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고상하고 귀족적인 문화를 좋아하는 윤해산과 그 아들들은 창립기념일도 참으로 저들답게 보냈다. 라크뷰 심포니의 피트니스 클럽 회원권은 까다로운 입회조건과 더불어 입회비만 수억 원을 호가하고 있었음에도 수요자들의 줄이 끊이질 않았으며, 호텔에선 매년 가을 VIP들을 위한 대형 라운지와 풀장에서 호화스러운 파티를 개최해 진귀한 음식은 물론이고 쉽게 구할 수 없는 와인과 기념품을 공유했다. 미술품과 골동품 경매에서 모인 수익은 거액의 기부금이 되어 사람들의 찬사까지 받았다.
상류층으로 보장된 네트워크. 재계에, 정계에, 영향력 있는 유명 인사들까지 서로의 니즈에 맞는 새로운 연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참석하는 자리. 라크뷰는 자신들이 그 중심에 있다는 기분에 심취하기 위해 하룻밤 파티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리고 막내아들 윤경원은, 집안에서 열심히 준비한 자선 파티를 방해하고 싶어 누구보다 몸이 근질거리는 사람이었다.
“서혜야, 너도 갈래? 직원 명단에 이름 올려 줄 테니까 연예인들 구경이라도 해. 너 토이도이 좋아한다며.”
비스듬히 기운 높은 콧대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경원의 시선이 내내 아래쪽으로 꽂혀 있었다. 그는 온몸이 희열로 뜨거운 와중에도 상냥하고 부드럽게 물었다. 정말 안 가? 이미 서혜는 안 가겠다고 못 박아 말했지만, 권유는 몇 번 더 이어졌다.
“사람 많은 데서 일하는 거 자신 없다니까요.”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서혜가 그만 물어보라는 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연예인이나 파티 따위가 아니다.
작은 양손이 딱딱하게 일어선 성기를 다소곳하게 붙잡고 있었다. 어떻게 만져 보아도 뜨겁고 징그러운 물건이지만 두려움과 함께 기대감을 밀려들게 하는 것도 분명했다.
일요일이 되기까지 며칠간 경원은 스위트룸에 머물렀는데, 당연히 그 시간을 허공에 내다 버린 것은 아니었다. 엄청난 애정 공세가 쏟아지면서, 쾌락에 흠뻑 젖은 서혜는 게임에 손도 대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그에게 빠져 있었다.
정장을 입고 외출 준비를 하던 사람을 굳이 침대로 끌고 가 구음을 시작하는 것도, 이전에는 도통 찾아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드레스라도 입혀서 같이 데려가면 좋겠는데 나도 초대받은 사람이 아니라서.”
경원이 익숙하게 서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연한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서혜가 혀끝을 내밀어 귀두 끝을 문질렀다. 선홍색 혀가 갈라진 틈새에 닿는 순간 머리에 얹어진 손에 바짝 힘이 붙는다. 머리가 조금 앞으로 당겨진다.
“혼자 두기 걱정돼서 그래.”
축축한 입술이 선단을 머금었다. 춥, 춥, 소리를 내며 고여 있는 물을 빨아 낸 여자는 자기가 어떤 음란한 짓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듯 태평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왜요? 저 이제 괜찮아요. 아직도 제가 죽을 것 같으세요?”
“…….”
“아니면, 계약 기간도 안 채우고서 도망이라도 갈까 봐 그래요?”
서혜가 미끄러운 기둥을 뺨에 비벼 대며 눈을 맞춰 왔다. 뜨거운 숨결이 예민한 표피 위에 머무르는 것이 기껍다. 경원은 당장 예쁜 입술 사이로 퍽퍽 좆질을 해대고 싶은 욕구를 힘들게 내리눌렀다.
언젠가 한 번은 너무 긴 성기가 목까지 닿았다가 서혜가 숨넘어갈 듯 울었던 적이 있었다. 한참을 안고서 진정시켰지만, 그 뒤로도 유달리 무서워해서 스스로 핥고 삼키는 것이 아니면 입을 쓸 일이 없었다.
“그런데 도련님은 왜 초대를 못 받았어요? 회사 창립기념일이라면서요.”
“내가 와서 사고 칠 걸 아는 거지. 나야 우리 아버지 귀찮게 하는 거면 뭐든지 하니까.”
“……회장님이 정말로 무슨 나쁜 일을 하긴 했나 봐요. 복수라도 하시려는 것 같네요.”
서혜는 며칠 사이 NPC답지 않은 질문들도 곧잘 했다. 정해 놓았던 선은 진작에 넘어가고 있다. 사랑까지는 아니라 해도 적어도 한결 편안함에 가까워진 것처럼은 보였다. 털 세운 고슴도치를 처음 데려왔을 때에 비한다면 모든 면에서.
경원은 분명 눈앞의 여자 하나를 다른 사람처럼 바꿔 놓고 있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중 자기 입맛대로 바꾼 부분도 많다. 서혜의 머리통을 붙들고 있던 사내의 손이 귓가로 내려갔다. 붉게 열이 오른 귀 뒤쪽으로 땀에 젖은 머리를 넘겨 주자 서혜가 움찔 몸을 떨었다. 어디 하나 경원에 의해 개발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내가 복수하는 것처럼 보여?”
경원이 나긋하게 반문했다. 서혜는 귀를 지분거리는 손길에 눈을 반쯤 감고서 경원의 이마가 찢어지던 날 그의 모습을 회상해 봤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느끼는 대로 대답했다.
“……그냥 어린애 투정 같았어요.”
“…….”
“옆에 붙어서 사고치고 귀찮게 하는 거……그거 그냥 어린애잖아요.”
“……물어. 입 안에 싸게.”
그러자 경원은 찔리기라도 했는지 아예 성기로 입을 막아 버렸다.
“아으…….”
이윽고 찢어질 듯 벌어진 입술 안쪽으로 비릿한 정액이 꿀렁 차오르기 시작한다. 서혜는 혀 위로 얽혀드는 끈적한 감각이 생각보다 불쾌해 머리를 뒤로 빼고 도망쳤다. 채 담기지 못한 사정액들이 머리카락과 뺨에도 튄다. 웩, 엉덩이를 찧고 뒤로 넘어진 서혜가 바닥을 짚었다. 뱉는 듯하기도 잠시, 기어이 경원의 것을 전부 삼켰다.
“……제가 말실수했어요?”
이렇게 마구잡이로 입에 사정한 적이 별로 없다. 서혜는 눈물 고인 얼굴을 치켜올리고서 물었다.
“아니. 좋아서 그러지.”
그러자 가뿐하게 일어난 경원은 서혜를 일으켜 세우고 치마를 들쳤다. 그의 눈가가 길게 접혀 들어 갔다.
“내 좆대가리 말고 속에 든 양아치 같은 남자한테도 관심을 좀 가져 주나 해서.”
“……딱히 그런 게 아니라…… 읏…….”
이내 커다란 손이 다리 사이를 쓱쓱 매만져 속옷이 젖어 있는 것을 확인한다. 그의 닫히지 않은 바지 틈으로도, 며칠 사이 수십 번도 더 쓴 생체 딜도가 빳빳하게 살아 있었다.
서혜는 매번 부끄러운 표정을 못 숨기고 입술을 물고 버티기 바쁘다. 그러면서도 아침에 바빠 보이는 남자를 기어이 붙잡은 서혜였다. 그녀는 그가 기분 좋게 해 줄 일들을 기대하면서 수줍게 재잘거렸다.
“……저도 전화번호 못 지우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에요. 가족들, 밉고 싫은데 쉽게 못 놓고 질척거리게 되는 거요……. 정말 복수하고 싶으셨으면 다른 방법도 있지 않았을까 해서요.”
“…….”
“……사정은 잘 모르지만 저는 질척거리는 게 나쁘다고 생각 안 해요. 그래도 괜히 또 다쳐 오지는 마세요. 허리라도 다치면 큰일이니까…….”
경원이 아무 말 없이 손을 당겨 제 성기를 문지르게 했다. 서혜는 그러는 동안 누군가 치마를 들치고 그 속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벌써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경원이 제 젖은 속옷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생각하니 또다시 배 속이 간질거린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대로 성실하게 기둥을 감싸 문지르기를 한참, 경원이 검은 레이스 팬티를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몸을 접붙여 그 안으로 정액을 듬뿍 털어 넣었고, 저 혼자 바지춤을 정리해 버렸다.
