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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11/12)

9장

“허니, 오늘 뭐 해? 이따 태수네 집에서 파티하기로 했는데.”

“도서관.”

책을 정리해 넣으며 조지현이 대답했다. 

“너 오늘 며칠인지 몰라? 오늘 같은 날 도서관에 간다고?”

캐비닛 문이 탁, 닫혔다. 표정도 없고 안색은 창백하리 만치 희다. 그런데도 조지현은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가면 안 돼?”

무미건조한 대답이 돌아온다. 김선우가 웃으면서 그런 건 아니지,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오늘 같은 날 도서관에서 책이나 들여다보고 있으면 쓸쓸하지 않겠어?”

“괜찮아.”

가방을 정리하며 조지현이 대답했다.

“공부도 좋지만 가끔은 좀 즐겨야지. 그래서 무슨 재미로 사냐.”

김선우의 말에 조지현이 웃음을 삼켰다. 눈을 아래로 내리감은 채로 입술 끝을 조금 당겨 웃는 것뿐이었다. 그뿐인데도 김선우는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조지현을 바라보고 만다.

“왜.”

눈이 마주치자 조지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표정하게 묻는다.

“아니, 그냥. 그럼 오늘 밤은 뭐할 거야?”

“책 읽다가 자려고.”

“너 그 외모로 그렇게 사는 거 인류에 대한 잔인한 처사라는 생각 안 드냐?”

김선우의 실없는 농담에 조지현은 반응하지 않고 가방을 어깨에 멘다.

“그러지 말고 오늘 같은 날은 놀자.”

김선우의 가장 큰 장점은 티가 없다는 점이었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부잣집 막내아들의 전형이었다. 그의 가장 큰 단점도 티가 없다는 점이었다.

“넌 가끔 보면 스스로 벌주듯이 공부하는 느낌이야. 하늘에는 축복이 땅에는 영광이 몰라? 오늘은 놀자, 놀아.”

지치지도 않고 놀아달라고 달려드는 대형견을 보는 기분이었다.

“맞아. 벌주는 거.”

조지현이 담담하게 수긍하자 김선우가 되레 놀란 표정을 짓는다.

“어, 아니, 난 그냥 했던 말인데…….”

“나도 그냥 한 말이야.”

“……. 너 무표정한 얼굴로 농담하면 얼마나 무서운지 아냐?”

“쓸데없는 얘기 이제 끝났지? 간다.”

“생각 바뀌면 연락해. 공중전화로.”

김선우가 키득거리며 뒷말을 덧붙였다. 조지현은 아직도 핸드폰을 사지 않았다. 불편하지 않으냐고 주변에서 몇 번이나 구박했지만, 조지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누구하고도 연락하지도 않고 그럴 생각조차 없었다. 

가장 연락하고 싶은 사람하고도 연락하지 못하는데.

강석원을 생각하자 입맛이 썼다. 한국을 떠나온 지 벌써 일 년이다. 병원에서 나와 바로 공항으로 갔다. 그날 밤 비행기였다. 폭설로 발이 묶였으면 하는 쓸데없는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항으로 나온 여자는 웃으면서 아들을 배웅했다. 그녀는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공부나 해. 그래야 병이 낫지. 협박이었다. 그쪽이나 부디 치료 잘 받으세요. 조지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여자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잘 다녀오라고 어깨를 도닥였다. 가면 고모 나와 계실 거다. 도착하면 바로 전화하고. 아버지의 말에 조지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검색대 안으로 들어가려는 아들을 여자가 붙들었다. 그 새끼하고 이상한 짓하는 거 걸리기만 해 봐.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어떻게 하실 겁니까. 조지현이 물었다. 그런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 못 했는지 여자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집행유예 기록이 있으니 다음번에는 풀려나기 어려울 겁니다. 여자의 표정이 구겨졌다. 조지현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검색대로 들어갔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조지현은 고모에게 학대받은 증거와 재판 결과를 넘겼다. 공항에서 여자와 나눈 대화도 녹음해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 비하면 합리적이고 공정한 부분이 있었다. 그건 친가의 특징이었다. 자신이 겪은 고모는 아버지의 장점이 극대화된 어른이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고모의 물음에 조지현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연락만 안 하면 됩니다. 고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 온 이후로 어머니와 연락을 하는 일은 없었다. 이곳에 와서 유일하게 좋은 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견디는 것뿐이었다. 미국에 온 뒤, 일주일은 꼬박 앓아누웠다. 그 이후부터는 모든 시간을 공부에만 쏟아부었다. 공부는 현실도피였다. 아니, 김선우의 말대로 자신에게 벌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전의 선택으로 현재의 강석원까지 기다리게 하고 있다.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재수술을 제대로 마쳤을까? 재활은 잘 받고 있을까? 건네지 못하는 말들이 쌓여간다. 미국에 와서 이 주 뒤에 강석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마세요. 통화연결음을 들으며 그렇게 뇌까렸다. 그러면서도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그리워했다. 삼십 초 뒤에 끊을 겁니다. 강석원에게 그렇게 말해주었다. 벨 소리가 몇 번이나 울릴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수화기를 공중전화기에 내려놓았다. 그다음 번 전화는 한 달 뒤였다. 처음 삼 개월은 한 달에 한 번씩 전화를 걸었다. 혹시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 생기면 벨 소리가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끊으라고 말해뒀다. 반드시 그렇게 해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정말 다 어긋날 수 있습니다. 조지현은 간곡하게 부탁했다. 강석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거짓으로 상황을 넘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행히 한 번도 강석원이 도중에 전화를 끊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간격을 줄였다. 삼 주, 이 주,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으로 정했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 전화를 걸고 싶지만 괜한 욕심이 생길 것 같아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 토요일 오후 10시, 한국 시각으로는 토요일 오전 9시. 일 년째 같은 시간에 전화를 걸었기에 강석원도 알고 있을 것이다. 수요일만 되면 기분이 들떴다. 금요일 오전에는 전화 생각에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고, 토요일은 온종일 시계만 들여다보았다. 통화 연결음을 듣는 것이 전부였지만 강석원도 같이 벨 소리를 듣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손끝이 떨릴 만큼 긴장되고 설렜다.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성탄절이니 연말이니 하는 것들은 중요치 않았다. 강석원에게 전화를 걸 생각뿐이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도 틈틈이 시간을 확인했다. 9시 30분에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이미 한 시간 전부터 책의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성탄절을 하루 앞둔 거리에는 캐럴이 울려 퍼졌다. 커다란 별을 단 크리스마스트리는 휘황찬란한 전구로 번쩍였다. 도시가 빛나는 밤이었다. 흩날리는 눈발에 사람들은 흥성거리며 즐거움을 감추지 못했다. 의무적으로 행복해야 할 것 같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조지현은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섰다. 서점 앞 카드를 파는 매대가 눈에 들어왔다. 파란 눈을 한 점원과 눈이 마주쳤다. 소중한 사람에게 사랑을 전하세요. 잡지 광고에서 볼 법한 말을 하며 점원이 미소 지었다. 조지현은 매대에 다가갔다. 어차피 부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장을 골라 계산했다. 길을 따라 걸으며 카드를 주머니에 넣었다. 공중전화를 찾기 어려웠기에 일부러 집 근처에 한곳을 찾아서 항상 그곳에서 전화를 걸었다. 시계를 확인했다. 10시가 되려면 1분이 남아 있었다. 국제전화 카드를 사두었다. 하지만 요금은 늘 그대로였다. 번호를 누르고 기다렸다. 통화연결음이 들렸다. 강석원도 듣고 있을까.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제는 무슨 일을 했을까. 오늘은, ……. ……. 약속한 30초가 지나 수화기를 걸이에 걸었다. 그대로 가야 하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캐럴이 들린다. 주머니에 넣어둔 크리스마스카드가 손에 닿았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시 강석원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신호음이 울렸다. 받지 않을 것이다. 알고 있다.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반복해 말했으니까. 하루에 두 번이나 이렇게 전화를 거는 일은 처음이었다.

하늘에는 축복이 땅에는 영광이. 성스러운 날을 축복하는 캐럴이 거리마다 울렸다.

그 축복이 아주 잠시만 자신들에게 향하길.

연결음을 들으며 조지현은 간절히 기도했다. 강석원이 말할 수 없을 만큼 보고 싶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가 들을 리 없는 말을 나직하게 속삭이며 조지현은 눈을 깊게 감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육중한 소리가 체육관을 갈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샌드백이 주저앉았다. 관장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그만하고 가서 쉬어.”

강석원은 대답하지 않고 수건으로 땀을 닦아냈다. 

“오늘 석원이 형 기분이 왜 저래?”

“국가 대표 선발 발표 났잖아.”

“당연히 선발된 거 아니야?”

이야기를 하던 한 녀석이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힉. 왜?”

“모르지. 석원이 형이 협회 비위를 워낙 안 맞춰줘서 그렇다는 말도 있고.”

“하여간, 협회 놈들도.”

이야기를 듣던 녀석이 혀를 내찼다. 

“그런데 근래 계속 기분 안 좋지 않았어?”

“그랬나? 워낙 말이 없으니,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나.”

이런저런 얘기가 오고 가는 사이 강석원은 글로브를 벗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형, 가시게요? 저랑 스파링 한번 하고 가시죠.”

체육관 후배가 일부러 기분을 풀어주려고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지만, 강석원은 고개를 내젓고는 체육관을 나갔다.

계단으로 내려오면서 강석원은 복싱 밴디지를 풀었다. 밖으로 나오니 하늘이 찌뿌듯한 게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았다. 연말을 앞둔 거리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강석원은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가 오지 않은 지, 삼 주가 지났다. 이유는 알고 있다. 2년 전 조지현이 미국으로 간 이후 처음 몇 개월을 제외하고 매주 토요일 오전 9시마다 전화가 왔다. 그곳은 밤 10시일 그 시각에. 하루하루를 그 시각을 위해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오전까지 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늦잠을 자는 습관은 없지만, 조지현의 전화를 놓칠까 봐 두려워 한숨도 잘 수 없었다. 그날도 전화를 기다리다가 조지현이 병원에서 주고 간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벌써 수천 번을 넘게 읽어 종이 모퉁이가 나달나달 닳은 편지지를 조심스럽게 넘기며 읽었다. 어린아이 같은 글씨를 볼 때마다 웃음이 나기도 하고, 뜨거운 것이 울컥하기도 하며, 괜스레 우울하기도 했다. 모든 감정이 스쳤다. 마지막 장을 읽고 나면 늘 결론은 같았다. 조지현이 보고 싶다. 사무치게 그리웠다. 조지현을 끌어안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코를 대고 한껏 숨을 들이켜고 싶었다. 그조차 안 된다면, 서늘하고 단정한 음성으로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만이라도 듣고 싶다. 그뿐이었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저도 모르게 통화 버튼을 눌러버린 이유는. 처음에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이어서 들리는 숨소리에 전화기 너머에 누가 있는지 알게 된다. 조지현이다.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그의 당황이 전해졌다. 끊지 마. 일주일을 굶은 비렁뱅이처럼 간절하게 구걸했다.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몇 초간의 침묵 뒤에 조지현이 물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말 대신 가까스로 그래, 하고 대답했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혀가 얼어붙은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운동은 잘하고 계시나요? 응. 그럼 끊겠습니다. 그렇게 통화는 끝났다. 그 뒤로 조지현은 삼 주간 아무런 연락이 없다.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7년간 서로에게 직접적인 접점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만 무사히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조지현을 믿기로 했지만, 그의 말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조지현이 이렇게까지 두려워하는 이유를 몰라 초조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오늘 국가대표 선발에 탈락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조지현이 말한 어긋남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탈락소식 때문이 아니었다. 결국, 이해하지 못할 일련의 모든 일이 타당해지고 만다. 전국 체전에서 우승한 선수가 국가대표 명단에서 빠지는 경우는 없었다. 관장도 눈이 뒤집혀 날뛰었지만 이미 한번 발표된 명단이 번복될 리는 없었다. 문득, 이대로 영영 전화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석원은 한숨과 함께 끔찍한 생각을 삼켜냈다. 조지현을 믿는 수밖에 없다.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지옥같이 끔찍한 재활의 고통을 이겨낸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도 오늘처럼 씁쓸한 날에는 조지현이 자신을 놓지 않았다는 확신을 듣고 싶었다. 내일은 토요일이었지만 조지현이 다시 전화를 걸어줄지는 모른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내내, 강석원은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습관적으로 우편함을 확인했다. 몇 개의 고지서와 광고, 그리고 흰색 봉투가 꽂혀 있었다. 조지현에게 온 편지는 없었다. 강석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우편물들을 뽑아서 집으로 가져갔다.

가방을 던져놓고 옷을 벗었다. 샤워를 하면서 뒤늦게 국가 대표 탈락에 대해 씁쓸함이 밀려왔다. 반드시 성공해서 조지현에게 미국으로 데리고 가주겠다고 말했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운동을 시작하고 난 뒤 처음으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마주했다. 성공할 확률이 낮은 수술을 하러 들어갈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무능함에 대한 비참함이 밀려든다. 떨치기 힘든 더러운 기분이었다. 조지현과 다시 만나게 됐을 때, 더 이상 무력한 인간이고 싶지 않다. 이번 탈락은 그래서 제법 아프다. 계획한 단계들이 뒤로 주르륵 밀려나는 터다. 모두 자신의 탓이었다. 강석원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아까 가져온 우편물이 눈에 들어왔다. 자리에 앉아 정리를 시작했다. 광고는 분류해 버리고 고지서는 한쪽에 놓았다. 그러고 나자 흰색 봉투 하나만 남게 되었다. 병원 이름이 찍힌 봉투는 발신자도 병원이었다. 이 년 전에 입원했던 병원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강석원은 봉투를 뜯었다. 거기서 곱게 접은 편지 두 통이 떨어졌다. 종이를 펼친 순간, 강석원은 숨이 멎을 뻔했다.

『선배님께.』

그렇게 쓰인 단정한 글씨가 누구의 것인지 안다. 글자를 마주하자 마치 조지현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강석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주체할 수 없는 연심이 치밀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강석원은 글자를 읽으며 제 기갈을 채웠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조지현입니다.』

조지현의 목소리로 글자가 읽힌다. 강석원은 차분하게 편지를 읽어내렸다.

『이걸 읽으실 때쯤이면 이 편지를 쓴 지 일 년이 지났을 겁니다.』

병원에서 연말 행사라며 편지지를 나눠줬던 기억이 뒤늦게 떠올랐다. 이듬해에 발송해준다고 해놓고 무슨 오류인지 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발송해준 것이다.

『별일 없이 지내시는 건가요? 운동은 잘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통화가 이어졌을 때도 조지현은 같은 질문을 했다. 예민하게 떨리는 그때의 목소리가 글씨에 덧씌워진다.

『어쩌면 국가 대표로 선발되셔서 합숙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강석원은 짧게 웃었다. 조지현에게 그런 말을 했다. 그렇게 되면 합숙소로 찾아와 달라는 말까지. 오늘따라 입맛이 지독히 썼다. 

『혹시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선배님이 가지신 재능과 노력이라면 언젠가 원하시는 자리에 오르실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비록 오늘이 아니더라도.』

담담하고 차분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언제나 선배님이 건강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추신. 제가 사랑한다는 말씀드렸던가요.』

덧붙은 한마디에 강석원은 그대로 고개를 떨군다. 제대로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글자를 한 자 한 자 읽을 때마다 기억 속의 조지현이 고스란히 살아난다. 새카만 눈이 자신을 바라본다. 단정하고 차가운 눈이 웃음을 띤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 흐트러진다. 손끝이 닿자 살짝 눈을 내리감은 채 웃음을 삼키고 입술을 당긴다. 어떤 경계심도 없이 온기에 기댄 채 자신을 가만히 응시한다. 조지현을 쓸어내리듯 강석원은 편지지에 쓰인 글자를 하나하나 어루만졌다.

편지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창가가 밝아오고 있었다. 강석원은 조지현의 편지를 모아둔 상자에 오늘 받은 것을 곱게 넣어두었다. 옷을 갈아입고 달리러 나갔다. 비록 오늘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원하는 곳에 설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했다. 

한참을 달리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니 9시가 되어갔다.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시계를 확인하며 휴대전화를 보았다. 오늘도 벨은 울리지 않았다. 강석원은 물을 마시며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체육관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벨 소리가 울렸다. 강석원은 수건을 내동댕이치고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국제전화임을 확인하고 속으로 벨이 울리는 횟수를 셌다.

열두 번. 정확히 열두 번이 울리면 전화는 끊어진다. 열 하나, 열, 아홉, 여덟…….

카운트 다운을 했다. 이번에도 열두 번이 울린 뒤에 전화는 끊어졌다. 핸드폰 버튼을 눌러 수신 이력을 살폈다. 전화는 9시 4분에 걸려왔다. 4분 동안 공중전화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을 조지현이 애틋하고 사랑스럽다. 조지현과 다시 만나려면 1528일이 남았다. 하지만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오늘이 아니더라도.

「허니.」

조지현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몇 번이나 조지현이란 이름을 알려줘도 돌아오는 반응은 한결같았다.

「왜.」

「뭐 하고 있었어.」

같은 수업을 듣는 에단이었다. 조지현은 대답 대신 읽고 있던 전공서적을 들어 보여주었다. 그가 낮게 휘파람을 분다.

「재미있어?」

「너랑 얘기하는 것보다는.」

에단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림자 때문에 글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에단은 제법 끈질긴 성격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자리를 피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에 조지현은 책을 덮고 일어섰다.

「어디 가게?」

「약속이 있어서.」

「그럼 잠깐만 얘기할 수 있을까.」

조지현이 시계를 보고는 그럼 5분만, 하고 대답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돼? 내가 정말 좋은 티켓을 구했거든.」

에단이 자신만만한 태도로 주머니에서 티켓을 꺼내 조지현에게 건넸다. 티켓을 본 조지현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이거 뭔지 몰라?」

「뭔데.」

조지현이 되묻자 에단이 몹시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때 저쪽에서 김선우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야. 가자. 배고파 죽겠다.”

김선우가 조지현에게 한국어로 말을 하자 에단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 먼저 갈게. 선약이 있어서.」

조지현이 그렇게 말하자 에단이 초조하게 조지현의 옷자락을 붙든다.

「토요일에 정말 시간 안 되는 거야? 정말 어렵게 구한 티켓이야.」

에단이 손에 든 티켓을 본 김선우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미안. 시간이 안 될 것 같아.」

조지현은 깔끔하게 거절하고 돌아섰다. 김선우가 허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에단 저 불쌍한 새끼.”

조지현이 무슨 이야기냐는 식으로 눈을 살짝 치떴다.

“쟤가 들고 있는 티켓, 만 달러를 호가할걸. 아니 돈 있어도 지금은 못 구한다. 세계 챔피언 간 세기의 대결이라고 뉴스에서 떠드는 거 못 들었어?”

“아, 그거.”

조지현이 무감한 투로 대답했다.

“너 복싱 좋아하잖아.”

조지현이 내가? 하고 대꾸했다.

