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9)

05.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서혜는 많은 것을 얻어 냈다.

윤경원은 자신의 팜므파탈 매력에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고, 혹시라도 자기가 아프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했으며, 비싼 명품 옷에 가방에 신발까지 또래 여자애들이 좋아한다고 소문난 것들은 전부 갖다 바치려고 했다. 최석훈의 부활을 위해 열심히 아등바등 살고 있는 사람에게 왜 자꾸 죽을 것 같다느니 죽지 말라느니 하는 말을 해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우주최강경원이를 노예로 만든 것이나 다름이 없다, 라고 정신 승리를 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앞으로 열흘만 더 있으면, 수천만 원을 들여도 가질 수 없었던 초 희귀 아이템을 월급 대신 받기로 한 날이었다. 정말 얼마 안 남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게임이 예전처럼 미친 듯이 재미있게 느껴지질 않는다는 것.

분명 멀쩡히 살아남아 다시 강해지고 있는 캐릭터를 보면 기분이 좋은데…… 딱 그 수준의, 평범한 육성게임 수준에 불과한 즐거움에서 그치고 마는 것이다.

서혜는 결국 며칠 내내 플레이하던 윈드 스토리에서 잠시 벗어났다. 그리고 멍하니 소파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봤다.

재미없는 이유가 뭘까, 더는 다른 플레이어를 죽일 수 없기 때문일까.

경원에 의해 신분 세탁을 마친 최석훈은 완전히 찌그러진 최석훈이 되었다. 산소 호흡기를 달고 목숨만 유지하고 있을 뿐, 강한 거인족의 후광 같은 것은 전부 퇴색되고 없다. 그야말로 주서혜와 같은 투명 인간이다.

이것은 해뜨기 전의 새벽. 부활하기 전의 어둠 속이기에 그런 거였다. 저주받은 검을 장착하고 다시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 이전과 같은 희열을 다시 느낄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겠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확신 대신 질문이었다.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은 기쁘지 않다. 꿈속에 빠진 듯 몽롱했다.

컨디션도 꽤 괜찮아졌는데 오늘은 러닝머신이라도 뛰어 볼까……. 따분함에 질린 서혜는 저답지 않은 생각까지 했다. 언제 어떻게 벌어질지 모르는 경원과의 격렬한 교접을 버티기 위해 근래에는 남는 시간에 종종 운동도 하고 있었다. 꼭 그것만 기대하는 사람처럼.

이 정도면 중증.

저 역시도 어지간히 심각한 것 같았다.

서혜의 손이 무료한 듯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게임도 별로 재미없고, 그나마 말동무를 해 주는 선 여사님도 일찍 퇴근해 버렸고. 윤경원은, 아, 그 인간은 말동무를 해 준다고 해도 본인이 거절하고 싶고. 남은 것은 TV 같은 것뿐이다.

서재에서 뒤엉켰던 며칠 전 저녁, 경원이 바리바리 사 들고 온 선물들 중에는 어디선가 맞춤 제작해 온 게임 코스튬까지 들어 있었다. 다리 사이 부분에만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요정족 의상. 천이 부족했나, 아니, 변태가 아닌 이상 어떻게 그런 짓을.

보자마자 기겁하고 방구석에 처박아 놨지만, 언제 경원이 그걸 다시 꺼내 들지 몰라서 남은 시간이 살얼음판이었다. 아마 쓸데없이 말을 많이 섞었다가는 분명 또 상스러운 요구에 휘말리고 말 터였다. 다른 건 몰라도 침대 위에서는 절대 안 져 주는 놈이니까.

그리하여 게임이 빠져나간 뒤의 주서혜는 심장에 구멍이 뻥 뚫려 버린 것처럼 공허했다. 친구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이대로 바보가 되는 것 같았다. 아니, 원래 게임 빼고는 할 줄 아는 게 있었던가? 게임을 안 하고 있는 시간에는 뭘 했었더라? 까먹은 것들이 너무 많다.

[독특한 청량감과 순수함으로 남심 여심 전부 사로잡은 매력적인 소년들이 돌아왔습니다.]

[네- 이번 주 IBT 인기 차트 1위 후보 토이도이의 컴백 무대 지금 바로 만나러 가 보실까요?]

둥둥당당, 순금으로 브랜드로고를 새긴 하이엔드 스피커가 감미로운 비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스피커 두 대에 천만 원. 선 여사님 설명으로는 풍성하고 다이나믹하다 못해 공간감까지 느껴지는 음향이라더니, 양리 마을에 살 때 쓰던 싸구려 스피커와는 비교가 어려운 자본주의의 맛이 느껴졌다. 리모컨을 든 서혜의 손이 어느새 채널을 넘기던 것을 멈추고 까딱까딱 리듬을 탔다.

영화관 스크린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거대한 화면 속, 앳된 티가 나는 남자아이들이 땀을 뻘뻘 흘려 가며 춤을 춘다. 연갈색 눈이 정신없이 바뀌는 화면을 쫓아갔다. 멍한 얼굴로 리클라이너 소파 위에 인형처럼 앉아 있는 자신과는 달리 생기가 넘치는 사람들이 신기하다. 체력과 열정도, 꿈도. 반짝반짝 빚을 내고 있었다.

언젠가 저에게도 저렇게 반짝이는 꿈으로 가슴이 채워진 시절이 있었던가. 그런데 그게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었는지 전부 잊어버렸다. 잊어버리고 게임을 선택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제대로 남지 않았다. 나사가 두어 개쯤 빠져서 달릴 수 없게 된 장난감 자동차 같았다.

“창문…… 너머어…… 자전거어가…… 달려어가는데에…….”

서혜의 입술이 방긋방긋 가사를 읊었다. 한동안 작은 파랑새처럼 짹짹거리며 높은 음정을 곧잘 따라가다가, 이내 목에서 느껴지는 불편감에 멈춰 버렸다. 윤경원 그 사악한 남자 때문에 우는 날이 많으니 목이 남아나질 않는다.

“주서혜 씨.”

“……!”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경원의 생각을 하던 서혜의 앞에 대뜸 진짜 경원이 나타났다. 서혜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TV 소리를 줄였다. 너무 음량을 크게 키워 놓은 나머지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들은 모양이었다.

