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삐삐삐-. 천지개벽과도 같은 새 일상이 시작됐다. 작은 소리로 알람을 맞춰 놓았던 서혜가 힘겹게 눈을 떴다. 아직 하늘이 어두운 여섯 시. 핸드폰은 돌려받았지만 한가하게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을 여유는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고 싶은 시간에 잠들고 깨어나서도 여유롭게 빈둥거리는 삶이었는데, 이제는 그때의 행복이 사무치게 그리운 나날이었다. 게다가 방은 왜 이렇게 사치스러운지, 생활감이라고는 없어 뵈는 호텔 방의 전경은 눈을 뜰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았다.
머리를 정리하고, 안경알도 닦고, 적당히 용모단정한 모습이 된 서혜는 터덜터덜 밖으로 향했다. 손뼉을 치면 거실 커튼이 열리고 정해진 시간에는 불도 알아서 켜진다. 영화에서나 본 것 같은 기능에 감탄하는 것은 며칠 뒤에 무뎌졌다. 거실을 볼 때 떠오르는 것은 오늘도 청소하기 더럽게 힘들겠다는 생각뿐이다.
서혜는 아무도 요리용으로 쓰지 않는 텅 빈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그 안에 꽉 채워진 닭가슴살이나 곤약밥이나 샐러드 따위를 꺼내 먹는 것까지, 모두 일곱 시 전에 마쳐야 했다. 잡곡과 단백질. 온갖 건강식들은 전부 운동에 미쳐 있는 경원의 주식이었다.
죄인처럼 방구석에 앉아 식사를 마치고 나면 경원님께 공손하게 문안 인사까지 드리러 갔다. 서혜가 늦잠을 자는 걸 두고 보지 않겠다는 고용주의 의지가 담긴 명령이었다.
경원은 언제나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났다. 서혜가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갔을 때, 그는 며칠째 그렇듯 이미 샤워를 마치고 작은 발코니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목욕 가운이 차가운 가을 바람에 팔랑거린다. 연기를 뱉으며 해가 뜨는 지평선을 응시하는 얼굴에 웬일로 장난기 대신 무게감이 서렸다. 서혜가 코웃음을 쳤다. 겉멋만 들어가지고, 새벽녘 아래서 혼자 드라마 속 주인공이 따로 없었다.
“도련님! 오늘은 어디 안 나가세요?”
카랑카랑한 음성에 고요한 새벽 공기는 와장창 깨어졌다. 경원은 피식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그는 아직 잠결에 잠긴 듯, 그답지 않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나 없을 때 또 누구 죽이려고?”
“어차피 컴퓨터 비밀번호 걸어 놓으셨던데요. 저처럼 방구석 폐인도 아니신 분이 며칠째 집에 계시는 게 신기해서요.”
“나 같이 약한 벌레가 맨날 밖에 나가고 그러면 쓰나-. 오늘도 집에서 최석훈 씨한테 보살핌이나 받아야겠다.”
“…….”
두 사람 사이에 아름다운 아침 인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싸움이 안 나면 다행이고, 대부분은 서혜가 졌다. 이 복수전은 결과가 나와 있었으며, 경원은 즐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는 복수에 충실하게 종일 서혜를 괴롭혔다. 맛없는 닭가슴살 스테이크와 삶은 계란 같은 것을 물릴 때까지 먹이고 쉴 틈 없이 노동을 시켰다. 홈짐에서 운동을 하는 동안 내내 운동기구를 닦게 하고, 물 심부름에, 그러다 심심해졌는지 대뜸 러닝머신을 뛰라며 똥개훈련도 하게 했다.
서혜는 늦은 오후 무렵 사업 문제로 범수가 방문할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온전한 휴식은 아니었다. 그들끼리 개발자를 당장 빼 오는 건 무리라느니, 중소 게임사는 인력 손실을 못 버티니 차라리 통째로 인수하는 게 낫지 않겠냐느니 하는 현실 세상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서혜는 허겁지겁 핸드폰으로 윈드 스토리 홈페이지를 살펴야 했으므로.
다행히 얼마 전에 대규모 보스 패치가 끝난 참이라 그런지 특별히 새로운 업데이트나 이벤트는 없다. 아주 뒤처지진 않을 것이다. 기분이 잠시 좋아진다.
생각보다 별거 없이 이대로 한 달이 끝나는 게 아닐까 하는 희망도 생겼다. 규칙적으로 괴롭혀지던 며칠 간, 한편으로는 이것이 괴롭힘의 전부라는 생각에 의문이 들기도 했다. 물론 몸이 고단하고 자존심이 남아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경원은 예상보다 비인간적이라거나 폭력적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경원은 생긴 것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적어도 서혜에게는.
종종 서혜가 말대꾸하거나 예의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음에도 그녀를 한심한 어린애 보듯이 내려다볼 뿐 폭언이나 폭행을 쓸 기미는 안 보였다. 약자는 철저하게 짓밟으려고 할 줄 알았는데, 승패가 갈린 뒤로는 큰 감정 없이 냉소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아이템을 빌미로 자신을 온종일 괴롭히고 있는 것을 보면 나쁜 놈인 게 맞는데. 가면 갈수록 왠지 시시한 나쁜 놈이었다.
서혜는 사람이 마음먹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면 어떤 식으로 잔혹해질 수 있는지 알았다. 그에 비해 윤경원은 겉으로 보기와 달리 마음이 약한 사람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만약 그런 거라면, 동정심 따위를 자극해서 더 빨리 아이템을 받아 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강약약강’에 충실하게도, 경원이 조금만 약점을 보인다면 당장 벗겨 먹을 계획을 세울 준비가 된 서혜였다.
과연 윤경원은 호구일까 양아치일까. 그는 속으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고상한 도련님이라면서, 깡패 양아치 같기도 하고, 유치하게 구는데, 자비로운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이렇다 저렇다 한마디로 형언하기가 어렵다.
서혜는 게임에서 억지로 분리돼 그의 옆에 붙어 있는 동안, 게임이 아닌 현실의 남자에게 그런 순수한 궁금증을 처음 느꼈다. 대체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물론 그런 호기심이 곧 관심이나 호감이라는 것은 또 아니다. 윤경원이 재수 없고 얄미운 인간임은 확실했다.
서혜에게 있어서 가장 괴로운 건 경원이 자신을 병풍처럼 세워 두고 게임을 시작하는 밤 시간이었는데, 그때야말로 제 인내심의 모든 것을 다 시험하는 것같이 고통스러웠다. 그런데도 경원은 그 정도도 못 참냐며 매번 서재에 들어와 있게 했고, 쓸데없이 책까지 읽으라고 했다. 게임을 눈앞에 두고 지루한 책이나 읽으라니, 서혜는 물리적 고문만이 고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말 뒤통수를 때려 주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
“그거…… 베히모스는 마법 방어력이 높아서 먼저 물리 공격으로 보호막을 부숴야 빨리 잡을 텐데…….”
“…….”
