습니다.”

“그래.”

강석원이 스스럼없이 조지현을 놓아준다.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의 바지 앞자락이 들린 채다.

조지현은 고개를 돌렸다.

“나 샤워 좀 할게.”

강석원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조지현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강석원이 욕실로 들어갔다. 평소보다 긴 시간 동안 샤워를 한 후, 그는 밖으로 나왔다. 

그날 밤 강석원은 체육관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조지현이 누운 이불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그는 제 팔을 베고 누웠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강석원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가물가물 흐트러지던 의식 속에서 잠을 깬 것은, 목덜미에 닿는 감촉 때문이었다. 너무도 조심스럽고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떨어지는 그 느낌에 눈이 뜨이고 말았다.

지현아.

입 밖으로 부르지 않았는데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것만 같다. 강석원의 입술이 다시 목덜미에 닿았다 떨어진다. 조지현이 깰까 봐, 제대로 입술을 대지도 못하고 입맞춤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엉성하고 불안한 행위였다. 문득 남자의 숨결이 뜨거워진다. 조지현은 그제야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탁한 신음을 흘리며 그가 동작을 멈추었다. 짐승 같은 숨소리가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진다. 

조지현은 감은 눈에 힘을 주었다. 제발 강석원이 자신이 깬 것을 알아채지 않길 기도했다. 다행히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서 욕실로 향했다. 물소리가 들렸다. 조지현은 자신의 아래를 살폈다. 얇은 옷 사이로 드러난 제 살덩이가 어느새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당혹감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다행히 강석원이 돌아왔을 때, 열기가 가신 후였다.

강석원이 떨어진 곳에 눕는다. 등에 닿는 남자의 시선이 선명했다. 숨소리가 어색하지는 않을까, 몸에 힘이 들어간 건 아닐까, 걱정을 하는 사이 강석원이 돌아눕는 기척이 들렸다. 조지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하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벽을 바라보다가 새벽녘에야 간신히 눈을 감았다.

다음 날, 강석원은 일찍 일어나 아침 운동을 다녀와 밥을 차렸다.

“제가 먹겠습니다.”

조지현은 그가 상을 내려놓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강석원은 잠시 생각하다가 숟가락을 내어주었다. 알고 있었구나.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병간호를 할 때도 자신이 조금이라도 뒤척이면 강석원은 바로 반응을 보였다. 그의 모든 감각은 야생짐승처럼 예민하게 날 서 있었다.

조지현은 숟가락을 받아들었다. 아무런 대화 없이 식사했다. 원래 거의 말을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밥을 씹으면서 무슨 맛인지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 죄송합니다.”

아직 손에 붕대를 감고 있어 젓가락질은 무리였던 터라 자꾸 반찬을 흘리고 말았다. 다시 집으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긴장이 되어 몇 번이나 헛손질을 했다.

“내가 해줄게.”

강석원이 상에 흘린 반찬을 덜어내고 새 반찬을 집어 조지현의 밥에 올려주었다.

“……감사합니다.”

“먹고 싶은 반찬 말해. 올려줄 테니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조지현은 숟가락을 올리며 말했다. 그러나 대답하기가 무섭게 밥에 얹어둔 반찬이 다시 뚝, 떨어지고 말았다. 조지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강석원은 조지현의 손에 들린 숟가락을 도로 가져갔다.

그가 숟가락을 조지현의 입가에 갖다 댔다. 몇 번이나 그가 밥을 먹여줬었는데도 이상하게 어색하게 느껴져 조지현은 입을 제대로 벌리지 못했다. 간신히 한 입을 받아먹었다. 여전히 입속에서 굴러다니는 게 밥알인지, 모래알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미안해.”

놀란 조지현이 작게 기침하며 네? 하고 되물었다.

“너 불편하게 한 거 같아서.”

역시 그가 자신이 깨어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조지현은 작은 목소리로 아닙니다, 하고 대답했다.

“기분 나빴을 텐데. 미안해.”

“기분 안 나빴습니다. 저도…….”

거기까지 말을 하고 조지현은 뒷말을 삼켰다. 공기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강석원은 그 뒷말을 기다리는 듯이 조지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라디오 들어도 되나요.”

조지현이 물었다. 강석원은 대답 대신 라디오의 전원을 눌러주었다. 이름 모를 노래가 흘러나왔다. 창밖에서는 빗소리가 들렸다.

“비 오나 봐요.”

“그러게.”

강석원은 평연한 투로 대답했다. 상 아래로 그의 손이 보인다. 허벅지를 가볍게 두드리고 있다. 그의 긴장이 몸에 열감을 더했다.

“저, 내일 집으로 돌아가려고요.”

강석원이 눈을 부릅뜬다.

“그동안 신세 많았습니다.”

이 좁은 자취방에서 보냈던 여름은 일생 중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하루의 매분 매초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여섯 번의 계절이 지나면 약속받았던 삶으로 가기 위한 하루하루가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그러기에 돌아가야 한다. 

어제 기억을 잠시 잃었을 때, 눈을 뜬 그 찰나가 환영이나 꿈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이미 한 번 겪어봤기에 그 끔찍한 순간의 느낌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터다. 

“나 때문이야?”

강석원이 묻는다. 조지현이 아니요,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계속 신세질 수는 없잖아요.”

“그런 이유라면 나가지 마. 그럴 필요 없어.”

조지현은 강석원을 바라본다. 그를 잃고 싶지 않다. 그와의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집으로는 더더욱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강석원을 위해서라면 뭐든 해줄 수 있다.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예요.”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아직, 상처도 다 안 나았어.”

“깊지 않아서 금방 아물 겁니다.”

“조지현.”

그의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조지현은 웃어 보였다.

“잠자리도 익숙지 않아서 불편하고요.”

강석원은 묵묵히 조지현을 응시했다.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거짓 변명을 끝까지 다 들어주겠다는 듯이.

강석원의 시선이 자신을 발가벗긴다. 그럴듯하게 갖춰 입은 옷을 모두 벗겨내어 가진 것 없는 어린애로 만든다. 무력케 한다. 나약하고 어린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도록.

조지현은 눈을 아래로 내리감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스스로에게 던지는 말이다. 나약함을 핑계로 언제까지 강석원의 마음을 이용할 수 없다. 강석원이 턱을 단단하게 당긴다. 한참 지난 뒤에 그가 그래, 하고 한마디를 내뱉는다.

노래와 광고가 끝나고 라디오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학대해 사망에 이르게 한 비정한 어머니에 대한 소식을 아나운서는 명확한 발음으로 전했다.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비통한 마음을 금치 못한다고 아나운서는 말했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 처음부터 알려줬다면 조금은 편했을 텐데.

조지현은 쓰게 웃었다. 강석원이 라디오를 껐다.

“밥 먹자.”

그는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반찬을 얹는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반찬이었다. 한 번도 말한 적 없는데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는 알고 있다. 십 몇 년을 같이 산 어머니도 모르는 것들을.

그가 주는 밥을 천천히 삼켰다.

소화제를 삼키고 자리에 누웠다. 내일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우울했지만 다행히 토하거나 하는 일 없이, 잠들 수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강석원이 지현아, 하고 작게 부르며 흔드는 기척이 들렸다. 조지현은 잠기운에 가까스로 눈을 떴다.

“잠깐 일어날래?”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강석원이 겉옷을 챙겨 건넸다. 신발장에서 꺼내준 강석원의 슬리퍼는 지나치게 컸다. 걷는 게 힘겨웠지만 조지현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밖으로 나갈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는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어디 가는 건가요?”

“옥상.”

이유를 묻기 전에 강석원은 옥상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순간, 조지현은 그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를 깨달았다. 

안개가 주변을 감쌌다. 여단을 머금은 안개는 푸르스름한 빛이 돌았다. 조지현은 눈을 깜빡여 새벽이 빚은 장관을 내려다보았다.

“바다 같지.”

조지현의 옆에 선 강석원이 말한다.

그 순간, 자신이 딛고 선 땅은 섬이 되고 주변은 바다에 잠긴다.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는 음성에 쑥스러워 하는 기색이 스친다. 조지현은 감히 그 장관에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수분을 머금은 바람이 뺨을 스친다. 물 냄새가 났다. 그날의 바다가 떠오른다. 부유물이 섞인 탁한 파도가 쉼 없이 모래를 부쉈다.

그리고 깨닫는다.

어쩔 수 없이, 이 사람을 이곳에서도 계속 사랑할 수밖에 없겠구나. 아무리 감추려 해도 이 마음은 숨길 수가 없겠구나. 

……그래서 결국은 끝이 나고 말겠구나.

조지현은 고개를 떨구었다.

“왜 그래. 몸이 안 좋아?”

강석원이 당황한 듯 말한다. 조지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내일 돌아가지 않아도 돼.”

“……갈 겁니다.”

맺힐 새도 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울지 마.”

강석원이 말을 잇는다.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가 초조한 듯, 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만약.”

조지현은 천천히 입을 뗐다.

“과거로 돌아가 과오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조지현의 물음에 강석원은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더 일찍 만나고 싶어.”

너를.

생략된 단어를 쉽게 알아차린다. 일찍 만나지 못한 것조차 남자는 제 과오로 삼는다. 

“어차피 결과는 같아도요?”

조지현이 고개를 들었다.

“응.”

“그게 의미가 있습니까.”

“있어. 나한테는.”

강석원이 조지현의 옷자락을 여며준다. 그 사소한 몸짓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루라도 더 볼 수 있다면, 그걸로 됐어.”

그걸로 됐어.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강석원은 빈틈없이 조지현을 살핀다. 바람이 불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강석원이 가지런히 정돈해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엉망이 될 머리였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지금의 이 순간이길. 조지현은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내려갈까.”

대기의 습도 때문에 두 사람의 어깨가 어느새 흠뻑 젖었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바람이 밀어낸 구름 사이로 달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다운 손톱을 톡 잘라내어 떼어 붙인 듯, 가느다란 빛의 흐름에 조지현은 일순 넋을 놓았다. 그림자를 드리운 긴 속눈썹이 움직이는 모양을 바라보던 강석원은 작게 한숨을 삼킨다.

“왜 그러십니까.”

조지현이 의아하다는 듯이 눈을 살짝 치떴다. 강석원의 시선이 달로 옮겨간다. 

“달이,”

참 예뻐서. 

무뚝뚝하게 덧붙는 뒷말이 파편처럼 가슴에 꽂힌다. 

사랑한다는 말을 당시의 말로 번역할 수 없어 달이 참 아름답다는 말로 대신했다는, 나츠메 소세키의 일화가 떠오른다. 그렇게만 말해도 상대에게는 충분히 전할 수 있는 마음이었다. 

달이 참 예뻐서.

남자의 진심이 그 한마디에 고스란히 실린다.

“조심히 내려와.”

계단을 앞서 내려가던 강석원이 말한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 신발 때문에 한 계단씩 천천히 내려와야 했다.

“내일 신발 사다줄게.”

괜찮다고 말을 하려는 순간, 신발이 벗겨져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고개를 드니 강석원의 품안이었다.

“괜찮아?”

조지현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석원이 끌어안은 팔에 힘을 푼다. 불시에 닿은 강석원의 온기에 조지현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떻게 계단을 내려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현관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조지현은 제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자고 있어.”

강석원은 신발을 벗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어디 가시게요?”

“한 바퀴 돌고 올게.”

조깅을 하기에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었다. 강석원이 밖으로 나가려는 이유를 안다. 억누르지 못하는 감정을 조금이라도 식히기 위함이다.

“해도 안 떴습니다.”

“괜찮아.”

조지현은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강석원이 곤혹스러운 듯이 설핏 인상을 찌푸린다.

“계속 여기 있다간 곤란해질 것 같아서 그래.” 

그가 제 턱을 쓸어내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을 떼어놓고 현관문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강석원이 고개를 돌린다.

“곤란해져도, ……아니, 곤란하지 않습니다. 전혀.”

조지현의 말에 강석원의 표정이 멎는다. 현관문이 닫힌다. 그가 지현아, 하고 나직이 조지현을 부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혹시라도 자신이 오해하지는 않을까, 남자는 상대의 뜻이 명확하게 밝혀지길 기다린다.

“같이 있고 싶습니다.”

하루라도 더 볼 수 있다면.

“그러니까…….”

뒷말까지 기다리기에 남자의 인내심은 그리 길지 못했다. 강석원은 조지현을 끌어안은 채로 벽에 몸을 기댔다. 어디에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몰아세운 후, 거칠게 입을 맞춘다. 다급하게 입술을 빨고 신발을 벗고 옷을 벗는다.

“지현아.”

헐떡이는 숨 사이로 강석원이 자신을 부른다. 조지현은 눈을 들어 그의 부름에 응답했다.

“그만할 거면, 지금 얘기해.”

나 못 멈출 것 같으니까.

당장에라도 폭발할 기세로 남자가 말을 잇는다. 조지현은 대답 대신 그의 목을 끌어안아 입을 맞추었다.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발치로 두 사람의 옷가지가 벗겨졌다. 강석원은 조지현의 엉덩이를 움켜쥐어 제 허벅지에 앉혔다. 잔뜩 부풀어 오른 성기가 닿았다. 아, 하고 터지는 탄성에 강석원은 짐승처럼 흥분했다. 단단하고 굵은 허벅지가 조지현의 다리 사이를 문질렀다. 머리가 타들어갈 듯한 흥분에 조지현은 더럭 겁이 나 강석원의 팔을 붙들었다. 강석원이 고개를 숙여 다시 입술을 겹쳤다. 열이 오른 입속을 혀가 샅샅이 범했다. 입술을 빨고 핥았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순서도 절차도 없이 본능이 시키는 대로 행했다. 미처 끌어내리지 못한 조지현의 속옷이 젖어들었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속옷째 조지현의 성기를 쥐었다. 조지현이 아, 하고 허리를 뒤로 젖혔지만 등에 닿는 벽은 물러설 곳을 허락지 않았다. 얇은 속옷 사이로 남자의 견고한 손마디가 느껴졌다. 응, 응, 하는 신음을 삼키기라도 하듯 강석원은 몇 번이고 각도를 바꾸어 조지현의 입술을 빨았다. 키스를 하는 동안 조지현은 결국 강석원의 손에 파정했다. 속옷 아래로 정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절정의 증거에 남자는 발정하듯 흥분했다. 그가 조지현을 번쩍 안아들어 이불에 눕혔다. 조지현이 밭은 숨을 내뱉으며 강석원을 올려다본다. 고고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정욕에 흠뻑 젖어 있다. 