“노래 잘하네?”

반면에 자기가 노래 부르는 소리는 경원에게 다 들켰다. 집에서 혼자 노래를 열창하는 모습이라니. 아, 쪽팔려. 서혜가 부끄러운 마음을 숨기고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일찍 오셨네요…….”

“이제 완전 편해졌지? 유니폼은 장식이다, 너?”

경원이 씨익 웃으며 소파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래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친근하게 어깨동무를 해 온다. 그런 식의 스킨십은 다소 생소한 느낌을 줬다. 뜨겁게 맞붙는 접촉보다 훨씬 더 미지근한데, 오히려 이렇게 이 남자와 가까웠던가 하며 부쩍 좁아진 거리감을 일깨워 줬다.

“토이도이네, 너 이런 거 좋아했어? 노래도 따라 부르고?”

“그런 것도 아세요?”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연예계하고 라크뷰하고 또 떼려야 뗄 수가 없거든요. 나한테도 번호 몇 개 있어.”

“…….”

“이번 주말에 호텔에서 자선 파티 여는데 연예인들 많이 올걸? 구경하고 싶으면 너도 올래? 직원 명단에 몰래 올려 줄게.”

그가 섹스 파트너가 아닌 평범한 말동무를 자처하는 것도 역시 생소하다. 경원이야 원래도 매사에 여유가 넘쳤지만, 그리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뻔뻔하게 굴 수도 있는 사람이었지만, 서혜는 술의 힘을 빌리기라도 한 게 아니라면 어려웠다. 누가 NPC 아니랄까 봐. 일상의 공유, 관심사의 공유, 그런 정신적 교류를 해 보려고 하면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한마디로 고장 나 버렸다.

“제가 거기 끼어서 뭘해요. 토이도이가 오면 또 모를까. 잘생겼고 노래도 잘하고. 누구랑 다르게 인성도 바르고…… 아, 토이도이랑 결혼하고 싶다아.”

고장 난 서혜의 입에서 아무 말이나 튀어나온다. 경원은 아랑곳 않고 어깨를 더 꽉 끌어당겼다. 그는 TV에 나오는 어린 남자들을 보며 생각했다. 기생오라비 같은 게 절대 주서혜 취향 아니라고.

“왜, 너도 그 이상한 안경만 벗기면 딱 아이돌 상인데, 왜 요즘 잘 나가는 애 누구냐, 도연희? 내 눈엔 걔보다 네가 나은데. 엔터 꽂아 줄 테니까 가수해라. 어때.”

“……안 해요.”

“그래- 안 하는 게 좋겠다.”

“…….”

“온몸에 키스마크 덕지덕지 붙이고서는 못 하지. 게다가 세상 남자들이 죄다 좋다고 달려들 거 아니야. 이야, 그걸 어떻게 내버려 둬?”

“……도련님이 안 내버려 두면 뭘 어떡할 건데요?”

“궁금하면 한번 해 보든가.”

경원의 손이 목과 빗장뼈 위로 남은 멍 자국을 자상하게 쓸어 만진다. 그러다 또 뭐 때문에 버튼이 눌렸는지 고개를 숙여서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쪽쪽 빨고 핥아 대기를 한참, 아예 이빨로 잘근 물기까지 한다. 붉은 자국을 선명하게 하나 더 남긴다. 영역표시도 아니고, 아주 잘났다.

“너 저번에 사 온 옷은 왜 안 입어 봐? 요정족 옷이 딱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주문한 건데.”

끈적한 숨결이 귓가에 뚜렷했다. 어차피 그가 정상적인 말동무가 되어 주기는커녕 이상한 요구나 해 올 거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서혜였다. 자기 같으면 그 변태 같은 코스튬을 쉽게 입어 줄 것 같냐! 서혜가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했다. 집에 오자마자 질척거리는 남자를 애써 외면했다. 모른 척하고 TV를 보는 척 채널도 돌려 버렸다. 그러자 웬 다큐멘터리가 나온다. 사냥에 나간 늑대가 사슴의 목덜미를 물며 넘어뜨린다.

[늑대는 강한 치악력으로 일격에 결판을 냈습니다. 운이 좋았죠. 늑대는 사냥감의 목을 단숨에 물어 죽이지 못하면 산 채로 잡아먹기도 합니다.]

남자의 입술이 훑고 지나가는 피부 위가 괜히 스산해진다.

서혜가 결국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자리를 피했다.

“제가 왜 요정족이에요? 그 옷 저랑 하나도 안 어울리거든요! 비실비실하게 생겼고 마음에 안 들어요! 거인족이면 또 모를까!”

그러자 자세를 바로 고친 경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에 갑자기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난 것처럼 남자의 키가 쑤욱 커졌다. 서혜가 눈을 치켜떴다. 내려다보는 남자가 거만한 얼굴로 말한다.

“네가 무슨 수로 거인족을 해 거인이 아닌데. 작고 귀여운 요정족 공주님이나 해.”

위협적인 체구를 내보이며 서혜에게 열심히 자기 어필을 한다. 입고 있던 가죽 재킷도 터프하게 벗어 던졌다.

[이 떠돌이 성체는 암컷이 발정기라는 신호를 멀리서부터 찾아냈습니다. 적극적으로 구애하는군요. 짝짓기를 하지 못한 암컷은 강한 수컷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고, 결국 무리 밖으로 이탈합니다.]

서혜가 흠, 흠, 하고 목을 몇 번 가다듬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서, 나름대로 한발 양보한 타협안을 제시했다.

“한 번쯤 입어 줄 수는 있어요.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조건?”

“앞으로는 콘돔 끼고 해요.”

“…….”

그 순간 경원은 귀를 의심했다. 그의 안색이 피가 빠져나간 사람처럼 창백해졌다.

“혹시 콘솔 게임을 잘못 말한 건 아니지?”

“아니에요.”

“콘도미니엄.”

“아니에요.”

“콘덴싱 보일러.”

“아니에요.”

“콘드로이틴설페이트.”

“콘돔이라고요.”

서혜는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꺼낸 적 없던 단어에, 단호함까지. 경원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물었다.

