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어슴푸레한 방 안. 투박한 조립식 컴퓨터 앞에서 한 여자가 마우스를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거무칙칙한 블라인드와 벽지는 좁은 방을 동굴이나 구덩이처럼 보이게 만든다. 장판 위에 즐비한 잡동사니들까지 어우러져 마치 쓰레기 처리장 같기도 했다. 그 가운데 오직 컴퓨터 책상 하나만이 우주 공간에 둥둥 떠 있는 별처럼 발광했다.
두꺼운 안경을 낀 채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여자는 진정으로 그렇게 느꼈다. 컴퓨터는 찬란한 항성이고, 자신은 그 빛을 먹고 사는 행성이라고.
일 년째 컴퓨터와 물아일체가 된 방구석 히키코모리의 이름은 최석훈. 20세 백수.
본명은 아니다. 현실에는 부모님께서 지어 주신 주서혜라는 예쁜 이름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서혜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방에 틀어박힌 이후부터 그 이름으로 불린 적이 거의 없었다. 제대로 불린 적은 기껏해야 혼자 사는 빌라 앞에 우편이나 택배가 올 때 정도다.
최석훈, 석훈아, 석훈 님……. 이제는 충동적으로 만든 석훈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정말 자신이 최석훈이라는 남자가 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참고 참았던 소변을 해결하기 위해 화장실에 가면, 거울에 비친 얼굴과 제 밋밋한 아래쪽의 모습에 흠칫 놀라기도 했다.
[석훈 님 제발 죽이지 좀 마세요ㅠㅠ]
[사막에 최석훈 떴어요!]
[석훈아 넌 잠도 없냐? 현생 내다 버렸음?!]
뿌듯하게도, 그녀의 새 이름은 참으로 많이 불리고 있었다. 서혜는 우걱우걱 퍼먹던 감자 칩 봉투에서 손을 빼내고, 기름 묻은 손으로 묵직한 청축 키보드를 두드려 댔다. 타닥타닥, 경쾌한 타건음이 방 안에 있지도 않은 강아지의 발소리처럼 마냥 듣기 좋았다.
[억울하면 님들이 강해지세요~^_^]
일 년 전 오픈한 온라인 게임 ‘윈드 스토리’의 세상 속. 무차별적인 PK(Player Killing)와 파렴치한 행태로 사람들의 원성을 산 것이 언제부터였더라. 이제 서버에서 최석훈과 그의 길드원들의 악명을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약한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고 비로소 자신이 먹이사슬 가장 위에 있다는 것이 증명될 때야말로. 서혜가 인생을 통째로 게임에 베팅한 보람을 만끽하는 순간이었다.
[너 튀지 말고 거기서 딱 기다려라]
포기를 못 하는 사람들의 복수전은 더더욱 즐겁다.
몇 번이나 제 손에 죽은 주제에, 마을에서 부활해 다시 꾸역꾸역 돌아오는 네 명의 마법사들을 멀리서부터 바라보고 있자니 서혜의 가슴이 벌써부터 두근거렸다. 도망을 왜 가겠는가? 이렇게 즐거운데.
장엄한 풍경의 사막 필드 한가운데서 후광과도 같은 노을빛을 등지고 있는 또 다른 ‘나’.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과장되어 보이는 험악한 외모. 한 손에는 서버에서 유일한 ‘+99강 축복받은 용사의 검 비에스’를 당당하게 들고 있는 서버 랭킹 1위 전사 최석훈.
석훈의 취미는, PvP(Player versus Player) 필드에서 벌이는 플레이어 학살이다.
[얼마나 현실에서 대접을 못 받으면 그러고 사니. 석훈이 오늘도 즐거운 게임 되세요♥]
멀리서부터 달려오던 마법사들의 욕설이 자동으로 설정된 매크로 단어로 필터링된다. 훌륭한 비속어 방지 시스템 덕분에 그들은 민망한 듯 더 이상 키보드를 두드리지 않았다. 온갖 이펙트를 줄줄이 달고 떼거리로 공격해 올 준비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거리가 좁혀지자, 서혜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가 2미터도 넘는 최석훈은 육중하고 무거울지언정, 그걸 다루는 이의 컨트롤은 더할 나위 없이 가볍고 현란하다. 그녀는 네 명의 마법사를 단 1분 만에 다시 전멸시켰다.