그렇게 현대판 노예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한 것이 일주일째가 되던 날. 정말로 룸메이드 이상의 보복이 없음에 안심할 대로 안심한 서혜는 모니터를 훔쳐보며 훈수까지 두기 시작했다. 시키는 대로 서재 소파에 앉아 책을 들고는 있었지만, 고개는 대놓고 컴퓨터 화면만 바라본 채였다.
“아, 거기서 그 스킬을 먼저 쓰면 망하는데.”
“…….”
“아-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진짜-. 마검사 처음 키우시나?”
경원에게는 캐릭터를 대신 키워 주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그래서 본인은 정말 하고 싶을 때만 컴퓨터를 켰다.
서혜는 왠지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다. 최석훈의 랭킹은 일주일 사이에 조금씩 내려가고 있을 텐데. 저런 허접한 컨트롤 실력으로도 아직도 굳건하게 1위라니.
나는 지금까지 쌓인 몹 손실만 얼마야, 경험치 손실은…… 그런 생각으로 인해 마음이 조급해졌는지, 아니면 바쁜 일과가 끝나고 금단현상이 오기 시작했는지. 경원의 뒤에서 불안한 듯 손톱을 씹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서혜야, 정신 사납다. 여기 책상 밑에 쌓인 먼지나 좀 닦아라.”
경원은 그러거나 말거나 마치 약 올리듯이 키보드를 요란하게 두드려 댄다. 순 아이템 빨이면서 허세는!
“빨리빨리 안 움직여?”
“우, 움직여요!”
서혜가 이를 갈며 걸레를 챙겨 들고 의자 옆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넓은 컴퓨터 책상 아래로 꾸역꾸역 몸을 비집어 넣었다.
그녀는 열심히 자신을 다독였다. 이 짓도 얼마 안 남았다고.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으니 한 달은 금방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신뢰할 수 있는 기업과의 근로 계약이니까 억울한 것도 없다. 저주받은 검만 준다면 발가락도 빨아 먹겠다고 할 사람들이 수두룩할 것이었다.
서혜는 추측했다. 경원이 자기 일에 집중하는 시간이 게임 플레이 시간보다 훨씬 길다는 것, 그리고 실력이 허접하다는 것 등을 보건대, 그가 게임을 좋아하긴 해도 윈드 스토리에 아주 각별한 애정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그러니 어쩌면 만족할 만치 부려 먹은 뒤에 아이템 하나 적선하듯 던져 주는 일이야 쉬울 거라고.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성의 없는 걸레질과 함께 인내의 실이 점점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그 순간, 경원이 발을 움직여 책상 밑에 틀어박힌 서혜의 몸을 툭툭 건드렸다.
“야, 사람들이 자꾸 최석훈 어떻게 됐냐고 묻는데 어쩌냐.”
“…….”
“이거 어지간히 악당이셨네. 접속 안 한 지 일주일이나 됐는데 다들 아직도 궁금해 미치려고 하는 거 보면.”
“……아무것도 말해 주지 마요.”
“이렇게 착하고 귀여운 애라는 걸 다들 알까? 응?”
서혜는 그의 빈정거림에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최석훈 씨가 얼마나 귀여운지 모두에게 알려 주고 싶은데 어쩌나. 사과 영상도 생략해 줬는데 그 정도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말하지 마요……! 마, 말아 줘요! 제발요!”
사실 놀리려는 의도도 맞았지만 경원은 어느 정도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일주일간 주서혜는 풀이나 뜯어 먹고 사는 토끼처럼 유순했다. 조금 놀려 줬다고 안절부절못하며 낑낑거리는 것을 보면 울 때까지 골리고 싶어져서 큰일이다. 최석훈이 하던 짓을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아예 다른 사람이거나, 혹은 전형적인 방구석 여포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못 하고, 계약서를 쓴 뒤로는 고분고분 말도 잘 듣고. 자는 사이에 다시 칼이라도 들고 찾아올 줄 알았더니 밤이 되면 근육통으로 앓아눕기 바쁜 허약한 여자애.
가끔 커피에 침을 타거나 바닥을 미끄럽게 만들어 놓기는 해도, 그 이상의 범죄 행각은 딱히 벌어지지 않는다.
그런 걸 보면 일단은 멀쩡해 보이는데. 왜 게임에 영혼을 팔았을까.
문득 주서혜의 머릿속을 열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경원은 그녀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일을 계속했다. 어찌 됐든 혼낼 건 혼내 줘야 하니까. 이참에 게임에서의 악행을 후회하고 반성이라도 하면 더 좋을 것이다. 잘하면 한 달 뒤에는 개과천선하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최석훈 씨는 제 발밑에서-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라고 해야지.”
팟-. 그때였다. 경원이 엔터를 누르기 직전, 반짝반짝 빛나던 모니터 화면이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어? 뭐야?”
탁, 탁, 키보드를 두드려도 완전히 맛이 간 듯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소리도 꺼져 버렸다. 경원의 새카만 시선이 자연스레 밑으로 향했다. 컴퓨터 전원이 책상 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주서혜, 너 왜 그래?”
그리고 바로 아래쪽에서, 서혜가 마치 공포 영화에 나오는 빌런이 된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경원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씩씩, 처음 양리 마을의 공원에서 만났을 때의 눈빛을 띠고서 숨을 거칠게 내쉰다.
핏발선 눈은 어딘가 묘하게 초점이 어긋나 있고, 손에는 방금 뽑아낸 전원 콘센트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끊겨 버린 전원만큼이나 완전히 녹다운된 표정을 한 채로, 난데없이 경원의 몸과 책상 사이로 몸을 비집어 넣기 시작했다.
“야, 야, 저리 가, 야!”
귀신에 빙의라도 된 듯 눈을 부릅뜨고 다리 사이를 기어 올라오는 꼴에 경원이 당황해 외쳐보았지만 이미 말로는 들을 듯한 모습이 아니었다.
이런, 미친 애라는 걸 잠시 잊어버렸다. 경원이 재빨리 팔을 뻗어 올라오려는 머리를 막았다.
“이제 저 할 거예요.”
“하긴 뭘 해?!”
그러자 서혜는 지지 않겠다는 듯 무릎을 세우고 몸을 더 밀어왔다.
“나도 할 거라고오!”
얼마나 기세가 강한 것인지, 경원의 손이 순간적으로 그녀의 이마에 밀려 버리고 말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완전히 상체를 책상 밖으로 빼내는 데 성공한 서혜가 양손으로 경원의 허벅지를 짚은 순간,
물컹.
이해할 수 없는 감촉이 작은 손바닥 위에 닿았다.
“…….”
“……!”
두 사람은 그대로 고장 났다.
만진 쪽이나 만져진 쪽이나.
이게 뭐지?
맛이 갔던 서혜의 눈빛이 재빨리 원래대로 돌아간다. 그녀는 이상한 감각이 느껴지는 접촉 부위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제 양손은 경원의 허벅지 위를 잡고 있었다. 주머니도 없는 바지였고. 뭔가 있을 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뭔가가 만져졌다. 그것도 오른쪽 허벅지에서만.
