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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내게 집착한다-23화 (23/96)

〈 23화 〉 예진. (8)

* * *

“…….”

회사에서와는 전혀 다른 산뜻한 분위기가 차내에 가득 찼다. 향수도 좋은 것을 썻는지, 원래 설치되어 있는 탈취제보다 좋은 냄새가 났다.

아무리 봐도 옷을 못 입는 것 같진 않은데, 그냥 정장이 안 어울리는 건가.

“정장 구하실 곳은 정하셨어요?”

“아, 네.”

옷을 잘 입은 건 둘째 치고,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정장을 구하기 위해 온 것이다.

사실 치마만 조금 올려 입고 와이셔츠 핏만 줄인다면 완벽할텐데, 이왕 이렇게 온 거 새 정장을 맞추는 것도 나쁘지 괜찮겠지.

신 팀장이 알려준 주소를 따라 차를 돌렸다. 강남역에 있는 한 브랜드 매장. 남녀 불문하지 않고 정장을 취급하는듯 하다.

차가 밀려 30분 정도 걸렸다. 이럴거면 그냥 지하철 타고 올 걸.

“와… 전용 주차장도 있네요.”

이 매장을 방문한 고객들만 쓸 수 있는 전용 주차장. 밖에서 유리창을 통해 보던 디자인부터 심상치 않았는데, 전용 주차장까지 있으니 가격이 안 봐도 눈에 선했다. 내가 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돈이 숭덩숭덩 나가는 모습을 상상하니 걱정됐다.

‘이런 데서 살았으면….’

차가 1.5대는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대당 면적이 넓은 주차공간. 정말 부자들만 이용하라는 오라를 풍긴다. 역시 강남.

“와….”

매장에 올라가는 길도 검정색 타일 계단에, 계단 손잡이는 도금이 되어있다. 진짜 금이라곤 생각되지 않지만, 그래도 입구부터 이런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신기하네요… 이런 곳이 있었다는 게….”

“네? 신 팀장도 처음 왔어요?”

“아, 네. 저도 검색만 하고 온 거라서요.”

“아하…….”

딱 봐도 비싸보이는 곳을 검색만 하고 올 정도면 얼마나 부자인거야…. 역삼 사는 것부터 일단 남다르긴 했지만.

정문에 도착하니 유리로 된 문에 흰색 글씨로 『CDNP』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마 브랜드 명인가 보다.

“어서오십시오.”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성이 우리를 맞아줬다. 교육을 빡세게 받았는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정장 맞출려고요.”

“이쪽으로 와주세요. 남성분도 맞추시나요?”

“아뇨, 저는 도와주러 온 거라서요.”

흰 대리석 바닥에 검정색 벽이 있어 깔끔한 느낌이 들고, 전시에도 신경 쓴 듯 적절하게 은은한 조명이 정장을 비춘다.

한 가운데는 고급진 목재로 되어 있는 서랍이 있고, 그 안에는 각종 귀금속이나 시계들이 정갈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가격표만 아니었다면 혹해서 사버렸을 것이다.

“이쪽에서 갈아입어 주세요.”

피팅룸 마저 고급이다. 문에는 전신거울이 달려있고, 터치 조작으로 열려서 최첨단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피팅룸이 3 개나 있었다.

신 팀장이 옷을 들고 들어가고, 나는 매장을 둘러보며 감탄이나 할 수 밖에 없었다. 집에 이런 공간이 있으면 어떨까 행복회로를 돌리며 신 팀장을 기다렸다.

잠시 기다리니 깔끔하게 차려입은 신 팀장이 안에서 나왔다.

“어, 어때요…?”

밝은 회색 바탕과 비슷한 계열의 더 밝은 색이 들어간 체크무늬의 싱글 브레스티드 재킷. 허리 통을 강조하는 형태로 되어있어 안 그래도 얇아 보였던 신 팀장의 허리가 더 얇아 보인다.

재킷 안쪽은 카라가 좁은 흰 셔츠를 입고 있고, 재킷과 셔츠 모두 팔길이가 짧아 세련된 느낌을 줬다.

하의는 스키니 진 처럼 통이 좁아 유려하면서도 얇은 다리가 강조되고, 신도 회색바탕의 앞이 뾰족한 구두를 신었다. 굽이 낮지만 그래도 신 팀장의 체형때문인지 키가 좀 더 커보이는 느낌이었다.

머리도 풀어서, 길게 늘어진 생머리가 커리어 우먼이라는 이미지에 딱 부합했다.

옷이 사람을 만든다더니, 신 팀장이 정말 모델 같았다. 괜히 머리를 이리저리 만지며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갭차이가 느껴져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잘 어울리세요.”

평소 출근할 때도 이렇게 입으면 좋을 텐데. 내 속에서는 벌써 오케이 싸인이 났지만, 그래도 하나만 보고 살 수는 없으니 다른 옷도 입어보기로 했다.

