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시연 & 수현. (4)
* * *
“수현씨 잠깐만!”
다시 한번 불러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쓸쓸한 담배 냄새뿐이었다. 극단적인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에 감사하긴 해야겠지만, 수현씨의 마음에 무언가 걸림돌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음….”
돌아간 현장에는 수현씨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화면을 응시하며 일을 하고 있고, 잠깐 눈을 마주쳤지만 비밀로 해 달라는 듯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별수 있나. 그렇게 해야지.
─죄송해요!
뭐… 일을 맡기 싫어할 수 있다. 그건 그렇다고 치자. 통상 업무가 아니라 비밀리에 진행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수현씨 특성상 일을 맡기 싫다고 거절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리고 나를 거절하는 그 표정은 어딘가 서러운 표정이었다. 설마 일 하나 맡겼다고 서러운 표정을 지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분명 무슨 일이──
「부장님」
「네」
최 과장에게서 온 메시지를 보고 슬쩍 보다가 서로 눈이 마주쳤다. 화면을 향하니 다시 최과장이 대화를 이어갔다.
「수현씨 이번 주에 끝나죠?」
「네」
「수현씨가 계속 물어 봤거든요. 이번에 끝나면 여기 말고 다른 부서로 가냐고」
「그래요?」
수현씨가 그런 질문을 하다니, 좀 의외긴 하지만 대충 표정이 좋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정직원이 됐을 때 좋아라 하며 부서를 떠난다. 다혜씨도 그랬고, 나도 지금은 이 부서이긴 하지만 한때 그랬었다.
사람이 아무리 사무적이라고 해도 ‘정’이라는 것은 들기 마련이다. 물론 하루 이틀 가지고는 상관없겠지만, 그게 주 단위가 되고 1개월만 잘 지내도 확 들어버린다. 괜히 싸우다가 정든다는 말이 생기는 게 아니니까.
‘심란한 때에 일을 시켜서 거절한 건가….’
하긴, 마음이 싱숭생숭한데 거기에 무언가 더 들어오면 과부하를 일으키는 게 당연하다. 아니면 역시… 그때 수현씨를 거절한 일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음….’
어찌 됐든 지금은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한다. 최 과장은 바쁘고, 지희씨에게 부탁하기엔…. 월말이라 이것저것 정산하느라 바쁘다. 다른 신입이었던 현주씨도 다른 부서로 갔고, 남은 신입사원은 수현씨밖에 없다. 더 이상 우리 부서에 도움을 요청할 사람은 없다.
다른 부서에 요청할 인맥 같은 건….
─부장님 혼자 힘드시면….
역시 황 대리밖에 없나….
~~~
‘아아….’
키보드를 두드리며 잡념을 떨쳐 내려 해도 떨쳐낼 수 없다. 아니, 그것보다 부장님의 부탁을 밑도끝도 없이 거절해버렸다. 안그래도 사과드려야 할 마당에, 일을 더 키운 것이다.
“…….”
순간 마주친 부장님의 눈빛이 날 걱정해주는 것같이 보인다. 해야 할 말을 못 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저렇게 걱정해주시고 계시는데, 나는 무시하고 있다.
계속 도망치고 있다.
“과장님.”
“응.”
“부장님 여자친구분… 계셨나요?”
“아~ 응. 언제부턴진 모르겠는데, 꽤 오래 됐나봐.”
“그렇군요….”
“왜 혹시─”
“아~ 여기 주문이요!”
“아야야. 꼬집지마.”
“밥이나 드세요 과장님은.”
“예예.”
오늘도 부장님은 따로 드신다. 대리님과 과장님의 말에 의하면 도시락을 싸준다고 한다. 게다가 현재 동거중….
밥맛은 있지만 움직이는 동작이 느려진다. 일부러 ‘맛없어져라!’라고 주문을 건 것마냥 음식이 입안에서 점점 더 걸쭉해져가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수현씨 이번 주까지였지. 다음 주부터 다른 부서로 발령나고.”
“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런 인사는 당일날 해. 괜히 숙연해질라.”
“……네.”