강석원이 허리를 굽혀 조지현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황홀함이 그의 눈에 깃든다. 그의 깊은 감정이 물처럼 밀려든다. 숨이 막혔다. 조지현은 강석원을 끌어당겨 다시 입술을 포갰다. 강석원의 성기가 허벅지에 닿는다. 체격차이 때문에 강석원이 움직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힘들었다. 그래도 좋았다. 강석원이 모든 것을 온전히 제게 기대길 바랐다. 조지현은 그의 성기에 제 몸을 문질렀다. 모든 걸 해주고 싶었다. 그 작은 몸짓에 강석원은 이성을 놓고 그대로 조지현의 허벅지를 잡아 벌린다. 두 개의 성기가 포개진 채로 강석원은 무게를 더해 문질렀다. 아래가 저릿저릿했다.

“조지현…….”

그의 부름에 응답이라도 하듯 조지현은 그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더했다. 강석원의 호흡이 흐트러진다. 열기가 목덜미에 닿았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그러쥔 성기가 질척이는 마찰음을 냈다. 몸에 열이 오른다. 조지현은 강석원의 어깨를 붙들었다. 강석원은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굵직한 성기에 제 성기가 범해지는 기분이었다. 가느다란 몸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강석원이 허리를 치받으며 손을 움직였다. 커다란 체구에 짓눌려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힘들었지만 조지현은 필사적으로 강석원을 끌어안았다. 강석원의 뺨에, 어깨에, 이마에, 닿는 대로 입을 맞추었다. 그 부름에 화답이라도 하듯 강석원이 조지현을 부서지게 안았다. 

이윽고.

“――, ――.”

충만할 정도로 가득 부어진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정액이 한 데 섞인다. 

조지현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강석원이 몸을 일으키며 조지현을 살핀다. 조지현은 축 늘어진 몸으로 힘없이 웃었다. 괜찮다는 말을 해주려 하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있지 않다. 몸 상태도 완전히 회복한 것도 아니었지만 애초에 체격차가 너무 컸다. 강석원의 무게를 버텨내는 게 고작이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거기에 입 맞춘다. 지현아, 하고 부르는 음색에 언뜻 열기가 묻어난다. 벌써 형태를 되찾은 살덩이가 허벅지 부근에 닿았다. 조지현은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잘게 경련하는 다리를 천천히 벌렸다. 강석원이 그걸 보고 이를 사리문다.

“가만히 있어.”

그렇게 말하는 음성조차 욕구를 억누르느라 잔뜩 쉬어있다. 강석원이 허리를 굽혀 조지현의 목덜미에 코를 댔다. 한껏 숨을 들이켜며 그는 잔뜩 성이난 제 성기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이름을 불렀다. 지현아, 지현아. 마치 꿈꾸는 듯한 그 부름에 조지현은 가슴이 꽉 메어온다.

“지현아.”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전보다 몇 배는 더 애틋하게 들려온다. 그 이유를 강석원의 눈을 보는 순간 깨닫는다. 현재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모든 감정은 진행형이기에 훨씬 더 깊다. 

강석원은 가느다란 조지현의 목덜미에 코를 대고 살내음을 흠뻑 들이켜며 용두질했다. 강석원의 몸에서 땀이 흘렀다. 그가 아랫도리를 한 번 훑어 내릴 때마다 조지현의 위로 땀이 한두 방울씩 떨어졌다. 압도적인 수컷의 냄새에 조지현은 발끝이 오싹오싹 떨렸다. 시선으로, 남자는 조지현을 범했다. 조지현은 바닥에 늘어진 채, 남자의 숨소리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뱃속까지 가득 들어차는 느낌이다. 드나든 적도 없는 굵직한 성기가 침범하는 기분이다. 아래가 빠듯하게 저려오는 착각을 느꼈다.

조지현이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

남자의 정액이 뿌려진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 짜내려는 듯이 성기를 훑는다. 제 정액으로 얼룩진 하얀 나신을 강석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내려다본다. 그러고는 허리를 굽혀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게 입술을 빨며 남자는 다시 손을 제 사타구니로 가져갔다. 눈 앞의 존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는 입술과 혀로 조지현을 맛보고 코로 냄새를 확인하고 손으로 형체를 더듬었다. 조지현의 존재에 남자는 한껏 흥분했다. 

강석원은 늘어진 조지현의 몸에 몇 번이고 사정했다.

뜨끈하게 적신 수건으로 남자는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꼼꼼하게 몸을 닦아주었다. 잠을 깰까 조심조심, 그 커다란 손을 움직이는 모습이 좋아서 조지현은 눈을 감은 채로 가만히 몸을 맡겼다. 그러다 문득 잠이 든다. 잠에서 깨면 강석원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면 그는 어김없이 입을 맞추었다. 포개지는 입술은 금세 열락에 닿았다. 몸이 달아오르면 남자는 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몇 번이고 절정에 다다랐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옷을 입을 새도 없었다. 거의 벌거벗은 채로 이불 위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먹고 자고 사랑했다. 짐승의 삶이었다. 이성도 논리도, 그 무엇도 필요 없는.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나서 조지현은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넸다. 왔니. 마치 몇 시간 공부를 하고 돌아온 아들을 대하는 말투였다. 새삼 놀랍지 않았다. 조지현은 어머니에게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학원은 자신의 공부 방법과 맞지 않는다고, 돈을 낭비하는 것 같아서 가지 않았고 그래서 한 푼도 손대지 않고 모아둔 것이라고, 그래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학원의 도움 없이도 성적이 올랐다고 하면 더 나은 거 아닌가요. 그렇게 덧붙인 말에 어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제 체면을 세워줄 포인트를 놓치지 않고 잡은 것이다. 맞아, 학원도 안 다니고 전국 퍼센트가 그렇게 나온다고 하면 다들 안 믿겠지. 하지만 그게 사실이잖아. 우리 아들은 정말 대단하구나. 그녀가 하는 말들은 모두 진심이었다. 본인의 만족을 채워주는 그 순간 만큼은 그녀는 전적으로 사랑을 표출했다. 앞으로도 혼자 공부할 거니까 학원비는 필요 없어요. 조지현의 말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래, 어쩔 수 없지, 하고 웃었다.

편의점을 찾아갔다. 화를 내는 점장 앞에서 조지현은 고개를 숙였다. 사고가 생겨 그동안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원하시면 빠진 기간만큼 알바비를 받지 않고 일하겠다고, 진심을 다해 사과했다. 처음엔 펄펄 날뛰던 점장도 거듭 되는 조지현의 사과에 결국 입맛을 쩝 다시면서 그럼 언제부터 나올 수 있는데, 하고 물었다. 결국 다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원자가 없어 빠진 시간을 모두 점장이 메꾸고 있는 참이었다고 했다. 알바비도 그냥 일한 만큼 주겠다고 하면서 점장은 방학 동안은 시간을 늘려줄 수 없을까, 하고 부탁했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된 일이다. 조금이라도 돈을 더 모아둬야 했다.

오전에는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오후 4시부터 10시까지 일을 했다. 강석원은 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조지현이 끝날 시간에 맞춰 기다렸다.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둘 다 말이 없는 편이었기에 말을 하는 시간보다 침묵이 이어지는 시간이 월등히 길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와 함께하는 일 분 일 초가 소중했다. 그거면 족하다. 언젠가 끝이 난다 해도, 강석원의 인생에서 자신이 물러나는 일이 생겨도, 지금은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석원의 인생을 망치는 선택만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말없이 그를 떠나는 일만큼은, 없을 것이다.

“오늘은 어땠어.”

언덕길을 내려가며 강석원이 묻는다. 그는 항상 하루의 일과를 확인했다. 보잘 것 없이 평범한 날들을 그는 늘 궁금해 했다.

“비슷해요.”

조지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편지 받았어요, 하고 덧붙였다. 강석원이 입을 굳게 다문다. 이전에도 비슷한 일을 목전에서 경험한 터다.

“거절했습니다. 사귀는 사람 있다고.”

강석원이 그래, 하고 대답한다. 어딘지 조금 언짢은 듯한 기색에 조지현은 웃음을 삼켰다.

“이번에는 정말 있으니까요.”

강석원이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선다. 조지현이 고개를 들었다. 인적이 드문 골목 안으로 손목을 잡아끈다. 그대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놀라서 잠시 굳었지만 조지현은 이내 강석원에게 맞추어 입술을 벌렸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입술이 멀어졌다가도 다시 포개지고를 반복했다. 숨이 모자라 눈앞이 아득해질 무렵에야 강석원은 조지현의 목을 끌어안은 손을 푼다. 강석원의 시선이 조지현을 향한다. 끌어안고도 한없이 부족한 갈급이 느껴진다.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애가 닳는다.

“내일…….”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닿는 거리였다. 강석원이 응, 하고 대꾸했다.

“내일, 주말이니까, …….”

주말에는 거의 강석원의 자취방에서 머물렀다.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시간을 함께 보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강석원은 조지현에게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이는 걸 좋아했다. 조지현 역시 그가 해주는 음식이 좋았다. 대단하지는 않지만 자신에게는 특별했다. 처음 그의 집으로 간 날, 끓여줬던 보리차처럼.

“오므라이스, 만드실 수 있어요?”

강석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해줄게.”

그가 조지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골목을 벗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저도 요리 배울 걸 그랬어요.”

“왜.”

“항상 얻어먹기만 해서 죄송해요.”

밥을 먹고 난 후에도 강석원은 조지현에게 설거지조차 시키지 않았다. 조지현이 하겠다고 나서도 손에 물 한 방울 묻지 않게 했다.

“더 얻어먹어도 돼.”

“버릇 나빠져요, 진짜.”

강석원이 기분 좋은 듯이 입술을 당겨 웃는다.

“그러려면 아직 멀었어.”

그 한마디에 가슴이 시리다.

두 사람이 함께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에 자신은 한국을 떠났다. 일의 순서와 시간이 뒤죽박죽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비슷한 흐름대로 흘렀다.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다.

“왜.”

조지현의 표정이 문득 어두워진 것을 눈치채고 강석원이 물었다. 

“아까워서요.”

한숨처럼 중얼거린 말에 강석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강석원이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트려 놓는다. 조지현은 열없이 웃었다. 맥락 없이 던진 말이라 여겨주길 바랐다.

정류장에 도착해 같은 버스를 탔다. 강석원이 먼저 내려야 하지만 그는 늘 조지현이 내리는 곳까지 같이 가서 도로 버스를 타고 돌아갔다. 집 앞까지는 가지 않았다. 집 앞까지는 안 바래다주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했을 때 어쩌면 강석원은 상처 입었을지도 모른다. 일부러 최대한 냉정한 목소리를 냈으니까. 강석원은 이유도 묻지 않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자리에 앉은 조지현은 창을 조금 열었다. 밤의 버스는 특유의 정취가 있었다. 창을 스치는 불빛과 밤바람이, 기분을 흥성거리게 했다.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탈 때면 늘 단어장을 들고 자투리 시간을 이용했는데 강석원과 함께 있을 때는 아무것도 꺼내지 않았다. 온전히 모든 시간을 그에게 쏟고 싶었다. 

“네 말이 맞아.”

갑작스러운 강석원의 말에 조지현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깃든다.

“아깝다.”

조지현은 눈을 깜빡였다. 조금 지난 뒤에야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는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엉켰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의 연속성이 훼손된 듯, 모든 게 멈춰버린다. 생각도, 호흡도, 감정조차.

끝내는 두 사람만 남는다. 

결국 그날은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쳐 두 정거장이나 걸어야 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날들이었다.

조지현.

자신을 부르는 나직한 음성에 조지현은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강석원이 서 있었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는 손짓을 해 보인다. 시계를 보니 슬슬 짐을 챙겨 나가야 하는 시각이었다. 조지현은 책을 가방에 넣고 강석원을 따라 일어섰다. 

“어쩐 일이세요.”

가끔 강석원의 훈련이 없는 날은 같이 도서관 지하나 근처에서 만나 점심을 먹기도 했지만 이렇게 말없이 불쑥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비 와.”

그가 짤막하게 대꾸하며 창밖을 가리킨다.

“훈련 없으세요?”

“…….”

강석원은 대답하지 않는다. 둘 다 말은 없지만 서로 눈치가 빠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 거짓말을 하는 대신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자꾸 그렇게 빠지시면 혼나는 거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고. 강석원이 대꾸하며 우산을 편다. 늦은 여름비가 바닥을 뚫을 기세로 내렸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조지현의 옷이 내리치는 비에 젖었다. 우산 하나로는 아무리 해도 무리였다.

“더 붙어.”

강석원의 목소리에 조지현은 그의 옆으로 바싹 다가섰다. 어깨가 닿았다. 공기 중에는 여름 특유의 싱그러운 풀냄새가 섞여 있다. 사실 아침에 일기예보를 봐서 가방에 우산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편의점까지는 걸어서 십 분가량이었다. 일부러 편의점에서 가까운 도서관으로 공부를 하러 왔다.

“다음 주면 방학도 끝이네.”

강석원이 아쉬움을 담은 투로 말한다. 여름 방학이 끝나 가고 있었다. 조지현은 저기, 하고 그를 불렀다.

“왜?”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되세요?”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으로 강석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둘의 주말은 서로의 것이었다.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둘 다 주말에는 그 어떤 약속도 잡지 않았다.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응.”

어물거리며 말을 고르는 조지현의 얼굴을 강석원은 세심히 살폈다.

“저랑, 제주도에 가주셨으면 합니다.”

“제주도?”

의외의 공격을 받은 복서처럼 강석원이 눈을 치뜬다.

“네.”

조지현은 조금 쑥스러운 투로 덧붙였다. 가보고 싶어서요.