게임을 향해 불타올랐던 의지는 얼음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 버리기 시작했다.
그건 묘하게 뜨거웠고.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점점, 뭔가, 이상해졌다.
아니겠지, 에이. 사람이 그럴 수가 없어. 아닐 거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스무 살이나 되었으면 알 건 다 안다. 이런 위치에, 뭔가 있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이윽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은 현실감.
내가 뭘 하고 있었던 거지? 하마터면 계약 위반으로 전설의 검이 날아갈 뻔했잖아. 그런 이성적 사고.
더불어, 만지면 안 될 것을 만지고 있다는 당혹감, 민망함.
다시 고개를 드니, 경원의 굳어 버린 눈이 정면에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꼴깍, 서혜가 침을 삼켰다. 이상하게 그 새카만 눈을 회피할 수가 없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경원이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
“……너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거야?”
“히익!”
그것이 신호라도 된 양, 서혜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버둥버둥, 어떻게 그의 다리 사이에서 벗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온갖 몸부림을 치다 책상을 빠져나갔다. 와당탕, 경원의 몸에 걸려 한 번 고꾸라진 서혜가 뭔가에 쫓기듯 급히 몸을 일으켰다.
“히이이익! 힉! 괴, 괴물!”
“…….”
“괴물!”
그러고는 그대로 옆 방으로 줄행랑을 친다. 자기가 멋대로 만져 놓고서는, 마치 진짜 괴물이라도 본 반응이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경원은 여전히 바짝 굳어 무표정했다.
“……거 너무하네.”
아니, 어쩌면 약간 상처받은 것에 가까웠다.
***
다음 날 아침엔 경원이 간만에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범수가 이른 새벽 나타나 상전을 모시다시피 했기에, 서혜는 말끔하게 정장을 입고 머리를 올린 고용주의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만 보면 되었다.
전날 밤의 일은 두 사람 모두 모른 척했다. 암묵적인 합의였다. 더 나빠질 것도 없는 감정. 딱히 그런 일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만큼 각별한 사이도 아니다. 원래부터 경원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남자이기도 했고. 서혜로서는 저 이상한 남자가 자기를 괴롭히는 일에 드디어 질렸다면 잘된 일이다 싶었다.
그녀는 오늘이야말로 편하게 쉬겠구나, 안도하며 현관까지 졸졸 따라가 경원을 배웅했다. 빨리 나가 버리라는 의미였다.
“가시죠, 도련님.”
그런데 범수가 깍듯하게 현관문을 열어 주어도 경원은 밖으로 발을 떼지 않았다.
“도련님?”
범수라고 해도 늘 완벽하진 못하다. 특히 요즘처럼 웬 객식구 하나가 끼어들어 신경 쓸 것이 늘어난 시기에는 더더욱.
경원의 까만 시선이 땅으로 향했다. 범수의 눈도 경원의 발치로 따라갔다. 볼로냐산 최고급 가죽으로 만들어진 한정판 구두의 신발 끈이 풀려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도련님.”
“아니, 됐어.”
설마, 나한테 묶으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서혜에게 불길한 예감이 치솟기 무섭게, 신발 끈을 묶는 일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몫이 되었다.
“서혜야.”
“……네. 제가 할게요.”
윤경원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있나. 결국 서혜가 눈치껏 경원의 발치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 정도 치욕쯤이야, 전설의 검을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며 묵묵하게 끈을 묶었지만, 부러 살살 힘을 주어서 금방 풀어지게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길 가는 길에 끈에 걸려서 넘어져 버렸으면 좋겠다! 간절한 염원이 사악한 표정을 타고 정직하게 배어 나왔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의 표정 변화도 마찬가지였다.
“흐악!”
시선이 남자의 허벅다리를 잠시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소스라치게 놀란 서혜가 그만 엉덩이를 찧고 뒤로 나자빠졌다. 도수 높은 안경알로도 가려지지 않는 커다란 눈이 아주 정직하게 경원의 허리 아래쪽으로 꽂혀 들어온다. 경원은 꼴깍 침까지 삼키는 서혜를 보며 하, 하고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사고 치지 마라.”
경고 같지 않은 경고에 서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자꾸 자기도 모르게 생각이 그쪽으로 집중된다. 고간에 시선이 닿을 때마다 흠칫 놀라게 되는 것은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러게 적당히 충격적이었어야지. 어젯밤에는 꿈에도 나왔던 것 같다.
거시기는 잊어버리자, 잊어버려. 자기도 딱히 어른 같지 않으면서 매번 어린애 대하듯 하는 남자가 그저 재수 없을 뿐이다. 그것만 기억하면 되는 거였다.
“대답 안 하지?”
“아, 알겠, 알겠어요. 도련님.”
그녀는 경원과 눈을 맞추고서 얌전하게 대답했다. 어제 일 때문인지 허세를 부리기에도 괜히 눈치가 보였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으랬다고, 오늘 그랬다가는 그가 진짜 화를 낼 것 같았다.
그렇게 한껏 성질을 죽인 덕분에 별문제 없이 지나간 오전이었다. 서혜는 오후에 출근한 다른 직원과 함께 오랜만에 경원이 없는 평화로운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주로 사람들한테 선 여사님이라고 불리는 중년의 여자는 경력이 꽤 오래된 룸메이드였다. 그녀는 자기가 오랫동안 여러 호텔을 전전하면서, 이렇게 떡하니 방을 꿰찬 경우는 처음 본다고 했다.
“보통 VIP층 직원들은 고객들 눈에 절대 안 띄게 일하거든. 가끔은 엘리베이터도 못 쓰고 계단으로 다니기도 하고……. 나도 주로 도련님이 안 계신 시간에 들락거리는데. 우리 같은 사람은 마주치기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 아무리 넓다지만, 방을 내주는 건 더더욱 싫어할걸.”
“그, 그런가요…….”
방을 꿰찬 게 아니라 감금을 해 놓은 건데. 서혜가 속에 든 말을 감춰 넣고서 거실 창문을 열어젖혔다. 광활한 도시의 풍경과 함께 차가운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창문이란 창문은 전부 틀어막고 살아야 했던 반지하 방을 생각하면 꽤 상쾌했다.
평화, 언제부터 게임도 못 하고 남의 집에서 온종일 노동하는 게 평화가 되었는지 몰랐다. 왠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다.
[판교 근처에서 출발. 도련님 지금 저기압.]
애매한 감정을 마음에 품은 채로 일을 배우는 데 몰두하다 보니 집 안에 금방 노을빛이 돌았다. 서혜는 부랴부랴 커다란 욕실 청소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 시간 내로 도착할 거라는 범수의 문자 때문에 마음이 급해지는데, 빌어먹을 욕실 하나가 공중목욕탕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엄청난 크기였다.