퇴사하는 것도 아니면서 너무 티내니까 한심해진다. 그런 직장인들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안 돼야지 그렇게 다짐했는데, 결국 진상 직장인이 되어버렸다.
“맞다. 수현씨.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아뇨… 괜찮은데….”
“사양말구!”
“으음….”
“수현씨가 곤란해하잖아.”
“밥이나 드시라니까요?”
“넵.”
“수현씨.”
“네.”
대리님이 내 귀에 가까이 오시더니, 과장님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부장님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거야?”
“…!”
과장님이 눈치가 좋다고는 하지만, 대리님의 눈치는 훨씬 좋았다. 아마 아까 옥상에서 내려왔을 때 눈치채셨겠지.
“그게….”
“과장님. 다 드셨어요?”
“어. 그런데.”
“커피 뭐드실래요?”
“나… 아아.”
“맨날 먹던 것만… 알았어요.”
“왜?”
“먼저들어가세요. 사가지고 들어갈게요. 저희끼리 할 얘기가 있어서.”
“알았어.”
…과장님은 대리님 말씀을 정말 잘 듣는 것 같다.
~~~
근처 카페로 들어와 적당히 자리를 잡아 앉았다.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부담없이 말할 수 있는 장소로 적합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냐 뭘~ 뭐 마실래?”
“저는… 아니, 제 건 제가 살게요!”
“됐어. 과장님것도 사야되니까. 아, 부장님 걸 안 물어 봤네.”
대리님이 부장님께 전화를 걸어 부장님 몫까지 커피를 시키셨다. 기다리는 동안 대리님이 다리를 꼬고 앉아 또 상담해주셨다.
“이번엔 무슨 일이 있었어?”
“그게….”
대리님과 이러는 건 처음이 아니다. 처음 부장님을 만나 부장님을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상담을 대리님께 받았으니까.
“그랬구나~ 하긴. 부장님 비밀로 하셨으니까.”
“비밀로요?”
“응. 들킨 것도 옥상에서 몰래 도시락 먹다가 나한테 들켰다니깐?”
“아하….”
“그럼 수현씨는 자꾸 부장님을 피해버려서 곤란하다는 거네?”
“……네.”
“나도 이해해~ 나는 부장님 때문에 회사 관둘뻔했거든.”
“…정말요?”
“응. 부끄러운 얘기지만.”
“하지만 대리님이랑 과장님은 지금….”
“아… 응. 확실히 부장님보다 덜렁거리고 섬세하지도 못하지만 뭐… 그 사람만의 매력이 있달까….”
대리님이 과장님과 사귄다고 들었을 때는 깜짝 놀랐지만, 사정을 듣고나니 왠지 이해가 됐다. 나도 대리님처럼 나아가야 되는데 계속 못 잊고 미련하게 이러고 있으니….
“맛있게 드세요~”
시킨 커피가 나오고, 대리님이 같이시킨 초코 케이크를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
“솔직히 수현씨가 맞아.”
“네?”
“나도 그 사람이 끈질기게 구걸하는 바람에…가. 아니라, 어쨌든 그런 사람을 못 잊는 건 정상이야. 그리고 이번 주가 마지막이니까 불안해진 거지. 부장님과 더 못 볼거라 생각하니까.”
“네….”
“근데 말야. 부장님과 연락하는 건 가능하거든? 수현씨도 휴가 전까지 부장님이랑 잘만 얘기 했잖아? 무슨 일도 없었고.”
“그건 그 사실을 몰라서….”
“에이. 그럼 나하고도 과장님하고도 얘기하면 안 되지. 수현씨가 하려는 건 죄를 짓는 게 아니야. 커뮤니케이션의 한 종류라구. 설마 뺏을 생각은 없잖아?”
“…….”
“그러니까 똑같이 하면 돼. 다른 부서에 가서도 우리부서 놀러 와도 되고, 점심도 우리랑 먹어도 되고. 뭣하면 부장님도 가끔은 우리랑 먹으라고 강하게 말해. 그 사람 거절 잘 못하니까. 그렇게 자연스럽게 잊어가면 되는 거야.”