“그러고 보니 수학여행 안 갔었지.”

강석원이 그래, 하고 가볍게 대꾸한다.

“비행기 표부터 사야겠네.”

“제가 예매하겠습니다.”

강석원이 눈썹을 비스듬히 휘어 올린다. 불만의 기운이 눈빛에 어린다.

“항상 받기만 하는데 저는 드린 게 없잖아요.”

“됐어.”

“저도 드리고 싶어요.”

조지현이 걸음을 멈추어 선다. 

“저도 뭔가 해드리고 싶습니다. 받기만 하는 건 원치 않습니다.”

강석원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다. 언젠가 떠올렸을 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오늘까지 하면 받는 알바비로 두 사람의 왕복 항공료와 여행 경비는 얼추 계산할 수 있었다. 그간 번 돈을 모두 쓰게 되겠지만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부탁드립니다.”

조지현이 고개를 숙였다. 강석원이 당혹스러운 듯 입매를 찌푸렸다.

“이런 일로 왜 고개를 숙여.”

“하나, 더 양해를 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뭔데.”

강석원이 흥미롭다는 듯이 다음 말을 재촉했다.

“당일로 다녀올 예정입니다.”

가진 돈으로 숙박까지는 무리인 데다 부모님께 일박을 하고 온다는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 조지현의 말에 강석원이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진심이야? 그거?”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넌…….”

강석원의 음성이 웃음처럼 흐트러진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더라.”

조지현은 벌게진 얼굴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강석원이 뺨을 그러쥐고 눈을 마주치게 했다. 얕게 입술이 닿았다가 물러선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장대비에 거리를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가자, 어디든.”

강석원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정말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산을 바로 세우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편의점에 도착했을 때는 두 사람 모두 옷이 흠뻑 젖어버렸다.

“지현이 일찍 왔네. 아, 오셨어요?”

김수정이 조지현에게 인사를 하다가 뒤따라 들어선 남자에게 알은척을 했다. 조지현의 앞 뒤 타임 사람들은 모두 자연히 강석원을 알게 되었다. 길에서 스치듯 지나쳐도 눈길을 끄는 사람이었다.

강석원도 짧게 고갯짓했다.

“저 옷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조지현이 창고로 들어갔다. 김수정은 강석원을 흘끔거리며 쳐다보다가 저기, 하고 말을 건넸다.

“제 남동생이 강석원 선수 팬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일하는 편의점에 자주 온다니까 안 믿더라고요.”

“네.”

“그놈은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믿어요. 저도 그렇긴 하지만, 아무튼 그래서 그런데…….”

조지현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와, 빨리 갈아입었네.”

김수정이 감탄한 듯 조지현을 보며 말한다. 조지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포스를 열어 시재 점검을 시작했다.

“지현아, 거기 돈 쌓인 건 금고에 입금했고 오늘 손님 얼마 없어서 금방 셀 수 있을 거야.”

“네. 알겠습니다.”

조지현이 돈을 세는 사이 김수정은 강석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까 말하던 거 계속하자면, 사진 한 장만 찍으면 안 될까요? 동생한테 자랑하고 싶어서요.”

바닥에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지현은 허리를 굽혀 떨어진 동전을 주웠다.

“한 장이면 되는데.”

김수정이 애교 섞인 웃음을 지으며 검지를 펴 보인다.

“싫어합니다.”

단호한 거절의 말이 돌아오자 김수정이 네? 하고 반문했다. 

“사진 찍는 거, 안 좋아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강석원이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지만 딱히 미안한 표정은 아니었다. 김수정이 무안한 듯 뺨을 긁적였다.

“시재 다 맞췄어요. 수고하셨어요.”

조지현이 말을 건네자 김수정이 그래? 하고 웃는다.

“학원 시간 안 늦으셨어요?”

“아, 맞다. 그럼 나중에 보자. 담에 봬요.”

그녀가 달려 나가자 편의점에는 벨소리만 울렸다. 

“안 가세요?”

“비 좀 그치면.”

강석원은 생수 한 통을 꺼내 들었다. 조지현은 계산을 해주고 계산대 주변을 정리했다. 김수정은 밝고 편한 성격이었지만 주변 정리가 말끔한 사람은 아니었다.

“조지현.”

조지현이 고개를 든 순간 찰칵, 하는 카메라 셔터음이 들렸다.

“……, 사진 찍으신 겁니까?”

“응.”

조지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다가 저도 사진 찍는 거 안 좋아합니다, 하고 입매를 찌푸렸다. 

어릴 때의 사진은 제법 있었다. 당시의 어머니는 젊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점점 늙어가는 본인의 모습을 어느 순간 견뎌내지 못하고 그녀는 사진 찍는 것을 관두었다. 당연히 아들의 사진을 찍어주지도 않았다. 조지현도 자연스레 사진 찍는 걸 꺼리게 됐다. 

“지워주시면 안 되나요.”

강석원이 핸드폰 화면으로 사진을 확인하고는 음, 하고 생각에 잠긴다. 어쩔 수 없이 증명사진을 찍을 때는 늘 무표정하게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았다. 카메라 렌즈를 앞에 두면 긴장이 되고 어색했다.

“이상하게 나왔을 겁니다.”

강석원이 아니, 하고 고개를 내저으며 핸드폰을 제 주머니에 넣었다.

“나만 볼게.”

마치 소중한 보석을 지키겠다는 말투다. 조지현은 열이 오른 목덜미를 문지르며 시선을 돌렸다. 강석원에게 자신은 이길 수가 없었다.

“그칠 기미가 안 보이네.”

강석원이 물을 단번에 마시고는 빈 통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이따가 데리러 올게.”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석원이 간다, 하고는 편의점을 나섰다.

생각해보면 자신도 강석원의 사진 한 장 없었다. 그때에는 그걸 나눠가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기억은 한계가 있었다. 다음에는 자신도 한 장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조지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시한부 환자가 남은 인생을 헤아리듯 끝을 준비해 가는 기분이다.

빗소리가 늦여름의 무더운 공기를 시원하게 식혔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두 사람은 새벽에 만났다. 조지현은 조금 부은 눈을 손등으로 연신 문질렀다. 어젯밤에 뜬 눈으로 지새운 것이다. 혹시 그때처럼 비가 쏟아져 비행기가 뜨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졸리면 자. 공항까지 한참 가니까.”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이 쏟아졌지만 버스에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조지현은 창밖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공항까지 뻑뻑한 눈으로 버텨냈다. 공항에 도착하자 부칠 짐도 없고 이른 시간대라 수속은 금세 마쳤다.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면서 조지현은 또 창밖을 바라보았다.

“왜?”

강석원이 아까부터 조지현이 창밖만 보던 것을 눈치채고 묻는다.

“다행이다 싶어서요.”

“뭐가.”

“날씨요.”

강석원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을 낮게 드리운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이 흐려 있었다.

“썩 좋은 날씨는 아닌 거 같은데.”

“비행기는 뜨잖아요. 그거면 됩니다.”

조지현은 의자에 앉아서도 초조하게 몇 번이나 하늘을 살폈다. 다행히 탑승도 아무런 문제없이 이루어졌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이륙하는 순간에야, 조지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 앉은 강석원이 조지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을 건넸다.

“그거 걱정하느라 못 잔 거야?”

부은 눈을 보고 짐작한 모양이었다. 조지현은 조금 쑥스러운 듯 네, 하고 대꾸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던 날이 떠오른다. 부유물 섞인 흙탕물이 사나운 바람에 떠밀려 모래를 적셨다. 아름답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광경은, 지금 당장의 것처럼 하나하나 세세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날의 냄새, 온도, 바람, 아슬아슬하게 닿았던 남자의 온기. 기억 속의 숱한 날 중, 가장 행복하던 순간이다. 빗소리를 들으면 항상 그날을 생각했다. 그 밤에, 강석원은 자신에게 약속했다. 여섯 번의 계절이 지나면 함께 하기로.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다음에 제주도에 가자는 약속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행이에요. 약속 지킬 수 있어서.”

강석원이 손가락으로 조지현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한숨 자.”

조지현은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긴장이 느슨하게 풀리자마자 금세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눈을 뜨자 어느새 제주 공항이었다. 

“가고 싶은 곳 있어?”

공항에서 나오면서 강석원이 물었다. 조지현이 가방에서 프린트를 꺼내 내밀었다.

“조사는 했습니다.”

리포트를 쓰듯 사진까지 첨부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온 것을 보고 강석원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린다.

“이래서 전교 일 등 하는구나.”

조지현은 눈을 깜빡였다. 그에게 그런 말을 한 기억은 없었다. 강석원이 게시판에서 이름 봤어, 하고 말을 잇는다.

“찾기 쉽더라고.”

궁금하더라고. 이번에는 몇 등일지. 얼마나 노력했을지. 그냥 그런 사소한 것들이. 

기억 속 강석원이 했던 말들이 현재의 강석원에게 덧씌워진다. 

이전의 강석원과 지금의 강석원은 같은 사람인 것일까. 

얼마 전 도서관에서 빌린 평행 우주이론을 다룬 책을 읽고 그런 의문들이 더해졌다. 자신이 과거로 온 것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빠진 것인지.

종이를 읽는 강석원의 눈이 가늘어진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쭉 뻗은 콧대와 이어지는 입술 선에 무심코 시선을 빼앗긴다.

“그래서, 어디로 갈까?”

강석원이 종이를 넘기며 묻는다.

“아무 데나 다 좋습니다.”

“아무 데나라는 곳은 없어.”

조금은 장난스러운 어투에 조지현은 웃음을 삼켰다. 의문에 대한 답을 영원히 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자신은 강석원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공항 근처에 있는 국수집에서 국수를 먹고 버스를 탔다. 버스 차창 밖으로 지나는 풍경들이 제법 이국적이었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나무들이 도로를 따라 이어졌다.

강석원은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조지현의 옆얼굴을 보았다. 평소의 차분한 모습과는 다르게 어딘지 들뜬 듯한 기색이 드러났다.

“수학여행, 못 가서 많이 서운했겠네.”

“네?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조지현이 조금 당혹스러운 듯 시선을 어물거린다. 기다란 속눈썹이 부드럽게 맞물리며 움직인다.

“같이 와서 좋은 겁니다.”

조지현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자신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지어 밀어내곤 했다. 그 목소리의 경계가 무너지고 감정이 실리는 순간들을 강석원은 분명히 알고 있다. 일시에 공기가 사랑스럽게 흩어지는 순간들을,

“그리고 저, 여행도 처음 와봅니다.”

지금처럼.

강석원은 나도, 하고 대답하고는 입술을 당겨 웃는다. 조지현은 마주 웃다가 다시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석원은 조지현의 손을 잡았다. 조지현이 깜짝 놀라 돌아본다. 덜컹거리는 버스에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 아주머니 한 명이 전부였다. 강석원은 턱을 괴고 창밖을 보며 조지현의 시선을 모른 척했다. 조지현은 손을 빼내려 했지만 애초에 그의 손아귀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나중에는 한 명 있던 승객마저 내려 버스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결국에 그대로 손을 잡은 채로 목적지까지 가게 되었다.

버스는 두 사람을 해수욕장에 내려주었다. 

바다를 보고 싶다는 조지현의 말에 공항에서 가까운 해수욕장으로 목적지를 택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엄청난 바람이 불어 닥쳤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은 도시에서 느끼는 것과는 무게가 달랐다.

조지현은 눈을 살짝 찡그린 채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우울한 청회색 빛의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다. 낮은 하늘과 수평선이 맞닿아 있다. 온통 찌푸린 하늘 때문에 물색이 그리 맑지 않았다.

“어때.”

강석원이 소감을 물었다.

“별거 없네요.”

조지현이 대답했다. 

뭔가 특별한 풍경일 줄 알았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투명한 바다와 하늘을 막연히 그렸다. 그림으로 그려낸 듯한 장관이 펼쳐질 거라 여겼다.

“날씨가 이러니까.”

강석원이 조지현의 말을 거들었다.

강한 바람 때문에 거세게 이는 파도가 바닥에 가라앉은 부유물을 흔들어 깨웠다. 그날 둘이 보았던 탁한 바다와 딱히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좋아요.”

조지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뿌듯한 감정이 차오른다. 강석원과 함께 있는 현재가 기쁘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파도에 부서지는 모래가, 그와 딛고 있는 이 순간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좋다.

“정말 오길 잘…….”

조지현은 말을 잇지 못한다.

사랑에 빠진 소년을 마주한다. 담담한 시선에는 몇 년 동안 소식 한 통 없던 상대를 찾으러 다니던 깊은 감정이 고스란히 실린다.

이런 것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만큼 가슴이 아프고, 애가 닳고, 온몸의 신경이 짓눌린 듯 저려오는, 이 무거운 감정을.

조지현. 그가 이름을 부른다. 평생 놀림거리가 되었던 이름이다. 좋아할 수 있을 거라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의 부름은 특별하다. 무엇으로도 표현하지 못할 감정이 그 안에 충만하다. 강석원이 불러주는 이름은, 몹시 사적인 속삭임이다.

“나 너 좋아해.”

뜨거운 쇠를 삼키는 듯이 힘겹게, 그는 한마디를 내뱉는다. 그 외에 다른 표현은 필요도 없다는 듯이 짧고, 단순한 말이다.

조지현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대답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입술이 떨려 말이 나오지 않는다. 강석원은 충분한 인내심을 갖고 조지현의 대답을 기다린다.

“저도……, 그렇습니다.”

대단히 멋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하다는 듯이 강석원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다.

“이리 와.”

강석원이 팔을 뻗는다.

지현아, 이리 와.

다시는 나 안 만나줘도 되니까.

어떤 마음으로 그날 그는 손을 내밀었을까. 조지현은 강석원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잘했어.”

처음 걸음을 뗀 어린아이에게 하듯 남자가 말한다. 강석원이 다정하게 자신을 대해줄 때마다 조지현은 평범한 부모의 사랑을 받는 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강석원은 바닷바람이 직접 닿지 않도록 몸을 틀어 막아준 후, 조지현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해변을 걸었다. 모래에 발이 빠져 곧 신발 안이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계속 걸었다. 근처에 있는 카페를 발견해 커피를 사서 마시다가 다시 또 걸었다. 

