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여자 울음소리가 들렸다. 울음에 젖은 낯선 목소리가 연신 사과했다. 조지현은 가까스로 눈을 떴다.
“지현아, 정신이 드냐?”
그렇게 묻는 남자의 낯이 매우 거칠다. 조지현은 눈을 깜박였다.
“지현아. 미안하다. 아줌마가, 정말, 어쩜 좋니.”
최기열의 어머니다. 그녀의 고운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흰색 벽이 눈에 들어온다. 병원이다. 환자복을 확인하니 강석원이 입원한 병원과 같은 곳이다. 근처에서 가장 큰 병원이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기열이가, 너무 화가 나서 자기도 모르게 그랬대.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고……, 지현아. 용서해줘.”
최기열의 어머니는 아들을 대신해 용서를 구했다. 보통의 모성애를 가진 어머니가 할 법한 일이었다.
“최기열은, 어떻게 됐습니까.”
목소리가 갈라져 있다.
“경찰서에 있다.”
아버지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한다. 조지현은 눈을 감았다 뜬다. 사건이 뒤죽박죽 얽혔지만 결국에는 하나로 합쳐진다.
“지현아, 아줌마가 이렇게 사과할게. 응? 기열이, 저렇게 해서 소년원 같은 데 가면 어떡해.”
이렇게까지 나오는 데는 분명한 증거가 남아있다는 뜻이다. 얼마 전 교장이 도내 CCTV설치 시범학교로 선정되었다는 이야기를 아침 조회시간에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도내 최초이기에 얼마나 자랑스러운지에 대해 교장은 떠들어댔다. 교장은 늘 최초와 최고에 집착했다. 누구도 그 이야기에 주목하지 않았다. 조지현 역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정도로. 아이들과 교실 뒤에서 시시덕거리던 최기열이 그 얘기를 들었을 리 만무하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애들끼리 장난치다가 그럴 수도 있지요.”
아버지가 최기열의 어머니를 안심시킨다.
“아니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조지현이 몸을 일으켰다.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날카로운 고통에 낯을 찌푸리며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장난이 아니라 고의적인 폭행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놀라서 뒤를 돌아본다.
“조지현!”
이숙현의 얼굴이 파르라니 질린다.
“최기열은 저를 강간하려고 했고 폭행했습니다. 증거는 CCTV영상으로 남아있을 겁니다.”
교실에서 있었던 일은 녹화되지 않았겠지만, 폭행에 대한 증거는 있다. 조지현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본인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죗값은 받아야 할 겁니다.”
조지현의 시선은 아버지에게 향해 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도 알 것이다.
“지현아, 기열이는…….”
“죄송합니다. 그만 나가주세요.”
이숙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아버지가 이숙현을 데리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조지현은 그대로 침대에 몸을 눕혔다. 곧 이어 아버지가 바로 들어온다.
“넌 어른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저분은 니 어머니…….”
“친구시죠.”
조지현은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깁스한 데는 오른팔뿐이었지만 온몸이 욱신거리고 열이 올랐다.
“그래, 너도 그러니까 이해를 좀…….”
“어떤 이해를 요구하시는 겁니까.”
조지현은 눈을 떴다. 불 주변에 일그러지는 공기처럼 눈앞이 어른거린다. 고통과 두려움, 분노가 한데 섞여 목구멍까지 치솟는다. 아버지에게 아들이 당한 분노는 없다. 오직 어머니의 친구에게 저지른 무례만을 신경 쓸 뿐이다.
“조지현.”
아버지가 엄한 표정을 짓는다. 조지현은 쓰게 웃었다.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사업에 문제 생기면 곤란하다고.”
아버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도 그는 어머니와는 다르게 얼굴을 붉힐 만한 양심은 가졌다.
“저 그냥 두시면 안 됩니까.”
“지현아.”
“저 그냥, ……버려주세요. 죽은 듯이 조용히 살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조지현은 고개를 숙였다. 목을 다쳤는지 움직일 때마다 식은땀이 흐를 만큼 날카로운 고통이 뼈를 쑤셨다.
할 수만 있다면 죽은 듯이, 아니 그보다 더 조용히 살 수도 있었다. 누구와 만나지 않고, 강석원과 그 안온한 세계에 속해.
한숨소리가 머리 위에서 스친다.
“네가 지금 이런저런 일로 지쳐서 그러는 거 다 이해한다. 그러니까…….”
“이해한다는 말씀 마세요.”
“지현아.”
“최기열하고도 합의할 테니까, 그냥 저 이대로 두세요. 그러면 아버지 사업도 무사히 진행되잖아요. ……제발, 좀.”
최기열을 용서한 것은 어머니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 역시 그랬다.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 최기열의 아버지와 손을 잡아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이, 누구였는지 확연히 드러난다.
“나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 나중에 연락하마.”
아버지가 옷을 챙겨 든다. 그가 뭔가 생각났는지 몸을 돌린다.
“네가 뭐라고 해도 난 니 애비다. 이런 일 생기면 결국에 나한테 연락할 수밖에 없는 거야. 그게 가족이다.”
조지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병실 문이 닫혔다.
숨을 삼켰다.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훑는다.
어떻게 하지.
무사히 넘어갔다고 생각했던 것도 돌아와 고스란히 이전의 전철을 밟는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조지현은 침대에 엎드린 채로 눈을 감았다. 자신을 싸늘하게 노려보던 강석원의 눈이 떠오른다. 눈을 감았다가 떠도 마찬가지였다. 죽을 것만 같다.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왜 이곳으로 돌아온 걸까. 왜 다시 과거에서 눈을 뜬 걸까. 미래를 바꾸지도 못할 거면, 왜 이 과정을 한 번 더 겪게 하는 걸까. 대체 왜.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결국 강석원을 떠나게 된다. 부모와의 관계도 끊어지지 않고…….
문득, 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을 스친다. 조지현은 맨발로 침대 밖으로 뛰어나갔다. 병실 문을 열고 나가니 강석원이 서 있다. 목발을 짚은 채로, 벽에 기대어. 눈을 마주치고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다.
“입원하려면 보호자 동의가 필요하다고 해서.”
강석원이 입을 뗐다.
“그래서, ……불렀어.”
그 한마디를 몹시도 고통스럽게 내뱉는다. 비참함이 그의 얼굴에 가득하다. 자식을 학대한 부모의 도움을 빌 수밖에 없었다. 실제 사촌도 아니었고 둘 다 미성년자다. 강석원은 조지현의 보호자가 되지 못한다. 어떤 의료 행위에도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안해.”
그가 고개를 숙인다.
“왜, 사과하십니까.”
“너 혼자 둬서. ……그런 짓, ……, 미안해.”
강석원이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한다. 목발을 쥔 그의 손이 떨린다. 그걸 보는 조지현은 심장이 짓이겨진다.
“미안해. ……, ……, 정말, 미안하다.”
몸을 움직이기도 힘든데 목발을 짚고, 병실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죄스러움을 곱씹으며 복도에서 서 있었을 남자를 떠올린다. 감정이, 순식간에 밀려들어 온다.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다.
“왜 선배님이 사과하세요.”
사과해야 할 당사자들은 누구도 사과하지 않는데, 강석원만이 죄책감을 느낀다.
“저는 괜찮아요. 선배님만 있으면,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
끝말이 울음으로 흔들린다. 강석원이 고개를 든다.
“저한테 사과하지 마세요. 앞으로도, 계속.”
그가 했던 말을, 그가 주었던 마음을 고스란히 돌려준다. 눈물이 눈시울을 적시고 옷깃을 적신다. 강석원이 성한 팔을 들어 조지현을 끌어안았다. 조지현은 그의 품에서 숨을 내쉰다.
이런 마음이었구나.
그때는 감히 헤아리지 못했던 남자의 마음이, 조금씩 안으로 밀려들어 깊이를 더해간다.
나한테는 사과하지 않아도 돼.
상대의 사과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프다. 그가 자신에게 느끼는 미안함이 애틋할 따름이다. 그 외의 일들은 상관없다. 상대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이미 용서해줄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조지현을 부른다. 지현아. 그 나직한 부름에 몸이 떨렸다.
자신에게 남은 일은 이제 하나뿐이다.
이 사람을, 이랬던 사람을, 그렇게 상처 입히는 일.
조지현은 강석원의 등을 움켜쥐고 가만히 울음을 삼켰다.
“또 여기 있으면 어떡해요.”
간호사가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환자가 다른 환자 병실에서 식사한다는 얘기는 처음 듣네. 자꾸 병실 비우면 안 돼요.”
조지현의 얼굴이 붉어진 채로 바로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강석원이 옆에서 바로 말을 거든다.
“젓가락질을 못합니다.”
강석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을 할 때마다 조지현은 눈 둘 데를 몰라 했다. 오른손에 깁스를 두르고 있다 하더라도 왼손으로 서툴게나마 식사는 가능한 정도였다.
“환자분도 불편하잖아요.”
“저는 양손잡이라 괜찮습니다.”
간호사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쉰다.
“그럼 식사만 하고 바로 내려가요. 병실 계속 비우면 안 돼요. 검사나 치료 받아야 하는 시간 놓치면 안 되니까.”
“알겠습니다.”
조지현이 반듯하게 대답하자 간호사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식사 맛있게 하세요, 하고 나간다.
“내일부터 혼자 먹을게요.”
강석원은 대답하지 않고 반찬을 집어 조지현의 밥 위에 얹어준다.
“혼자 할 수 있습니다.”
“싫어.”
조지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석원이 이런 말을 쓰는 것은 처음이었다.
“너 혼자 밥 먹게 두고 싶지 않아.”
“……. 그동안 혼자 잘 먹었는데요.”
조지현이 숟가락을 들었다. 강석원이 정성스럽게 얹어준 반찬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강석원이 이번에는 아예 반찬을 조지현의 입가에 가져다준다.
“입 벌려.”
무뚝뚝한 음성인데 귀가 녹을 듯이 달큼하게 들린다. 조지현은 눈을 내리깐 채로 입술을 벌렸다. 젓가락이 입술을 스친다. 밥을 넣고 같이 씹었다. 강석원도 간간이 식사를 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반찬을 집어서 먹여주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식사를 하는 데 보통 때보다 시간이 두 배나 걸렸다. 식판을 반납하고 양치를 한 다음, 조지현은 병실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왜?”
강석원의 물음에 조지현은 혹시 그가 자신의 말을 잘못 이해한 것인가 싶었다.
“그냥 여기 있어도 되잖아.”
뒤따라 붙는 말이 강석원의 분명한 이해를 알려준다.
“자꾸 병실 비우면 좀 그러니까요.”
둘 다 일 인실을 사용했다. 조지현의 병원비는 최기열의 집에서 낸다. 그뿐만이 아니라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해 뇌MRI까지 찍기로 했다.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이숙현이 한사코 검사를 권했다. 잘못된 곳이 있으면 어떡해. 눈물이 그렁그렁해 그렇게 말하는 그녀가 걱정하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아들이었다. 아들이 범죄자가 될까 봐, 누군가에게 평생 가는 상해를 입혔을까 봐, 걱정하는 것뿐이었다. 귀찮아서 그만두라고 할까 하다가 조지현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걱정을 하는 것은 이숙현뿐만이 아니었다. 머리 아프지는 않아? 속이 메스껍지는 않고?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말해야 해. 머리는 괜찮아? 조지현은 강석원이 같은 말을 그렇게 많이 반복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결국,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모든 검사를 받기로 했다.
“그럼 내가 내려갈까?”
조지현이 사용하는 병실은 강석원의 병실보다 한 층 아래였다.
“아니요. 선배님 왔다 갔다 하시기 불편하시잖아요. 그냥 계세요.”
조지현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강석원의 표정이 더럭 굳는다.
“걱정하지 마세요. 병원에만 있는데.”
강석원이 그래, 하고 대꾸한다. 표정의 변화는 없지만 우울한 기운이 스친다. 조지현은 머뭇거리다가 그럼, 하고 입을 연다.
“삼십 분만 더 있다가 갈게요.”
조지현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의 불안은 깊어진다. 조지현이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강석원은 어쩔 줄 몰라 했다. 표정 변화가 많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조지현은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아픈 데는 없어?”
강석원이 질리지도 않고 같은 질문을 한다.
“네. 괜찮습니다.”
조지현은 매번 같은 대답을 돌려주지만 조금도 지겹지 않다. 자신에게 그런 것을 물어주는 사람은, 의사를 제외하곤 강석원뿐이었다.
그가 손을 뻗어 조지현의 뺨을 어루만진다. 계단에서 구르는 바람에 상처가 남은 것이다. 강석원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때, 그렇게 끝내는 게 아니었어.”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조지현은 강석원의 손을 끌어내린다.
“어차피 다 미수에서 그친 거고, 상처는 나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대답을 듣고도 강석원은 마뜩잖은 표정이다.
조지현은 가만히 웃어 보인다.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다. 끝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속였다. 강석원과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욕심은 커졌다. 어쩌면 이렇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지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 그걸 빼앗긴 기분이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도 못하고 상의할 수도 없다. 그저 혼자 생각해내고 답을 내야 한다.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잠은 잘 자?”
강석원이 묻는다.
“네. 잘 잡니다.”
“악몽은 안 꾸고?”
“약 먹고 자면 아침에 눈 뜹니다.”
강석원은 대답하지 않고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조금씩 넘겨준다. 귀 뒤로 사락사락 넘어가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서늘하다.
“머리 감는 건 할 수 있어?”
“네.”
“세수는?”
“저 어린애 아닙니다.”
“알아.”
강석원이 대답하며 조지현의 눈 밑에 입을 맞춘다.
“2인실이 얼른 나면 좋겠는데.”
“……. 저는 금방 퇴원해요.”
“그래도.”
요란하게 구른 것치고 오른팔이 부러진 게 전부다. 지금 입원해 있는 것도 이숙현의 요구 때문이었다.
“계속 같이 있고 싶어.”
강석원은 전보다 좀 더 솔직한 속내를 말한다. 조지현은 웃으면서 저도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매일 매일 같이 있고 싶어요.”
“그럴 거야.”
간호사가 노크하고 들어왔다.
“약 드실 시간이에요. 조지현 학생도 밑에 내려가면 약 있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간호사는 약을 건네주고 바로 나갔다. 강석원은 약을 삼켰다. 물을 마시자 목울대가 움직인다. 강석원이 물을 마실 때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기갈을 느꼈다.