“……끝이에요?”
미끄러운 정액들이 음모 위를 잔뜩 더럽히다가 가운데 부근까지 줄줄 흘러내렸다. 입구에 칠해지고 남은 건 팬티 안에 고이다 못해 밖으로 뚝뚝 새어 나간다.
“저는요?”
“갈아입지 말고 있어. 밤에 와서 확인할 테니까.”
그리고 당혹스러운 듯 위를 올려다보는 서혜를 향해 돌아오는 대답은 짓궂기 그지없었다.
“착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밤새 펑펑 울 때까지 해 줄게.”
정말 질 나쁜 제안이었다. 그런데도 서혜는 결국 고개를 끄덕여 버리고 말았다.
경원의 눈에, 휘두르기에는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운 여자애다. 그런데도 혼자 두고 외출하는 것이 묘하게 불안한 아침이었다. 몸도 마음도 넘어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상했다. 사람을 노심초사하게 만든다.
이유가 뭘까? 윈드 스토리가 아니라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돌아가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기껏 내려준 자비를 무시하고 떠날 거면 떠나라지, 주서혜. 돌아가서 얼마나 혼자 잘 사는지 봐 줄 테니까. 내 옆에서 놀고먹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될걸. 그때 가서 다시 받아 달라고 울어 봤자.
울어 봤자…….
뭐, 울면 다시 받아 주겠지만.
“멀쩡하게, 몸 관리 잘 하고 있는 거다?”
“……제가 무슨 불발탄이에요? 가만히 있다가 터져 버리기라도 하게요? 제발 걱정 말고 일찍 오기나 하세요.”
그는 서혜가 불만족한 상태 때문에라도 자기를 기다리게 만들고 나서야 발을 뗐다. 어찌 됐든 제 몸은 좋아하니까. 그것 때문이라도 그녀가 계속 이곳에 남아 있을 것 같았다.
***
서혜가 대답을 미루고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 결정을 내리고 나면 다시는 선택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지레 겁을 먹은 것이었다.
경원은 절대 무리해서 애인의 의무를 해 달라는 뜻이 아니며, 내킬 때면 언제든 마음대로 떠나도 화내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피해를 주거나 상처 줄 일도 만들지 않을 테니 너는 호의를 받기만 하다가 가도 좋다고. 덤덤한 말투는 간곡함과 거리가 멀었으나 내용은 그렇게 들렸다.
경원을 제 발밑에서 굴리며 융숭한 대접을 받는 삶. 게다가 그가 마음을 나누자고 강요조차 하지 않는다고 하니, 부채감 같은 것은 내다 버리고 그 시간을 즐겨도 괜찮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당장 부담스러운 것은 경원이 아니었다.
이대로 계속 같이 살게 되면 점점 그에게 빠져 버리게 될 자기 자신이 문제였지.
확실하다. 새카만 눈에 주서혜는 얼마 안 가 완전히 묶여 버릴 것이다. 지금도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반쯤은 넘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최악의 원수에서, 쾌락을 보장해 주는 사람. 같이 있으면 지루함을 덜어 주는 사람으로, 나쁘지만은 않은 사람으로 그리고 조금은 편한 사람으로. 파랑으로 물든 가을 하늘과 함께 감정의 색이 짙어진다.
그러니까 그에게서 벗어나려면 지금 거절해야 했다. 나흘 뒤 계약이 끝나기 전까지. 무능하고 한심한 주서혜가 사랑에 빠지기 전에.
[서혜야. 나야, 현수. 전화 왜 안 받아?]
[내가 도와준다니까. 도연희 걔, 너 그렇게 괴롭혀놓고서 사랑받고 잘 사는 거 두고 볼 거야?]
[나 녹음본도 가지고 있고, 아는 기자님들도 있고. 너만 마음 단단히 먹고 용기내면 돼. 연예인들은 이미지가 생명이잖아. 끌어내릴 수 있어. 아니면, 또 전화번호 바꾸고 숨으려고? 돈 많은 남자 만나서, 돈으로 그 상처가 다 치유가 돼? 그게 진짜 잘 사는 거라고 생각해?]
화면에 찍힌 문자메시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서혜가 핸드폰을 소파 위로 홱 내던져 버렸다.
하아-. 입가에서 한숨이 샜다. 도움을 주려는 친구의 손조차 맞잡지 못하는 겁쟁이 주서혜. 정말 무능한 여자다.
현수는 그날 이후로 계속해서 연락을 시도해 오고 있었다. 학교를 자퇴하게 만든 나쁜 이들을 같이 물리치자고.
약한 사람은 바짝 엎드려 살아야 한다고 배운 서혜에게는 마치 절대 물리치지 못할 보스 몬스터를 함께 잡으러 가자는 치기로 느껴졌다. 그렇다고 진심 어린 걱정을 매몰차게 내치지도 못해서, 서혜는 며칠째 연락을 회피 중이었다.
털썩, 그녀는 커다란 소파에 머리를 붙이고 누웠다. 마음이 피곤했다. 역시 전화번호 같은 거 교환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밖을 나돌아다니지 말았어야 했다. 옛날이었으면 벌써 윈드 스토리로 도망가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경원이 제 어두컴컴한 과거를 알게 될까 봐 괜한 걱정을 하기에 바쁘니 얼마나 심각한가. 결말이 뻔히 보이는 대책 없는 감정이 아닐 수 없었다.
상대방이 재벌 집 도련님이든 평범한 샐러리맨이든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제대로 된 연인이 되어 주지도, 그렇다고 생채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떠나지도 못할 터였다. 최악의 상황에는, 그에게 정말 나쁜 기억만 주게 될지도 몰랐다. 그만큼 자신은 정상인 상태가 아니었다.
‘너 목매고 죽을 것 같더라.’
게다가 경원은 이미 상처가 있는 사람 같았다. 얄밉기는 했지만, 굳이 저까지 나서서 찔린 곳을 다시 찌를 수야 없다.
그래서 나사 빠진 서혜는 발을 딛고 싶어도 디딜 수가 없었다.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경원이 불안해한다는 걸 알아도 말이다.
“어머, 서혜야. 도련님은 라운지 내려가셨다며. 넌 여기서 뭐 해? 오늘 행사 안 따라갔어?”
늦은 오후, 거실에서 뒹굴거리는 서혜를 발견한 선 여사가 깜짝 놀라 물었다. 서혜는 자기 집인 양 소파에 드러누워 음악방송을 틀어 놓고 있었다. 심란한 서혜의 마음과 비싼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버린 몸뚱이는 별개의 존재였다. 불편하게 앉아 있는다고 해서 고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녀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지, 뒤늦게 사람을 발견하고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는 모습에 위기감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였다.
“세상에, 곰탱이가 따로 없네!”
“네?”
너무 게을러 보였나, 평소답지 않은 선 여사의 반응에 서혜가 당황한 듯 제자리에 멈춰 선다.
“죄, 죄송해요. 뭐 도와드릴까요?”
자기가 뭔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는지 금방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하는 여자애.
선 여사는 절로 이마를 짚었다.
한 달간 가까이서 지켜봐 오면서 아둔한 애라는 것은 알고도 남음이었다. 실수도 잦고 어리숙하고.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혹시 막내 도련님과 일반적인 연인 사이가 아니라 무슨 약점이라도 잡혀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로 도무지 야무지지 못한 애.
그래도 자기 것은 챙길 줄 알아야 되는데, 상류층들의 삶을 수십 년간 봐 왔던 선 여사의 눈에는 고생길이 훤해 보였다. 저래서는 여기서 오래 살아남기가 힘들다.
“파티장에 중매쟁이들 엄청 돌아다니는데 몰랐어? 못 가게 하든가 같이 가든가 했어야지.”
21세기에도 중매쟁이가 있는 건가? 말뜻을 단번에 알아듣지 못한 서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혜를 바라보는 선 여사의 시선이 씁쓸함으로 가득하다.
사실 대학 캠퍼스에서 잘생긴 학생회장을 짝사랑하고 있는 쪽이 어울리지, 그런 곳에 관심을 가지기에는 이른 나이였다.
“라크뷰랑 사돈 맺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잘 나가는 결정사 대표들도 기를 쓰고 꼬실 텐데 태평하기는…….”
“결정사면…… 결혼정보회사요?”
