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9)

09.

똑같은 한 달이지만 느낌이 사뭇 다른 잔잔한 시간이 지나갔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화려함이라고는 없는 단칸방. 몸에 남은 붉은 흔적들도 전부 사라지고 나니, 이제 아침 일찍 눈을 뜨는 습관만이 남아 있다.

12월 말. 새해가 다가오고 있었다. 출근을 끝내고 카운터에 앉아 있던 서혜가 목젖이 보일 때까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평일 낮의 한적한 기운이 노곤노곤 잠을 쏟아지게 만든다. 양리 마을은 정말 한결같은 동네였다. 크리스마스에도, 연말이 되고 새해가 다가오는 시즌에도 들뜬 분위기는 일절 없이 고요했다. 그저 단풍이 지고 눈이 내리는 변화만이 시간이 흐른다는 걸 알려 주는 그런 곳이었다.

덕분에 서혜도 평온했다. 늘 똑같은 규칙적인 하루하루가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매일 비슷한 손님에, 비슷한 진상에, 비슷한 고양이들. 그들과 어울리는 게 별로 어렵지 않았다. 새로운 손님이 와도 떨지 않고 자연스럽게 맞이할 줄 안다. 의사의 평가도 긍정적이었고, 몸 안쪽에서 멈춰 있던 톱니바퀴들이 다시 삐걱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전부 잘 되어 가는 것 같았다.

언제 환상적인 호텔 속에서 살았냐는 듯, 경원과 보낸 시간이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지는 고즈넉한 하루하루였다.

[라크뷰 게임즈가 출범식을 앞두고 공격적인 인수합병을 시도함에 따라 업계에 큰 긴장감이 돌고 있습니다.]

라크뷰, 취향껏 틀어 놓은 라디오 채널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려온다. 서혜의 귀가 쫑긋거린다.

[자회사로 편입된 전 윈드 주식회사의 강언욱 대표가 라크뷰 게임즈의 새 전략책임자로 취임했으며, 신작 제작발표회 역시 최대한 빠르게 앞당길 예정이라 밝혔습니다. 유례없는 투자액만큼이나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주머니 게임의 대항마가 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경원은 윈드 스토리에서 1등 마검사가 되는 걸로도 모자라 아예 회사를 사 버렸다. 정말 대단하신 도련님이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경영지원실 실장으로 근무한다는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윈드 스토리도 대규모 업데이트를 예고했다. PvP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개편할 거란다.

“…….”

아직 미련이 남았나. 조금만 플레이해 볼까. 잠시 유혹을 느낀 서혜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게임에 미련이 남은 게 아니라, 그냥 윤경원과 관련된 것들에 관심이 가는 것일 뿐이다. 검색도 해 보고, 인터뷰 영상도 보고, 사업이 아니라 외모로 화제가 되어 돌아다니는 그의 사진도 구경하며 감정을 달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연락해 볼 때가 되지 않았나.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으나 쉽지는 않았다. 의사가 조금 더 치료가 필요하다고 하니 괜찮다는 확신이 부족했다. 언제 갑자기 주서혜를 죽이고 싶어질지 몰라서 불안하다.

완치가 안 된다면 영영 사랑 같이 낭만적인 일은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경원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리는 상처를 두 번 주어서는 안 될 일이니까 말이다.

[오늘 오전, 국내 최정상 여자 아이돌 그룹의 멤버인 가수 도연희 씨가 돌연 그룹 탈퇴를 발표했습니다. 소속사인 EP엔터테이먼트는 개인 사정으로 인한 계약 해지에 합의하였고, 나머지 멤버들의 활동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그래도, 윤경원 보고 싶다.

딸랑-. 딸랑-. 핸드폰 화면에 띄워 놓은 경원의 인터뷰 사진만 천장에 걸어 놓은 보리굴비라도 되는 양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거칠게 문이 열리고, 고요한 편의점에 손님 하나가 들이닥쳤다. 서혜가 핸드폰을 끄고 몸을 일으켰다.

“안녕.”

그 순간 익숙한 남자의 체취가 코끝을 스친다. 바깥에서부터 불어 들어온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손님의 등에 업혀 온다. 서혜의 노곤하던 얼굴이 그 냉기에 바짝 굳어 들어 갔다. 놀란 토끼 눈을 뜬 여자의 시야에 갑자기 후광 같은 불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동네 주민이 아닌 낯설고 새로운 이방인은 곧장 카운터로 직행해 다가왔다. 진열된 물건들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손님에게 인사하는 방법을 그만 잊어버리고 만 서혜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성큼, 성큼, 경쾌한 발걸음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서혜가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한껏 위를 향해 머리를 젖힌 것이 오랜만이었다.

“내 취향이라 그러는데, 괜찮으면 번호 좀.”