“저 이제 내려갈게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말했다.
“안 돼.”
강석원의 말에 조지현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직 삼십 분 안 됐어.”
조지현은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짧게 웃었다.
“왜 웃어.”
“아니요. 선배님이……, 아닙니다.”
강석원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어린 강석원이다. 늘 자신보다 크고 강해서 잊고 있지만, 어린 강석원인 것이다. 강석원이 억지를 부릴 때마다 그가 사랑스럽고 귀엽다.
“그럼 시간 채우고 가겠습니다.”
“채우고?”
강석원이 가벼운 투로 되묻는다. 조지현은 꽉 채우고 갈게요, 하고 웃으며 대꾸했다.
과거로 돌아온 이유는 아무리 알아내려 해도 알지 못한다. 하루만 더 볼 수 있다면 상관없다 생각하다가도 하루가 더 욕심이 난다. 그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강석원을 떠날 생각은 없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정해진 미래가 바싹 뒤를 따라붙는다. 사지를 포박당한 채 질질 끌려간다. 거기에 자신의 의지는 조금도 섞이지 않는 느낌이다.
조지현은 제 무력함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지현아.」
“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네. 알겠습니다.”
조지현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병실에 전화기가 놓여 있어 강석원과 자유롭게 통화를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자리에 누웠다. 통 잠이 오지 않는다. 의사에게 말을 해서 수면제 처방까지 받아서 복용 중이지만 날 선 신경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눈을 감았다.
잠결에 갉작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예민하게 신경이 곤두선다. 조지현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병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한참을 앉아서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지나치게 고요하다. 섬뜩한 예기가 등골을 쑤신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숨을 내쉬기도 어렵다. 침대 아래로 내려간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슬리퍼를 신을 새도 없이 문 앞으로 달려간다. 문을 연다. 누군가 서 있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드는 순간, 어둠 속에서 다가온 손이 목을 움켜쥔다. 컥, 하고 비명을 내지른다. 산소가 희박해지고 시야가 흐려진다.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소용없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다. 대체, 누가…….
“내 눈에 띄지 말라고 했잖아.”
낮게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온몸의 세포가 곤두선다.
“다음에 만나면 죽여 버린다고.”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
조지현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가쁜 숨을 몰아쉰다. 숨소리가 들린다. 꿈과 환상, 착시와 미래 사이에서 조지현은 익사하기 직전의 공포를 느낀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병실을 어슴푸레 밝혀준다. 어둠을 물러서게 할 환한 빛이 필요하다. 침대에서 내려서려던 조지현은 그대로 넘어지고 만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귀에 날카로운 이명이 일고 손발이 떨린다. 식은땀이 흐른다.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숨통을 조른다. 어떻게 벽까지 기어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간신히 불을 켰다. 모든 게 명확하게 보이는데도 아직도 지금 이 순간을 확신할 수 없다. 강석원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혐오와 증오가 묻어나던 그 목소리. 지금 당장 전화를 걸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 당장에라도 그는 자신에게 증오를 퍼부을 것만 같다. 단순한 악몽이라 치부할 수 없다. 이미 한 번 들었던 말이다. 자신을 바라보던 강석원의 차가운 눈이 떠오른다. 조지현은 입을 틀어막고 그대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에 미처 소화하지 못한 음식물을 쏟아낸다. 강석원이 일일이 젓가락질을 해 떠먹여 준 반찬의 잔해다. 그걸 확인하고도 조지현은 위층에 있을 남자의 감정을 확신할 수 없다. 죽을 것만 같다. 조지현은 변기를 붙들고 몇 번이나 더 토악질했다. 어떻게 하지. 간신히 비틀거리며 일어나 입을 헹궜다. 차라리 어머니에게 죽임을 당하는 악몽이 몇천 배는 낫다. 이건, 현실이다.
보고 싶다.
조지현은 눈을 감았다.
강석원이 보고 싶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존재가 간절하다. 그를 끌어안고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 순간, 인기척이 들린다. 머리카락이 쭈뼛 솟는다. 손이 덜덜 떨린다. 그대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문을 열어젖혔다.
강석원이다.
노크를 하려던 참인지 그의 손이 공중에서 멋쩍게 멈춰있다.
“선배님…….”
조지현이 멍하니 그를 부른다.
“미안. 잠 깨웠어?”
“……, 아닙니다.”
조지현은 눈을 깜빡인다. 강석원이다. 그의 눈빛은 다정하다. 아직은, 무한한 애정을 담고 자신을 내려다본다.
“어디 아파?”
강석원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는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꿈에서 들었던 남자의 목소리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눈에 띄지 마. 죽여 버릴 거니까. 잘게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춘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이 시간에.”
두려움을 누르고 애써 태연한 척 물었다.
“보고 싶어서.”
그 한마디에 칼날처럼 날이 섰던 감정들이 무너진다.
보고 싶어서.
조지현은 고개를 숙였다.
“왜.”
“……, 아닙니다.”
그가 세수를 하다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올려준다. 그의 손끝에서부터 다정함이 침범한다. 부끄럽다. 강석원을 그렇게 만든 것도 자신이고, 그 감정 또한 타당하다. 그를 두려워해선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길 건너에 서 있던 강석원이 말할 수 없을 만큼 그리워진다.
조지현이 강석원의 손을 쥔다.
“들어오세요.”
강석원이 목발을 짚고 병실 안으로 들어선다. 그와 나란히 침대에 앉았다. 강석원의 이마는 땀으로 젖어있다.
“힘드신데 다음부터는 그냥 부르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운동하는 셈 치지.”
강석원의 회복 속도는 예상보다 더디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전에 겪은 대로 흐르는 것이라면 강석원은 지금쯤 놀라울 만큼 회복되어 있어야만 했다. 그게 이전과 유일하게 다른 점이었다.
“힘드시죠?”
조지현이 물었다. 평범한 자신의 부상은 일상의 불편함뿐이지만 운동선수인 강석원은 다르다. 제어할 수 없는 몸은 그에게 불편을 넘어선 고통일 것이다.
“조금.”
강석원이 순순히 긍정한다.
“금방 나으실 겁니다.”
강석원이 말없이 웃는다. 조지현은 시계를 보았다. 새벽 세 시가 넘어 있다.
“잠이 안 오세요?”
“응.”
“어디 불편하신 거면 선생님 회진할 때 꼭 말씀하세요.”
강석원이 그게 아니고, 하면서 턱을 감싸 쥔다. 조금 쑥스러운 투로 그가 말을 잇는다.
“네가 없어서, 잠이 안 와.”
여기 보조 침대에서 내가 잘 수도 없고.
결국, 그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끔찍한 악몽이 씻겨 내린다.
“그럼 제가 선배님 병실 보조침대에서 잘게요.”
“안 돼.”
강석원의 목소리가 바로 굳는다. 고지식할 정도로 그의 연심은 두텁다. 절대 안 돼. 강석원이 조지현을 보며 한 번 더 말한다. 보조 침대에서 자는 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라고.
조지현은 고개를 돌려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악몽에 바싹 마른 입술이 그의 호흡으로 젖어간다. 입을 한껏 벌리고 그의 혀가 점막을 마음껏 휘저을 수 있도록 돕는다. 입맞춤만으로도 아래가 저릿저릿하다. 조지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강석원의 입술을 머금었다.
“지현아.”
그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는다. 조지현은 몸을 그에게 내밀어 그가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했다. 강석원이 이를 세워 조지현의 목을 물었다 놓는다. 강석원의 손이 환자복 안으로 들어온다. 순간, 맨살을 더듬던 최기열의 축축한 손길이 떠올랐다. 조지현은 저도 모르게 흠칫하고 몸을 움츠렸다.
“왜 그래?”
그 기척을 바로 알아채고 강석원이 걱정스럽게 묻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시 입을 맞추려 했지만, 강석원은 움직이지 않는다.
“너 어디 아픈 거 아니야?”
그를 속이는 것은 어렵다.
“속이 조금 안 좋은가 봅니다.”
조지현은 대충 둘러댔다. 강석원에게는 최기열이 자신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려고 했다는 정도로만 말을 해뒀다.
“의사 부를게.”
강석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지현이 강석원의 손을 붙든다.
“안 돼요. 가지 마세요.”
무의식적으로 매달리고 만다. 강석원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조지현의 곁에 앉는다.
“나 어디 안 가.”
또 마지막인 듯 초조함을 드러낸 것이다. 조지현은 조그만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침묵이 흐른다.
“이제 그거 끝난 거야?”
“네?”
“더 다치는 일은 없는 거냐고.”
“……, 다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다행이다.”
강석원이 한숨을 섞어 내뱉는 한마디가 가슴을 울린다. 누군가 다치는 일은 없지만, 자신은 강석원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몇 년 뒤 다시 만난다. 이게 정해진 규칙이다.
“선배님.”
“응.”
“만약 제가, …….”
뒷말을 잇지 못하고 조지현은 제 입술을 물었다 놓는다.
“말하기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돼.”
“…….”
“내가 뭐든 할게.”
그때와 같은 말이다.
내가 뭐든 할 테니까, 그러지 마.
그 말을 듣는 순간, 간신히 붙들었던 무언가가 뚝 부러져 그대로 도망치고 말았다. 강석원을 망쳐버릴까 봐 두려웠다.
“뭐든 하지 마세요.”
조지현은 강석원을 똑바로 보며 말한다.
“저는 선배님이 저 때문에 희생하는 거 보고 싶지 않습니다.”
“희생한 적 없어.”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다.
강석원은 단 한 번도 제가 한 일을 희생이라 여겨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전의 자신이 원망스럽다.
“네가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할게. 약속했잖아.”
“꼭 지키셔야 합니다.”
조지현의 말에 강석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여전히 어두운 조지현의 낯을 살피던 남자가 제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어울리지 않는 그의 행동에 가슴께가 간지럽다. 조지현은 손가락을 내밀었다. 손가락이 단단히 얽힌다. 가볍게 두어 번 흔든 뒤에 그가 손가락을 풀어준다.
“이제 믿어?”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석원에게 기댔다.
눈을 감았다. 길 건너에 선 남자가 보인다. 그가 이 약속을 잊지 않았길 바라며 조지현은 강석원의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좀처럼,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아침까지도 뒤척이다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전에 회진을 도는 의사에게 말하자 그가 다른 수면제를 처방해주었다. 강석원과 점심을 먹고 내려와 처방받은 약을 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느른하게 늘어졌다. 낮잠을 자겠다고 전화로 강석원에게 알린 뒤, 자리에 누웠다. 간신히 잠이 들었는데 살얼음처럼 얄팍한 수면의 경계를 바스러트린 것은 아삭거리는 청량한 소리였다.
아삭, 아삭, 아삭.
잘 익은 과육에서 껍질을 벗겨내는 달콤하고도 잔인한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상큼한 사과 냄새가 그다음이었다. 눈을 뜬 순간,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칫 젖혔다. 의자에 앉아 과도로 사과를 깎던 어머니가 깼니, 하고 눈가를 접는다. 꿈이다. 어머니가 눈앞에 나타날 리 없다. 그녀는 분명히…….
“오는 길에 사과를 좀 사 왔어. 길에서 할머니가 파시는데 너무 안돼 보이더라고. 너 사과도 좋아하고.”
열렬히 사랑받다 장막에서 은퇴한 여배우처럼 다정한 목소리다.
“과도를 안 갖고 와서 난감해 하고 있는데 옆 병실 아주머니가 빌려주시더라. 1205호 환자가 아들이라니까, 대번에 알던데? 아드님 예쁜 얼굴이 어머니를 똑 닮은 것 같다고 말이야.”
“……, 어떻게 나오신 겁니까.”
어머니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임신했을 때도 과일만 그렇게 당겨서 영락없이 딸인 줄 알았는데, 낳고 보니 딸보다 더 예쁜 아들이었지 뭐야.”
아름다운 손이 움직일 때마다 사과의 껍질이 사각사각, 농염한 과육이 살결을 드러낸다. 문이 반쯤 열린 채라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웃었다. 새카만 벌레가 온몸을 타고 기어오르는 듯했다.
“사진은 언제부터 찍어둔 거야?”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대화의 문맥이었다. 주제가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른다.
“이것도 다 네가 계획한 거야?”
모든 죄를 타인에게로 돌린다. 탁월한 자기중심적 사고다.
“어떻게 나오신 겁니까.”
조지현은 다시 물었다.
어머니는 분명 구속당한 채로 수사를 받고 재판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구속적부심 신청이라는 게 있어. 이 사람을 구속한 채로 재판하는 게 옳은지 판단해주는 거야. 너희 아버지가 정말 백방으로 이것저것을 알아보셨더라고. 너희 아빠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노래를 부르는 듯 명랑하다.
“나는 아프잖아.”
그녀가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네 말대로 엄마는 마음이 병든 사람이잖아. 아버지도 그렇게 되고, 오빠도 그렇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이니까.”
외조부와 외삼촌은 자신과 관련 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던 사람이다. 조지현은 아버지가 무엇을 근거로 그녀를 거기에 빼냈는지 알게 되었다.
“엄마, 병원 다니기로 했어. 상담도 받고 치료도 받을 거야. 약도 먹을 거고. 심신미약 상태에서 저지른 일은 법원에서 관대하게 봐준대. 이 정도 상태면 집행유예처분이라고 하시더라. 정말 고마운 일이지.”
“……, 나가세요.”
“오늘 처음 상담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정말 친절하시더라. 많이 힘드셨을 거라고, 내 얘기를 들어주셨어.”
“나가세요. 사람 부르겠습니다.”
호출 벨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런데 지현아. 그거 아니? 정신병은 유전되는 거.”
손끝이 움칫, 멈춘다.
“그래서 난 네가 걱정이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너 상담 받은 곳에서 아버지에게 연락 왔어. 공황장애, 우울증, 불안증세. 다 심각한 수준이래. 어떻게 넌 그런 것까지 날 닮았니.”
어머니의 눈이 그린 듯이 웃는다. 속이 뒤틀렸다.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사각, 사각, 얇은 사과껍질이 칼을 타고 흘러내리듯 내려온다.
“너도 치료가 필요할 것 같아.”
“……!”
“입원시키는 것도 좋을 것 같고.”
“당신 지금…….”
“당신이라고 하지 마.”
그녀가 눈을 번뜩인다.