“아니야? 가끔 너 중계 챙겨봤잖아. 너 스포츠는 관심도 없는 줄 알았는데 복싱 중계 보길래 깜짝 놀랐다.”

강석원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고 있다. 국내에서는 그를 당해낼 사람이 없다는 게 정평이었다. 그의 경기를 인터넷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 조지현은 몇 번 중계를 챙겨보기도 했다. 그가 너무 많이 맞는 날에는 밤잠을 설칠 정도로 잔상이 오래 남았지만, 그래도 강석원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에단이 너 좋아하는 거 있냐고 물어보길래 지나가는 말로 대답해준 건데, 저런 걸 사 오다니.”

조지현이 눈가를 찌푸리며 쓸데없는 소리 하고 다니지 마, 하고 친구를 구박했다.

“저놈 돈 많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진짜 돈 많네.”

“네가 할 말은 아니잖아.”

“나하고 쟤랑 비교가 되냐? 너 쟤네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라? 맥캘런가에 비하면 우리 집은 동네 슈퍼마켓이지.”

엄살이 섞여 있긴 하지만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에단 맥켈런은 4대째 군수산업을 운영하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재벌가의 자제였다. 김선우의 아버지도 제법 내실 있는 기업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에단이 너한테 단단히 반하긴 했나 보다.”

조지현이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에단이 왜 싫어? 쟤 여자애들이 왕자님이라고 부르던데.”

조지현은 여전히 티 없이 맑은 제 친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에 에단 무리가 너한테 칭총이라고 부른 거 기억 안 나?”

칭총은 동양인을 비하하는 명칭이었다.

“하루이틀이냐.”

김선우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웃어넘겼다. 조지현도 평소에는 그런 정도의 놀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인종에 대한 은근한 차별은 유난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 그거 때문에 싫은 거야? 에단 맥컬런이?”

조지현에게 호감을 표하는 사람은 많았다. 여자도 다수였지만 조지현은 누구에게도 반응하지 않았다. 여자는 별로야? 하고 묻는 김선우에게 조지현은 관심 없다고 대답했다. 김선우는 그 이후로 조지현의 성향을 아예 그쪽으로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조지현은 굳이 정정해주지 않았다. 

“아니. 그냥, 싫어.”

외모가 닮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에단을 볼 때마다 최기열이 떠올랐다. 사람들 앞에서는 조지현에게 말도 건네지 않고 구분을 짓다가 혼자 있을 때 종종 와서 수작을 거는 행동이 썩 좋게 보이지 않았다.

“뭐, 니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어때?”

“더 싫어.”

김선우가 허, 하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야, 너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 안 나? 날 한참 쳐다보다가 우리 테이블까지 걸어와서 밥 같이 먹자고 한 건 내가 아니라 너다.”

김선우가 투덜거렸다. 

룸메이트가 된 지 몇 달 되지 않아 김선우는 조지현에게 제 마음을 고백했다. 당연히 조지현은 단칼에 거절했다. 김선우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듯이 처음 만났던 날을 거론했다. 분명 나는 니가 날 마음에 두고 있는 줄 알았다고. 내가 정말 착각한 거냐고.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착각이야. 그 이후로 김선우는 걸핏하면 억울하다는 듯이 그날의 일을 꺼내 들었다.

“애들이 넌 말도 못하는 벙어리라고 했는데 난 그래도 말 못하는 자폐아에 걸었었다고. 그런 니가 말 걸면서 대뜸 밥 같이 먹자고 하는데 우리가 얼마나 놀랐겠어. 그날 밤에 집에 가서 다들 설레서 잠 못 잤지. 다들 잠 못 자고 난리였을걸?”

김선우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김선우를 한눈에 알아보고 다가간 건 사실이었기에 조지현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진짜 궁금하긴 하다. 그때 무슨 생각이었냐.”

“별생각 없었어.”

“아니야. 넌 나를 제법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밥을 같이 먹자고 할 리가 없지. 네 성격에.”

조지현은 짧게 웃었다. 김선우는 예나 지금이나 귀찮고 시끄러운 부분을 제외하면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아, 맞다. 신문 말해둔 거 받아놨어. 집에 도착해 있을 거야.”

조지현이 고개를 돌린다.

“오늘?”

“응, 왜?”

“나 집에 갔다 올게.”

“뭐? 설마 신문 때문에?”

조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가져가는 것도 아닌데, 식사는 하고 가지.”

“아니야. 나중에 보자.”

조지현은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나중에는 뛰었다. 학교에서 아파트까지는 20분가량 걸리는 거리였다. 현관에 도착해 문고리를 비틀 때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김선우의 말대로 테이블에 서류 봉투가 놓여 있었다. 조지현은 봉투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봉투를 뜯고 종이 뭉치를 꺼냈다. 한국에서 발간된 스포츠 신문이었다. 몇 장 넘기고 나자 천재의 귀환이란 머리기사를 건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올해 봄, 강석원은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걸었다. 인터넷으로 기사를 확인하긴 했지만, 지면으로 보니까 몇 배는 더 반가웠다. 앉은 자리에서 꼼꼼하게 기사를 읽고 난 후, 조지현은 가위를 가져와 기사를 오려냈다.

“스크랩해?”

어느새 방으로 들어온 김선우가 샌드위치가 든 종이봉투를 내밀며 물었다. 조지현은 기사를 스크랩 파일에 끼워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먹어가면서 해.”

김선우가 종이봉투에서 제 몫의 샌드위치를 꺼내 씹으며 말한다. 

“고마워.”

“고맙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김선우는 본가가 있는 한국에 자주 들락거렸다. 비행기에서 읽던 신문을 가져온 것을 보고 조지현이 혹시 가져도 되느냐고 물었을 뿐인데, 그는 본인이나 아버지가 한국에 오갈 때마다 이렇게 신문을 챙겨다 주곤 했다. 

“정말 고마워.”

조지현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김선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넌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 만 달러짜리 티켓은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신문 한 부에 그렇게 고마워하고.”

조지현은 말없이 웃었다.

“그런데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아는 사람이란 단어에 조지현은 가만히 웃었다. 너한테 아는 사람이 되려면 뭘 더 알려줘야 하는 거냐고 묻던 남자가 떠올랐다.

조지현은 신문에 실린 강석원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3년이란 세월이 흘러 소년은 자라 남자가 되어 있었다.

“맞아. 아는 사람.”

세 번의 봄이 지났다. 네 번의 봄을 더 맞이하면 그를 만날 수 있다.

창밖의 꽃망울이 움트고 있었다.

알람이 울리는 동시에 눈을 떴다. 알람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서 샤워를 한다.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챙겨 먹고 운동을 간다.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에게 눈인사하고 훈련에 집중한다.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그의 훈련 방법에 주변 사람들은 감히 말을 붙일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훈련을 마치자 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범벅이었다. 샤워실에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석원아. 오늘 인터뷰 있는 거 알지? 저녁에.”

“생각 없습니다.”

시청팀 감독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뭐? 하고 되물었다. 강석원은 짧게 고갯짓으로 인사하고 체육관을 나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어느새 기세를 잃고 부드럽게 뺨을 스친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려던 걸음을 돌려 한참을 걸었다. 눈에 띄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소주를 샀다. 천오백 원입니다, 하는 점원에게 돈을 건네고 거스름돈을 받았다. 한강 둔치에 앉아 혼자 술을 마셨다. 저번 주에 있었던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여기저기에서 연락이 오고 축하인사를 받았다. 결승전이 있는 날이 할머니의 기일이었다. 올해의 세계 선수권 대회는 미국에서 열렸다. 미국에서 할머니의 기일에 경기를 치렀다. 우승을 하고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가장 축하를 받고 싶었던 두 사람에게서 축하받지 못한 기분이었다. 강석원은 소주를 삼켰다. 빈속이라 후끈한 기운이 목을 훑고 지나갔다. 미국에 있는 동안 조지현은 전화를 걸지 않았다. 일부러 그랬을 것이다. 물리적 거리감은 생각보다 많은 고뇌를 느끼게 했다. 미국땅을 밟는 순간 몇 번이나 이대로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넓은 땅덩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불쑥불쑥 치미는 욕구는 어쩌지 못했다. 시합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도 주변을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혹시라도 마주치지는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가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사진을 찍거나 말을 하는 일은 자신이 없었지만 들어오는 대로 다 승낙을 했던 이유는 단 하나다. 분명 보고 있을 테니까.

강석원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주변에서 왜 아직 그런 구형 핸드폰을 사용하느냐는 말을 숱하게 들었지만 바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진 앨범에서 이전에 찍은 사진을 찾아 화면에 띄운다.

놀란 듯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조지현이다. 

이상하게 나왔을 겁니다.

조금 불퉁한 투로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가 떠오른다. 단 한 장 갖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을 다른 핸드폰으로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의, 그 기억이 퇴색되는 기분이었다.

강석원은 한참 동안 화면 속의 소년을 바라본다.

어떻게 자랐을까. 키는 조금 더 컸을까. 살은 조금 붙으면 좋을 텐데. 얼굴은, 목소리는, 머리카락은, 손가락은, ……. 

자신의 기억 속 조지현은 아직도 열여덟 살에 멈추어 있다. 아무리 상상을 해보려 해도 소용없었다. 몇 년간 목소리 한 번 들어본 게 전부였다. 강석원은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주 중에 시간을 내서 강원도에 내려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주를 마저 마시고 남은 것은 강에 뿌렸다.

한강 대교를 따라 걸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고 정해진 식단대로 식사하고 훈련을 받는다. 단조로운 생활이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준비했던 일을 이루고 있음에도 마음 한구석은 허전하기만 하다. 벌써 햇수로 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한 시간이 끔찍하리만치 길게 느껴졌는데 어느새 반을 넘게 지나왔다. 그리고 반이 남아있다. 조지현을 보냈던 첫해보다 이상하게 아득하기만 하다. 전 주처럼 별다른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조지현은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를 걸었다. 벨 소리를 들으면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얼굴에 열이 오를 만큼 기뻤다. 하지만 문득 드는 불안감은 어쩌지 못했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너는 약속을 버거워하지는 않을까. 

고개를 들었다. 흰 꽃잎이 바람결을 따라 흩날린다. 아름답다는 생각보다는 조지현에게 이 광경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였다.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10시가 넘어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온 후에야 우편함을 확인하지 않은 것을 떠올렸다. 조지현은 언젠가 편지를 한 통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게 꼭 오늘일 필요는 없겠지만, 오늘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다. 가볍게 머리를 털어내고 밖으로 나갔다.

전단지와 지로 용지만 몇 개 꽂혀 있었다. 

강석원은 우편물을 뽑아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현관문을 열려는데 옆집에서 문이 열리는 기척이 들렸다.

“저기, 운동하는 총각.”

옆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강석원을 불렀다. 강석원은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번 주에 집에 없었지? 내가 우편물을 하나 받아놓은 게 있었는데 깜빡했지 뭐야. 요즘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자꾸 깜빡깜빡하네.”

우편물이란 단어에 강석원은 무심코 숨을 멈춘다. 혹시 몰라서 옆집에 찾아가 홍삼 세트를 건네면서 자신이 부재중일 때 우편물이 오면 대신 받아달라는 부탁을 해둔 것이다. 4년간 돌아오는 명절마다 그렇게 부탁을 해왔다.

“잠깐만 기다려 봐.”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둔 채로 안으로 들어간다. 아닐 수도 있다. 협회에서 온 초청문이나, 공문일 수도 있다. 기대하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손끝이 떨리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이름이 영어로 쓰여 있어서 이게 뭐야, 강……, 맞지?”

“네.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석원은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나저나 저번에 뉴스에 나오던데, 총각 유명한 사람이야?”

텔레비전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데 이렇게 허름한 빌라에 사는 게 영 미심쩍다는 표정이었다.

“나중에 더 유명해지면 모른척하면 안 돼.”

“알겠습니다.”

강석원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신발을 벗고 앉을 때까지도 편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영어 필체였지만 누구의 것인지 단번에 알아본다.

봉투는 예상보다 얇았다. 딱 한 번 보낸다고 했던 편지였다.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서랍에서 칼을 찾아 봉투의 모서리를 조심스럽게 뜯어냈다.

봉투를 벌리자 안에 들어있던 게 툭, 떨어진다.

“…….”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고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눈을 깜빡일수록 열이 오른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사진 속의 조지현이 웃는다. 머리는 조금 길었고 눈매는 여전히 그린 듯이 섬세하다. 조금 살이 오른 듯한 뺨, 길고 곧은 목덜미, 귓불, 콧방울, 눈썹, 웃음 짓는 입술, 변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

4년이란 시간이 그 한 장에 담겨 있다. 강석원은 홀린 듯이 한참을 사진을 바라보다가 봉투 안에 미처 나오지 못한 종이 한 장이 남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흰색 종이에는 간단한 메모가 적혀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적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아래는 숫자가 적혀 있다. 만나기로 한 날짜였다. 

모든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괜찮겠어?”

“응. 괜찮아.”

조지현은 시트를 끌어당기며 대답했다.

“지금이라도 병원 가자. 항공권은 취소하면 돼.”

“그러지 마. 약 먹고 한숨 자면 나을 거야.”

김선우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빨리 가. 중요한 결혼식이잖아.”

친척 결혼식이 있어 김선우는 한국에 가야 했다.

“태수한테 내가 연락해둘게.”

“하지 마. 불편해.”

“고모님은?”

조지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고모님을 볼 낯이 없었다.

어머니가 찾아왔다. 한눈에 봐도 그녀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제 아들을 내놓으라고 난동을 부리는 여자에게 고모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버지까지 가세했다. 이 사람도 다 후회하고 반성하는데 왜 가운데서 천륜을 끊으려 하냐고, 아버지는 고모를 설득하려 했다. 그 천륜 끊은 거 너희 부부야. 애한테 책임 지우지 마. 고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머니는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다고 한다. 소파에서 넘어진 고모의 오른쪽 손목이 부러졌고 경찰이 와서 부부는 끌려나갔다. 이 모든 일을 사촌에게 전해 들었다. 지현아, 그동안 진짜 힘들었겠다. 그렇게 말하는 사촌 형에게 조지현은 몇 번이고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많은 의미가 담긴 한마디였다.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하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바로 아버지에 전화를 걸어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있으면 법적으로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네 엄마가 매우 아프고 힘들어해. 너를 정말 보고 싶어 하고. 엄마가 너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도 알잖아, 응? 지현아, 마음 상한 건 이해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부모와 자식 간인데……. 부모와 자식 간이란 단언에 심장이 서늘하게 굳는다. 이번에도 말 안 들으면 정신병원에 보낸다고 하실 겁니까? 그렇게 물었을 때,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여자가 자신에게 하려 했던 짓을 그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미성년자도 아니고 의사 진단 없이는 위법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미국으로 온 뒤로 한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죽도록 공부를 파고들어 단 한 번도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고, 틈틈이 아르바이트했다. 돈을 벌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이곳에 온 비행기 값을 한국에 보낸 것이었다. 한 푼도 신세 지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보낸 모든 시간을 어쩌면 부모와 연을 끊어버리는 데 사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떤 노력을 더 해야 할지 몰라 암담하다. 그날 이후로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그렇게 노력했는데 그 여자는 단 한 번의 방문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악몽을 일상으로 끌어들였다.

김선우가 한숨을 내쉬며 침대맡에 앉는다.

“넌 왜 그렇게 누구한테 기대지를 않냐.”

“정말 괜찮다니까.”

열 때문에 흐릿한 눈을 하고도 조지현은 담담하게 말한다. 김선우가 조지현의 이마를 짚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꿈속에서 제 목을 조르던 여자의 손이 겹쳐져 조지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피했다. 김선우가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손을 거두었다.

“미안해. 내가 지금 몸이 안 좋아서 신경이 날카로운가 봐.”

“……, 상담 잘 받고 있어?”

한밤중에 악몽에서 깨서 발작을 일으킨 조지현을 몇 번 보고 난 후로, 김선우는 바로 정신과 의사를 소개해주었다. 자신이 아는 분 중에 정신과 의사가 있으니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삼촌한테 상담한다고 생각하고 찾아가면 좋을 거라고. 한국에서는 상담을 꺼리지만 여기서는 그냥 감기처럼 생각하는 거라고. 그러면서 비용문제가 고민되면 그것도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고 덧붙이며 그는 조지현을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게 벌써 4년 전이다. 꾸준히 상담을 받는 중이었다.

“약도 먹어.”

조지현이 희미하게 웃으며 진담 섞인 농담을 던졌다.

“빨리 가. 늦겠다.”

조지현이 김선우의 등을 떠밀었다. 김선우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 무슨 일 있으면 태수한테라도 전화해라. 알았지?”

“알겠어.”

못 미더운 얼굴로 뒤를 돌아본 김선우가 한마디 던진다.

“아프면 아프다고 좀 해라.”

조지현은 대답 대신 어서 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문이 닫힌다. 침대에 도로 누웠다. 열이 오른다. 숨을 내쉴 때마다 목뿐만 아니라 폐까지 쑤셨다. 나중에는 온몸이 덜덜 떨려 시트에 쓸리는 몸이 아플 정도였다. 강석원을 빗속에 버려두고 도망쳤던 그 날처럼, 아프다.

문득 오늘이 토요일인 것을 떠올렸다. 

전화해야 하는데.

조지현은 가까스로 눈을 떠서 시계를 확인했다. 밤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침대 헤드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옷을 입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늦여름의 밤공기에 한기를 느꼈다. 조지현은 옷자락을 움켜쥐고 공중전화까지 걸어갔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머리가 궁궁 울리고 토기가 올라왔다. 아파트 현관에서 20m도 떨어지지 않은 공중전화 박스가 달처럼 멀게 느껴졌다. 간신히 도착해서 수화기를 들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수화기를 몇 번이나 놓쳤다. 수화기를 어깨에 대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눌렀다.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앞이 검게 변하고 속이 뒤집혔다. 숨을 몰아쉬며 토기를 참아냈다. 서서히 시야가 밝아졌다. 조지현은 그제야 자신이 전화기를 끌어안고 너무 오래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대로 전화를 끊으려다가 멈칫, 하고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통화가 되고 있었다. 숨소리가 들린다. 강석원이다.

「미안해. 벨이 너무 오래 울려서 혹시 무슨 일 있나 하고.」

그래 봤자 일 분 남짓이었다. 남자는 그 아주 작은 차이조차 알아채고 만다. 5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무서울 만큼 다정하다.

조지현은 대답하지 않고 수화기를 붙들고만 있었다. 전화를 끊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데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어디 아파?」

숨소리만 듣고도 남자는 모든 것을 읽는다. 눈앞이 뜨겁다.

「지현아. 아파?」

걱정 어린 남자의 나직한 음성에 참고 있던 마음이 치솟는다.

“네. ……아파요.”

결국에, 강석원에게는 어리광을 부리고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내가 갈까?」

마치 집 앞으로 가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너무도 강석원다웠다. 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변하지 않는다. 아니, 이전보다 더 자상하게 느껴진다. 이미 더 다정할 수 없을 만큼, 대해줬었는데.

「어디야. 내가 갈게.」

“나중에…….”

