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9)

02.

“나이.”

“스무 살이요.”

“이름은.”

“주서혜요.”

“서예?”

“서, 혜라고요. 혜.”

“이게 근데 아까부터 어른한테 말버릇이…….”

더 난동을 부리지는 않았지만, 서혜의 상태는 불안정했다. 흥분한 교감신경 탓에 위아래 앞뒤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결국 커다란 경원의 손에 꿀밤을 두 대나 맞았다. 학교 선생에게 반항하듯 굴었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주서혜는 이제 성인이었고, 보호해 줄 울타리가 없었으며, 제 언행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질러 온 만행들에 대한 결과는…….

꼼짝없이 우주최강경원이, 아니 진짜 ‘경원’의 차를 타고 어딘가로 끌려가는 것이었다.

커뮤니티에 영상을 올리는 일 정도는 없던 일로 해 준다는 말에 서혜는 제 발로 차에 올라탔다. 사실은 억지로라도 태울 기세였기 때문에, 패자에게는 딱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거 납치예요. 범죄요. 아세요?”

“알다마다. 칼 휘두르는 게 범죄인 것도 알고.”

“무기 쓰는 거 합의했잖아요.”

“너도 합의하고 탄 거잖아? 이 밤중에, 남자 따라서. 여기가 9시 뉴스였으면 너 벌써 죽었어.”

서혜가 사는 반지하 월세방은 강남 끝자락 헌릉로 근방의 양리 마을. 경원이 사는 용산구까지는 20여 킬로미터를 달려야 했다. 적어도 삼십 분 이상은 차 안에서 조용히 대화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오가는 대화는 싸늘하기만 했다.

“그런 게 무서웠으면 나오지도 않았어요.”

“네가 아직 아픈 게 뭔지 몰라서 그래.”

“알아요. 그걸 왜 몰라요.”

“말대꾸할래?”

운전석에 앉은 범수가 힐끔 백미러로 뒤를 살폈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히고 나니 두 사람의 덩치 차이는 더 극명했다. 바닥 위를 구르며 찢어진 패딩을 벗겨 버리니 여자 쪽은 더더욱 초라해졌다.

어쩐지 아직 한겨울도 아닌데 이상하다 했더니만 패딩은 몸을 부풀리기 위한 수단이었나 보다. 서혜는 작아서 잘 뵈지도 않았다. 위풍당당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외투도 뺏기고 핸드폰도 뺏기고서 차 구석에 쭈그러진 모양새였다. 한마디로, 주둥이만 반항적이었다.

반면 경원은 손에 들린 서혜의 핸드폰을 뒤적거리며 실실 웃고 있는 것이, 승자의 여유를 즐기고 있거나 아니면 너무 기분이 별로이거나. 모 아니면 도다. 대체 여자애를 데려가서 어쩌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속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으면 윤 회장이 그렇게 자식 교육에 머리를 싸맬 이유도 없을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붙어 다닌 범수의 생각도 그러했으니, 막 처음 만난 서혜 역시 경원을 파악하기란 힘들었다.

서혜는 고개는 반듯하게 앞으로 놓은 채로, 힐끔힐끔 눈알만 흘기며 옆에 앉은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어둑한 차 안. 길게 트인 눈과 콧대로 내려오는 날카로운 선…… 야비하게 올라간 입꼬리. 전형적인 악당의 첫인상이었다. 감정이 나쁘니 아무리 배우처럼 잘생긴 외양이래도 좋게 생각하기가 싫다.

대체 왜 히죽거리고 있어? 바윗덩어리 같은 게.

“이야, 최석훈 씨, 전화번호부에 사람이 딱 세 명이야? 부모님하고 통화 기록이 두 달 전이네.”

“…….”

“아예 내놓은 자식인가 봐?”

“놀리려면 마음대로 하세요.”

“별로? 누구는 생명의 위협이라도 느낄 판에 나 혼자 놀리고 그러면 안 되지.”

하는 말과는 달리, 그는 맥락도 없이 계속 키득키득 웃는다. 몇 살인지는 몰라도 아마도 고등학교 때 오토바이 좀 타다가 조직폭력배가 된 조직원이 아닐까. 서혜는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하는 행동이나 말이나 질 낮아 보이기도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자기를 끌고 가서 어디 다른 곳으로 팔아넘긴대도 믿을 법했다.