그래도 알 것은 알아야 했다. 그녀는 서혜와 경원이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알 도리가 없었으니, 혹여라도 서혜가 너무 순진한 나머지 부잣집 도련님에게 이용만 당하다 버려질까 온갖 상상을 다 하게 되는 것이었다.
“돈 많고 인맥 좋은 사람들끼리 같이 친목 쌓고 놀다가 자연스럽게 끌어들인단 말이야. 어찌나 노련한지 저번에 어떤 사업가는 5년 사귄 약혼녀도 버리고 넘어가더라니까. 도련님 단속 안 해?”
“……그런 얘기는 없었는데요. 관심도 없어 보였고…….”
“그거야, 본인은 당연히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법이지만……중매쟁이들 하는 일이 부풀리고 바람 넣어서 없던 마음도 생기게 하는 거란다. 막상 술 들어가고 화려한 여자들이 눈앞에 왔다 갔다 하면 자기도 모르게 넘어갈지도 모르잖니.”
아, 그런 거였구나. 서혜가 그제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찰싹 붙어서 방해해야지.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 줄 알아? 안 그래도, 서혜 네가 불리할 거 아니야. 세상 잘 살아가려면 네 권리도 챙겨. 여우같이 정신 바짝 차려도 모자라다?”
하지만. 경원이 결혼을 한다고 해서 막을 생각도 딱히 없었다.
불리한 건 둘째 치고 자신이 무슨 권리로 방해하겠는가. 여자친구도 아니고…….
“……인물이 워낙 좋으니까 인기도 많아서, 그냥 어떻게든 엮여 보려는 사람들이 드글드글해. 혹시 너무 사랑해서 행복을 기원해 준다거나, 그런 속 터지는 소리를 할 건 아니지?”
“…….”
선 여사는 가만히 있는 서혜가 답답하다는 듯이 부엌으로 가 냉수부터 찾았다. 오히려 서혜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경원을 사랑한다고 착각해 야단법석을 떠는 여사님이 유난스럽다. 그렇다고 부모뻘인 아주머니한테 두 사람이 그저 몸만 섞는 사이라고 제 입으로 해명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가기 싫으면 말고, 나도 오지랖 부리기 싫은데, 얼굴 보다 보니 딸 같아서 그래, 딸 같아서.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서혜 네가 여기 있는 게 나도 편하고. 넌 갑질이 뭔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혹시라도 다른 여자 들어오면 얼마나 까다롭게 굴지 안 봐도 비디오잖니.”
“…….”
“오징어 사 온 거나 같이 먹자.”
서혜는 조심조심 발을 옮겼다. 선 여사가 가져온 비닐봉투를 풀고 포장된 음식들을 꺼냈다. 게임에 잘 손대지 않게 되면서부터 고용주 몰래 간식을 먹으며 그녀와 수다를 떠는 것이 그나마 서혜에게 일과라고 할 만한 것이 되어 있었다. 일회용 젓가락을 뜯으며 자리에 앉는다. 애써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 보지만, 왠지 자기가 정말 무신경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몰리고 있다.
다른 여자랑 하룻밤을 보내……?
따뜻한 숙회 한 점을 집어먹으면서, 서혜는 들은 말들을 조금씩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경원도 그랬지.
달려드는 사람이 많았다고.
그녀는 웬 아름다운 여자들이 경원을 노리는 장면을 머릿속에서 펼쳐 보았다. 확실히 경원의 외양이든 혹은 집안이든, 달려들 이유는 많을 터였다.
파티장에서 경원은 왕자님이 되어 있을까?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경원을 자빠뜨릴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연예인들도 많이 온다는 거 보면…… 분명 어마어마하게 아름다운 여자들도 있겠지?
클럽이나 유흥주점에 가는 것도 아니고, 고상한 자선 파티에서 무슨 일이 있으리라고는 차마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게다가 아마도 경원은 그런 유혹이 있다 해도 거절할 것이다. 아무나하고 하기 싫어서 28년을 참았다는 걸 보면…….
하지만…… 선 여사님 말대로 술이 들어간다면 또 모르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서혜 역시 경원이 술에 취한 날 유혹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저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만약 사람 다루는 데에 고수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작정하고 접근하면 성공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그래서 경원이 미모의 여성과 뒤엉키게 된다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게 들리지도 않았다.
그때가 되어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우물우물, 음식을 씹는 턱에 힘이 들어갔다.
윤경원이 자기가 아니라 다른 여자의 몸을 쓰다듬고, 눈을 맞추고, 그 여자를 기쁘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아래를 세우고 망측하게 허리를 흔든다고?
쾌락에 먼 눈으로 예쁘다 귀엽다 칭찬도 하겠지? 뻘뻘 땀도 흘리고. 달뜬 숨을 내쉬고, 체온을 나누고. 설마, 키스도 하려나?
그 이름 모를 여자는 경원을 구석구석 만져 대고 그의 몸을 꽉 끌어안고…… 자기가 느꼈던 그 황홀한 감정들을 똑같이 겪을 것이다. 그리고 경원이 자기 것이 됐다고 착각도 할지 몰랐다.
“아니요…… 안 돼요. 제 건데…….”
몹쓸 상상에 빠져 있던 서혜가 저도 모르게 낮게 웅얼거렸다. 표정은 어둡고 음울했다. 마지막 오징어 한 조각을 집어 들고 있던 선 여사가 먹으려던 것을 멈추었다.
배가 많이 고팠나? 그녀는 마지막 점을 서혜의 앞 접시 위로 놓아 주었다.
“……그래, 너 어서 먹어.”
“아니, 그게 아니고요…….”
오징어 말고 윤경원의 몸이요!
“아무래도 라운지에 가 봐야겠어요!”
서혜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남녀 간 예의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였지만, 설령 결혼을 할지언정 그건 자기랑 완전히 관계를 정리한 뒤에 해야 하는 것이 분명했다. 서혜는 상상만으로도 온갖 추잡한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처럼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밤새 엉엉 울 때까지 해 준다고 큰소리 뻥뻥 치고 나가 놓고서는, 감히 다른 여자와 부비적거리다 온 몸뚱이로 태연하게 다시 자기와 뒹군다니, 아무리 마음을 배제한 사이라도 용납이 안 되는 게 당연지사 아닌가!
서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경원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었다. 파티장에 아무나 들여보내 주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였고, 지금이라도 가겠다고 말했을 때 그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으니까.
“왜 안 받아!”
하지만 너무 늦은 걸까, 연락이 전혀 닿지 않았다. 짧아진 해가 저물고 있었다. 초조한 서혜는 방향을 바꾸어 범수에게 전화했다. 범수는 서혜에게 문제가 생긴 것을 처리하지 않았다가는 경원에게 뼈와 살이 분리될 처지에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전화 받는 속도가 유달리 빨랐다.
-도련님 바꿔 달라고? 나도 지금 경비들이랑 라운지 홀 발코니석에서 계속 상황 보고 중이라서. 그리고…… 지금 엄청 바쁘셔.
여기저기 시비를 걸고 다니느라 바쁘다는 뜻이었지만 서혜에게는 완전히 곡해되어 들렸다. 바쁘다는 말에 몹쓸 상상은 더더욱 부풀려지고, 마치 현실처럼 가까워진다.
“파티인가 뭔가 저도 가고 싶어요! 저도 어쨌든 직원인데 어떻게 들어갈 방법 없어요?”
-갑자기 왜 오고 싶다는 거야?
“토이도이가 보고 싶어서 그래요. 빨리요!”
서혜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아니 전투적으로 뭔가를 요구한 적은 처음이었다. 필요한 생활용품 하나 사 달라고 하는 데에도 더듬더듬 눈치를 보기 일쑤였으니까. 그렇다 보니 범수는 그녀가 단순히 연예인이나 구경하기 위해 그럴 거라 안일하게 넘길 수가 없었다. 이 기운은, 사고 칠 확률 매우 높음의 기운이었다.
-서혜야……. 오늘 도련님 상태도 안 좋고…… 박 실장님한테 직원 명단 올려 달라고 요청해야 돼서 내가 하기는 좀 곤란한데. 그냥 거기 있으면 안 되겠니?
당연하게도 수화기 너머에서 완곡한 거절이 이어졌다. 그리고 서혜는 지지 않았다.