조지현은 울음을 삼키며 말을 잇는다.

“보리차 끓여주세요.”

열 때문에 목소리가 갈라진 채였다. 전화기 너머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그도 제 감정을 참고 있다.

「다 해줄게.」

그 단단한 마음을 듣고 나자 조지현은 자신이 지키려던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대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집으로 돌아가 신발도 벗지 못하고 침대에 누웠다. 정말 죽을 듯이 아팠다. 내장이 불타는 느낌이었다. 지현아, 조지현,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꿈을 꾸었다. 강석원을 보았다. 꿈에서 그는 아픈 자신을 끌어안고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매번 그렇게 그의 존재에 구원받는다.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병원 침대에서 눈을 떴다. 김선우의 부탁을 받은 정태수가 집에 들렀다가 혼절한 조지현을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독감이 발전해 폐에 바이러스성 염증을 일으킨 경우였다. 당분간은 입원해서 지켜봐야 하고, 어쩌면 폐가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으면서 처음 든 생각은 다행이다, 였다. 이번에는 강석원 대신 자신의 인생이 어긋난 것이다.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연락을 받고 온 고모와 고모부가 병실로 들어왔다. 고모의 손에 두른 깁스가 들어왔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바싹 마른 입술로 간신히 그렇게 말했다. 고모는 울음을 터트렸다. 강한 여자였다. 마음도 몸도 누구보다 강한 여자가 그렇게 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픈 애가 자신을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그런 말이냐며 그녀는 눈물을 쏟았다. 죄송합니다. 조지현은 다시 사과했다. 미국에 온 뒤로 그녀는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지현아, 너희 고모랑 상의를 해봤는데, 하면서 고모부가 어렵게 입을 뗐다. 고모는 제 조카에 대한 입양 의사를 밝혔다. 물론 네가 원한다면 말이지. 하며 고모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현아, 어차피 성인이라서 크게 달라질 건 없겠지만, 고모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줄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네가 어떻게 컸을지 생각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며 그녀는 조지현의 손을 쥐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모성의 감정을 받아본 것은. 조지현은 눈을 깜빡이면서 얼굴을 붉혔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더는 폐 끼쳐드리기 싫어요. 조지현이 그렇게 말했을 때, 고모는 고개를 내저었다. 너 이러고 사는 게 더 폐야. 왜 그걸 모르니. 그녀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 제 아내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모부가 그녀를 도닥였다. 지현이 아직 아프니까 천천히 상의합시다. 시간은 앞으로도 많으니. 고모는 일어서면서 얼른 쉬라고 말했다. 부부가 떠난 병실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꿈에서 봤던 강석원의 모습이 떠오른다. 괜한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진다. 남은 시간을 헤아리다가 너무 아득해져 눈을 감았다.

오랜 꿈을 꾸고 싶었다.

뭐? 강석원? 하하하하하. 축하한다. 그래, 한 번은 거쳐야 할 관문이지. 힘내라, 인마. 

강석원을 인터뷰하러 간다고 했을 때, 김경록은 선배들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요? 문제아예요? 

인터뷰를 따기 어렵거나 진행이 어려운 상대를 흔히 문제아라고 칭했다. 거만한 건 기본이고 실컷 떠들어 놓고 지면에 실은 뒤에야 패악을 부린다거나 자기 얘기가 아닌 다른 연예인이나 선수의 욕을 늘어놓는다거나, 등등 이 바닥에서는 흔한 경우였다.

문제아라기에는 좀 미묘하지. 나름 성실하긴 하니까. 

그런데 뭐가 문제인데요?

강석원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주목받는 운동선수였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자마자 프로로 전향 의사를 밝혔고 미국 유명 프로모터와의 계약을 추진 중이었다. 언뜻 보면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 듯하지만, 비 체고 비 체대 출신인 그는 철저한 비주류의 인생이었다. 게다가 체대 입학을 앞두고 당한 사고 때문에 한동안은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고 했다. 피나는 재활 훈련 끝에 다시 운동을 시작했고 정상의 자리에 오른 그의 인생은 지금 같이 빡빡한 시대에 사람들이 좋아할 법한 이야기였다.

야, 야. 그렇게 준비해 갈 것 없어. 어차피 사진만 찍고 올 테니까. 그래도 강석원이 멀끔하게 준비는 잘 해오더라. 인터뷰 내용을 프린트하는 김경록에게 선배 한 명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김경록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강석원이 걔 하는 말이 몇 개 안 돼.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네, 아니요, 노력하겠습니다. 매크로야, 매크로. 넌 적당히 그중에 골라서 인터뷰 내용 작성하면 될 거다. 

김경록은 코웃음을 쳤다. 선배님들 실력이 그것밖에 안 되셔서 그러신 거 아니에요? 사람한테서 이야기를 끌어내려면 그 사람의 인생을 이해해줘야 하는 겁니다. 진심으로. 

김경록이 제 가슴을 치며 말하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잘해 봐라. 예, 잘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두고 보세요.

김경록은 의욕에 가득 차 그렇게 외치고 나온 세 시간 전의 자신을 매우 치고 싶었다.

“한국 선수로서는 최초로 미국의 가장 큰 에이전시와 계약을 하셨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미국 진출에 국민의 기대와 성원이 남다른데요, 각오는 어떠신지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미국 진출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들도 많습니다. 아마추어 선수로 좀 더 활동해서 국가의 위상을 높여줬으면 하고 바라는 분들도 많고요. 여기에 대해서 강석원 선수의 의견은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

인터뷰 진행을 하면서 이토록 어려운 대상은 처음이었다. 선배들의 말대로 강석원은 예, 아니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도에서만 번갈아 대답하고 있었다. 매크로라는 단어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불성실하거나 거만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질문에 나름의 대답을 하고 있고 태도도 반듯했다. 말수가 없어도 너무 없을 뿐이었다.

김경록은 한숨을 내쉬며 강석원을 쳐다보았다. 

걔 인터뷰 있는 날에는 미용실 들러서 머리는 꼭 다듬고 오더라. 옷도 깔끔하게 입고. 그나마 그거에나 감사해. 사진찍기는 좋잖아. 체격이랑 인물 되니 막 찍어도 그림 되고. 

옆자리 선배인 박준혁의 말이 떠올랐다. 눈이 마주치자 강석원이 왜 그러냐는 듯이 눈가를 좁힌다. 

“아닙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할까요?”

“알겠습니다.”

강석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경록은 마른침을 삼켰다. 체고가 올라갈수록 위압감이 엄청났다. 

강석원이 자리를 뜨자 김경록은 한숨을 내쉬며 인터뷰지를 정리했다. 선배들의 말대로 그 다섯 개의 말 중에 적당히 섞어서 남은 내용도 채워 넣으면 될 것 같았다.

“후우…….”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자신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김경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 화장실이 어디인가요?”

카페 직원에게 묻자 직원이 화장실 방향을 가리킨다.

“감사합니다.”

화장실로 들어가 소변기 앞에 섰다. 강석원을 앞에 두고 어찌나 목이 마른지 냉커피만 석 잔째 연거푸 들이켠 탓에 요의가 급했다. 지퍼를 내리고 몸의 긴장을 풀자 오줌 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졌다. 그때 문이 열리고 강석원이 들어왔다. 좁은 공간에 들어서자 그의 체격이 얼마나 좋은지 다시 한 번 깨닫고 만다. 강석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옆에 섰다. 김경록은 저도 모르게 옆을 흘끔 쳐다보게 되었다. 힉, 하고 숨을 삼키며 고개를 바로 했다. 볼일을 마치고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데 강석원도 옷을 추스르며 옆에서 손을 씻는다. 어색한 분위기에 숨이 막혀 김경록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거치지 않은 말을 내뱉고 말았다.

“되게 크시네요.”

단순히 신장이나 체격 얘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면전에서 듣고도 강석원은 별다른 표정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네.”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마치 너 눈이 두 개구나, 하는 정도의 말을 들은 듯한 반응이었다.

김경록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짜 내서 주제를 전환했다. 

“강석원 선수, 여자친구는 있으시죠?”

뱉어놓고도 김경록은 아차, 싶었다. 인터뷰하기 전에 해당 인물에 대한 조사는 필수였다. 그래야 풍부하게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다. 강석원의 인생은 한 글자로 정리하면 운동이었다. 그래서 그가 프로로 전향한다고 했을 때, 의외라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우직하게 운동만 할 것 같은 선수가 지나칠 정도로 빠르게 시장에 나온 게 아니냐는 의견이었다. 거기에는 김경록도 동의하는 바였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뭘 하면서 푸느냐는 질문에 운동이라고 답을 한 사람이었다.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강석원은 딱히 운동 외에는 욕심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이다. 일과가 운동에서 시작해 운동으로 끝난다는 사람인데, 하물며 여자는…….

한숨을 내쉬던 김경록은, 눈을 내리깐 채로 짧게 웃는 강석원을 보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분명 뭔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자의 예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자친구, 있으세요?”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사귀는 사람 있습니다.”

매크로가 새로운 답변을 내놓는 순간, 김경록의 심장은 두방망이질 쳤다. 잘만하면 대박이다.

“자리로 돌아가서 마저 인터뷰할까요?”

강석원이 짧게 고갯짓한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아 김경록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여자친구에 관해 묻기 시작했다.

“여자친구 분은, 그러니까 어디서 만난 분인가요?”

“후배입니다.”

“누구 소개로? 강석원 선수라면 분명 여자분들 대쉬도 많았을 텐데요. 요즘 대세남으로 떠오르고 있잖아요.”

“아닙니다.”

“여자 친구분은 어떤 타입이세요? 남자친구 분이 좀 위험한 운동 한다고 걱정하지는 않으시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강석원은 테이블에 놓인 커피를 마시고 시계를 확인했다.

“이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감사합니다.”

약속받은 시간은 이미 지나 있었다. 강석원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김경록은 초조해졌다. 대박 특종을 앞에 두고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결혼 계획은 없으세요?”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강석원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대꾸했다.

“내년에 다시 만나면 할 겁니다.”

“네? 내년이요?”

강석원은 짧게 고개로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특종이다. 

김경록은 잔뜩 들떠 회사로 복귀했다.

“잘하고 왔냐. 사진만 찍으면 되니까 쉽지?”

“하하하. 선배님들은 정말 일을 너무 날로 먹는 거 아니십니까.”

파일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김경록이 거만하게 웃었다.

“뭐? 무슨 얘기 들은 거 있어?”

“완전 특종입니다, 특종.”

“뭔데, 뭔데.”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김경록이 잔뜩 으스대며 말했다.

“강석원 결혼 소식. 이쯤 되면 대박 아닙니까?”

“뭐? 강석원이?”

“에라이, 미친.”

다들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김경록은 발끈해서 외쳤다.

“아, 진짜라구요. 본인 입으로 내년에 다시 만나서 한다고 했어요.”

“상대가 누군데.”

“후배라는데요?”

다들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왜요? 왜들 웃으세요.”

김경록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옆자리에 있던 박준혁이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걔 남중, 남고 나왔어. 대학은 안 갔고.”

“초등학교 후배일 수도 있잖아요!”

“강석원 나온 초등학교 걔 졸업하고 폐교됐잖아.”

“체육관 후배거나!”

“똥을 싼다, 똥을 싸. 너 걔가 운동했던 체육관 가 봤냐? 시발, 다 쓰러져 가는 건물에, 샤워장도 달랑 한 칸 있는 복싱장을 어느 여자가 다녀!”

“아니, 진짜예요.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니까요. 강석원이 저한테 거짓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김경록이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니가 걔 빡치게 한 거 아니야? 너 강석원이 경기하는 거 제대로 본 적 있냐? 걔가 그래 보여도 진짜 무서운 놈이다.”

“……, 아니 그냥 봐도 무섭던데요. 아 별말 안 했는데.”

“뭐, 네가 몰라도 그쪽에서 기분 나쁜 포인트가 있을 수도 있는 거고. 사람 상대하는 일이 그렇지, 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당분간은 그냥 존나게 쪽 팔린 채로 사는 거야.”

박준혁이 김경록의 어깨를 도닥이며 위로했다.

“그래도 좋은 경험 했다고 쳐라. 내가 봤을 때, 걔는 우리나라에 다시는 없을 천재야. 지금이니까 너 같은 햇병아리도 만나주지, 앞으로는 어림없다. 그래, 직접 본 소감은 어땠어?”

“크던데요.”

“강석원 큰 거 누가 몰라?”

“그거 말고요, 이거.”

김경록이 다리 사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박준혁이 손바닥으로 김경록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미친 새끼.”

“아, 왜 때려요.”

“그걸 또 인터뷰하는 내내 쳐다 봤냐? 이거 완전 변태 새끼 아니야.”

“화장실에서 마주친 겁니다. 아니, 보이는 걸 어떡해요. 제가 보려고 봤어요? 볼 수밖에 없는 사이즈였다고요.”

“아, 이 또라이 새끼. 그래서 강석원이한테 아 존나게 크시네요, 하고 칭찬이라도 해 줬고?”

“……, 그렇게 말한 건 아닌데.”

다시 딱, 하고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아! 선배님! 좀!”

“맞아도 싸. 새끼야. 강석원이 너 왜 엿 먹이려고 헛소리했는지 나는 너무 잘 알겠다.”

김경록이 얼얼한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꿍얼거리자 박준혁이 정색하며 말했다.

“미국이었으면 넌 고소감이야. 한국이라 다행인 줄 알아. 다음부터는 그딴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 알겠습니다.”

김경록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대답했다. 박준혁이 히죽거리며 어깨를 옆으로 붙이며 목소리를 낮춰 묻는다.

“그래, 얼마나 크디?”

김경록이 제 팔뚝을 내려다보며 한 이쯤? 하고 대꾸했다.

“또라이 새끼. 허풍은.”

“아니에요. 진짜 크더라고요. 여자친구 없는 게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죠. 그렇게 큰 걸, 으으.”

김경록이 진저리를 치며 말하자 박준혁이 쯧쯧, 혀를 내찬다.

“있지도 않은 남의 여자친구 걱정은 그만하고 인터뷰 기사 정리나 해서 얼른 올려.”

“알겠습니다.”

김경록은 노트북을 꺼내 전원을 켰다. 사진을 옮기려고 카메라를 꺼내 확인하다가 그는 휴,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또.”

“표정이 다 똑같아서요.”

“그냥 그중에 아무거나 골라 써. 걔 원래 그래. 표정 없어.”

“아니, 분명…….”

여자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에 강석원이 보인 반응은 뜻밖의 것이었다. 무언가 잠시 생각하더니 웃음을 삼켰다. 사랑스러운 존재를 되새기는 듯이.

“분명 있는데…….”

내년에 다시 만나면 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에는 무언가를 열렬히 갈구하는 사람의 설렘이 묻어났다. 사랑해본 자는, 모를 수가 없는.

“에휴, 모르겠다.”

김경록은 결국 가장 빛을 잘 받은 사진을 골랐다. 

그해, 미국 프로 복싱에 진출한 강석원은 네 경기 만에 WBA 세계 챔피언에 등극했다. 이듬해는 동급 WBC까지 석권해, 통합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동양인 불모지로 불리는 헤비급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었다. 강석원은 우리나라를 넘어서 세계에서 주목받는 선수가 된다. 김경록은 이후로 강석원을 공식 석상을 제외하고 만날 기회가 없었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 박준혁의 말대로 모두 이루어졌다.

“오늘도 우리 항공과 즐거운 여행 되셨기를 바랍니다. 가시는 목적지까지 안녕히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기내방송이 시작되자 승객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안전벨트 불이 채 꺼지기도 전에 여기저기에서 일어서는 사람이 보였다.

조지현 역시 초조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벨트를 끌렀다. 브릿지로 걸어가면서 조지현은 숨을 삼켰다. 그간의 날들이 스친다. 여권 심사를 기다리는 중에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몇 번이나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자신의 귀국은 3월 26일이었다. 기억을 잃고 쓰러진 4월 3일에서 8일 전이다. 몇 번이나 강석원에게 말해주었던 날짜다. 자신은 이날 귀국할 거라고. 

입국한 날 피자 배달을 하던 강석원과 만났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한국을 떠나면서 강석원에게 귀국 날짜와 도착시각을 같이 말해줬었다. 강석원이 와줄지는 모른다. 몇 년 전에 말했던 것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확신도 하지 못했다. 바쁜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마음이 변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치미는 설렘은 어쩌지 못했다. 짐을 찾는 도중에도 초조함에 몇 번이나 색이 같은 다른 사람의 짐을 잡을 뻔했다. 일 초라도 빨리 나가서 강석원을 보고 싶었다. 그 생각뿐이었다.

돌아가는 가방 사이에서 자신의 짐을 찾아내 끌어내서 입국 게이트를 통과했다. 밖으로 나온 조지현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조지!”

“어이, 허니! 여기다.”

그를 알아본 친구들이 손을 흔들며 반겼다. 조지현은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다 불렀지. 하하하.”

묻지 않아도 자신이 한 짓을 김선우는 술술 불었다.

“우리 허니 얼굴 본 게 얼마 만이냐. 다들 보고 싶다고 해서 마중하러 왔다. 봐라. 명규는 플래카드도 만들었다고.”

방금 어디선가 주운 종이에 볼펜으로 직직 쓴 우리 허니를 환영합니다, 라는 조악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조지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선우에게는 오늘 입국한다는 말을 했지만, 이게 이런 결과를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회포 풀러 가야지. 형님이 좋은 데 알아놨지.”

김명규가 조지현의 어깨에 제 어깨를 비비적거리며 히죽거리며 웃었다. 조지현이 그를 밀어내며 단호하게 대꾸했다.

“나 피곤해. 바로 가 봐야 해.”

강석원은 보이지 않는다. 그를 오늘 만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친구들과 어울릴 마음은 없었다. 

“비행기에서 잤을 거 아니야. 가자, 가자.”

김선우와 그 친구들의 특징은 장단점을 같이 한다는 것이었다. 조지현이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비행기 연착돼서 거의 스무 시간 동안 앉아있었어. 힘들어.”

“그럼 딱 한 잔만 하면 되겠다. 그렇지?”

이재경이 조지현의 손에서 짐을 빼앗으며 말했다.

“줘.”

조지현이 짐을 도로 빼앗으려고 했지만, 이재경이 이미 짐을 밀면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달라니까. 이재경!”

조지현이 이름을 부르며 그의 뒤를 쫓아가려는 순간,

“어……, ……!”

삽시에 짐을 빼앗긴 이재경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다. 누구도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향했다.

캐리어를 밀며 다가오는 남자의 모습을, 조지현은 숨을 멈춘 채로 바라본다. 

“늦어서 미안.”

나직한 목소리. 

머릿속에서 셀 수도 없을 만큼, 숱하게 떠올리던 그 목소리가 실제의 울림을 갖고 다가온다.

“오는 길에 앞에 사고가 좀 생겨서 늦었어.”

강석원이 캐리어를 손에 들고 조지현의 앞에 선다. 