최석훈이 이런 양아치 같은 놈에게 끝나다니, 문득 허망함에 눈물이 날 거 같아서 서혜는 창가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기가 약해서 진 것이 잘못이라며 제 심장을 과녁 삼았다.

“어차피 전 더 잃을 게 없어요. 아저씨는 잃을 게 많을 거 아니에요. 겁 안 나요.”

“네가 잃을 게 왜 없어? 쥐어짜면 없던 것도 생겨.”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우리 만나는 거 다 알고 내기까지 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범인이야 금방 잡히지 않겠어요? 가진 거 많은 사람한테는 손해밖에 안 되죠.”

“아, 그래?”

먹히지도 않는 허세였다. 경원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사실 이익이니 손해니 하는 것들을 따진다면 이미 시간도 돈도 손해였다. 그의 입장에서도 한 달간 최석훈을 잡기 위해 투자한 에너지를 생각하니 적잖이 허망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서혜만큼 게임에 목숨을 걸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 그다지 속 시원하게 때려 주지도 못했고, 이런 어린애한테 잠시나마 휘둘린 스스로가 한심하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내 기대가 됐다. 그 오만방자하던 최석훈이 귀여운 여자애라니 예상외의 정체가 흥미롭지 않은가. 죽이기는 왜 죽이겠는가.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훈육 방법이 많을 텐데.

“최석훈 씨. 뭘 모르네.”

이윽고 범수가 차를 멈춰 세웠다. 도착했습니다, 말하기 무섭게 누군가 밖에서 덜컥 문을 열어 주었다.

“가진 게 너무 많으면, 좀 잃는다고 티도 안 난단다.”

서혜는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렸다. 비웃는 듯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같은 서울권, 그리 먼 거리가 아님에도 눈앞에선 어느새 별천지에 온 것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금이 간 안경 너머, 연갈색 시선이 천천히 하늘로 옮겨갔다.

아르 데코 양식의 건물 게이트에서부터 너무 눈이 부시지도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은 조명들이 한없이 위로 뻗어 나간다. 머리가 점점 뒤로 젖혀졌다. 커튼 월로 지은 유리 벽이 끝이 안 보였다.

서혜는 그게 정확히 어떻게 지어진 건물인지 알 도리가 없었으므로, 신기한 듯 눈만 깜빡이기 바빴다.

아무리 봐도 집처럼 생기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원양어선에 팔아 치울 만한 광경도 아니고. 왜 이런 곳으로 데려온 걸까.

“도련님, 오셨습니까.”

정신이 팔린 사이, 뒤쪽에서는 단아한 정장을 입은 직원 하나가 경원과 태연하게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박 실장, 이 시간에 왜 마중까지 나오고 그래?”

차에서 내린 경원의 얼굴에서 잠시 웃음기가 지워진다.

“통화가 안 돼 기다렸습니다. 회장님께서 모레 저녁에 급히 귀국하신다고 하십니다. 일단 자택으로 가신 뒤에 일정을 정리하시고 호텔로 오실 것 같습니다.”

“아- 내 기분 잡치려고 나왔구나? 그런 건 좀 해 뜨고 말해 주지.”

“죄송합니다, 시간이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기침 후에 조식은 라운지에서 하시겠습니까? 두 분이 함께하시는 걸로 알고 있으면 될까요?”

“웬일이래, 내 아침밥까지 챙기고. 여자한테는 신경 꺼. 필요한 거 있으면 범수 시킬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서혜에게는 물속에 잠긴 것처럼 먹먹했다. 낡은 운동화가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서혜는 회전문 위로 새겨진 금색 글씨를 읽어 보았다. 익숙한 영어 철자가 눈에 띄어서.

‘더 라크뷰 심포니’

몇 년 전 떠들썩하게 미디어를 타던 특급 호텔의 이름이었다.

***

실밥이 풀린 낡은 스웨터가 말해 주듯 바깥세상에 큰 관심이 없는 스무 살이었다. 서혜는 초호화 호텔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었다. 호텔이든 모텔이든 볼 일이 있을 리가. 사회성이라면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제대로 못 할 수준이었으니, 직원은 물론이고 투숙객으로 접해 볼 기회조차 없었다.