정말 어떤 예고도 멋도 없는 느닷없는 등장에.

얼굴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건성으로 번호를 물어보는 이상한 남자.

자신이 아는 이런 이상한 남자는 윤경원밖에 없다.

“……취향이 뭔데요?”

서혜가 환각이라도 보는 듯 멍한 눈으로 물었다.

경원이 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며 카운터 위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리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착하고 귀엽고.”

“…….”

“사랑 때문에 열심히 살아 보려고 아등바등 노력하는 순진한 여자애.”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서혜의 눈꼬리 끝으로 방울방울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다.

하여튼, 얼마나 쉬운지 말 몇 마디 해 줬다고 넘어오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경원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근데 너무 멍청해서, 돈도 없는 주제에 게임에다가 7천만 원이나 쓰고, 그걸 되팔지도 않고 길거리에 뿌려 버리고, 저 좋다는 잘난 남자 옆에 철썩 붙어 있어도 모자랄 판에 기약 없이 기다리게 만들고, 그래서 그 남자가 상사병에 걸려서 죽기 전에 찾아오게나 만드는 그런 애.”

쏟아지는 지탄이 두 배는 세 배는 길고 험했다.

“보통은 좋은 걸 나중에 말하던데…….”

“난 그런 거 몰라.”

감동이 깨져 버린 서혜가 재빨리 안경을 벗고 손등으로 눈물을 벅벅 닦아 냈다. 비싼 안경을 꼼꼼하게 닦아 다시 착용한다. 그사이에 붉은 기운만 남기고서 눈가는 건조하게 말라 버렸다. 효과적으로 눈물을 그치게 만든 경원은 뻔뻔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런 남자도 괜찮으면 전화번호 찍어.”

“제 전화번호 저장 안 한 거였어요?”

하여튼 웃기는 남자.

서혜가 언제 울었냐는 듯 투덜거리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꾹, 꾹, 온갖 복잡한 감정들을 다 담아서 번호를 누른다.

그사이에 경원이 서혜를 잡아먹을 듯이 훑어내린다. 잘 챙겨 먹는지 빵빵해진 볼때기에, 윤기 도는 머리카락에. 가느다란 손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 하나하나까지, 오랜만에 보고 있으니 꼴려 죽겠다.

[보고싶은주서혜]

“…….”

그리고 이미 저장되어 있는 자신의 전화번호를 확인한 서혜도 피식 웃고 말았다.

“너도 나 보고 싶었지?”

“……이제 한 달밖에 안 됐잖아요.”

“그러게, 묶은 거 풀고 오느라 한 달이나 걸렸지 뭐야.”

“…….”

“의사가 복원 수술 하고 한 달은 자제하라고 해서.”

물론 잠깐의 웃음기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무슨 수술을 해?

잠시 정적이 흘렀다.

빈틈이 없을 정도로 당당한 태도로 말하는 나머지 서혜는 순간 경원의 말에 어떤 숨겨진 다른 아름다운 뜻이 있는 건가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한참을 고민해 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답은 하나밖에 없다.

쿵, 쿵, 의미를 인지하자 심장이 고장 난 듯이 뛰기 시작한다. 서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대낮에, 언제 손님이 올지 모르는 편의점에서. 오랜만에 찾아와서 할 말이 아니었다.

“이런데도 아직 고백할 마음 없어?”

“…….”

“슬슬 고백하고 싶지 않나?”

“…….”

말도 안 돼, 보통은 반대가 아닌가. 복원 수술부터 할 게 아니라, 내가 피임을 철저하게 할 테니까 걱정 말라 어필을 해도 모자란 게 아닌가. 아직 결혼을 생각할 단계도 아닌데, 어떻게 저런 태연자약한 얼굴로……!

“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2세도 만들 수 있어. 나한테 부족한 게 뭐야?”

“그, 그건…….”

서혜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고백해.”

윤경원은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남자라고 했다. 그 말의 뜻을 새롭게 깨닫는다. 처음 몸을 부딪친 가을날 느꼈던 것처럼, 이 남자가 완전히 미쳐 있다는 아주 강렬한 확신이 든다.

자기는 미친 주서혜가 아니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했는데, 이 인간은 점점 나빠지는 것 같았다.

동시에 문득, 어쩌면 그의 옆에서라면, 주서혜는 절대 마음대로 죽을 수조차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해 버리고 말았다.

“그럼, 수, 술 좀 마실 줄 아세요?”

“……뭐?”

“같이, 같이 좀 마셔 주세요. 오늘 밤에. 취향 다 맞춰 드릴 테니까…….”