게다가 건식 욕실에 편백나무 욕조까지. 사용하는 사람이야 좋겠지만 관리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너무 고되다. 선 여사는 비품부터 욕조까지 비싸지 않은 것이 없으니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다며 내내 신신당부했다. 서혜는 일평생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물건들을 보물 다루듯이 닦고 또 닦았다. 정작 경원은 샴푸든 비누든 아주 물 쓰듯이 써 대는데 말이다.
잘살아서 좋겠네, 게임에서도 잘살고 현실에서도 잘살고, 나 같은 건 우습겠지!
그렇게 경원의 욕을 하며 한참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였다. 띵동-. 갑자기 거실 쪽에서 벨이 울려 왔다.
“어라? 벌써 왔나?”
왜 쓸데없이 벨을 누르지?
서혜가 부리나케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365일 보안 하나는 뛰어난 장소이니, 여기까지 찾아올 사람은 기껏해야 박 실장이나 수행원들, 혹은 룸서비스를 가져다줄 호텔 직원들밖엔 없다. 그래서 아무런 경계 없이 문을 열어젖혔더니만, 문 앞에는 직원도 무엇도 아닌 남자가 서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나이 든 남자였다. 경원이나 범수와 달리 고개를 들지 않아도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게 새삼 어색했다.
“……누구세요?”
서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머리가 희끗하게 샌 노인이 주름진 눈매를 사납게 일그러뜨리며 혀를 찼다.
“쯧쯧, 이렇게 넋이 빠져 살아서야.”
마주치자마자 듣는 소리에 당황한 서혜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당연하게도 주변에는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다. 설마 나한테 하는 말?! 그런 생각이 들기 무섭게 남자는 자기 가방을 냅다 서혜의 품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뭐, 뭐야, 이 사람은. 처음 보자마자!
느닷없는 불청객이었다. 마주한 것은 아주 찰나였지만 엄청나게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이 피부를 타고 느껴졌다.
물론, 느낀 것은 감정뿐.
그가 어쩌면 중요한 인물일 수도 있겠다는 이성적인 생각까지 하는 것은 서혜에게 무리였다.
어안이 벙벙해진 서혜는 황급히 침입자를 따라가며 외쳤다. 누구세요! 여기 마음대로 들어가시면 안 돼요! 겁은 나지만 갑자기 괴한이 침입하는 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 소란에 안쪽에서 청소 중이던 선 여사도 거실로 뛰쳐나왔다.
“아이고, 회장님! 연락도 없이 어떻게……!”
회장님, 그제야 서혜는 노인의 얼굴을 어디서 봤는지 생각해 냈다. 윤해산! 뉴스에서 본 사람이었다.
“연락하면 또 도망이나 치겠지.”
그는 제집인 양 거실 소파에 깊숙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아니, 어쩌면 그의 집이라고 해도 무방하기는 하였다. 서혜는 한참 떨어진 곳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는데, 들고 있는 가방조차 어찌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자 선 여사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서혜를 빈방으로 끌고 갔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전부 못 들은 척, 못 본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알지?”
선 여사의 경고에서 잔뜩 긴장한 것이 느껴졌다. 서혜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와중에 거실에서는 쩌렁쩌렁한 남자의 목소리가 곧이곧대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박 실장, 어, 나일세. 잠깐 호텔 좀 들렀는데 말이야. 어떻게 된 건가? 직원이 왜 둘이나 필요해. 그것도 젊은 애가. 무능한 애들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거 질색인데. 그리고 선 여사가 지금까지 잘해 왔고……. 그래? 굳이 쓰겠다고 했다고? 아니, 아니야. 됐어. 다 큰 아들놈 여자까지 내가 신경 써야 하나. 지겨워.”
서혜가 저를 향한 힐난인지 경원을 향한 힐난인지 모를 것에 귀를 쫑긋 세웠다. 정확히 다 들리는 건 아니지만 무능하다는 말이 귓속에 때려 박힌다. 윤 회장은 경원에 비하면 무척 작은 사람이었지만, 호기로운 음성은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기세가 넘쳤다.
윤 회장은 통화 끝에 박 실장에게 저녁상을 준비해 달라 지시했다. 그러자 얼마 안 가 호텔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부엌으로 음식을 배달해 줬다. 꼭 뷔페를 집으로 옮겨 놓는 것 같았다. 서혜는 눈에 띄지 않는 복도 한구석에서 그 마법 같은 장면들을 지켜보았다. 투명 인간처럼 찍소리도 내지 않고서.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몰라도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상황인 것 같았다.
서혜의 관심사는 먹을 것에 더 고개를 틀고 있었다. 은은한 촛대가 빛을 내는 반짝반짝한 식탁 위에 맛있는 것들이 가득했다. 닭가슴살과 풀때기만 먹고 살았더니 오랜만에 맡는 기름진 음식 냄새에 침샘이 폭발한다. 윤 회장이 또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이어 가는 동안, 그녀는 결국 주방 일을 돕는 선 여사에게 은밀히 다가가 직원 식당이라도 가서 밥을 먹고 오면 안 되겠냐 물었다. 그러다가 선 여사로부터 타박만 들었다.
“지금 나가 버리면 도망간다고 생각하실 테니까 그냥 있어. 어차피 둘이서 다 먹을 양도 아니니까, 나중에 남은 거 먹으면 돼.”
“네……. 그, 그럼, 제가 뭐 도와드릴 건…….”
“방해되니까 저리 가 있어.”
윤 회장이 무능력하다고 얘기한 것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일이라는 걸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고, 믿음직하게 잘 하는 편도 아니었으니까 딱히 할 말도 없었다. 그 뒤로도 서혜는 있어도 곤란하고 없어도 곤란한 취급을 받으며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자리를 지켜야 했다.
경원이 집으로 돌아와 그들끼리 식사를 시작했을 때도 그랬다. 그녀는 오늘 하루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그 편안한 기분이 새삼 양반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경원과 단둘일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윤 회장이 온 뒤부터는 묘하게 숨이 막혔다. 그가 누구처럼 자신을 대놓고 괴롭히거나 말을 거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
달그락, 달그락, 해가 진 뒤 집 안에는 조용히 음식을 먹는 소리만 남았다.
도련님이 저기압이라는 범수의 문자와 달리 경원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윤 회장을 포함해 식탁 뒤쪽에 서 있는 직원들까지 죄다 굳은 표정인 데 반해, 그는 혼자서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아주 복스럽게, 아니 게걸스럽게 식사 중이었으니까. 깔끔을 떨며 먹는 평소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이, 부모님과의 식사 자리가 너무나 기쁜 나머지 마음이 들떴겠거니 했다.
그러나 잠시 뒤 윤 회장이 입을 열고 나서부터는, 결코 화목한 부자의 모습으로 보기가 어려운 내용들이 식탁 위를 오가기 시작했다.
“아비가 오랜만에 귀국하는데 연락 한번 없더구나. 네 형들은 둘 다 공항까지 나왔어.”
“뭘 새삼스럽게 그런 걸로 서운해하세요. 일하느라 바쁘면 그럴 수도 있죠.”