“안 도와주시면 저번에 저한테 문자하신 거 다 이를 거예요. 범수 씨가 도련님은 위험한 사람이니까 절대 신뢰하지 말고 피임에 두 번, 세 번 신경 쓰라고 했다는 거랑 기회 되면 도망치라고 했다는 것도 전부 다요. 무사하실 수 있겠어요?”
-서혜, 너……. 그런 졸렬한 사람인 줄 몰랐는데…….
“저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요!”
경원이 뭐라고, 게임이 아닌 일에도 부쩍 용기가 샘솟는 서혜였다.
***
VIP 라운지는 이미 계획된 일정이 끝나고 뒤풀이로 달아올라 있었다. 고상한 공식 행사 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3층 규모의 높은 천장에 달려 있던 크리스털 샹들리에는 깨끗한 백색에서 보랏빛으로 탈바꿈해 맑은 북극 밤하늘 아래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사람들의 목소리도 점차 재즈 음악과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에 가려졌다. 어둑한 조명 아래, 이브닝 드레스와 장신구로 치장한 화려한 사람들을 뚫고 다니며 경원을 찾아내는 일이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윤 회장이 라운지를 돌며 게스트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눈을 피해 목표물을 찾아가는 일까지 마치 스텔스 게임 속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커다란 덩치가 그래 봤자 어딜 숨겠는가. 서혜는 얼마 안 가 시선을 절로 잡아끄는 남자 하나를 발견했다. 단지, 다가가지 못하고 주위를 빙빙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저 사람이 윤 회장 댁 막내아들이에요. 아까 경매에서 스페셜리스트한테 장물 아니냐고 조목조목 따지는 거 봤어요? 태선전자 사모님이 출품한 고서였는데, 윤 회장이랑 친하게 지내던 집안이 그렇게 모욕당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패들도 몇 개 부숴 버리고, 섬뜩해서 원. 장난 아니던데.”
“집안에도 흉흉한 얘기가 많잖아요. 언론 보도한다고 난리를 치니까 매번 오기는 하는데. 사실 라크뷰는 예양 물산 쪽이랑 더 어울리지 않나 싶어요. 소문도 그렇고.”
“아, 그 월초에 밤마다 모여서 약하다 걸린 애들? 거기 같이 있었는데 운 좋게 안 걸렸다며?”
“그렇대요. 게다가 듣기로는 밤마다 깡패 새끼들이랑 같이 어울려 다닌다고……”
아닌데…… 이번 달 내내 꼬박꼬박 일찍 귀가했는데…… 새벽마다 나랑 놀았는데…….
주변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서혜의 입매가 샐쭉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인상이 썩 좋지 않은 경원이었다. 자기도 처음 보았을 때 조직폭력배 출신일 거라고 지레짐작해 버릴 정도였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행실이 조금 치사하고 유치할 뿐이거늘 헛소문이 심하다.
“야, 거기. 가서 술 한 병 가져와.”
“네!”
서혜가 테이블 사이를 거닐며 마른 침을 삼켰다. 역대 최대 규모라는 이번 자선 파티에는 손님이 많은 만큼 직원도 많았다. 덕분에 서툰 직원 하나가 끼어 있는 것쯤은 무난하게 넘어가고 있었다. 인산인해인 공간에서 직원 행세를 잘 할 수 있을까 싶었던 걱정이 무색하게도 화려하게 차려입은 유명 인사들 사이에서 서혜는 눈에 띌 일이 없다. NPC라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지, 사람들은 누가 옆에서 테이블을 닦고 있든 서빙을 하고 있든 신경도 안 쓰고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데 여념이 없었으며, 왠지 염탐꾼이 된 듯한 기분까지 들게 했다. 자기는 그저 눈과 귀를 바짝 연 채로 주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하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자식 교육만 봐도 어떤 집안인지 안다는데…….”
“그래도 윤주원 사장이 회원 관리 신경 쓰잖아. 미꾸라지 하나쯤 무시하자고. 얼굴 비추다 보면 이쁜이 하나 낚을지 어떻게 알겠어.”
“저거 분명 여자관계도 엄청 복잡할 거야.”
“일부러 저런다는 얘기가 있어요. 윤 회장님 사모님이 옛날에 돌아가셨잖아요. 그때 이후로 이상해졌다고요.”
“지병으로 가신 거 아니야? 그게 왜?”
“사모님이 알코올 중독이었는데…… 그걸 아버지 탓을 하나 보더라고요.”
덕분에 서혜는 경원에 대한 험담을, 인터넷 뉴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적잖이 자세히 듣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한낱 소문으로도 아는 것들을 자신은 처음 듣는다. 몸을 섞은 것에 비해 대화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관계를 원했었다. 그런데 남들 입으로 알게 되는 것이 썩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파티 질이 낮아진다고, 미꾸라지 하나가 들어와서 물을 흐린다고. 경원의 이미지는 정말이지 안 좋았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니었다. 아침에도 파티에서 사고를 친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더니만 정말 여기저기 난봉꾼 행세를 하고 다니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 쳐도, 파티는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으며 본인 평판만 떨어진 게 아닌가 싶지만 말이다. 폭탄이라도 투척해서 파티를 엉망으로 만든 것도 아니었고, 라운지의 분위기는 하염없이 평화로웠다. 그저 사람들의 대화 주제가 건전한 사회 문제가 아닌 윤씨 집안에 대한 걱정과 가십거리로 꽉 채워져 있을 뿐이었다.
그게 윤경원이라는 남자가 원하는 결과일까? 자기 자신을 못나고 비열한 인간으로 포장해 버리는 것이? 복수라고 하기보다는 자기 학대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었다.
서혜는 수시로 고개를 돌려 경원의 행방을 살폈다. 그는 절대 파티를 쉽게 떠날 생각이 없는 듯 스탠딩 바에 기대 바텐더가 즉석에서 만들어 준 칵테일 따위를 마시고 있었다. 눈총을 받든지 말든지 보란 듯이 자리를 지키는 게 뻔뻔하기로는 우주최강의 칭호가 맞는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그럼에도 경원의 주위에는 늘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따가운 시선만큼이나 가장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 역시도 경원이었다.
라운지 중앙의 몽환적인 분수대가 형형색색으로 빛나며 조각 같은 남자를 비추었다. 조금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단정한 옆선을 타고 흘러내린다. 위험한 기운을 내포하고 있는 새침한 미소와 함께 후광이 일었다. 단정한 정장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그 야성미에 홀려 버리는 것이 서혜뿐일 리가 없었다. 몇몇 셀럽들이 경원과 인사를 나누고 지나가기 무섭게,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들이 몰려들어 그를 둘러쌌다.
“여기 여자애들 절반은 너 보려고 오는 거 알아? 평소에 기부도 안 하는 애들이 웃겨.”
“우리 아빠 리조트 같이 갈래? 이번에 미국에 하버비치 근처에도 하나 만드셨는데.”
“약혼 얘기 오가는 건 없어?”
“나는 엄마가 어디 웨딩컨벤션 대표랑 선보라고 해서 나갔다가 내 취향 아니라서 도망쳤잖아. 근데 자꾸 궁합이 너무 좋다고 밀어붙여서 곤란해.”
“우리 집도 그래. 요즘 세상에 간택도 아니고 사주단자가 웬 말이야. 경원이 생각은 어때? 그런 거 중요하게 봐?”
좋은 집안에서 자라 서로 친하기까지 해 보이는 여자들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순식간에 즐거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위기감에 휩싸인 서혜는 경원을 둘러싼 한 무리의 여자들을 힘껏 째려보았다. 아름답고 활기차고. 돈도 많아 보이고. 도무지 자기가 이길 수 있는 상대들도 아닌 것 같아 씁쓸하다.
여기서 여자들이랑 노닥거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사실은 그저 여자들이랑 즐기려고 온 거였어?! 서혜는 화사한 얼굴로 사람들과 어울리고 웃기 바쁜 경원을 뚫어져라 지켜보며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동시에 그가 누군가와 팔짱을 끼고 으슥한 곳으로 사라져 버린다면 그때는 저 역시 당장 짐을 싸서 도망가 버릴 거라고 다짐했다.
다른 여자와 대화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기분이 언짢다니. 그런데도 일개 직원에 불과한 서혜는 다가갈 명분조차 못 찾고 있었다. 이쯤 되니 저놈의 몸 때문이라도 여자친구 행세가 하고 싶어진다.
“야! 술 가져오라니까!”