“어제까지 배 터지도록 질내 사정해 놨는데 대체 그게 무슨 의미야?”

“피임도 문제지만 혹시 모를 바이러스나 세균도 문제예요. 그리고, 아예 복구 못 할 수도 있어서 병원에서 젊은 사람은 정관 수술 잘 안 해 준다는데, 수술 안 해 놓고 했다고 하는 걸 수도 있잖아요. 완벽하게 수술이 안 됐을 수도 있고. 제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로 불안해요.”

서혜가 또박또박 입을 놀렸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똑 부러진 논리에 경원은 할 말을 잊어버렸다.

“도련님이 미리미리 준비했어야죠. 자기 몸 아니라고 너무 막 나가시는 거 아니에요? 사랑은 없어도 예의는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완벽한 대사. 지난 시간을 되돌아봤을 때 주서혜 머릿속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닌데. 마치 누가 알려 주기라도 한 것 같다. 위화감을 느낀 경원이 충격으로 삐그덕거리는 입을 간신히 움직였다.

“……너, 어디서 뭘 들은 거야?”

“듣긴 뭘 들어요! 인터넷에 쳐 본 거지!”

그의 눈치가 새삼 귀신같았지만 서혜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윤경원을 조심하라는 범수의 경고 문자는 이미 다 지워 버렸고, 실제로 신경 써야 할 문제이기도 했으니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콘돔 끼겠다고 약속 안 하면 그 옷 안 입어요. 파트너는 한쪽이 거부하면 안 하는 거잖아요.”

“날 못 믿으시겠다? 세상에 나보다 깨끗한 좆 가진 놈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저 며칠 뒤면 생리예정일이라 빨리 결정하시는 게 좋을걸요.”

“……주서혜 너 많이 컸다?”

그렇게 주서혜가 드디어 윤경원을 이겼다. 경원이 범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XL인지 XXL인지 당장 종류별로 사 오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전화를 끊은 뒤에는, 오늘 콘돔 한 박스는 다 쓰고 말겠다며 서혜의 손을 잡아끌기까지 했다. 자, 이제 약속 지킬 시간이다. 그는 그녀가 방에 숨겨 둔 창피한 코스튬을 꺼내 기어이 자기 눈앞에서 갈아입는 걸 지켜보았다. 서혜는 투덜거리면서도 목마른 사람처럼 허겁지겁 라크뷰의 유니폼을 벗었다.

“어머머, 아직 해도 안 졌는데 이래야겠어요?”

“입어. 해 질 때까지 빨아 줄 테니까.”

서혜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어른인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콘돔 끼기 싫다는 말을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못 해 패닉에 빠진 경원의 얼굴은 사진으로 찍어 남기고 싶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옷을 갈아입는 내내 끊임없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마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은 열흘 동안 결코 마음대로 되진 않을 터였다.

어서 화를 내고 날뛰어라, 윤경원. 그러면 철없고 못된 사람이라고 마음 편하게 손가락질해 줄 테니까. 서혜가 신이 난 속마음을 감춘 채로 타이트한 요정 옷을 꾸역꾸역 올려 입었다.

상체는 가슴 중간 라인에서부터 딱 달라붙고, 하의 쪽은 하늘하늘하고 반투명한 원단이 주렁주렁 이어져 있다. 게임에서나 존재할 법한 웃기게 생긴 옷. 그러나 경원의 반응이 흡족한 나머지 왠지 부끄러움도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언제 따분해했냐는 듯, 그가 돌아오자마자 인생이 꽤 재밌어진다. 텅 빈 가슴이 쾌락이나 즐거움 따위로 빵빵하게 차오른다.

삐리리리-. 삐리리-.

그날 한 통의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었다.

경원이 방 화장대에 올려져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동생, 그 두 글자가 주는 임팩트가 엄청나다. 스팸이 아니라 정말 제대로 된 사람에게서 걸려 온 전화는 이번에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옷을 다 입은 서혜를 힐끔 쳐다보았다. 귀엽네. 그런 감상이 들어도 잠시 내려놓고 말했다.

“받아. 처제인데?”

“……남동생이에요.”

“아.”

서혜가 재빨리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몇 달 만에 걸려온 전화. 내다 놓은 자식인 줄 알았더니 표정에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경원이 자기 동생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른다는 것은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어차피 자기도 윤씨 집안에 대해서는 경원에게 들은 것보다 인터넷에 검색해서 알게 된 게 더 많다.

“……거기 계실 거예요?”

그리고 경원은 문가에 선 채로 자리를 비켜 줄 기미가 안 보였다. 그는 자기가 나갈 생각도, 서혜를 나가게 해 줄 생각도 없다는 듯 뻔뻔하게 팔짱을 끼고 버텼다. 한 술 더 떠서는, 도리어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다.

“왜 자꾸 내외를 해. 우리 사이에.”

“그냥 파트너끼리 무슨 우리 사이예요! 그동안 괴롭혔던 게 찔려서 감시를 하고 싶은 거겠죠!”

사실은 먼저 괴롭힌 건 제 쪽이었지만 서혜는 그렇게 넘겨짚어 버렸다. 혹시라도 윤경원이 파트너 사이라는 걸 특별하게 느끼기 시작한 거라면, 그래서 주서혜의 사생활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한 거라면 그거야말로 엄청난 부담이니까 말이다. 서혜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저 양아치한테 뭘 바랄까. 그녀는 침대로 다가갔다. 통화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제 침대 위에 있던 이불을 끌어 내려 자기 몸을 돌돌 감싸 가렸다. 어차피 전화기 너머에서 누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갑자기 잊고 있던 창피함이 해일처럼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불로 가려 놓으면 잠깐이나마 가려질 듯싶었다.

-서혜야, 엄마야.

맙소사. 동생이어도 창피한데, 심지어 전화를 건 사람은 동생이 아니었다. 표정은 반가움에서 곤란함으로 바뀌었다. 하도 전화를 안 받으니 어린 동생 번호까지 이용한 듯싶었다. 방 안이 고요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인자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분위기는 더 경건해지고 있었다. 서혜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으응, 엄마.”

