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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내게 집착한다-25화 (25/96)

〈 25화 〉 예진. (10)

* * *

대부분의 출장은 박단위로 일정이 짜여져있거나, 뭔가 일이 없지 않는 한 하루 출장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밤 늦게 돌아오는 사이클인 것이다.

오늘이 금요일이라면 늦게 자고 오는 것도 가능하지만, 하필 목요일이라 그럴 일도 없었다.

즉, 시간이 엄청 빠듯하다는 것이다.

─쪼오오옥.

기차 도착까지는 아직 20분이나 남았다. 다행히 둘다 그렇게 늦는 사람은 아니라, 시간 맞춰서 역 앞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는 코레일 전용 라운지. 잠시 커피를 마시며 숨을 돌리고 있었다. 용산역도 만나기엔 좋지만, 역시 서비스 시설은 서울역이 갑인 것 같다.

“방심했어…….”

무슨 일인지, 옆좌석에 앉은 신 팀장의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요 3일간, 신 팀장은 나뿐 아니라 여러 부서의 눈에 든 모양이다. 하긴, 주말 사이에 사람이 저리 변했으니 놀랄 만도 하지.

성격도 상당히 유해졌고, 잠깐 마주친 계단에선 무려 팀원들과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고 있었다. 장족의 발전이라 괜히 가슴이 뿌듯해졌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래서 고민 터놓은 사이는 될 줄 알았더니, 그 정도까지는 아직 아닌가 보다. 나야 뭐 편하지만.

“개인적인 거에요?”

하지만 미팅의 지장이 있을 고민이라면 또 다르다. 개인이 아니라 회사의 이미지가 걸린 문제니까.

“네…. 신경 안 써주셔도 되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있으니 예민해지는 건 당연한 건가. 기차에서 잠깐 눈붙이면 나아지겠지 뭐.

“…….”

그건 그렇고, 오늘 입은 정장이 정말 눈에 잘 들어온다. 그 비싼 돈이 전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옷도 깔끔했고 머리도 그때보다 더 단정해졌다.

무엇보다 그 때는 입지 않았던 검은 스타킹이 눈에 들어온다. 자꾸 보지 않으려 하는데 눈이 계속 슬쩍슬쩍 신 팀장의 다리 쪽으로 향했다.

“가요.”

“아, 네.”

이 짓을 멈추게 한 것에 감사하며,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신 팀장의 뒤를 따라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

“두 시간이면 가니까, 그 동안 눈 좀 붙일게요.”

“아, 네…. 여기 안대요.”

“감사합니다.”

신 팀장이 앞 좌석 주머니에 있는 안대를 나에게 건내줬다. 원래는 없었는데, 또 언제부턴가 생긴 듯 하다.

“아침은 드셨어요?”

“네. 뭐.”

중학생 때까지만해도 중간중간 간식차를 모는 아줌마가 지나가서 좋아했는데, 언제부턴가 폐지 되었다. 뭔가 일이 있었던 듯 하다.

그래도 도시락 반입은 허용되는지라 이동하는 동안 식사가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유희가 만들어 놓은 샌드위치 덕분에 도시락에 돈 쓸일은 없었다.

“눈치 안보시고 식사하셔도 돼요.”

“아, 네….”

제육냄새가 나면서 조금 구미가 당기긴 하지만, 남의 음식을 뺏어먹을 순 없다. 그리고 졸리다. 이어폰에서 나오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시야가 점점 블랙아웃되었다.

“어린 년이 말이야!”

몇 분이 지났을까, 아침햇살이 창문을 통과해 눈이 부실 정도의 시간에,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가 이어폰을 뚫고 들렸다.

“…!”

눈을 떠보니 이상하게 배나온 할아버지가 신 팀장을 노려보고 있었고, 신 팀장도 지지 않고 그 할아버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차내 음식 섭취는 허용인데요.”

“그럼 냄새를 풍기지 말고 먹던가! 잠을 잘 수가 없잖아!”

“그럼 딴 칸으로 가시던지요.”

“이──”

“저기요 영감님. 지금 냄새 풍기는 것보다 당신 목소리가 더 민폐거든요? 이쪽 알아서 할 테니까 잠이나 주무시죠?”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역무원 불러서 해결할까요?”

“이… 이…!”

이런 사람들은 관리직을 부르면 게임 끝난다. 지도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단지 목소리가 더 커서 자기의 말이 맞다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을 뿐이지, 정론을 들이대면 입꾹닫하고 아무말도 못한다.