멋지다, 최석훈.
서혜는 오늘도 영광스러운 승리의 기쁨을 누렸다. 주먹을 힘껏 쥐고 머리 위로 뻗어 기지개를 켰다. 두두두둑-. 찌뿌둥한 허리가 운동 부족이라며 비명을 지르지만 아무렴 상관없다. 이때의 쾌감은 무엇으로도 당해 낼 수가 없으리라.
하지만 아직 부족해, 계속해서 피가 고프다.
방 안의 시계는 벌써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서혜의 하루는 이제 시작이었다. 게임 중독자의 도파민 부족 현상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밤새도록 필드를 독식하며 승승장구하던 서혜는 곧 더 파괴적이고 새로운 쾌감을 찾고 싶어졌다.
그녀는 이틀째 감지 않은 머리를 한 번 긁적이며 무엇을 할지 생각하다가, 힘없이 널브러진 시체들을 뒤로한 채 남부의 초원 사냥터로 순간이동을 시도했다. 일정 레벨을 넘긴 플레이어들은 평화로운 마을 근처에서 벗어나 서로 살상이 가능한 PvP 필드로 나가야만 제대로 된 육성이 가능했는데, 그리하여 병아리들이 마주하는 첫 번째 필드가 바로 초원이었다. 그곳에 싱싱하고 손쉬운 사냥감들이 많다는 뜻이었다.
어디 죽일 만한 것이 없나, 먹이를 찾아 정처 없이 헤매는 서혜의 퀭한 눈빛은 가히 한 마리 하이에나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오픈 월드를 떠돌던 굶주린 포식자의 눈에 얼마 안 가 무언가 포착됐다. 조금 떨어진 초원 외곽, 부싯돌로 쳐서 만든 것 같은 작은 화염이 치솟고 있었다. 비루한 이펙트는 레벨 낮은 마법사의 특징. 살생에 목마른 석훈은 말에서 내린 뒤 길게 솟은 잡초 틈새로 커다란 몸을 욱여넣었다. 성긴 풀밭을 뚫고 얼굴을 내밀자, 공터 한복판에서 고군분투하는 초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요정족이네.”
마법사의 정체는 비실비실하게 생긴 요정족 남자였다.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는. 거인족의 멋짐을 모르는 불쌍한 녀석들…….”
감자 칩 부스러기가 묻은 서혜의 입술이 불만스럽다는 듯 번들거렸다. 그녀는 키보드를 마저 움직여 버프를 장착했다. 쿵, 쿵, 근육으로 무장한 거대한 캐릭터가 발을 구를 때마다 게임에선 진동이 울리는 효과음이 났다.
효과음을 들은 것인지 한참 뿔 달린 사슴을 때려잡던 뉴비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멍청한 뉴비. 그는 그 순간 아직 죽지 않은 사슴에게 뒤통수를 공격당했다. 그렇게 체력이 절반이나 깎이고 나서야 뒤늦게 다시 무기를 휘둘러 사슴을 때린다. 적잖이 우스운 광경이다. 컨트롤도 못 하고, 마나가 부족해서 마법으로 한 번에 못 잡으니 몽둥이까지 동원하고 있는 꼴이라니.
하아, 뉴비 사냥에도 급이 있지…….
딱 보아도 장비 세팅이나 초보자용 공략도 전혀 모르는 햇병아리였다. 굳이 자기가 죽이지 않아도 사슴에게 맞아 죽을 것 같았기에, 서혜는 그저 자비를 베풀어 아이템이나 나눠 주고 돌아갈까 잠시 고민해 봐야 했다.
[ㅡㅡ 몹인줄 알았네]
물론 예상치 못한 하얀 말풍선이 화면에 나타났을 때는, 얄팍한 고민 따위 감자 칩 봉투를 채운 질소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말이다.
[님 때문에 죽을 뻔?]
“하-.”
한 번의 탄식과 함께 서혜의 미간이 좁아졌다. 기계에서 뻗어 나온 청광이 안경알에 일렁거린다. 유리 위로 새겨지는 글자는 더 가관이었다.
[자리]
자리? 자리라고?