“제가 잘못 알고 있었네요…. 평생 연락 못할 거라 생각해서….”
“그래~ 아까 거절한 거 사과드리면서 원만하게 지내면 되는 거야. 그리고 수현씨 인기 은근 많은 거 알아? 이미 다른 부서사람들이 나보고 누구냐고 물어본다니까?”
“정말요…?”
“응!”
대리님은 못 잊는 게 정상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런 건 자연스럽게 잊어가야 된다고. 세상에 부장님만 있는 건 아니니까.
대리님의 말씀이 백번 옳다 하지만 대리님은 간과한 것이 한 가지 있다. 대리님이 말씀하신 것은 포기한 사람들이 취해야 할 행동이다.
─설마 뺏을 생각은 없잖아?
나는 아직….
“대리님. 먼저 들어갈게요. 부장님께 드릴 말씀 있어서….”
“아~응. 커피는 내가 전해 줄게.”
“죄송해요.”
“아냐~ 이번엔 꼭 하고 싶은 말 다해!”
“감사합니다.”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
아무래도 부서가 부서인지라 황 대리와 만날 시간은 점심시간밖에 없다. 이번엔 갑작스럽게 부른터라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부장님!”
“갑작스레 불러내서 죄송해요.”
“아뇨 괜찮아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
황 대리가 부담스러운 곳을 고르기 전에 적당한 국밥집으로 인도했다. 인테리어가 깔끔한터라 괜히 책상이 찐득찐득하거나 벌레가 꼬인다고 무시당할 일은 다행히 없었다.
“뭐 시키실래요?”
“음… 전 매운 순대 국밥이요.”
황 대리가 곱게 자랐다곤 하지만 딱히 가리는 건 없는지, 국밥집에 와서도 평범하게 자기 먹을 것을 주문했다. 저번에 대접받은 것에 비하면 초라한 가격이지만, 내가 사준다고 하니 고맙다는 표시를 아낌없이 했다.
국밥을 기다릴 동안 이야기를 진행했다.
“그래서…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게… 부탁하려던 직원한테 거절 당해서요… 혹시 괜찮으시면 도와주실순 없나──”
“할게요!”
“아… 네. 감사합니다.
혹여나 이쪽도 거절할까 내심 불안 했지만 도와 준다고 하니 다행이다. 어차피 내가 이사가 되면 이쪽이 수행비서가 될 거, 미리 경험하면 좋을 지도 모른다.
“그런 거였으면 전화로 간단하게 하셔도 됐었는데… 이렇게 대접까지 해주시니까 기뻐요.”
“아뇨… 저번에는 제가 대접 받았으니까요.”
이걸로 일은 순탄하게 진행할 수 있다. 이사가 될 수 있을진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 해 봐야지. 유희를 위해서라도.
“커피는 제가 살게요.”
“아뇨. 부하직원이 샀다고 해서요.”
“아… 그렇군요.”
“부장님!”
“아, 수현씨.”
건물에 들어오니 로비에서 수현씨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뛰어우며 나부끼는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더 찰랑거렸다. 뭔가 어색해질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가 보다.
“드릴 말씀이… 아.”
“누구세요…?”
“아, 신입사원 수현씨예요. 다음 주부터 정직원으로 근무해요.”
“아~ 안녕하세요.”
“수현씨 이쪽은 인사부 대리 황시연 대리.”
“안녕하세요….”
“아,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
“오전에는 죄송해요. 갑자기 내려가버려서…. 사실 일이 있었거든요.”
역시 뭔가 있었구나. 그래도 말해 줘서 다행이다.
“아냐 괜찮아. 그럴 수 있지.”
“그래서 말인데… 부탁하신거 제가 맡을 수 있을까요?”
“그건….”
“아, 그 일은 제가 맡게 되었어요. 수현씨가 굳이 안 맡으셔도 돼요.”
“네?”
“미안해 수현씨. 아까 거절당해서… 밥 먹을 때 말했거든.”
“……대리님.”
수현씨가 가만히 있다가, 목소리 톤이 바뀌었다.
“죄송하지만… 그 일 제가 맡을 수 없을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