매일 밤 꿈꾸던 순간이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아득해져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소년에서 남자로 자란 강석원이 조지현을 마주한다. 인터넷으로 경기 장면과 인터뷰 사진들을 봐오긴 했지만, 실물이 주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짙은 남색 슈트가 정제된 남성성을 드러냈지만, 특유의 길들지 않는 흉포한 야생 짐승 같은 눈빛은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었다. 그 간극이 주는 아찔함에 지나가던 여자들이 걸음을 멈추어 서서 강석원을 돌아본다.

“가, 강석원 선수 아니세요?”

김명규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네.”

“아, 영광입니다.”

김명규가 두 손을 내밀었다. 강석원이 손을 마주 잡자 김명규가 고개를 숙여 얼른 악수했다. 이재경도 손을 닦으며 다가왔다. 강석원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들었다.

“팬, 아니었어?”

김선우가 조지현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귓속말을 한다. 조지현에게 매번 스포츠 신문을 배달해줬기에 그냥 많이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구나 하고 짐작했다.

“선배님, ……, 학교 선배님.”

조지현이 가까스로 입술을 뗐다. 선배님, 이란 부름에 강석원의 눈가가 슬쩍 가늘어진다.

“나 먼저 갈게.”

조지현이 홀린듯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뭐? 어딜 가게?”

“나중에 연락해.”

조지현이 그렇게 말하자 강석원은 캐리어를 밀고 앞장서 걷는다. 여기까지 나와준 친구들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그런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공항의 게이트 밖으로 나가는 길에도 강석원을 알아본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용감하게 말을 건네는 사람은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와 다른 사람을 구분 짓는 위압감은 엄청났다.

“피곤하지 않아?”

“괜찮습니다.”

이런 평범한 대화를 얼굴을 보며 한다는 사실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7년간 전화통화를 한 것은 딱 두 번이다. 그로 인해 강석원은 국가 대표 발탁에서 누락 되었고 조지현은 평생 관리를 해야 할 병을 얻게 되었다.

“차 대기 시켜놨어.”

강석원이 주차장에서 대기 중인 고급 세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지현은 강석원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왜?”

“아닙니다.”

그가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뉴스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직접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강석원이 응당 가졌어야 할 미래다.

강석원이 차로 다가가자 기사가 내려 문을 열어주었다. 

“타.”

조지현이 먼저 뒷좌석에 타고 강석원은 캐리어를 트렁크에 실은 후, 옆에 앉았다. 

“아까 부탁한 곳으로 가주시면 됩니다.”

강석원의 말에 기사가 차를 출발시켰다. 

차의 뒷좌석은 보통 승용차보다 널찍했지만, 강석원의 체구 때문에 비좁게 느껴졌다. 차가 차선을 바꾸거나 속도를 올릴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두 사람의 무릎이 닿았다. 피가 바싹 마르고 온몸이 떨렸다. 사춘기 소년이 열렬히 짝사랑하는 스타와 만난 기분이었다. 강석원은 아무런 말도 없다. 괜스레 혼자 들뜬 것 같아서 민망했다. 조지현은 열이 오른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 일부러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문득 차의 진행 방향이 고속도로 쪽이 아님을 깨닫는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가장 가까운 호텔.”

강석원의 대답에 한층 더 심장에 열이 오른다. 조지현은 당황해서 눈을 껌뻑였다.

“비행기 오래 타서 피곤하잖아.”

“아, ……네.”

조지현은 어색하게 대꾸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차는 금세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

“언제쯤 모시러 올까요?”

짐을 내리면서 기사가 묻는다.

“연락드리겠습니다.”

강석원의 대답에 기사는 바로 차를 몰고 사라졌다. 강석원은 캐리어를 들고 호텔 로비로 가서 체크인 절차를 밟았다. 

조지현은 조금 당황했다. 강석원이 말이 없는 성격임을 알지만, 지금 상황은 예상 밖의 수준이었다. 그를 믿지만,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강석원에게 이 약속이 부담스러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다. 지금 보이는 그의 태도도 차가울 만큼 군더더기 없다. 사적인 말은, 한마디도 붙지 않았다.

“조지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조지현은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가자.”

조지현은 얼른 그의 뒤를 쫓아 걸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도 강석원은 이렇다 할 말이 없다. 조지현은 눈 둘 데를 몰라 고개를 떨구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카드를 대고 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에도 어색한 침묵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문득, 강석원의 손이 눈에 들어온다. 불규칙하게 허벅지를 두드리고 있다.

조지현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공중에서 엉킨다. 강석원의 노골적인 시선에 피부가 따끔했다. 조지현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목구멍 안쪽이 근질근질하고 열이 오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간신히 숨만 쉬었다. 땡, 하는 엘리베이터 알림음이 울렸다. 강석원이 엘리베이터를 잡은 채로 조지현에게 먼저 내리라고 손짓한다.

그의 옆을 스치는 순간, 조지현은 무릎에 힘이 풀릴 것 같은 느낌을 간신히 참아냈다. 급작스런 요의에 가까운 감각이 뱃속을 짓눌렀다.

“…….”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강석원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선다. 그러고는 곤란하다는 듯이 낮게 혀를 찬다. 덜컥, 드는 불안감에 조지현은 뭐라고 말을 붙이지도 못했다.

“조지현.”

“네.”

“내가 혹시 착각하고 있는 거라면 솔직히 말해도 돼.”

“무슨 말씀이십니까.”

“몇 년 전의 약속을, 나 혼자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강석원이 곤란하단 표정으로 턱을 쓸어내린다. 그제야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공식 석상에서도 잘 입지 않던 슈트 차림, 손질한 듯한 머리, 잔뜩 긴장한 그의 어깨, 허벅지를 계속 두드리던 손가락.

“……후회되거나 이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돌아가도 돼. 억지로 너 그렇게 할 마음은 없어.”

“…….”

조지현이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껌뻑이자 강석원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준다. 구웅, 하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가 올라왔다.

“선배님.”

조지현이 부르자 강석원의 손끝이 움칫, 떨린다. 커다란 남자가 자신을 앞에 두고 얼마나 긴장하고 두려워하는지, 단번에 느껴진다.

“저는,”

목소리가 떨렸다. 심장에서 뜨거운 피가 북받쳐 오른다. 

“……평생을, 오늘만 기다리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강석원의 나직한 한숨이 들린다. 그의 안도를 머리로 이해한 순간, 바로 손목이 잡힌다. 

“……!”

문이 닫히자마자 남자가 사납게 달려들었다. 등에 벽이 닿았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강석원이 난폭하게 조지현의 재킷을 벗겼다. 조지현도 강석원의 슈트를 벗겼다.

“나, ……, 그때 이후로, 처음이라.”

흐트러진 호흡 사이로 강석원이 속삭이는 말들에 조지현은 저도 그래요, 하고 대답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옷자락을 잡아 뜯었다. 찢겨나간 천을 그대로 걷어내고 강석원은 조지현의 맨살에 제 손을 갖다 댄다. 온기가 도는 몸을 확인하고 더듬으며 남자는 세차게 흥분했다. 조지현은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강석원의 목을 끌어안았다.

“지현아.”

강석원이 조지현을 불렀다. 조지현이 작게 고갯짓했다.

“차에서 미치는 줄 알았어.”

잔인할 정도로 날카롭게 서린 욕망을 문지르며 강석원이 말을 잇는다.

“너 만지고 싶어서, ……, 미칠 뻔했어.”

“저도……, 선배님 만지고 싶었습니다.”

차에서 무릎이 닿을 때마다 몸을 움츠렸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강석원에게 매달려 천잡한 욕구를 드러낼 것만 같았다.

조지현의 바지와 속옷이 단번에 발치로 내려간다. 조지현도 그의 벨트를 끌러 내렸다. 고급 셔츠와 바지가 바닥에 짓밟히고 나뒹군다. 엄청난 갈급을 느끼며 두 사람은 서로를 탐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허벅지를 잡아 벌려 단번에 삽입했다.

“――!”

갑작스러운 삽입에 조지현의 몸이 일순 움츠러든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아랫입술을 씹으며 속삭인다.

“미안해. 못 참겠어.”

“……! ――.”

굵직한 성기가 반 뼘쯤 더 안으로 들어왔다. 조지현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강석원의 목을 끌어안았다. 미안해, 미안해, 지현아, 연신 사과를 하면서도 남자는 허리를 추어올렸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 저도, 계속, ……하아.”

조지현이 강석원의 셔츠 자락을 움켜쥐고 속삭였다. 계속 이렇게 되길 원했습니다. 이어지는 말을 듣는 순간 강석원은 조지현을 끌어안고 그대로 침대로 데려간다.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빠져나갔던 성기가 다시 안으로 쑥 들어왔다. 조지현이 헉, 하고 어깨를 뒤로 젖혔다.

“못 가.”

조지현의 허벅지를 벌리고 붙든 채로 남자가 말했다. 

“이젠, 어디든, 누구한테든, 못 가.”

그날 나누었던 약속이다.

다시 만나면, 절대로 어디에도 가지 않겠다고.

조지현은 남자의 너른 어깨를 끌어안아 당기며 대꾸했다.

“저 선배님 겁니다.”

“…….”

“그러니까, ……아!”

남자가 격렬하게 몸을 부딪쳐 온다. 그는 타고난 파이터였다. 온몸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공격을 퍼붓는 타입이었다.

“아, 하아, 아! 읏, 아!”

조지현이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강석원이 짓치는 대로 조지현의 엉덩이가 무게에 눌렸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눈물이 시큰 돌 만큼 이를 잔뜩 세우고 힘껏 빨아당겼다.

“다시 말해 봐.”

짐승처럼 그가 사납게 을렀다. 영문 모를 말에 조지현이 눈을 크게 뜬 채로 강석원을 올려다본다.

“아까 한 말, 다시, ……, 해보라고.”

“저는, ……선배님, 겁니다.”

“다시.”

“――, 저는 선배님 겁니다.”

“다시!”

조지현은 깨닫는다. 남자의 갈 곳 없는 불안을.

“저는, ……, 선배님 겁니다. 이전에도, 앞으로도 계속.”

퍽퍽, 살을 치고 들어오는 성기의 진입에 조지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당신도 제 겁니다.”

그 한마디에 남자는 무너져 내리듯이 조지현을 끌어안는다. 두 사람의 몸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아, 하아, 흣, ……읏.”

조지현의 성기가 남자의 단단한 배에 닿아 문질러졌다. 강석원이 맹렬하게 공격해 온다. 한동안 출입이 없던 구멍이 한계까지 벌어져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성기의 끝이 깊숙한 곳에 닿는다. 남자의 음모가 한껏 벌어진 구멍에 문질러진다. 조지현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강석원의 팔을 붙들었다. 뱃속에 열이 오른다. 닿을 곳 없이 추락하는 아찔한 감각에 조지현은 숨을 헐떡이며 허우적거렸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입술을 빨아당긴다. 호흡이 섞인다. 아찔하고 달큼한 감각이 붉게 달아오른 혀를 타고 전해진다. 너무 좋으면 눈물이 난다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조지현은 눈물을 흘리며 강석원을 불렀다. 선배님, 선배님, 너무 좋아요, 아, 선배님, 계속해주세요……. 강석원은 조지현의 살갗을 빨아올리고 씹고 핥았다.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물어뜯는 것처럼 자비 없는 남자의 욕구는 낯설었다. 괜찮은지 물어보거나 기색을 살피지도 않는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오직 원초에 가까운 본능이었다. 강석원의 허리를 짓쳐서 내리누른다. 남자의 힘에 무게까지 실려 숨이 턱턱 막히는데도 그는 숨 고를 틈조차 주지 않고 밀어붙였다. 남자의 배에 짓눌린 성기가 아플 정도로 부풀었다. 눈이 마주쳤다. 지현아. 그렇게 불리지도 않았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그것만으로 절정에 다다랐다. 조지현의 성기에서 터져 나온 정액이 두 사람의 가슴과 배를 더럽혔다. 강석원이 정액에 젖은 조지현의 가슴을 빨아당겼다.

“하아……읏.”

조지현이 도리질을 치며 허리를 꺾었다. 강석원의 몸이 일시에 긴장으로 단단하게 굳었다. 본능적으로 뒤로 몸을 빼려는 조지현의 허리를 움켜쥐고 남자는 그 안에 사정을 시작했다. 안이 뜨끈하게 젖어 들어가는 감각은,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굴욕적인 절정이었다.

강석원이 이를 꽉 문 채로 몇 번 더 허리를 추어올렸다. 맞물린 비부 사이로 정액이 찌걱찌걱 새어 나왔다.

조지현이 베개로 고개를 떨구며 숨을 몰아쉬었다. 남자도 그 위로 쓰러지듯 엎드린다. 젖은 호흡이 귓가에 닿는다. 그의 숨소리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그토록 그리워했던.

조지현은 눈을 감고 가만히 강석원의 숨소리를 들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귓불을 입술에 물고 부드럽게 씹는다. 조지현이 하아,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었다.

“지현아.”

나지막한 음성이 귓바퀴를 훑는다. 강석원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단단한 그를 닮아 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팔을 들어 저를 끌어안게 했다.

“보고 싶었어.”

“…….”

뜨거운 것이 왈칵 시야를 가린다.

“너무, 보고 싶었어.”

그리움이란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깊고 지독한 감정이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이해받고 싶지도 않은 감정이었다.

“사랑한다고 말해줘.”

고고할 정도로 강한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굴종하며 사랑을 구걸한다. 조지현은 그를 끌어안고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선배님, 정말로, 사랑해요.

조지현의 고백을 들을 때마다 남자는 그제야 뭍에 건져진 사람처럼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었다. 그가 떨고 있다는 사실을, 조지현은 뒤늦게야 깨달았다.

지현아.

어깨를 흔들며 부르는 소리에 조지현은 간신히 눈을 떴다.

“밥 먹고 자.”

“……, 조금만 더 자고 싶어요.”

“안 돼.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강석원이 조지현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조지현은 부은 눈을 손으로 비비며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밤새도록 남자는 조지현을 범했다. 나중에는 울면서 죽을 것 같다고 빌었지만, 그는 제 욕구를 제어할 수 없다는 듯이 굴었다. 한낮까지 섹스하다 기절하듯 잠이 든 것이다. 식욕보다 수면욕이 먼저였지만, 애초에 체력이 다른 강석원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강석원은 룸서비스로 시킨 죽을 트레이에 얹어서 조지현의 앞에 앉았다. 숟가락으로 죽을 휘휘 저어 식힌 다음 한 숟가락 떠서 조지현의 입에 갖다 댄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조지현이 짧게 웃음을 삼키며 두 손을 들어 보인다.

“알아.”

“제가 먹을게요.”

“먹여주고 싶어.”

조지현을 어린아이처럼 다루는 것은 강석원인데, 일순 그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지현은 하는 수 없이 입술을 벌렸다. 적당하게 식은 죽이 입으로 들어왔다.

“입에 맞아?”

항상 뭔가를 먹인 다음 물어보는 그의 습관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그 말이 퍽, 반가웠다.

“네. 그래도 선배님이 해주신 게 더 맛있긴 합니다.”

“나중에 해줄게.”

얼마든지.

덧붙는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진다. 

“계속 같이 있어도 되는 거지?”

강석원이 묻는다.

사실, 4월 4일 이전에 만나는 것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마주친 것은 오늘이 맞지만, 그때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다. 분명 다시 만나면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조지현은 오늘 만나자고 말해버렸다. 만나는 날을 단 하루 미루고 싶지 않았다.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뒤늦게 더럭, 들었다.

“괜찮아.”

조지현의 표정을 살핀 강석원이 그렇게 말하며 숟가락에 죽을 덜어 입에 가져다준다.

“조금 걱정돼서요.”

어긋난다는 의미를 강석원도 알고 있기에 그 걱정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는다.

“4월 4일까지만…….”

“안 돼.”

강석원의 눈빛이 진해진다.

“나 이제 하루, 아니 한 시간도 너 못 기다려.”

“선배님.”

“운동 못 해도 상관없으니까, 이제 그냥 내 곁에 있어.”

결연한 눈빛이다. 조지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강석원이 죽을 다시 떠서 입에 넣어준다. 죽그릇을 모두 비워내자 강석원이 트레이를 치운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곁에 앉았다.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입술을 쪽, 빨아올린다.

“이제, 뭐하실 거예요?”

조지현이 눈을 반쯤 내리감은 채로 물었다.

“하던 거 마저 해야지.”

“네?”

“온종일, 너랑 섹스하고 네 안에 사정할 거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의 직설적인 말에 조지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전에 강석원이 안에 사정하는 일은 드물었다. 콘돔을 사용하거나 여의치 않을 때는 직전에 빼서 사정했다. 생각해보니 만나고 나서는 계속 안에 사정하고 있다. 마치, 수컷이 제 것에 마킹하듯.

“싫어?”

그가 묻는다.

“싫을 리가, 있겠습니까.”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다는 듯이 강석원이 입술을 당겨 웃는다.

“이리 와.”

강석원이 팔을 벌린다. 조지현이 그에게 다가가자, 강석원은 시트째 조지현을 바투 끌어안는다.

“선배님.”

“응.”

“목욕하고 나서 하면 안 될까요. 저 아직 몸이 덜 풀려서…….”

조지현이 주저주저 묻는 말에 강석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뜨끈한 기운이 전신을 휘감았다. 긴장되어 있던 근육과 뼈가 일제히 노곤하게 풀리는 감각에 조지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좋아?”

강석원이 묻는다. 조지현이 눈을 감은 채로 네, 하고 대답했다. 강석원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연착해서 스무 시간 가까이 앉아 있었어요.”

조지현이 변명처럼 말을 이었다.

“허리 아파?”

“네. 조금.”

“주물러 줄까.”

조지현이 눈을 크게 뜬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리와. 근육 뭉쳐서 그런 걸 테니까.”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앞에 앉힌다. 스위트룸답게 성인 남자 둘이 들어가도 넉넉할 만큼 욕조의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같이 들어가자는 말을 들었을 때 조지현은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 그냥 혼자 하겠습니다. 강석원은 욕조에 물을 받으며 대꾸했다. 안 돼. 이것 때문에 이 방 예약했어. 그리고 제주도에서 못했잖아. 강석원이 제주도에서 욕조를 신경 썼었는지 전혀 몰랐다. 하는 수 없이 둘이 같이 욕조에 들어오게 되었다.

“어때.”

강석원이 조지현의 허리를 은근하게 조물조물 누르며 묻는다.

“괜찮습니다. 아, …….”

조지현이 설핏 눈가를 좁힌다. 뭉친 근육이 풀어지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삼킨다.

“살은 별로 안 붙었네.”

“네.”

강석원의 손이 조지현의 허리를 더듬듯이 훑는다.

“더 붙어야 할 텐데.”

“간지럽, ……습니다.”

허리를 비틀었는데도 강석원의 손은 조지현의 옆구리를 더듬었다. 조지현은 그제야 강석원이 장난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로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선배님. 조금 짓궂어지신 거 아십니까?”

“그래?”

강석원이 대답하며 웃는다. 그러고는 이내 질문을 던진다.

“다른 건?”

“네?”

“다른 건 뭐가 변한 거 같아.”