“아이를 낳는 고통이 어떤지 알아? 온몸이 불타거나 손발이 잘리는 고통 그 다음이야. 마지막에 아이를 꺼내기 전에 의사가 메스로 내 아래를 찢어. 여자 성기를 칼로 생으로 찢는다고. 그런데도 그 아픔을 느낄 틈도 없었어. 계속 그 생각뿐이었거든.”
사과 껍질 위로 붉은 점이 흩뿌려진다. 하얀 손가락으로 쉴 새 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조지현의 동공이 경악으로 크게 번졌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칼에 베인 살점이 너덜거렸다. 뽀얀 사과의 속살에 검붉은 피가 번졌다. 어머니가 사과를 쥔 채로 조지현에게 다가왔다.
축축한 손이 뺨을 그러쥐자 피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그렇게 낳았어. 너를.”
“…….”
“그런데 네가 뭔데 그걸 없던 일로 만들어?”
소리를 지르려 하는데 머릿속이 새하얗다. 어머니의 핏줄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정신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 온몸이 떨린다.
“미성년자는 보호자 두 명의 동의만 있으면 얼마든지 정신병원에 처넣을 수 있어.”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사탕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네가 자고 있을 때, 남자 둘이 나타나서 네 사지를 붙들고 데려갈 거야. 너랑 그 더러운 새끼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나가…….”
조지현은 어머니를 밀어내려고 손을 뻗었다. 어머니가 그 손을 움켜쥔 채로 제 뺨에 부빈다.
“가여운 아가.”
서늘한 뱀이 목을 타고 올라온다. 천천히 목을 옥죄고 단단한 비늘이 일제히 일어선다. 본능적인 혐오가 숨통을 조였다.
“아니면 다른 방법도 있어. 미국 고모 댁으로 가서 공부하면 네 아픈 정신이 많이 좋아질 거야. 미국은 우리나라하고는 많이 다르니까. 네가 그동안 많이 힘들었을 텐데, 엄마가 몰라줘서 미안해.”
자애로운 목소리로 그녀는 아들을 걱정한다.
“네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다 정신이 불안해서 생긴 병이야. 그거 고칠 수 있어.”
어머니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만 같던 사실을 나약함으로 꾸며내, 법망을 빠져나올 방법을 모색했다. 동시에 그 방법으로 아들을 가두려 한다.
“미국까지 갔는데 병이 도지면 다시 데려와야겠지만.”
그녀가 측은함으로 가득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본다.
“……, 나가세요.”
“잘 생각해. 엄마 갈게.”
그녀가 조지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진득한 피가 환자복에 스민다. 발소리가, 조금씩 멀어지고 병실 문이 닫혔다.
잃어버렸던 마지막 조각 하나가 아귀를 맞춘다. 자신이 강석원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드러났다.
병실까지 계단으로 올라오면서 조지현은 수도 없이 고민했다.
도망가자고 할까. 당분간이라도 몸을 숨기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강석원도 얼마간 치료가 필요할 텐데, 그때까지만이라도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보니 강석원의 병실 앞이다. 아직 그에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사실을 털어놓으면 그는 당장에라도 나가자고 할 것이다. 그걸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다. 이중적인 마음이 난잡하게 뒤섞인다.
그래도 말은 해야 한다. 노크하려고 손을 들었을 때, 안에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린다.
“재수술해야 해.”
“나중에 받겠습니다.”
“수술이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알아? 당장 받아도 결과 장담 못해. 의사 말 못 들었어? 재활만 일 년 넘게 걸려. 재활해도 전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고.”
관장이 흥분해서 쏘아붙인다.
“대체 왜 수술을 나중에 받겠다고 고집부리는 거야? 수술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다고.”
강석원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관장이 씨발, 하고 욕을 내뱉는다.
“그 새끼 때문이지? 조지현인가 뭔가 하는 개좆같은 새끼.”
“말씀 함부로 하지 마세요.”
“함부로 안 하게 생겼어? 니가 누구 때문에 이 모양이 됐는데?”
발밑으로 피가 빠져나간다.
“정신 안 차릴래? 너 이 동네 어떤지 몰라서 그래? 가뜩이나 너 비체고 출신이라 판정 불리한 거 몰라? 드러운 소문이라도 나 봐. 시발, 너 선수생활 그걸로 끝이야.”
고개를 숙인다. 그때와 다름없다.
“운동하는 노인네들이 얼마나 고지식한데.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에 국가대표로 선발 안 되면 끝이라고.”
“선발되면 됩니다.”
“시발, 병신 새끼야. 너 지금 제대로 걸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몰라! 잘못하면 다리 병신 된다고!”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한, 강석원에게 그런 미래는 없다. 강석원은 온전하고 누구보다 강건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불안감에 가슴이 수런거린다.
“제발, 일단 재수술 받고 나중 일은 천천히 생각하자. 내가 수술비랑 재활비는 다 도와줄게. 너 지금 다른 거 신경 쓸 때가 아니야. 좆 빠지게 운동만 해도 모자란다고.”
“죄송합니다.”
“강석원 이 미친 새끼야, 진짜 사람 속 터지게 할래!”
뒷말은 듣지 않았다. 조지현은 복도를 빠져나와 비상계단으로 나갔다. 계단에 주저앉아 고개를 묻었다.
벗어나려고 할수록 운명은 더 바짝 뒤를 쫓는다. 사지를 묶고 재갈을 채워, 목줄을 묶는다. 꼼짝할 수도 없다. 어머니의 말을 강석원에게 전한다면 그는 두말하지 않고 병원을 떠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재수술이나 치료는 제대로 받지 못한다. 병원 치료는 기록이 남는 터다. 어머니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뒤쫓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다면 강석원이 할 행동은 번연하다. 무릎을 바싹 끌어안았다. 도망가고 싶다. 혼자라도 도망칠까. 강석원에게는 잠시만 있으라고 하고, 일 년만이라도 어딘가에 숨어 있으면 되지 않을까. 일 년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강석원은 이곳에서 운동하면서……. 사각, 사각, 사각. 과도가 사과의 과육을 깎아내리던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아들이 없어지고 나면 여자의 광기는 오롯이 한 사람에게 향할 것이다.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석원의 미래를 망칠 게 분명하다.
어젯밤 무표정한 얼굴로 손가락을 내밀던 강석원이 떠오른다. 네가 하지 말라는 짓은 하지 않겠다던.
미래는 바뀌어 있을까? 미래를 엿볼 방법을 알고 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까 봐 의식적으로 억눌렀던 생각이다. 잠깐이면, 아주 잠깐이면 되지 않을까. 두 번 모두 돌아왔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제발 그래야만 한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만 다른 방법은 생각할 수 없었다. 숨을 내쉬었다. 다른 생각을 몰아내고 한 가지 생각에만 집중한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강석원에게 이 모든 것을 알린다.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 이해하지 못할 일에 관해. 시작은 그 순간이다. 창밖을 내려다본다. 빛이 내렸다. 어둠을 긋던 수많은 빛, 커다란 달이 자신을 들여다본다.
순간 쿵, 하고 묵직한 것이 공기를 짓누른다. 숨이 막히고 거스를 수 없는 중력이 몸을 잡아당긴다. 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대로 바닥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바닥을 짚은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야 뺨을 스치는 서늘한 공기를 느낀다. 폐쇄된 건물 계단이라면 느끼지 못할.
조지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바닥을 짚은 손이 보인다. 두 손 모두 부러진 곳 없이 멀쩡하다. 웅성거리는 사람의 소리가 들린다.
“괜찮으세요?”
누군가 묻는다. 조지현은 눈을 깜빡인다. 흘러내린 땀 때문에 눈이 따갑다.
“갑자기 쓰러지셔서요.”
“……괜찮, …….”
길 건너에 선 그가 보인다. 이쪽으로 달려오려던 차인지, 막 차도에 발을 내딛던 순간, 그의 감정을 읽는다. 당혹, 수치, 낭패, 그리고 후회.
미래는 바뀌었을까.
그를 부르려고 입을 뗐다. 강석원이 고개를 돌린다. 무참한, 그의 무시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 바뀐 게 없다. 어째서?
조지현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넘어질 때 머리를 다쳤는지 시야가 흐릿하고 머리가 묵직하다.
“선배님!”
그를 불렀다. 차들이 가로지르는 차 사이로 강석원이 보인다.
“선배님!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외치는 소리를 무시하고 강석원이 걸어간다. 그의 걸음걸이를 보는 순간, 조지현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상하다. 자신이 알던 모습이 아니다. 자로 잰 듯이 반듯하고 규칙적인 걸음걸이에서 한참 어긋나 있다. 끔찍한 사실을 깨닫는다. 너 지금 제대로 걸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몰라! 잘못하면 다리 병신 된다고! 관장이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친다. 뭔가 분명히 잘못되었다. 강석원이 피자 박스를 들고 자신을 찾아왔을 때는 온전한 모습이었다. 자신이 과거로 돌아가기 시작한 후부터,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선배님!”
목이 찢어질 듯이 그를 다급하게 불렀다. 안 돼. 그럴 수는 없다. 어떻게 지켜내려던 사람인데. 조지현은 그를 부르며 도로를 따라 달렸다. 강석원이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이대로는 영영 그를 잃어버린다. 그를 놓치고 싶지 않다. 과거에, 자신을 애틋하게 사랑해주던 강석원도 중요하지만 길 건너의 남자를 놓을 수 없다.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심장이 타들어 간다. 미칠 것만 같다.
“선배님!!”
조지현은 도로로 뛰어들었다. 빠앙, 하는 날카로운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강석원이 자신을 돌아본다. 그의 등 뒤로 하늘을 가득 채운 별이 보인다. 커다란 달이 자신을 바라본다. 절대적인 존재가 심연을 들여다본다. 그것이 주는 경고를 이제는 명확히 알 수 있다. 벗어나서는 안 된다. 처음 그대로, 고스란히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모든 것을 망칠 것이다.
고개를 돌린 순간 새하얀 라이트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눈을 감았다.
“――!”
사방이 어둠이다.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쉬고 나서야 천천히 시야가 돌아온다. 자신이 계단 바닥에 손을 짚고 넘어진 채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병원이다. 돌아왔다. 환자복이 식은땀으로 젖어있다. 한기가 스민다. 조지현은 옷자락을 움켜쥐고 계단에 쭈그려 앉았다. 방금 자신이 본 것들을 되새긴다. 강석원의 다리. 일그러진 그의 걸음걸이.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공포가 목구멍까지 치솟는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보았다. 그에게 도망가자는 말을 하는 순간, 벌어질 일들을. 운명이 자신에게 내리는 경고다. 이미 미래는 정해져 있고, 자신은 그것을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게 뒤틀릴 것이다. 얼굴을 감싸 쥐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도망가고 싶다. 지금이라도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들에게 잡혀 정신병원에 처박힐 것만 같다. 끔찍하다. 처음이었다. 이곳으로 돌아온 게 반갑지 않은 것은. 성치 못한 다리를 갖고도 넘어진 자신을 향해 걸어오려던 강석원을 떠올리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숨을 삼켰다. 조지현은 무릎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결국에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알면서도 행한 일들이 무게를 더해 온몸을 짓누른다. 잔인한 게임이다. 더 이상 어떻게 버티어야 할지 모른다. 속이 뒤틀렸다. 누군가 뱃속에 날카로운 갈고리를 걸어 이리저리 휘두르는 느낌이었다. 조지현은 몸을 아래로 숙였다. 세상이 흔들린다. 중력이 사라진 것처럼 발밑이 무너져 내렸다.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계단에서 쓰러져 있는 조지현을 간호사가 발견했다. 여러 가지 검사를 했지만, 결과는 혈관 억제 실신이었다. 어려운 말로 설명하던 의사는 스트레스 때문입니다, 라고 간단하게 답을 내려주었다. 열이 오르고 머리가 아팠다. 꼬박 하루를 의식 없이 앓아누웠다. 생각해보니 이전에도 그랬다.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몸이 아팠다. 두 번 모두 몸이 아픈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라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이번에는 유독 더 아팠다. 몸에 과부하가 걸린 느낌이었다. 이건 모두 벌이다. 순리에 거스르려는 자에 대한 벌.
눈을 뜨자 걱정스러운 표정의 강석원과 눈이 마주친다. 정신이 들 때마다 강석원을 보았다. 환자가 다른 환자의 병실에서 나가지 않는다고 간호사가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많이 아파?”
강석원이 묻는다.
“괜찮습니다.”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물 마실래?”
“아니요.”
목이 까슬까슬하고 아프다. 편치 않은 침묵이 이어진다. 강석원은 묵묵히 조지현이 먼저 말을 건네주길 기다린다. 뭔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조지현의 상태를 정확히 살폈다. 그를 볼 낯이 없다. 조지현은 시트를 잡아당기며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의사 부를까.”
“아닙니다.”
강석원의 몸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표정을 살피려는 것이다. 들키고 싶지 않다. 조지현은 몸을 잔뜩 움츠리며 시트 안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두렵다. 이 모든 것이 강석원의 인생을 어그러트리는 과정임을 깨닫고 나자, 그의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다.
“조지현.”
강석원이 조지현을 부르며 그의 등을 가만가만 쓸어내려 준다. 전처럼 불안이 스러지지 않는다. 강석원의 손이 닿을 때마다 죄책감은 그 무게를 더해갔다.
“괜찮아.”
그의 한마디에 눈물이 울컥 치솟았다. 전혀 괜찮지 않다. 자신이 옆에 있으면, 강석원은 미래뿐만 아니라 온전한 신체까지 망치게 될 것이다. 그를 놓아줘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당장 강석원이 없는 내일을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선배님.”
갈라진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응.”
“제 얼굴 안 보고, 얼마나 지내실 수 있습니까.”
“…….”
강석원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벽을 보고 누운 상태라 강석원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일주일, 아니 고작 사흘 버티겠지.”
“…….”
“원하는 대답이야?”
그렇게 묻는 목소리에 화기가 스며있다. 강석원이 목발을 짚고 일어섰다.
“쉬어. 피곤할 텐데.”
목발이 땅을 짚는 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문이 닫힌다.
시커먼 불안감이 목 끝까지 치닫는다. 인파 속으로 사라지던 그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조지현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를 두 번 다시 놓치고 싶지 않다. 지금이라면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았을 것이다.
병실 문을 열었다.
“……!”
병실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던 강석원이 고개를 든다.
“나쁜 버릇이야, 그거.”
“…….”