신 팀장이 다시 들어가고, 참고 삼아 가격을 물어봤다.

“혹시… 가격은 어느정도 되나요?”

“상하의 세트로 1200만원 입니다. 셔츠는 별도로 70만원, 슈즈는 30만원 입니다. 구매하시면 서비스로 넥타이 핀과 여성분들은 리본 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 들고 간건….”

“네. 상하의로 960만원 입니다.”

“…….”

순간 “겁나 비싸네.”라고 말할 뻔했다. 연예인들 입는 양복이 이런 가격이라곤 들어는 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비싸잖아. 할부를 얼마나 해야되는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점원이나, 그걸 듣고 당황하는 나를 보니 어딘가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거의 100만원 든 내 맞춤 정장이 초라해 보일 정도다.

그것보다 신 팀장은 가격 같은 건 신경 안 쓰이는 건가…?

“이건 어떤가요?”

여타 정장과 다를바 없는 검정색 정장. 하지만 보풀이나 먼지 하나 없이 재단된 것을 보니 확실히 고급 원단을 쓴 것으로 보인다.

셔츠는 아까와 같은 셔츠에, 이번에는 허벅지 위로 약간 올라간 치마를 입었다. 신 팀장의 흰 다리가 보이면서 역시 옷만 잘 입으면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한다.

가격적인 면에도 그렇지만, 솔직히 여기에 약간 비치는 검은 스타킹만 입었다면 완벽하게 내 취향이라 이쪽을 추천하고 싶었다.

“이쪽도 어울리네요…. 머리 풀고 다니시는게 어때요?”

“ㄱ, 그럴까요?”

“네. 훨씬 나은데요?”

“그, 그럼 그러죠 뭐…. 어느 게 더 나으세요?”

“그건…….”

신 팀장의 태도로 보아 내가 골라주는 것을 구매할 것 같다. 본인의 의사가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나한테 부탁했으니 여기선 골라주는 것으로 답해야 한다.

물론 당연히 후자를 추천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구매한 건 신 팀장이었지만, 같은 공기를 마셔서 그런가 흔히 뽕이들 차오른다고 하나? 가슴이 괜히 벅차올랐다.

정장 상하의 세트와 셔츠, 그리고 구두까지 완전하게. 1060만원에서 처음 할인, 기타 멤버쉽 가입 등등을 통해 800만원까지 깎였다. 그래도 비싼 건 여전했다.

서비스로 향수와 멀티클리너까지 준다. 아마 시계를 닦는 용도로 쓰나보다. 왠진 모르겠지만 나도 멀티클리너를 받았다.

“출장때는 이 복장이면 될 거 같고…. 댁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아… 감사합니다.”

비싼 옷을 사서 그런지, 표정이 불안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입꼬리가 계속 올라가는게 보인다. 하긴, 나 같아도 거금 들여서 옷을 샀다면 온갖 감정에 휩쓸릴 거 같다.

매장을 나와서 40분, 신 팀장의 집에 도착했다.

“여기에요?”

“아, 네…. 이쪽에서 내려주세요. 감사합니다.”

역삼에 산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사는 곳이 사는 곳이라 고층 아파트, 그것도 신축된 건물에 살고 있는 거 같다.

“아, 부장님.”

“네.”

“저희 집에서 차라도 한 잔 하시지 않을래요? 오늘 고마워서요.”

“아뇨 됐어요. 뭐 대단한 일 한 것도 아니고. 팀장님도 쉬어야죠. 솔직히 저도 쉬고 싶고요.”

“아, 네…….”

신 팀장이 차 문을 닫고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본다. 이대로 가버리면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아 울 것 처럼 표정이 울상이었다.

‘하아…….’

너무 쓸데없이 착한 나를 질책하며, 결국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댔다.