“불러보던가! 그래!”

“네.”

결국 그 할아버지는 다음역에서 내렸다. 딱히 잘못한것도 없는데 자기 불편하다고 딴지 거는 사람들이 제일 싫다. OUT 좀 해버렸으면.

우리쪽도 역무원한테 주의 받아서, 나도 같이 빠르게 먹어치워버리고, 자리 주변에 향수까지 뿌렸다.

“괜찮아요?”

“ㄴ, 네….”

금방이라도 울 듯이 목소리를 떨고 있었다. 그 할아버지 목소리가 장난아니긴 했지.

“잘했어요. 보통 그런 상황에서 그냥 아무말도 못하거든요.”

“후우….”

“아직 1시간정도 남았으니까 눈 붙이세요. 그럼 좀 풀릴거에요.”

“네에….”

“여기 안대요.”

“감사합니다….”

신 팀장이 안대를 쓰고 강제로 취침모드에 들어갔다. 숨 고름이 자연스럽게 될때까지 지켜보다가, 나도 다시 안대를 썼다.

~~~

“하암….”

자다 일어나다 자다 일어나다 해서 그런지 엄청 피곤하다. 눈 감으면 5초 이내로 잠들 수 있을만큼 눈꺼풀이 무거웠다.

“일어나셨어요…오?”

“…?”

신 팀장이 고개를 돌린다.

나는 스트레칭을 하기 위해 잠시 일어난 상태였고, 신 팀장은 아직 앉아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굳이 고개를 돌리는 이유가──

“…!”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 남자든 여자든 수면상태로 들어가면 피가 그쪽으로 쏠리면서, 자연스럽게 단단해지고 서게 된다. 발기는 성기능이 건강하다는 증거지만, 그렇다고 남들 앞에서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다. 특히 여성 앞에선.

“크흠….”

괜히 큰 소리를 헛기침을 하며 아랫쪽을 가방을 올려놔 가렸다. 서는 것도 맘대로가 아니지만, 가라 앉는 것도 맘대로가 아니라 곤란할 따름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같은 단어지만 억양은 다르다. 여유롭게 웃으며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아마도 회장이겠지.

복장도 금방이라도 골프장에 갈 거 같은 가라달린 하늘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

“잠시 이쪽에서 기다려주시겠어요?”

그리고 정장을 입고 남색 배경에 붉은 색과 하얀색 무늬가 있는 넥타이를 착용한 남성이 우리를 안내 해줬다. 아마 부사장이거나 이사급이겠지.

중소기업이라도 이런 지방쪽은 건물이 고급스러운데가 많다. 오늘 방문하는 곳은 규모도 커서 한 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직원들 좌석들도 깨끗하고, 미팅용 룸도 불투명한 유리벽으로 깔끔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잠시 기다리니 인턴으로 보이는 여성이 커피를 타다 주었다.

“자료 준비는 잘 됐어요?”

“네…. 일단 하긴 했는데….”

가방에서 꺼내든 서류봉투에는 이번에 광고할 상품과 제시 단가가 적혀져 있다.

어찌보면 여기 오길 잘한 것 같다. 안 그랬으면 중소기업 특유의 네고 때문에 손해를 볼 수 있으니까.

그런 행위를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이쪽도 최대한 이득을 보는 구조로 가져가야 하니까…. 어쩔 수 없는 거다.

“긴장되세요?”

“좀 그렇네요….”

“뭣하면 저도 도와드릴게요.”

“아뇨, 괜찮아요. 애초에 여기 데리고 온 것도 제 억지니까…. 그냥 있어주시는 것 만으로 감사해요.”

“그럼 뭐──”

“아이고 기다리셨죠. 김영섭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신예진 팀장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김찬희 부장이구요.”

“반갑습니다.”

의외로 부사장으로 보이는 사람까지 들어올 줄 알았더니 회장만 들어왔다.

“몇 살이에요?”

“ㅅ, 서른 여섯입니다.”

“이야 젊어보이네~ 우리 딸내미랑 닮았어.”

“아하하….”

성희롱이라던가 그런게 아니다. 아무말이나 던지며 간을 보는 것이다. 거짓도 없고 가식도 없지만, 단지 한 마디 던지는 것 만으로 상대 기량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정도는 되야 기업 대표 하나보다.

더 이상 신 팀장이 말려들지 않게 중재했다.

“진행할까요.”

“그래요.”