자신이 사냥하고 있는 구역에 감히 접근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최석훈이 나타난다면 누구든 울며 겨자 먹기로 자리를 비켜 주는 것이 이 세계의 국룰이거늘……!
자리를 주장해? 감히 나한테?
머릿속에서 물음표가 춤을 춘다. 달칵, 달칵. 황당함에 사로잡힌 서혜는 재빨리 커서를 움직여 캐릭터 정보를 확인했다. 시건방진 뉴비는 ‘세계최강경원이’라는 딱 봐도 중학생이나 쓸 법한 이름을 쓰고 있었다.
레벨 30의 아직 전직도 안 한 마법사.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자리. 가라고. 죽고 싶냐?]
가지런히 아치형을 그리던 눈썹 산이 위로 치솟았다. 아하하, 자비는 무슨, 서혜의 생각은 이미 180도로 바뀌었다. 어린 뉴비들은 너무 용감하다. 서버 랭킹 1위의 위엄 따위는 모른다. 그럴 때는, 얼마나 이 세계가 무섭고 잔인한 곳인지 훈육해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콰쾅! 땅이 무너지는 듯한 효과와 함께 뉴비는 지옥으로 떨어졌다. 상쾌한 원킬이었다.
서혜는 그날부터 초보 중의 초보인 경원이를 무자비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100% 데이터 덩어리인 보스 몬스터 따위로는 쾌감이 부족했다. 좀 더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사냥감들이 훨씬 더 좋았다. 추적 아이템까지 구입해 경원이가 들어올 때마다 따라가 죽이니 말 그대로 목숨줄을 끊어 놓는 사냥이었다. 때때로 하루에 한 번만 사용 가능한 강제 소환술을 써 익사나 낙사로 죽이기도 했다.
[좋은 말로 할 때 그만해라. 지금 그만하면 잊어 줄 테니까]
[벌레가 말도 하넹ㅋ]
[벌레?]
[저는 저보다 약한 놈의 명령은 듣지 않습니당ㅋ 공손하게 빌면 생각은 해보겠음ㅋㅋ 생각만ㅋㅋㅋ]
약이 올라 달려온 경원이를 다시 죽이는 일은 서혜에게 마약이라도 한 듯한 황홀함을 안겨 줬다. 큭큭크, 방 안에선 음흉한 조소가 끊이질 않았다. 희열로 가득 찬 눈에 섞여 들어 간 집요함은 옛날 옛적 정상의 것을 넘은 지 오래다.
남들이 유치한 싸움이라 손가락질한들 상관없고말고. 그놈도 추적해 끝장낼 테니까.
사냥감을 완전히 전의상실하게 만드는 악명 높은 학살자 최석훈. 그는 절대 지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강했다.
승리의 증거일까, 얼마 뒤 건방진 경원이는 더 이상 추적이 되지 않았다. 결국 접속을 멈춘 것이었다.
서혜는 그가 게임을 완전히 접었을 거로 생각했다. 반성 따위는 없었다. 약하면 현실의 주서혜처럼 죽는 것이 당연했으니까.
게임에서는 시스템이 허용하는 한 무엇을 해도 자유. 게다가 쫓겨난 유저는 현실에 더 집중하게 될 테니 도리어 그에게 잘된 일이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원래의 사냥터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곧 새로운 던전이 업데이트될 시기였다. 경쟁자들이 위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사냥터를 독점하는 것이 단언컨대 경원이 따위보다 훨씬 중요했다.
[오늘부터 고대 숲 신규 보스 베히모스 토벌 통제합니다. 접근하는 유저 발견 시 길드 전쟁으로 알고 전부 죽이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석훈의 보스 통제 선언에 채팅창은 순식간에 원성으로 가득 찼다. 최석훈 또 시작이네, 나도 무기 좀 만들자, 게임 너 혼자 하냐?
그러나 서혜는 그런 사소한 민란 역시 일명 ‘채팅창 통제’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방금 채팅친 분들 이름 기억했습니다^_^]
또다시 아랑곳하지 않고 왕 노릇을 이어간다. 게임 속의 그녀는 분명 왕이고 신이었다. 현실과는 전혀 달랐다. 아무도 자신을 괴롭힐 사람이 없다. 약한 주서혜는 없고 강한 최석훈만 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영원히 이어지는 왕좌가 과연 있었을까.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서혜가 온 힘을 다해 군림하고 있던 아름다운 가상 세계는 모래성이 무너지듯 몰락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별이 떠오름과 함께였다.