-아무리 그래도, 연락 한 번을 안 하니. 네 아버지가 절대 걸지 말라고 했는데 몰래 하는 거야. 곧 네 생일이더라. 잘 지내지? 일자리는 구했고? 이제 생활비도 다 떨어졌을 거 같은데. 엄마가 돈 좀 보내 줄까?

게임 문제로 싸우고 또 싸우고, 서로 지친 나머지 연락하지 않기로 했지만, 가족이라는 게 뭔지 그렇게 쉽게 연이 끊기지 않는다. 서혜는 게임 중에 일자리 구했냐는 잔소리를 들으면 버럭버럭 화부터 내곤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다. 자기가 왜 그렇게 화를 냈었을까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

“취업…… 해, 했어. 아니, 이상한 데 아니고, 라크뷰 호텔…….”

-라크뷰?

“계약…… 계약직…….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닌데…….”

안절부절못하며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는 서혜의 발밑으로 이불자락이 질질 끌려다녔다. 공적인 부분이든 사적인 부분이든 경원과의 관계는 부모님께 말하기에 썩 떳떳하지 못하다. 제대로 된 직원도 아니고 제대로 된 애인도 아니고. 서혜가 마치 거짓말이라도 하는 듯 쩔쩔매는 걸 보고 있으려니 경원의 표정도 덩달아 굳어 들어 갔다.

-그래도 그게 어디야, 엄마는 너무 대견스럽다. 꾸준히 다녀, 응? 재활치료는 가고 있니? 목소리가 안 좋은 거 같은데.

“아니야…… 나 많이 좋아졌어…….”

그래도…… 서로 연락도 안 하는 것치고는 제법 화목한 가정인 것 같은데.

경원이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수화기 너머에서 고성이 터졌다.

-당신 지금 누구랑 통화해?! 주서혜 그년이지?!

“……!”

난데없는 남자의 등장에 서혜가 깜짝 놀라며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낡은 핸드폰은 그 충격으로 화면이 나갔다.

-아이고, 여보, 또 왜 그래. 애가 밥이나 챙겨 먹고 있나 궁금해서……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게임에 미친 김에 그냥 게임이나 하다 죽으라지! 집안 밑천 훔쳐서 다 게임에다가 날려 놓고 밥이 넘어가?!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비명. 놀란 서혜가 허겁지겁 핸드폰을 주워 전화를 끊으려고 하지만 화면이 새카매서 잘되지 않는다. 어, 어떻게 해. 어떡해. 주저앉아서 끙끙거리느라 바쁘다.

경원은 그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며 생각한다.

생활비는 떨어져 가고.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살아 계시지만 썩 건강한 관계는 아닌 것 같고. 뭔지 모를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 게임에 썼다는 7천만 원은 집안 밑천이었단다.

대화로 알아 가면 좋을 것을, 염탐이라도 하듯 구질구질하게 알아 가고 있다. 원수 같은 경원이, 최악의 남자 경원이. 그런 것으로 첫 단추를 잘못 꿰어 버린 탓에 겉에서만 빙빙 돌아야 하는 게 답답스럽고 마음에 안 든다.

힘들게 최석훈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그녀의 목숨을 붙여 놓은 그간의 노고에 대한 보상 심리인가? 분명 이런 심경은 그냥 파트너가 아니라 점점 그 이상을 원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 같았다.

이유가 무엇이든 관계에 발전이 생기면 좋겠고, 그럼 지금보다 조금 더 인생이 즐거워질 것 같고. 주서혜의 인생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고. 그래서 계속 선물 따위를 사다 바치고 싶어지고.

집안 사정이 안 좋으면, 뭐, 그것까지도 도와주고 싶었다.

동정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 나서서 끼어들 수는 없지만, 적어도 주서혜가 서재에서 그랬듯이 도와달라고 한마디만 한다면야 못 해 줄 것도 없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 돈으로 내가 그때 땅을 샀으면! 그 땅이 지금 몇십 배가 올랐는데!

-그래도 어차피 당신 돈도 아니었잖아, 목소리 좀 낮춰! 애 깨겠어!

-천하의 이기적인 년! 가족보다 게임이 중요하면 아주 제사상도 컴퓨터 앞에서 차리지! 어? 주서혜! 듣고 있어?!

그러나 정작 서혜는 놀란 듯 울상이 되어서, 히으으, 하고 이상한 숨소리를 내느라 바빴다. 그녀는 게임과 관련된 일이 아니고서야 특별히 저에게 원하는 것이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왠지 그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다 늙은 부모들이 어린 늦둥이 데리고 뼈 빠지게 일하고 살면 누나가 돼서 보탬이 될 생각을 해야지, 양심이 있으면 당장 방 빼고 내려와. 내가 잡으러 올라가면 그날 너 내 손에…….

콰득! 콱!

결국 핸드폰을 딱딱한 바닥에 내리쳐 완전히 박살 내 버리고 나서야 소리가 끊어졌다.

“허억…… 헉…….”

얼마나 있는 힘껏 힘을 썼는지 숨이 다 찼다. 서혜가 커다랗게 뜬 눈으로 경원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은 메마르고 건조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생각했던 것보다 더 한심한 애라고 생각하겠지. 정이란 정은 다 떨어졌겠지? 노래 부르는 걸 들켰을 때나 이상한 코스튬을 입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쪽팔렸다. 옷이 발가벗겨지다 못해, 아예 뼛속까지 전부 드러낸 이상한 기분. 단순한 수치심을 넘어서서 뭔가가 무너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평소 욕정에 차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그 순간보다 더 두려웠다.

띵동-. 벨소리가 울렸다.

심부름을 해 온 범수였다. 범수는 현관에 결계라도 쳐진 것처럼 들어오지 못한 채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원이 군말 없이 밖으로 나가자 서혜는 허겁지겁 일어나 움직였다. 마치 스스로를 가두고 성벽을 쌓듯이 그가 나가자마자 제 방문을 잠갔다.

경원이 방구석 폐인으로 사는 삶을 되돌아보라 말하였을 때도 아무 감흥이 없었던 서혜였다. 원래부터 죽은 인생, 욕하든 침을 뱉든 곧 헤어질 사람. 부끄러운 차림새마저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에게는 그래 봤자 막돼먹은 게임 중독자 주서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니까.