“비행기 시간 몇 시지?”

“7시요.”

강석원이 시간을 확인했다. 공항까지의 거리와 수속 시간을 따지면, 슬슬 돌아가야 했다.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지만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고마워.”

“뭐가요.”

“다.”

조지현은 강석원을 올려다본다.

“……언젠가 갚기로 했잖아요.”

강석원이 응? 하고 되물었다.

“그동안 얻어먹은 밥값 갚으려면 한참 멀었습니다.”

강석원의 눈가가 구부러진다.

“그래.”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을 잡아 제 주머니에 넣는다. 이제 갈까. 그가 묻는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일찍 집으로 갈게요.”

방학이 끝나기 전 마지막 주말이었다. 

“그리고, 저, ……여쭤볼 게 있습니다.”

“뭔데.”

조지현이 음, 하고 입술을 물었다 놓는다. 어려운 말을 꺼내기 전에 보이는 습관임을 강석원은 안다. 말을 고르는 사이 시선이 아래로 움직인다. 그 사소하고 작은 몸짓이, 못내 사랑스러워 강석원은 말없이 조지현의 주저함을 지켜본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거기까지였다. 톡톡, 얼굴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위를 가두었다. 

강석원은 조지현의 손을 잡고 근처의 카페 차양으로 달렸다. 조지현이 불안스런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치겠죠? 하고 물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점점 빗줄기는 거세어졌다. 강석원은 하늘을 흘깃 쳐다보면서 눈가를 좁혔다. 

“어쩌죠?”

“일단 공항으로 가야지.”

다행히 길 건너 멀지 않은 곳에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강석원은 최대한 젖지 않도록 조지현을 가리며 정류장까지 뛰었다. 2차선 도로를 건너기만 했는데도 금세 두 사람의 옷이 흠뻑 젖었다. 십여 분을 기다리자 버스가 도착했다. 공항까지는 한 시간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시간은 넉넉했다.

문제는,

“어떡하죠?”

조지현이 창밖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지는 비를 보며 물었다.

“그치겠지.”

그러나 공항에 가까워질수록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조지현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항공사 창구마다 줄을 선 사람들이 한결같이 화가 난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여기 있어.”

강석원은 두 사람이 타고 온 항공사 창구로 갔다. 직원 여러 명이 문의하는 승객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강석원이 직원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는 바로 돌아왔다.

“항공기 지연인데 결항 가능성도 있대.”

결항이란 단어에 조지현은 눈을 홉떴다.

“일단 기다려 보자. 갑자기 내린 비는 갑자기 그치기도 하니까.”

강석원이 차분하게 말하며 구석의 빈 의자를 가리켰다. 두 사람은 일단 의자에 가서 앉았다. 젖은 옷과 에어컨의 조합은 쉽게 체온을 빼앗아갔다. 조지현이 팔을 문지르며 입술을 물었다 놓는다. 강석원이 기다려,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론가 사라졌던 그는 작은 담요를 가져왔다.

“웬 거예요.”

“사 왔어, 편의점에서.”

“금방 갈 건데 아깝잖아요.”

강석원은 대답 대신 포장을 뜯어 조지현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감사합니다. 조지현은 작게 인사하며 담요 끝을 잡아당겼다. 한결 떨림이 덜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항의 사람은 늘어갔다. 공항 안에는 지연과 결항에 대한 사과 방송이 연신 흘러나왔다. 두 사람의 탑승 시간이 다가왔지만 항공사 창구는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원래 태풍이 진로가 이쪽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바뀌었대. 뭐 이런 일이 다 있냐. 짜증나 죽겠다.”

옆에 앉은 커플이 핸드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확인하고는 투덜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조지현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보고 강석원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번 더 확인하고 올게.”

여기서도 한눈에 상황이 보이는데도 그는 굳이 몇 번이고 확인을 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어딜 가든 눈에 띄는 남자였다. 그가 다가오기만 해도 근처에 있던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특별히 인상이 험악하거나 불량스럽지도 않은데 강석원은 대하기 어려운 특유의 날카로움이 있었다. 강석원이 질문을 거듭할 때마다 그를 상대하는 항공사 직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강석원이 아까보다 조금 더 굳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일어나.”

“네? 왜요?”

아직도 밖은 하늘이 찢어진 듯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오늘 다 결항이래.”

조지현은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럼 어디로 갑니까?”

공항 구석에서 노숙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일단 공항 나가야지. 조금만 더 늦으면 버스든 택시든 못 잡을 거 같아.”

“저 잠깐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

강석원이 저쪽이야, 하며 화장실 방향을 가리켰다. 조지현이 돌아오자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강석원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버스와 택시 승강장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삼십 분가량을 기다려 간신히 택시를 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근처에 괜찮은 숙소가 있을까요.”

강석원의 질문에 기사가 음, 하고 생각에 잠긴다.

“아마 이 근방 숙소는 다 차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아예 서귀포시로 내려가거나 성산같이 펜션 많이 모인 곳으로 가보시든가요.”

“죄송합니다. 저희가 초행이라서 정확히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데요.”

조지현이 차분한 목소리로 기사에게 말을 건넸다.

“기사님께서 아는 곳이 계시면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하나 있기는 한데…….”

“어디인가요?”

택시 정류장과 버스 정류장은 거의 아비규환이 되어 가고 있었다. 분명 기사의 말대로 근방의 숙소들도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는 동생네가 탑동 쪽에 작은 펜션을 하나 만들었는데 아직 완공이 좀 덜 됐다고 들었거든. 거기라도 괜찮으면 연락해줄까?”

조지현이 강석원을 보았다. 강석원이 부탁드립니다, 하고 말했다. 숙소를 구하러 주변을 빙빙 돌아다닐 바에야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잠깐만 기다려 봐요.”

기사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짧은 통화를 마치고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인테리어 공사가 덜 된 것만 감안해 달라는데. 괜찮겠어요?”

“상관없습니다.”

“괜찮습니다.”

두 사람의 대답을 듣고 나서 기사는 차를 출발시켰다. 해안도로를 따라 삼십 여분을 달리던 차는 한적한 길 안쪽으로 들어가 정지했다. 연락을 받은 펜션 주인 내외가 문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비가 갑자기 이렇게 많이 온대요.”

“태풍인가 뭔가가 진로를 바꿨다는데, 기상청 놈들 하는 짓이 그렇지.”

택시 기사와 주인 남자가 반갑게 말을 나누었다. 

“내일 공항 갈 거면 한 시간 전에만 주인한테 말해요. 우리 집도 이 근처니까 차 갖고 올 테니까.”

“감사합니다.”

택시 기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차에서 내렸다. 펜션 주인이 건넨 우산을 썼지만 내리는 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손님들은, 학생 아닌가?”

주인이 조지현을 살피며 물었다.

“네. 학생입니다.”

조지현은 평연하게 대꾸했다.

“부모님한테 말씀은 드렸어? 갑자기 못 올라가서 걱정하실 텐데.”

“공항에서 전화 드리고 왔습니다.”

강석원이 조지현을 쳐다보았다. 주인이 강석원에게 힐끔 시선을 주었다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뭐. 일단 묵기로 한 거니까.”

주인이 안쪽에 있는 독채 펜션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다른 건 다 공사 완료됐는데 욕조가 없어요.”

“뜨거운 물만 나오면 괜찮습니다.”

강석원의 대답에 주인이 열쇠를 건넸다.

“운 좋은 줄 알아요. 이렇게 좋은 펜션은 제주도 어딜 가도 없을 테니까. 독채에 이 정도 가격이면 거의 거저라니까. 수건이랑 그런 건 대충 가져다 뒀어요.”

“감사합니다.”

강석원이 열쇠를 받아들고 숙박료를 계산했다.

“들어가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 가격에 이 정도 펜션은 구할 수 없다는 주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좋네요.”

조지현이 펜션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죄송해요. 숙박료도 제가 지불했어야 했는데.”

괜한 소리를 한다는 표정으로 강석원이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담요로 털어주며 말했다. 

“씻어. 감기 걸려.”

“먼저 씻으세요.”

강석원은 대답 대신 욕실 문을 연다. 조지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금방 나올게요,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간단한 목욕 용품은 구비되어 있었다. 문제는 옷이었다. 옷은 물론이고 속옷까지 모두 젖은 채였다. 수없이 보인 몸이지만 아예 알몸으로 나가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때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조지현.”

“네?”

조지현은 화들짝 놀라 도로 바지를 올리며 대답했다.

“샤워가운 빌려왔어.”

그가 문을 조금 열고 가운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강석원은 바로 문을 닫았다. 가운을 수건걸이에 걸어두고 조지현은 옷을 벗었다. 욕조가 놓일 자리만 미완성의 상태로 남아 있었다. 

샤워콕을 열자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왔다. 비에 얼어붙은 몸이 노곤하게 녹아들었다. 조지현은 얼른 머리를 감고 샤워를 마친 후에 샤워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왜 이렇게 빨리 나왔어.”

조지현은 말없이 웃어보였다. 강석원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춰준 후, 욕실로 들어갔다. 조지현은 침대에 앉아 펜션 안을 살폈다. 전체적으로 흰색과 짙은 남색으로 구성한 인테리어는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주었다. 전면의 창은 테라스와 연결되어 있고 밖으로는 바로 바다가 보였다.

조지현은 창 앞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뒤에서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 하셨……, 어요.”

끝말은 입속에서만 중얼거렸다. 샤워 타월을 허리에 두르고 나온 강석원과 눈이 마주쳤다. 강석원은 군더더기 살이 하나도 없었다. 솜씨 좋은 조각가가 정으로 쳐낸 듯한 몸이다. 커다란 샤워 타월로 하반신을 가렸는데도 이상하게 벗은 몸을 보는 것보다 더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조지현은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가운이 하나밖에 없다고 해서.”

그렇게 말한 강석원은 드라이기를 찾아내 코드를 꽂았다.

“이리 와. 머리 말려줄게.”

조지현은 머뭇거리며 강석원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침대를 가리켰다. 조지현이 침대 끝에 걸터앉자 강석원은 드라이기의 전원을 눌렀다.

위잉, 하는 드라이기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바람이 구석구석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다 됐어.”

조지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말리세요?”

“난 짧아서 금방 말라.”

강석원이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냈다.

이상했다. 강석원의 자취방보다 훨씬 넓은데, 어디에 있어야 할지 몰라 불안하기만 했다.

“피곤하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조지현은 저도 모르게 잔뜩 긴장해 대꾸했다. 강석원의 눈가가 느슨하게 풀린다.

“걱정 마. 오늘은 그냥 잘 테니까.”

“…….”

“내일 일찍 공항 가봐야지.”

“비가 그칠까요?”

강석원이 그치겠지, 하고 무심한 투로 대답했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를 떠올렸는지 전화 안 해도 돼? 하고 묻는다.

“무슨 전화요?”

“집에.”

“했습니다. 아까.”

조지현이 쓰게 웃으며 거짓말인 줄 아셨어요? 하고 물었다.

“하긴, 너무 능숙하다 생각은 했다.”

둘 다 거짓말에는 익숙지 않은 성격이었다. 그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자 왠지 웃음이 났다. 조지현이 작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떴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뺨을 쥐고 허리를 숙여 입을 맞춘다. 일시에 몸에 열기가 퍼졌다.

“바다 보이네.”

그가 조지현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지며 말한다. 강석원이 테라스와 연결된 창으로 걸어갔다. 그가 조지현을 돌아보며 손짓했다. 조지현은 강석원에게 다가갔다.

비바람이 육중한 몸뚱이의 바다를 뒤흔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흔들린 바다는 파도가 되어 부서지고 모래를 적셨다. 밤바다는 무서울 정도로 깊은 색을 지녔다. 보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침잠되고 만다. 

“비 많이 오네요.”

“응.”

무심한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던 강석원이 아까, 하고 말문을 연다.

“아까 뭐 물어본다고 하지 않았어?”

“아, 그거.”

조지현이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린다. 강석원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조지현은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물어보려고 마음을 먹긴 했는데, 갑자기 이런 상황에서 말을 꺼내자니 몇 배는 더 긴장되었다.

“……, 끝까지 안 하시는 이유가, 저 때문인지……, 궁금했습니다.”

“뭘.”

강석원이 짧게 되묻는다.

조지현은 열심히 단어를 고른다. 골라도, 골라도, 처음 떠올린 단어를 적당히 대체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섹스요, 하고 대꾸했다. 링 위에서 제대로 카운터를 얻어맞은 것처럼 강석원의 표정이 멎는다.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자 조지현은 한층 당황한 듯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는 괜찮은데, 그냥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건지, …….”

몸을 몇 번이나 겹쳤지만 끝까지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강석원이 방법을 모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흥분한 성기를 그곳에 문지르며 제 욕망을 억누르는 듯한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던 것이다.

“원치 않으시면…….”

거세게 끌어 안긴다. 입술이 겹쳐지고 옷자락이 벌어진다. 정신을 차려보니 침대에 내던지듯 눕혀졌다. 

“내가 원하지 않는 거 같아?”

강석원이 묻는다. 짐승의 눈이다. 열기와 욕망이 한데 뒤섞인다. 

“원하시면, 하셔도 됩니다.”

조지현이 강석원을 올려다보며 간신히 대답한다.

“너는.”

강석원이 묻는다. 너는 어떠냐고.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의 마음에 있는 일말의 망설임을, 샅샅이 읽어낸다. 그래서 한껏 욕망에 사로잡힌 채로도 기다리는 것이다. 

평생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없을 거라 여겼다. 사랑받지 못했으니까 주지도 못할 거라 막연히 생각해 왔다.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을 조지현은 남자를 바라보며 깨닫는다.

“좋아해요.”

조지현은 강석원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한다. 지구가 자전을 하고 바다는 물로 이루어져있음을 설명하듯, 담담하고 평연한 어조로.

“좋아해요. 아주 많이.”