이것 하랴 저것 하랴 정신이 없다. 경원을 감시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고주망태가 된 남자가 자꾸 일을 시켰다. 서혜가 재빨리 손에 들고 있는 와인 병을 들고 몸을 돌렸다.
멀찍이서 술병을 유독 많이 쌓아 올린 테이블이 보였다. 테이블에는 익숙한 얼굴의 젊은 남자도 앉아 있었는데, 그간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토이도이 멤버 중 하나인 알렉스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까부터 배우나 연예인을 마주쳐도 별로 놀랍지가 않은 서혜였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그녀는 태연하게 테이블에 얼음 바스켓과 술을 놓아 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명한 연예인들도 종종 눈에 띄었는데, 잠깐 신기한 마음이 스쳐 지나가 입을 끔뻑이는 게 감탄사의 전부였다. 나중에는 질려서 그들이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것도 잊어버렸다. 오후에 선 여사님과 먹은 오징어회에 노로바이러스 같은 위험 인자라도 들어 있어 환각을 일으킨 게 아닌 이상 이럴 수가 있을까?
그러다가 멀리서 유일하게 잘생겨 보이는 것이 있기에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보았더니, 다름 아닌 윤경원인 것이었다.
그를 제외하고서는 죄다 오징어로 보일 지경이라니 정말 중병에 걸렸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거 말고 다른 걸로 가져와.”
그때였다. 경원에게 향해 있던 모든 집중력을 깨뜨리며 누군가 서혜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
서혜는 강한 힘에 테이블 위로 거의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나머지 손으로 식탁보를 짚고 다시 중심을 잡았다. 당황한 눈이 그제야 자신을 불만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는 남자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파티 분위기를 위해 설치한 식탁 위의 LED 양초가 어스름하게 남자의 얼굴에 일렁거렸다. TV에서 보던 청량한 미소년 알렉스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가 섬짓한 얼굴로 명령했다.
“귀 삶아 먹었어? 다른 거 가져오라고.”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손목을 뿌리치듯 놓아줬다.
뭐 이런 무례한 사람이 다 있담!
서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애써 공손하게 물었다.
“어, 어떤 걸로 가져다 드릴까요?”
“내가 그런 거까지 알려 줘야 돼?”
서혜는 다른 직원들이 손님들을 얼마나 깍듯하고 정중하게 대하는지 알았다. 자기도 그 장단에 맞춰 줘야 한다는 것도.
뭔가 불친절했던 걸까, 실수했다는 생각에 당황으로 표정이 굳어 버리자, 남자의 시선이 더 험악해졌다.
“기본적인 것도 모르냐고.”
“그, 그게 아니라요…….”
술을 늦게 가져다준 것에 대해 사과하려고 하는데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서혜가 고장 난 얼굴을 최대한 구겨 미소를 지었다. 어찌 됐든 웃어야 하는 것이 직원의 역할인 것 같아서. 그 다분히 가식적인 미소는 경원에게 배운 것이었다. 그가 왜 기분이 좋아도 웃고 안 좋아도 웃어 댔는지 약간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떨리는 감정을 누그러뜨리지 못할 것 같다.
“죄송합니다. 다시 가져올게요.”
쨍그랑!
그리고 서혜의 노력은 괴롭힐 사람을 찾아낸 사람 앞에서 하등 소용이 없었다. 남자는 아예 술병과 얼음 바구니를 땅으로 떨어뜨려 버렸다.
“닦아.”
“…….”
병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싸늘할 정도로 고요해진다. 순식간에 서혜에게 이목이 쏠렸다.
쿵, 쿵, 쿵,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한 순간 서혜의 심장박동이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제 심장이 크게 뛰어 살갗을 밀어내는 느낌이 가슴 부근에서 느껴질 정도였다.
신기했다. 뭔가 청소하라는 명령은 윤경원에게서 늘 듣던 것인데. 똑같은 명령이라도 이렇게 훨씬 더 기분 나쁘고 살벌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게.
“어이고. 또 왜 그래, 이 친구가.”
“아까부터 손님을 무슨 지나가는 오징어 보듯이 하고 싸가지가 없잖아.”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피식피식 웃으며 건성으로 말리는 시늉을 했다. 다른 직원 하나가 급히 대신 사과를 하러 왔다. 남자들은 직원에게 거짓말을 했고, 와인 병을 깨 버린 것은 서혜의 실수가 되어 있었다. 귀하신 게스트의 의사가 먼저였기 때문에, 누구도 상황을 만류할 생각이 없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겁먹은 서혜가 재빨리 몸을 숙이고 떨어진 병 조각들을 모았다. 알렉스가 테이블 아래로 길게 발을 뻗어 엎어진 바스켓을 밀어냈다. 양철 바구니가 부산스러운 소리를 내며 한 바퀴 굴러갔다.
“이것도 치워.”
당혹스럽고 민망한 감정도 경사길을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기분이었다. 깨진 유리를 치우던 서혜는 술과 섞인 차가운 얼음도 전부 주워 담아야 했다. 최석훈이었다면 한주먹 거리도 안 됐을 비실비실한 놈이!
속으로 아무리 씩씩대 봤자 지금은 자기가 더 약하다. 육체적인 힘으로나 권력으로나.
내가 뭘 잘못했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것은 맞지만 그렇게 잘못한 일일까? 남자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도리가 없는 서혜는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푹 고개를 숙였다. 범수 씨가 사고 치지 말랬는데. 이 장면을 윤씨 부자에게 들키면 일이 더 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떠올랐다.
사실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초연하게 생각해 버리면 편하다.
세상은 원래 약육강식이니까. 그러니까 모든 화살을 주서혜에게로 돌리면 땅을 파고 서러움을 묻는 일이 아주 쉬워지는 것이었다.
***
쨍그랑!
아찔한 파열음과 함께 파티장에 소란이 일자 경원의 시선도 유리병이 깨진 방향을 향해 돌아갔다.
자기 말고도 욕먹는 걸 즐기는 한심한 망나니가 여기 또 있나, 그런 생각으로 한참 떨어진 테이블을 바라보니 직원 하나가 주저앉아 엎어진 깨진 병을 부랴부랴 치우는 중이었다.
뭔가 한두 개 깨지는 것쯤이야, 최근 재벌 3세들이 모인 다른 파티에서 술잔을 깨서 악운을 몰아내니 어쩌니 했던 적까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관심을 가질 만큼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유리 조각을 치우는 직원을 괴롭히는 일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머리를 밝게 염색한 남자 하나는 무어라 신경질을 내며 양동이를 구둣발로 걷어찬다. 그러자 직원은 차가운 얼음도 맨손으로 주워 담았다. 저런 것도 문화 핑계를 댈 수 있나. 경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투명한 분수대 너머로, 실루엣이 아른거린다. 라운지는 너무 넓고 인파도 많아서 잘 보이지가 않았다.
“쟤 알렉스 아니야? 작년 파티 때는 기분 좋아 보이더니 오늘은 영 아니네.”
“직원이 잘못을 했겠지.”
“요즘 어린애들은 적당히를 몰라. 갑질 논란이니 뭐니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데.”
“어머, 그러면 네가 가서 한마디 하든지.”
“그건 좀…… 알렉스는 팬이 많아서 잘못 엮이면 SNS 닫아야 된단 말이야.”
사람들은 뭐든 남 일처럼 여겼다.
직원이 실수했으면 바짝 엎드려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걸 위해 라크뷰에서는 다른 업장과 비교도 되지 않는 비싼 임금을 지불하고 있는 것이니까.
오히려 손님의 심기를 거스른 직원이 교육을 잘못 받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누군가는 사소한 실수쯤 괜찮다고 너그럽게 넘어가겠지만, 세상에는 100% 자비가 넘치는 사람만 존재할 수가 없더랬다.
경원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어린 가수가 파티에 머무는 내내 부쩍 화가 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기가 받아야 할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연예인들도 VIP 라운지에 들어온 순간 그저 무수한 하늘의 별 중 하나였다. 그걸 못 견딘 남자는 힘없는 직원에게서라도 인정받고 싶어졌을지도 몰랐다.
특히 경원과 친목을 쌓기 위해 몰려든 여자들은 오늘 참석한 고객 중에서 가장 눈에 띌 것으로 예상되는 운환자동차그룹 계열사 사장들의 손녀들이었다. 경원이 한 사람과 오래 대화하지 않는다는 파티 에티켓을 깨 버리고 그들을 전부 오래도록 붙잡고 있었으니 몇몇 사내놈들은 경쟁에서 밀린 우중충한 수컷들처럼 불만족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시기심을 못 견딘 어린 남자애들이 그만 비뚤어질 수도 있고.