그런데 못 참겠다. 윤경원이 자신의 한심한 내면을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 이런 생각이 들지? 그에게 잘 보여서 뭘 하려고?

그리고 잠시 뒤. 경원은 애초에 잠겨 있었던 적이 없었다는 듯이 문고리를 가볍게 부수고 들어와 말했다.

“뭐 해? 하기로 한 거 계속해야지.”

손에는 콘돔 한 박스를 들고서. 진지한 얼굴에는 미친 짓을 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서혜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괜찮아.”

“…….”

“별거 아닌 걸로 쫄지 마, 주서혜. 내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야.”

그 뒤로는 그저 휩쓸리는 게 일이었다. 경원이 서혜를 이불째로 들어 침대에 내동댕이쳤다. 그는 눕혀진 여자의 허리 위로 올라타, 느릿하게 옷을 벗고, 콘돔을 뜯었고, 씌워 본 적도 없는 고무를 꾸역꾸역 성기 위로 끼워 넣었다. 그 과정에서 평소와 달리 어떤 질 낮은 소리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지만, 서혜는 그가 속으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이야기들이 뱃속을 오싹하게 했다.

“다리나 벌리고 있어. 위로해 줄 테니까.”

“뭐, 뭘 안다고…… 도련님이 뭘 안다고 위로를 해요……!”

“넌 뭐 알아서, 그날 날 덮쳤어?”

새카만 눈에 집어 삼켜진다.

“잊어버리게 해 줄게. 무서운 거든 쪽팔린 거든.”

처음으로 붙어먹은 날, 윤경원은 그날 밤 일에 대하여 저 혼자 열심히 의미 부여를 했다. 의미 부여 안 한다더니. 얄미운 거짓말쟁이다.

“아무런 참견도 못 해도, 그 정도는 해 줘도 되잖아. 우리 사이에.”

가슴만 헐떡이며 숨을 쉬던 서혜가 천천히 다리를 벌렸다. 울먹이는 얼굴로, 음부 가운데만 뚫려 있는 추잡한 옷을 입고서 남자를 받을 준비를 한다.

경원이 몸을 겹쳤다. 길들여진 여자는 그가 완전히 들어올 때까지 힘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던 거구의 남자가 체중을 실었다. 목이 뒤로 젖혀지며 서혜는 거친 숨을 토했다. 위아래로 가볍게 들썩이던 것은 속도가 빨라지고, 시트를 붙잡고 버티던 서혜가 금방 울기 시작했다. 그녀 혼자 쓰던 작고 평범한 침대가 끊임없이 삐걱거리는 동안, 경원은 그저 열심히 치받고 열심히 만져 댈 뿐이었다.

“애기야, 난 신경 안 써.”

“흐읏……!”

“넌 그냥 이상한 애고, 하아…… 나도 이상한 사람이고. 그래서 눈 맞았고, 뭐가 문제야.”

다정하게 속삭이는 말들에서 평소처럼 짓궂은 태도는 찾아볼 수가 없다. 나긋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아찔하게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너랑 나랑 집안 보고 만난 것도 아닌데 대체 무슨 상관이야.”

이만큼 예뻐해 주는데, 다른 사소한 일들이 다 무슨 상관이야.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사내는 애정을 쏟아부었다. 거기에 취해서 게임이든 뭐든 다 잊어버릴 만큼. 고작 NPC에게 해 주기에는 과분할 정도로.

“넌, 네가 말하고 싶을 때, 힘들면 힘들다고 말만 하면 돼. 네가 하고 싶을 때.”

“흐…… 흑…….”

“파트너끼리 그 정도는 해도 되는 거야. 부담 없이.”

커다란 등은 완전히 여자를 감싸 세상에서 사라지게 한다. 서혜가 경원의 등을 끌어안았다. 더 밑바닥까지, 온갖 부끄러운 모습들을 공유하면서 이 남자가 전혀 괘념치 않아 한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한다. 다른 모든 걸 별거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을 하고서 쾌락을 찾는 짐승 같은 행위가 놀란 마음에 조금씩 안정을 가져다줬다. 그런 모습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생긴 것 같아서. 주서혜의 마지막 남은 통제력은 아직도 건재한 것 같아서.

***

파트너끼리 이 정도는 해도 돼. 그 말 하나로 경원은 서혜가 쌓아 올린 성벽을 가뿐하게 뛰어넘을 수 있게 됐다. 역시 뭐하나 튼튼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여자애다.

그 제멋대로인 진리를 만들어 낸 이후로, 경원은 자기가 해 주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해 줄 수 있었다. 자기가 이 게임 중독자에게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섹스 이상으로 더 어디까지 나아가고 싶은 건지 확인할 수도 있었다. 얼마나 마법과도 같은 말인가.

“주서혜, 내일이 생일이지.”

“어떻게 아셨어요?”

“네 패딩 안주머니에 주민등록증 있더라.”

“…….”

“너 갖고 싶은 거 사 줄 테니까 나가자.”

다음 날 경원은 서혜와 처음으로 함께 호텔 밖으로 나가 보기로 했다. 외출이라고는 PC방 가는 것밖에 모르던 히키코모리를 데리고 나간다는 게 잘하는 짓인지 고민했지만 다행히 서혜는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서혜가 자기는 화장품도 없고 렌즈도 없다며 유난을 떠는 것을 진정시켜야 했다. 꾸미는 데 관심도 없어 보이던 애가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려고 한다.

“그냥 대충 입고 나가. 누구한테 잘 보일 건데?”

경원의 질문에 서혜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게, 내가 누구한테 잘 보이려는 거지. 그녀는 조용히 옷장 구석에 쌓여 있는 쇼핑백을 뒤졌다. 대충 입으라는 것치고는 지난번 왕창 사다 준 옷들이 전부 다 명품이었다.

서혜는 제일 수수한 검은 바지와 블라우스를 주워 입었다. 눈에 띄지 않을 듯한 갈색 코트도 걸치고, 심플한 로고가 붙어 있는 끈으로 머리카락은 위로 높게 말아 묶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줄줄이 비싼 티가 났다.

