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지희. (12)
* * *
“…….”
유희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침착해지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헤어지자고?”
“…!”
초점을 잃은 유희의 눈이 나를 매섭게 바라본다. 유희와 마음을 트기 이전의 눈. 집에 처음 데려온 날의 나를 경멸하는 눈이었다.
“자기가 뭐라 하든 난 상관 안해.”
“…….”
거짓말이다.
끝내자고 말하면 분명히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것이다. 나를 볼 때마다 무시하고, 대화도 꼭 필요한 것만 톡으로 하는 그 시절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돼서는 절대로 안 된다. 유희와 다시 떨어지는 게 싫었다.
“절대 안 헤어져.”
“…!”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아, 니. 그냥….”
유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아줬다. 이불로 자기 몸을 가리고 있는 유희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고, 유희의 코가 내 가슴에 닿는 게 느껴졌다.
“헤어진다고… 할 줄 알았어….”
“그럴 리가 없잖아.”
지금이 좋다. 유희와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지금이 좋다. 시크하면서도 상냥하고, 또 밤에는 평소와 다르게 요염해지는 모습이 좋다.
누가 이런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싶겠냐고.
“유희 너를 사랑하니까.”
“……응.”
사귀는 것 자체는 적어도 불법은 아니니까. 딱히 사실이라고 해서 법적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도덕적 윤리 의식이 있고, 전 세계적으로 안 좋게 보는 것은 사실이다. 소문으로 퍼진다면 잘리는 것도 시간 문제다.
‘지희씨를 어떻게든 잘 구슬려야….’
무언가 방법이 없을까, 아무리 지희씨라지만 언젠가 퍼질 것이다. 지희씨와 친한 건 나뿐만이 아니니까. 도게자를 해서라도 막아야 된다.
나와 유희의 앞으로를 위해서.
~~~
“안녕하세요.”
“응.”
다음 날. 지희씨를 불러냈다. 아마 본인도 인지하고 있었는지, 자기도 할 말이 있다며 바로 나온다고 전했다. 유희가 같이 따라온다고는 했지만 지희씨에게 부담을 주긴 싫어 혼자오게 되었다.
적당한 거리에 있는 서울대입구역의 카페. 사람이 많아 진중한 얘기를 해도 별로 눈에 띄지 않으니 딱 안성맞춤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 데도 서로 정장을 입은 것을 보니 약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 날씨가 덥네. 집은 괜찮아?”
“늘 에어컨 키고 있으니까요….”
“하긴….”
“…….”
막상 얘기를 꺼내려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서로 조금씩 껄끄러운 분위기가 되어 이대로는 커피만 다 마시고 가게 생겼다. 꼭 있다니까. 모여서 올 때 혼자서만 커피 다 마시는 사람들.
“부장님.”
내가 머뭇거리자 지희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단호하면서도 올곧은 표정이 결코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중간한 말발로는 안 된다. 나는 지희씨를 설득시키려 나온 것이다. 적어도 일반적인 통보는 받지 않기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해 왔다.
예를 들어, 내 재킷 안주머니 속에 있는 흰 돈 봉투라던가.
“죄송해요!”
“!?”
긴장된 상황과는 다르게, 지희씨가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제가 어제 너무 심했죠!”
“응……?”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연신 사과를 해댔다.
“제가 부장님한테 이상한 소리를 해 버려서…. 어제 심란하셨죠… 죄송해요….”
“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안주머니로 가려는 손이 멈췄다. 그리고 안도감이 찾아오면서 긴장해 있던 몸이 풀린 탓인지,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와 버렸다.
“휴우우우우….”
“부장님…?”
“크흠. 아무것도 아니야.”
“뭐예요 그게~”
“아하하… 어쨌든 사과해 줘서 고마워. 조금 심란하긴 했거든.”
“죄송해요….”
“괜찮아 이제.”
역시 단순한 추측성 발언이었던가보다. 어제 유희와 진지하게 생각했던 게 다 바보같이 느껴졌다.
어색했던 분위기가 가벼워지고, 서로의 표정도 밝아졌지만, 아직 지희씨는 할 말이 남아 있었는지 나가려하지 않았다.
“부장님. 부장님도 어제 말씀하셨었죠. 좋아하냐고.”
“어제…? 아…”
─혹시… 나 좋아해?
어떻게든 얼버무리려고 생각해 낸 변명이 생각났다. 정말 급해서 억지로 논리를 끼워 맞춰서 생각해낸 거라 지희씨에게 미안했다.
“그랬었지… 미안──”
“좋아해요.”
“…….”
순간 흐르는 둘 사이의 정적. 거의 무음일 정도로 소리가 들리지 않다가, 다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점점 들어오기 시작했다.
“뭐라고…?”
“좋아…해요.”
확인차 물어 봤지만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잘못 들은 게 아닌 것이다. 어떨떨한 표정으로 지희씨를 바라보자 지희씨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뭔가 말이라도 해 줬으면 하는 표정이라는 것을 지으면서, 카페 내는 시원하지만 지희씨의 귀가 밖에서 더위먹은 것처럼 빨개지는 것이 보인다.
“그… 언제부터?”
“아마도… 처음부터요.”
“처음부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지희씨가 입사하고, 나에 어필하려는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수현씨처럼 그랬으면 모를까, 딱히 둘이서는 사무실에서만 보지, 그 외의 장소에서는 본 적이 없다. 그나마 최근에 몇 번 주말에 만난 게 전부다.