“일하느라 바빠? 게임에 미쳐서 바쁜 게 아니고?”
처음은 평범한 잔소리였다. 서혜는 괜히 찔리는 마음이 들어 등줄기가 스산했다. 꼭 자기가 잔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그게 싫어서 가족들과 연락하지 말자 연을 끊자 서로 소리치고 싸운 것이 몇 달 전이었다.
“박 실장이 어디까지 숨겨 줄 수 있을 것 같아?”
“…….”
“사업 준비한다길래 기특한 마음에 품위 유지비 하라고 보내 줬더니, 그걸 그대로 게임에 쓰고 말이야. 밖에서 패싸움하고 사고치고 다닐 때도 다 눈감아 줬어. 질풍노도의 시기니까 그러려니 했지. 너, 이제 내일모레 서른이야.”
“요즘 게임들은 주 고객이 40대부터인데. 뭐 어떱니까.”
“그래서 네가 40대야? 네 형들 멀쩡하게 자리 잡고 사는 거 안 보여? 호텔 운영에 봉사활동에. 넌 대체 뭐냐. 도대체 누굴 닮아 그 모양이야.”
“…….”
“남들 보기 쪽팔려서 원…….”
“그렇게 남들 시선 신경 쓰시는 분이, 사람 죽인 건 전혀 안 쪽팔리신가 봐요.”
대화 내용이 점점 이상해진다.
사람을 죽여? 윤 회장이 설마 살인을 했다는 말일까? 그런 얘기를 직원들 다 있는 데서 해도 되나?
경원은 여전히 즐겁게 눈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주고받는 말들은 도저히 그런 태도로 할 얘기가 아니었다. 미친놈이라면 또 모를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람? 서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쿡, 그러자 옆에 나란히 서 있던 범수가 스리슬쩍 옆구리를 찔러 왔다.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너, 네 엄마 자살한 게 아직도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윤 회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를 둘러싼 공기도 한층 더 무겁고 눅눅했다. 기세가 넘치는 노인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화를 내기 시작하니 옆 방으로 도망가고 싶은 생각까지 들게 했다. 만약 게임 속이었다면 그 음산한 기운에 주변의 음식이 다 썩어 문드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왜 그렇게 생각하겠어요.”
그리고 경원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부드럽게 그 분노를 맞받아치고 있었다.
“저한테는 명백히 자살이 아니라 타살인데.”
“뭐야?”
서혜는 경원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경원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가 사는 세상은 항상 이런 분위기인가. 조금 엿보는 것뿐인데 기분이 여러모로 불쾌했다. 한여름 습도가 90%쯤 되는 공간에 갇힌 것 같았다.
“아직도 철이 안 들었어. 네가 호의호식하고 사는 게 누구 덕인지 알면서. 언제까지 날 원망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아. 남들이 피같이 번 돈으로 게임에 몇억씩 써재끼는 네가, 밑바닥에서부터 구르는 건 도저히 못 하겠다고 결국에는 아비 돈 끌어다가 사업 벌이고 다니는 한심한 새끼가. 언제까지 그럴 수 있겠냐고!”
“워낙에 영세한 게임사라서 힘들어 보이길래 돈 좀 쓴 걸 가지고 뭘 그러세요.”
“윤경원!”
“그러게 왜 저 같은 후레자식을 낳으셨어요. 바지 간수 좀 잘하시지. 덕분에 잘 먹고 잘 삽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 새끼가 그래도!”
계속되는 도발에 폭발한 윤 회장이 밥그릇을 엎었다. 그리고 숟가락부터 집어 던졌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무엇이든 잡아 경원을 공격하는 데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제 아들의 멱살을 잡고 바닥으로 넘어뜨렸다.
서혜는 말리지 못했다. 그럴 자격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범수와 다른 룸메이드 사이에 낑겨 선 채 그들과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어야 했다. 그때야말로 경원이 말한 NPC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Non-player character. 플레이어들이 눈앞에서 무슨 짓을 하든 전혀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존재들.
그들이 사실은 일방적인 폭력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사람들이라는 것과 별개로, 계약을 하고 돈을 받는 순간 겉모습은 완벽한 NPC로 새롭게 프로그래밍이 되는 것이었다. 주어진 업무 외의 상호작용은 허락되지 않으므로, 플레이어의 삶에 참견하지도 못한다.
그나마 경원이 아버지에게 맞아 죽을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윤해산은 TV나 인터넷 뉴스에서 보던 것보다 더 작고 볼품없는 늙은 남자였다. 한 번 경원의 힘을 정면에서 마주해 봤던 서혜는 윤 회장이 절대 물리적인 방법으로 그를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경원이 일부러 맞아 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반항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선 얄궂게도 도발을 이어 가고 있었으니까.
그래, 여기서 아버지에게 똑같이 폭력을 휘둘렀다가는 아마 더 이상 경제적 원조는 받을 수 없겠지.
재벌 집이라 그런가 깽값도 단위가 다른가 보네.
“내가 자립하라고 한 건, 결국 못 해낼 걸 알기 때문이야. 그걸 깨달아야 윤경원 네가 자기 주제를 알고 정신을 차릴 테니까! 그때 가서도 아비한테 그렇게 눈을 뜰 수 있을 것 같아?!”
“글쎄요……. 그래도 절반은 아버지 유전자인데, 너무 무시하시네요.”
온갖 생각을 하던 와중에 투명한 재떨이가 허공을 날았다. 쾅-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튄다. 경원의 이마가 조금 찢어졌다. 집안싸움이 과격하다.
플레이어를 마음대로 잡아 죽이고, 언젠가 경원을 향한 칼부림도 각오했던 서혜였지만, 역시 게임과 현실은 달랐다.
그가 한동안 얻어맞는 것을 보면서도 그다지 속이 시원하지도, 기분이 좋지도 않았다.
***
뒷정리는 룸메이드의 몫이다. 서혜는 늦은 시간까지 부엌에 남아 청소에 매진했다.
그사이에 박 실장도 오고 주치의라는 사람도 와서는, 찢어진 이마는 흉터도 안 남게 잘 해결할 거라고 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이 능숙한 처치였다.
서혜는 경원의 상처는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기 손목도 으스러뜨리려고 하던 무식한 곰 같은 남자한테 그 정도 생채기쯤이야 뭐.
그보다 어찌나 난장판을 해 놨는지, 음식이 죄다 엎어져서 먹을 거 하나 안 남았다는 게 더 충격적이다. 음식에다가 왜 화풀이야? 정말 난폭하고 추한 부자들이었다. 바닥에 남은 기름기를 닦는 일이 고역이었다.
함께 청소하던 선 여사는 내내 남은 음식이 없음에 미안해했다. 서혜는 그녀 역시 굶주렸다는 것을 알았기에 어서 집에 돌아가라고 채근해 쫓아냈다. 그렇게 혼자 일을 도맡아 하고 찌뿌둥한 허리를 폈을 때,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와서 밥맛도 없고, 닭가슴살은 더더욱 먹기 싫고, 몸이 너무 피곤하니 게임을 하고픈 생각조차 안 들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후. 부엌 밖으로 나오니 집 안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둑한 거실은 혼자 살기엔 조금 무섭게도 느껴진다. 화려하기야 하지만, 집이 너무 넓어서 그런지 더 쓸쓸한 느낌인 것 같다.