“왜 자꾸 마지막인 것처럼 굴어.”
너 그러면 나 정말 미칠 거 같아. 강석원이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린다. 그의 낯이 거칠다. 하루를 꼬박 조지현의 병실에서 보낸 것이다. 조지현은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죄송합니다.”
조지현이 사과했다. 조지현은 그의 앞으로 걸어가 복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밤이 늦은 시간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대체 왜 그래.”
강석원이 묻는다.
“나 이런 거 해본 적 없어서, 정말 모르겠어. 내가 무슨 잘못 해서 그러는 거야?”
강석원의 눈빛이 초조함으로 흔들린다. 원래도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게다가 모든 주의를 조지현에게 쏟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표정, 말투, 주변의 공기. 샅샅이 살핀다. 조지현의 기분을 모를 리가 없다. 조지현의 불안과 절망, 초조함을 강석원은 모조리 읽어 낸다.
“차라리 내가 잘못한 거였으면 좋겠다.”
“…….”
“그럼 다 고칠 테니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조지현은 강석원의 손을 쥐었다. 뭔가 변하고 있었다. 미래도 지금의 현실도. 이전과는 다르다. 원래대로였으면 강석원은 지금쯤 목발 없이도 걸었어야 했다. 깨질 듯한 머리로 생각했다. 달라진 것은 하나였다. 자신이다. 강석원의 옆에서 떠나지 않을 궁리만 하는 자신이, 결국 현재와 미래를 비튼다.
강석원을 떠나야 한다. 전처럼.
지금의 상황은 아귀가 맞지 않은 채 돌아가는 톱니바퀴다. 언제 고장 날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자신이 강석원의 옆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귀퉁이가 심하게 부서지고 말 것이다.
“제가,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조지현이 고개를 숙였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턱을 쥐고 얼굴을 들게 했다.
“너 잘못한 거 없어. 앞으로 잘못할 것도 없고.”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면죄부를 주겠다는 말에 가슴이 막힌 듯이 답답하다. 그가 용서하지 못할 단 하나의 일을 알고 있다.
“내가 잘할게.”
더 이상은 없을 만큼 그는 최선을 다해놓고도 부족하다는 듯이 말한다. 강석원의 손가락이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내가 더 잘할게.”
그가 고개를 숙여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맹세의 말이 새겨진다. 그가 손목에 새겨 넣었던 여섯 자의 이름처럼.
조지현은 몸을 일으켜 강석원의 목을 끌어안았다. 입술이 겹쳐졌다. 열 때문인지 그의 입술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들어갈까.”
떨어진 입술 사이로 그가 묻는다. 조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실로 들어서자 강석원이 조지현을 벽으로 몰아세웠다. 두 사람 모두 몸이 성치 않은 상태라 잘못 닿기만 해도 시큰한 고통이 올라왔다. 그러나 그 순간은, 그것까지 염두에 둘 수 없었다. 얇은 환자복 사이로 남자의 흥분이 여실히 느껴졌다.
“뼈 아직…….”
할딱이는 숨소리가 조지현의 흥분을 담는다. 강석원이 괜찮아, 하면서 조지현의 입술을 물어뜯는다. 젖은 점막을 남자의 혀가 침범한다. 쪽쪽 소리가 날 정도로 서로의 입술을 강하게 빨았다. 돌처럼 단단한 남자의 몸이 조지현을 거세게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깁스를 한 손이 남자에게 닿았다. 조지현이 흣, 하고 신음을 삼키는 기척을 남자는 바로 알아챘다.
“손 이렇게 해.”
강석원이 조지현의 오른팔을 제 목에 두르게 했다.
“선배님도 힘드시잖아요.”
강석원은 한쪽 팔과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한 채다. 조지현은 그의 입술을 가볍게 쪽, 하고 빨아 당기며 침대로 가요, 하고 속삭였다. 강석원이 작게 한숨을 삼킨다. 조지현이 의아한 듯 눈을 치떴다.
“아까 거짓말했어.”
“…….”
“하루도 못 버텨, 나.”
강석원이 괴롭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음성으로 속삭인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래요.”
“…….”
“저도, 선배님 없이는, ……. ――.”
뒷말은 맞물리는 입술 사이로 스러진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말이었다. 강석원이 조지현을 침대에 앉혔다. 환자복은 응급상황을 대비해 탈의가 쉬워야 했다. 몇 번의 손놀림만으로도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겨낼 수 있어야 한다. 새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남자가 황홀한 숨을 내뱉으며 그 존재를 손으로 더듬어 확인했다. 아직 열이 떨어지지 않는 몸이 남자의 손이 스칠 때마다 흠칫흠칫, 움츠러들었다.
“열 있어.”
그가 몸의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린다.
“그래서 안 하실 겁니까.”
조지현이 웃으며 물었다. 강석원이 고개를 든다. 반듯한 콧대가 보인다. 복싱을 하는 선수가 갖기 힘든 코다. 그의 강함을 증명한다.
“하고 싶어.”
그가 드물게 제 솔직한 욕구를 고백한다.
“저도 하고 싶습니다.”
조지현이 웃었다.
“선배님이 제 안에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
“이번에도 적절치 못한 발언이었습니까?”
“아니.”
강석원이 무너지듯 조지현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네가 그럴 말 할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담담한 목소리가 제 열정을 고백했다. 조지현은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강석원의 입술이 목덜미를 머금는다. 강석원의 입술이 닿으면 발끝까지 저릿저릿했다. 조지현은 발가락을 움츠리며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강석원의 입술이 가슴 부근을 맴돈다. 몇 번의 접촉만으로 피가 몰린 돌기를 그가 이로 가볍게 물어 당긴다. 아, 조지현이 들뜬 신음을 흘렸다. 강석원의 혀가 돌기를 입 안에 넣고 혀를 굴린다. 하아, 아, 숨소리는 금세 베개 위로 흐트러진다. 조지현은 자신이 침대에 누워있다는 사실도 한참 뒤에나 깨달았다. 그림자가 드리운다. 거구의 남자가 조지현의 위로 올라선다.
“선배님.”
“응.”
“누우시면 제가 위로 올라가겠습니다.”
한쪽 팔과 한쪽 다리로 버티는 게 어렵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움직이는 데 제한이 있다. 공손한 말투가 남자의 욕구를 자극했다. 강석원이 낮게 숨을 내뱉는다.
“싫으세요?”
“아니.”
강석원이 웃으며 침대에 누웠다. 조지현은 그 위에 엎드리듯 몸을 숙였다. 강석원이 팔을 뻗어 조지현의 허리를 끌어당겨 제 몸에 닿게 했다.
“힘드시잖아요.”
“참는 게 더 힘들어.”
단단한 성기가 조지현의 맨살에 닿는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뺨에 입을 맞추며 나직이 말한다. 너한테 닿고 싶어. 조지현은 기꺼이 그를 끌어안았다. 입을 맞추고 혀를 섞었다. 열기가 더해졌다. 병원에 입원한 이후로 끝까지 한 적은 없었다. 서로의 몸을 더듬고 입을 맞추고 손으로 욕망을 달래주는 게 전부였다. 그조차 거의 몇 번 없었다.
조지현은 허리를 내려 강석원의 다리 사이에 제 아래를 비볐다. 강석원이 하아, 낮은 숨을 내뱉으며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입맞춤이 거칠어진다. 입구에 닿은 살덩이가 조지현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끄덕거리며 입구를 스친다. 끄트머리가 젖은 채여서 입구에 비벼지며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선배님…….”
조지현이 열에 들뜬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강석원이 눈짓으로 대답했다. 넣으셔도 돼요. 조지현의 목소리는 서늘하고 선이 분명했다. 그게 흐트러지는 순간은, 몹시 선정적이었다. 강석원이 한 손으로 조지현의 엉덩이를 움켜쥐어 벌리게 했다. 한쪽으로 벌어진 입구로 성기를 가져다 대고 그대로 박아 넣었다. 조지현이 헉, 하고 숨을 삼키며 강석원의 위로 무너지듯 쓰러진다.
“……, 뺄까.”
강석원이 묻는다. 조지현의 몸은 닿기만 해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열이 오른 상태다. 조지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더, 깊이 들어오세요.”
“힘들잖아.”
아래가 터질 듯이 흥분한 상태인데도 남자는 미동조차 없이 참아낸다. 사나운 짐승이 제가 지닌 야생성을 억누른다. 사랑스럽다.
“괜찮습니다. 아니, 좋아요.”
침대를 짚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조지현은 희미하게 웃으며 무게를 아래로 실었다. 간신히 벌어진 틈으로 남자의 성기가 깊숙이 들어간다. 강석원이 이를 사리 물었다. 조지현은 남자의 이마에, 뺨에, 턱에, 닿는 대로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좋아해요. 좋아합니다. 선배님, 정말 너무 좋아해요. 선배님, 선배님, ……. 사랑해요.
강석원이 조지현을 움켜쥔다. 억누르던 욕구가 튀어 오른다. 온몸의 피가 날뛰었다. 하루에도 몇천 번, 아니 매 순간 떠올리던 감각이다. 탐욕스럽게 조지현을 범했다. 아랫도리가 터질 듯이 흥분했다. 황홀한 욕구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본능처럼 조지현을 만지고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허리를 박아 올렸다. 조지현이 작은 동물처럼 신음하며 숨을 내뱉었다. 땀 냄새가 나는 조지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이를 세웠다.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짓씹었다. 그대로 삼켜버리고 싶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자람 없이, 모두 취하고 싶었다. 비정상적으로 범람하는 정욕에 부표 하나 없이 표류하는 기분이었다.
“선배님…….”
어스름하게 열기를 띤 음성이 강석원을 붙든다.
자신은 알고 있다. 온 세상을 돌아다닌다 하더라도 조지현의 부름에는 언제든 달려갈 것을. 평생 조지현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네 말대로 행하고 믿을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감정이 네 것이다.
강석원은 조지현을 바특하게 끌어안고 성기를 박아 넣었다. 조지현의 입에서 낮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강석원이 쥐고 흔드는 대로 조지현의 몸이 흔들렸다. 맞물린 결합부가 찌걱거리며 마찰했다. 성기가 내벽을 문지르고 압박했다. 조지현의 습한 숨이 강석원의 뺨에 닿는다. 그것만으로도 남자는 사납게 흥분한다. 뽀얗게 살이 오른 둔덕을 움켜쥐고 내리면서 허리를 쳐올렸다.
“아!”
성기가 몸을 꿰뚫는 느낌에 조지현의 동공이 커진다. 퍽, 퍽, 치골이 부드러운 둔덕을 쳐올릴 때마다 조지현의 마른 입술에서 울음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지현아. ……조지현.”
강석원의 부름에 조지현이 소리 내어 대답하지도 못하고 고갯짓만 한다. 눈물이 고인 눈에는 웃음이 어린다. 그 모습을 마주한 거구의 사내는 머리가 하얗게 터질 만큼, 흥분한다. 그는 조지현의 어깨를 쥔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위치가 뒤집혔다. 조지현의 다리를 들어 올리고 힘껏 박아 넣었다.
“아, 흐, ……읏.”
조지현의 신음이 흐트러진다. 침대에 닿은 무릎에 날카로운 고통이 치솟았지만, 신경 쓸 틈이 없다. 몸의 모든 감각이 조지현에게 향했다. 강석원은 미친 듯이 허리를 움직였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조지현은 남자의 등을 끌어안았다. 미칠 듯이 사랑스럽다. 부서진 숨결이 남자의 목덜미에 닿았다. 선배님, 사랑해요. 숨소리에 섞인 그 음성에 남자의 눈앞이 번뜩인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치미는 쾌감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몇 번이고 조지현의 구멍을 벌려 성기를 찔러 넣었다. 뜨거운 내벽이 보일락 말락 하게 벌어졌다 닫히며 강석원의 살덩이에 들러붙는다. 강석원의 턱이 단단하게 당겨진다. 그는 이를 사리 물고 있는 힘껏 조지현의 안을 파고들었다.
“아, 하아, ……아, ――.”
입술을 포개자 조지현이 허겁지겁 남자에게 입을 맞춘다. 삼일 굶은 어린아이처럼 조지현은 강석원의 입술을 빨았다. 자신이 얼마나 강석원을 좋아하는지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헐떡이면서도 입맞춤을 멈추지 않는다.
“응, 아, ……하아, 선배님……, 더…….”
체격 차이 때문에 온몸이 땀으로 젖을 만큼 힘들어하면서도 조지현은 다리를 벌렸다.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욕구가 온몸을 가득 채운다. 강석원의 단단한 성기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곳까지 치고 들어가 극점을 찌른다. 조지현이 흣, 하고 신음을 삼키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뼈가 선 것처럼 단단한 성기가 구멍의 안을 몇 번이고 찔러댔다. 조지현이 흐느끼며 사정했다. 보드라운 구멍이 벌쭉거리며 강석원의 성기를 조였다. 빳빳하게 부풀어 오른 성기가 내벽에 닿은 채로 토정했다. 울컥, 쏟아지는 뜨끈한 감각에 조지현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조지현이 숨을 내뱉을 때마다 구멍이 움칫하며 움직여 정액이 흘러내렸다. 강석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조지현은 희미하게 웃는다. 오랜만의 삽입으로 힘들었는지 뼈를 더듬을 수 있을 만큼 마른 등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더 하셔도 됩니다.”
그런데도 조지현은 강석원에게 입을 맞추며 다음 행위를 조른다. 마치 이 오늘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조지현이 이런 식으로 굴 때마다, 강석원의 가슴은 불안으로 타들어 간다.
“너 힘들어서 안 돼.”
강석원이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며 이마에 입을 맞춘다. 조지현이 아스라이 웃는다. 불쑥 치미는 불안감에 강석원은 조지현의 손을 쥐고 말했다.
“내 옆에 있어, 계속.”
조지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진다. 그러다 이내 웃음을 삼킨다. 조지현이 팔을 벌려 한껏 남자를 끌어안는다. 사랑해요. 낮은 속삭임이 뒤따른다. 강석원은 무너지듯 조지현을 안았다.
“선배님.”
얕은 수면을 흔드는 목소리에 강석원은 눈을 떴다. 조지현이 그를 가볍게 흔들어 깨운다.
“몇 시야?”
“두 시요.”
강석원이 몸을 일으켰다.
“눈 와요.”