강석원의 물음에 조지현은 그제야 남자를 찬찬히 살핀다. 청동 조각을 연상시키는 얼굴은 이전보다 몇 배는 더 남자다워지고 아름답게 다듬어졌다. 그가 표지를 장식한 잡지가 최근 늘어가고 있음을, 조지현은 스크랩의 횟수를 통해 알고 있었다.

“멋있어지신 거 같습니다.”

강석원이 짧게 웃으며 그리고? 하고 되묻는다.

“키는, ……더 크신 건가요?”

“조금 더 컸어. 넌?”

저는 그대로입니다, 조지현이 한숨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키도 몸무게도 열여덟의 그 날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게.”

강석원이 조지현을 바라보며 꿈꾸듯 중얼거린다.

“정말 그대로다.”

남자의 시선이 조지현을 샅샅이 훑는다. 그의 시선이 더듬는 궤적을 따라 열이 오른다.

“너는 변한 게 없어.”

황홀에 젖은 눈빛을 하고 남자가 감상을 말한다. 

“그래서 믿기지 않아.”

“…….”

“꿈꾸는 것 같아서, ……, …….”

강석원의 낮은 음성이 젖은 공기에 마찰된다. 조지현은 몸을 앞으로 숙여 그에게 키스했다. 그의 무릎에 몸을 기댄 채, 조지현이 말했다.

“꿈 아닙니다.”

강석원이 물에 젖은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겨 준다.

“변하긴 했다.”

조지현이 그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더 예뻐졌어.”

물이 참방거리며 수면이 흔들렸다. 깊게 입을 맞추던 두 사람의 몸이 떨어진다. 강석원의 시선이 조지현의 다리 사이에 머문다. 마른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체모를 적신다.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에 짙은 욕망이 서린다. 얼굴로 피가 몰렸다. 국부를 가릴 새도 없이 강석원이 단박에 두 사람의 거리를 좁혔다. 뒷머리가 잡힌 채 난폭한 키스가 이어진다. 강석원이 조지현을 끌어안아 샅을 맞대게 했다. 손끝 하나 대지 않았는데 거의 일자로 선 성기를 조지현의 다리 사이에 문질렀다. 온종일 욕구를 채워놓고도 한참 모자란다는 듯이 그는 제 굶주림을 드러냈다. 살이 뽀얗게 오른 엉덩이를 한껏 움켜쥐고 강석원은 조지현의 몸을 제 성기에 문질렀다. 조지현이 아, 하고 신음을 내자 강석원이 젖은 입술을 물어뜯고 혀를 빨아올린다. 뜨거운 물에 말랑해진 입구를 더듬었다. 구멍을 손가락 두 개로 벌리고 중지를 집어넣는다. 욕조에 담긴 따뜻한 물의 수면이 찰박찰박 흔들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반쯤 주저앉은 터에 강석원이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뜨거운 물이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조지현의 눈가가 붉어지고 반쯤 벌어진 입술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온다. 굵직한 손가락이 푹푹 구멍을 드나들며 아래를 풀어냈다. 손가락 개수가 늘어날 때마다 조지현은 가쁘게 숨을 내뱉으며 강석원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빨리.”

조지현이 작게 그를 보챘다.

“뭘.”

“……, 아, 읏, ……. 하아.”

겹쳐진 손가락이 얕고 깊게 출입을 거듭하며 내벽을 휘저었다. 조지현이 허리를 움찔거리며 강석원에게 매달렸다.

“선배님, ……, 응, ……, 응. 읏.”

강석원은 턱을 단단히 당겨 제 욕구를 누르고는 끈질기게 묻는다.

“말해.”

“……, 넣어주세요.”

조지현이 발갛게 흥분한 성기를 강석원의 팔에 문지르며 졸랐다. 강석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엉덩이를 움켜쥐고 벌려 성기를 쑤셔 박는다. 단단한 살덩이가 부어오른 내벽을 가르고 안으로 점점 들어온다.

“아, ……, 하아, 응, 읏.”

강석원이 허릿짓을 할 때마다 구멍으로 뜨거운 물이 같이 밀려들어 왔다. 안에 뼈가 선 듯이 단단한 성기가 매번 사정하는 것만 같다.

“선배님, ……하아, ……물이, 자꾸…….”

강석원이 조지현의 유두를 입에 넣고 갈작갈작 씹으며 왜, 하고 물었다.

“물이 들어와서, ……, 기분이 이상합니다.”

“어떤데.”

“……, 무서워요.”

조지현이 울먹이며 말하자 강석원이 안고 있던 조지현을 욕조에 엎드리게 한다. 손가락을 넣어 쑤시자 물이 다리 아래로 주르륵 쏟아진다. 실금이라도 하는 것 같아 조지현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강석원의 굵직한 손가락이 안쪽을 이곳저곳 더듬으며 물기를 긁어냈다.

“안에 조금 고여 있어.”

강석원이 엎드린 채로 조지현의 귓가에 속삭인다.

“더 빼줄까?”

조지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대답을 듣자마자 강석원은 손가락을 빼고 자신의 성기를 박아 넣는다. 지금까지 참은 것이 신기할 만큼, 그의 살덩이가 빳빳하게 부풀어 있다. 욕조 끝을 붙든 조지현의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

이미 오늘 하루 몇 번이나 사정했는데, 남자의 기세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는다. 마치 7년간 쌓인 것을 오늘 모두 해소하겠다는 듯이, 그는 달려들었다.

“선배님, 아, 아……!”

낮게 쉰 조지현의 목소리가 욕실의 천장에 닿아 울렸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어깨를 물고 살갗을 씹는다. 희미한 고통이 쾌감에 뒤섞였다. 남자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 반동에 욕실의 물이 출렁거렸다. 젖은 체모가 입구에 부딪히고 비벼졌다. 남자가 뜨거운 숨을 뱉으며 조지현의 성기를 움켜쥔다. 나올 것도 없이 빳빳하게 일어서기만 한 살덩이를 쥐고 아래위로 흔들자 조지현은 흐느끼듯 울며 헐떡였다.

“하아, 아, 선배님, 응……. 읏!”

어린아이가 찔끔 소변을 누는 것처럼 맑은 액이 강석원의 손바닥을 적셨다. 절정에 다다른 몸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성기를 오물거리는 듯한 구멍의 움직임에 강석원은 눈가를 찌푸렸다. 강석원이 봉긋하게 솟은 조지현의 엉덩이를 있는 힘껏 움켜쥐고 제 욕구를 찔러넣었다.

“――!”

눈앞이 핑그르르 돌 만큼, 고조된 오르가슴이 남자의 전신을 할퀴고 지나갔다. 강석원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로 허리를 몇 번 더 박아 올렸다. 조지현의 안이 정액으로 젖어들었다.

두 사람의 흐트러진 호흡 소리만 이따금 들렸다. 몇 초 뒤, 욕조의 물로 뿌연 정액이 뚝 뚝 흘러내렸다.

“지금은?”

“……, 네?”

“지금도 무서워?”

강석원의 정액이 구멍 안에 고여 있다. 물이 들어오는 것과 다르긴 해도 비슷한 감각이었다. 강석원이 굳이 이 질문을 하는 이유를 조지현은 알고 있었다.

“무섭지 않습니다.”

조지현이 덧붙였다.

“선배님이 하시는 건, 다 괜찮습니다.”

조지현이 누구의 소유인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그의 집착과 불안이 안쓰러웠다.

강석원이 몸을 뒤로 빼자 성기와 함께 고여있던 정액이 후드득 흘러내렸다. 뿌옇게 흐려지는 욕조의 물을 보고 조지현이 언뜻 눈가를 찌푸리며 말했다.

“물 다시 받아야겠네요.”

“왜?”

강석원이 묻는다. 조지현이 눈을 껌뻑거리자 강석원이 평연하게 덧붙이며 조지현을 끌어안았다.

“어차피 계속 더러워질 텐데.”

“깼어?”

잠에서 깬 조지현을 보며 강석원이 묻는다. 조지현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뺨에 입을 맞춘다.

“뭐 먹을래?”

“아니요. 괜찮습니다.”

호텔에 들어온 이후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모든 식사는 룸서비스로 주문해 해결했다. 밥 먹고 졸리면 잠을 자고 섹스를 하고 다시 서로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그 어떤 이성적인 사고도 끼어들지 못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먹어야지.”

“이따가요.”

“나 씻고 나올 테니까, 뭐 먹을지 생각해 둬.”

조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석원은 조지현의 이마에 한 번 더 입을 맞추고 몸을 일으켰다. 꽉 짜인 그의 등 근육을 보며 조지현은 그가 보냈을 인고의 시간을 감히 짐작해 본다.

강석원이 욕실로 들어가자 물소리가 들렸다. 한숨 더 잘까 하고 눈을 감았던 조지현은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 숨을 삼켰다.

“선배님.”

“응.”

물소리에 섞여 강석원의 대답이 들려온다.

“저 전화 좀 써도 됩니까.”

“재킷 주머니에 있어.”

“네.”

조지현은 침대 옆에 던져둔 강석원의 재킷 주머니를 뒤적였다. 손끝에 걸리는 금속의 감촉에 이것인가 싶어 움켜쥐고 꺼냈다.

“…….”

무심코 버튼을 눌렀다가 화면에 뜬 사진을 보고 조지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때 샤워기를 잠그고 강석원이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

“안쪽주머니 말고 바깥쪽에…….”

눈이 마주쳤다. 조지현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발견한 강석원이 낮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린다.

“이거, 계속 쓰고 계시는 겁니까.”

벌써 7년이었다. 아니 그전부터 썼으니 햇수로는 7년을 훌쩍 넘을 것이다. 한 기종을 계속 사용할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바탕 화면의 사진은…….

“바꾸기 뭐해서.”

강석원이 조지현이 든 핸드폰을 빼앗고 주머니를 뒤적여 신형 핸드폰을 건넨다.

“두 개 쓰세요?”

“이건 너하고만.”

강석원이 겸연쩍은 듯 말하고는 바로 덧붙인다.

“바탕 화면 아무한테도 안 보여줬어. 걱정 마.”

“……, 네.”

아무리 그래도, 왜 하필이면…….

“좀 잘 나온 사진으로 하지 그러셨어요.”

편의점에서 갑작스럽게 강석원이 찍었던 사진 속의 자신은 놀란 듯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것밖에 가진 게 없어.”

그렇게 말하는 강석원의 목소리가 조금 불퉁했다. 조지현은 웃음을 삼켰다.

“나중에 찍어요. 선배님도 저 때문에 많이 찍으셨으니까.”

여전히 사진 찍는 것이 고역이었지만 자신을 위해 그간 인터뷰 때마다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머리를 손질한 남자를 떠올리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 알고 있었어?”

“어떻게 모릅니까.”

강석원의 성격을 고려하면 그간 언론의 노출 횟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딱히 뭔가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강석원은 말없이 사진만 찍혔다. 마치 사진을 찍히기 위해 공식 석상에 서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게 누구를 위한 일인지 조지현은 알고 있었다.

강석원이 턱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됐어. 이제 그것도 끝이니까.”

조지현은 가서 씻으세요, 하고 강석원을 등을 밀었다.

“전화 오는 거 받지 말고.”

“네.”

호텔에 머무른 첫날, 빗발치는 전화에 강석원은 일찌감치 전원을 꺼버렸다. 전원을 켜자마자 문자와 메시지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무시하고 김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몇 번 들리고 나서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김선우. 나야.”

「야! 너!」

“미안해. 연락한다는 게.”

「너 진짜 죽는다. 그러고 가서 전화 한 통을 안 하냐! 혹시 무슨 일 있나 걱정했잖아.」

“미안해.”

변명의 여지가 없다. 

김선우의 결혼식을 앞두고 2주 전으로 귀국 일정을 잡았다. 이 사실을 알렸을 때, 김선우는 너 잠은 어디서 자냐? 하고 물었다. 게스트 하우스 같은 거 빌리지, 하고 대답하자 김선우가 바로 대답했다. 야, 나 쓰던 방 하나 있어, 거기로 들어 와. 그 방이 소위 사람들이 일컫는 방이 아님을 알기에 조지현은 바로 거절했다. 나 신혼집으로 이사했는데 아직 거기 짐 정리가 덜 돼서 처분을 못 했단 말이야. 어차피 신혼여행 갔다 와서 천천히 할 생각이니까 잔말 말고 그냥 들어와. 괜찮다는 말, 하지 마라. 니가 항공권 사려고 어떻게 일했을지 아니까. 그의 아파트를 쉐어하는 동안 조지현은 한 번도 렌트비를 밀려본 적이 없었다. 코피를 쏟아가며 아르바이트를 한 비용으로 모든 것을 충당했다. 나 돈 잘 벌어. 조지현이 그렇게 말해도 김선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귀국하면 보자. 아파트 출입 키 그때 줄 테니까. 부조 얼마나 달라고 이러는 거냐고 묻자 김선우가 크게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 결혼식 부조 안 받아. 인마. 조지현이 뭐라고 덧붙이기 전에 김선우는 그때 보자,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정말 미안해.”

분명 열쇠를 건네주려고 내내 연락을 기다렸을 것이다.

「너 당장 핸드폰부터 사. 사람이 연락이 돼야 걱정을 하든 안 하든 하지. 경찰에 가야 하나 고민했다고.」

“알았어.”

「어, 그냥 해본 말인데. 진짜 사려고?」

“응, 사야지.”

휴대폰을 사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것이 해소된 것이다.

「잘 생각했어. 야, 부모님이랑 유경이가 너 보고 싶대. 시간 좀 내.」

“내가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샤워를 마친 강석원이 허리에 타월을 두르고 나왔다.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는 몸이었다. 조지현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김선우에게 그럼 나중에 통화하자, 하고는 통화를 마쳤다.

“누구?”

“선우요. 친구.”

“흰색 셔츠?”

“네?”

“네 옆에 서 있던.”

조지현은 공항에서 보았던 김선우의 모습을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다. 강석원의 등장과 동시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그 밖의 것들은 거의 기억에 남지 않았다.

“흰색 셔츠였나요.”

“키 180정도에, 남색 바지. 호남형. 바로 네 옆에 서 있었던 사람.”

“……, 맞나 봅니다.”

“친해?”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조지현은 네, 하고 순순히 대답했다. 김선우는 고마운 친구였다. 이런저런 일들로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인간적으로 그를 좋아했다. 

“많이 친했나 보네.”

강석원이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내며 말한다.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선배님이 신경 쓰시는 일은 없었습니다.”

“내가 신경 쓰는 일?”

강석원이 되물었다. 조지현은 그제야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았다. 애당초 강석원이 신경 쓰는 일의 범위도 알지 못했다. 조지현의 당혹을 알아챘는지 강석원의 입가가 느슨하게 풀린다. 

“뭘 신경 쓸 것 같아?”

조지현이 어물거리며 대답하지 못하자 강석원이 중얼거렸다.

“난 그렇게 관대하지 않은데.”

“걔, 다음 주에 결혼합니다.”

강석원이 가늘게 웃는다. 조지현은 그제야 놀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가를 찌푸렸다.

“선배님, 진짜…….”

조지현이 말을 마치기 전에 벨 소리가 울렸다. 부재중 통화로 몇 번이나 찍혀 있던 이름이었다. 강석원이 그걸 보고 한숨을 내쉰다.

“받아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호텔에 들어온 지 벌써 닷새째였다. 자신이야 그렇다 쳐도 강석원은 업무가 많은 사람이었다.

“저 씻을게요. 선배님 전화 받으세요.”

“그래.”

강석원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샤워하고 머리를 감고 나오니 강석원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네. 부탁드립니다.”

강석원이 조지현에게 앉으라고 눈짓한다. 조지현은 거실 의자에 앉았다. 통화를 마친 강석원이 헤어드라이어기를 찾아와 전원을 연결했다.

“이리 와.”

조지현은 그의 앞으로 가서 앉았다.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주며 강석원은 뭐 먹을래, 하고 묻는다.

“나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

대답이 없다. 정곡을 찔린 것이다. 그가 누군가에게 호텔의 위치와 호수를 말해주는 것을 들었다. 자신은 가져온 짐에 갈아입을 옷이 있지만, 강석원은 그게 마땅치 않았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그냥, 이런저런 일들.”

이런저런 중요한 일을 무산시켰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저도 볼일 있어서 나가보긴 해야 합니다.”

“무슨 일.”

“서류 정리할 게 있습니다. 열쇠도 받아야 하고요.”

“열쇠?”

강석원이 눈썹을 치켜올린다.

“……. 한국에 머무는 동안 선우가 집 빌려준다고 했습니다.”

강석원이 입을 다문다. 미묘한 침묵이 이어진다. 머리카락이 바싹 마른 후에야 그는 조지현을 놓아준다.

“다 됐어.”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조지현의 목덜미를 남자가 한 손으로 쥐고는 입을 맞춘다. 짧게 끝날 거라 여겼던 입맞춤은 의외로 끈질기게 이어졌다. 조지현이 가쁘게 숨을 할딱이며 강석원의 어깨를 밀어낸 후에야, 강석원은 뒤로 물러섰다.

“방금 그건 신경 쓰여.”

강석원이 조지현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중얼거렸다. 

“하아.”

조지현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았다.

결국, 강석원과 한 번 더 소파 위에서 몸을 겹쳤다. 그러고 나서야 호텔 방을 나올 수 있었다. 호텔 로비에서 강석원과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에 강석원은 자신이 사용하던 구형 핸드폰을 건넸다. 갖고 있어. 전화할 테니까.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었다. 끝나면 바로 전화할게. 알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강석원은 제가 사용하는 다른 번호를 입력해주었다. 호텔 앞에서 대기하던 차를 타고 두 사람은 서울로 나왔다. 조지현을 시내에 데려다주면서도 강석원은 영 마뜩잖은 표정이었다. 계속 연락할게요. 조지현은 그렇게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병원에 들러 검사 일정을 잡고 서류 정리를 한 뒤에 김선우를 만났다가 엉겁결에 붙들려 집까지 들어갔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은 조지현을 진심으로 반겨주었다. 특히, 김선우의 부모님은 조지현을 은인으로 대했다. 유학생활 중에 김선우는 클럽에서 만난 질 나쁜 친구들에게 몇 번 약을 받아온 적이 있다. 부유한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술에 잔뜩 취한 상태에서 그는 별생각 없이 약을 삼켰다가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새벽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조지현이 그를 발견하고 완벽하게 응급조치를 해서 살려냈다. 이후로 김선우는 새사람이 된 것처럼 살았다. 조지현이 한국에 전화를 걸어 그의 부모에게 모든 사실을 알린 수고를 아끼지 않은 덕도 있었다. 김선우의 부모는 조지현이라면 집문서라도 내줄 만큼 예뻐했다. 오랜만인데 그냥 가는 게 어디 있어요. 결혼식 전에 온다고 해서 안 그래도 언제 오나 계속 기다렸어요. 머리가 하얗게 센 김선우의 어머니는 조지현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지현이 학생 때문에 우리 선우 살아난 거 생각하면 지금 생각해도 정말 고마워요. 김선우는 그 집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늦둥이 막내아들이었다. 조지현은 하는 수 없이 저녁 식사 자리에 동참했다. 식사 내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손위 형제를 제치고 장가를 가는 막내에게 형들은 애정 어린 구박을 아끼지 않았다. 조지현은 말 많은 친구가 형들에게 당하는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았다. 