“흐음…….”
그곳에서, 제 방으로 돌아가려던 서혜는 이유 모를 찝찝함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
이대로 자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왜지? 의자 다리까지 안 빼먹고 닦았고, 냉장고랑 커피포트도 반질반질하게 닦았고, 식기세척기 예약도 다 해 놨다. 게임은 어차피 못 할 텐데, 그 외에도 뭔가 할 일을 빼먹은 듯하다.
그녀는 천천히 왼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한쪽 복도 안쪽에, 희미하게 불빛이 새 나오는 방 하나가 눈에 밟혔다.
아, 맞다. 윤경원.
지금쯤 자고 있겠지 싶었는데. 아직 안 자나 보다.
더러워진 슬리퍼를 벗어 버리고서, 맨발 한 쌍이 살금살금 바닥을 스쳤다. 서혜는 저도 모르게 자기 방과는 반대 방향으로, 경원의 침실로 이동하고 있었다.
아직 잠들지 않았다면 혼자 끅끅 울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절경을 놓친다면 아깝지 않을까. 아버지랑 어린애처럼 싸우기나 하고…… 자기한테 사고 치지 말라며 애 취급을 하더니만, 이참에 쫓아가서 놀려나 줘야겠다.
물론, 경원이 그 돈을 게임에 쓰게 된 원인에…… 약간은 기여한 부분이 있으니까. 이대로 자 버리면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몸은 물론이고 머릿속 생각조차도 뭔가에 홀린 듯이 흘러갔다.
이윽고 문고리를 잡아 밀자, 문이 경첩 스치는 소리도 없이 아주 조용하게 열렸다.
서혜가 도둑이라도 된 양 빼꼼 고개를 내밀고 안쪽을 살폈다.
따뜻한 그레이 톤으로 도배한 호텔 방의 모습. 자기 방에 급히 갖다 놓은 작은 침대와 비교도 안 되는 최고급 매트리스와 카펫. 청소하는 사람 더럽히는 사람 따로라는 듯 그대로 바닥을 뒹굴고 있는 옷가지들. 피 묻은 거즈까지. 그 모든 것들을 차례로 발견했지만, 경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좀 더 용기를 낸 서혜는 아예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대로 침실 끝까지 가로질러 발코니를 가린 커튼을 걷어 내자,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말을 걸어 왔다.
“야. 주서혜, 너 술 마실 줄 아냐?”
“…….”
편안한 옷을 입고 머리도 차분하게 내리고서, 완전히 잠들기 직전의 모습을 한 경원이었다.
그러나 정작 잠은 오지 않아 날밤을 새우는 중인 것이 전형적인 청승 떠는 남자였다. 이미 절반이 비어 있는 술병 탓에 더 그렇게 보였다.
경원은 조금 전에 이마를 꿰맸으면서 당당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 걸까. 서혜는 이해하지 못했고, 경원은 그런 서혜에게 더 이해되지 않는 명령을 했다.
“와서 좀 같이 마셔.”
서혜가 발코니 안을 쓱 둘러보았다. 닫힌 창문 밖으로는 야경이 반짝거렸다. 당장 기타를 치고 바비큐 파티를 해도 무방할 것처럼 가구와 화분들이 얽히고설킨 아름다운 전경인데, 그게 경원에게 위로가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때로는 그런 사치가 사람 하나보다 못할 때도 있다. 굳이 자기를 앞에 앉히겠다는 것만 봐도 그랬다.
어차피 경원이 자기 전에 퇴근은 없다고 했고, 명령은 명령이니까. 서혜가 딱딱한 나무 바닥 위에 발을 디뎠다. 덜컥, 덜컥 소리를 내며 작은 테이블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도련님, 친구 없죠?”
그렇게 앉자마자 하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앞에 앉은 남자를 레벨 30짜리 경원이 정도로 생각하지 않는 이상은 나오기 힘든 말이다. 경원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친구 없냐는 질문에 왜 웃는대? 서혜는 이제 경원의 표정을 굳이 해석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기분이 좋아도 웃고 나빠도 웃는 사람이다. 아주 비틀린 인간. 아마 저주받은 검만 아니었다면 평생 상종할 일도 없었을 터였다.
서혜가 태연히 뒤집혀 있던 잔 하나를 들어 제 앞으로 가져왔다. 연예인들 SNS에서나 본 적 있던 비싼 술이 반투명한 병 속에서 찰랑찰랑 춤을 췄다.
그 고생을 했는데 이 정도 보상은 있어야지. 저녁 내내 그 염병 천병을 다 봐 놓고서 병을 기울이는 손이 혼자 신이 났다.
“친구 없는 게 아니면, 같이 술 마셔 줄 사람이 왜 없대요?”
“걔네들이랑 NPC랑은 다르지. NPC는 내가 뭐라 하든 기억도 못 하고. 입도 무겁고. 의미 부여도 안 하고.”
서혜는 경원의 말대로 NPC라는 역할을 착실하게 지킬 셈인지 값비싼 술을 단번에 입속에 털어 넣었다. 경원의 사정에 대해 관심도 없고 듣는 시늉도 제대로 안 하겠다는 불성실한 태도였다. 쓸데없는 집안 사정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것이 제 역할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 역시 자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듯이 말이다. 그럴수록 경원은 마치 혼자 벽에 대고 말하듯이 말이 많아졌다.
“너 그날 내가 왜 여기 데려왔는지 아냐?”
“괴롭히려고요?”
“그것도 맞기는 하지.”
“마음대로 하세요. 다 당해 드릴 테니까.”
“무슨 짓을 당할지 알고. 당할 생각 말고 반성이나 좀 진득하게 하지그래…….”
두 번째 잔은 앞으로 내밀어졌다. 경원이 형식적으로 잔을 부딪쳐 줬다. 서혜는 또 단숨에 잔을 비웠다. 공복에 강술을 들이부으면서도, 고단한 하루를 보내서 그런지 아니면 비싼 거라 그런지, 맛이 아주 달콤했다.
“반성을 왜 해요? 윈드 스토리에서는 약하면 죽는 거고 강하면 사는 거예요. 최석훈도 예외 없어요. 그러니까, 저처럼 강해지려고 발버둥 치는 게 싫으면 다른 게임 하면 되잖아요. 뭐, 퍼즐 게임이나, 다른 거……. 아…… 그래서 게임이 망해 가나.”
자기 잔에만 술을 따르기 바쁜 여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경원이 조용하게 빈 잔을 내려놓았다. 웃기는 여자애. 같이 마시자고 앉혀 놨더니 자기 혼자 신나서 다 마실 기세다.