그래서 VIP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면서도 뭘 타고 있는 건지 몰랐고, 호텔 꼭대기의 펜트하우스에서 누군가 장기 투숙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돈이 많아 보이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많구나.

그 정도의 단순한 감상만 남긴 채로, 그녀는 자기 집보다 큰 것 같은 현관과 복도를 지나 경원의 뒤를 쫓아 들어갔다.

내부는 겉으로 보는 것보다 더 화려했다. 거실이든 방이든 유리 박스 속에 들어 있는 듯 사방이 통유리였다. 양말에 닿는 대리석의 감촉이 낯설다. 여기저기 고풍스러운 샹들리에를 달아 놓은 주제에 모더니즘인지 컨템포러리인지 하는 도시적인 인테리어를 갖춘, 한 가지로 표현하기 어려운 다채로운 집. 앞에서 걷는 경원의 어깨가 호텔에 들어온 직후부터 부쩍 더 넓어 보였다. 아주 하늘까지 닿을 기세였다.

“이런 스위트룸 본 적 있어?”

“…….”

“원래 더 넓었는데 너무 비싸서 객실 가동률이 오 퍼센트도 안 됐거든. 그래서 그냥 방 몇 개 쪼개서 나한테 달라고 했더니 공사까지 새로 싹 해 주더라고.”

“……그런데요?”

“나한테 게임에 돈 쓰는 거, 별거 아니라는 뜻이야. 마음먹으면 더 쓸 수도 있어.”

그는 의기양양해져서는 돈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같은 게임에서 만났더라도 두 사람의 차이가 땅과 하늘만큼 크다고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교양 있는 부자들과는 달리 한마디 한마디가 숨김없이 직설적이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서혜는 주눅이 든 지 오래였는데, 점점 기가 죽어서 나중에는 야단맞은 강아지처럼 시무룩한 얼굴이 돼 있었다.

“이런 거 보면, 자기가 어떻게 살고 있나 좀 되돌아보게 되지 않나? 나야 벌레치고는 제법 잘 살지. 방구석에 앉아서 폐인처럼 게임만 하는 사람보다는 팔자 폈고. 안 그래?”

방구석 폐인. 주서혜의 인생이 보잘것없다는 것은 본인이 더 잘 안다. 원하는 반응을 보여 주기 싫었던 서혜가 남은 자존심을 쥐어짜 내며 삐딱하게 대답했다.

“별로요. 대신전이나 사원에 비하면 별거 없네요.”

그러자 경원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탄식을 했다.

“윈드 스토리? 하-!”

“…….”

“됐다. 이리 와서 윈드 스토리랑 작별 인사나 해라.”

툭, 툭, 서재방에 도착한 경원은 통하지도 않는 대화를 포기하고 컴퓨터 책상 위를 두드렸다. 알아서 행동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서혜는 그의 눈앞에서 캐릭터를 삭제하기로 한 약속을 지켜야 했으므로 조용하게 비싸 보이는 의자 위에 앉았다. 물론, 그렇게 쿨하게 앉은 것치고는 정작 손이 움직이질 않았지만.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차에서 내리자마자 도망갈걸. 지나다니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경찰에 신고해 달라고 할걸. 그런데, 그다음에는? 어차피, 최석훈은 끝났는데. 그렇게 해서 집에 돌아가면 뭐가 달라져?

다음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런 마음이 위험한 남자를 따라 호랑이굴까지 들어오는 발을 멈추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들어와서 얌전히 캐릭터를 삭제하고 돌아갔다가는 기껏 따라온 보람이 없었다.

“……이거, 이거 지금 랭킹 더 떨어지기 전에 아이디 팔면, 꽤 비싸게 받을 수도 있어요. 근데 그냥 지우자니 아깝잖아요.”

“혓바닥이 기네.”

“삼 할 정도는 떼 드릴게요. 일단 차분히 대화를…….”

“푼돈 필요 없어.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삭제해.”

다른 방법이 없을까. 이 상황을 반전시키고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이…….