바로 전 서버 랭킹 1위를 차지한 마검사, ‘우주최강경원이’의 등장이었다.
***
열심히 시간을 쏟아부어도 현질에는 당할 자가 없었다.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지만, 게임 운영자들의 목적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윤추구니까 말이다. PvP는 그들에게 경쟁과 과금을 유도하는 좋은 시스템이었고, 서혜도 노가다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을 깨기 위해 거금을 게임에 쓴 상황이었다. 남들 보고 데이터 덩어리에 돈을 쓴다 비난할 처지가 못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조잡한, 한마디로 망겜에 한 달 동안 2억 원이라니. 그게 말이 되는 액수인가?
[최석훈]
[나 2억이나 썼어]
[만나서 얼굴 좀 보자]
대세가 뒤집힌 것은, 오랜만에 호화스러운 배달 초밥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있던 쌀쌀한 가을날의 저녁이었다.
서혜의 텅 빈 시선은 초밥을 먹으면서도 모니터로 가 있었다. 곧 보스 몬스터가 나타날 시간이라서 던전 입구에서 망을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석훈은 난데없이 나타난 마검사에게 당해 버렸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공격. 죽음은 순식간이었다. 처음에는 방심한 탓에 죽은 줄 알고 몇 번 부활하기를 반복했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우주최강경원이의 손에, 한 번으로도 끔찍한 죽음이 몇 번이나 반복된다.
그때부터 1:1 개인 채팅이 오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었다.
[안 나오면 사람 고용해서 너만 쫓아다니게 만든다]
[나와서 깔끔하게 사과하고, 몇 대 맞고 해결하자고]
[게임 접고 싶지?]
[대답 안 하냐?]
서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장비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두 눈을 아무리 깜작대 보았자 눈에 보이는 것들이 사라지진 않는다.
‘꼼짝없이 접은 줄 알았더니만, 언제 새 캐릭터를 키운 거지? 상위권 랭킹은 매일 체크했고 경원이라는 이름은 지금까지 없었는데!’
그런 의문은 경원이의 손에 들린 장비를 보았을 때 깔끔하게 해소되었다.
장비창을 빛내는 붉은 색 배경 아이템.
‘+99강 저주받은 용사의 검 비에스’.
그것은 석훈이 들고 있는 ‘+99강 축복받은 용사의 검 비에스’보다 공격력을 최소 40%는 더 올려 주는, 아직 전 서버 통틀어 아무도 얻은 사람이 없다는 초 희귀 전설 무기였다. 장착하는 순간 누구든지 1위로 껑충 뛰어오르고도 남을 스펙이다.
저 역시 각성을 시도해 볼까 하다가, 재료 아이템인 축복받은 검이 높은 확률로 터져 버린다는 것이 무서워 지레 포기한 것인데…….
존재마저도 루머가 아니냐는 소리가 돌던 전설의 장비가 왜 저 건방진 놈의 손에 들려 있다는 말인가!
[아 맞다. 최석훈]
[너네 길드원들 돈에 약하더라? 애들 월급 좀 주지 그랬어ㅋ]
[너 몰래 던전도 막 들여보내 주던데. 퀘스트도 깨주고. 덕분에 전설 무기 만들었음:)]
쾅-!
서혜가 양손으로 키보드를 내리쳤다. 마치 동굴 속이 울리듯이 방 안이 굉음으로 진동했다.
미역국수 님께서 탈퇴하셨습니다, 파인애플피자 님께서 탈퇴하셨습니다, 배신을 끝낸 길드원들이 우르르 길드를 나가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오픈 채팅방도 이미 전부 나가 버린 뒤다. 이제 와서 그들의 의리를 탓하기에는 PK를 밥 먹듯이 하는 비매너 유저들만 모아 놨기에 할 말도 없었다.
복수전은 즐겁다.
자신이 이겼을 때만.