삶이 고단해서 술이 달게 느껴진다고 허세를 부리기 시작하는 것도, 마셔 본 적이 없는 티가 나서 웃겼다. 보아하니 본인이 마시고 있는 술이 설탕이 듬뿍 들어간 리큐르인 것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너 다 마셔라. 포기하고 잔을 놓은 남자의 관심이 자연스레 서혜에게만 꽂히기 시작했다. 세 번째 잔까지 비웠을 때, 서혜의 뺨이 햇빛에 익은 붉은 과실처럼 달아올랐다. 경원은 그녀의 주량이 형편없다는 걸 예감했지만 굳이 술잔을 뺏지 않았다.
“내 말은, 그렇게 사는 본인 인생에 미안하지 않냐는 거야.”
그래야 자기 할 말을 더 편하게 할 것 같아서. 다음날 필름이 끊겨서 기억을 못 하면 더 좋고.
서혜는 대답 없이 또 술을 따랐다.
“너 그날 그대로 집에 돌려보내면, 목매고 죽을 거 같더라.”
“…….”
“그냥 그럴 거 같았어.”
그리고 예상대로, 취기가 오른 여자는 경원이 무슨 진지한 소리를 해도 놀리거나 비웃지 못했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
“……제가 죽어요? 뭔 소리래…….”
경원의 집에 따라온 날, 서혜는 집에 돌아가기 싫었다.
만약 돌아갔다면, 경원이 이상한 제안을 하지 않았다면, 이 말도 안 되는 계약을 수락하지 않았다면 정말 자신은 죽었을까?
최석훈이 끝났으니 주서혜도 죽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을까?
겪어 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다.
두 사람 모두 머리가 알딸딸했다. 경원이 등받이에 나른하게 몸을 기댔다. 서혜는 목을 젖히고 혼자 한숨을 내쉬는 그를 멍하게 응시했다. 목선부터 떨어지는 라인이 참 예술적인 사내의 몸이다.
또, 또 혼자 분위기 잡고 있네. 그렇게 말하려던 서혜의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저 안 죽어요. 남이야 죽든 말든 걱정 마세요. 최석훈만 멀쩡하면, 저도 멀쩡한 거예요.”
그리고 다시 정적.
서혜가 허공에 대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윤경원이 주서혜를 걱정해? 자기 입으로 뱉은 말이지만 웃음이 절로 나왔다. 주서혜가 윤경원을 걱정해서 그의 침실에 들어와 술친구를 해 주고 있다는 소리만큼이나 웃겼다. 원수 같은 경원이가. 말도 안 되지.
걱정은커녕, 도대체 경원이는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커피잔에 침을 뱉고 바닥에 비누칠하고 신발 끈을 느슨하게 묶어 버리는 조잡한 방법 말고 저 커다랗고 강인한 남자를 무슨 수로 통제할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더 그럴듯했다.
얌전히 술친구는 해 주면서도 속으로 하극상을 일으킬 방법을 구상하는 서혜였다. 물론, 대부분은 제정신으로 실행하기 어려운 것들이었기에 이성적으로 참고 인내하며 한 달을 채우는 게 최선이었지만 말이다.
“주서혜…… 너한테 최석훈이 뭐야? 헤어진 남자친구 이름이라도 돼? 그게 뭐 그렇게 좋다고 목숨을 걸어.”
계속해서 잔을 홀짝이고 있으려니 경원이 다시 입을 뗐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서 호기심이 느껴졌다. 평소였다면 분명 거짓말로 둘러댔을 질문이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서혜는 조금 어눌해진 말투로 성실하게 대답했다.
“남자친구는 무슨…… 그런 거 없어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거예요. 저도 제가 못난 거 알아요.”
경원이 자세를 바로 한다. 없었어? 그가 의아한 듯 되물었는데, 서혜는 이젠 정말로 듣질 않았다.
“……최석훈은 강하잖아요. 이름도 세 보이고. 거인족은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하거든요.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는 게 얼마나 멋진데요. 사람들이 죄다 넙죽넙죽 엎드리고.”
“…….”
“아- 딱 한 명. 경원이는 빼고요. 경원이는 석훈이도 괴롭히고…… 서혜도 괴롭히고…… 생긴 것만 취향이지 완전 최악이에요. 걔 때문에 게임 못 하고 있는 것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눈이 떠진다고요.”
서혜는 빈 병을 잔 위로 털어 댔다. 잘 빠진 병 입구가 투명한 물방울을 부산스럽게 떨어뜨린다. 술이 다 떨어졌다고 시위를 하는 것 같았다.
경원이 손가락으로 창가 쪽을 가리켰다. 작은 와인셀러가 놓여 있었다. 서혜는 투명한 냉장고 문 앞으로 달려가 금박으로 실링이 된 와인병을 집어 왔다. 제일 비싸고 좋은 것만 고르네. 경원이 혀를 차기 무섭게 그녀는 금방 두 번째 병을 비우기 시작했다. 다만 이번에는, 경원에게도 계속해서 술을 따랐다. 테이블 위로 병이 늘어 갔다.
두 사람 모두 맛이 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저녁에 일어난 일에 대해 위로를 주고받는다거나 과거의 일들을 잊고 화해를 나눈다거나 하는 아름다운 광경은 조금도 벌어지질 않았다. 그저 경원이에 대한 비난과 게임에 대한 찬양만 쉼 없이 이어졌다.
꿰맨 이마가 지끈거린다. 괜히 비싼 술만 털린 경원이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그만 됐어. 퇴근해도 돼.”
그 역시 심신의 한계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서혜의 눈이 번뜩인다. 그녀는 기회를 엿봤다.
윤경원이 취한 순간. 지금이라면, 어쩌면 취약해진 경원을 넘어뜨리고 승패를 뒤바꿀 수 있을 것이다. 해서는 안 될 초자아 속의 생각이 어지러운 머리를 타고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설상가상으로, 서혜는 당장 게임을 할 수 있다면 제 몸 따위는 내다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주서혜 따위는 전혀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망가지고 다쳐도 상관없을 정도로.
그러니까 몹시 취한 나머지 디버프 상태에 걸린 윤경원을 유혹해서 자빠뜨린 다음, 아이템을 얻어 내고 노예로 삼아야겠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비로소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벌떡, 서혜는 아예 뭔가를 마음먹은 사람처럼 비장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에만 집중하고 있던 남자는 뒤늦게 마지막 병이 완전히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주서혜라는 NPC는 좀 많이 고장이 나 버린 것 같았다.
얌전히 앉아만 있으라니까 그것도 못 한다. 경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 모두 풀린 눈으로 몸을 흐느적거린다.
“방으로 데려다줘?”
경원이 그만 여자를 방으로 돌려보내 재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서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느닷없이, 그녀의 말투의 점도가 높아졌다.
“도련님, 게임이 왜 좋은지 아세요?”
말끝이 끈적거렸다.