미묘하게 조금씩, 쫓아낼 구실은 주지 않고. 그러나 분명 거슬리도록. 제 방식으로 파티 분위기를 흐리는 데에 재미가 들린 경원이 질 낮은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에도 직원은 무릎까지 꿇고서 치우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경원이 바에 느른하게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했다. 어찌 됐든 힘없는 직원은 구해 줄까. 그러다 저 어린놈과 시비가 붙으면 더 좋고. 그런 계획을 떠올리는데 멀리서부터 어디선가 젊은 여자가 나타났다. 윤주원도 함께였다. 연푸른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주저앉아 바닥을 치우던 직원을 따뜻한 손길로 일으켜 세운다. 씩씩대는 남자에게 대신 양해를 구하고, 손수건을 꺼내 손도 닦아 주는 게 천사가 따로 없었다.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등장할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제 차례를 빼앗긴 경원이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바텐더에게 무알코올 칵테일 같은 것을 주문해 숙녀들에게 대접하도록 했다. 꺄르륵, 저들끼리 즐거움으로 가득 찬 웃음이 터졌다. 그러고 보니 서혜도 비싸고 희귀한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데. 하나 가져다줘도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형식적인 건배에 응하니 쨍 울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그 경쾌함이 산산이 부서진 것은 잔을 완전히 비우고 난 뒤였다. 뒤늦게서야, 웨이터 하나가 조심스레 옆으로 다가와 이상한 소리를 했다.
“박 실장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라운지에 주서혜 씨 출입 허락했다고요. 지금 들어와 계실 거랍니다.”
“……뭐?”
황당한 이야기였다. 서혜는 절대 오지 않겠다고 했으니, 박 실장에게 갑자기 그런 명령을 내릴 이유도 없었다.
경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가식적인 웃음도 흘릴 수 없이 심각해진다.
“무슨 헛소리야? 내가 언제 그런 명령을 내렸어.”
“……저는 전달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경원이 황급히 핸드폰을 꺼냈다. 무음으로 해 놓은 데다가 웬만한 연락은 수행원들 쪽으로 돌려놓았으니 파티장에서는 특히 확인이 어려웠다.
그리고 설마, 절대 자신에게 전화를 안 걸던 여자애가 느닷없이 부재중 전화를 열 통 넘게 남길 거란 것 역시 예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경원은 다시 발신 버튼을 눌렀다. 뚜-뚜-뚜-. 통화연결음이 한없이 길다. 불길하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경원은 수화기를 든 채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손목을 그었어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득한 비명이 불길함을 증폭시켰다.
한참을 솟아올랐던 분수가 가장 아래까지 가라앉는다. 분수대 너머의 세상, 물줄기가 사라진 또렷한 시야에, 낯익은 여자가 서 있었다. 피 묻은 유리 조각을 들고 버티는, 한눈에 보기에도 힘없고 초라한 여자였다.
그때부터 경원은 정신을 놓고서 내달렸는데, 어떻게 거기까지 도착했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없었다. 하의가 홀딱 젖은 걸로 봐서는 아마 분수대를 그냥 뛰어넘어 버린 것 같았다. 그는 몸이 물속에 빠지는 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완전히 다른 생각에 빠져 버렸다.
그 애는 처음부터 오라고 하지 말았어야지.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했어야지. 그런 생각들.
아니, 저 역시 오늘 파티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게스트들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서혜에겐 아무 일도 없었을지도 몰랐다.
하물며 부리나케 달려가 도와주기라도 했다면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멍청하게 여자들 사이에 낑겨서, 남의 일처럼 바라보고 무시해 버렸다. 집안에 대한 원망에 눈이 멀어서. 안 그래도 정상이 아닌 그 히키코모리가 그 꼴인데. 것도 모르고.
경원의 머릿속은 과도할 만큼의 자책으로 가득 차올랐다. 제 어미처럼, 그 애가 자기 눈앞에서 자기 때문에 죽어 버린다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러나 서혜가 소란의 중심에 서게 된 경위를 따져 보자면, 그녀를 완전히 오작동하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은 경원도 알렉스도 아니었다. 그 작은 스파크는 따뜻하게 몸을 일으켜 주고 손수건을 건네준 천사와 같은 여자에게서부터 튀었다.
“서혜야?”
도연희가 자선 파티에 참석한 건 우연이라 보기에는 어려웠다. 연예계와 긴밀히 카르텔을 구축해 온 라크뷰에서는 매해 적극적으로 스타들을 불러들였고, 가수는 물론 배우로도 잘 나가는,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스무 살 도연희를 초대 명단에서 빼놓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연희도 잘 나가는 대형 로펌의 대표 경영인 집안에서 자란, 태생부터 금수저인 사람. 호텔이 개업할 무렵부터 피트니스 클럽에 이름을 올려 놓고 있었기에 상류층 사회에 어울리는 것이 위화감 하나 없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니까 오히려 라운지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는 서혜 쪽이었다. 서혜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하필이면 바닥에 주저앉아 쏟아진 얼음이나 치우고 있는, 이 초라한 타이밍에 눈앞에 성공한 라이벌이 등장한 것은 너무 잔인했다.
“맞네! 도화예고 주서혜!”
도화예고라는 말에 알렉스의 험악했던 표정이 누그러진다. 그 역시 몇 년 먼저 졸업한 동문으로, 연희의 선배였다.
대부분의 잘 나가는 연예인들이 그 일류 명문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그 학교를 나와서 음악으로 밥벌이에 실패한 경우도 거의 없었다. 같은 동문끼리는 어떻게든 밀어주고 당겨 주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주서혜는 여기서 웨이트리스를 하고 있다. 그녀에게는 음악을 이어 갈 의지가 그다지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잠시 누그러진 알렉스의 눈빛이 얼마 안 가 경멸의 눈초리로 바뀌었다.
“선배님. 제 친구인데, 무슨 실수를 했는지는 몰라도 좀 봐주세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연희는 재빨리 서혜를 일으켜 주었다. 서혜는 엉망이었다. 손이고 옷이고 붉은 와인으로 뒤덮여서는, 얼음처럼 꽁꽁 얼어 있기까지 했다.
서혜의 입도 얼어붙었다. 사실 연희가 자신에게 왜 친절하게 대하는지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굴을 본 지도 오래됐거니와, 두 사람은 친하기는커녕 늘 경쟁심 때문에 사이가 나빴었다. 적어도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던 서혜에게는, 절대 반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명품 드레스를 입은, 반짝반짝 예쁜 도희가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아 주었다. 주변 사람들이 마치 천사를 바라보듯 그녀를 보고 행복해했다. 알렉스도 잘 나가는 연희와 갈등을 만들 이유가 없었으므로,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상황을 종료시키려고 했다. 술 같은 건 취하지도 않은 사람 같았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네. 후배인지도 모르고. 미안하다.”
“…….”
남들 보기에는 사과까지 금방 받아 내니 얼마나 대단해 보일까. 자기는 얼마나 불쌍해 보일까. 서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동안 고개도 제대로 못 들었고 눈앞의 여자와 눈도 못 마주쳤다.
“연희 씨는 어쩜 마음씨도 따뜻하시네요.”
누군가 그 장면에 당당하게 찬사를 보냈다. 서혜의 고개가 멍하니 옆으로 돌아갔다. 웬 남자가 나타났는데, 처음에는 윤경원과 너무 닮아 헷갈릴 뻔했지만 그보다 키도 작았고, 퀭하고 야윈 인상은 전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남자가 마주친 눈을 접어 웃었다. 어둡게 진 다크서클이 더 짙어졌다.
“안녕하세요. 윤주원입니다.”
웃는 게 웃는 것 같지 않은 것은 집안 내력인 것 같았다.
“뒷정리는 다른 직원 부를 테니까 걱정 말고 가 보세요.”
따뜻한 축객령이 이어진다. 주원은 파티 내내 연희의 파트너로 직접 귀빈을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그녀가 친구라고 주장하는데 일개 직원일지언정 따뜻하게 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서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을 두리번거리며 누가 보아도 불안한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서혜가 말을 편하게 잘 못해요. 옛날에 목을 다쳐서요. 아직 회복이 안 됐나 봐요.”