석훈의 랭킹은 2위, 아니, 3위, 4위…… 점점 아래쪽으로 곤두박질을 쳤다. 막고 있던 길드가 파훼된 틈에 너도나도 보스를 처치하고 장비를 만들어 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와중에 저 혼자 입구에 드러누운 시체가 되었으니, 쪽팔림과 수치심으로 서혜의 몸이 바들바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문지기처럼 서서 보스는 꿈도 꾸지 말라며 비웃음을 날리는 것은 석훈이 아닌 경원이였다. 그녀에게는 마치 태양이 폭발해 버린 것 같은 충격이었다. 세상에 빛이 비치지 않는다.
[너 이제 아무것도 못 해. 어떡하냐ㅋㅋ]
먹다 남은 초밥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채팅창은 지금껏 광명을 찾을 날을 기다려오던 선량한 유저들의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경원이는 세상을 구원한 영웅 취급을 받았고, 몰락한 석훈이는 조롱을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귓속말에 답장을 보내는 서혜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예, 만납시다. 지금 당장.]
TV 뉴스에 현피, 즉 현실 PvP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건이 터졌었는지 알면서도, 그녀는 당장의 위기감과 열패감을 감당해 낼 수 없었다. 윈드 스토리는 자신의 인생이었다. 주서혜는 키보드를 조작하기 위한 껍데기에 불과했으며 중요한 것은 주서혜가 아니라 최석훈이었다. 이대로 망하는 꼴을 두고 보느니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낫다.
서혜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채팅을 이어 갔다.
[진 사람이 아이템 다 넘기고 캐릭터 삭제. 커뮤니티에 무릎 꿇고 사과 영상 인증. 무기 사용 자유. 하시죠?]
사과는커녕 당당하게 캐삭빵을 제안하는 석훈. 그 범상치 않은 패기에 사납게 찢어져 있던 경원의 눈이 제법 둥그레진다.
“……이 새끼 봐라. 진짜 막장이네 이거.”
아무리 잃을 거 없는 것들은 겁도 없다지만. 이 정도면 게임과 현실을 구분 못 하는 수준 아닌가?
경원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린다. 꺼지지 않은 잿불이 벌겋게 끓어올랐다.
그가 서 있는 자리는 더 이상 게임 속이 아니다. 바닥에 밟히는 것은 흙 대신 매끈한 대리석이다.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펜트하우스. 잘 닦인 통유리에 세 대의 모니터와 함께 거대한 사내가 비치고 있었다.
남자는 은하수처럼 빛나는 도시의 광해를 배경 삼아 술을 찾는다. 멀찍이 서 있던 수행원 하나가 눈치껏 가장 비싼 맥주를 대령했다. 먹으로 칠한 듯한 머리카락을 뒤로 젖히고 냉수를 마시듯 잔을 비운 경원은 그제야 뛰는 가슴을 조금 진정시켰다. 깊고 길게 내뱉는 한숨은 제 성질머리를 발끝으로 주저앉히기 위한 심호흡이었다.
“하…… 내가 어쩌다가 게임에 손을 대서.”
정보통신 사업으로 세계적인 부를 축적한 라크뷰 플랫폼스의 창업자, CEO 윤해산의 자식 중 가장 천덕꾸러기로 꼽히는 윤경원.
기껏 회사에 자리를 내줘도 제대로 출근조차 하지 않는 망나니 같은 아들에게 질려 버린 집안에선 엄포를 놓았다. 올해 겨울이 지나기 전까지 자립할 능력을 기르지 않으면 모든 경제적 지원을 끊어 버리겠다고.
삶의 위기라는 걸 느낀 경원이 사업이나 해 볼까 싶어 평소 좋아하던 게임에 호기심을 가진 것이 모든 일의 화근이었다. 본래 망하지 않으려면 망한 가게를 공부해 봐야 한다고 하지 않나. 사전 조사나 해 볼까 설렁설렁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간 것이 바로 윈드 스토리였는데…….
그곳에서 웬 미치광이 사이코 같은 놈이 나타나서는, 자제하려던 성질을 긁고 만 것이었다.
[쫄?]
