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서혜는 바로 다음 날 짐을 싸서 양리 마을로 돌아왔다. 한 달간의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변한 게 없는 마을이었다. 변한 것은 언덕배기에 빼곡한 나무들이 전부 옷을 벗었다는 것. 울긋불긋하던 단풍은 사라지고 쓸쓸하고 황량한 분위기가 흘렀다. 경원이 새로 사 준 패딩은 이런 날씨에 딱 어울렸다. 골목을 파고드는 발걸음을 추위에도 가볍게 만들었다.
그녀는 한동안 게임을 켜지 않았다. 세 칸의 돌계단을 내려가 우편물이 꽂힌 빽빽한 현관문을 열어젖히고, 호텔에서 알뜰하게 쓸어 온 생필품들을 내려놓은 뒤 팔을 걷어붙이고 청소를 시작했다.
집 안 구석구석, 채 버리지 못한 음식물들이 바짝 건조돼 미라처럼 말라 있다. 언제 사용했는지 기억 안 나는 청소기도 돌리고 기름때가 묻은 컴퓨터도 닦았다. 선 여사가 알려 준 청소 스킬들이 꽤나 도움이 되었다. 나중에 정말 다른 호텔에 지원해도 꽤 괜찮은 수준이 됐다.
사흘간의 대청소를 마친 뒤에는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새로 장도 봐 왔다. 아직도 요리는 자신 없지만, 생일 선물로 받은 프라이팬을 써 보기는 해야 할 것이다. 비싼 옷들은, 뭐. 언젠가 입을 날이 있을 것이고. 적어도 속옷 하나만큼은 몇 년 동안 새로 살 일이 없다.
새로 구한 아르바이트 자리는 양리 마을 초입에 있는 편의점이었다. 호텔 청소보다는 사람들과 많이 만나는 일을 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면접을 보러 다닐 때만 해도 낯선 사람들과 정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녀는 동네에 있는 병원에 찾아가 도움도 받아야 했고, 약도 먹었고, 용기도 계속해서 필요했다. 그래도, 나중에는 어떤 진상 손님이 와도 처음 공원에서 마주친 윤경원보다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사람이 없어서 금방 적응했다.
일상에 익숙해진 서혜는 얼마 안 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그간 벌인 악행에 대해 사과문도 올렸다. 최석훈은 사죄의 뜻으로 밤 12시 마을 광장에서 모든 아이템을 뿌리겠다고 선언했고, 그리하여 윈드 스토리에는 한 번에 너무 많은 유저가 몰린 탓에 서버가 터져 버리는 사건이 발생. 일명 ‘최석훈 현자 타임 사건’으로 영원히 기록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번뇌에 사로잡힌 최석훈이 울면서 다시 나타날 거라는 유저들의 예상과 달리 그는 다시는 게임에 나타나지 않았다. 완전한 죽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약한 사람 괴롭힌다고 기분이 나아지나 봐. 창피한 줄 알아.’
서혜는 약육강식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현실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다시는 최석훈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고, 미련을 남기는 짓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제 손으로 모든 흔적을 없앴다. 다시는 되돌아볼 수 없도록.
우주최강경원이, 그 역시도 더는 게임에서 만날 수가 없었다.
경원이 게임에 안 들어가는 건 너무 바쁜 탓이었다. 경원의 일정에는 차질이 생겼다. 서혜가 돌아가자마자 비뇨기과로 쳐들어가 복원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에는, 아버지 대를 이어 주는 게 죽도록 싫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회복 기간은 답답했다. 그래도 워낙 그의 스위트룸 자체가 구색이 잘 맞춰진 거대한 회의 공간이었기 때문에, 수술 일주일 뒤쯤에는 타 업체 직원들을 불러들여 연봉 협상에 대해 논의하거나 변호사들과 서류 검토를 하는 등 사업 진행을 이어 갈 수 있었다.
