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예진. (4)
* * *
“커플 할인 해주세요.”
“ㅇ, 유희야…….”
커플이라니, 조금 남사스럽다. 유희는 일부러 할인을 받으려고 말한 건가…?
하긴, 커플이라는 말 자체를 안내원 분이 꺼내기도 했고, 그렇다는 건… 다른 사람이 보기엔 우리는 커플처럼 보인다는 소리다.
음… 그렇게 잘 어울리려나…….
“알겠습니다~”
유희가 이쪽을 찌릿하고 쳐다본다. 음… 그래. 싸게 오면 좋긴 하니까…. 유희는 더 싼 가격에 즐기기 위해 대답한 것이다. 다른 마음은… 없겠지.
무사히 커플 할인 20%, 거기에 카드사 50%할인을 받아서, 엄청 싼 가격에 들어올 수 있었다.
“ㄷ, 다행이네……. 중복 할인이 돼서.”
“….”
정작 유희 본인이 커플이라고 말해놓고 부끄러운 건지,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일단 뭐부터 탈까? 역시 롤러코스터려나?”
전 세계 우드롤러코스터중 높이 1위, 길이 3위, 그 외 각종 기록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큰 롤러코스터. 사람들이 이곳에 온다면 이 롤러코스터를 탈 목적으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한 번 기다리면 짧아도 1시간, 길면 3시간이 때문에, 적절한 타이밍을 봐서 줄을 잘 서야한다. 운이 나쁘면 기다리다가 결함이 생겨 운행을 중단할 수도 있다.
나이가 거의 수현씨와 동갑인데, 아직도 잘 운영한다는 것은 그만큼 유지보수가 잘 된다는 증거다. 다른 몇몇 놀이기구는 운행중단을 해서 그 자리에 방치 중이다. 5년 전에 중단한 팽이그네. 언제쯤 새로운 걸로 다시 올거야….
“아니.”
음… 무조건 이쪽으로 직행하리라 생각했는데, 유희의 생각은 달랐다. 아마 처음부터 좀 타기에는 무리가 있던 거 같다. 아침 먹은 지도 얼마 안 됐고 말이지.
“…이거.”
유희가 팜플렛을 건내주며 가리킨 곳에는 코믹스럽게 생긴 흰 백마가, 리젠트 머리를 하며 익살스럽게 웃고 있었다.
'회전… 목마…?'
뭐… 솔직히 재미없긴 하지만, 유희가 타자고 하니 거절할 순 없었다. 의외로 이런 순한 놀이기구를 탄다는 사실에 약간 귀여움을 느꼈다.
10년 전까지 운행하던 시설은 중단되고, 새롭게 리뉴얼 되서 바뀌었다. 말의 패인트 도색도 잘 됐고, 혼자타는 어린이들이 떨어지지 않게 안전장치도 생겼다.
그리고 마차는 물론, 두 명까지 탈 수 있을 정도의 길쭉한 검은 말까지 생겼다.
운행 시간도 짧고, 대기하는 사람들도 적어서, 금방 들어왔다.
“유희는 뭐 탈래? 아빠는 유희 옆에 탈게.”
작거나 평범한 말은 부모와 아이들이 다 챙겨갔고, 남은건 검은 말과, 마차, 그리고 촌스럽게 생긴 금색 말이었다. 가장 무난한 픽은 마차로 보인다만… 유희는 또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른다.
“....”
유희가 말 없이 원판을 걷기 시작했다. 따라 간 곳에는 광이나고, 약간 몸이 길쭉한 검은 말이 있었다.
뭐… 유희가 타고 싶다는데, 내가 뭐라 할 순 없다.
“앗.”
검은 말에 타려는 찰나, 우리의 반대편에서 돌아온 커플로 보이는 사람들이 먼저 자리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이거 타자~”
“끄래~”
어우. 남사스러워라. 뭐… 젊은 사람들이라 저정도 염장질은 그러려니 한다. 개중엔 대놓고 키스를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유희야!?”
갑자기 유희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커플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를 비켜줬다.
‘뭐라고 말했길래….’
멀리서 보고 있자니 유희가 먼저 타라는 듯 앞쪽에 착석했다. 내가 고르라고는 했지만, 뭔가 뒤에서 같이타자니 좀 민망한데….
“안 타?”
“ㅌ, 탈게….”
결국, 유희가 탄 검은 말의 뒷쪽에 탑승했다.
~~~
보통 놀이기구에는 재미있는 말투의 알바생들이 붙어있기 마련인데, 회전목마의 경우 그렇게 멘트 칠 순간도 없고, 거진 아동이 타는 놀이기구라 별도의 멘트가 없이 출발했다.
“ㅎ!”
“윽.”
덕분에, 의식적으로 유희와 접촉하지 않고 타려고 했었지만 갑자기 출발해버리는 바람에 유희의 등에 몸이 닿았다.
“ㅁ, 미안해….”
“…….”
옷이 얇아서 그런지 가느다란 몸매가 느껴지고, 은은한 샴푸향이 코를 간질인다. 더위 때문에 순간 정신을 못 차릴 뻔했지만, 다행히 덜컹거려서 다시 몸을 일으켰다.
‘휴우….’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남녀가 몸을 밀착시키면 묘한 감정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유희는 다 큰 처녀라 나에 대한 거부감이 생겼을 지도 모른다.
유희도 뭔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였다. 옆머리로 튀어나온 귀는 빨개져 있었다.
“후우…….”
다행히 내 몸은 반응하지 않은 채로 회전목마가 끝났다. 반응했다면 정말 대 참사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출구로 나오니 유희가 약간 더운 듯,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내가….
“유희야 잠깐만 기다려.”