조지현의 말에 강석원이 몸을 창가 쪽으로 돌렸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전처럼 흩날리는 눈발 수준이 아니라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이었다.
“많이 와요.”
조지현이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창가를 보며 말한다. 쭉 뻗은 조지현의 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강석원은 순간 호흡을 멈추고 그 모습을 바라본다.
“제법 쌓일 거 같죠?”
조지현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강석원은 대답 대신 시트를 들어 조지현의 어깨에 둘러준다. 내리는 눈 때문에 병실의 공기가 차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이마를 짚는다.
“열 내렸어요.”
“그러게.”
강석원의 눈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스친다.
“선배님.”
“응.”
“생일 축하드려요.”
강석원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마워, 하고 대꾸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날짜조차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선물도 못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손으로 쓴 편지를 달라고 했다. 조지현은 오른손에 깁스를 두르고 있었다.
“내년에 줘.”
강석원의 대답에 조지현은 말없이 웃었다.
“두 배로.”
“세 배로 드릴게요.”
“그래.”
강석원이 조지현의 어깨를 바싹 당겨 안는다.
“……, 죄송해요.”
“신경 쓸 거 없어.”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생일이 언제인지 정확히 나도 몰라. 어머니가 할머니께 그냥 첫눈 오는 날이라고 하셨대. 그 이듬해 첫눈이 12월 10일에 내렸고.”
그래서 12월 10일에 출생신고를 한 거야. 강석원의 설명에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났을 수도 있겠네요.”
“안 지났을 수도 있고.”
강석원이 조지현의 뺨에 입을 맞춘다.
“넌 3월이지. 3월 23일.”
“어떻게 아셨습니까.”
말해준 기억이 없었다.
“생활 기록부.”
“어떻게 보셨어요?”
“너희 담임 책상에 있던데.”
조지현은 작게 웃었다.
“그걸 왜 보세요. 걸리면 혼날 텐데.”
“궁금해서. 키, 몸무게, 이런 거 다.”
강석원의 시선이 창밖에서 내리고 있는 눈에 닿는다. 가슴이 먹먹하다.
궁금하더라고. 그냥 그런 사소한 것들이.
이전에도, 지금도, 강석원은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사소하고 작은 것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아무튼, 신경 쓰지 마. 날짜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 순간, 조지현의 표정이 굳는다. 벼락에 맞은 듯한 얼굴이다. 조지현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한참을 그대로 멍하니 있었다. 강석원의 말이 복잡하게 엉킨 생각을 가로지른다. 강석원이 걱정스러운 듯이 묻는다.
“왜 그래.”
“……, ……, 날짜.”
조지현이 혼잣말처럼 입속에서 중얼거린다.
“신경 쓸 거 없다니까.”
강석원의 말에도 조지현의 표정은 풀리지 않는다. 미간에 주름을 세운 채, 골몰히 생각하던 조지현이 고개를 들었다.
“저 내일 집에 좀 갔다 오겠습니다.”
“뭐?”
강석원이 대번에 낯을 찌푸렸다.
“안 돼.”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잠깐이면 됩니다.”
“안 돼. 너 지금 제정신이야?”
조지현은 차분하게 대꾸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별일…….”
“별일 있으면.”
강석원이 살벌한 눈을 하고 조지현의 어깨를 쥔다.
“별일 있으면 어쩔 건데.”
“선배님…….”
“별일 없을 거라고, 금방 올 거라고, 매번 그렇게 말하고 갔잖아.”
강석원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다. 새빨갛게 달군 인두가 목구멍을 지지는 듯하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감정이 가닥가닥 끊긴다.
“다치고 아픈 너 지켜보는 거, 못하겠어.”
강석원이 짓씹듯이 말을 내뱉었다.
“다른 건 내가 다 할게.”
오만할 정도로 강한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구걸한다.
“내가 다 할 테니까, ……, 이건 정말 못하겠다. 지현아.”
어깨를 쥔 손이 가늘게 떨린다. 조지현은 자신의 불안이 남자를 얼마나 휘젓는지 깨닫는다.
“다치러 가는 거 아닙니다.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니고요.”
조지현은 남자의 손을 움켜쥐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조지현.”
“혼자 안 가요. 복지 담당자한테 연락해서 같이 가자고 하겠습니다. 꼭 필요한 게 있어요.”
“같이 가. 일주일만 더 있으면 그 정도는 다닐 수 있을 거야.”
“아니에요. 시간이 없어요.”
강석원이 메마른 뺨을 쓸어내린다. 그의 눈빛이 초조하다.
“정말 중요해요.”
“너보다 중요한 거 없어.”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바닥에 제 손가락을 얽으며 말한다.
“저도,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지금 강석원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를, 그의 인생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다른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오롯이 그것에만 몰두한다.
“가지 마. 안 돼.”
조지현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는 강석원도 이번에는 한 치의 양보가 없다. 집에 가서 잘 이야기하고 오겠다고 들어갔던 조지현에게 그의 어머니는 텔레비전을 던졌다. 강석원이 같이 있지 않았다면 조지현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지도 모른다.
학교에 자퇴서를 내고 오겠다고 했을 때도 그랬다. 팔이 부러져 실려 온 조지현을 보는 순간, 강석원은 제 안에서 무언가 뚝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가까스로 붙든 감정의 둑이 무너져 우르르 쏟아졌다. 수술해야 하는데 보호자 동의서가 필요해요. 동의서가 없으면 수술을 못 합니다. 원무과의 직원은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로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결국, 자신이 한 일은 그의 부모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비참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비참하고 비참해서 숨이 막혔다. 자신이 조지현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매 순간 확인하는 기분이다.
“너 절대 못 보내.”
강석원이 조지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다. 조지현이 선배님, 하고 그를 떼어내려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움켜쥔 손에 힘을 주고 그는 낮게 속삭인다. 놓지 마. 가련하고 사랑스러운 남자를 안고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놓습니다. 절대로. 아니, 못 놓습니다.”
눈이 소록소록 쌓이는 소리가 한밤의 고요를 갈랐다.
벨을 누를까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까 고민하다가 전자를 택했다. 벨 소리가 울리고 난 뒤, 누구세요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조지현은 머뭇거리다 접니다, 하고 대꾸했다.
발소리가 들리고 문이 활짝 열린다.
“너……!”
눈을 부라리던 여자가 조지현의 뒤에 선 사람을 발견하고 표정을 갈무리한다.
“지현아. 어쩐 일이야. 퇴원한 거야?”
상냥함을 꾸며내는 것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자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잠깐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들어가도 됩니까?”
“당연하지. 이 집이 우리 집인데 왜 그런 말을 해?”
조지현은 뒤에 선 복지사에게 들어오라고 눈짓을 하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집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곳의 공기가 낯설다.
“차 한잔 하실래요?”
여자가 복지사에게 싹싹하게 말을 건넨다. 조지현은 신경 쓰지 않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간 듯 방은 엉망이었다. 뒤따라온 어머니가 어머, 하면서 부끄러운 듯 웃는다.
“아무래도 남자애라서 아무리 깔끔해도 방은 잘 안 치우더라고요. 치워줘도, 치워줘도 끝이 없어서요.”
책장은 쏟아진 상태고 바닥에는 찢어진 책과 옷으로 가득하다. 그런 말로 이 상황을 넘길 수 있다고 믿는 여자의 정신 상태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조지현은 책장을 바로 세우고 바닥에 널브러진 책을 모아서 정리했다.
“도와줄까요?”
복지사가 묻는다.
“아닙니다. 필요한 물건만 찾으면 됩니다.”
복지사는 문 앞에 서서 조지현이 물건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여자는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문 앞을 서성였다.
한참을 뒤적인 후에야 연습장을 찾을 수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책 몇 권을 더 섞어서 가방에 집어넣었다.
“이제 가도 됩니다.”
조지현이 일어서자 여자가 그의 앞을 가로막아 선다.
“지현아. 잠깐 엄마랑 얘기 좀 하자. 응? 아빠도 곧 오실 거야. 퇴근하시는 길이라고 했어. 엄마가 문자 보냈어.”
“저는 할 얘기 없습니다.”
“고모한테 전화도 다 해뒀어. 고모도 흔쾌히 허락하셨고. 너 정말 보고 싶어 하셔. 네 얘기 하니까 눈물을 글썽이시더라.”
미국으로 가지 않으면 정신병원에 처박아버리겠다고 속삭이던 여자가 이야기를 잘도 꾸며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들어온다.
“지현아. 퇴원한 거야? 병원에서 그런 연락 못 받았는데.”
“퇴원한 거 아닙니다.”
“그럼 언제 퇴원하는 거냐?”
데스크에 전화만 걸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조지현은 쓰게 웃었다. 퇴원은 닷새 뒤다. 원래는 더 일찍 할 수 있었는데 계단에서 기절한 것 때문에 이숙현이 퇴원을 미루자고 말했다. 혹시라도 조지현이 잘못될까 봐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터다.
“닷새 뒤에 합니다.”
“그래. 아빠가 그때 병원으로 가마.”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나중에 제가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조지현이 그리고, 하며 여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재판받으실 때 뵙겠습니다.”
재판은 모레였다. 조지현은 재판에서 증언하기로 했다.
“……. 그래. 그때 보자.”
여자의 얼굴이 구겨진다. 조지현이 고개를 숙이고 집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복지사가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으셔서…….”
거울 속의 얼굴은 잿빛이었다. 조지현은 괜찮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숨을 골랐다.
강석원의 반대는 굳건했다. 복지사와 같이 가겠다고 말해도 절대로 안 된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결국, 그에게 말하지 않고 병원을 나왔다. 강석원은 오늘 재활에 관한 상담과 검사 예약이 잡혀 있고, 근 두 시간가량이 걸린다고 했다.
강석원이 날짜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조지현은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왜 이곳에 돌아왔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한 번도 왜 그날에 이곳에서 눈을 떴는지는 생각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억을 잃고 다시 눈을 뜬 이후로, 이곳에서의 일과 이전의 일을 비교해서 연습장에 기록해 두었다. 연습장을 보면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몇 시인가요?”
“5시 좀 안 됐어요.”
강석원의 검사가 끝날 때까지는 여유가 남아 있었다.
“병원까지 태워다 드릴까요? 어차피 가는 길이거든요.”
복지사가 친절하게 묻는다. 조지현이 그럼, 하고 말을 이었다.
병실 문을 여는 순간, 조지현은 흠칫 숨을 삼켰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강석원이 고개를 든다.
“선배님.”
조지현은 벽시계를 확인했다. 검사가 끝난다는 시간에서 아직 사십 분이나 남아 있었다.
“검사 오늘 못 받았어. 기계가 고장 났대.”
강석원이 침대에서 내려와 다가온다. 조지현은 문을 닫았다.
“죄송합니다. 정말 중요한…….”
“중요한 게 뭔데.”
조지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강석원에게는 연습장에 관해 말할 수 없었다. 강석원의 시선이 조지현의 손에 들린 케이크 상자에 닿았다.
“케이크 사갖고 온 거야?”
단단하고 각이 진 음성은 평소와 다르게 서늘하다.
“네. 제대로 축하도 못 드려서…….”
조지현이 상자를 내밀었다. 그나마 가진 돈으로 살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선물이었다. 강석원이 케이크 상자를 받아들었다.
“이게 그렇게 중요해?”
“네?”
강석원이 케이크를 상자째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예상하지 못한 강석원의 행동에 놀란 조지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미안해. 케이크 먹을 기분이 아니라서.”
바로 사과를 하고는 강석원이 그런데, 하고 말을 잇는다.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아?”
“……, 알고 있습니다.”
강석원이 아니, 하고 나직이 말을 내뱉었다.
“넌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여기서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했다면,”
강석원의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치미는 감정을 다스리려는 듯, 그의 어깨가 천천히 오르내린다.
“저런 데에 시간을 쏟지는 않았겠지.”
“…….”
강석원이 손을 뻗어 조지현의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창밖의 세계는 내리는 눈으로 새하얗게 뒤덮인다.
“피곤할 텐데 쉬어.”
강석원이 목발을 짚고 병실을 나갈 때까지 조지현은 그를 붙들지 못했다. 눈앞이 시큰거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걸음걸이를 바로 세워주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오늘 검사 못 받았다면서요. 재수술 날짜는 잡혔어요?”
이제는 낯이 익은 간호사가 친근하게 말을 건넨다.
“아직 안 잡았습니다.”
재수술하려면 입원 날짜가 배는 길어진다. 그렇게 되면 당분간은 병원에서만 생활해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대로 조지현을 혼자 둘 수는 없다. 원래도 아슬아슬했지만 요즘 들어 조지현은 눈을 떼기도 힘들 만큼 위험해 보였다. 당분간은 옆에서 그를 지켜봐야만 한다.
“빨리 잡는 게 나을 텐데. 그나저나 지현 학생은 오늘 안 보이네요?”
저녁 시간에 아래층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은 혼자 먹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가여울 정도로 힘이 없었다. 강석원은 그러라고 대답했다. 조지현은 끝까지 집에 갔다 온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 뭐든 묻지 않고 조지현의 말에 따르겠다고 했지만, 이것만은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어머니랑 정말 닮았더라고요.”
링거를 갈아주던 간호사의 말에 강석원이 네? 하고 되물었다.
“지현 학생 어머니요. 미인이라서 눈에 확 띄던데. 친척이면 알지 않나?”
“……, 언제 왔다 갔습니까.”
“며칠 전이었는데, 나흘쯤 전인가.”
“혹시 지현이 쓰러진 날입니까.”
“어머, 그러네요. 지현 학생은 너무 말라서 걱정이야. 병원 밥도 간신히 먹던데. 그러니까 자꾸 쓰러지지.”
간호사가 링거 줄을 고정하며 불편하지는 않아요? 하고 묻는다. 강석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네, 하고 대답했다.
“그럼 주무세요.”
간호사가 문을 닫고 나갔다.
주먹을 쥔 손이 떨렸다. 어머니가 재판 전에 풀려났대요. 뭔가 법적인 절차가 그렇대요. 지나가는 식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정작 조지현은 중요한 얘기는 하나도 하지 않는다. 결국, 자신이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 조지현이 다치고 아파지고 나서야, 뭔가 일이 생겼다는 것만 간신히 아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조지현을 옆에 두고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하고 싶다. 지켜주지도 못하는 주제에 욕심만 사나워 미칠 것만 같다.