그리고 서혜의 손이 달달 떨리고 있다는 걸 아는 연희는, 무엇이든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그녀는 경쟁의 승리자로서 모든 것을 쟁취한 사람이었고, 서혜는 전부 잃고 도망친 패배자였으니까.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었다.
“너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연락도 안 되고 걱정했는데. 여기서 일하고 있었던 거야?”
립스틱이 곱게 발린 예쁜 입술이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이 꼴이 다 뭐야, 동창 애들이 너 죽은 거 아니냐고 수군거려도 난 잘 살고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얼마 전에 현수가 너 진짜 잘 산다고 그래서 안심했었단 말이야.”
“……둘이 정말 친구였다고? 하나도 안 어울리는데.”
“선배도 참. 잘나고 못나고, 그것 때문에 친구가 못 되고 그런 건 없잖아요.”
잘나고. 그리고 못난 사람.
그 붉은 입술에 비웃음이 담겨 있다는 것도 보였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서혜는 알았다. 그녀의 말 속에 담긴 가시가 얼마나 따가운지 목이 아파 오는 것 같았다. 가시가 목에 걸려 숨을 죄었고, 그러자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도망가고 싶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가 아니라, 그냥, 영원히. 죽은 사람이 꼼짝없이 세상에서 사라지듯이.
“서혜야, 너 괜찮아? 왜 이렇게 땀을 흘려.”
“괜, 괜찮, 괜찮…….”
“아, 너 그때 영상 때문에 공황장애까지 생겼었잖아. 아직 안 나은 거야? 그거라면 걱정 마. 그거 거의 지워져서 쉽게 못 찾을 거래.”
연희가 다분히 계산적으로 남의 사정을 줄줄이 뱉어 댔다. 친절하게 대해 주는 듯 하지만 남들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쪽팔려 하라고.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 돼서 동정이나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라고.
영상? 무슨 영상?
호기심에 찬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서혜는 그들의 호기심이 싫다. 친구들의 관심도. 그래서 연락처를 바꾸고 집에 틀어박혔다. 전부 부담스러웠다.
다가오는 것이 좋았던 사람은, 자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그저 NPC라고 생각해 주며, 좋다고 말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 주는 어떤 바보 같은 남자 하나뿐이었다.
‘착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밤새 펑펑 울 때까지 해 줄게.’
‘멀쩡하게, 몸 관리 잘 하고 있는 거다?’
최석훈이 아닌 주서혜는, 이런 상황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는데, 그런데 그 바보와 한 약속 때문에 이제 그럴 수도 없다.
“아니야…….”
손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혜가 연희의 팔목을 콱 붙들었다. 잡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잡고 힘을 주어 말했다.
“너 때문이잖아. 연희야.”
“응?”
서혜는 죽지 않으려면 적을 공격해야만 했다.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것이라고도 하기 힘든 아주 작은 공격이라도 말이다. 그러다가 밟혀 죽을 게 확실해도 말이다.
“내가 고장 난 건…… 너 때문이잖아…….”
“…….”
“그런데 왜 모르는 척해.”
연희는 순간 서혜의 광기가 서린 눈을 피해 버렸다. 연예인들이나 소화할 수 있는 넓은 직경의 화려한 렌즈가 사방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경원의 표정을 읽어 내느라 매번 고초를 겪었던 서혜의 눈에는 너무나 읽기 쉬운 얼굴이었다.
의외로, 침대 위에서 아무리 때리고 할퀴어도 미동도 안 하고 몸을 밀어붙이던 바윗덩어리에 비한다면 남들 시선을 의식하느라 바쁜 연희는 훨씬 약하고 물렁해 보였다.
“나 다 들었어. 네가 나 묻으라고 애들 시킨 거라고……. 그때, 학교 오디션에서, 네가 데뷔하려면, 내가 없어졌어야 했다고……. 그래서…… 내가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된 건…… 다 너 때문이니까…… 절대 가만두면 안 된다고…….”
“…….”
그 자리에서 서혜의 두서없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사람은 딱 두 명이었다. 바로 곁에 있는 도희와 알렉스. 주원은 가까이 있었어도 그 말이 무슨 내용인지 곧장 알아들을 길이 없었지만, 연예계에 몸담고 있는 알렉스는 꽤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도화예고에서는 늘 소수 정예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비공개 오디션이 벌어졌다. 연희가 그때 대형 기획사에 데뷔 확정을 조건으로 캐스팅된 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일화였다.
“……그게 진짜야?”
“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갑자기.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지. 데뷔하고 나서 워낙 증거도 없는 괴소문이 많아서 힘들긴 했는데……. 서혜 너까지…… 왜, 왜 이런담. 정말.”
연희가 애써 웃음기를 유지했다. 그녀는 황급히 손을 빼내려고 했는데, 서혜는 물귀신처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눈빛도 이미 예전에 맛이 간 사람 같았다.
“주원 씨, 그만 가요. 아픈 애라서, 뭔가 이상한 상상을 하나 봐요.”
사고는 거기서 벌어졌다.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알렉스가 먼저 나서 서혜를 떼어 놓으려고 했고, 몸싸움이 번졌다. 알렉스도 술기운 때문에 제대로 대처하지를 못했다. 강한 외력에 위협을 느낀 서혜가 발버둥 치며 남자를 밀어냈다. 그녀는 과도하게 겁을 먹은 나머지 단순히 제지하려는 알렉스의 행동도 극도의 살해 위협 따위로 느꼈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 같았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해 줄 도구를 찾았고, 굴러다니는 양동이를 잡아 던지고 바닥을 뒹굴었다. 결국 알렉스도 양동이에 걸려 넘어지면서 미처 치우지 못한 유리병 위로 쓰러졌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그의 손목을 베고 지나갔다.
“헉!”
정신을 차리니 서혜의 손에도 여기저기 널린 유리 조각들 몇 개가 들려 있었다. 다친 사람보다 더 놀라버린 서혜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렸고, 순식간에 그녀는 흉기로 주변 사람을 다치게 한, 완전히 악마 같은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쓰러진 알렉스를 내려다보는 서혜의 표정이 곧 울 것처럼 와락 일그러졌다.
“어, 어떻게 해. 선배! 괜찮아요?!”
주원의 고개가 알렉스의 팔을 지혈하기 위해 달려드는 연희를 따라 아래로 움직였다. 연희는 마치 그의 손목이 잘린 것처럼 죽으면 안 된다고 소리쳤지만, 보아하니 조금 스쳤을 뿐 심각한 부상은 아니다.
경이롭게도, 주원은 파티가 말도 안 될 정도로 형편없이 망해 버린 것에 대하여 딱히 분노하거나 당황한 기색을 띠지 않고 있었다. 황폐함에 가까운 얼굴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 뿐이었다. 박 실장, 사람 내려보내. 그는 그다지 빛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은 새카만 눈으로 몇 발자국 떨어져 경계 중인 서혜를 향해 물었다.
“윤경원이 이러라고 시켰습니까?”
“…….”
집 나간 정신을 금방 되돌아오게 만드는 묵직한 질문이었다. 그 몇 마디가 격노해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았다. 서혜는 완전히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지만 윤주원 사장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경원이 말했을 수도 있고, 주서혜라는 이름을 박 실장이나 또 다른 누군가가 전달했을 수도 있었다.
“아, 아니,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저는……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당연히 서혜는 경원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니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런데 제정신이 돌아오기 무섭게 누군가 팔을 잡아당겼다. 검은 정장을 입은 경비원들이 달려들어서 몸을 짓눌렀다. 그들은 정말이지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무자비했다. 코와 턱이 바닥에 짓뭉개지면서 숨이 나갈 곳을 못 찾고 목구멍에 머물렀다. 바닥에 엎어져 제압된 서혜는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있는 힘껏 참았다. 몸은 너무 아프고, 주변 사람들이 꺼내 들고 있는 핸드폰 카메라는 죄다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서혜에게는 처음 겪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울고 싶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이 새끼들이 누구한테 함부로 손을 대.”
동시에 현장에 도착한 경원은 서혜가 제압당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완전히 이성을 놓아 버렸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경비원들이 하나둘씩 나가떨어졌다. 경원이 남자들을 다 때려눕히는 데는 몇 초의 시간도 안 걸렸다. 정직하게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는 한 번의 움직임으로 남자들이 태풍을 맞은 갈대처럼 후두둑 꺾여 나갔다.