역시, 예상대로 눈빛이 바뀌었다. 옆에 내가 있으니 바가지 씌운다거나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저희부터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은──”

그리고 무사히, 적당한 가격 조절을 해서 오히려 싼 가격에 광고를 맡길 수 있었다.

광고 퀄리티는 지금까지 여기서 해온 걸 보면 잘 나올 거 같고, 신 팀장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거 보면 딱히 꼬인 것은 없는 모양이다.

“하우….”

사무실에서 나오자 신 팀장이 풀린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수고하셨어요.”

“감사합니다…. 부장님 없었으면 못 할 뻔했어요.”

“네 뭐….”

남자만 그득그득한 줄 알았더니, 여직원도 어느정도 있고, 게다가 미팅은 대표와 2대1로 했다. 역시 날 좋아해서 꼬신 건가. 신 팀장 답지 않구만. 그래도 나도 일을 어느정도 빼먹을 수 있었으니 이득이라면 이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차 시간은 오후 5시. 생각보다 미팅이 빨리 끝나버려 시간이 좀 남았다.

─꼬르르륵.

신팀장의 얼굴이 빨개졌다. 실외라서 다행이지, 사무실이었으면 큰일날 뻔했다.

내가 낸 소리는 아니지만 나도 배고픈 상태다. 아마 이쪽 대표도 점심 때문에 빨리 끝낸 듯 싶다.

“밥부터 먹을까요?”

“네….”

이왕 온 김에 부산 오면 빠질 수 없는 돼지국밥 집에 들어왔다.

“어서오세요~”

들어오자마자 고기향과 열기가 우리를 덥친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긴 하지만 바로 앞에 가야 시원함을 느낄 수 있지 조금만 멀어진다 싶으면 엄청 더워진다. 그래도 이런데가 맛있는 법이다.

적당히 자리에 앉으니 구수한 억양을 하는 아주머니가 우리를 맞아줬다. 체크무늬와 꽃 무늬가 있는 촌스런 앞치마와, 머리에는 두건을 쓴 인자한 아주머니 상이었다.

“국밥 두 개요.”

“네~”

메뉴를 시키니 물과 밑반찬이 나온다. 적당히 버무려진 시금치와 간장마늘, 쌈장과 고추까지 나왔다.

책상 한 켠에는 냉면에 뿌려먹는 식초와, 항아리 안에 깍두기가 담겨있다. 정말로 항아리인 건가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항아리의 기능은 하지 않는 모양이다.

“….”

정면의 앉은 신 팀장을 보기가 좀 그랬다. 더워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단추를 푼 틈 사이로 약간 가슴골이 보였기 때문이다. 일요일 날 원피스를 볼 때도 그랬지만, 역시 신 팀장도 한 가슴 하는 거 같다.

“맛있게 드세요. 이번엔 제가 살게요.”

“아, 고마워요.”

이럴꺼면 돈까스도 시킬걸이라는 사족은 넣어두고, 바로 밥을 말아 깍두기를 얹어 입으로 넣었다. 회사 주변에 있는 못하는 돼지국밥집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돼지 특유의 냄새가 나긴 나지만, 좋은 방향으로 났다. 비리지만 그것을 커버할 정도의 단백한 고기향과 깍두기의 김치향이 입안에서 서로 어울리면서 목으로 넘어가라는 길을 만들어 준 것 처럼 느껴졌다.

“맛있네요.”

“그러게요.”

수저가 뚝배기를 긁는 소리와 깍두기를 아삭거리는 소리, 그리고 젖가락과 젖가락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순식간에 국밥을 먹어치웠다.

“……이런 말 하긴 그런데, 의외로 잘 드시네요. 돼지국밥은 호불호 갈리던데.”

“이, 이상한가요…?”

“아뇨. 이상한 건 아니고… 그냥 맛있게 드셔서요.”

“아하하….”

국밥집의 더위에 적응한 몸이 밖에 나오니 다시 새로운 기압에 휩싸이는 기분이 든다. 점심을 먹었는데도 기차 시간까지는 꽤 많았지만, 돌아다닐 체력은 이미 방전된 상태였다. 그렇다고 역사를 가자니 역내에 2~3시간 죽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어디 적당히 카페라도──”

“부장님.”

신 팀장이 내 말을 끊었다. 뭔가 결심한 눈이었다.

“저기서… 쉬다가지 않으실래요…?”

“…….”

신 팀장이 가리킨 곳에는, 최근에 건축한 것으로 보이는 깔끔한 비즈니스 호텔이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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