강석원은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분노를 억누르며 내도록 조지현을 지켜줄 방법을 생각했지만 마땅한 대책은 떠오르지 않는다. 한숨을 삼켰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혼자 그 무거운 짐들을 떠안고 있을 조지현을 생각하자, 우릿한 통증이 가슴을 가른다. 침대 옆에 세워둔 목발을 들었다. 웬만하면 목발 짚고 다니지 마세요. 지금 그럴 만한 상태가 아닙니다. 의사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보고 싶다. 조지현을 끌어안고, 모든 게 잘 될 거라 말해주고 싶다. 아니, 사실은 그렇게 위로하며 위안받고 싶은 것이다. 조지현이 제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싶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으로 내려가 복도를 걸었다. 짧은 거리를 걷는데도 어깨와 무릎이 욱신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상관없다. 조지현을 보면 사라질 통증이었다. 1205호 문을 열었다. 텅 빈 병실을 보고 강석원은 할 말을 잊는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욕실을 확인했지만, 마찬가지로 비어 있었다. 데스크로 가서 물었다. 혹시 1205호 환자 어디 갔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못 봤는데. 어디 잠깐 산책하러 간 거 아니에요? 간호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꾸했다. 강석원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으로 내려왔다. 병원 로비와 산책을 할 만한 곳을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가슴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이대로 사라진다면. 연락할 수 있는 수단조차 없다. 핸드폰을 만들어주겠다고 해도 조지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다고 에둘러 말하지만 그런 것은 필요 없다는 태도였다. 초조함에 입이 바싹 마른다. 어깨를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조지현을 찾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조지현!”
혹시나 하고 소리 높여 이름을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병원 주변을 샅샅이 둘러보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대로 사라진다면……. 그럴 리 없다고 자신을 달래 봐도 꾸역꾸역 치밀어 오르는 불안은 어쩌지 못한다. 거스러미가 인 입술을 물어뜯었다. 자신의 끔찍한 무능함에 진저리가 났다. 모든 것을 줘도 아깝지 않은 상대에게 무엇 하나 제대로 해줄 수 없다. 비참함은 칼끝처럼 날카롭게 폐부를 찔렀다. 숨을 쉴 때마다 무능함과 마주해야 했다. 병원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조지현의 병실로 올라갔다. 간호사에게 확인해봤지만, 여전히 보지 못했다는 답만 돌아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강석원은 병실로 올라가기로 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갈 생각이었다. 일단 경찰서에 연락하고 조지현이 갈만한 곳부터 찾아야 한다. 병실 문을 열었다.
“…….”
강석원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잠시 할 말을 잊는다.
“선배님.”
조지현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구석에 놓인 초코파이 위에 불붙은 초가 꽂혀 있다. 강석원은 말없이 다가가 초에 물을 붓는다.
“이게 뭐가 중요해.”
“…….”
조지현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초코파이를 바라본다. 화가 치밀었다.
“이까짓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강석원이 물었다. 심장이 타들어 가고, 온몸의 피가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조지현이 사라졌을지 모른다는 가정만으로도 자신은 제대로 된 사고조차 할 수 없다. 신체와 정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느낌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다. 처음 마주하는 공포였다.
“왜 자꾸 머저리처럼 굴어. 뭐가 중요한지 정말 몰라서 그래?”
“……, 중요합니다.”
조지현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는다.
“저한테는 이것도 중요합니다.”
“뭐가 중요해. 매해 돌아오는 날인데, 왜 올해 아니면 못 챙길 것처럼 구냐고!”
가장 화가 나는 부분이었다. 조지현은 항상 지금이 마지막인 것처럼 굴었다. 나쁜 버릇이라고 지적을 해줘도 마찬가지였다. 숨길 수 없는 불안이 지독한 습관처럼 그의 행동을 비틀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목을 움켜쥔다.
“어디 안 간다고 말해.”
“…….”
“나 안 떠나겠다고 약속해.”
조지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미칠 것만 같다. 바닥과 천장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어지럽다.
“왜 말을 못해.”
강석원이 조지현을 잡아 세우며 다그쳤다. 조지현은 끝까지 입을 떼지 않는다.
“어제는 놓지 않는다고 했잖아.”
“……, 놓지 않습니다.”
“그럼 떠나지 않는다고 약속해.”
“…….”
강석원이 이를 사리 문다. 폭죽을 삼킨 것처럼 극도의 감정이 혈관을 타고 폭발한다.
“나한테 진심이긴 해?!”
강석원이 조지현에게 소리 지르며 화를 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진심입니다.”
조지현이 눈을 부릅뜬다. 고개를 드는 것만으로 눈가에 고인 눈물이 뚝, 떨어진다.
“그런데 왜 약속 안 하는 건데. 말없이 어디 가지 말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야?”
강석원의 말에 조지현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자신이 정곡을 찔렀다는 사실을 강석원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한마디면 돼.”
“…….”
“어디 안 간다고 해.”
제발.
강석원이 조지현의 팔을 잡아당겨 끌어안으며 말했다.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불편한 침묵이 이끄는 진실을, 강석원은 마주한다. 피가 서늘히 식는다. 천천히 몸을 뗐다. 울음을 참으려고 짓 깨문 조지현의 입술이 엉망이다. 강석원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강석원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창밖을 보던 강석원이 그래, 하고 한마디를 던진다. 서늘한 선이 그어진다.
“알았어. 네 뜻.”
“…….”
“늦었다. 가서 자.”
“선배님, …….”
“더 할 말 있어?”
조지현은 고개를 숙였다. 강석원은 절뚝거리며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다. 조지현은 강석원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머뭇거리다가 병실을 나섰다.
강석원은 바로 문을 닫았다. 좀처럼 화를 다스릴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다. 이 모든 상황이, 벅찰 따름이다. 팔이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진 것 따위는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하지만 조지현의 저런 태도는, 도저히…….
강석원은 이를 낮게 물었다. 병실을 나서기 전 자신을 바라보던 조지현이 떠올랐다. 겁에 질린 눈을 하고, 울음을 참던 모습이.
강석원은 문을 열어젖혔다. 조지현이 서 있다. 사거리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울면서.
“할 말 있습니다.”
“…….”
“선배님은, ……, 선배님도 약속 어겼잖아요.”
“뭐?”
“선배님도, 저한테 한 약속, ……어기실 거잖아요.”
앞뒤 맞지 않는 말을 하며 조지현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약속하시고, ……, 선배님도, ……, 나 선배님, 좋아해요. 왜 안 믿습니까.”
쉴 새 없이 내리는 눈처럼, 조지현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좋아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강석원이 한숨처럼 신음하며 조지현을 끌어안았다.
“울지 마.”
“…….”
“내가 잘못했어. 나 너 울면,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는 아이를 달래듯이 조지현의 이마에, 정수리에, 닿는 대로 입을 맞추며 강석원이 속삭였다. 내가 잘못했어. 지현아. 울지 마. 조지현은 끌어안긴 채로 한참을 울었다. 울음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강석원은 결국 조지현을 데리고 침대에 앉혔다.
“화내서 미안해.”
강석원이 조지현을 끌어안고 속삭인다. 숨쉬기 힘들 만큼 바특하게 끌어안긴다. 조금의 틈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강석원을 그렇게 만든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조지현은 더욱 마음이 아프다. 절대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말은, 거짓으로도 해줄 수 없다.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 한다. 정리된 연습장을 보고 내린 정확한 결론이다.
“울지 마.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에 입을 맞추며 말한다. 방금까지 새파란 분노를 퍼붓던 남자가 난폭한 감정을 누르고 스스로 고개를 숙인다. 결국에 모든 것을 기꺼이 제 탓으로 돌리는 남자의 마음이 애달프다. 조지현은 눈을 깜빡였다. 차오르는 눈물에 금세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지금의 강석원을 일 초라도 더 오래, 자세히 보고 싶었다.
“선배님.”
조지현의 부름에 강석원이 고개를 든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됩니까.”
“뭐든.”
“오늘 선배님이랑, 한 침대에서 자고 싶습니다.”
강석원이 커다란 손바닥으로 조지현의 눈가를 닦아주며 얼마든지, 하고 대답했다. 눈물이 흐를 때마다 남자는 귀찮지도 않은지 매번 손으로 닦아주었다. 그렇게 눈물이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그는 묻는다.
“다 울었어?”
조지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물 마셔.”
강석원이 물통을 집어 들었다가 입매를 찌푸렸다. 아까 촛불에 부어버리는 바람에 물이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다.
“떠다 줄게.”
“아니요. 안 마셔도 됩니다.”
“탈수와.”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너 울렸잖아.”
“…….”
“이 정도는 하게 해줘.”
강석원이 목발을 집어 들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복도 안쪽에 있는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서 걸어왔다. 병실 앞에 서서 문을 열려는데 문득, 이대로 조지현이 사라졌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강석원은 다급히 문을 열어젖혔다. 침대에 오도카니 앉아있던 조지현이 고개를 들고 강석원을 바라본다. 눈이 내리는 창밖이 온통 하얗다. 눈이 마주치자 조지현이 희미하게 웃는다. 뜨거운 것이 마음속에 천천히 번져갔다. 강석원은 조지현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자야지.”
강석원이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말한다. 옆에서 뒤척이던 조지현이 강석원의 품으로 파고든다.
“선배님.”
“응.”
어리광 섞인 부름이 반갑다. 강석원은 조지현에게 팔을 내주었다.
“저번에 못한 거, 마저 하면 안 될까요?”
“뭘.”
“밤새 얘기하는 거요.”
첫눈이 온 날 집에 돌아가면 밤새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그날 이후로 계속 병원 신세였기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그래. 하자.”
강석원은 조지현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무슨 얘기 할까.”
“…….”
“…….”
“……. …….”
둘 다 말이 없는 편이라 처음 주제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서로 얼굴만 보고 눈만 껌뻑이던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너부터 해.”
“저부터요?”
“그래. 아무거나. 질문이라도.”
강석원의 환자복 앞자락을 만지작거리던 조지현이 그때, 하고 입을 연다.
“선배님, 편의점 오셨을 때요.”
“응.”
“컵라면 원래 안 드시지 않아요?”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는지 강석원이 조금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조지현은 그 이후로도 강석원이 컵라면을 입에 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안 먹어. 안 좋아하고.”
“그런데 왜 하필, 컵라면이었어요?”
다른 음식도 있었는데 굳이 그걸 고른 이유가 궁금했다.
“너 볼 수 있어서. 3분 동안, 계속.”
강석원의 말에 조지현의 얼굴이 붉어진다.
“사실 3분 넘겨서 매번 면이 불긴 했어. 먹는 게 고역이더라.”
웃음기 묻어나는 음성을 들으며 웃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작은 테이블에 앉아 좋아하지도 않는 라면이 익길 기다리던 남자가 떠올랐다.
강석원이 그럼 내 차례인가, 하고 말문은 연다.
“너는, 그때 왜 만나지 말자고 한 거야?”
“…….”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말이 꽤나 마음에 맺힌 모양이었다. 조지현은 그게, 하고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무서워서 그랬습니다.”
“뭐가.”
“선배님 인생, 망가트릴까 봐요.”
절대로 엮이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끌리는 마음은 어쩌지 못했다. 도망치려 했지만, 매번 마주치게 되었다. 이제야 이 모든 일이 일목요연하게 이해된다.
“싫었던 건 아니지?”
“제가 선배님을요?”
“그래.”
“그럴 리가 있습니까.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조지현의 말에 남자의 표정이 멎는다.
“언제 처음 봤는데?”
“……. 이건 그냥 넘어가면 안 되나요.”
“안 돼.”
강석원은 집요했다. 그게 그의 성실함을 뒷받침해주는 요인이었다. 조지현은 당혹감에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다가 대답했다.
“버스에서 처음 봤습니다.”
눈을 뜨고 처음 강석원을 마주친 곳은 화장실이었지만, 제대로 그를 ‘인식’한 장소는 버스였다. 아침 운동을 마치고 버스에 탄 강석원을 보며 그를 지켜주자고 다짐했다.
대답이 퍽 마음에 드는지, 강석원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렸다. 그의 표정을 보는 순간, 뱃속이 간지러웠다. 조지현은 고개를 숙인 채 강석원의 환자복만 매만졌다.
“네 차례야.”
강석원이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며 말한다.
“퇴원하시면, 뭐 하실 겁니까.”
생각해 본 적 없는지 강석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글쎄, 한다.
“영화 볼까.”
“영화요?”
“그때 못 봤잖아.”
최기열과의 약속 때문에 강석원의 영화 제안을 거절했던 게 떠올랐다. 미안했다. 자신에게는 남은 기억이 강석원한테는 사라진 것이다.
“영화 좋아하세요?”
“아니.”
“그런데 왜요?”
“그냥. 너랑 가고 싶어서.”
단순하고 솔직한 고백이 그의 깊은 연심을 담는다. 조지현은 강석원의 옷자락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켰다. 결심을 바로 세운다.
“전에 영화를 본 적이 있어요.”
최대한 에둘러 말해야 한다. 강석원에게 시간의 귀환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은 규칙에 어긋난다.
“무슨 영화.”
“제목은 기억이 안 납니다.”
계속해보라는 듯이 강석원이 조지현의 어깨를 도닥인다.
“약속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강석원이 약속? 하고 되묻는다. 조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을 하고 헤어졌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내용입니다.”
도닥이던 손이 멎는다.
“왜.”
강석원이 묻는 바를 조지현은 정확히 안다.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어떤 이유도 필요 없다. 그러지 않으면 정신병원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말도, 어머니가 당신을 해칠 수도 있다는 말도, 이제는 필요 없다. 모든 게 정해져 있고, 그것을 따라야만 한다.
자신이 이곳에서 눈을 뜬 것은 4월 3일이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억을 잃은 날이 4월 4일이다. 연습장에 정리해둔 것을 보고 간신히 기억해 냈다. 그다음 주에 김선우의 결혼식이 있던 터다.
기억을 잃은 날과 이곳에서 눈을 뜬 날이, 공교롭게도 하루 차이가 난다. 처음에는 여기에 관해서 아예 생각지도 못했다. 왜 돌아왔는지에만 골몰했을 뿐이다.
하루만 되돌릴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강석원의 인생을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4월 4일에 그렇게 소원을 빌었고 4월 3일에 눈을 떴다.
자신은 강석원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하루 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기나긴 하루다. 그동안 강석원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왜.”
강석원이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렇게 정해져 있습니다.”