갑자기 사람들이 왜 다쳐 나가는지, 연희는 그 가운데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입을 틀어막고 쩔쩔맸다. 그러다 아예 기절해 버렸다.
이제 들 것이 얼마나 많이 필요할지 감도 오지가 않았다. 그 한가운데서, 윤주원 사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윤경원. 딱 너 같은 여자를 데려왔구나. 폭력적이고, 대화도 안 통하고. 아버지가 아주 기뻐하시겠어.”
그 이상의 감정 표현은 없었다. 허겁지겁 달려온 수행원들에게 차분하게 명령할 뿐이었다. 구급차 부르지 말고 조용히 실어 가라고.
높낮이가 없는 음성은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듯 텅 비어 있었다. 오히려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씩씩대고 있는 것은 윤경원 쪽이었다. 경비원들을 다 때려눕히고서, 만신창이가 된 여자를 안아 든 경원은 핍박받는 여인을 구해 낸 영웅처럼 서서 말했다.
“약한 사람 괴롭힌다고 기분이 나아지나 봐. 창피한 줄 알아, 윤주원!”
누가 누구보고 창피함 따위를 운운하는 건지.
정말이지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동생이었다.
쓸데없이 동정심을 발휘하고, 한번 정을 주면 떼어 내지를 못하고. 동네방네 되지도 않는 양아치 행세를 하고 다니는 주제에 정의 같은 걸 따지고 싶어 하고. 20대 내내 길거리 깡패 새끼들은 죽기 직전까지 패고 다녔으면서, 제 눈에 불쌍해 보이면 덮어 놓고 감싸기 바쁘고. 뭐가 이득이고 뭐가 손해인지 제대로 구분도 못 해서, 이성보다 주먹을 먼저 쓰려고 하고…….
그러니까 자식들 내팽개치고 술만 마시던 여자한테 자기 장기까지 떼어 준다고 나서서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놨지.
“앞뒤 사정도 모르면서, 뭘 안다고 큰 소리야. 윤경원.”
“형은 알아? 제대로 알기나 해? 알면 설명해 봐.”
제대로 알기나 해. 십 년 전 술에 전 여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장례를 치를 때도 윤경원은 그렇게 말했었다.
멍청한 윤경원은 설득하고 설득해도 알아듣지를 못했다. 네 엄마는 미칠 대로 미쳐서 절대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이식받은 간도 다시 망가뜨려 무용지물로 만들었을 거라고. 앞날이 창창한 네 몸을 떼어 줘 봤자 후회뿐이었을 거라고. 그러니까 가둬 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경원은 그렇게 말하는 제 형제들에게 빽빽 소리를 질러 댔다. 제대로 알기나 해? 엄마가 왜 고장 났는지. 옆에서 얘기는 들어 봤어?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도저히 제어가 불가능하도록 커다래진 덩치뿐이다.
결국 라운지에선 도연희를 포함해 실려 나간 사람이 한 무더기였다. 연예인, 경비원, 심장 통증을 호소하는 사모님들. 거기에 뒤늦게 달려온 윤해산 회장도 뒷목을 잡고 쓰러져 버렸다. 이미 회복 불가능할 만큼 초토화가 된 상황, 파티 호스트인 주원은 급하게 자리를 파할 수밖에 없었다.
***
“주서혜, 괜찮아?”
경원이 서혜를 부축해 비어 버린 테이블 앞에 앉혔다. 그는 제일 먼저 서혜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다음엔 손목을 확인했다. 다행히 자기 손목은 하나도 안 다쳤다. 토이도이인지 뭔지의 손목이야 두 동강이 나든가 말든가 알 바 아니다.
“그래, 앞으로도 무슨 일 있으면 그냥 모가지를 그어 버려. 아예 죽여 버려.”
눈도 제대로 못 뜨고서 빌빌거리는 서혜를 달래고 테이블 위에 놓인 물병을 뜯어 지극정성으로 떠먹이는 모습은 결코 평소 윤경원의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파티장, 뒷정리를 하던 직원들이 힐끔힐끔 그들을 곁눈질했다. 아마 내일 아침쯤이면 윤경원이 누구와 사랑에 빠졌다고 온 호텔에 소문이 쫙 퍼지게 될 터였다. 아니, 그보다 더 안 좋은 헛소문들도 많이 생겨날 터였다.
“참 좋은 거 가르치는구나.”
수습은 꼼짝없이 오너의 몫이 됐다. 기자들에게는 뭐라고 해야 하며 돌아간 게스트들에게 해명과 사과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주원에게는 무척이나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그리고 가장 충격을 받은 건 그들의 아버지일 터였다.
“아버지가 너무 안일했지. 너 같은 것도 아들이라고, 사람 많은 데서 체면 죽이지 말라고 하길래 내버려 뒀더니 결국 이 난리를 치고 말이야.”
“그렇게 체면 생각하시는 분이 직원들 보는 데서는 잘만 두들겨 패시던데?”
“네가 지금 삐딱선 탈 자격이나 있어? 언제 철들래.”
“못 들어. 안 들어.”
그때 2층에서 내려온 범수가 동영상을 확보했다며 달려왔다. 그가 내내 2층에 난간에 기대고 서서 실행한 역할 중 하나가 보안 유지, 증거 수집이라서, 소란이 벌어진 전후의 상황이 자세히 담긴 영상이 무리 없이 주원의 손에 들어올 수 있었다.
서혜야, 물 좀 마셔. 숨은 쉬는 거야? 토할 거 같아? 내 손에 토해 그냥.
꼴같잖은 행태를 앞에 둔 채로 주원은 무심하게 태블릿을 조작했다. 영상을 돌리고, 또 돌리고. 몇 번 재생 버튼을 눌러 같은 장면을 되돌아보니 빠져나갈 구석은 있었다.
와인병을 일부러 깨고 직원이나 괴롭히는 주정뱅이 아이돌 가수. 그런 이미지를 갖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 알렉스 쪽은 문제없이 합의를 볼 수는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다음은. 무려 오늘 자신의 파트너로 초대했던 도연희.
주원은 서혜의 입모양을 확대해 봤다. 작은 소리는 멀리서 녹음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저절로 고막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재생됐다. 그는 한 번 들은 말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도연희를 바라보는 영상 속 서혜의 눈에 살기가 비치고 있었다.
‘네가 데뷔하려면, 내가 없어졌어야 했다고……. 그래서…… 내가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된 건…… 다 너 때문이니까…… 절대 가만두면 안 된다고…….’
어쩌면 알렉스가 몸 던져 막지 않았으면 서혜는 더 큰 사고를 쳤을지도 몰랐다.
제정신 아닌 여자애가 사실을 말하는 건지 망상을 말하는 건지 뒷조사까지 해 볼 정성까지는 아직 없다. 다만 이전처럼 마음 놓고 도연희라는 여자와 친밀하게 어울리기가 다소 어려워지기는 했다. 도씨네 집안이 워낙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한 법조계 집안이다 보니 의심 없이 불러들였는데, 당분간은 좀 더 신중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중에라도 사고가 터졌을 때 같이 엮이면 라크뷰 체면이 상하게 될 테니까.
주원은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하는 사람이었고, 아주 이성적이게도 조금이라도 위험 요소가 있는 인물은 굳이 라크뷰에 가까이 둘 의향이 없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떨어질 생각을 않는 구질구질한 윤경원 같은 특이케이스가 아니라면 말이다.
주원에게 막냇동생이라는 존재는 정말 신물이 날 정도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내 호텔에서 당장 나가, 같은 말은 기어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아버지나 자신이나 어차피 저 망나니를 내버리지 못할 것이었다. 그게 그들이 베풀 수 있는, 평생 해줘야 할 조의, 혹은 사죄였다.
“주서혜 씨는 해고야. 제대로 근무한 이력이 없으니 월급도 당연히 없어.”
물론, 동생이 데려온 이상한 여자에게는 전혀 부채랄 것이 없으므로 당장 호텔에서 내쫓아도 상관이 없다.
“굶어 죽게 할 게 아니라면, 윤경원, 네가 정신 차리고 돈 벌어. 아니면 겨울 지나고 둘이 같이 길거리에 나앉든지.”
할 말은 그게 끝이었다. 주원은 몇 마디 말만 남기고서는 그대로 자리를 떠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