그러나 아침 내내 골라 입은 비싼 옷은 경원이 누리는 사치스러운 삶의 아주 일부분에 불과했다.

오전 내내 범수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앉아 편안하게 도착한 파인다이닝 프라이빗 룸, 그곳에서 브런치 개런티로 쓴 돈이 인당 100만 원. 오케스트라 공연 티켓 한 장에 50만 원. 공연 기다리는 동안 안경점에서 맞춰 준 티타늄 안경테도 50만 원.

몇 시간 만에 수백만 원이 날아간다. 경원은 게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돈을 물 쓰듯이 썼다. 마치 자기가 집안 돈을 얼마나 많이 날려 먹을 수 있는지 보여 주려는 것 같았다.

공연이 끝난 뒤 두 사람은 북적이는 인파 사이에 섞여 번화가 한복판을 거닐었다. 경원은 일부러 젊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을 골라 다녔고, 서혜는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그들의 활기를 쫓아갔다. 조용하고 낭만적인 카페 거리도 혹은 자연 전경이 아름다운 외곽지도 아니었다. 완전한 도심 한복판, 아마도 다른 또래의 20대들이 얼마나 빛나게 사는지 알려 주고 싶은 게 아닐까 서혜는 생각했다. 정신 차리라는 뜻으로 말이다.

그게 아니면, 어제부터 그 위로라는 게 이어지고 있다거나. 이제 곧 헤어질 시간이니 마지막 인사라도 해 주는 거라거나.

“이왕 사 주시는 김에 컴퓨터도 사 주세요.”

“아주 자존심도 없지?”

“제 자존심이 남아 있겠어요? 가진 게 너무 많아서 티도 안 난다면서요? 왜요? 좀 불안해요?”

“불안? 필요한 거 있으면 다 말해. 집도 사 주고, 차도 사 주고, 너희 집 돈 필요하면 돈도 부쳐 줄 수 있어.”

“우와, 그럼 베풀어 주시는 김에 저 프라이팬도 하나 사 주세요. 집에 있는 거 너무 낡아서요.”

마치 고래에게 붙은 빨판상어라도 된 양 경원의 옆을 쫄랑쫄랑 붙어 걸으며, 서혜가 재잘거렸다. 언제 치고 박고 싸웠냐는 듯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이 제법 자연스러웠다. 경원이 걷는 속도를 맞춰 준다는 것을 서혜는 눈치채지 못했고, 그녀는 온종일 그가 베푸는 선물에 기뻐하기 바빴다.

경원의 자상함은 평소보다 더 넉살스러웠다. 다감한 눈웃음을 짓고서 해 달라는 것은 다 해 준다. 저 인형 뽑아 주세요, 그 한마디에 귀여운 슬라임 열쇠고리도 뽑아 주었다. 뭐 어쨌든, 파트너끼리 이 정도는 해도 되는 거라니까, 부담 같은 건 갖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서혜는 착실하게 경원의 뻔뻔함을 배워 가고 있었다.

늦은 오후 무렵에 경원은 서혜가 가리키는 핸드폰 가게로 들어가 제일 비싼 기기를 사 주었다. 기곗값을 다 내서 요금제를 제일 저렴한 걸로 골라도 된다는 말에 서혜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경원은 이해하지 못했다. 자기가 주서혜라면, 며칠 뒤에 아이템을 받는 대로 바로 되팔아 버릴 계획을 세울 텐데. 그럼 얼마간 생활비 걱정은 안 하고 살 텐데.

마치 혼자 다시 양리 마을로 돌아가 힘든 삶을 이어 갈 것을 예상이라도 하는 듯이, 프라이팬 따위를 뜯어내기 바쁜 서혜의 모습을 보아하니 그럴 계획은 전혀 없어 보였다.

아직도 게임 랭킹이 우선인 걸까. 같은 생각을 하면서, 경원은 그녀에게 비싼 케이스와 이어폰까지 전부 갖다 바쳤다. 서혜의 예상과 달리, 적선의 의미도 삶의 격차를 일깨워 주려는 의도도 위로도 작별의 인사도 아니었다. 그냥 자기 마음 가는 대로, 자기 성에 찰 때까지 시험해 보고 있는 것뿐이었다. 윤경원이 주서혜에게 어디까지 마음을 품고 있는지 말이다.

“원래 쓰던 아이디 있으세요? 전화번호부 백업된 거 있으면 다시 등록해 드릴게요.”

점원이 부서진 핸드폰에 저장돼 있던 전화번호들을 전부 되살려 줬다. 복구된 핸드폰과 함께, 서혜도 전화를 받기 전의 컨디션으로 돌아간 것처럼 밝은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거기에 경원의 번호가 없었다.

“애기야, 너 내 번호 없네?”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는데, 서혜는 새 핸드폰을 만져 보느라 무신경하게 대답한다.

“……제가 무슨 마법사예요? 알려 주신 적도 없는 걸 저장해 놓게?”

“김범수 번호는 있고 내 번호는 없잖아. 걔가 안 알려 줬어?”

“박 실장님이 절대 직접 연락하지 말고 뭐든지 범수 씨 거쳐서 말하라고 했어요.”

“박 실장 걔 원래 고지식한 거 몰라? 적당히 흘려들었어야지.”

“그러는 도련님은 제 번호 저장이라도 해 놨어요?”

매대에 팔을 기댄 채 기기 작동이 잘 되는지 확인하던 서혜가 홱 고개를 돌렸다. 안경 너머로 경원을 빤히 쳐다보며 다시 묻는다.

“해 놨어요?”

“…….”

경원이 대답을 못 했다. 그는 대신 서혜의 핸드폰을 홱 낚아채 갔다. 그러고는 자기 번호를 누른 뒤 이름까지 입력했다. 김범수보다 앞에 있어야 하니까, 그냥 윤경원은 안 되고. 1등마검사윤경원.

어거지로 입력된 유치한 이름에 서혜가 아하하, 하고 소리 내서 웃었다.