“왜.”
“지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강석원의 회복 속도가 더디고 재수술을 해야 할 만큼 상황이 나빠진 데에는 자신이 너무 그의 곁에 오래 머문 탓이다. 자신이 강석원을 떠난다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였다.
“……, 왜.”
강석원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진다.
“그래야,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지현아.”
부서진 숨결이 어깨에 닿는다. 그의 숨이 뜨겁다. 그가 얼마나 당황스러워하는지 알 수 있다.
“내가 너한테 잘못했어?”
어떤 일에도 그는 먼저 자신의 잘못을 찾곤 했다. 조지현은 아닙니다, 하고 웃었다. 아니, 웃어 보이려 했다.
“선배님은 잘못 하신 거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래.”
왜 떠나야 하는지,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받아들일 수도 없을 것이다.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7년 뒤, 4월 3일 전까지는 조지현도 자기 뜻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사건이 정리된 연습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조지현은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사건은 큰 맥락에 따라 비슷하게 흐른다.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얼추 시간상의 흐름도 같다. 그러나 단 하나 예외가 존재했다. 최기열과 강석원은 얽히지 않았다. 그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강석원의 의지에 따라 발생했다. 결국, 그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선배님.”
조지현은 강석원을 바라본다.
“저 믿으세요?”
깊은 눈이다. 그의 눈빛은 늘 직설적이었다. 제 감정을 숨기거나 감추는 법이 없었다.
“믿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상대에게도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신뢰를 드러낸다.
“저도 선배님 믿습니다.”
강석원을 믿는다.
그가 빛나는 미래를 갖게 될 것을, 그의 온전한 신체를, 아름답고 강건한 그의 마음을, 진심으로 믿는다.
이전의 두 사람의 믿음은 어긋난 방향으로 흘렀다. 이제야 그것을 바로잡을 방법을 깨달았다.
“제 이야기도 믿어주셔야 합니다.”
침묵이 감돈다. 조지현은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석원이 입을 뗀다.
“어떻게 되는데.”
“네?”
“주인공.”
“……, 7년간 떨어져 지냅니다.”
7년 뒤에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이건 이미 정해진 사실이다. 그때까지 자신은 정해진 대로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강석원에게 연락하지 않는다. 그의 인생에 관여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시간은 7년 동안 겹치지 말아야 한다.
강석원이 눈을 내리감았다 뜬다. 언짢은 기색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만납니다.”
“그 뒤에는.”
“저도 모릅니다.”
7년 뒤, 4월 4일이 지나고 나서의 미래는 자신도 알지 못한다. 가져본 적 없는 미래다.
말을 하면서도 조지현은 암담했다. 강석원이 자신을 믿는다 해도 앞뒤 맞지 않고 논리도 이유도 없는 자신의 이야기까지 납득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내가 뭘 하면 되는데.”
그래서 그런 질문이 돌아왔을 때, 조지현은 퍽 당황했다.
“뭘 하면 되는 거냐고.”
조지현은 눈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선배님이 원래 하시려던 일들을 하시면 됩니다.”
재수술을 받고 운동을 다시 시작한다. 전보다 조금 늦어지긴 하겠지만,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그의 재능에 걸맞은 자리에 올라설 것이다.
“그리고.”
“그뿐입니다.”
강석원이 그래, 하고 대답한다.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난 모습에 조지현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연락은, ……, 아예 못해?”
강석원이 말끝을 흐린다.
“한 번, 편지를 쓸 겁니다.”
강석원의 답장을 기다리다가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반송 도장이 찍혀 돌아오긴 했지만, 이것도 강석원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화하겠습니다.”
강석원이 고개를 든다.
“받지는 마세요.”
“…….”
“이게 가능하다면 계속 주기적으로 이렇게 전화하겠습니다.”
이건 모험이었다.
두 사람의 인생에는 접점이 없이 흐른다. 이어지지 않는 전화. 조지현이 밤새 생각해낸 유일한 연락이었다.
“그렇지만 뭔가 문제가 생기면 이것도 그만둘 겁니다.”
“…….”
“미친 소리 같죠?”
조지현이 웃으며 물었다.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연락도 없이 7년간 떨어져 지내자는 이야기는, 강석원의 입장에서는 미친 소리일 뿐이다.
“정신병자가 꾸며낸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거 압니다.”
“…….”
강석원은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다.
“기다리시다가 저를 믿지 못하게 되거나 이 모든 게 미친 짓으로 여겨지면, 그때는 얼마든지…….”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온다. 절대로 입 밖에 담고 싶지 않은 말이다.
“……, 얼마든지 저 버리셔도 됩니다.”
눈썹에 눈물이 엉킨다. 조지현은 얼른 눈을 깜빡였다.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말해야 한다. 그래야 강석원에게 조금이라도 더 신뢰받을 수 있을 테니까.
“저는, 선배님 놓는 일 없을 겁니다.”
조지현은 강석원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놓지 않습니다. 선배님 혼자 두지 않을 겁니다.”
이 모든 일의 대전제다.
자신은 강석원을 놓지 않는다. 이 사실을, 강석원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이곳으로 돌아온 목적이다.
다시 만난 그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부분을 보게 되고, 새로운 감정을 느꼈다. 그의 나약함, 실수, 고뇌, 불안을 이제는 읽는다. 자신도 어렸던 만큼, 강석원 역시 그랬다. 그 역시 기댈 곳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강석원이 자신을 믿었으면 한다. 자신에게 기대줬으면 한다. 그래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주길 바란다.
긴 시간을 버티는 동안, 서로에 대한 그리움이 삶을 갉아먹지 않도록 믿음을 주고 싶다.
“저를 기다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다시 만난다.
그것을 위해 7년을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어지는 날짜를 통해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강석원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어제로 돌아왔다. 7년 뒤의 미래가 어찌 될지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자신의 바람대로 흐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강석원이 길을 잃거나, 중요한 것을 잃게 된다면 자신은 별이 떨어지는 날 기도할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게 해달라고.
그날 그랬던 것처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할 것이다.
몇 번이고 그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사랑하며, 사랑을 받으면서, 서로를 믿을 수 있도록.
강석원의 대답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꽂힌다. 낱낱이 자신을 살피는 것이다. 조지현은 고개를 돌리지도 눈길을 피하지도 않는다. 숨소리를 죽인 채, 그를 마주했다.
“그러면,”
강석원이 이윽고 입을 연다.
손끝이 떨린다. 그의 선고를 기다린다.
“너도 하나만 약속해.”
“네.”
“다시 만나면,”
강석원이 짓씹어 내뱉듯이 말을 잇는다.
“그때는 너 못 가.”
“…….”
“무슨 이유를 대든, 무슨 일이 있든 내 옆에 있어야 해. 절대로.”
흉포한 짐승이 이를 드러낸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상대를 갈기갈기 찢어발길 것만 같은 눈빛이다. 지독한 독점욕을 드러내면서 남자는 그걸 몇 년 뒤의 몫으로 미룬다.
조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덜덜 떨리는 손을 뒤로하고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 겁니다.”
무슨 이유가 생기든, 무슨 일이 닥치든, 그의 곁에 있을 것이다. 절대로.
그러기 위해 죽도록 그리운 마음을 버텨내고 견뎌낼 것이다.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강석원이 자신을 찾아 전국의 정신병원을 헤맸던 그 몇 년처럼.
“그럴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얼마든지, 몇 번이고, …….”
강석원이 조지현의 떨리는 손을 끌어내 움켜쥔다. 그는 조지현에 관한 것이라면 빠짐없이 모두 지켜본다.
“저는……, 선배님 겁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설득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린아이처럼 그에게 매달려 제 감정을 토해낸다.
“그때는 어디도 안 갈게요. 선배님이 저를 싫어해도, 다른 사람을 곁에 두고 싶다고 하셔도, 가지 않겠습니다.”
조지현은 강석원을 붙들었다. 강석원의 환자복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그럴 거 같아?”
강석원의 물음에 조지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지 마세요.”
“…….”
“전 선배님만 좋아할 거니까, 선배님도, …….”
말을 잇지 못했다. 강석원이 조지현을 바싹 끌어안고 입술을 겹친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하지 못한 말들이 넘나든다. 황홀하고 애틋한 마음이 넘쳐 흐른다. 난 너 아니면 안 돼. 전부, 다. 강석원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강석원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하루 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앞으로도 계속, 그를 보고 싶다. 눈앞이 뜨겁다. 강석원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데,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쉽지 않다. 열아홉의 강석원을, 서로의 전부였던 사람을, 조지현은 필사적으로 바라보았다.
“운동 계속하셔야 합니다.”
“그래.”
“약속하신 거 잊지 마세요.”
“잊지 않을게.”
강석원의 음성이 뜨겁게 젖는다. 조지현은 그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7년 뒤 다시 마주치게 되는 날을, 약속한다. 혹시 그가 잊을까 봐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강석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수롭지 않은 말들과 진심 어린 고백, 어색한 농담, 중간중간 이어지는 침묵, 그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눈이 쌓인 창가에 동살이 들기 시작할 무렵에야 조지현은 강석원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빠아아앙.
날카로운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새하얀 불빛이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눈을 감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충격이 전해진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사람들의 비명이 울렸다.
천천히 눈을 떴다. 강석원과 눈이 마주친다.
“……, 선배님.”
자신을 끌어안고 있던 남자가 그 부름에 응답하듯 눈을 감았다 뜬다.
“선배님, 왜, …….”
뜨끈한 느낌에 조지현은 제 손을 내려다본다. 피투성이다. 곧, 그것이 자신의 피가 아닌 남자의 피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선배님, 선배님, 정신 차려요. 선배님!”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구별하지 못한다. 그저 그를 붙들고 짐승처럼 울부짖을 뿐이었다. 강석원의 커다란 손이 조지현의 뺨을 덮는다. 손가락이 눈가를 닦아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울지 마.
“선배님…….”
조지현은 강석원의 손을 붙들었다. 과거에서 여기로 되돌아온 것인지, 자신이 처음부터 긴 꿈을 꾼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순간에조차 강석원은 자신을 감싸 안고 모든 것을 감내한다. 너를 죽여버릴 것 같으니까,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했던 상대를.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조지현은 그의 손을 붙들고 괜찮아요, 괜찮을 겁니다, 하고 속삭였다. 그러다 문득 그의 손목이 눈에 들어온다. 가슴이 메어온다. 변할 수 있다. 그렇게 해줘야만 한다.
“제가, 이번에는 꼭 지켜줄게요.”
조지현은 남자의 손목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손목에 보이지 않는 맹세를 새겨 넣었다.
“선배님, 지켜줄게요. 혼자 두지 않을 겁니다.”
낮은 울림이 인다. 커다란 달이 자신을 내려다본다. 그 어디에 속한다 해도 상관없다. 몇 번이고 강석원을 지킬 것이다.
조지현은 맹세를 되새기며 눈을 감았다.
별이 쏟아진다. 어둠에 긴 상흔이 그어진다.
눈을 뜨자, 자신을 내려다보던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잘 잤어?”
한숨도 자지 않은 게 분명한 얼굴을 하고, 그는 다감하게 묻는다. 자신이 방금 본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조지현은 눈을 깜빡였다. 강석원의 커다란 손이 이마를 덮는다.
“열 있네.”
약 먹어야겠다.
그는 여느 때처럼 다정한 걱정을 속삭인다. 조지현은 웃음을 삼켰다.
“저 이제 병실로 갈게요.”
그 한마디에 강석원의 표정이 흐려진다.
“걸리면 수간호사님한테 혼나요.”
조지현은 환자복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석원의 눈에 숨길 수 없는 불안이 머문다.
“선배님.”
“응.”
“아침 먹을 때 올라오면 됩니까.”
조지현의 물음에 강석원이 느슨하게 웃는다.
“올라와.”
“그럼 이따가 봬요.”
조지현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병실을 나왔다.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강석원의 손목에는 문신이 없었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얼마든지 미래는 바뀐다.
이제는 자신의 할 일만 남았다.
병실로 들어서는 조지현을 보고 강석원이 미간을 찌푸린다.
“눈 많이 와?”
“네. 제법 내리네요.”
조지현이 다가오자 강석원이 그의 옷깃에 묻은 눈을 털어준다.
“열은.”
“약 먹고 내렸습니다.”
조지현이 어디에 다녀 온지 알면서도 강석원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밥은 먹었어?”
“선배님이랑 먹을 겁니다.”
“식사 시간 지났어.”
병원의 식사는 정해진 시각에 나온다.
“그럼 한 번 더 드세요.”
조지현답지 않은 억지에 강석원은 짧게 웃었다.
“뭐 먹고 싶은데.”
“컵라면이요.”
강석원이 눈썹을 휘어 올린다. 본인도 그렇지만, 조지현도 썩 좋아하지 않는 음식임을 아는 터다.
“편의점으로 가요.”
강석원이 목발을 짚으려 했다.
“휠체어 타세요.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 목발 짚지 말라고 하신 얘기 들었습니다.”
조지현이 휠체어를 가져온다. 강석원 물끄러미 휠체어를 바라보았다.
“타세요.”
조지현이 휠체어 발판을 펴며 말한다.
“한 손으로 못 밀어.”
“밀 수 있습니다. 얼른 타세요.”
강석원이 작게 한숨 쉬며 휠체어에 탔다. 복도를 지나가는 동안 조지현에게 알은척하는 간호사들이 몇 명이나 있었다. 조지현은 반듯하게 모두 인사했다. 휠체어에 앉은 강석원이 낮게 혀를 찼다.
“그렇게 싫으세요?”
“싫어.”
“잘 보여야죠. 선배님 돌봐주실 분들인데.”
그 속에 담긴 진의를 알기에 강석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편의점이 있는 지하 1층 버튼을 눌렀다.
“뭐 드실래요?”
“아무거나 상관없어.”
“그래도 그나마 나은 거 없었어요?”
강석원은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고를 때, 제법 여러 상품을 돌아가며 가져와 결제했다.
“다 별로라.”
조지현은 짧게 웃었다.
“그럼 제가 고를게요.”
조지현은 휠체어를 테이블 앞에 세워두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컵라면을 두 개 가온 그는 비닐을 뜯어, 라면 수프를 그 안에 털어 넣었다.
“물 받아올게요.”
“뜨거운 물 조심해.”
젓가락을 가르던 강석원이 한마디 했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뜨거운 물을 받아온 컵라면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조지현은 강석원의 맞은편에 앉았다.