조지현은 웃음을 삼켰다. 쓴 약을 삼켜내듯, 목울대를 천천히 움직이며. 강석원의 이성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도 무너지듯 조지현의 위로 쓰러진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입술을 집어삼킨다. 깊숙한 물에 잠겨 있다가 뭍으로 나온 사람이 생존을 향한 다급한 호흡을 하듯. 단단한 가슴이 조지현의 몸을 짓누르듯 끌어안는다. 성기가 닿는다.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정확히 제 욕구를 아는 움직임이 조지현의 아래를 자극한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힘줄이 돋은 단단하고 굵직한 성기가 구멍에 닿았다. 조지현이 순간적으로 숨을 삼켰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으며 묻는다. 모든 인내심을 긁어모은 호흡이 닿는다.

“네가 싫으면 안 해.”

“하고 싶습니다.”

그 한마디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지현은 강석원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청동조각처럼 단단한 강석원의 어깨에 입술을 댄 채, 조지현은 속삭였다.

넣어주세요.

거기까지였다. 급작스런 삽입이 시도되었다. 조지현은 숨을 멈추고 강석원을 올려다보았다.

“괜찮아?”

“너무 오랜만이라…….”

조지현은 그 순간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았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어깨를 끌어안고 단번에 허리를 추어올렸다. 쑥, 하고 살덩이가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조지현의 벌어진 입술에서 빚어지지 못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앞이 핑 돌았다. 꺼멓게 흐려진 시야가 돌아오지 않는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강석원은 한 번 더 허리를 박아 올렸다. 조지현이 입술을 짓깨물며 비명을 참아냈다. 빡빡한 입구가 간신히 성기를 받아냈다. 조지현은 눈을 껌뻑거렸다. 간신히 숨을 내쉬었다. 가엽고 안타까운 모습에조차 남자는 엉망으로 발정했다. 강석원은 조지현의 허리를 끌어안고 몇 번이나 더 추삽질을 반복했다. 조지현은 거의 숨도 쉬지 못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시트를 움켜쥔다. 그제야 머리에 피가 돌기 시작한 강석원이 그 반응의 의미를 알아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해.”

강석원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는다. 

“나 미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강석원은 감정의 동요가 거의 없었다. 큰소리로 화를 내거나 욕을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이런 식으로 언성을 높인 적은 처음이었다. 그의 질투는 좋아하는 감정만큼이나 열렬하다. 자신이 조지현에게 첫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보다, 이 모습을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봤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조지현이 고개를 내젓는다. 긴 눈초리를 따라 고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강석원은 조지현을 끌어안았다.

“다시는 그러지 마.”

강석원이 조지현의 뺨에, 귓불에, 목덜미에 차례대로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다시는, 그런 거짓말 입에 담지도 마. 미칠 것 같으니까.

조지현은 강석원의 목을 세차게 끌어안았다. 남자가 열중한 얼굴로 가느다란 몸을 부서질 듯 안는다. 질컥거리는 소리가 아래에서 울렸다. 조지현은 물에 빠진 어린아이처럼 강석원의 목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커다란 성기가 뱃속을 두드리는 감각에 조지현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쇳소리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프고 힘들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다. 그런데도 손을 놓고 싶지 않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겹겹이 밀려든다. 

강석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 열기 어린 시선에 조지현은 참지 못하고 그대로 절정에 다다랐다. 정액이 강석원의 배를 적셨다. 조지현의 턱까지 치솟은 정액을 강석원이 혀로 핥았다. 

그의 성기가 출입을 거듭할수록 무게를 더했다. 더 이상 벌어질 것 같지 않던 아래가 살덩이의 형태에 맞춰 빠듯하게 열린다.

“아, 선, ……, 아,……,”

간신히 끝까지 들어온다. 거센 맥박이 느껴지는 살덩이가 뜨겁게 안을 압박했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원하는지 남자의 성기를 아래에 품은 채, 깨닫는다. 상대의 탐욕이 정신적 카타르시스로 이끈다. 그가 더 깊이 들어오길 바랐다. 더 많이, 더 깊숙하게, 빠짐없이 욕구해주길, 미칠 듯이 갈구한다.

“빨리, …….”

조지현의 짧은 재촉에 강석원은 가느다란 허벅지를 움켜쥐고 깊은 곳까지 제 성기를 박아버렸다. 무언가가 들어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부분까지, 벌어지고, 열리고 만다. 조지현은 울음처럼 비명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여전히 모자라다는 듯이 재촉을 잇는다.

선배님, 더, 계속, 해주세요, 선배님, ……더.

강석원이 이를 사리문 채 허리를 움직였다. 위에서 덮쳐오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조지현이 숨을 헐떡이며 힘들어 한다. 처음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다. 적당히 느긋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강석원은 자신을 멈추지 못한다. 제어를 잃는다. 그 어떤 이성과 논리도 통하지 않는 상대다. 잘게 경련하는 몸을 바특하게 끌어안고 강석원은 한껏 흥분했다. 짐승이었다. 발정 난 짐승이 제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조지현을 몰아세웠다.

조지현의 단정한 얼굴이 욕정과 고통으로 엉망으로 흐트러진다.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모습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폭죽을 삼켜버린 것처럼 혈관을 타고 불꽃이 튀어 오른다.

강석원이 뜨거운 숨을 뱉으며 조지현의 몸에서 성기를 끄집어낸다. 희뿌연 액체가 가느다란 허벅지를 적셨다. 울컥, 울컥, 몇 번이고 정액이 사출된다. 

몸이 땀에 젖어 미끈거렸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몸을 그대로 끌어당긴다. 본디 하나였던 것처럼 빈틈없이 바특하게 두 사람의 몸이 겹쳐졌다.

조지현은 잠결에 남자의 부재를 깨달았다. 화장실에라도 간 것인가 싶어서 눈을 감은 채 기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테라스에 앉아있는 강석원이 눈에 들어왔다. 발을 내딛는 순간, 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둔통에 조지현은 숨을 삼켰다. 강석원이 그 기척을 들었는지 고개를 돌렸다. 조지현은 가운을 집어 들어 걸치고 천천히 걸어가 테라스 문을 열어젖혔다. 밤바람이 차다.

“왜 나와 계세요.”

“그냥.”

테라스에는 원형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두 개가 있었다. 조지현의 눈에 테이블에 놓인 캔이 보였다.

“술 드셨어요?”

“응.”

“어디서 났어요?”

“냉장고에 있던데.”

“……, 드셔도 됩니까?”

“신체적으로는 가능한 나이라.”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조지현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출생신고를 일 년 늦게 했어. 낳고도 키울 생각이 없으셨대.”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다.

“할머니가 키워주시면서 출생신고도 그제야 했어.”

얼마 전 할머니의 기일이었다는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부모도 없이 할머니의 손에 자란 그가 유일한 혈육을 잃었을 때의 상실감을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한다. 조지현이 우두커니 선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강석원이 손을 뻗는다. 조지현은 그의 품에 바싹 안겼다. 강석원이 두르던 담요로 조지현의 몸까지 빈틈없이 덮었다.

파도 소리가 바로 앞까지 밀려든다.

“저도 마시면 안 될까요?”

조지현이 맥주캔을 가리키며 물었다.

“안 돼.”

그가 엄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그러고는 달래듯이 조지현의 한쪽 어깨를 끌어안고 나중에 같이 마시자, 하고 속삭인다. 

같이 술잔을 기울이게 되는 날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조지현은 그러겠다고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계속 생각해 봤는데.”

강석원이 비가 내리는 먹색 바다 너머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잇는다.

“너 그 집으로 보내고 싶지 않아.”

“…….”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말없이 외박을 했으니 돌아가면 난리가 날 게 분명하다. 피투성이가 된 채 밖으로 쫓겨났던 모습까지 봤으니 강석원은 그 이상까지 상상할 것이다. 행복을 곱씹을 여유도 없이 밤새 혼자 앉아 그런 것들을 상상했을 남자를 떠올리자 가슴이 먹먹해진다.

“괜찮습니다.”

조지현이 차분하게 대답한다.

“혼나긴 하겠지만, 큰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괜찮아요.”

“뭐가 괜찮아.”

어깨를 감싸 안은 손에 힘이 실린다.

“너 그런 거,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강석원의 얼굴이 목덜미에 닿았다.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저희 어머니는,”

조지현이 운을 뗐다.

“제가 성적을 잘 받아오면 만족하세요.”

“…….”

“화를 내시다가도 그러면 웃어주시거든요. 그래서 어렸을 때는 열심히 했습니다. 칭찬을 받을 수 있어서요.”

조지현은 담요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냥 한 번 쓰이고 말더라고요. 같은 걸로는 여러 번 자랑할 수 없으니까요. 나중에는 그냥 습관처럼 공부를 했어요. 할 줄 아는 것도 그뿐이고요.”

조지현이 힘없이 웃었다.

“얼마 전에 모의고사를 봤습니다. 사설기관에서 치른 모의고사인데, 제법 공신력 있는 시험이에요. 거기서 만점 받았습니다. 그거면 될 거예요, 아마.”

조지현은 고개를 숙였다. 제가 가진 방어수단이 고작해야 그런 종잇조각 한 장이라는 사실을 남자에게 밝히는 게, 부끄러웠다.

강석원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조지현은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몇 대 맞으면 돼요.”

“내가 너 좋아한다고 했잖아. 기억 안 나?”

“……네?”

“그러니까, 웃으면서 그런 말 하지 마.”

강석원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닳아 없어질까 봐 자신은 제대로 만지지도 못했던 사람이다. 말이라도 그런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강석원이 조지현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로 말한다.

“다해주고 싶은데, 뭘 더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더 이상 받을 게 없을 만큼, 모든 것을 주었던 남자다. 제가 가진 미래와 약속된 성공까지 버리고.

“그럼, 두 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조지현이 입을 열었다.

“그래.”

얼마든지.

강석원의 눈빛이 그 뒷말을 대신한다.

조지현은 강석원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마디가 견고하고 투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손이다.

“저 때문에,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뒤에서 강석원이 작게 한숨을 내쉬는 기척이 들린다. 그가 지금까지 조지현을 도운 것은 두 번이고, 모두 그럴만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조지현은 마지막 세 번째가 어떻게 되는지 안다. 그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그리고?”

강석원이 물었다.

“운동 계속하세요.”

“뭐?”

“계속, 어떤 일이 있어도 그만두지 마시고, 계속하세요.”

조지현은 강석원의 손에 제 손을 얽는다.

“고작, 그게 부탁이야?”

“중요해요, 저한테는.”

조지현이 고개를 돌려 강석원을 돌아본다. 

“약속해주세요.”

까만 눈동자가 더없이 진지하게 빛난다. 강석원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어. 약속할게.”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응.”

대답을 듣고 나서야 조지현은 그제야 안심한 듯, 긴장을 푼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어깨를 바특하게 끌어안고 말한다.

너도 다치지 마.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온기가 뒤덮었다. 강석원이 그리고, 하며 혼잣말처럼 덧붙인다.

“선배라고 부르지 마.”

“네?”

“헷갈리니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몰라 조지현은 고개를 들었다. 

“뭐가 헷갈린다는 말씀인가요.”

“네가 전에 사귀었던 사람.”

“…….”

비록 오늘 자신이 말실수를 하긴 했지만, 계속 그런 오해를 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지 못했다. 

조지현은 눈을 감았다 천천히 떴다.

“저 누군가랑 사귀는 거 처음입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선배님은,”

조지현은 강석원을 바라본다.

만나지 말자. 앞으로.

그렇게 말하던 남자를 알고 있다. 자신이 이곳으로 돌아온 이후로 강석원을 선배님이라고 부른 적이 몇 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미래가 겹쳐질까 두려웠던 터다. 하지만 이성을 걷어내고 나약한 본모습을 드러낼 때면 언제나 강석원을 선배님이라고 부르곤 했다. 어떤 결말을 맞게 되더라도, 결국에 모두가 강석원이다. 조지현은 손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선배님뿐입니다. 저한테는, 선배님뿐이에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겁니다.”

강석원이 조금 당황한 듯 표정을 굳히더니, 턱을 쓸어내린다.

“왜 그러십니까.”

조지현이 묻자 강석원이 낮게 혀를 찼다.

“너무 머저리 같이 군 것 같아서.”

조지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강석원이 머쓱한 투로 말을 덧붙였다. 그럼 그동안 계속 나한테 질투했던 거잖아.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목덜미가 기분 탓인지 조금 붉게 보였다. 조지현은 눈을 깜빡이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안 하시면 됩니다.”

“…….”

“선배님. 좋아해요.”

조지현은 강석원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이 손이 잘못된 것을 쥐지 않길 바라며.

“계속, 앞으로도 선배님만 좋아할 겁니다.”

“나도.”

그 한마디에 실릴 무게를 알기에 가슴이 저릿하다. 몇 년을, 자신을 찾아 전국의 정신병원을 떠돌았을, 약속인 것이다.

조지현은 강석원의 뺨에 입술을 댔다. 눈 아래와 콧대, 입술, 닿는 대로 입을 맞추며 중얼거린다.

“하고 싶어요.”

강석원이 설핏 눈가를 좁힌다. 그가 이미 잔뜩 흥분한 상태라는 것은 아까부터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강석원은 제 욕구와는 무관하다는 듯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조지현이 두 번째 사정을 마치고 거의 혼절하듯 의식을 잃고 쓰러진 터다. 애초에 체격 차이도 현저했지만 체력 차이도 컸다.

“무리하지 마.”

강석원의 말에 조지현은 입고 있던 가운자락을 열어젖힌다. 일시에 드러나는 나신에 강석원은 무심코 한숨을 흘린다.

조지현은 강석원의 손을 잡아 제 몸에 댔다. 보잘 것 없고 서툰 유혹이었다. 그러나 남자의 이성은 그대로 스러지듯 사라지고 만다. 

아――.

입술이 벌어지면서 탁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뒤에 있던 강석원이 무너져 내린 조지현의 허리를 추어올린다. 베개를 아래에 받쳤는데도 조지현은 번번이 다리에 힘이 풀려 엎드린 채로 쓰러진다.

“괜찮아?”