도중에 강석원에게 몇 번 연락이 왔다. 조지현은 바로바로 답장을 보내고 전화를 걸기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김선우의 셋째 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누구냐고 물었다. 조지현이 당황해서 대답을 못 하자 바로 추궁이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조지현에게 좋은 아가씨를 소개해주겠다고 형들이 몇 번 오지랖을 부렸었다. 조지현은 진땀을 흘리며 간신히 둘러댔다. 왜 제 친구한테 그러세요. 김선우가 거드는 척, 조지현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빼앗으려 했다. 가까스로 핸드폰을 사수하고 식사를 마쳤다. 

티타임까지 가진 후에야 김선우가 사용하던 아파트로 올 수 있었다.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많은 사람에 섞여 대화하는 것은 확실히 피곤한 일이었다. 느른하게 앉아있던 조지현은 한참 뒤에 고개를 들고 아파트를 살폈다. 짐을 빼던 중이라는 말이 영 거짓은 아닌지, 아파트는 휑하게 비어 있었다. 가구도 빌트인을 제외하고 소파와 침대, 협탁 하나만 뎅그러니 놓여 있었다. 지내기엔 불편함이 없는 정도였다.

차에서 내려주던 강석원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언짢은 기색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사실 김선우가 머물 곳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조지현은 강석원의 집을 떠올렸다. 하지만 연락도 하지 않고 당연하게 그의 집에서 몇 주간 머무르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조지현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기계의 모서리가 닳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사용한 햇수에 비해 관리가 잘 되어 있다. 그가 얼마나 곱게 사용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버튼을 누르자 어색한 표정을 지은 자신의 사진이 보인다. 핸드폰을 받을 때 조지현은 혹시 배경화면을 다른 사진으로 교체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강석원은 몹시 단호한 어투로 거절했다. 절대 안 돼. 여지조차 없는 목소리였다.

소파에 앉아 오래전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지나온 날들이 생각난다. 한국에서 떠나온 이후로는, 한 번도 기억을 잃은 시점으로 돌아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된 강석원이 떠오른다. 이번에는 반드시 당신을 지켜주겠다고, 절대로 이런 미래가 오지 않도록, 지켜줄 거라고 그에게 약속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조지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평소보다 큰 달이 건물 사이에 걸려 있다. 텔레비전을 켜면 어김없이 최대의 우주쇼에 대한 뉴스를 떠들었다.

그날이 다가오고 있다. 강석원을 만난 행복도 잠시, 불안이 심장을 짓누른다. 4월 4일이 지나고 나면, 이 기나긴 하루는 어떻게 되는 걸까. 거기에 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조지현은 한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그때 벨 소리가 울렸다. 조지현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선배님.”

「어디야.」

“아까 말씀드린 거기요.”

「문자로 주소 보내줘.」

“지금 오시게요?”

전화기 너머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린다.

“술 드세요?”

강석원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렇게 됐어, 하는 목소리에 마뜩잖은 기색이 느껴진다.

「감독님이 이번 주에 결혼한다고 해서.」

“결혼 시즌이라서 그런가 봐요.”

「이따가 갈게.」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10시가 넘어있다.

“선배님 내일 봬요. 내일 아침에 장소 말씀해주시면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강석원이 미안해, 하며 사과했다.

“아니에요. 내일 어디로 갈까요.”

「내가 데리러 갈게.」

“알겠습니다.”

「잘 거야?」

“네. 시차 적응이 아직 안 됐나 봅니다.”

지금도 눈이 무겁다. 한국에 오자마자 강석원과 호텔에만 있었지만, 엄밀히 말해 쉬었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래. 잘자.」

“네. 선배님도 잘 들어가세요.”

강석원은 바로 전화를 끊지 않았다. 조지현이 먼저 끊길 기다리는 것이다. 조지현은 선배님, 하고 그를 불렀다.

「응.」

“보고 싶습니다.”

강석원이 나직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그가 제 마음을 바로 고백한다. 

“끊을게요.”

조지현은 전원 버튼을 눌렀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욕실로 들어가 씻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몇 번 몸을 뒤척이지 않고 잠이 들었다. 

깊은 잠을 깨운 것은 어디선가 쿵쿵 울리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비가 내려서 천둥이 치는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소리는 규칙적으로 끈질기게 들려왔다. 조지현은 눈가를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온몸의 피가 서늘하게 굳는다. 한밤중에 어머니가 집으로 찾아오는 악몽은 숱하게 꿨다. 차갑게 식은 손으로 침대 끝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겉옷을 걸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꿈은 현실을 헤치지 못합니다. 그것부터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의사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꿈이다, 꿈일 뿐이다. 조지현은 숨을 몰아쉬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린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할 상황에 서서 조지현은 마른침을 삼킨다.

“누구세요.”

간신히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지현아.”

뜻밖의 목소리에 놀란 조지현이 얼른 현관문을 열었다. 강석원이 서 있다.

“선배님? 어쩐 일이세요. 이 시간에…….”

“…….”

강석원이 말없이 조지현을 응시한다. 그의 숨결에서 느껴지는 술기운에 조지현이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술 취하셨습니까?”

“응.”

강석원이 순순히 자신의 술기운을 고백한다. 조지현은 문을 닫고 그를 들어오게 했다.

“얼마나 많이, …….”

강석원이 조지현의 팔을 붙들어 제 품에 가둔다. 숨이 막힐 정도로 세게 끌어안긴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들숨에 몸냄새를 들이켠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으로 조지현의 등뼈를 더듬어 확인한다. 조지현은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는다. 

존재를 확인한다. 안도한다. 부정한다. 불안해한다. 다시 확인한다.

강석원은 몇 번이고 그걸 반복하며 조지현의 몸에 저를 가져다 댄다.

“꿈 아니라고 해 줘.”

“꿈 아닙니다.”

“자고 일어나면 그대로 사라질 것 같아.”

호텔에서 한 번도 강석원이 잠든 모습을 보지 못했다. 자고 일어나면 항상 강석원은 옆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심장이 저미듯 아프다. 그의 불안을 키운 것은 자신이었다.

조지현은 강석원의 등을 가만가만 쓸어내려 주었다.

“어디 안 갈게요.”

강석원을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선배님이 저 싫다고 하셔도, 안 갈 거예요.”

강석원이 고개를 든다. 

“……, 내가 어떻게 너를 싫어해.”

마치 신앙을 부정당한 듯한 신실한 신자와 같은 말투다. 조지현은 강석원에게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요. 속삭임이 끝난 것과 동시에 남자가 짐승처럼 달려들어 조지현에게 폭풍 같은 키스를 퍼붓는다. 옷이 끌어 내려지고 그에게 안긴다.

꿈이라면 깨지 않길.

강석원을 만난 이후로 자신 역시 늘 바랐던 생각을 삼키며 조지현은 눈을 감았다.

잠든 강석원을 바라보았다.

며칠간의 잠을 몰아 자는지 깊게 잠들어 있다. 

곧은 콧대, 부드러운 입술, 강인해 보이는 턱, 서늘한 눈매. 한참을 들여다봐도 지루하지 않다.

시계를 확인하니 오전 9시가 넘어있다. 몸을 일으키려다 조지현은 허리 아래서 올라오는 통증에 신음을 삼켰다. 침대에 엎드린 채로 한참을 숨을 골랐다. 몸이 아프고 힘들어도 그가 자신을 원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뭐든 들어주고 싶었다.

그래도 당분간은 조금 자제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조지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음료수와 생수, 맥주만 눈에 들어왔다. 김선우다웠다. 이것도 그나마 조지현이 당분간 묵는다니 구색을 갖춰놓은 게 분명했다. 조지현은 옷을 껴입고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상가에 있는 마트로 가서 간단하게 장을 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현관 열쇠를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문이 벌컥 열린다.

“…….”

밖으로 나오려던 강석원과 눈이 마주친다. 바지만 입고 한 손에는 미처 입지도 못한 셔츠를 든.

조지현을 발견하자 강석원이 한숨을 내쉰다. 안도도 잠시,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온다.

“어디 갔다 왔어.”

“아래 마트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너무 곤히 잠드셔서, 말씀 못 드렸습니다.”

강석원과 호텔에서 같이 보낸 게 닷새였다. 그간 한숨도 자지 못했다면 인간적인 한계에 다다라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깨워.”

조금 날 선 목소리였다. 조지현은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강석원이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올린다.

“미안해. 화내려던 건 아니었어.”

“아닙니다. 말씀드리지 않고 가서 죄송합니다.”

그저 강석원이 조금이라도 편히 자길 바랐을 뿐이었다. 제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는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맨발로 달려 나오던 남자를 마주한 순간 깨달았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에 든 봉투에 그제야 눈을 돌린다.

“그건 뭐야.”

“아침 식사해드리려고요.”

강석원이 눈을 슬쩍 치뜬다. 거기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다.

“간단한 건 만들 줄 압니다.”

미국에서 거의 모든 식사는 만들어 먹었다. 최대한 생활비를 아끼려면 어쩔 수 없었다. 강석원이 미묘하게 어긋난 표정으로 조지현을 내려다본다. 마치 잠시 눈을 뗀 사이, 자신의 아이가 걸어 다니고 말하는 것을 놓친 부모 같은 표정이다.

“씻고 나오세요. 아침 차려놓겠습니다.”

“그래.”

강석원이 욕실로 들어갔다. 그가 씻는 동안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었다. 샤워하고 나온 강석원이 식탁에 앉아 조지현이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왜 그렇게 보세요?”

“신기해.”

“뭐가요?”

강석원이 턱을 괸 채로 입술을 당겨 웃는다.

“많이 컸구나 싶어서.”

얼굴이 달아오른다. 조지현은 얼른 뒤를 돌아 한소끔 끓어오른 콩나물 국의 간을 본다.

“밥 드셔도 되는 겁니까?”

조지현은 준비하며 물었다. 강석원은 운동선수였다. 시합을 앞두고는 엄격하게 식단제한을 했다.

“당분간은 괜찮아.”

“다행이네요.”

밥이 다 되자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고 준비한 요리를 옮겨 담았다. 조지현은 음식을 차려놓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썩 대단한 음식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처음으로 강석원에게 만들어준 음식이었다.

강석원이 음식을 맛보는 동안 저도 모르게 그의 기색을 살피게 된다.

“괜찮으세요?”

“응.”

맛있어.

그가 바로 뒷말을 덧붙였다. 조지현은 안도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아침을 먹는 동안 두 사람은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다.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이따금 들릴 뿐이었다.

“오후에는 뭐하실 거예요?”

조지현의 질문에 강석원이 입을 다문다. 오늘도 중요한 일정이 잡혀 있는 게 분명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어디 들러야 합니다.”

“몇 시에 끝나?”

“네다섯 시면 끝날 거예요.”

정리할 서류들이 있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예약해둘게.”

“선배님이 해준 음식 먹고 싶습니다.”

조지현의 말에 강석원이 넌지시 웃는다.

“그럼 집으로 와.”

“주소 알려주세요.”

“예전 거기야.”

조지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식사를 마친 강석원이 식기를 정리하며 말을 잇는다.

“이사 안 했어. 계속 거기 살아.”

아주 비좁고 낡은 연립 주택이었다. 강석원이 쌓은 명성과 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혹시 몰라서.”

강석원의 한마디에 그가 이사하지 못한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아이를 길에서 놓친 부모는 영영 이사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 아이가 언제든 집에 찾아올 수 있도록.

“설거지 내가 할게. 아침 잘 먹었어.”

강석원이 싱크대에 식기를 가져다 두며 말한다. 

무엇하나, 빠짐없이, 좋지 않은 게 없다.

그를 더 사랑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할 만큼, 사랑했다. 틀린 생각이었다. 다시 만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전보다 몇 배는 더 강석원이 좋아지고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금방 왔네.”

“네. 바로 앞에서 전화 드린 거라서요.”

“들어와.”

강석원이 현관문을 열어주며 옆으로 비켜선다. 

“청소는 했는데, ……, 좁아서 좀 불편할 수 있어. 미안해.”

“아니요.”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조지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그래도 그 집보다는 불편하니까.”

김선우가 내준 아파트는 강남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아파트였다. 조지현은 잠시 강석원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입을 연다.

“저는 여기서 지내고 싶습니다.”

“…….”

“물론 선배님만 괜찮으시면.”

귀국 전에 강석원과 통화를 할 수 없어서 그렇게 결정할 것뿐이었다.

“여기서 지내.”

강석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네가 불편하면 당장 다른 집 알아볼게. 그러니까,”

강석원이 조지현의 어깨를 붙든다.

“나랑 있어.”

아주 작은 틈도 남자는 견디지 못한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짐 옮길게요.”

대답을 들은 후에야 남자의 표정이 느슨해진다. 조지현은 집으로 들어오며 주변을 살폈다. 

“여기는 정말 변한 게…….”

갑작스럽게 턱을 붙들린 채로 입을 맞춘다. 그의 욕구는 한여름의 폭우처럼 급작스럽고 열렬하다. 맞물린 입술로 드나드는 혀가 조지현의 고른 치열을 핥고 지나간다.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간신히 떨어진 입술 사이로 강석원이 중얼거린다. 조지현은 멍한 눈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그러다 손에 든 것을 떠올리고 내밀었다.

“이게 뭔데.”

“맥주요.”

강석원의 표정이 멎었다. 그가 조지현과 맥주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뭔가를 떠올리고 숨을 내쉰다. 

“가끔 잊어. 네 나이.”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에서 맥주를 받아서 냉장고에 넣는다. 조지현은 웃으면서 강석원의 방을 둘러본다. 변한 건 거의 없다. 방구석에 쌓인 상패가 늘어나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그의 삶처럼 단조로운 방이다. 그는 대체로 모든 것에 덤덤했다. 그렇게 돈을 많이 벌고도 더 넓은 집이나 호화로운 것들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강석원은 묵묵히 주어진 일만 했다. 그런 그가 깊은 욕심을 드러내는 순간을 안다. 채워지지 않은 제 갈급을 끊임없이 채우려고 달려들던 강석원이 떠올랐다. 조지현은 괜스레 더워진 목덜미를 문지르며 자리에 앉았다. 작은 집이었기에 강석원이 요리하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조지현은 눈가를 좁힌다.

“선배님.”

“응.”

강석원이 팬에 손질된 새우를 쏟으며 대답한다.

“요리 배우셨어요?”

이전에 강석원이 해준 요리들도 고등학생치곤 솜씨가 좋았지만, 전문적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조금.”

“왜요?”

“배워두면 좋을 것 같아서.”

조금 쑥스러운 투로 덧붙는 말에 조지현은 웃음을 삼켰다. 강석원은 군더더기 없는 솜씨로 요리를 이어갔다. 조지현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마 되지 않아 강석원은 한 상 가득 요리를 차려냈다.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조지현이 젓가락을 손에 들고 물었다. 

주요리만 세 개였다. 다른 반찬들도 다 손이 가는 것들뿐이었다.

“먹고 남겨.”

강석원이 조지현에게 밥을 퍼서 건네며 말한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조지현이 반찬을 하나 입에 넣고 삼키기를 기다렸다가 강석원은 입에 맞는지 물어본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강석원이 그제야 젓가락을 들며 말을 잇는다.

“입맛이 변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쉽게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모르잖아.”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7년간 만나지 못했다. 다시 만난 순간,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할 만큼 열렬한 관계였지만 사소한 것들은 차마 묻지 못한다. 사소한 것도 스스럼없이 물어도 좋을 만큼의 시간이, 두 사람에게는 필요했다.

“선배님.”

식사를 끝내고 조지현은 강석원을 불렀다.

“응.”

“오늘 밤새 술 마실래요?”

조지현의 말에 강석원이 그래, 하고 대답한다. 그의 입매가 느슨히 풀린다. 두 사람은 조지현이 사 온 맥주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평상에 앉아 차가운 캔맥주를 봉지에서 꺼냈다.

“술 잘 마셔?”

강석원이 캔의 고리를 뜯으며 묻는다.

“그냥, 평범합니다. 선배님은요?”

“나도 그럭저럭. 거의 마시는 일 없으니까. ……누구랑 마셨어?”

“친구들이요.”

강석원이 누구를 신경 쓰는지 알고 있다.

“걔 다음 주에 결혼합니다.”

“알아.”

“좋은 사람이에요. 좀 시끄럽긴 해도.”

“그렇겠지.”

강석원은 캔 고리를 뜯었다.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맥주 거품이 올라온다. 강석원이 한 모금 들이켠다. 그가 캔을 들고 말을 잇는다.

“……, 부러워서.”

“네?”

“내가 모르는 모습들을, 봤을 테니까.”

솔직한 그의 말에 조지현은 가만히 웃었다.

“선배님은 앞으로 저 질리도록 보실 텐데요.”

“안 질려, 절대.”

농담처럼 던진 말에 단호한 대답이 돌아온다. 강석원의 시선이 조지현을 붙든다. 조지현은 눈을 껌뻑이다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내일,”

강석원이 입을 뗀다.

“유성이 많이 떨어진다고 하더라.”

“……. 네.”

그렇지 않아도 신문이나 뉴스에서 그 얘기가 한창이었다. 

내일이면 이 이해할 수 없는 기나긴 하루도 끝난다. 아니,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끝이겠지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조지현의 표정이 더럭 어두워지자 강석원이 고개를 기울인다.

“왜?”

“아니요. 그냥.”

조지현이 말끝을 흐리자 강석원이 괜찮아, 하고는 위로를 건넨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비켜갈 거야.”

지구에 그대로 떨어지면 남반구의 반이 날아갈 거란 소식을 뉴스 진행자들은 차분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사람들은 우주적 쇼를 기념하기 위한 명당을 차지하려고 벌써 자리를 깔고 기다렸다.

“그러겠죠.”

조지현은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맥주를 마셨다. 강석원의 시선이 조지현의 옆모습을 더듬는다. 무거운 침묵을 걱정하는 것이다.

“별이 떨어질 때 소원 빌면 이루어진대.”

남자가 무심한 얼굴로 소년 같은 말을 한다. 그가 나름의 위로를 건네고 있음을 알기에 조지현은 애써 웃어 보인다.

“무슨 소원 비실 겁니까.”

“항상 같지.”

그의 눈이 담담하게 제 마음을 고백한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준다. 

“언제 여기로 들어올 거야?”

“내일 오전에 서류 정리하고 짐 갖고 바로 올게요.”

“무슨 서류?”

강석원은 조지현의 입에서 몇 번 나온 단어를 조심스럽게 되짚는다. 조지현이 음, 하고 입술을 물었다 놓는다.

“말씀드릴 기회가 없었는데, 저 사실 이제 조지현이 아니라 윤지현입니다.”

“무슨 소리야?”