집에 있는 것보다 훨씬 크고 선명한 모니터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미 로그인만 하면 게임에 접속할 준비가 다 되어 있는 상태였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주서혜.

한동안 눈동자 말고는 움직이는 것이 없자 의자 옆에서 팔이 쑥 뻗어 나왔다. 남자가 제 손을 잡아 친절하게 마우스 위로 올려 준다.

“애기야, 아이디랑 비밀번호 알아내는 거 일 분이면 할 수 있다?”

경원의 목소리가 한층 다정해졌다. 왠지 옷 속으로 소름이 돋았다. 시간을 끌어 봤자 이 남자는 자기를 봐주지 않을 것 같다. 서혜가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결국 그녀는 내내 어렴풋이 생각만 하던 일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별로 내키진 않는 일이었지만, 굳어 버린 머리에서는 그것 말고는 생각이 안 났다.

“자, 잠깐만요!”

헐레벌떡 손에서 벗어나는 여자를 따라 경원도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여기까지 쉽게 따라오는 것도 이상했고, 캐릭터를 삭제하기로 한 약속을 안 지키려고 할 거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해도 놀랄 것이 없었다.

그는 경계하며 뒷걸음질을 치는 서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검은 눈동자를 타고서 어디 도망갈 테면 도망가 보라는 오만한 마음가짐이 풀풀 흩날렸다. 서혜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사, 사람 살려요!”

그리고 꽥 괴성을 질렀다.

“때리지 마세요! 여기까지 데려왔으면, 충분히 겁은 줬잖아요.”

서혜가 악당에게 붙잡힌 듯한 목소리로 애원하기 시작했을 때도 경원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다. 이미 황당한 일은 죄다 겪어서 놀랄 에너지도 아깝다. 아마도 마지막 발버둥,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고 지켜볼 뿐이었다.

서혜는 참으로 애를 썼다. 짝! 부러 큰 소리가 나게 자기 뺨을 때리지를 않나, 굳이 책장 옆으로 몸을 던져 커버에 흠집 하나 안 남게 보관해 놨던 책들을 우르르 떨어지게 만들고, 책 모서리에 스친 팔을 붙잡고 팔이 부러진 것 같다며 엄살도 부린다. 그 뒤로도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러다녔다.

우당탕, 쾅, 쾅, 한동안 저 혼자서 기물 파손을 동반한 자해공갈 원맨쇼를 보여 주던 서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쯤이면 됐겠지 싶어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남자를 올려다보는데, 사악한 경원이는 아무런 미동이 없다. 무신경하게 관람하는 눈빛이 싸늘하기만 했다.

“그걸로 되겠어? 제대로 피라도 봐야지.”

안 그래도 지금껏 최석훈에게 복수할 날을 고대하며 잔뜩 벼르고 있던 경원이었다. 그는 놀라기는커녕 서혜가 얼마나 더 추해질 수 있을지 기대하느라 바빴다.

“버, 벗으면 되잖아요!”

물론 그녀가 칙칙한 베이지색 스웨터를 벗어 던지기 시작했을 때는, 약간 당황할 뻔했지만 말이다.

“마음대로 하시라고요!”

하지만 그것도 곧 워낙 미친 사람이니 그러려니 이해했다.

돈 많기로는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이가 없다는 재벌 2세 윤경원. 지금까지 불순한 목적으로 접근하는 경우라면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에 이르기까지 온갖 상황을 다 겪고 살아왔다. 저런 발 연기에 동조할 만큼의 얼간이였다면 벌써 재산의 절반은 다 털렸을 터였다.

“그만, 동작 금지.”

정신줄을 놓은 서혜가 속에 입은 나시티까지 벗어 던지려는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차마 더는 못 봐주겠다는 듯, 경원이 팔을 풀고 성큼성큼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서 몸을 낮춰 쭈그려 앉는다. 서혜가‘마, 만지지 마세요!’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울먹거렸다. 건들거리는 모양새로 바지를 더듬기 시작하는 경원은 서혜의 눈에는 완전히 육욕에 넘어간 사람처럼 보였다.

“네 바지 주머니 속에 녹음기가 들어 있다, 에 내 아버지를 걸겠다.”

“그런……!”