조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괜찮은지 아닌지도 구분이 가지 않는다. 뜨거운 머릿속에는 남자의 것들로만 가득하다. 강석원의 숨소리, 손길, 거친 입맞춤, 단단한 살덩이, 마찰되는 살갗, 목소리, ――그런 것들. 물러섰던 살덩이가 다시 안으로 들어온다. 조지현의 눈이 크게 벌어진다. 시트를 움켜쥔 손끝이 떨렸다. 목이 타들어갔다. 강석원이 허릿짓을 할 때마다 아, 으, 하는 동물 같은 신음이 연이어 터져 나온다. 아니, 동물이다. 동물의 교미를 하고 있다. 엎드린 채로 뒤로 남자의 성기를 받아내며 조지현은 연신 신음을 내뱉었다. 턱 아래로 땀이 흘러내린다. 허벅지 사이로는 정액이 질질 흘러내렸다. 강석원이 땀에 젖은 조지현을 끌어안는다. 감정과 감각이 온몸에 충만했다. 더없이 만족스런 성교였다.

“조지현.”

강석원은 연신 조지현의 이름을 불렀다. 등에 닿는 부름에 몸이 바르르 떨렸다. 강석원의 커다란 성기가 더 들어올 수 없다고 여겨질 만큼 안으로 퍼억, 밀려든다. 강석원이 마킹을 하듯 조지현의 등줄기에 이를 세우고 허릿짓을 한다. 이미 몇 차례의 사정으로 제대로 서지 않는 조지현의 성기를 남자가 뒤에서 움켜쥔다. 조지현이 제발, 하고 입술로 속삭였다. 강석원의 손바닥에서 몇 번의 마찰로도 탄력을 잃었던 살덩이는 무게를 더해갔다. 오줌인지 정액인지 구분도 가지 않을 정도의 묽은 액을 남자의 손바닥에 토해냈다. 절정에 다다른 몸이 움찔, 하고 일순 움츠러들었다. 남자가 눈썹을 찌푸린 채 다급하게 성기를 끌어냈다. 그러고는 손으로 몇 번 훑어내 조지현의 등에 사출을 마친다. 

조지현이 앞으로 풀썩 쓰러진다. 강석원이 숨을 고르고 조지현을 붙들고 앞으로 돌렸다. 얼굴을 마주보게 하고는 강석원은 입술을 가볍게 빨았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머리 아래로 제 팔을 고였다. 비가 내리는 새벽 여름의 공기가 무더웠다. 조지현은 남자의 팔을 베고 누워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뜬다.

“선배님.”

강석원이 조금 머뭇거리다 응, 하고 대꾸한다.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이 남자가 좋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만큼, 좋았다.

“둘만 있는 것 같아요.”

그날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게.”

강석원이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빗소리가 거짓말처럼 잦아들고 있었다. 

여름의 끝에서 어둠이 물러갔다.

예상대로 어머니는 다음날 오후에 돌아온 아들을 보고 미친 듯이 화를 퍼부었다. 그러나 조지현이 성적표를 내밀자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그럼 이게 전국 일 등 성적표란 말이지? 네가 전국에서 제일, 그러니까 지금 우리나라 애들 중에서 공부를 제일 잘한다는 말이지? 여자는 비슷한 맥락의 질문을 여러 차례나 던지고는 급히 할 일이 생각났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지현은 제 방으로 돌아갔다. 방문 너머로 호들갑을 떨며 여기저기에 전화를 걸어 떠들어대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제주도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학교는 개학을 했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 시간은 수업시간에 맞춰 조정했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학교에서 강석원을 보는 건 요원해졌다. 원래도 학년이 달라 같은 층수가 아닌 데다 방학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강석원이 바빠진 터다. 게다가 조지현은 강석원에게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알은척하지 말아달라고 부탁까지 해뒀다. 이 말을 했을 때, 강석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썩 달가워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가진 막연한 불안을 최대한 이해해주려고 노력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강석원을 마주쳤을 때,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강석원이 정류장에서 비스듬히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안녕, 하세요.”

조지현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강석원이 응, 하고 눈으로 알은척을 한다.

“어쩐 일이세요.”

강석원이 조지현을 힐긋 본 후 혼잣말처럼 대답한다. 내일부터 춘추복 입잖아. 조지현은 한참 동안 그 말의 뜻을 알아채지 못했다.

“버스 왔다.”

강석원이 먼저 버스에 올라탔다. 먼저 버스에 오른 강석원이 조지현을 돌아본다. 그제야 깨닫는다. 두 사람이 같이 학교를 다니는 것은 올해로 끝이다. 그는 내년에 학교를 졸업한다. 내일부터 춘추복을 입으라는 공지가 내려왔다. 결국, 하복을 입은 조지현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란 뜻이다.

하복을 입은 첫날과 마지막 날.

변한 게 없는 사람이다. 

조지현은 웃음을 삼키며 버스에 올랐다.

“어, 조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조지현의 표정이 굳었다.

“조지, 너 여기서 타냐?”

최기열이 조지현을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 앉아.”

최기열이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강석원은 이미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여기 앉으라니까.”

조지현은 잠시 갈등하다가 강석원의 앞자리에 앉았다.

“새끼, 하여간 싸가지하고는.”

최기열이 가방을 가지고 와서 조지현의 옆에 털썩 앉는다.

“존나 덥지 않냐? 내일부터 춘추복 입으라는데, 미친 교장.”

최기열은 손부채질을 하며 조지현을 힐끔 쳐다보았다. 서늘한 인상 때문에 더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도 조지현의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너도 덥지?”

최기열이 책을 꺼내 조지현에게 부쳐주었다.

“됐어. 괜찮아.”

조지현은 대답하면서도 뒤에 앉은 강석원이 신경 쓰였다. 최기열과 강석원이 서로를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자기 때문에 악연으로 얽히게 된다.

“원래 이 버스 타는구나. 난 오늘 자동차 점검하러 간다고 해서 진짜 오랜만에 버스 탄 거거든. 버스도 탈 만하네.”

부잣집 아들인 최기열은 늘 비싼 외제차를 타고 등교했다. 조지현은 맥없이 그렇구나, 하고 맞장구쳤다. 

“나 성적 좀 올랐다.”

최기열이 우쭐거리며 말을 이었다. 요즘 들어 최기열은 교실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고3이잖아. 뭐, 니 말대로 언제까지 시시덕거릴 수도 없고.”

이 모든 게 다 너의 덕분이라는 듯이, 최기열은 조지현을 보며 웃어 보인다.

“축하해.”

조지현은 무감한 투로 그렇게 말하며 가방을 뒤적였다. 목덜미에 시선이 닿는다.

“영어 공부해?”

조지현의 손에 들린 영어단어장을 보며 최기열이 몸을 기댄다. 어깨가 닿았다. 소름이 돋는다. 벌어지지 않은 일이라 지금의 최기열에게는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조지현은 최기열과의 신체 접촉이 꺼려졌다.

게다가 무엇보다,

“…….”

강석원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와 등굣길에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새벽 운동을 마친 강석원이 30분가량 일찍 학교에 가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조지현은 일부러 시간을 맞춰 나가지 않았다. 그와 등교를 몇 번만 같이 해도 이목을 끌 게 당연했다. 괜한 소문에 휩쓸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같이 등교를 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서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최기열만 아니었다면 강석원의 옆에 앉아 조용히 등교했을 것이다. 비록 대화를 나누는 일은 없었겠지만, 느슨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놓친 게 안타깝다.

“너 요즘 보면 맨날 영어 공부만 하더라? 영어 항상 만점 나오잖아. 영어에 원수라도 졌냐?”

최기열이 조지현의 단어장을 보며 묻는다.

“영어는 해도 어려우니까.”

자신의 긴장을 눈치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강석원이 최기열에게 괜한 반감을 사서 싸움이라도 붙으면 큰일이니까.

“설마 고등학교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이라도 가게?”

최기열의 질문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너 지금 하는 영어, 수능 영어 아니잖아. 힉, 존나 이런 단어를 왜 외우냐? 영어 듣기도 죽어라 하더니.”

손끝이 싸늘하게 식는다. 무의식중에 미국으로의 유학을 염두에 두고 있던 자신을 들킨 기분이었다. 조지현은 황급히 단어장을 덮었다. 다른 책을 꺼내려고 하는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강석원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자신의 반응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아챘을 것이다. 흰색 하복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가 서늘하게 식는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따끔거린다. 지금이라도 그가 손을 뻗어 목을 움켜쥘 것만 같다. 사람 쥐고 흔드는 거, 여전해.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버스가 급정거를 했다. 버스기사가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창을 내리고 삿대질을 했다. 놓친 단어장은 급정거와 함께 튀어나가 빼곡히 들어찬 승객들 다리 사이로 사라진 상태였다.

“아, 젠장. 운전을 뭐 이따위로 해. 괜찮냐?”

최기열이 묻는다. 조지현은 그제야 최기열이 앞으로 쏠린 자신을 반쯤 끌어안고 있음을 깨달았다. 단어장을 신경 쓰느라 다른 것은 신경 쓰지도 못했다.

“괜찮아.”

조지현은 몸을 바로 세우며 대꾸했다. 조지현은 손으로 팔뚝을 문질렀다. 최기열의 손이 닿은 곳마다 새카만 벌레가 기어 다닌다.

“왜 그래? 모기라도 물렸어? 침 발라줄까?”

최기열이 장난스럽게 손가락에 침을 바르는 시늉을 했다. 벌레가 살을 파고든다. 조지현은 필사적으로 끔찍한 혐오를 참아냈다.

“어, 너 진짜 여기 모기 몰렸다.”

그의 손이 조지현의 목덜미 아래에 닿는다. 조지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삐익, 하는 소리와 함께 학생들이 일제히 정류장에서 내린다. 조지현은 가방을 움켜쥐고 도망을 치듯 버스에서 내렸다. 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좋지 않았다.

“조지! 같이 가!”

최기열이 뒤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조지현은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어디로든 들어가 앉고 싶었다. 지금은 그 생각만이 간절했다.

“야, 조……!”

최기열이 그를 붙들기 전에 누군가 조지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누군지 안다. 

“이거.”

그가 뭔가를 내민다. 사람들의 발자국이 여기저기 찍히고 찢어진 단어장이다. 조지현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단어장을 받아든 손이 작게 떨렸다. 식은땀이 났다. 강석원의 시선이 닿는다. 고개를 들고 그를 봐야 한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조지!”

뒤에서 최기열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지 깨닫기 전에 쿵, 하는 충격이 머리에 닿는다. 

시야가 까맣게 죽는다.

“정신이 좀 드니?”

양호 선생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켰다가 조지현은 머리를 찌르는 고통에 신음을 삼켰다.

“너 학교 오다가 쓰러진 거 알아? 저번에도 그러더니.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괜찮습니다. 단순한 빈혈입니다.”

“남자애가 빈혈이 뭐니, 빈혈이. 그렇게 말라서 그렇지. 밥 좀 잘 챙겨먹고 다녀.”

양호선생이 쯧쯧 혀를 차며 조지현의 마른 팔다리를 훑는다. 조지현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네, 하고 대꾸했다. 양호 선생은 대체로 무심한 성격이었다. 직업적인 방어기재였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친구 하나는 잘 뒀네. 저번에도 같이 왔던 애가 너 데리고 왔어.”

심장에 뜨끔, 고통이 퍼진다.

“선배님이요?”

“선배? 아니, 너랑 같은 반 애. 이름이 최, 뭐더라.”

“……, 걔만 왔나요?”

“응. 걔가 혼자 너 업고 가방도 갖다 놔 주고 갔어. 나중에 고맙다고 인사해.”

몸이 싸늘하게 식는다. 학교에서 알은척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것은 자신이다. 강석원은 최기열이 앞으로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래서 그가 자신을 업고 양호실까지 데려오도록 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이토록 가슴이 시린 것은 모두 제 이기심일 뿐이다.

“선생님, 잠깐 회의 갔다 와야 하는데 더 누워있다 갈래?”

조지현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양호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강석원을 만나면 뭐라고 하지. 그에게 말 못할 비밀들이 늘어갈 때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해진다. 베개에 고개를 묻고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커다란 손이 이마에 닿는다. 수면의 경계를 오르내리는 의식 사이로도 그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깨닫는다.

“괜찮아?”

미간을 찌푸린 채, 강석원이 묻는다. 조지현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웃어 보인다. 그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아팠는데, 얼굴을 보는 순간 기분이 느슨하게 풀렸다.

“쉬는 시간에 교실에 갔는데 안 보여서 내려와 봤어.”

너 불러달라는 말은 안 했어. 그가 변명처럼 한마디를 덧붙인다. 

미안했다. 이유도 모른 채, 그는 자신의 불안에 이리저리 휩쓸린다. 

“몇 시예요?”

“2교시 중간.”

“수업 안 들어가셔도 돼요?”

“잠시 나온 거야. 가봐야 해.”

그가 내도록 옆에 있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무심코 외로워진다.

“가지 말까.”

찰나에 스친 그 감정을 읽은 남자가 묻는다. 그는 언제나 잔인할 만큼 다정하다.

“아니요.”

조지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은 아르바이트 쉬어.”

강석원이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며 말한다. 조지현은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지현아.”

그의 음성에 지극한 감정이 실린다. 조지현은 네, 하고 시선을 마주했다.

“언제까지 모른 척해야 해.”

“…….”

“앞으로도 이런 걸 보고만 있어야 하냐고.”

조지현은 그제야 섭섭함을 느낀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강석원이 느꼈을 참괴감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강석원의 입매가 굳는다.

“사과하지 마, 나한테는.”

“…….”

강석원의 손이 조지현의 뺨에 닿는다. 그는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조지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아무도 없어, 하고 속삭인다.

“그래도요.”

강석원이 조지현의 팔을 문지른다. 최기열의 어깨가 닿았던 부분이다. 예민하게 각을 세우며 엉켜있던 세포들이 부드럽게 가라앉는다.

“수업 끝나면 학교 정류장에서 기다릴게. 데려다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조금 더 자. 목마르면 이거 마시고.”

강석원이 침대 옆에 보리 음료를 내려놓는다.