몇백만 원짜리 모니터 너머에서 도발이 계속되고 있었다. 석훈은 자신의 오픈 채팅방 이름과 비밀번호까지 보내 왔다. 핸드폰을 들어 채팅방으로 접속해 보자, 자기 집 근처의 공원 위치까지 친절하게 찍어 준다. 이놈도 어지간히 제정신이 아니다.
“적당히 혼내 주고 끝내려고 했더니…….”
그래. 생각해 보니 자신은 지금 시장 조사를 하는 와중이었다.
이건 단순히 유치한 현피라고만 할 수 없다. 이렇게 게임에 목숨 거는 것들은 대체 어떤 놈일지 알아보는, 창업에 도움이 되는 준비과정일 뿐이다. 유저의 성향을 분석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니까.
“범수야, 차 좀 대기시켜라.”
머릿속으로 간단히 합리화를 마친 경원의 목소리 톤이 즐거운 수준까지 올라갔다. 이 밤중에 또 사고를 칠 속셈이라는 걸 알아챈 수행원이 뻘뻘 땀을 흘려 댔다.
“진짜 현피인가 뭔가 하시려고요? 어떤 놈인지도 모르는데 위험합니다, 도련님. 애들 미리 보내 놓겠습니다.”
“글쎄? 잠도 안 자고 온종일 게임만 하는 놈이 운동은 하겠어? 뭐 기껏해야 덩치만 크고 슬라임처럼 물렁물렁한 놈이겠지. 사내놈이 자존심도 없이 연장 챙기겠다고 하는 것만 봐도 뻔해.”
경원은 수행원의 말을 능청맞게 무시하며 드레스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인들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벽창호처럼 귀도 막고 눈도 막고.
매사에 그렇게 가볍고 장난스러운 태도이니 다른 재벌가들과 함께 상류층 문화에 적극적으로 합류하고 싶어 하는 윤 회장의 속은 나날이 타들어 갔다. 자식이라는 놈은 어렸을 때부터 유학까지 보내 놨더니만 사고만 쳐서 돌아오고, 그가 선망하는 교양이나 성숙함이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가 없었으니까.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의외로 진짜 칼 좀 써 본 깡패 같은 애들이 우르르 몰려나올지도 모르고…….”
“영화 찍어? 대형 슬라임이라니까. 내기할래? 내 말이 틀리면 너 이번 추석에 떡값 두 배로 올려 준다.”
“수행원들 보너스는 실장님이랑 회장님께서 상의해서 결정하시는 거라서…….”
“아- 쨍알쨍알 시끄럽네.”
그리고 제 아비에 대해 신물이 날 정도로 질려 있는 것은 경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회장님이라는 한마디에 경원의 눈매가 아주 길게 휘어졌다. 가장 가까운 수행원이라는 범수도 결국에는 아버지의 사람이라는 게 때때로 티가 난다. 그는 드레스룸 안까지 뒤따라온 범수를 향해 친절한 말투로 말했다.
“범수야, 너는 걱정 말고 네 할 일이나 하자. 응?”
단정하고 청초한 이목구비 아래로 그림자가 졌다. 그 얼굴 가죽만 대충 구겨 놓은 것 같은 표정에 진심은 없다. 싱그러운 듯하면서도 비열함이 느껴지는 오묘한 미소는 멈추라는 경고등이었다. 범수는 재빨리 한발 물러났다.
“예, 도련님.”
“그래그래, 내가 돈 쓰겠다는데 우리 잘나신 아버지가 어쩔 거야. 어차피 아버지 돈이 내 돈이고 내 돈도 내 돈이지. 안 그래?”
“맞습니다, 도련님.”
경원이 후레자식 같은 소리를 태연하게 내뱉으며 외출복을 챙겨 입었다. 터질 것 같은 티셔츠 위로, 차마 가려지지 않는 근육들이 목선과 어깨를 따라 그림을 그려 낸다. 애써 점퍼 같은 것을 걸쳐 가려 봤자 마찬가지였다.
경원은 누가 나오든, 심지어 그놈이 잘 갈린 회칼을 들고 오더라도 흠씬 두들겨 줄 자신이 있었다. 그건 단순히 더러운 성격에서 나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동물, 짐승, 맹수, 그런 것들로부터 배어 나오는 위협적인 분위기가 범수의 눈에도 뚜렷했다. 범수에게는 다소 걱정이 되었다. 최석훈이라는 남자가 오늘 밤 맞아 죽을까 봐.