몇 년 전 멋대로 피임 수술을 했던 것을 되돌리는 것도 모자라 일까지 열정을 가지고 하니, 파티장에서 쓰러진 뒤 아직도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윤 회장은 아들이 정신을 차린 것이냐며 범수에게 먼저 연락까지 해 왔다.
“원래는 투자자들 모아다가 싹 말아먹고 아버지한테 책임 전가하려고 했는데, 먹여 살릴 사람 생겨서 참는 거야.”
경원이 또 어떤 무시무시한 생각을 했는지 새까맣게 모르고서 말이다. 홧김에 하는 반항아적 소리일 거라고 짐작은 하지만 그래도 범수의 등골은 서늘해진다.
“노인네 진짜 죽으면 더 괴롭히지도 못하니까 어쩔 수 없지.”
범수는 중간에서 곤란함을 느끼다가, 결국 진실된 보고를 포기했다. 경원이 먹여 살리려고 하는 게 서혜라는 것도 알았지만 그리고 갑자기 수술받은 것도 서혜 때문일 거라 짐작했지만, 그 역시도 전달하지 않았다.
먹여 살린다, 라. 아직은 확실하지 않은 일이었다. 서혜는 이제 고작 스무 살이었고, 설령 두 사람이 연애를 시작한다고 해도 살다 보면 언제든 경원의 위험한 실체를 깨닫고 도망을 갈 수도 있고 말이다. 물론 경원은 거기까지 생각해서 복원 수술을 받은 걸을지도 몰랐다. 도망도 못 가게 하려고. 아, 얼마나 위험한가.
“주서혜 뭐 하고 있는지 알아봤어?”
양리 마을로 사람을 보내 그녀를 몰래 감시하게 하는 것만 해도 그렇다. 사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동네는 작은데 매장이 많아서 노동 강도도 괜찮습니다.”
서재에 앉아서 생전 안 하던 법령 공부를 하고 있던 경원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생전 안 하던 것은 아니고. 어릴 적엔 수재 취급을 받기는 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사망한 이후로 엇나가면서 공부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손에 꼽을 뿐이었다.
“혼자서도 잘 삽니다. 문제없습니다.”
일터에서 잘 적응하고 있고 문제없다는 보고. 그러나 경원의 눈빛은 심히 불만족스러웠다. 혼자 잘 살아? 그러면 안 되지. 내 옆이 얼마나 편안한지 뼈저리게 깨달아야지.
“문제가 없긴 왜 없어. 퇴근하다가 스토커라도 따라붙으면 어떡하려고. 안 그래도 그 동네 으슥하고 위험해 보이던데.”
여자 혼자 살기에는 치안이 불안한 동네이긴 하지만, 본인이 제일 위험한 스토커 같은데……. 범수가 말을 아낀다.
“바람은 안 피우고?”
게다가 벌써부터 의처증까지 우려된다.
범수는 서혜가 잠시 시간을 갖기로 하고 돌아갔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왕 돌아간 김에 그냥 다른 남자를 만날 기회가 있으면 잡는 게 좋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고민이 된다. 접근하는 남자가 있다고 사실대로 말할까 말까.
그리고 그 표정을 놓치지 않은 늑대 한 마리가 보고 있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요즘 너무 드러누워 있었지?”
다행히 늑대는 부상을 입은 지 열흘밖에 되지 않아 움직임이 예전보다 굼떴다. 범수가 걸음아 나 살려라 서재 밖까지 뒷걸음질을 쳤다.
“스, 스토커는 아니지만, 찾아오는 남자 정도는 있습니다!”
그리고 제 발 저린 도둑인 양 재빨리 사실을 고했다. 경원이 놀란 듯 걸음을 멈춘다.
“뭐?”
“머리가 짧고, 건실하고 인상 좋은 젊은 청년인데. 많지는 않고요. 두세 번 정도 편의점에 다녀가는 거 목격했습니다.”
“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게 안 많아?”
“아닙니다. 무지 많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완전히 작정한 놈입니다. 그놈은.”