서혜가 새카만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더는 슬픔이나 서러움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가득 채워진 눈빛이 경원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

새해가 밝아 왔다. 서혜가 첫 월급을 탔다. 한 달 내내 일하고 백오십만 원. 그동안 일억이니 이억이니 오가던 이야기들에 비해 적은 돈이었지만 본인이 정상적으로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는 생각에 뿌듯한 스물한 살이었다. 완전히 사회의 떳떳한 일원이 된 기분. 서혜는 그 돈으로 퇴근길에 경원에게 줄 선물도 살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경원은 판교에 새 아파트를 구했고, 서혜는 제 입으로 당장 들어가 살 테니 제일 좋은 침대를 내놓으라고 말했다. 그에 대한 경원의 대답은 이제 침대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서울에 있는 학교에 보내 주겠다고 부모님이 없는 돈 있는 돈 모아 계약해 줬었던 양리 마을 단칸방도 완전히 정리했다. 그 과정에서 계약당사자인 부모님에게 연락해야 하는 일은 불가피했다. 드디어 방을 빼게 되었으니 보증금을 챙겨 가라는 서혜의 말에 어머니는 반가워하기는커녕 당황해했다. 대체 어디 가서 살려고 그러는 것이냐며. 나쁜 일에 휘말린 것은 아니냐며. 원래 살던 강릉으로 다시 건너와 살라고도 했다. 미워하는 말들은 별로 오가지 않았다.

서혜는, 사실 합의를 하고 싶었던 적이 없다. 하지만 가족들은 너무나 돈을 필요로 했다. 서혜는 자신의 다친 몸과 마음보다 돈을 택한 가족들이 끔찍하게 싫었었다.

그리고 월급을 벌어 본 서혜는 이제는 자기가 게임에 쓴 7천만 원이 얼마나 큰 액수인지 알았다. 터무니없는 예고 등록금과 생활비를 대느라 평생 모은 돈을 다 써 버린 가족들은 앞으로 그런 목돈은 꿈조차 꿀 수 없을지도 몰랐다. 회수한 보증금을 아버지가 또다시 땅 사는 데에 샀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대로 일평생 가난에 허덕이며 살게 될지도 몰랐고.

세상을 살아가기 시작할수록,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그들이 돈을 받았어야만 했던 사정을, 언젠가는, 단 일 퍼센트라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될까.

“아빠, 나 임신했어.”

봄이 다가오는 3월. 서혜는 아버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임신 소식을 전했다. 끊어질 듯 보이는 실의 끝은 사실은 누구도 놓지 않고 있다.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아이 아빠에 대해 물어 왔다. 서혜는 행복에 겨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은 사람이야. 나 그 사람 만나고 게임도 안 하고 일도 잘 다녀. 당장은 관둬야 할 것 같긴 하지만…… 나중에, 할 수 있으면 음악 공부 다시 하려고. 얼마나 걸리든…….”

한참이나 혼자 뭔가를 재잘거리며 말하는데,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그저 조용히 들어 줄 뿐이었다.

“엄마 아빠 돈 필요하면, 조금 도와주겠대. 괜찮다고 하면.”

“필요 없어. 알아서 할 테니까 네 몸이나 간수 잘해.”

전화는 냉정하게 끊어졌지만, 서혜는 더 이상 당황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언젠가는 가족들에게 아이를 보여 줄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은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자기 입으로 애가 생겼다는 말을 꺼내지도 못해서 결국 범수를 통해 윤씨 집안에 모든 일의 전말이 알려지게 만드는 윤경원에 비하면 말이다.

[윤경원. 새아가 데려와라. 식은 제대로 올려. 그래야 후회가 안 남을 테니까]

[나, 네 어미랑 결혼할 때 제일 좋은 것들로만 해 줬었다]

[너도 자식새끼가 생기면 이해하겠지. 내가 왜 널 막아야 했는지]

윤 회장으로부터 온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고 있던 경원이 문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핸드폰을 내동댕이치고 재빨리 서혜에게 달려갔다. 혹시라도 울면서 나오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다.

“뭐라고 하셔?”

울기는커녕, 웃통을 벗고 반라가 된 남자가 다급하게 다가오니 서혜는 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왜 홀딱 벗고 있어요?!”

“너 힘들어할까 봐 미리 벗었지.”

“…….”

시간이 어느새 자정이었다. 음울한 얼굴로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시간. 하지만 지금은 경원의 몸 위에 앉을 시간이다.

서혜가 가만히 양팔을 뻗었다. 그다지 위로는 필요 없더라도, 밤새도록 안고 있지 않으면 안 됐다. 경원은 군말 없이 그녀의 뜻대로 움직인다. 그는 서혜가 원한다면 언제든 안아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윈드 스토리의 어떤 거인도 이보다 더 멋있는 파트너가 될 수는 없을 터였다.

최석훈과 우주최강경원이. 그들의 치열한 싸움 끝에, 약하디약한 주서혜가 승리를 거머쥐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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