“고모께서 입양해주셔서 고모부 성 따르게 됐습니다. 작년 겨울에 재판이 끝나긴 했는데 아직 이것저것 처리할 서류가 남아있습니다.”

강석원은 조금 멍한 표정으로 조지현을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가늘게 찌푸린다.

“그 여자 미국에 왔었어?”

“네. 별일은 없었습니다.”

이후로 부모님은 몇 번 더 미국으로 찾아왔다. 입양 의사를 밝히자 여자는 정말 말 그대로 미친 것처럼 달려들었다. 칼을 휘둘러서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재판에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여자의 정신병은 손댈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보였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녀가 정상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서로에게 비극인 사랑이었다. 두 사람 모두 한겨울의 나뭇가지처럼 빠짝 말라 있었다.

“성인 입양이라 크게 달라질 건 없습니다. 윤지현이란 이름도 서류상의 이름입니다. 선배님께서 부르고 싶으신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생각해본 적 없는 선택지인지 강석원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네가 원하는 대로 부를게.”

“그럼 부르시던 대로 불러주세요.”

아버지의 성에 의미를 두는 게 아니었다. 강석원이 처음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 계기가 조지, 라는 별명 때문이었다. 조지현이란 이름을 좋아해 본 적 없다. 강석원이 불러주기 전까지는.

“조지현.”

강석원이 저를 부르는 소리는, 몹시도 특별했다. 조지현이 웃으면서 네, 하고 대답한다.

“잘 됐다.”

“네. 변한 건 부모님과 법적인 관계가 사라졌다는 것뿐이지만.”

“너 군대는…….”

말한 대로 성인의 입양은 크게 달라질 게 없었다. 성만 바뀌는 수준이었다. 16세 이하의 미성년자가 미국 국적을 가지게 되면 아예 미국 영주권자가 되어 군대 문제도 해결되겠지만, 조지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신검은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뤘다. 한국에 들어오면 강석원을 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가 미국으로 경기하러 오는 날에는 문을 걸어 잠그고 온종일 잠만 잤다. 이번에 한국에 머무는 기간에 맞춰 신체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재검 뜨긴 했는데, 아마 면제될 것 같습니다.”

강석원의 표정이 복잡미묘해진다. 무턱대고 좋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

그날 강석원의 전화를 받고 감기가 악화하여 병원에 실려 갔다. 폐의 기능 손상으로 평생 관리를 하며 살아야 하는 몸이 되었다. 

조지현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강석원이 그의 손을 붙든다.

“무슨 일 있었지?”

“……, 괜찮습니다.”

“무슨 일인데.”

추궁하는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강석원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먹는 약을 감기약이라고 둘러대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몸이 좀 안 좋아졌습니다.”

“…….”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무리가 없습니다. 달리거나 심한 운동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원래 운동도 안 했으니 정말 달라진 게 없네요.”

강석원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때 내가…….”

조지현이 선배님, 하고 강석원을 부른다.

“죽는 거 아닙니다. 그다지 아프지도 않고요. 조금 불편한 정도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일 때문에 부모님과 완전히 인연도 끊게 됐습니다. 저한테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사경을 헤매다 깬 조지현이 자신을 보고 죄송하다는 사과를 하는 모습에 고모는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조지현에게는 어쩌면 몹시 다행스러운 순간이었다. 성인이 되어도 생활을 책임지는 보호자 둘이 동의를 하면 얼마든지 정신병원 감금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법에는 어긋나지만 그런 일들이 많이 자행된다고 했다. 조지현에게는 그런 상황 자체가 공포였다. 자신이 갇히는 건 상관없지만, 강석원이 다시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찾아 떠돌게 될까 두려웠다.

“이 모든 일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그건 다 제 몫입니다.”

조지현이 강석원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강석원에게 한마디라도 하고 떠났더라면 그의 인생이 어긋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더라면, 그에게 답장이 오지 않아도 끊임없이 편지를 썼더라면, 자신이 결혼하는 게 아니라고 그 자리에서 붙들고 설명을 했더라면.

길 건너에 서 있던 강석원이 떠오른다. 숱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별이 떨어지던 날 그의 인생을 되돌릴 수 있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고, 기적적으로 그의 인생을 바로잡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로 인해 갖게 될 결과는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뺨을 그러쥔 채 속삭인다. 

“그때, ……, 많이 아팠어?”

조지현은 말없이 웃었다.

지현아, 아파? 하고 묻는 그의 목소리에 조지현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그의 앞에서는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고 소용없어진다. 

그때는, 너무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았다. 누군가 억지로 석유를 삼키게 하고 불을 붙인 기분이었다. 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 강석원을 떠올렸다. 그가 보고 싶었다. 그렇게 이 모든 것들을 지나 강석원을 다시 만났다. 됐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혼자 둬서 미안해.”

“아닙니다.”

“이제 그런 일 없을 거야.”

조지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뺨에 닿은 그의 단단한 손바닥이 기분 좋다. 조지현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다. 낮게 가라앉은 안개 때문에 주변의 불빛이 흐리게 번져 있다. 

“그때 생각나요.”

“언제.”

“선배님이 저 깨워서 옥상 데려왔던 날이요. 안개 많이 끼고.”

바다 같다.

소년의 한마디에 조지현은 자신이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였다. 기꺼이 정해진 운명에 순응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기억나세요?”

강석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은 그날, 처음으로 마음을 확인했다.

“선배님이 그때 하신 말이, 기억에 남아요.”

조지현이 눈을 내리감은 채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츠메 소세키라는 일본 작가가 사랑한다는 영어를 대신할 말을,”

“달이 참 예쁘다.”

강석원이 조지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지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 알고 계셨어요?”

강석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술기운 때문인지 그의 얼굴에 붉은 기가 머문다. 조지현은 눈을 깜빡였다.

그날의 강석원이 떠오른다. 조금은 수줍은 듯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 목소리가.

달이 참 예뻐서.

심장에 열이 오른다. 조지현은 맥주를 말없이 마신다. 평상을 짚은 손에 강석원의 손가락이 닿는다. 간질간질한 기운에 조지현은 손끝을 움츠렸다.

“지현아.”

고개를 드는 순간, 입술이 맞닿는다. 소년처럼 수줍은 키스에선 맥주 맛이 났다. 어른의 맛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입술에 부드러운 봄바람이 스쳤다. 할 말이 마땅하게 떠오르지 않아 조지현은 작게 웃었다. 그 모습을 남자는 넋을 놓고 바라본다.

“그때도 그렇게 웃었어.”

“네?”

강석원이 시선을 하늘로 옮기며 뇌까린다. 

“달이 참 예쁘다고.”

조지현이 그러게요, 하고 눈을 내리감았다.

서로에게 기대고 앉아 대수롭지 않은 말들을 밤새 나누었다. 두 사람에게 몹시도 간절했던 시간이었다.

“조지현.”

조지현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간신히 눈을 떴다. 어느새 옷을 입은 강석원이 자신을 내려다본다.

“……, 어디 가세요?”

“볼일 있어서.”

아침에 강석원이 조깅을 나가는 기척을 들었다. 샤워까지 마치고 또 볼일을 보러 나간다는 강석원의 체력에는 존경을 표했다. 자신은 지금 눈을 뜨는 게 고작이었다.

“피곤해?”

“네, 조금.”

어제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두 사람은 정말 말 그대로 잡담을 나누었다. 주제도 맥락도 없는 이야기를 두 사람은 한없이 묻고 대답했다. 둘 다 말이 없어서 침묵이 이어질 때도 잦았다. 그래도 그저 좋았다. 이전에도 병실 침대에 누워 비슷한 밤을 보냈지만,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더 자.”

강석원이 이불을 끌어다 조지현에게 덮어준다.

“언제 오세요?”

“점심 지나지 않을 거야. 밖에서 만날까?”

“그럴까요.”

조지현이 웃으며 대답하자 강석원이 허리를 굽혀 그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춘다.

“뭐 먹고 싶어?”

“선배님은요?”

“난 뭐든 상관없어.”

“저도 그렇습니다.”

“그래도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둬.”

강석원이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쓸어넘겨 준다. 그 손길이 좋아서 조지현은 눈을 감고 가만히 웃는다.

강석원이 한숨을 내쉰다. 조지현이 이유를 묻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나가기 싫어서.”

강석원이 차려입은 옷차림을 봐선 분명 중요한 약속일 것이다. 조지현은 몸을 반쯤 일으켜 강석원을 배웅했다.

“다녀오세요.”

“너는 볼일 언제 끝나.”

병원에서 서류만 떼오면 된다. 사실, 오늘은 강석원과 온종일 함께 있고 싶었다. 어쩌면 오늘이 이 기나긴 하루의 마지막 날이 되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메어온다.

“왜?”

강석원의 눈빛이 금세 날카롭게 각을 세운다. 야생 짐승 수준의 감이었다.

“아닙니다. 조금 피곤해서요.”

“병원 갈래?”

강석원의 표정이 굳는다. 조지현은 쓰게 웃었다. 이래서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오랜만에 술 마셔서 그래요.”

“해장국 끓여놨어. 일어나서 먹어.”

“……, 선배님, 잠은 언제 주무십니까?”

강석원이 말없이 웃는다.

“갈게. 일어나면 전화하고.”

“네.”

강석원이 시트를 고쳐 덮어주며 조지현을 도닥인다.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아, 하고 입을 연다.

“책상에 편지 있어. 네 앞으로 온 거.”

“무슨 편지요?”

이 주소로 올 만한 편지가 뭐가 있나 생각해 봤다. 

“보면 알아.”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석원이 이마에 입을 한 번 더 맞추고 이제 정말 갈게, 하고 몸을 일으킨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조지현은 시트를 몸에 둘둘 감았다. 익숙한 섬유 유연제 향이 났다. 자신이 오기 전 분명히 모든 이불과 시트를 세탁해 뒀을 강석원을 떠올리며 한껏 숨을 들이켰다. 더 자려고 했는데 한번 깨고 나니 다시 잠이 드는 게 쉽지 않았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일으켰다.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어제 보았던 대로 변한 게 거의 없었다. 옷가지도 물건도 늘지 않았다. 백색 소음이 섞여 나오던 손때 묻은 라디오도, 털털거리며 돌아가던 선풍기도 그대로다. 기억 속의 장면을 떼어다 고스란히 붙인 것처럼.

책상에 놓인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조지현은 책상으로 다가가 편지를 집어 들었다. 흰색 봉투에는 병원 이름이 찍혀 있었다. 기억을 더듬다가 강석원과 자신이 입원했던 병원임을 떠올린다. 봉투를 뜯자 반듯하게 접힌 종이가 툭 떨어진다. 종이를 폈다.

『조지현에게.』

나직한 강석원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오늘 저녁에 뭐 먹을래.』

다른 말은 없다.

병원에서 썼던, 일 년 뒤에 받기로 했던 편지였다. 자신은 7년 뒤에 이 편지를 받게 되었지만, 그때와 강석원은 한결같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 웃음이 났다. 조지현은 내도록 그 짧은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편지를 반듯하게 다시 접어 봉투에 넣은 다음, 일단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잠자리를 정리하고 옷을 벗고 샤워했다. 온수 스위치 누르는 것을 깜빡해서 차가운 물을 뒤집어썼다. 그래도 웃음이 낫다. 이 소소한 일상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선풍기 앞에서 젖은 머리를 말리고 외출 준비를 했다.

병원에 가서 서류를 받는 일은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병원에서 김선우의 아파트까지는 제법 가까운 거리였다. 버스를 탈까 하고 노선을 살피다가 뭔가 복잡하게 변한 노선을 보고 포기하고 택시를 잡아탔다.

목적지를 기사에게 말하고 조지현은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들이 혼재한 세상을 내다본다. 그러다 눈에 익은 건물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치뜬다.

“기사님.”

“네?”

“저 이 앞에서 내려주세요.”

“어? 말씀하신 아파트까지는 몇 블록 더 가야 하는데요?”

“괜찮습니다.”

조지현은 바로 계산을 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낯익은 건물이 서 있다. 묘한 기분이었다. 조지현은 길을 건너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 입구 데스크를 지키던 경비원이 바로 인사를 한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거주민과 방문객을 구분하는 모양이었다. 조지현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김선우 때도 그랬지만 자신에게만 기억이 있는 사람을 대할 때는 왠지 미안하면서도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혹시 4802호에 사는 분과 통화할 수 있나요?”

과거가 바뀌지 않았다면 자신이 머물렀을 아파트다. 확인하고 싶다. 지금과 달라진 것들을.

“지금 4802호는 공실입니다.”

“그런가요.”

“무슨 일이신가요?”

경비원이 약간 경계하는 표정으로 묻는다. 조지현은 머뭇거리다가 저기, 하고 말문을 열었다.

“잠깐만 둘러보셔야 합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경비원이 미심쩍은 말투로 말했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위를 잠시만 보여줄 수 있느냐는 부탁을 했을 때, 경비원은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부탁드립니다. 오 분, 아니 일 분이면 됩니다. 조지현이 간절하게 고개를 숙이고 부탁하자 경비원은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하며 그럼 본인과 같이 올라가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가 48층에 멈추어 섰다. 

“여기가 48층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도 조지현이 꼼짝하지 않자 경비원이 입을 연다. 조지현은 홀린 듯이 48층의 복도로 나갔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자신이 기억을 잃고 쓰러진 장소다. 모든 게 시작된.

창가에 섰다. 정오도 되지 않은 시간이라, 달도 쏟아지는 별도 보이지 않는다. 귓가에 컨베이어 벨트가 움직이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온몸이 오싹 떨린다. 조지현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괜찮으세요?”

경비원이 묻는다. 조지현은 괜찮습니다, 하고 대답하며 숨을 천천히 몰아쉬었다.

“이제 내려가도 될 것 같습니다.”

“다 보신 건가요?”

“네.”

다시 경비원과 엘리베이터를 탔다. 경비원은 조지현을 흘끔거리며 훔쳐보았다.

“전에 혹시 여기 사시던 입주민인가요?”

조지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비슷합니다, 하고 대꾸했다.

“이상하다. 그럼 기억에 있을 텐데.”

경비원이 연신 조지현을 흘끔거렸다. 일 층에 도착했다. 조지현은 감사합니다, 하고 반듯하게 인사하고 건물을 나왔다.

물 밖으로 나온 사람처럼 숨을 토해냈다. 식은땀이 흥건하다. 보이는 대로 벤치에 앉았다. 

아파트 복도를 본 순간 기분 나쁜 기시감이 확 다가왔다. 

괜찮다. 강석원의 미래는 변해 있다. 그가 다리를 못 쓰게 되는 일도, 자기 대신 차에 치여 피투성이가 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조지현은 숨을 몰아쉬었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위로하듯 땀을 닦아낸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아파트 상가가 보인다. 조지현은 홀린 듯이 걸어가 상가에 걸린 상호 명을 확인했다. 피자 가게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오싹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올라온다. 그때 옆을 지나가던 차가 클랙슨을 울린다. 조지현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가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다. 강석원이 저곳에 서 있을 리 없다. 그걸 알면서도 죄를 지은 사람처럼 길 건너를 바라보지 못한다. 칼을 박아넣은 생선처럼 심장이 펄떡거린다. 치밀어 오는 불안감에 잠식당한다. 시야가 비틀렸다. 오랜만에 겪는 공황발작이다. 약을 꺼내려고 주머니를 더듬었지만, 손이 떨려 그것도 쉽지 않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속이 뒤틀렸다. 약을 꺼내려다가 주머니에 닿는 금속의 감촉에 얼른 그것을 끄집어냈다. 통화 버튼을 누른다. 신호음이 들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올까 봐 손끝이 떨린다. 그때와 같지 않다. 전혀 다르다. 속으로 같은 말을 되뇌며 강석원이 전화를 받길 기다렸다.

「여보세요.」

강석원이 대답했다.

“선배님…….”

그를 불러놓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아랫입술을 질근 깨문다.

「무슨 일 있어?」

강석원이 묻는다.

“……, 아닙니다.”

뜨거운 것이 목을 훑고 올라온다.

전화기 너머에서 강석원이 잠시만요, 하고 양해를 구하는 소리가 들린다. 곧이어 조지현, 하는 부름이 닿는다.

「어디야. 내가 갈게.」

“괜찮습니다. 선배님.”

방금까지 술렁이던 불안이 거짓말처럼 잦아든다. 강석원의 음성은 그처럼 곧고 강직하다. 강석원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이유도 묻지 않고 그 긴 시간을 기다려 주었다. 

강석원을 믿어야 한다. 

조지현은 고개를 들었다. 길 건너의 사람들이 스쳐 간다.

「조지현.」

강석원이 자신을 부른다.

“네. 선배님.”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냥요, 하고 대답했지만, 싱거운 느낌이 들어서 제 본심을 드러낸다. 

“보고 싶어서요.”

전화기 너머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그래.

무뚝뚝한 음성에 열기가 실린다.

“언제 끝나세요?”

「두 시 안 돼서.」

늦어져서 미안해. 하는 다정한 사과가 뒤따른다.

“그럼 제가 선배님께 가겠습니다. 문자로 위치 보내주세요.”

아파트에서 짐을 가져와 자취방에 정리해 두고 출발하면 시간이 얼추 맞는다. 

「진짜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저 거짓말 못 하는 거 아시잖아요.”

조지현은 대답하며 건널목으로 걸어갔다.

“선배님. 이따가 봬요.”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통화가 끊어졌다. 보행자 신호에 불이 들어왔다. 

조지현은 길을 건너려고 발을 뗐다. 

저 멀리서 클랙슨 소리가 다가왔다.

“이 디자인은 어떠세요?”

“괜찮습니다.”

강석원의 대답을 들은 점원이 미소를 짓는다.

“다 괜찮다고 하셔서, 죄송하네요. 천천히 더 둘러보시고 마음에 드시는 거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강석원이 다시 진열장 안에 놓인 반지를 진지하게 바라본다. 그러다 가운데에 놓인 심플한 디자인의 반지를 가리킨다.

“이거 볼 수 있습니까?”

“네. 물론이죠.”

흰색 장갑을 낀 점원이 조심스럽게 반지를 꺼내 보여준다. 강석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참 바라보다가 이걸로 하겠습니다, 하고 말한다.

“선물하실 건가요?”

“네.”

“어머, 선물 받으시는 분은 좋으시겠어요.”

강석원을 알아본 점원이 눈웃음을 짓는다.

“굉장히 고급스러운 디자인이라 남녀 가리지 않고 착용 가능합니다. 선물 받으시는 분 호수는 알고 계세요?”

강석원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낸다. 조지현이 잘 때 손가락의 둘레를 재서 표시해 둔 종이였다.

“이걸로도 호수를 알 수 있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이렇게들 많이 가져오세요.”

종이로 둘레를 재는데 조지현이 눈을 뜨는 바람에 강석원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다행히 조지현은 강석원이 제 앞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가늘게 웃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사랑스럽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기분 좋은 일 있으세요?”

“네?”

“표정이, 티비에서 보던 거랑 많이 다르셔서요.”