경원이 멍한 얼굴로 앞머리를 쓸었다. 신경질적인 손짓이 쓸고 지나간 자국마다 진지함이 가득했다. 편의점에 찾아오는, 머리 짧은 젊은 청년. 보나 마나 나현수 그놈이다. 편의점까지 찾아왔다면 서로 연락도 주고받고 있다는 이야기.
‘제가 고백할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딴 놈 좆 빨아 대는 꼴 보게 생겨도 계속 이렇게 기다리기만 해? 경원의 생각이 날이 갈수록 극단으로 치닫는다.
벌써 열흘짼데. 최석훈 현자 타임 사건인가 뭔가 일으키고서 캐릭터 삭제한 것도 확인했고, 일까지 다니면서 잘사는 것 같고. 그 정도면 멀쩡해진 거 아닌가?
근데 대체 왜 연락이 안 와?
설마, 완전히 버려진 건가? 아니면 그 젊고 탱탱한 놈이 더 좋은 건가?
주인의 부름만을 기다리는 똥강아지가 된 기분이 들었다. 서혜가 준비만 되면 조금의 지체도 없이 한강을 건너가 꼬리를 흔들 준비가 되어 있는.
경원이 결국 핸드폰을 들었다.
서혜에게 전화해 압박을 넣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애처럼 유치한 남자가 아닌 나잇값 하는 어른스러운 남자로 보이고 싶으니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 게다가 어차피 수술 후 회복에도 더 시간이 필요하다.
경원은 저장해 놓았던 나현수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일전에 길거리에서 두 사람이 번호를 교환할 때 이미 전부 스캔해 외워 두고 있었다. 스캔은 그놈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가 현수와의 번호 교환을 종용한 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서혜가 도망가 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그렇게 됐을 경우 뒷조사에 들어갈 경로로써 ‘과거를 아는 친구’가 필요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주서혜는 도망가지 않았고, 잠깐 떨어진 틈을 파고들어 얼굴을 들이미는 나현수는 제거해야 할 위험인물 1순위였다.
주서혜 모르게, 조용하게 싹을 잘라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보세요?
“나다. 주서혜 남자친구.”
그리고 그날 전화 통화에서 현수에게 들은 변명들은, 착실하게 서혜를 기다리겠다는 경원의 다짐을 크게 흔들어 놨다.
-인터넷에 서혜 영상이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제목이…… ‘약한 벌레 분해하기’ 뭐 이런 식인데. 거의 삭제됐다가, 최근에 누가 다시 업로드를 하고 있어요. 제가 볼 때는…… 누군가 작정하고 그러는 것 같은데. 그럴 사람이 많지 않거든요.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서혜를 설득하고 있는데 잘되지가 않습니다.
나현수는 말을 청산유수로 잘 했다. 그의 말을 듣다 보면, 서혜가 사람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도연희를 물귀신처럼 잡아끌고 내려가야 모든 정의가 실현되는 것처럼 들렸다. 어떤 각오를 불사하더라도 모든 악의 근원을 뿌리 뽑아야만 서혜가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안식을 찾을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경원의 정의는 그런 방향이 아니다. 그의 옳고 그름은 서혜가 행복한가 아닌가에만 있었다. 혼자 숨쉬기에도 급급한 여자를 억지로 콜로세움 속에 집어넣고 싸우라고 할 수는 없다. 함부로 오지랖을 부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현수가 서혜에게 가족이라도 된다면 또 모르겠으나, 그랬다면 서혜의 전화번호부에는 처음부터 사람 3명이 아니라 4명이 있었을 것이다.
경원은 쓸데없는 질투를 내려놨다. 현수는 주서혜의 공략법을 전혀 몰랐다. 오히려 싫다는 애한테 찾아가 부담만 주고 있으니 서혜가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었다. 사랑의 경쟁 상대 같은 건 될 수 없었다.
“만나서 자세히 좀 얘기하자.”
하지만 그녀를 위해서, 잠시 손잡을 수는 있다. 딱 그 정도의 정의로운 청년은 되었다. 약육강식보다는, 권선징악 따위를 믿는 사람.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