라면이 익길 기다리는 동안 마주 보고 앉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무릎이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강석원의 손가락이 간헐적으로 허벅지를 두드리는 모습을, 조지현은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앞에서 긴장한다. 사랑스럽다.
“다 익었다.”
강석원이 젓가락을 건네며 말한다. 그러다 문득, 눈가를 좁힌다.
“젓가락질할 수 있어?”
조지현은 오른손을 다친 상태였다.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먹으려고.”
“선배님이 먹여주실 거 아니었습니까.”
예상치 못한 조지현의 발언에 강석원이 퍽 당황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런 행동을 한 적이 없는 터다.
조지현이 가만히 웃는다. 강석원은 젓가락으로 면발을 두어 번 저어서 식힌 다음 돌돌 말아 조지현에게 건넸다. 조지현은 그걸 한 입 받아먹는다.
“입맛에 맞아?”
“아니요.”
강석원이 언뜻 인상을 찌푸린다.
“먹어보고 싶었어요.”
“왜, 굳이.”
“선배님께서 굳이 이걸 항상 드셨잖아요.”
매번 면발이 불 때까지, 강석원은 자신을 보았다고 했다. 자신도 그 시간 동안 강석원을 마음껏 보고 싶었다.
“버릴래?”
“아니요. 다 먹겠습니다.”
조지현은 강석원이 주는 대로 라면을 받아먹었다. 라면을 모두 먹고 나서 조지현은 강석원의 휠체어를 밀며 물었다.
“산책하러 가실래요?”
“산책?”
아직 눈이 오고 있었다.
“춥잖아. 감기 걸려.”
“실내로만 다녀도 돼요.”
강석원이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으로 올라가 복도를 따라 걸었다. 휠체어에 탄 강석원도 조지현도 말이 없다.
복도 창으로 눈으로 뒤덮인 풍경이 보인다. 의자가 조르륵 놓인 곳에 휠체어를 세웠다.
“집행 유예라고 합니다.”
긴 침묵을 깨고 조지현이 입을 열었다. 오늘 오전에 재판이 열렸다. 조지현은 증인으로 그 자리에 출석했다.
“초범이고 심신미약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점, 본인도 몹시 괴로워하고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 점, 가족이 선처를 탄원하는 점을 고려해…….”
판사가 읽어준 판결문을 고스란히 내뱉던 조지현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말끝을 흐린다. 이런 경우 2심에서 뒤집히는 일은 거의 없어요. 재판이 끝나고 찾아온 복지사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을 도닥인다. 그 손길에 담긴 수많은 진심이 전해진다. 잘했어. 수고했어. 고마워. 괜찮아.
조지현은 눈을 내리감았다가 뜬다.
“선배님.”
“응.”
“목마르지 않으세요? 음료수 뽑아올게요.”
“그래.”
잠깐 기다리세요, 하고는 조지현은 음료수 자판기를 찾으러 갔다. 강석원은 묵묵히 창밖을 본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본다.
“지현아.”
강석원이 그를 소리 내어 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강석원은 벽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목발도 없이 발을 내디뎠다가 날카로운 통증이 다리를 타고 올라온다. 균형을 잃고 그대로 넘어졌다. 우당탕, 하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선배님!”
그때 조지현이 넘어진 강석원을 발견하고 복도 끝에서 달려온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조지현이 놀란 얼굴로 그를 부축해 일으킨다.
“왜 갑자기 일어나셨어요.”
강석원은 대답 대신 조지현의 손을 우악스럽게 움켜쥔다. 조지현이 윽, 하고 낯을 찌푸리자 강석원은 그제야 놀라서 손을 거둔다.
“미안.”
“아닙니다.”
잠깐의 부재에도 불안을 참지 못한다. 이 짧은 거리도 제대로 걷지 못한다. 불현듯 깨닫는 두 가지 사실에 조지현은 피가 서늘히 식는 기분이었다. 강석원을 다시 앉히고 그를 살폈다.
“다치신 데 없어요?”
“없어.”
강석원은 아직도 조지현의 손을 놓지 못한다. 버림받은 아이 같은 표정이다. 조지현은 붙들린 채로 그의 옆에 앉는다.
“음료수 드실래요?”
“그래.”
대답하는 중에도 강석원은 조지현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조지현은 주머니에서 음료수 두 캔을 꺼내 강석원에게 건넸다.
“이거 선배님이 저 처음에 주신 음료수예요. 기억나세요?”
강석원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저 다시 주시면 안 될까요.”
강석원이 받은 것 중 하나의 고리를 뜯어 조지현에게 건넸다. 조지현은 음료수를 받아들었다. 그때는 차마 마시지 못했던 음료수를 한 모금씩, 나누어 마셨다. 달큼한 향이 입술에 감돈다.
“눈 많이 오네요.”
“…….”
“밤새 내릴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대화를 하는 중에도 강석원의 시선은 조지현에게만 향해 있다. 잠시도 눈을 떼는 법이 없었다.
“올라갈까요?”
“응.”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조지현은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는다.
강석원의 병실로 가는 도중에 간호사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강석원 씨. 수술 때문에 오늘 선생님하고 외래 상담 있는 거 잊으셨어요?”
강석원과 조지현은 한 살 차이였지만 모두 그에게는 자연스럽게 존칭을 사용했다.
“죄송합니다.”
강석원이 변명 없이 바로 사과했다.
“지금 가셔야 해요.”
“죄송한데 혹시 저 대신 환자분 좀 데려다주실 수 없나요?”
조지현의 말에 강석원이 눈을 치뜨고 고개를 돌렸다. 보호자가 없는 강석원의 사정을 아는 간호사가 순순히 휠체어의 손잡이를 건네받았다.
“어디 가려고.”
그렇게 묻는 강석원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다.
“서류 정리할 게 좀 있어요.”
“…….”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강석원은 조지현을 힐끗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의사와 상담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의사는 왜 수술을 해야 하는지, 어떤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는지, 수술에 관한 장단점을 비관적인 논조로 차분하게 설명했다. 제대로 걷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도 강석원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조지현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일 초라도 빨리 상담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수술 일정을 잡고 외래 상담을 마칠 수 있었다.
“환자분. 지금 다른 환자가 많아서 이동하시는 데 좀 기다려주셔야 할 것 같아요.”
데스크의 간호사가 조금 곤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목발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어깨 때문에 목발 못 짚으시는 거 아니에요? 안 될 텐데.”
간호사가 강석원의 상태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결국, 강석원은 데스크에서 목발을 빌려 13층으로 올라갔다. 복도를 걷는 것만으로도 진땀이 흘렀다. 하지만 걷는 속도를 늦출 수 없다. 할 수만 있으면 달리고 싶었다. 당장 달려가 조지현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7년 뒤에 만나자는 약속을 했지만, 아직 그와 작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아니, 영원히 준비는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병실에서 기다린다고 말은 했지만, 가버렸을지도 모른다. 언제 떠날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같이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잠시간의 부재도 견딜 수 없는데 7년을 견뎌내라는 말은 가혹한 형벌이었다. 병실 앞에 도착했다. 문고리를 잡고 열려는데 손이 멈칫한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조지현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다시는 볼 수 없다면, 7년의 세월이 아니라, 영원히 보지 못하는 거라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두려움이 이성을 마비시킨다. 손끝부터 몸이 차갑게 식어간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조지현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강석원은 손잡이를 움켜쥐고 문을 열어젖혔다.
침대에 걸터앉아 창가를 바라보던 조지현이 고개를 돌린다. 눈이 마주치자 조지현이 가느스름한 웃음을 짓는다.
강석원은 깨닫는다. 자신에게 조지현이 어떤 의미인지.
너를 잃어버리는 날이 오면 나는 너를 평생을 찾아 헤매겠지.
몇 년이 걸리든, 반드시.
강석원은 천천히 조지현에게 다가갔다.
“생각보다 금방 끝나셨네요, ……어, 왜 목발 짚고 오셨어요. 휠체어는요?”
“고장 났어.”
강석원은 목발을 침대 옆에 던져두고 조지현 옆에 앉았다.
“본인이 거짓말 못 하시는 거 아시죠?”
강석원이 대답 없이 입가를 당겨 웃는다. 조지현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쉰다.
“무리하지 마세요. 걱정됩니다.”
“그래.”
“수술 일정은 잡으셨어요?”
“응.”
“잘됐네요.”
조지현이 다시 창가로 시선을 돌린다. 눈 멈췄어요. 어딘지 쓸쓸한 말투로 조지현이 중얼거린다.
“눈이 많이 쌓였으면 좋겠어?”
강석원의 물음에 조지현이 눈을 살짝 치뜬다. 조금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는데 의아한 반응이었다.
“……, 잘 모르겠습니다.”
조지현이 어물거리며 말을 잇는다.
“그냥, 문득 제주도 갔던 생각이 나서요.”
갑자기 기상청도 예측하지 못한 태풍이 진로 변화 때문에 두 사람은 제주도에 발이 묶였었다.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또 가자.”
조지현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턱을 쥐고 당겼다. 입술이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진다. 아슬아슬한 간극이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두 사람은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초조함에 바싹 타버린 입술을 조지현이 빨면서 남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강석원의 조지현의 외투 속으로 손을 넣고 셔츠의 단추를 풀다가 마뜩잖은 듯 혀를 찼다.
“죄송합니다.”
웃음기 묻어나는 조지현의 사과에 강석원이 뭐가, 하고 묻는다.
“환자복 아니라서요.”
상의든 하의든 환자복은 탈의가 쉬웠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볍게 툭, 갖다 대며 속삭였다.
“가서 갈아입고 와.”
법원에 갔다 오느라 조지현은 아직도 외출복 차림이었다. 조지현이 순순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선배님.”
병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조지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부른다.
“응.”
“나중에 봬요.”
“그래.”
문이 닫힌다. 강석원은 침대에 기대어 누웠다. 목발을 짚고 걸었던 터라 아직도 어깨가 저릿저릿했다. 무릎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받아둔 진통제를 찾으려고 서랍을 뒤적이던 강석원은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숨을 삼킨다. 테이블에 놓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1205호로 내선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들린다. 받아야 한다, 받을 것이다. 초조하게 전화기를 움켜쥐고 반복되는 신호음을 들었다. 한참을 수화기를 들고 있었지만, 결국 통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강석원은 아까 던져둔 목발을 들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참지 못하고 비상계단으로 발길을 돌렸다. 계단을 내디딜 때마다 날카로운 고통이 무릎을 타고 올라왔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중에는 목발을 짚지도 않고 달렸다. 다리를 다시는 쓰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1205 병실 문을 열었다. 완벽하게 정리된 침대를 보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다. 그 어디에도 조지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데스크로 달려갔다. 지현이, 아니 1205호 환자 어디 있습니까. 1205호 환자요? 오늘 오전에 퇴원하셨는데요? 간호사가 의아하다는 듯이 대답한다.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닙니까. 아니에요. 원래는 사흘 뒤인데 오늘로 당겨서 퇴원하신 거 맞아요. 방금까지만 해도 있었습니다. 강석원의 언성이 높아지자 간호사가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강석원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눌렀다. 부탁드립니다. 한 번만 더 확인해주세요. 간호사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키보드를 두드린다. 맞아요. 1205호 조지현 환자. 오늘 퇴원했어요. 그녀가 모니터를 돌려서 보여준다. 강석원은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꼼짝도 하지 못하고 모니터를 바라보기만 했다. 뭐, 더 필요하신 거 없으시죠? 간호사가 불안한 눈으로 그에게 묻는다. 없습니다. 가까스로 대답했다. 머릿속이 텅 빈다. 나중에 봬요. 조지현은 그렇게 말했다. 이따가 보자든가, 저녁 시간에 보자고 말했어야 옳다. 나중에, 봬요. 너무나 긴 약속이다. 어떻게 버텨내야 할지, 무슨 생각으로 기다려야 할지, 준비도 없이 조지현을 보냈다.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소년은 기다리라고 말했다. 자신을 믿어달라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그 어떤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놓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와 눈빛은 진실했다. 소년을 믿는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당연한 권리다. 그런데도 이건, 참담하기 그지없다. 온몸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몸부림친다. 숨을 내쉴 때마다 목구멍이 찢어지는 듯이 고통스럽다. 눈앞이 캄캄하다. 어떻게 병실로 돌아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침대에 걸터앉아 한참을 숨을 몰아쉰다. 선배님. 어디선가 금방이라도 그렇게 부르며 문을 열고 나타날 것 같다. 7년이라고 했다. 당장 한 시간 뒤가 아득하다. 방금까지 끌어안았던 가느다란 몸이 떠오른다. 환자복으로 갈아입을 시간을 충분했다. 눈이 그친 하늘을 바라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미국으로 간다고 했다. 태풍 때문에 발이 묶인 그 날처럼, 폭설로 항공 일정이 밀리길 바란 것이다.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까지 안타까운 기색을 내비쳤는데, 하나도 알아보지 못했다. 강석원은 손에 잡히는 대로 움켜쥐고 바닥에 내던졌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넘어진다. 베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동시에 그 안에 들어있던 종이뭉치가 흐트러진다. 허리를 굽혀 종이뭉치를 집어 들었다. 흰색 봉투를 보는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선물로 손으로 쓴 편지를 달라고 했다. 소년 꼭 빼닮은 글자를 흠모했다. 필담을 나눈 종이를 가장 아끼는 책 사이에 껴 두었을 정도로. 편지는 그러모아 쥐면 한 손에 다 잡히지 않을 만큼 두툼한 양이다. 조지현은 지금 오른손이 부러진 상태였다. 익숙하지 않은 왼손으로 밤새 편지를 썼을 것이다. 선배님께. 그렇게 적힌 글씨는 어린아이가 쓴 듯이 삐뚤빼뚤하다. 병실에 오도카니 혼자 앉아 이별을 준비했을 조지현을 떠올리자 숨이 막혀온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봉투를 뜯었다. 뿌옇게 젖어드는 시야에 읽을 수 있는 글자라고는 서두뿐이다.
선배님께.
강석원은 편지를 손에 쥐고 유일한 후회를 삼킨다.
단 하루라도 더 일찍 너를 만났더라면.
누구보다 더 귀하게 여겨주고 사랑해주었을 텐데.
나중에 봬요.
그래.
이미 약속해버린 7년을, 이제는 시작해야 했다.
강석원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