커피 마시는 정도라면 괜찮겠지.

~~~

“실례합니다….”

역삼 아파트 답게 우리 집 보다 훨씬 넓어보이는 거실. 앞에는 60인치로 보이는 벽걸이 TV가 있고, 부엌은 화이트 톤으로 깔끔하게 인테리어 되어있었다. 정장 매장과는 다른 세련된 집이었다.

“혼자 사시는 건가요?”

“네. 가끔 어머니께서 올라오셔요.”

“어머님은….”

“고향이 대전이라서요. 어머니도 대전에 사셔요.”

“그렇군요.”

이 정도면 모시고 살아도 되지 않나 싶지만, 괜히 참견할 일은 아닌 거 같다.

“커피는 뭘로 드세요? 블랙? 라떼?”

“아, 라떼로 주세요.”

잠시 기다리자 향긋한 커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방향제 냄새와 섞여서 왠지 모르게 카페 분위기가 난다.

“관리하기 힘드시겠어요. 돈도 많이 들고.”

“돈 문제는 없어요. 쓸 곳이 이런 데 밖에 없거든요.”

“….”

뭔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든 기분이다. 같이 공유할 상대가 없어서 펑펑써도 돈이 남는 건가….

뭔가 계속 히스테리 부리는 이유를 알 거 같다.

“그… 미안해요.”

“아뇨. 익숙해요 이런 건. 드세요.”

“잘 마실게요.”

커피 맛은 달달했지만, 방금 전 그 언행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져서 쉽사리 넘어가지 않는다.

“어떠세요?”

“네. 맛있어요.”

가만 보면 신 팀장도 이제 시집 갈 나이다. 아니, 좀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점점 결혼하는 나이가 늦어지고 있다곤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아직 젊을 때 가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 점을 본인도 알고 있을 텐데, 내가 그 역린을 건드린 듯 했다.

“부장님은… 결혼 하실 생각이 있나요?”

“……글쎄요.”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아마 유희가 시집가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제 놀이공원에 갔을 때 확실히 정했으니까.

“팀장님은요?”

“저는… 하고 싶은데 포기한 격이죠.”

“에이. 아직 포기하기엔 이른 거 같은데.”

“네…?”

“아직 중반이잖아요? 집도 잘 살고, 적당한 남자 잡아서 결혼하면 될거 같은데. 옷도 말이죠, 오늘 처럼 입으면 사람들이 조금은 보는 눈이 올라가지 않을까요? 솔직히 치마 길이랑 스타킹… 아, 미안해요. 말이 너무 헛나왔네요….”

“…….”

상담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위로의 말을 건냈다. 마지막에 내 취향이 드러나서 NG가 나긴했지만… 아무말도 안하는 것을 보아 그냥 넘어가 주는 것 같다.

커피를 다 마시고, 갈 준비를 했다.

“저 부장님…….”

“네.”

“혹시 고민 상담 해 주실 수 있나요?”

“네… 해결은 못할 수도 있지만, 듣는 건 해드릴게요.”

신 팀장이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를 한 후, 심호흡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왜 결혼 못한 건지 아세요?”

“…….”

설마 결혼 상담일 줄이야…. 안 그래도 민감한 나이일 텐데, 속으로 정말 미안했다.

어쩔 수 없이 TV 건너편에 있는 소파에 앉아 끝까지 들어주기로 했다.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어요. 잘생겨서 성격이 별로 안 좋을 줄 알았는데, 주변 사람들도 챙기고, 저한테도 신경 써 주셔서 좋아하게 됐거든요.”

“그런가요.”

뭐야, 나 말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잖아. 역시 최 과장이 장난친 헛소문이었군. 낼 만나면 혼내줘야겠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절 봐주지 않았어요. 저와 같이 있어도 다른 게 눈에 잡혀보였달까… 그래서 그 사람과 대화 할려고 여러가지를 했는데… 오히려 독이 된 거 같아요.”

“독이요?”

“네… 항상 그 사람 앞에 서면 괜히 긴장해서 화만 내고… 별것도 아닌 것에 딴지 걸고 싶어지고… 아무튼 제 애정이 이상한 방향으로 표출 된 거 같아요. 지금은 뭔가 포기하니 나아졌지만요.”

“그렇군요….”

그래서 그렇게 히스테리를 부렸던 거구만. 그 좋아한다던 사람과 잘 안 돼서, 주변 사람들한테 괜히 짜증낸 것이다. 그 마음이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지만, 그 분노를 다른 사람들에게 표출하는 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만약 부장님이라면 그 사람한테 어떻게 했을 거 같으세요?”

“저는… 그냥 고백했을 거 같은데요. 전하지 않으면 팀장님 말처럼 독이 될 수도 있잖아요?”

“역시 그렇게 생각하시네요…….”

“뭐 그렇죠. 그 사람이랑은 연락하고 계세요?”

“네… 연락하고 있어요.”

“결혼은요?”

“…안 했대요.”

“그럼 다행이네요. 어차피 그 사람도 장가 가고 싶어 할 테니, 시험삼아 해보는 건 어떠세요? 계속 끙끙 앓는 것 보다는 낫잖아요?”

“그것도 그렇네요…. 감사합니다. 억지로 집에 끌고 왔는데 상담도 해주시고….”

“아뇨. 커피 잘 마셨어요.”

자리에서 일어나서 현관문 앞에 섰다. 이제 집에 가서 한숨 눈 좀 붙여야 할 것 같다. 부자동네에 와서 그런지 기가 빨리는 기분이다.

“부장님.”

신발을 신어 나가려던 그 때, 신 팀장이 내 옷자락을 잡았다.

“부장님이라면 고백한다고 하셨죠.”

“네… 그렇죠?”

“그럼 저…… 고백할게요.”

“네…?”

신 팀장이 기어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ㅈ, 저랑 교제해 주실 수는 없나요…….”

“…….”

방금 전 최 과장을 의심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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