그렇게 순수하게 웃는 모습을 처음 봐서, 경원은 평범한 스무 살 여자애 같은 서혜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우는 얼굴도 쾌락에 젖은 얼굴도 아닌, 그 환한 얼굴이 심장을 뛰게 했다. 이왕이면, 앞으로 계속 보고 싶을 정도로.

***

저녁밥으로 한우까지 얻어먹은 서혜가 부른 배를 두드리며 식당을 나섰다. 나오고 보니 짧아진 해는 벌써 사라지고 풍경은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밤거리로 변해 있다. 기분 좋은 밤이었다. 번화가를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 본 적이 없었는데, 거대한 경원의 옆에서 걸으니 외출도 꽤 할 만한 것이 되었다. 적어도 호텔 방에서 따분하게 TV를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컴퓨터 밖의 세상이 즐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니 운수 좋은 날인가 보다.

“고마워요. 생일까지 다 챙겨 주고.”

“…….”

“어젯밤에도 고마웠고.”

범수가 차를 대기시켜 놓은 큰 도로로 나가는 길목이었다. 서혜가 감사 인사를 했다. 이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잘 했다. 조금 잘해 줬다고 졸졸 따라다니다 못해 말도 많아졌다. 아니, 말이야 원래도 많았지. 다만 솔직한 적이 별로 없었을 뿐.

“인정하기 싫었는데, 저보다 어른은 어른인가 봐요. 저번에 술 취해서 최악이라고 막말한 거는 취소할게요.”

서혜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파트너든 아니든, 이유가 무엇이든, 이렇게까지 잘해 주는 사람에게 모진 말을 하기는 싫었다.

“도련님이 그렇게 나쁜 사람인 것 같진 않아요!”

그리고 그거면, ‘나쁘지 않다’라는 정도면 경원에게는 충분하고도 남는 말이었다. 이내 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도련님?”

고목 같은 남자는 존재감이 너무 커서, 있다가 없으면 금방 옆이 텅 비어 버렸다. 서혜도 몇 걸음 안 가 몸을 돌렸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마주한다. 적의도 경멸도, 장난기도 웃음기도 없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윤경원의 눈이다.

“그럼, 너 이대로 계속 나랑 살래?”

왜 그런 얼굴을 하느냐 묻기도 전에, 새로운 제안이 던져졌다.

“NPC 같은 거 말고, 그냥 주서혜 해.”

“…….”

서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으로 완전히 정지해 버렸다. 번화가의 연인들이 정신없이 걸음을 옮기는 골목이었다. 두 사람은 마주 본 채로 그들만의 시간에 갇혔다.

“아무것도 안 바랄 테니까. 그냥 주서혜로 옆에 있어.”

경원은 제 감정이 영원하고 불타는 운명의 사랑이라고 감히 말하지를 못했다.

한 달. 함께 지낸 시간이 고작 그 정도도 되지 않았다. 수도 없이 몸을 섞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건져 올렸는데, 끈질긴 최석훈을 물리치고 주서혜 머릿속 한 편을 끝끝내 차지했는데, 다시 놓아주기는 싫다. 그녀가 양리 마을로 돌아가 윤경원이라는 사람은 전혀 모른다는 듯 삶을 이어 가는 게 싫다. 웃는 얼굴도, 한 번 더 보고 싶다. 아니 두 번, 세 번, 질릴 때까지.

주서혜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온종일 느낀 것은, 이 여자애에게 갖다 바친 돈이 얼마인지 가치를 저울질하는 일 따위가 아니었다. 그냥 다음에 또 데리고 나와야겠다, 같은 바보 같은 생각뿐이었다.

“나 너 좋아하나 보다.”

경원은 확인을 끝냈다.

이제 자기 마음을 확인해야 할 의무는 서혜에게로 넘어갔다. 그녀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서 물었다.

“……사귀자는 뜻이에요?”

“네가 남자친구 만들 생각 없는 거 알아. 부담 안 주기로 했으니까 당장 강요는 안 할게.”

“…….”

“천천히 생각해도 돼.”

한 달이라는 약속 따위 깨 버리고, 겁박을 하고, 혹은 넘어오기 쉬운 여자를 어르고 달래고 속여 파트너라는 편리한 관계를 유지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런데 경원은 정직하게 허락을 구하는 방법 말고는 못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최석훈은 이겨도 주서혜는 이제 못 이길 모양이었다.

“어? 너 혹시 주서혜?”

하지만 그날 밤 경원은 대답을 듣지 못했다.

서혜의 목소리 대신 난입하는 목소리는 낯선 남자의 것이었다.

“맞네! 서혜야!”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서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키 큰 전봇대 아래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세 명의 남자가 있었다. 커다랗게 써진 S대학교 실용음악과 점퍼가 눈에 띄었다. 그중 하나가 손에 든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해맑은 미소를 짓는다. 경원은 그 순간 담배에 대한 애정이 뚝 떨어졌다.

“혀, 현수야?”

“야, 널 여기서 만나네, 세상이 좁긴 한가 봐.”

현수라고 불린 남자는 마치 눈앞에 서혜밖에 없다는 듯이 허물없는 태도로 다가왔다. 거기서 고작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경원이 있었다. 결코 존재감이 약한 인물이 아닌데 굳이 못 본 척한다.

반듯하게 짧게 깎은 머리, 티끌 없이 맑고 순수한, 정말 반가움으로 가득한 태도. 서혜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다가, 결국 또 고장 났다. 그녀는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찡그린 이상한 얼굴을 지었다.

“혹시 심각한 상황인데 내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나?”

서혜가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물쩍거리자 뒤늦게 남자의 시선이 경원에게로 향했다. 경원은 일순간 남자의 눈이 자신이 걸친 옷을 스캔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너무 빨라서, 웬만하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안녕하세요! 형님!”

그리고 그의 눈알이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때 호칭은 자연스럽게 형님으로 바뀌었다.

경원도 금방 파악을 마쳤다. 주서혜의 사회성이 마이너스를 향해 극단으로 치우쳤다면 이놈은 그 반대쪽이다. 바르고 건실하게 생겨서는 붙임성까지 좋으니 여자에게 꽤나 인기 많을 스타일이었다.

“예의가 바르구나. 누구니? 서혜 친구?”