“감사합니다.”

강석원의 손이 다시 이마를 덮었다가 떨어진다. 갈게. 조지현은 작게 고갯짓했다. 양호실 문이 닫힌다. 그가 주고 간 음료수를 손에 쥐고 끌어당긴다. 몸에 피가 돌고 온기가 스몄다.

수면 아래로 침잠하는 의식 사이로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편의점 도어벨이 차랑, 하고 가볍게 흔들린다.

“어서 오세요.”

반사적으로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교복을 입은 최기열이 조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들어선다.

“안녕.”

그가 인사를 건넸다. 조지현은 간신히 목소리를 내어 어쩐 일이야, 하고 물었다.

“어쩐 일은. 편의점에 물건 사러 오지.”

그가 진열대로 걸어가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과자 코너에서 그는 조지현을 힐끔거리며 초조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다가 손에 닿는 대로 아무거나 집어서 계산대로 걸어온다.

“천사백 원입니다.”

최기열에게 돈을 받아 거스름돈을 돌려주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왜.”

“아니, 저기, 너 이거 언제 끝나? 잠깐 얘기 좀 하자.”

“끝나려면…….”

야간 타임인 최정식이 슬리퍼를 찍찍 끌며 안으로 들어왔다.

“오, 지현아.”

“……오셨어요.”

“너 몸 안 좋다며. 점장님이 안 그래도 전화해서 좀 일찍 들여보내라고 하더라. 그래서 이 형님이 특별히 생각해서 삼십 분 일찍 오셨다.”

조금도 반갑지 않은 친절이었다. 최기열이 그럼 밖에서 기다릴게, 하고는 나간다.

“친구? 같은 학교 교복 아니야?”

“친구 아닙니다.”

“어?”

조지현은 시계를 확인했다. 차라리 강석원이 오기 전에 얼른 이야기를 마치고 돌려보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그래. 얼른 와라. 시재 맞추게.”

편의점 밖으로 나오자 최기열이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다가 옷을 툭툭 털며 일어선다.

“무슨 일이야.”

“넌 사람이 왔는데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아, 젠장. 됐다. 말을 말아야지.”

최기열이 제 머리를 북북 문지르다가 입을 뗐다.

“너 여기서 알바하는 거 준성이한테 들었어. 걔가 저번에 여기 왔다가 너 봤대.”

조지현은 그래, 하고 대꾸했다. 같은 반 학생 중 하나가 커피를 사러 들렀다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조지? 하고 알은척을 한 적이 있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이후로 아무런 얘기도 없었고 학교에서 그런 말을 나눌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언제부터 일한 거야?”

“그거 물어보러 왔어?”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저번에 쓰러졌잖아. 여기서 일해서 무리하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먹는 것도 새 모이처럼 존나 조금 처먹는 놈이 무슨 알바야.”

몸을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 싫었다.

“내가 알아서 할게. 걱정해줘서 고맙다.”

최대한 감정을 담지 않고, 그러나 예의는 차려 대꾸했다.

“왜 여기서 일하는 거야?”

최기열이 묻는다.

“집 사정이 안 좋아서.”

조지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치부를 드러내자 오히려 최기열이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어? 그, 그래? 미안하다. 이런 거 물어봐서.”

그가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우리 어머니, 다른 사람 입 통해서 이런 얘기 듣는 거 싫어하셔. 자존심이 강하셔서.”

“알았어. 말 안할게.”

최기열이 짐짓 진지한 목소리를 낸다. 

“그럼 이건 비밀인 거지?”

마치 중요한 비밀을 나눠가진 동지처럼 친근하게 군다.

“그래. 난 이제 들어가 볼게. 시재 맞춰야 해.”

“집에 같이 갈래? 어차피 방향도 같고…….”

“아니. 나 어디 들렀다 가야 해.”

“이 시간에?”

“응.”

“알겠어. 하여간 새끼.”

최기열이 투덜거리며 조지현의 어깨를 두드린다. 내일 보자. 그의 인사말이 끔찍하게 들린다. 조지현은 응, 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최기열이 가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골랐다. 몸의 떨림이 멈추고 나서 안으로 들어가 최정식과 시재를 맞췄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 너 안색이 오늘도 안 좋다.”

“감사합니다.”

“그래. 내일 보자.”

조지현은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강석원이 오려면 십 분가량이 남았지만 차라리 밖에서 기다리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았다. 조지현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물을 사러 오는 강석원을 보고 최정식이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이미 다섯 번이나 질문을 한 것이다.

조지현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골목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강석원이었다.

“왜 거기 계세요? 들어오시지 않고.”

조지현은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몸은 어때.”

“괜찮습니다.”

“힘들면 말해. 내가 대신 해줄 테니까.”

“……, 됐습니다.”

강석원의 눈가에 웃음이 스친다. 그가 편의점에서 새벽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조지현은 도저히 이 농담에 이젠 웃어줄 수 없었다. 강석원은 잠잘 시간과 훈련 시간을 쪼개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나 토요일에 시합 있어.”

“어디서요?”

“부산.”

“멀리 가시네요.”

“저녁에는 돌아와.”

주말은 항상 같이 보냈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 도착하면 집에 들어가서 기다려.”

그는 조지현에게 열쇠를 하나 복사해서 건넸다. 한 번도 쓴 적은 없었지만 조지현은 그걸 부적처럼 들고 다녔다.

“네. 그럴게요.”

“조지현.”

“네?”

“누구야.”

단도직입적인 짧은 질문이 던져진다. 피가 아래로 내려앉는다. 강석원이 언제부터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조지현은 애써 평연함을 가장하고 같은 반 애요, 하고 둘러댔다.

“전에 무슨 일 있었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래?”

강석원은 조지현의 불안과 두려움을 예민하게 읽어냈다. 

“……,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강석원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의 심기가 뒤틀렸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한다. 그는 제가 느끼는 질투를 굳이 감추려 들지 않았다.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잖아.”

그가 한숨을 섞어 중얼거린다.

“죄송합니다.”

조지현은 고개를 숙였다. 강석원이 손으로 조지현의 턱을 쥐어 고개를 들게 했다. 사과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선배님.”

“왜.”

“내일, ……등교 같이 하실래요?”

조지현의 한마디에 강석원의 표정이 일순 굳는다. 그러다가 한숨을 내쉬며 제 턱을 쓸어내린다. 미치겠다. 그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조지현이 걱정스러운 듯 올려다보자, 강석원이 말한다.

“넌 진짜 가끔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어.”

“기분 상하셨습니까?”

“아니.”

너무 좋아서 탈이지.

강석원의 말에 조지현의 얼굴이 붉어진다.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이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조지현은 걸음을 옮겼다.

폭탄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침을 먹던 조지현은 숟가락을 든 채로, 물었다.

“아니, 숙현이가 전화를 해서 그렇게 부탁하더라고. 너는 학원도 안 다니고 혼자 공부하는 애가 성적이 그렇게 잘 나오는데, 분명 비법이 있지 않겠냐고.”

그녀가 기분 좋은 목소리로 재잘재잘 말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자기 아들한테도 그 비법 좀 공유하면 안 되겠냐고 통 사정을 하더라. 과외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같이 공부하면서 서로 도와주는 셈 치래. 같은 학년끼리 무슨 과외야. 참 웃기지? 얼마나 네가 부러우면 그러겠어. 너 용돈도 두둑하게 줄 테니까, 부탁한다고 몇 번이나 말하던지.”

여자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열등감을 가진 상대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상황이 기분 좋은 것이다.

“싫습니다.”

조지현은 단칼에 거절했다.

“뭐? 왜?”

어머니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는다.

걔가 저를 나중에 강간하려고 할 겁니다. 배를 걷어차고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고도,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건 모두 제 탓이라고 할 겁니다. 그래서 선배님은,

“……공부에 방해됩니다.”

조지현은 숟가락으로 밥을 떴다. 입에 넣고 씹지도 않고 삼켰다. 모래가 버석버석 씹히는 기분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만 봐주면 된다던데?”

권유인 척하고 있지만 어머니의 심사가 뒤틀렸음을 안다.

“저 그러다 성적 떨어지면 어떻게 해요. 이제 곧 고3입니다.”

어머니가 그런가? 하고 한 발 물러선다. 그녀에게 아들의 성적은 곧 자신의 불행을 가려줄 그럴싸한 명패였다.

“제 공부하기도 벅차요.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밥그릇을 모두 비워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학교에 도착하자 최기열이 어딘지 의기양양한 얼굴로 조지현을 힐끔거렸다. 

“최기열.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조지현이 다가가 그렇게 말하자 최기열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오, 최기열. 이제야 조지가 니 마음 받아주려나 보다.”

“그렇게 목을 매더니 이제 사랑이 이루어지냐?”

“미친놈들. 좆같은 소리 좀 그만해라. 내가 역겨운 호모로 보이냐.”

최기열은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린다. 조지현은 어느새 교실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최기열이 허둥지둥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구관의 계단 끝으로 갔다.

“무슨 일인데?”

어서 제가 한 일을 칭찬해달라는 투로 최기열이 묻는다.

“너희 어머니께 전화 왔었어.”

조지현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우선, 그렇게 말씀해주신 거 정말 감사하다고 생각해. 나 같은 일개 학생이 과외를 할 자격도 없는데.”

“과외 같은 건 아니야. 그리고 네가 무슨 일개 학생이냐. 전국에서 그런 등수가 나오는데.”

그건 지옥 같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대학은 이제 가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법적인 신분의 자유를 얻는 날까지만 이 성적을 유지하면 그만이다.

“너무 부담 갖지 마. 너 체력도 안 좋은데 계속 그런 데서 일할 수는 없잖아. 저번에 쓰러진 것도 그렇고.”

최기열이 조지현을 흘끔거리며 말한다. 목덜미와 턱선, 입술 등을 훑는 그의 시선에 숨길 수 없는 욕망이 서린다.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그러다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걱정되게.”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사람인양 구는 최기열을 보며 조지현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조지현은 고개를 들었다.

“내 문제니까 누구한테도 폐 끼칠 생각 없어.”

“뭐? 폐? 내가 언제 너한테……, 시발. 진짜.”

최기열이 욕설을 삼키며 짜증을 낸다. 상황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그는 금세 본성을 드러낸다.

“야, 너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그딴 식으로밖에 말을 못 하냐?”

“기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해.”

컴퓨터 프로그램같이 감정 없는 대답만 돌아오자 최기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시발, 너 진짜 내 마음 모르냐?”

최기열이 조지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조지현이 흠칫 놀라서 한걸음 뒤로 물러서자 그가 우악스럽게 손을 잡아끌었다.

“내 마음 모르냐고. 그래서 그따위로…….”

“조지현.”

낮고 단단한 음성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조지현은 물론이고 최기열까지 사색이 되었다. 최기열이 얼른 조지현의 손목을 놓는다.

“선생님께서 부르신다.”

“……네.”

조지현은 최기열에게 이 얘기는 끝난 걸로 해, 하고는 몸을 돌렸다. 남자의 너른 어깨가 보인다. 그는 아무런 말이 없다. 어디로 가는지도 묻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걷고 나서야 강석원은 멈추어 선다.

“언제까지, 모른 척해줄까.”

“…….”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까, 말해. 언제까지 내가 머저리같이 보고 있어야만 하는지.”

“……,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거짓은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최기열과 아무 일도 없다.

“선배님이 신경 쓰실 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목을 움켜쥔다. 그러고는 미술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그대로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집어삼킬 듯한 기세였다. 조지현은 놀라서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그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마치 지금 손을 놓으면 모든 것을 잃기라도 한다는 듯이.

발밑이 아득해진다. 조지현은 눈을 감고 입술을 벌려 그의 입맞춤을 고스란히 받아주었다. 간신히 입술이 떨어졌다. 

“그거 알아?”

밭은 숨을 내뱉으며 강석원이 묻는다.

“네가 나 선배님이라고 부를 때, 어떤 표정인지.”

“…….”

“네가, 그런 표정인데 어떻게 신경 쓰지 말라는 거야.” 

강석원이 천천히 숨을 삼킨다. 그의 어깨가 분노를 억누르는 방향대로 천천히 내려간다.

“지현아.”

강석원의 부름에 조지현은 겁이 더럭 났다.

다시는 보지 말자. 들릴 리 없는 음성이 머릿속을 맴돈다.

“나, 믿기는 해?”

강석원이 자신을 바라본다. 상처받은 짐승의 눈이다.

말해야 한다. 당신을 이 세상 누구보다 믿는다고,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몇 년을 존재하지도 않는 자신을 찾아 전국을 떠돌았을, 당신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강석원이 나직이 웃는다.

“교감 선생님이 너 찾더라. 가 봐.”

“……. 선배님.”

그는 항상 헤어지기 전에 그런 말들을 했다. 이따가 보자, 나중에 만나, 밤에 전화해. 다른 사람에게는 모호한 인사일 수도 있는 것들이 그에게는 모두 현실적인 약속이었다.

“먼저 갈게.”

미술실 문이 닫혔다. 

다음 주에 성적 우수자에게 교장 선생님께서 표창을 하기로 했다고 교감은 웃으며 말했다. 교감이 한참을 떠들었는데 기억에 남는 말은 거의 없었다. 수업을 받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강석원의 교실로 찾아갈까 고민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업이 끝나 있었다. 3학년 교실로 올라가니 강석원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강석원은 최기열에 대한 자신의 거리낌을 명확하게 읽고 있었다. 그냥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뚜렷한 감정의 문제임을. 최기열에 관해 그에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명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하려면 처음부터 모든 것을 털어놔야만 한다. 강석원이 과연 믿어줄까. 아니, 차라리 미친놈 취급을 받는다면 다행이다. 

모든 것을 알고도 이 끔찍한 것을 시작했느냐고,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그딴 선택을 하도록 둔 것이냐고, 강석원이 화를 낼 것이 두렵다. 소중한 시간들을 그가 모두 부정해버릴까 봐, 다시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자신을 저주할까 무섭다.

조지현은 한숨을 삼켰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강석원에게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다. 상처받은 강석원의 눈이 떠오른다. 내일은 부산에서 시합이 있다. 괜한 결과를 가져올까 걱정이 되었다. 