“네… 뭐랄까… 제가 부장님을 자각한 건 그때부터였어요. 부장님 출장 갔다 오신 날…. 엉덩이에….”
“…….”
엉덩이라는 말을 들으니 생각난다. 신 팀장의 유혹을 뿌리치고 지하철에서 하필 지희씨의 엉덩이 사이에 내 것이 보란 듯이 안성맞춤으로 껴졌으니까. 나는 지희씨에게 간접치한을 저질러버린 것이다.
“그건 사과할게. 미안해.”
“사과할 건 저예요…. 과장님까지 끌어들여서 거짓말을 했으니까요….”
“거짓말이라니… 아, 그랬던 거구나.”
“죄송해요….”
역시 뭔가 했지만 역시 둘이 사귄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하긴, 지희씨가 아니더라도 둘이 사귀더라면 최 과장이 진작에 말해 줬겠지.
그리고 둘은 연인이라기에는 너무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많이 하긴 했다.
“…….”
“…….”
물론 그렇다고 해도 지희씨의 고백을 받아줄 순 없다. 나에게는 유희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 전이라도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도 그냥 싹싹하고 친한 직장 동료 정도로 생각한다. 소꿉친구가 이성으로 보이지 않는 것과 똑같은 논리랄까, 나는 지희씨가 이성으로 보이지 않았다.
“지희ㅆ──”
“아뇨! 답은 안주셔도 돼요!”
“…….”
“그냥…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어차피 부장님은 유희씨가 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안녕히 계세요.”
“지희씨!”
지희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뛰어나갔다. 서둘러 쫓아가려했지만 왠지 다리가 떼어지지 않았다.
“하아….”
지희씨의 걱정보다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한 내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하지만 지금 쫓아갔다가는 지희씨에게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몰라 무서웠다.
“자기… 왔어…?”
“응. 근데 왜 그렇게 헉헉대고 있어?”
착잡한 심정으로 집에 돌아오자, 유희가 엄청 땀흘린 모습으로 현관에서 나를 맞아주었다.
“운동을 좀 해서….”
“그래….”
“어떻게 됐어?”
“그냥 착각이었대.”
“그래?”
“응.”
“뭐야 그 여자…. 샤워할 건데 같이 할래…?”
“아니… 됐어.”
“하지만──”
“아니. 오늘은 정말로…….”
“……알았어.”
“미안해.”
유희가 쓸쓸한 뒷모습으로 욕실로 들어 갔다. 왠지 미안하지만, 계속 마음 속에 뭔가 걸리는 게 있어 함께할 수 없었다.
분명 우리 사이는 착각으로 끝났고, 지희씨의 고백도 일단락됐다. 사건이 끝난 것이다. 근데도, 그런데도 찜찜하다. 무언가 확실히 마무리를 짓지 않아 여간 찜찜한 게 아니었다.
분명 유희를 보면 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유희를 보고 흥분하지 않은 순간이었다.
‘이게 정이라는 건가….’
함께한지 3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관계를 잘 쌓아왔고, 싸운 적도 한 번도 없다. 가끔씩 생일 선물도 챙겨주 고, 출장 기념품 같은 것도 사주고, 친한 상사와 부하직원 관계였다.
하지만 막상 그 감정이 ‘연애’라는 감정으로 바뀌고, 거절당하니 그동안 지내 왔던 것은 전부 날아가 버 린듯 순식간에 거리감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아…….”
뭔가 굉장히 죄책감이 들었다.
~~~
“안녕하세요.”
“안녕.”
수현씨의 차분한 목소리가 더위로 싱숭생숭한 내 마음을 식혀줬다. 최근 겨우 말을 놨다. 본인이 계속 그러라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오셨어요.”
“응.”
사무실이 시원해서 그런가 전체적으로 텐션이 낮아진 느낌이다. 뭐 일하는 데서 텐션이 높아 봐야 뭘 하겠느냐마는. 진짜로 낮은 이유는 따로 있지만.
“커피 드세요.”
“고마워.”
수현씨가 타주는 달달한 커피. 아직 들깬 잠을 카페인이 번쩍 뜨이게 해줘서 손가락 움직임이 빨라진 느낌마저 든다.
“지희씨는 오늘도야?”
“네 뭐…. 도통 연락을 받지 않으니까요.”
지희씨는 반차를 썼다. 그것도 일주일. 여름휴가까지 합쳐서 10일이다. 오늘이 3일째 되는 날이다.
“…….”
“그렇게 걱정되세요?”
“아니 딱히. 쉬어야지 사람이. 지희씨는 너무 안쉬었어.”
“하긴 그렇죠 뭐.”
최 과장은 아직 우리 사이에 뭔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사무실에서는 티 안내기로 설정했다는 듯, 지희씨를 향한 걱정은 딱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걱정 안될 리가 없잖아.’
그 일이 있고 다음날 월요일. 잠이 오지 않아 사무실에 일찍 출근한 날, 지희씨에 책상에는 흰 봉투가 있었다.
「사직서」
그제서야 나는 나를 계속 불안하게 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아직 우리 부서 사람들은 모른다.
“부장님?”
“응?”
“……아니에요.”
그리고 왜인지, 최 과장의 표정도 좀 어두워진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