***
공원 중턱에 세워진 고급 승용차가 썩 이질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약속 장소와 조금 떨어진 거리. 가만히 운전석에 앉아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범수의 시야에 드디어 무시무시한 최석훈이 나타났다.
예쓰! 범수가 짧은 환호성을 질렀다. 멀리서 실루엣만 보아도 확실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나타난 남자는 덩치 큰 거대 슬라임 같은 게 아니었다. 그로써 내기에서 이긴 범수는 큰돈을 받게 될 터였다. 게임에 억 소리 나는 돈을 써 버릴 수 있는 윤씨 일가의 재력답게, 일개 수행원의 보너스도 결코 적지 않으니까. 그걸 두 배로 올리면 새 자동차 정도는 너끈했다.
희비가 교차했다. 기뻐하는 수행원과 달리, 김이 새다 못해 차갑게 식어 버린 경원은 엄청난 현자 타임을 느끼고 있었다.
언덕 꼭대기에 만들어 놓은 오래된 공원은 재개발 지역 근처라 그런지 여기저기 녹슬어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눈앞에 나타난 작은 생명체를 보고 있으려니 기껏 조성된 섬뜩한 필드도 무용지물이었다.
작아도 너무 작다. 한 손으로 들고 던질 수도 있을 듯한 최석훈의 초라한 체구에 경원은 완전히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지가 요정족이야 뭐야?
긴 롱패딩을 입은 데다가,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꽁꽁 감싸 매고 있는 탓에 얼굴까지 자세히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키가 160센티도 안 되는 것만은 눈대중으로 알 수 있었다. 잎이 떨어진 나무에 걸어 놓으면 나뭇가지인지 사람인지 구분도 안 될 것 같은 놈이랑 싸움이라니. 웃기는 상황이다.
당연히 최석훈의 등장이 게임과 다를 거라 생각은 했지만…….
설마,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은 아니겠지?
서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경원은 피우다 만 담배꽁초를 잘근 밟아 껐다. 공원이 금연 구역이어서는 아니고, 애들 있는 데서 피기 껄끄러워서. 그는 자칫하면 아동 학대로 잡혀가겠다는 노파심에 물었다.
“야, 석훈아. 집에 부모님 안 계시냐?”
질문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서혜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만나자마자 하는 첫 마디가 패드립이라니, 양아치 같은 놈.
그러나 그녀는 대꾸할 수가 없었다. 싸움을 앞두고 여자라는 걸 들키면 더 만만하게 볼 것이 뻔했으니까.
길드원들과 음성채팅을 할 때는 음성변조 프로그램으로 어찌저찌 넘어갔지만, 지금은 그런 속임수를 쓸 수 없다. 그래서 일부러 머리카락을 감추고 남자처럼 보일 옷만 주워 입고 나온 것이었다.
대답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주머니에서 준비해 온 식칼을 꺼내는 일이었다. 가로등도 몇 개 제대로 켜진 것이 없는 공터 한복판. 모자 속으로 그림자 진 눈의 생김새까지는 제대로 보이지 않아도 눈빛에 살기가 그득하다는 것은 경원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씨발, 진짜 미친놈이구나 너.”
김이 새는 바람에 대충 좋게 해결해 보려던 경원은 화가 난 듯 점퍼를 벗어 던졌다. 보통은 제 덩치를 본 놈들은 알아서 말로 하자고 물러서는데, 끝까지 자존심을 부리는 걸로도 모자라 사람을 찔러 보겠다고 칼을 꺼내다니. 천하의 악마 같은 놈을 굳이 봐줄 필요가 있을까.
하긴 그렇지. 학생이면 의무적으로 등교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밤낮으로 게임에 접속해 있을 수가 없지.
“흉기까지 꺼냈으면 이제부턴 정당방위다?”
두둑, 긴 목선을 몇 번 좌우로 가다듬던 경원이 어울리지 않게 생글생글 웃어 댔다. 겁을 먹기는커녕 반가워하는 얼굴이었다. 그가 낮고 뜨거운 숨결을 내쉴 때마다 두꺼운 몸통에선 날 선 핏줄과 근육들이 꿈틀거리며 춤을 췄다.