강석원은 제 뺨을 쓸어내렸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이 얘기를 무려 네 명에게 들었다. 인터뷰를 진행하던 뉴스 기자조차 좋은 소식이 있는 거냐는 질문을 연거푸 했다. 아닙니다. 강석원의 무뚝뚝한 대답이 돌아오면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달 뒤 챔피언 방어전이 있어서 여기저기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개인 인터뷰는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선언을 해두었다. 당분간은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마음먹으면 조지현에게 전화를 걸어 얼굴을 볼 수 있다. 그 단순하고도 아름다운 일상에 강석원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보고 싶어서요.

오전에 통화했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강석원은 피가 통하지 않는 손끝을 움켜쥐었다가 편다. 조지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수용하기 힘들 만큼 격한 감정이 밀려든다. 지나친 것은 좋지 않다. 끊임없이 그렇게 되뇌어도 소용없다. 조지현이 조금만 우울한 기색을 내비쳐도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선다. 떠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내고도 그를 제 곁에 묶어둘 구실만 찾는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어디에도 보내지 않고 가둬두고 싶다는 비정상적인 욕구마저 든다. 강석원은 쓴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치수는 지금 재보니까 14호로 나오는데 더 확실하게 하시려면 동행하셔서 재시는 게 좋아요.”

“아닙니다. 14호로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계산을 마친 뒤, 강석원은 주머니에서 조지현의 필체를 복사한 종이를 꺼냈다. 편지의 한 부분만 복사해온 것이다.

“이 글자 그대로 각인할 수 있습니까. 뒤에는 이름을 넣을 겁니다.”

“한번 여쭤보긴 해야 할 텐데, 아마 가능할 거예요. 손글씨인가요?”

“네.”

“엄청나게 달필이시네요. 폰트라고 해도 믿겠는데요?”

글씨 칭찬에 강석원의 표정이 느슨해진다.

“그럼 뒤에 넣으실 이름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조지…….”

강석원이 조지현의 이름을 말하려는데 벨 소리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강석원이 잠시만요, 하고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네.” 

「강석원 씨 휴대전화인가요?」

“맞습니다.”

강석원은 핸드폰을 왼손으로 옮기고 펜을 건네받았다. 그러나 종이에는 단 한 글자로 쓰지 못했다.

“손님!”

하얗게 얼굴이 굳은 채로 달려나가는 강석원을 점원이 불렀지만, 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조지현 씨가 사고를 당해 연락드렸습니다. 병원 이름은, …….

택시를 타고 가는 내도록, 그 목소리가 머리를 맴돌았다.

“조금 더 빨리 가주세요.”

“신호가 걸리는 걸 내가 어쩌겠어. 근데 혹시 티비에 나오는 그 복싱선수 아니에요?”

아까부터 룸미러로 뒤를 흘끔흘끔 보던 택시 기사가 알은척을 한다. 강석원은 대답하지 않고 두 손을 모은 채로 초조하게 창밖을 바라본다.

조지현 씨가 사고를 당해 연락드렸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멎을 뻔했다. 조지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는 연결되지 않는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온갖 일이 머릿속을 점령한다. 오늘 아침에 마지막으로 본 조지현은 이불에 누워 잠기운이 잔뜩 묻어나는 눈으로 웃고 있었다. 이따가 연락드릴게요. 마지막으로 통화했던 조지현은 그렇게 말했다. 이제야 간신히 손에 닿은 사람이다. 이렇게는 안 된다.

“거, 우리 아들이 팬인데.”

기사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말을 잇는다.

“무슨 세계 챔피언인가 해서 돈도 억수로 번다고 들었수다.”

신호가 걸렸다. 강석원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기사에게 건넸다. 차라리 여기부터는 뛰어가는 편이 낫다.

“어, 여기서 내리면…….”

강석원은 그대로 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삼 차선에서 달려오던 차가 클랙슨을 누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강석원은 그대로 인도로 달렸다. 모퉁이를 돌자 병원 건물이 보였다. 응급실까지 미친 듯이 뛰었다. 핏기가 가신 머리에 드는 생각은 온전한 조지현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응급실로 뛰어들어갔다.

“어떻게 오셨나요?”

간호사가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강석원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지현아.”

강석원이 조지현의 이름을 불렀다. 입구 근처에 있던 환자 몇이 고개를 돌린다. 어디에도 조지현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조지현!”

강석원이 소리 내어 조지현을 불렀다.

“여기서 이렇게 큰 소리 내시면 안 돼요.”

간호사가 강석원을 막아서며 말렸다. 강석원은 침대를 가로질러 달렸다. 한 명 한 명 얼굴을 확인했지만, 조지현을 찾을 수 없었다.

미칠 것 같다.

조지현을 떠나보내고 오만가지의 악몽을 꿨다. 미국에서 끔찍한 사고를 겪거나 그의 미친 모친이 찾아가 나쁜 짓을 저지른다거나, 누군가에게 안 좋은 짓을 당하거나. 모두 자신이 보지 않는 곳에서 생기는 일들이었다. 조지현이 돌아온 이후로는 그 악몽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믿었다. 다시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진실한 눈이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한결같이 조지현을 믿는다. 7년 만에 다시 만난 조지현은 이전과 다름없었다. 자신의 감정도 그랬다. 아니,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를 바라보는 시간이 더해질수록 조지현에 대한 마음은 커졌다. 그저 좋았다. 행복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어제 밤새도록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강석원은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않겠다고.

조지현은 자신의 전부였다. 아니 전부를 준다 해도 부족했다. 

그런 조지현을 다시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 심장이 갈기갈기 찢긴다. 죽을 것 같은 공포에 눈앞이 흐리다. 감각이 사라진다. 방향도 구분하지 못한다. 숨을 쉴 수 없다. 사지가 잘린 채 바다에 던져진 사람처럼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 순간,

“선배님.”

뒤에서 들려온 조용한 음성에 붙들린다. 강석원은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돌렸다. 

“선배님, 여긴 어떻게…….”

조지현이 놀란 얼굴로 강석원을 올려다본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강석원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사람처럼 조지현만 바라본다. 

이쪽을 주시하는 시선이 많다는 것을 깨달은 조지현이 강석원을 붙들고 응급실 밖으로 끌어냈다. 병원 구석의 비상계단으로 와서 문을 닫았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조지현은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다가 강석원의 안색을 살핀다. 이마는 온통 땀투성이고 얼굴은 창백하다. 

“물 가져다 드릴게요.”

조지현이 몸을 돌리려는데 강석원이 팔을 붙든다.

“가지 마.”

물에 빠진 사람이 저를 건져줄 상대를 발견해 움켜쥔 듯, 필사적인 기세였다. 조지현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다.

“저 괜찮습니다.”

조지현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사고 경위를 설명했다.

“건널목을 건너고 있는데 앞에 서 있던 버스를 뒤에서 차가 박았어요. 버스가 밀려나서 조금 부딪친 정도입니다.”

“전화는……, 왜 안 받았어.”

“넘어지면서 망가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응급실 들어올 때 보호자 연락처 적으라고 해서 적은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그냥 뭐.”

“…….”

“혼자 알고 있으려고?”

“……선배님.”

“왜 모든 걸 너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해.”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조지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나 너 7년 기다렸어. 알 권리 있어. 네가 사고를 당하거나, 무슨 일이 생기거나. 혹은,”

강석원이 조지현을 쥔 손에 힘을 준다. 감정을 다스리려는 듯, 그의 손끝이 떨린다.

“네가 죽는 일이 생겨도, 내가 제일 먼저 알아야 해.”

“…….”

그 모든 일이 제게 주어진 의무라고 남자는 말한다. 거기까지 각오하고 그 긴 시간을 버틴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함이 그의 손을 타고 전해진다.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당연한 일이야.”

“…….”

그렇게 말하고 강석원은 조지현을 끌어안는다. 부서질까 봐 힘을 주어 안지도 못한다. 그저 제 품에 가두어 조지현의 무사를 확인할 따름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느리게 반복하는 그 손짓에 조지현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맡겼다. 그의 온전한 행복을 위해, 할 수만 있다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줄 텐데.

조지현은 강석원에게 기대어 그의 불안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강석원은 핸드폰 가게로 들어가 새 핸드폰을 개통해 조지현에게 건넸다.

앞으로 무슨 일 있어도 전화 받아.

전국 최고, 동양 최고, 세계 최고의 자리를 차례대로 오르면서 강석원은 그 어떤 상대에게도 주눅이 들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상대를 때려눕혔다. 동양인은 태어나는 순간 체격적으로 핸디캡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라고 떠들어대던 미국의 해설가들도 강석원의 시합을 보고 나서는 두려움을 모르는 신예의 탄생이라고 환호했다.

핸드폰을 건네주던 강석원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가 느꼈을 두려움을 알기에 핸드폰을 받아드는 조지현의 심정도 참담하긴 마찬가지였다. 아주 짧은 부재에도 최악을 떠올려야 하는 관계를 만든 것은 자신이었다. 미안할 따름이다. 

택시를 타고 오는 동안, 강석원은 한마디도 없었다. 택시 기사가 말을 붙이고 싶어서 아까부터 이쪽을 연신 힐끔거렸지만, 강석원은 신경 쓰지도 않는다. 병원에서 수납하는 직원이 알아보고 강석원 선수 아니세요? 하고 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구하고 말을 섞거나 눈을 마주치지도 않는다.

그는 턱을 괸 채로 창밖만 바라본다.

조지현은 그의 불안을 짐작할 수 있기에 뭐라고 쉽게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는 기다리고 있다. 조지현이 모든 것을 털어놓기까지. 이유도 없이 훌쩍 사라졌던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는 그것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그렇지만 불현듯 의지로도 제어할 수 없는 불안이 종종 마음을 잠식할 것이다.

조지현은 말을 걸려고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만다. 강석원에게는 별일 아니라고 말했지만 갑작스럽게 당한 교통사고가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끝까지 규칙을 지키라는 무언의 경고가 아니었을까. 건물 끝에 걸린 달이 보인다. 어두운 감정이 넘실거리며 밀려든다.

“아이고, 엄청나게 밀리겠는데요.”

기사가 꽉 막힌 도로를 보며 투덜거렸다.

“오늘 뭐, 유성인가 뭔가 떨어진다고 해서 여기저기서 구경하겠다고 난리들이 아니에요. 마포 대교는 훨씬 더 막히네요. 이것 참.”

대교의 초입인데도 차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대교 위 인도가 북적였다.

“그런데 한 분은 혹시 그분 맞나?”

차가 대교 중간쯤에 정차하자 기사가 본격적으로 돌아보며 말을 건다. 강석원은 대답이 없다. 무뚝뚝한 사람이긴 해도 누군가를 무시하는 일은 없었다. 

“아니, 뭐 기분 나쁜 일 있어요?”

기사가 강석원을 보며 물었다. 강석원이 턱을 괸 손을 푼다. 그가 움직이자 기사도 움찔하며 몸을 바로 했다. 강석원이 지갑을 꺼내 돈을 건넸다.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잔돈은 필요 없습니다.”

차를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건네자 기사도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강석원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조지현도 그의 뒤를 따라 내렸다. 조지현이 사람들에 밀려 뒤로 물러서자 강석원이 제 손을 건넸다. 조지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사람들의 이목이 하늘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강석원은 유명인이었다. 괜한 소문에 휩쓸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강석원은 그 한마디를 내뱉고 앞서 걷는다. 조지현은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몰려든 사람들로 대교 주변은 발 디딜 틈 없이 혼잡했다. 술을 마시는 남자, 앉아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 듣는 사람, 커다란 카메라를 가져와 촬영하는 젊은이, 잠든 아이를 안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부부, 담요를 뒤집어쓰고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까르르 웃는 여고생들. 평생에 다시 오지 않을 우주적인 쇼를 기념하기 위해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평화로운 밤의 축제를 즐겼다. 보도를 위해 나온 방송국 촬영도 여러 대다. 밤공기가 가볍게 흥성거린다. 어디선가 폭죽을 쏘아 올리자 사람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조지현은 수많은 인파 때문에 몇 번이고 뒤로 밀려났다. 강석원이 인파 속에서 조금씩 멀어질 때마다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조지현은 차마 그의 손을 잡지 못했다.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우르르 다리 쪽으로 밀려들어 불꽃이 수놓은 아름다운 하늘을 바라본다. 

“선배……!”

그의 모습이 이미 저만치 멀어진다. 강석원을 불러도 사람들의 함성에 파묻히고 만다. 초조함에 피가 바싹 마른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다시는, 강석원을 놓치고 싶지 않다.

“선배님!”

조지현은 강석원을 부르며 그를 찾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갈 수조차 없을 만큼 인파가 밀려들었다. 키가 큰 사람이라 한눈에 찾을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꾸역꾸역 밀려든 사람들 틈에서 불꽃놀이와 유성을 보겠다고 목말을 한 사람부터 난간에 올라간 사람까지, 높이까지 들쑥날쑥해서 강석원의 모습은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선배님! 선배님!”

조지현은 몇 번 더 강석원을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와아!”

“저기 별 봐.”

하늘에 빛 한 줄기가 그어진다. 가슴이 섬뜩하게 가라앉는다.

조지현은 핸드폰을 꺼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린 탓인지 안테나가 서지 않는다. 핸드폰이 잘 터지는 곳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초조하게 강석원을 찾았다. 간신히 안테나가 뜬 것을 확인하고 조지현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들렸다. 제발, 제발, 받아라. 제발. 간절하게 그렇게 되뇌었지만, 통화가 쉬이 연결되지는 않는다. 조지현은 초조하게 몇 번이나 통화를 시도했다. 그 와중에 눈으로 강석원을 찾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기를 십여 분. 뚜르르, 하는 연결음 뒤에 달칵하고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선배님!”

조지현이 크게 그를 불렀다. 사람들의 환호가 점점 커졌다. 소리에 짓눌릴 것만 같다.

「어디야.」

“여기, ……다리 위입니다. 선배님 따라가고 있었는데,”

펑, 펑, 하는 폭죽 소리가 연달아 터졌다. 

「움직이지 마. 내가 너 찾을게.」

사람들이 점점 더 다리로 몰려들었다. 이대로는 꼼짝없이 이 위에 갇혀버릴 것 같았다. 

「택시 타고 들어온 방향으로 내려갈 수 있겠어?」

강석원도 그걸 깨달았는지 말을 바꾼다. 

“네. 그렇게 할게요.”

「……, 전화 끊지 마.」

“안 끊습니다.”

「도중에 끊기면 내가 걸게. 서로 하면 엇갈리니까.」

“네.”

조지현은 그와 통화를 하며 길을 걸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반대 방향으로 걷자니 보통 고된 게 아니었다. 가까스로 한 걸음씩 걸어가며 조지현은 혹시 강석원이 주변에 있지는 않을까 살폈다.

「대교에서 내려와서 처음 보이는 도로 쪽으로 내려와.」

“알겠습니다.”

한참을 걷다가 대교 아래로 이어지는 길을 발견하고 조지현은 방향을 틀었다. 핸드폰을 꼭 쥐었다. 강석원의 숨소리가 들렸다. 건물 사이로 커다란 달이 보였다. 왜 하필 이럴 때 그를 놓쳐버린 걸까.

자책해봐도 소용없다.

유성이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기쁨에 넘쳐 환호했고 조지현은 두려움에 숨을 삼켰다.

「지현아.」

“네.”

「뭐가 그렇게 무서워.」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지현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뭘 무서워하는지 알고 싶어. 그래야 괜찮다고 말해주잖아.」

이런 순간에조차 강석원은 제 무능함을 미안해한다. 뜨거운 게 왈칵 눈 앞을 가린다.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폭죽이 연이어 터지고 별이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함성을 터트리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만약에,”

커다란 달이 보인다. 심연을 들여다보는 달이다. 온몸이 떨린다. 그가 자신을 믿어주지 않아도 된다. 미친 사람 취급받는 것은 상관없다. 그저, 강석원을, 지금의 강석원을 놓칠까 봐 그것이 두렵다.

검은 하늘을 낙하하는 수많은 별이 수놓는다. 

“과거로 돌아가서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뭘 하실 거냐고 했던 질문 기억하세요?”

조지현이 묻는다. 

발밑이 무너지는 듯 어지럽다. 몰려든 사람들이 내지르는 환호 때문인지, 극도의 긴장이 빚어낸 현기증인지, 혹은 지금까지 지켜온 시간이 허물어지는 과정인지, 알 수 없다. 손에 식은땀이 흥건하다. 

「기억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같은 질문이었다. 강석원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대답한다.

「더 일찍 만날 거야. 하루라도 빨리.」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이전보다 더 깊어진 마음으로.

삶의 기쁨뿐만 아니라 네 죽음조차 자신이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고, 그게 제 몫이라고 말하던 남자의 눈빛이 떠오른다. 그의 진심이 스며든다.

“제가, 만약에, 다시, ……그렇게 돌아간다면, …….”

두렵다.

긴 시간 동안 버텨온 외로움과 그리움이 스쳐 간다. 이날을 위해 참아냈다. 부디, 제발, 무위로 돌아가지 않기를.

누군가 별을 털어내는 것처럼 어두운 하늘에 별들이 쏟아진다.

“그래서 선배님을 다시 만난다면, …….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면…….”

「괜찮아.」

단조롭고 단단한 음성이 닿는다.

그때, 길 너머에 강석원이 보인다. 조지현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밀려 빠져나갔어야 할 입구를 지나쳐 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번을 만나도 너를 찾을 거니까.」

다시 돌아가서 어린 그를 만났다. 도망치려 했지만, 또 사랑에 빠졌고, 이전보다 몇 배는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전에는 알지 못했던 그의 나약함과 불안을 지켜보았다. 그가 실수하지 않도록 믿음을 주고 싶었다. 

그렇게 돌고 돌아, 이곳으로 왔다.

강석원이 길 건너에서 자신을 바라본다. 지금 당장 달려오지 못하는 애틋함과 안타까움, 짧은 부재도 견뎌내지 못하는 연심이 담긴 눈으로.

그의 말대로다. 몇 번이고 돌아간다 해도, 자신은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정해진 운명이었다.

신호가 닿지 않는지 통화가 끊어졌다.

순간, 다른 건물의 불이 전멸되었다. 지상에 남아있는 빛이라곤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서울 하늘을 집어삼킨 어둠에, 별이 쏟아졌다. 성결한 어둠에 상처를 내듯 빛이 그어진다.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에 압도되어 사람들은 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고요한 어둠에 빛이 내린다. 

조지현은 강석원을 바라본다. 강석원은 하늘을 올려다본 후, 잠시 눈을 감는다. 그가 정확히 어떤 소원을 비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과 같은 마음일 거라고 확신한다. 

그가 행복하길 바란다. 그뿐이었다. 그것이 바라는 전부였다.

그 순간, 달칵, 흔들리던 무엇인가가 귀퉁이가 맞물린 채 고정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지현아.

들릴 리 없는 거리인데도 강석원이 그렇게 부른 소리를 들은 것만 같다. 길 건너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슬픔과 증오, 외로움에 사무친 눈을 했던 남자는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조지현은 웃음을 삼켰다.

미처 터트리지 못한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실로, 아름다운 장관이었다.

조지현은 길 건너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길을 건넜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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