서둘러 가까이 있는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 미니 선풍기와 부채를 사고, 음료까지 사갔다.
“…이럴 필요 없는데….”
거절하는 거 같아 심장이 쫄렸지만, 다행히 선풍기도 받아주고, 음료수도 벌컥벌컥 마셨다.
‘왠지 신나는걸.’
수현씨와도 놀이공원에 왔었지만, 그때는 완전 불편한 마음에, 스토킹 사건까지 겪어서 솔직히 재미가 없었지만, 유희는 전혀 달랐다.
날씨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방해받지 않는 오늘. 가면 갈수록 유희와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 든다. 이 기분이 계속되도록, 더 노력해야한다.
미니선풍기를 자연스레 쐬고 있는 유희에게 말했다.
“다음엔 어디 갈래?”
“…여기.”
유희가 팜플렛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안쪽에 있는 사파리월드에 가자고 했다. 많이 와 봤지만 여기는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는데 이참에 갈 수 있다니 잘 됐다.
하지만 문제점이 하나 생겼다.
“유희야 여기… 예약젠데?”
스마트예약. 사이트나 스마트 폰으로 미리 예약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예약한 놀이기구를 탑승한다. 잘만하면 같은 놀이기구를 두 번 연속 탑승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계속 연속으로 탄다면 다른 사람들의 기회를 앗아가는 거 같아 좀 그렇다만… 과거의 나에게 반성해야지.
“예약해놨어.”
“정말?”
“내가 가자고 했으니까.”
그래서 대기 시간이 짧은 회전목마를 타자고 했구나.
유희가 계획을 다 짜놓은 이상, 내가 뭘 하려고 할 필요가 없어졌다. 솔직히 부담됐는데, 다행이다.
유희를 따라 사파리를 타러 왔다. 호랑이 무늬가 칠해진 버스. 옆에 있는 표지판에는 ‘창문이 강화유리로 되어 있어 안심하셔도 됩니다.’ 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확실히 얼핏 봐도 단단해보이고, 쇠창살도 달려 있으니 믿음이 갔다. 뭔가 군용 버스 같다는 느낌.
“출발합니다.”
묵직한 중저음을 가진 기사님의 목소리와 함께, 버스가 출발했다. 길을 가다 조금 코너를 돌아서 들어가니, 맹수가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우와~!!”
아무래도 관람 요소가 많다보니, 이것도 어린애들과 부모님이 같이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신기해서 그런지 높은 목소리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나도 저절로 감탄사가 나올만큼 초 근접에서 본 사자는 대단했다. 가능하면 고개를 내밀어보고 싶다만, 그런짓을 했다가는 영영 못돌아 올 지도 모른다.
“오…!”
최대한 점잖게 보려고 했으나 가까이서 움직이는 곰의 모습을 보고 결국 탄성이 터져나왔다. 왜 그런거 있잖아. 어린이 영화인대 어른들이 더 재미있게 봤다거나 하는 영화. 이것도 같은 거라니까?
“유희야 저거 봐! 곰이 막──”
“…!”
…너무 들떠버렸나.
자연스럽게 유희의 어깨를 감싸 잡아당기며 말했다. 유희가 반가워할리가 없다.
“아, 그게….”
유희가 내 시선을 피한다. 어쩌지… 이대로 가면 또 어색해질 텐데.
“더워.”
“하긴. 덥지? 하하…….”
괜히 얼굴이 화끈해지고, 열이 올라오는것만 같다. 유희도 더운지, 괜히 선풍기를 자신의 얼굴에다 갖다댔다.
그리고 그 버스에는 에어컨이 빵빵 틀어져 있었다는 것을, 우리 둘 다 알지 못했다.
~~~
─우우웅.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신 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거절할까 했지만 월요일의 후환이 두려워 일단은 받기로 했다.
“여보세요.”
「부장님.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네 뭐… 짧은 통화면 가능해요.”
「ㅉ, 짧은 통화에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숨소리가 약간 거칠다. 거칠다기 보다는 뭔가 말을 더듬는다는 느낌, 평소의 신 팀장 같지 않았다.
보나마나 뭐가 잘 안된다거나, 출장에 대해 뭔가 물어보려는 거겠지.
“뭔데요?”
일부러 빨리 끊기 위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유희가 이쪽을 신경쓰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나 같아도 데이트 도중에 부모님을 제외한 다른 사람과 통화한다면 조금 화날 거 같다.
「지금 부장님 주변에 시끄러운 거 보니까 통화로는 안될 거 같네요.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세요?」
“아뇨. 오늘은 안 돼요. 데이트 중이거든요.”
「네!? 아…… 그러시군요. 그럼 내일은 괜찮으시나요?」
“내일이라면 뭐….”
「그럼 내일 다시 전화 드릴게요.」
“네. 수고하세요.”
수화기 너머로 전화벨 소리와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것을 보니, 신 팀장은 아무래도 출근 한 거 같다. 불쌍해라.
전화를 끊고, 다시 유희를 보자, 귀가 새빨개져 있었다.
“…유희야?”
고개를 푹 숙이고, 다른 곳을 보고 있다. 혹시 누군지 궁금한 건가?
“그냥 사무실 사람이야. 나중에 다시 통화하기로 했어.”
“ㅎ…!”
어라, 이 포인트가 아닌가.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ㅈ, 저쪽봐! 더워!”
“아… 그래….”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말실수라도 한 건가…?
통화때 한 말들의 기억을 되짚어 본다.
─여보세요.
─네 뭐… 짧은 통화면 가능해요.
─뭔데요?
─아뇨. 오늘은 안 돼요. 데이트 중이거든요.
─내일이면 뭐….
딱히 잘못한게…. 아니 잠깐만.
─데이트 중이거든요.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거 같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