얘 또 왜 이래? 경원이 신경을 곤두세운다. 다른 여자라면 별걱정도 안 들겠지만, 게임만 관련되면 이성을 잃어버리기 일쑤인 애가 또 어떤 이상한 짓을 할까 저답지 않게 불안한 마음이 든다. 목숨 걸고 싸움박질을 하고 다닐 때도 들지 않던 마음이 주서혜라는 이상한 여자애 때문에 스멀스멀 피어나는 것이었다.
가까이 몸을 붙여 온 서혜가 드레싱을 해 놓은 거즈 위로 길게 팔을 뻗었다. 경계심 강한 경원이 손목을 잡아챘다. 그런데 살짝 잡은 것만으로도 서혜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어서, 예상치 못한 반응에 저도 모르게 도로 놔 버리고 말았다.
그래, 사실은 그게 정상이다. 차라리 죽이라며 악을 쓰는 것이 아니라.
경원은 제 머리를 만져 대는 작은 손 두 개를 완전히 내버려 두었다. 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건지 궁금했다. 새로운 방식의 공격을 시도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듬는 손길이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실제로 다치면 이렇게 아픈데.”
“…….”
“게임에선 아무도 안 아프거든요.”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면서 기이한 주정을 부릴 뿐이었다.
“저는 게임만 할 수 있으면 뭐든지 할 거예요. 도련님은 절대 최석훈을 못 막아요.”
작은 손바닥이 살갗 위를 훑어내린다. 무척 생소했다. 제 손과 달리, 어떤 무게감도 없이 가벼웠다.
그렇다고 제 아버지처럼 매서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강아지풀 같은 것이 스치고 가는 것 같았다.
처음 현실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도 그랬다. 이를 보이고 으르렁거리는데 전혀 위협이 안 됐다. 경원은 단번에 알아차렸었다. 주서혜가 실제로 누굴 찌를 수 있는 위인이 아니라는 걸.
상처 입고 짖어 대는 개새끼를 만난 것처럼 그냥 두기가 불안해서, 혹여라도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생각을 하기가 싫어서 주워 왔다. 그래 봤자 심신이 회복되면,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면 금방 돌려보낼 예정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유혹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냐오냐해 줬더니 아주 자기를 호구로 보는 모양이다.
“……지금 게임하고 싶다고 이러는 거야?”
고작 게임 때문에, 라고 말하려던 것을 경원이 순화했다. 조금 전 게임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연설을 듣고 난 탓에 자연히 그리되었다. 서혜에게는 그게 세상 전부인 것이었다.
“네가 치댄다고 내가 컴퓨터 비밀번호라도 알려 줄까 봐? 네가 뭐가 예쁘다고, 주서혜.”
그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여자로 뵈지도 않는 애였다. 예쁜 여자애들이야 주변에 널렸는데 이런 폐인이나 다름없는 애한테 무슨 반응을 보이겠는가. 귀엽게 봐줬더니만 떽떽 말대꾸나 하고, 자기 고간을 보고 괴물이라고 도망가기 바쁘고. 그리고 이제는 감히 윤경원을 벗겨 먹으려고 든다.
그사이에 뺨을 타고 내려간 손이 어깨 위에 닿아 있었다. 경원은 그 노골적인 손길을 계속해서 막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서혜의 허리 위로 제 손을 올렸다. 서로 한 번 손을 대기 시작하자 거리낌이 없었다. 핀잔을 주는 말투와 행동이 완전히 불일치했다.
“안 알려 줘도 돼요.”
마주친 까만 눈이 흔들린다. 서혜가 몽롱한 얼굴로 조곤조곤 속삭여 왔다.
“도련님 몸이요, 그거라도 주세요…….”
자기 딴에는 그렇게 말하면 비밀번호를 알려 줄 거라고 계산한 걸까. 아니면 몸을 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어느 쪽이든 경원이 무시해 버리면 그만인 어처구니없는 선택지다. 그런데도 발코니를 밝힌 고요한 불빛들이 그녀를 꽤 정상으로 보이게 했다. 술주정을 진지하게 듣게 만든다.
“아니야…… 알려 줄게. 비밀번호.”
경원이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다. 서혜의 부탁이 물 흐르듯 쉽게 먹혀들어 갔다.
“저, 정말요? 그럼 지금 당장…….”
“내 몸도 줄 수 있고. 둘 다 줄게.”
“……!”
그러나 하찮은 여우짓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 내면 그만큼 위험부담도 있는 법. 경원은 서혜의 요구를 전부 무시할 수도, 전부 받아 줄 수도 있었다.
순간 그의 대답에서 나오는 여유로움이 너무나도 포식자의 것이라, 서혜가 움찔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가 놀란 듯 떨어져 나가려는 서혜의 손을 잡아당겼다. 끌려간 서혜의 몸이 좁은 테이블 위로 넘어간다. 밀려난 술병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위로 올라온 남자의 몸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커다랗게 떠지는 옅은 눈동자를, 새카만 눈이 벗어날 수 없게 단단히 옭아맸다.
“그럼 넌 나한테 뭘 줄 수 있는데?”
경원이 보기에 안경 너머 서혜의 시선은 진작부터 애틋함이나 동정이 아니었다. 서로 그런 걸 주고받을 사이도 아니었다. 단지 세상의 서러움은 다 담고 있는 눈이었다.
그런데 그 서러운 눈으로 평소답지 않은 유혹은 왜 하는 걸까. 남자도 안 사귀어 봤다는 애가 단순히 술에 취했다고 이런 발칙한 짓을 할 수 있을까. 대체 게임이 뭐라고 이렇게 망가졌을까.
주서혜는 전혀 관능적이지 않았고, 특별히 대담하지도 않았다. 꼭 자기랑 같이 망가져 줄 사람을 찾아 붙잡는 것 같았다.
NPC나 하라고 했더니만. 그 체온도 눈빛도 조금씩 스며들듯 전해져 왔다. 화살을 쏠 곳을 찾지 못해 결국 자기를 쏴 버리는, 사람을 자멸하게 만드는 감정. 경원은 주서혜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왜 멀쩡해 보이는 여자애가 게임에 미쳐 있는 건지, 그 감정만은 어렴풋이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 역시도 취한 게 틀림없었다. 자기 감정을 이 연고 없는 여자애한테서 찾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어느새 저녁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다 잊어버린 듯 생각이 안 났다.
그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네 취향, 다 맞춰 줄 테니까 말해 봐.
서혜가 대답했다. 괴물…… 그런 거.
“아. 그랬어?”
경원이 미소 지으며 윗옷을 머리 위로 단숨에 벗어던졌다. 서혜는 짐승 같은 체취와 함께 드러나는 남자의 몸을 올려다보며 숨을 삼켰다.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남자의 단단한 몸판은 몹시도 위협적이었다.
유혹이라는 게 이렇게 쉽게 성공할 수 있는 거였나? 자기한테 무슨 매력이 있다고, 이 남자 왜 이렇게 빨리 넘어와? 다 저질러 놓고서 뒤늦게 그런 의문이 들게 만들 정도로 무섭게 생겼다.
그런데 이미 너무 늦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