하지만 그것은 서혜의 완전한 착각이었던 것으로, 경원은 타이트한 청바지의 앞주머니와 뒷주머니를 열심히 뒤지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대뜸 자기 아버지를 내다 파는 것도 서혜에게는 상식 밖의 일. 그녀는 그대로 할 말을 잃고 굳어 버리고 말았다.

“어른들 속이는 게 그렇게 쉬울 것 같냐?”

경원이 씨익 웃으면서 고개를 들고 서혜를 올려다보았다. 뒷주머니에 뭔가 있다는 것이 금방 들켰다. 서혜가 뒤늦게 몸을 빼고 도망가려 했지만, 그의 속도가 더 빨랐다. 덩치는 두 세배는 크면서 움직임까지 날래다니 정말이지 반칙이었다.

“봐, 있잖아.”

그는 마침내 장난감 같아 보이는 기계를 손에 넣었고, 보란 듯이 눈앞으로 살랑살랑 흔들어주기까지 했다. 서혜의 뺨이 달아올랐다.

허세와 자존심이 벗겨져 나간 얼굴을 뚫어질 듯 응시하던 경원이 가뿐하게 몸을 일으켰다. 녹음기를 몇 번 조작해 보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저장이 되어 있는지 확인해 본다. 음성이 실린 것은 두 사람이 만나기 직전부터였다. 잃을 것도 없고 겁도 안 난다는 말이 완전히 허세였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랬다면 만나기도 전부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물건을 챙기지도 않았을 테니까.

“하, 한 번만 봐주세요……!”

“…….”

“차라리 사과 영상을 올릴게요! 게임 접는 건 안 돼요……!”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던 중, 결국 서혜가 바닥에 무릎을 붙이고 주저앉았다. 남은 방법이 읍소하는 것 하나뿐이라지만 공원에서의 발악을 생각한다면 태세 변환이 참 빠르다. 게다가 차라리 죽이라느니, 영상을 올린다느니, 극단적이기까지 했다. 경원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

“한 번 인터넷에 올라가면 너 그거 평생 못 지워. 알아?”

“아, 알아요. 그러니까…….”

“아는데 왜 그러는데, 돈 때문에 그래? 최석훈 그거 얼마짜리길래.”

“파, 팔면, 전부 회수는 못 하지만… 지금까지 7천만 원쯤 썼어요……!”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경원이 납작한 녹음기를 두 손으로 완전히 부러뜨리는 소리였다.

양리 마을에서 월세방 산다는 애가 게임에 얼마를 써? 제정신이 아닌 것도 정도가 있지.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서?”

“그, 그건, 어렸을 때부터 조금씩 모아 놓은 돈이에요……!”

“아, 그러세요?”

퍽이나 믿을 만한 이야기였다. 경원은 자기도 모르게 망가뜨린 녹음기를 땅에 내팽개쳤다.

그래, 그 돈이 어디서 났는지 알 게 뭐람. 한 가지 확실한 건 분명 자신은 묘하게 거슬리는 부분이 많은 이 여자애에게 또다른 사죄의 기회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집에 데려올 때도 거기까지 염두는 해 뒀으니까. 그동안 최석훈에게 갉아 먹힌 자존심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렇게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디까지나 저만의 방법으로 말이다.

콱, 서혜의 턱이 우악스럽게 잡혀 올라갔다. 그녀는 호텔 건물을 올려다보았을 때만큼이나 고개를 한껏 젖혀야 했다.

“서혜야.”

경원이 친구라도 되는 양,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왔다. 턱을 잡은 손이 묵직하다. 그는 경계심 강한 강아지를 달래듯이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친절한 눈웃음을 짓고서 물었다.

“너 내 NPC할래?”

찢어진 눈꺼풀 속, 끈적하게 느껴지는 검은자위.

어딘가 미묘하게 진심이 아닌 것 같은 표정.

서혜는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이 어색한 다정함이 꼭 어떤 경고등인 것 같다고.

“룸메이드가 하나 더 필요해. 침실 청소. 방 청소. 화장실 청소. 뭐, 다른 더러운 데도 많고.”

“…….”

“한 달, 한 달 뒤에 월급도 챙겨 줄게. 어때?”