경원이 속마음을 숨긴 채 나긋하게 물었다. 누가 보아도 신사답게.

“아, 저 서혜랑 같이 도화예고 다녔던 나현수라고 합니다!”

활기찬 대답이 돌아온다. 흠칫,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서혜가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재빨리 현수의 옷자락을 잡았다. 말하지 마, 대충 그런 사인이었는데 이미 늦었다.

“아- 그래? 도화예고를 나왔어?”

떡밥을 놓칠 리 없는 경원이 성큼 한 발자국 발을 내디뎠다. 현수 역시 서혜가 좋아하는 튼튼한 몸을 가졌지만 그래 봤자 비교할 수준이 아니다. 불쑥 가까워진 위압감에 현수는 서혜의 간절한 표정을 채 발견하지 못하고 시선을 경원에게로 빼앗겼다.

“많이 친했나 봐?”

그는 경원의 친절한 표정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막 그렇게 친했던 건 아닌데, 어떻게 사는지 소식이 없어서 같은 반 애들끼리 걱정이 많았죠. 전화번호도 바꾸고 완전히 잠수 타서, 갑자기 연락도 안 됐으니까요.”

“…….”

“진짜 그냥 친구입니다!”

도화예고라면 국내에서 견줄 곳이 없는 명문예고였다.

어쩐지 노래를 좀 하는 것 같더라니.

하지만 왜 전도유망한 명문 학교 학생이었던 주서혜가 세상과 단절돼 여기까지 흘러들어왔을까. 전혀 상상도 못 했는데.

NPC나 하라고, 즐기자고 말한 전적으로 인해 자기는 함부로 물어볼 수조차 없었는데.

경원은 서혜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남자의 등장만으로도 상당히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입었다.

뭔데 아는 척이냐고, 네놈이 날고 기어도 주서혜의 처음을 가져간 건 나라고, 한껏 유치해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야 할 지경이었다.

“현수야! 오빠랑 나랑 이만 가 봐야 될 거 같아.”

그리고 그보다 더 유치한 것은, 서혜가 말하는 오빠라는 한마디에 그런 마음도 사르르 녹아버렸다는 것이었다. 서혜의 입장에서는 아저씨나 도련님이라고 불렀다가 엄한 오해를 사기 십상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텐데도 말이다.

“야, 아무튼 다행이다, 주서혜. 너 그때…… 어떻게 됐을까 봐 걱정했는데.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더니 지금 보니까 완전 잘 살고 있었네.”

현수가 아쉬운 표정으로 몸을 돌리더니 서혜의 손을 덥석 잡는다. 헤어졌던 가족이라도 만난 듯 정말로 걱정하는 듯한 뉘앙스의 대화. 불청객은 저쪽인데, 이상하게 경원이 끼어들기가 어려워진다.

“잘 살고 있는 거지?”

“그, 그럼. 나 입은 거 안 보이니? 직장인 일 년 치 연봉을 두르고 다니잖아. 남자 하나 잘 만나서 완전 잘 살지. 하하하하-.”

고장 난 서혜가 정신 나간 소리를 늘어놓았다. 밝디 밝은 현수도 함께 웃기 시작했다.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웃음은 정신 나간 소리도 금방 재미있는 농담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경원의 입꼬리를 타고 보조개가 깊어진다.

“혹시 뭐 어려운 일 있으면 S대학교 찾아와도 돼.”

현수에게서는 끝까지 여지를 남기고 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서혜는 얼버무리며 대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갈 것 같았으니까.

“아, 알겠어. 기억할 테니까 얼른 가 봐.”

그리고 아쉬운 듯 현수가 자리를 비키려는 찰나였다. 큼직한 손이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왜 그냥 가.”

“…….”

“둘이 친구라며? 이참에 전화번호도 주고 가. 안 그래도 우리 서혜가 친구가 없어서 걱정인데.”

경원이 갑자기 생글생글 웃으며 친목을 주선한다. 서혜의 등줄기를 타고 뻘뻘 땀이 흘렀다. 윤경원이 또 무슨 미친 짓을 하려는 건가 무섭다. 게다가 눈치 없는 동창은 신이 나서 기다렸다는 듯 자기 핸드폰까지 내밀었다.

“그래도 됩니까?! 서혜 남자친구신 줄 알았는데요.”

“너희 둘은 그냥 친구인데 뭐 어때. 뭐 해, 서혜야.”

커다란 남자 두 명에게서 쏟아지는 무언의 압박에 서혜가 결국 자기 핸드폰에 현수가 불러 주는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친구 같은 거 그다지 원치 않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뭘까. 경원의 생각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놈 통해서 아는 사람 있으면 다시 연락도 하고. 친구들도 좀 만나고 살아. 난 걱정 안 한다.”

함께 호텔로 돌아왔을 때에도, 자비로운 언행에 서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윤경원이라는 남자랑 전혀 어울리지가 않아서.

“옷 벗어. 같이 씻게.”

이윽고 어영부영 함께 욕조까지 들어가고 나서도, 그녀는 경원의 태도가 왜 이렇게 이상하게 느껴지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어차피 너 이제 나 아니면 느끼지도 못하는데.”

“…….”

“딴 놈이랑 붙어먹으래도 안 될걸? 여자친구 행세는 못 해도 평생 내 파트너로 살아야 돼. 이미 늦었어.”

원인을 찾은 것은 그가 자기를 무릎에 앉혀 놓고 가슴을 주물럭거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저급한 건 둘째 치더라도, 대답을 기다린다고 해 놓고 이미 결정을 내린 사람처럼 굴고 있는 게 아닌가.

“자, 잠깐! 이건 짚고 넘어가야겠어요! 저는 아직 여기 계속 살겠다고 대답 안 했어요, 너무 놀라서, 제대로 생각할 겨를도 없었단 말이에요. 계약 기간 끝나면 바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요!”

“시끄러워. 나한테 구멍 크기 맞췄으면 이제 내가 서방님이지.”

“심술부리지 마요!”

“엉덩이나 내밀어.”

“꺅!”

그러나 너무 늦은 깨달음이라서, 결국 새벽 내내 그가 원하는 애정 어린 말을 해 주며 온 집 안을 굴러다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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