공중전화 부스가 눈에 들어왔다. 조지현은 동전을 넣고 강석원의 번호를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갔지만 끝내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지금쯤 체육관에 있을 시간이었다. 항상 그는 운동을 하던 도중에 와서 조지현을 집까지 바래다주고 다시 운동을 하러 가곤 했다.

강석원은 늘 최선을 다했다. 최소한 그에게 선택의 기회를 줘야 한다. 

조지현은 결심을 굳힌 후 버스에 올라탔다.

“강석원. 그만하고 들어가지? 내일 시합인데.”

강석원은 대답하지 않고 주먹을 내뻗는다. 미트를 쥔 관장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관장의 얼굴에 두려움과 기쁨이 교차한다. 타격이 더해질수록 미트를 쥔 관장은 궁지에 몰린 기분이 들었다. 링 위에서 강석원을 만나면 선수들이 느낀다는 공포가 무엇인지, 선수 출신인 그도 십분 이해하는 바였다.

미트 트레이닝을 마치고 관장이 강석원에게 물을 건넸다.

“기분 안 좋은 일 있냐?”

“없습니다.”

강석원은 물로 입술을 축였다. 수건으로 땀을 닦고 그는 다시 글러브를 꼈다. 

“살살 좀 하라니까. 체력 다 빼고 갈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관장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강석원. 누가 찾아왔는데?”

체육관 선배인 이명학이 외쳤다. 강석원이 눈을 살짝 치켜뜬다.

“누구요.”

“몰라. 너희 학교 교복 입고 있더라.”

강석원은 손에 낀 글러브를 도로 벗었다.

“후배야? 근데 사내새끼가 뭐 그렇게 생겼냐. 존나 좆 꼴리게…….”

그는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강석원의 사나운 시선이 날아들었다.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까마득한 후배인 강석원이 자신의 목을 비틀어버릴 것 같다는 느낌에 감히 입을 떼지 못했다.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강석원이 그대로 체육관을 나갔다. 

조지현은 체육관으로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다른 사람들 눈에 띄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강석원은 체육관 근처에서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건물 입구에 서 있는 조지현을 발견하고 강석원이 그에게 다가갔다.

“왔어?”

“네.”

조지현이 고개를 돌린다. 뚜렷한 색의 대비가 얼마나 선정적인 느낌을 주는지, 조지현을 통해 강석원은 알게 되었다.

“전화했는데 안 받으시더라고요.”

“미안. 연습하느라.”

“아닙니다. 내일 시합이시니까.”

조지현은 머뭇거리며 시선을 내린다. 말하기 힘든 이야기를 꺼내기 전의 버릇이다. 남자의 이마에 땀이 흘러내렸다. 조지현을 보는 것만으로도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거세게 그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강석원은 한 발 뒤로 물러선다. 그 기척을 느낀 조지현이 퍼뜩 고개를 든다. 

“시합 끝나고 돌아오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해.”

“아닙니다. 괜히 신경 쓰이게, ……얘기가 기니까 돌아오시면 천천히 하고 싶습니다.”

강석원이 그래, 하고 대답했다.

“내일 잘하세요.”

“응.”

“저번처럼, ……그러지 마시고.”

강석원이 조지현의 뺨을 손등으로 툭 건드렸다.

“그건 한 번으로 족해.”

조지현이 웃는다. 아주 짧은 찰나에 내닫는 달큼함에 현기증이 인다. 강석원은 말없이 조지현을 바라보았다. 조지현은 주변을 살핀 후에, 강석원의 손에 입술을 갖다 댔다. 닿았다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조심스러운 접촉이었다.

“믿어요. 선배님 하시는 말씀, 다.”

가슴 속 심지가 그대로 타들어갔다. 강석원이 조지현을 데리고 계단을 올랐다.

“어, 선배님.”

조지현이 당황한 듯 그를 불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3층까지 올라가 빈 사무실로 들어간 강석원은 문을 걸어 잠그고 조지현을 끌어안았다. 

“누가 오면…….”

“아무도 안 와.”

남자가 몸을 숙여 입을 맞추었다. 입속의 점막이 가볍게 떨렸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셔츠 자락을 끌어올렸다. 

“잡고 있어.”

강석원이 조지현에게 셔츠자락을 쥐어준다. 그러고는 이를 세우고 조지현의 몸에 잇자국을 새겼다. 하얀 피부에 금세 발간 울혈이 인다. 그 자국이 제법 마음에 드는지 강석원은 그 위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선배님…….”

조지현은 간신히 옷자락을 움켜쥔 채로 강석원을 불렀다. 강석원의 입술이 미끄러지듯 움직인다. 추위로 도드라진 돌기를 강석원이 한입에 품는다. 조지현이 불규칙적인 숨을 내뱉으며 강석원의 어깨를 붙들었다. 강석원의 혀가 작은 돌기를 갈작갈작 핥아 댄다. 금세 유두가 발갛게 부어오른다. 강석원이 입술을 대고 문지를 때마다 조지현은 가느다란 신음을 냈다. 차갑고 서늘해 보이는 조지현의 눈에 언뜻 열기가 어렸다. 강석원이 그걸 모를 리 없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교복바지를 헤집는다. 벌어진 바지 사이로 반쯤 부풀어 오른 성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강석원이 조지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

한 입에 아래를 삼켜낸다. 놀란 조지현이 강석원을 떼어내려고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강석원은 물러서기는커녕 한층 힘을 주어 살덩이를 빨기 시작했다. 

“선배님, 무슨, …….”

커다란 남자가 무릎을 꿇고 성기를 빨며 조지현에게 흥분했다. 조지현이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리를 뒤로 빼려 하자 남자가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아래가 통째로 삼켜지는 기분이었다. 강석원의 콧대가 음모 사이로 드나들었다. 아래에 빠듯하게 피가 몰렸다. 허리 아래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조지현은 발끝에 힘을 주어 간신히 버텨 냈다.

“선배님, 하지마세요, 제발, ……. ――하아.”

가느다란 신음이 헐떡이는 숨소리와 난잡하게 뒤엉켰다. 한껏 욕심에 사로잡힌 남자가 탐욕스럽게 살덩이를 빨았다. 조지현의 무릎이 휘청거리며 꺾였다. 혀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아래의 감각이 민감하게 곤두섰다. 남자의 입속은 놀랄 만큼 뜨거웠다. 

“그만, 아, ――.”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강석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간청했다. 선배님, 선배님, 하고 몇 번이나 강석원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더 목구멍 깊숙이 조지현의 성기를 삼켜냈다. 

“――!”

조지현의 가느다란 허리가 경련했다. 남자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조지현이 무너지듯 강석원의 앞으로 쓰러졌다. 강석원이 조지현을 한 손으로 지탱한 후, 아래에서 입을 뗐다. 미처 삼키지 못한 정액이 강석원의 입가에 새어 나왔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등으로 스윽 닦아내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흥분이 또렷하게 바지 위로 제 존재를 드러냈다. 

강석원이 손을 벽에 짚게 하고 조지현의 바지를 발치까지 끌어내렸다. 그가 바짝 다가섰다. 조지현은 아직도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골랐다. 

“괜찮아. 안 넣을게.”

낮은 음성이 다가왔다. 강석원의 몸이 닿는다. 그의 성기가 허벅지를 치대기 시작했다. 허벅지 조여 봐,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머리가 타들어갈 듯이 뜨거웠다. 누군가 올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몸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뭐든 해주고 싶었다. 강석원의 성기가 다리 사이를 드나들었다. 이미 한 차례 사정을 마쳐 민감해진 성기에 자극이 지속되자 조지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목덜미와 귓불을 차례대로 물었다 놓는다. 제 영역을 새겨놓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는 반복해서 조지현의 몸을 입안에 넣고 빨았다. 그의 집착과 불안이 비례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조지현은 제 몸을 고스란히 강석원에게 내맡겼다.

“지현아――.”

열에 들뜬 부름에 화답하듯 조지현이 허벅지를 조였다. 부드러운 살갗에 단단하게 피가 오른 성기가 질척질척, 치대며 움직였다. 허벅지가 쓰라리고 얼얼했지만 조지현은 입술을 사리물고 참아냈다. 강석원의 숨소리가 조금씩 고조되었다. 그가 조지현의 손등을 움켜쥐었다. 단련된 근육이 일시에 팽팽하게 긴장했다. 땀 냄새가 훅, 끼얹어졌다. 다리 사이로 뜨끈한 음액이 쏘아진다. 조지현의 성기와 허벅지, 엉덩이를 흠뻑 적시고도 남을 양이었다. 강석원이 허리를 추어올릴 때마다 정액이 가느다란 줄기를 이으며 내려왔다. 조지현은 숨을 몰아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발목으로 뿌연 정액줄기가 몇 가닥 이어졌다. 허벅지도, 무릎도 마찬가지였다. 수컷이 제 영역을 표시하듯 남자는 조지현의 몸에 사정했다. 강석원이 제가 입던 티셔츠를 벗어 조지현의 다리를 닦아주었다. 그러고는 조지현의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하게 했다. 남자는 아직도 열이 어릿어릿한 얼굴로 조지현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큰일 났다.”

조지현이 왜요, 하고 입술을 달싹이며 묻는다.

계속 생각날 거 같아.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 어렴풋이 한숨이 어려 있어, 조지현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지지는 마시고요.

조지현은 강석원의 어깨에 기댄 채 말했다. 토요일이 지나면 끝날 수도 있는 이 얄팍한 행복이 최대한 지속되길 바랄 뿐이었다.

「미안, 최대한 서둘러 갈게.」

부산에서 경기가 끝나고 바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협회 사람들한테 붙들리는 바람에 조금 늦게 되었다고 강석원은 거듭 사과했다.

“그럼 몇 시에 도착하세요?”

강석원의 집으로 가려고 나온 길이었지만 어차피 상관없었다.

「서울역 도착하면 8시정도 될 거야.」

“제가 서울역으로 갈까요?”

「피곤하게, 왜.」

“빨리……, 보고 싶어서요.”

말을 해놓고도 얼굴에서 열이 올라 손등으로 뺨을 몇 번이나 문질러야 했다. 강석원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혹시 전화가 끊어진 것은 아닌가 싶어 조지현은 수화기를 들고 여보세요? 하고 강석원을 불렀다.

「서울역에서 기다려.」

강석원의 나직한 음성에 간신히 떨어진 열이 다시 오른 기분이었다.

“네. 도착해서 다시 전화 드릴게요.”

조지현은 수화기를 공중전화기에 걸었다. 떨어진 동전을 챙겨서 주머니에 넣었다. 서울역까지 넉넉잡아 삼십 분이었다. 거의 한 시간이 붕 떴다. 다시 도서관으로 가기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차라리 서울역으로 가서 기다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를 타려고 신호를 기다리는데 길모퉁이에 세워진 트럭이 눈에 들어왔다. 조지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트럭 앞으로 다가갔다.

“이거 얼마예요?”

“뭐? 꽃다발? 아님 바구니?”

트럭에 걸터앉아 있던 아저씨가 물었다.

“꽃다발이요.”

“그거야 고르기 나름이지. 무슨 꽃으로 얼마큼 만드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야.”

한 번도 꽃을 사 본 적이 없어서 가늠도 되지 않았다. 조지현이 고민에 잠기자 꽃 트럭 주인이 누구한테 줄 건데? 하고 묻는다.

“애인?”

조지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걸 본 트럭 주인이 장미를 가리켰다.

“애인 줄 거면 보통 장미를 제일 많이 하니까.”

“그럼 그걸로 주세요.”

다행히 어제 알바비를 받은 돈이 있었다. 조지현은 트럭 앞에 서서 꽃 포장을 기다렸다.

“여자 친구는 좋겠어. 꽃보다 예쁘게 생긴 애인이 꽃다발 선물까지 줘서. 자, 넉넉하게 줬으니까 선물 잘하고. 만 오천 원만 줘.”

조지현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건넸다.

“꽃 선물 처음이지?”

“네.”

“그래 보여. 꽃다발 들고 가는 거 생각보다 용기가 좀 필요한 일이거든. 근데 막상 주면 왜 꽃을 선물하는지 알게 될 거야.”

트럭 주인이 오천 원짜리를 거슬러주었다. 조지현은 감사합니다, 하고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꽃을 들고 길을 건너는 동안 조지현은 트럭 주인이 한 얘기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은 흘끔거리며 쳐다본다.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조지현은 꽃다발을 아래로 내리고 걸었다.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가 올라탔다. 자리에 앉아 꽃다발을 무릎에 얹었다. 바스락, 바스락, 포장지 소리가 움직일 때마다 들렸다. 거추장스러운 건 아닌데 왠지 바짝 긴장이 되었다.

막상 주면 왜 꽃 선물을 하는지 알게 된다는 트럭 주인의 말이 떠올랐다. 강석원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조금 놀란 듯하다가 입가가 느슨하게 풀려 웃을 것이다. 눈을 감고도 그의 표정을 빠짐없이 온전하게 그려낼 수 있다.

조지현은 창가에 고개를 기댔다. 강석원의 승리를 축하해주고 싶었다. 이전에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이다. 그리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말할 생각이다. 강석원이 믿어 줄지 확신할 수 없다. 어떤 선택을 내릴지도 모른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던 그 말을, 몇 년을 앞질러 오늘 듣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도,

조지현은 꽃다발의 포장지를 반듯하게 폈다. 강석원에게는 떳떳한 마음이고 싶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거짓되지 않았음을 알리고 싶다.

버스가 대교를 건넜다. 조지현은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커다란 달이 시야에 들어온다. 문득, 그날 그곳에서 본 달이 떠오른다. 기묘한 감각이 등골을 훑는다. 조지현은 눈을 깜빡였다. 시야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불안이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 손잡이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 

빠앙――.

새하얀 헤드라이트 불빛이 달려들었다. 창백한 달이 자신을 내려다본다. 심연을 들여다보는 눈이다. 붉은 꽃잎이 바닥에 흐드러지게 핀다. 소리가 사라진다. 그대로 의식 아래로 침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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