그래서 천천히 읊조리듯이 묻는 경원의 질문에도, 감히 반문하거나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NPC가 되라니 무슨 생뚱맞은 제안이지? 서혜는 그의 심중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녀의 속내가 경원에게 곧잘 읽히는 것과는 반대였다.

다만 예측할 수 있는 것은 거절하면 꼼짝없이 최석훈은 사망이라는 것. 그리고 무작정 하겠다고 한다면 분명 안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것뿐이었다. 예를 들면, 밥도 안 주고 청소 안 한다고 채찍질도 하고, 노역장에 끌려간 죄수처럼 고통스럽게 죽어 가게 만든다든가……!

서혜가 당장 대답해야 할 것 같은 기분과 하기 싫은 기분 사이에서 입술만 달싹거리자, 경원이 손아귀에 힘을 주며 재차 물었다.

“싫어?”

“제, 제가, 그런 걸, 왜 해요, 당연히…….”

그리고 경원은, 막돼먹은 게임 중독자를 제 발밑에서 구르게 할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저주받은 검인가 뭔가, 마음에 들면 월급 대신 그걸로 줄게.”

“뭐든 시켜만 주세요.”

초 희귀 아이템이라는 커다란 미끼 하나로 서혜의 망설임은 몇십 초 만에 끝이 났다.

***

“그러니까, ‘저주받은 용사의 검’만 있으면 다시 랭킹이 올라갈 테니까, ‘최석훈’이 부활할 기회다 이 말씀이시죠?”

다음 날 아침, 펜트하우스에 찾아온 박 실장이 난처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녀는 윤 회장의 신임을 산 덕분에 젊은 나이에 인사관리를 맡은 서른세 살의 직장인이었다.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풀어헤치고 짙은 다크서클을 드리운 귀신 같은 몰골의 서혜와 달리, 올백으로 깔끔하게 넘긴 머리카락 아래로 과하지 않은 은은한 화장기가 똑 부러진 사회인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최석훈은 게임 캐릭터고요?”

경력이 경력인 만큼, 박 실장은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잡부도 이런 잡부가 따로 없지, 이것저것 얹히는 일이 너무 많다 보니 게임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질 시간도 없었다. 당연히 서혜의 입사 동기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차피 낙하산이었고 형식적으로 주고받는 이야기였지만, 경원이 왜 이런 경력도 없는 어린애를 쓰겠다고 했을까. 그 의도가 우려스럽다.

“맞아요. 그, 그냥 캐릭터가 아니라 특별한 캐릭터예요.”

서혜가 민망한 줄은 아는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 실장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눈앞의 여자애는 서재 소파 위에서 뻗은 채 늦잠까지 잤다. 남자의 집에서, 어제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대충 양치질과 세수만 한 상태. 그런 모습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본인은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듯 보였다.

“요즘 막내 도련님께서 새 사업 준비 때문에 적잖이 바쁘세요. 미팅도 많고, 아침 일찍 나가실 때도 잦으시고요. 해 뜨기 전부터 호텔 직원이든 수행원이든 오가는 사람이 있으니까, 남들 시선에 신경 좀 써 주세요. 특히, 지금 호텔 오너가 장남인 윤주원 사장님이시거든요? 구설에 휘말리지 않게 조심하셔야 돼요. 저희 호텔은 직원들 품위 유지도 중요하게 보니까요.”

“……네, 네.”

“원래 직원들은 직원용 기숙사를 따로 쓰는데, 서혜 씨는 계약이 입주 가정부로 되어 있네요. 서재 옆에 화장실 딸린 방이 하나 더 있으니까 사용하시되 다른 화장실이랑 욕실은 사용하시면 안 되고요. 그리고 룸메이드는 다른 고객님들 눈에 띄지 않는 게 원칙이니 이동 시에 주의하시고요. 급한 일 아니면 계단 이용하시고, 식사도 방에서 조용히 해결하시고, 업무시간에 핸드폰, 전자기기 사용 자제해 주시고…… 그리고…….”

능숙한 지시가 이어졌다. 어색하게 손을 모으고 서 있던 서혜의 표정은 갈수록 어두워졌다. 그녀는 근무 환경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전혀 다른 세상이라는 게 이런 건가. 하지만 또 보수가 나쁘지 않으니 그만두기는 싫었다. 서혜는 박 실장이 내민 서류에 간단하게 서명도 했다.

