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지희.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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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지희. (12)편에서 마지막 부분에 최 과장 묘사에 대한 내용이 조금 추가되었습니다! 읽고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아….”
한숨을 쉰 건 내가 아니다. 뭔 일이 있어도 늘 밝았거나 화내거나 둘 중 하나였던 최 과장이 낸 한숨이다.
오늘따라 집에 뭔 일이라도 생긴 것마냥 유난히 한숨을 많이 쉰다. 평소 같이 그냥 화나는 일이었으면 화를 내고 말았지, 한숨을 푹푹 쉬는 사람은 아니다.
걱정돼서 최과장이 담배를 피우러 갈 때 뒤를 따라갔다.
“후우….”
평소라면 바로 눈치챘을 거리에도, 담배를 피우며 하늘 한 곳을 바라본다. 파란 하늘에 뭉게 구름이 느릿느릿 지나가고, 최 과장의 담배도 그에 따라서 점점 기리가 짧아지고 있었다.
“어이.”
“아, 깜짝이야!”
“그렇게 놀랐어?”
“그러면 누구나 놀라죠….”
“그런가.”
최 과장이 재떨이에 담배를 덜어내고 내가 앉은 벤치에 앉았다. 앉으면서도 한숨을 쉬는 것을 빼먹지 않았다.
“뭘 그렇게 한숨을 푹푹 쉬어?”
“그러게요…. 하아….”
웬만하면 이러지 않는데, 정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가보다.
“지희씨 이대로 그만두는 걸까요…”
“……!”
설마 서랍에 있는 사직서를 봤나?
‘아니….’
서랍에 넣어도 깊은 곳에 넣은 것이라 누가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최 과장이 내 서랍을 뒤질 사람은 아니다. 그냥 있는 휴가를 전부 써버리니 그만둔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엄청 큰 대기업이 아니면 남은 연차에 따른 보상은 안해주니까.
“에이. 아니겠지.”
이미 사직서를 받았으면서 거짓말을 했다. 뭔가 받았다고 말하면 진짜로 쇼크에 빠질 것 같아서이다.
“그렇… 겠죠?”
최 과장은 내가 아직 둘이 연기했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을 모른다. 어쩌면 이 또한 지희씨를 그리워하는 연기일 수도 있다.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다. 슬슬 돌아가야 한다.
“최 과장. 이제──”
“저희 둘. 사실 안 사귀어요.”
“…….”
“이미 알고 계신 눈치네요.”
지금 만큼은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최 과장이 이쪽을 휙 돌아보더니, 다시 하늘 쪽을 봤다.
“지희씨 휴가 쓴 거 보면 부장님이랑도 잘 안 됐나 보네요.”
“알고 있었던 거야?”
“네. 애초에 부탁 받아서 그런 거니까요. 부장님 애인분도 한번 뵈고 싶었고. 부장님이 놓치면 아까울 거 같은 사람이네요.”
“그래….”
말하는 뉘앙스로 보아, 지희씨가 우리를 가족이라고 얘기했던 부분은 모르는 것 같다.
“근데 저는 진심이었단 말이죠.”
“…뭐?”
“눈치 못 채셨어요?”
“전혀.”
서로 의아한 표정으로 몇 초를 바라본다. ‘이걸?’이라는 단어를 서로 생각했는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부장님 진짜 둔감하시네요.”
“그런 소리 많이 들어….”
“언제부터…?”
“글쎄요. 그냥 깨닫고 보니 그렇더라고요. 친한 동생이 이성으로 보이는 거. 꽤 많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최 과장의 표정이 왜 시무룩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만큼 슬픈 일은 없으니까.
“최 과장은….”
“네?”
“지희씨가 있었으면 좋겠는 거야?”
“……뭐 그렇죠. 이번에 안 떠나길 바래야죠.”
“그래….”
최 과장을 보고 결심이 섰다. 원래라면 최책감을 가지고서라도 지희씨의 결정을 받아들일 생각이었지만, 최 과장을 봐서라도 지희씨는 반드시 나와야 한다.
‘우선 연락을….’
스마트폰을 열어 지희씨의 톡에 메시지를 보냈다.
~~~
춥다.
계속 에어컨을 틀어놔서 그런가, 온몸이 너무 차갑다. 나이가 들어 가서 그런가 더 체감이 큰 것 같다.
‘겨우 차였을 뿐인데….’