“한 대 맞고 멈춰 달라고 하지나 마라.”
너 오늘 잘 걸렸다. 경원은 긴말할 것 없이 사냥감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그의 덩치는 두 배 세 배로 커졌다. 히익! 서혜가 숨을 들이켜며 본능적으로 칼을 앞으로 내밀었다. 칼을 가지십시오, 하고 갖다 바치는 모양새였다.
삐빅-. 삑-. 언덕의 약간 아래쪽에서는 야간 줌 기능이 훌륭한 카메라를 든 범수가 그 모습을 정확하게 촬영하고 있었다. 칼을 꺼내 드는 것부터 휘두르는 모습까지 전부. 적어도 나중에 쌍방 폭행으로 우겨 볼 수준은 되도록. 하지만 성격 나쁜 도련님이라면 거기서 끝내지 않고 상대방을 살인 미수로 고소해 버릴 거라는 짐작도 들었다.
어찌 됐든 본래 몸싸움이라는 것은 대체로 한순간에 결판이 난다. 녹화를 시작한 지 대충 30초쯤 지났을까. 하아- 빨리 집에 가고 싶다. 범수가 그렇게 생각하며 하품하기 무섭게 카메라 속에서 싸움이 끝났다. 경원이 칼을 든 손목을 꺾고 키 작은 남자를 거칠게 바닥으로 넘어뜨렸다.
“꺅!”
아, 남자가 아닌가?
***
“흐윽…….”
넘어지며 모자가 날아가자 숨겨 놓았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바닥에 머리를 부딪힌 서혜는 벗겨진 모자를 신경 쓸 여유도 못 찾고 끙끙 신음성을 뱉기 바빴다. 아무래도 뇌가 터지고 말았나 보다. 오랜만에 겪는 육체적 충격에 절로 눈물이 나왔다. 사실은 넘어지며 조금 쓸린 것뿐이지만 허약한 서혜에게는 몸이 두 동강 나는 고통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절대 항복 선언만큼은 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몸을 꼬며 등 뒤로 고정된 팔을 풀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게 정신 나간 좀비가 따로 없었다.
“……뭐야, 얘.”
오히려 당황하며 손에 힘을 풀어 버린 것은 경원이었다. 감은 지 얼마 안 된 듯 젖어 있는 긴 갈색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그랬다.
그렇다고 해서 서혜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꺾인 팔이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풀어 준 것이지 팔을 잡고 등을 억누르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였으니까.
“이젠 여자야?”
등에 올라탄 경원이 한쪽 손으로 여자의 손목 두 개를 거뜬하게 고정했다. 얼마나 앙상한지 제 손이 남을 지경이었다. 남은 팔을 뻗어 마스크와 안경을 단숨에 벗겨 버리니 돌아간 옆얼굴이 의심할 것도 없이 여자애였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지만, 때릴 곳도 없어 보이는 작은 턱선이나 커다란 눈이나 완전한 미인의 형상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악명 높은 최석훈이 생각보다 훨씬 귀엽게 생겼다는 것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여자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 조금 앞쪽에 떨어져 있는 식칼로 향했다. 이미 끝장이 난 상황에서마저 이길 방법을 궁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림도 없지.
“미안하지만…… 여자든 남자든, 캐삭빵은 이겨야겠다.”
“윽!”
“항복해. 평생 마우스 못 잡게 되기 전에.”
경원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어찌나 악력이 센지, 얇은 손목 따위야 금방 으스러뜨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차, 차라리 죽여요!”
“싫어.”
“한 번만, 한 번만 다시 해요. 사, 삼세판으로……!”
“그걸 들어주겠냐?”
“도련니임! 안 됩니다!”
“흐아악! 죽이라고오오!”
“이 미친! 야, 범수야! 얘 혀 깨문다!”
훗날 서혜는 생각했다. 만약 그때 마침 수행원이 싸움을 말리러 오지 않았다면…… 윤경원은 분명 제 양 손목을 부러뜨리고 말았을 거라고. 그리고 저 역시 애꿎은 혓바닥을 잘라 냈을 거라고.
몸의 대화만큼 확실한 것이 없었다.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서로가 미친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