“저, 그런데 출근이 오늘부터인가요? 제가, 속옷도 하나도 못 가져와서…….”

“계약 기간은 오늘부터니까 무단 외출은 곤란해요. 필요한 건 나중에 범수 씨한테 여쭤보세요.”

“예…….”

“특별한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평소 업무는 어렵지 않아요. 점심에 원래 일하던 여사님 나오시면 옆에 붙어서 차근차근 배우시면 돼요.”

그 뒤로도 한참이나 귀가 아플 듯한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서혜는 막연하기만 하던 경원의 정체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까다롭고 성격 나쁜 재벌 집 도련님. 그리고 그의 밑에서 노예처럼 구른다는, 대강 그런 이야기.

수상하게 느껴지지만. 뭐 어떤가, 계약서대로 아이템만 받을 수 있으면.

어차피 밑바닥인 현실의 주서혜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어젯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옷을 벗어 던지거나 칼부림할 때부터 그랬다.

경원은 서혜에게 복수해서 즐거울 테고 서혜는 최석훈을 부활시킬 수 있으니 즐거울 것이다. 게다가 그는 바쁘기까지 해서 마주칠 일도 적을 테니 아주 럭키한 일이 아니겠는가.

경원이 베푼 이해할 수 없는 자비로움이 희망일지 아니면 희망 고문일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지만, 서혜로 하여금 석훈을 죽이지 않도록 길을 제시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PC방? 여기서 일하는 게 그렇게 만만해 보여?”

그리고 경원은 저녁나절 돌아오자마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침 7시 전에 일어나. 퇴근은 내가 자는 시간. 농땡이 부리거나 밖에 나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고. 나 오늘 일이 잘 풀려서 내일부터는 며칠 쉴 거야. 내가 은근히 집돌이거든.”

기껏 쌓아 올린 긍정의 탑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소리였다.

“유니폼 잘 어울리네. 형님이 디자인한 건데, 우리 집안 사람들이 안목이 있기는 해. 그렇지?”

서혜는 끔찍하다는 표정을 숨기질 못했다.

안목은 개뿔, 청소에 집중해야 할 직원들한테 고상하게 원피스를 입히는 게 어딜 봐서 안목이야?

그러나 그녀에게 정말 중요한 건 불편한 유니폼을 입고 청소를 해야 했던 고충, 혹은 문 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넙죽 뛰어나가 현관에서 고용주를 맞이해야 하는 고충,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가장 힘든 것은 오늘 하루 종일 컴퓨터를 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자, 자유 시간도 아예 없나요? 잠깐 접속이라도 해 봐야 살 거 같은데요……!”

“게임? 허락받고 해.”

“그럼 허락해 주세요.”

“싫어.”

“……!”

뭐 이런 양아치 같은 놈이 다 있어! 박 실장에게서 그가 여덟 살이 많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던 서혜는 그 유치함에 기함하고 말았다. 그리고 경원은 입을 벌리고 멈춰 있는 여자를 내버려 둔 채, 승자만이 그릴 수 있는 호선을 입가에 띄우고서 거실로 들어가 버렸다.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털썩, 서혜는 그대로 현관에 주저앉았다. 오늘 게임을 못 한다는 사실에 바닥을 걸레질하느라 혹사한 다리가 그대로 풀려 버린 것이었다. 이내 누군가 백화점 로고가 커다랗게 박힌 종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경원의 뒤를 따라 들어온 범수였다. 서혜가 피곤한 팔을 뻗어 꾸물꾸물 가방을 뒤져 보니 그 안에 속옷과 잠옷이 한가득했다. 당연하게도 외출복은 하나도 없었다.

“서혜야-! 욕실 청소 다시 해라-!”

안쪽에서부터 들려오는 발랄한 명령과 함께, 범수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금방 질리실 테니까 당분간 장단 맞춰 드리라고.

서혜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이틀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로 갑자기 삶이 휩쓸려 버린 기분.

아! 주서혜는 바다에 떠다니는 줄 끊어진 부표나 다름이 없구나! 자괴감이 눈앞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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