어른스럽지 못하다. 이래서는 그냥 단순히 꼬맹이가 사고 싶은 거 안 사준다고 고집부리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주는 것도 아닌데. 뭘까 이 답답함은.
“캬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써본 장기 휴가. 슬슬 다른 곳 면접도 보러 가야 하는데,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묵혀놓는 건데. 괜히 고백만해서 상처받았다.
지금 술이 잘넘어가는 건 상처받아서 그런가. 알코올이 가슴에 스며들어 내 마음을 치유해주는 기분이다. 벌써 몇캔이나 거실에 쌓였다.
「당신 뭔데! 왜 나한테 이러는 건──」
TV를 켜도 흔하디흔한 삼류 드라마 밖에 안 한다. 여사원이 뭔 일이 있어서 화내고 있는데, 거기서 남자 상사가 키스하는 장면. 키스해 본지도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아마 4년도 더 됐나….
‘키스하고 싶다….’
이렇게 된 거 아무나 만나면 속으로 풀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은 넓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한두 사람 정도는 있을 텐데. 그냥 이 사람들이나 만나서 부장님 보다 먼저 결혼해서 부장님한테 복수를──
‘되도 않는 소리를….’
너무 자신감이 넘쳐있다. 그리고 쪽팔린다. 차일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부장님이 바람기가 있어 양다리라도 걸쳐준다는 그런 전개를 조금이라도 상상한 내가 쪽팔렸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차이는 게 이렇게 괴로웠다니. 이럴 거였으면 고백 받았을 때 좀 더 생각하고 거절할 것 그랬다. 다음부턴 그래야지.
‘다음…?’
아니, 그래 뭐. 다음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다. 내 사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고백해 올 수 있다. 나를 보고 첫눈에 반해서 고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뭔가 내 삶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이대로 계속 혼자 살지도 모른다.
「통화 괜찮아?」
……?
부장님에게서 온 톡. 뭐냐고. 자기가 차놓고 이제 와서….
「괜찮아요.」
그래도. 마지막으로 부장님의 낮고 허스키한 중저음을 들어두고 싶었다.
~~~
“먼저 내려갈게요.”
“응.”
최 과장이 내려가고, 지희씨에게 통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부장님….」
“잘 쉬고 있어?”
「네에… 잘 쉬고 있어요.」
딱 봐도 잘 쉬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평소 텐션 높던 지희씨의 목소리는 어디 가고 이쪽이 기가 빨릴 정도로 텐션이 낮은 목소리였다.
「부장니임~ 왜 전화하셨어요~?」
“……지희씨 술 마셨어?”
「아뇨~?」
목소리의 끝이 자꾸 올라간다. 목으로 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코로 소리를 내는 것처럼 애교섞인 콧소리도 들린다.
원인은 따지고 보면 나에게 있으니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지희씨. 진짜로 그만둘 거야?”
「…….」
일도 하고 해야하니 단독직입적으로 물어봤다. 지희씨는 인간적으로도, 일적으로도 좋은 사람이다. 지희씨 같은 사람이라면 금방 다른 곳에 들어가겠지만, 그래도 이쪽에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최 과장을 위해서라도 잡고 싶었다.
「그만 둔다고 하면 어쩌실 거예요?」
“그건…….”
계약서가 폼도 아니고.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둘 수 있다. 그걸 이 회사 사장도 아니고 일개 부서의 부장인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막고 싶었다. 중소기업 사장들이 유능한 직원이 퇴사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는 심정도 이랬을까 생각이 든다.
“많이… 아쉬울 거 같네.”
「……!」
“지금까지 큰 사고는 한 번도 없었고.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고, 지각도 거의 한 적 없었잖아? 게다가 다른 부서 사람들도 지희씨를 알 정도라고.”
어떻게든 설득해야 한다.
「부장님은 제가 어떻게 하셨으면 좋겠어요?」
“나야 물론 있어줬으면 해. 결정하는 건 지희씨지만.”
「…….」
스마트폰 너머로 깡통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다시 지희씨가 말했다.
「제 부탁 하나만 들어 주시면, 사직서 낸 거 없던 걸로 할게요.」
“부탁? 그래. 뭔데?”
「저랑 사귀어 주세요.」
“지희씨…….”
「안 그러면, 이대로 그만둘래요.」
“…….”
그동안 지희씨를 오해한 것 같다. 싹싹하고 밝으며, 언제나 배려하는 그런 성격인 줄 알았다.
하지만 어쩌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협박도 하는지금 이 모습이 진짜 지희씨의 성격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미안해."
지희씨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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