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내게 집착한다-84화 (84/96)

〈 84화 〉 나영. (5)

* * *

“그 여자한테 미련이 남은 거야?”

“아니야.”

“왜 아닌데?”

“그건….”

“말해 줘.”

“…….”

유희의 사라진 초점이 다시 돌아온다. 아마 이성을 잃었다가 다시 돌아온 것 같다. 유희의 의도가 화내는 것이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유희랑 처음 대화한 날.”

“처음…?”

“응. 그러니까….”

반차를 쓰고 일찍 온 날, 처음 들었던 유희의 목소리. 즉, 유희가 날 부르며 자위행위를 했던 그날.

이라고 어떻게 말해….

“유희가 그….”

“으, 아, 아아아아!”

유희의 얼굴이 빨개지며, 그 이상 말하지 말라는 듯 내 입을 막았다. 조금 진정이 되자, 유희의 팔을 잡아 손을 살살 입에서 뗐다.

“그래서 그날에… 잠깐 나갔다 왔잖아?”

“응.”

“그때 만나러간 사람이──”

“그 여자야?”

“응….”

“뭐 했어?”

사실을 말할까 말까, 속으로 고민이 되었지만, 거짓말을 해 봤자 서로에게 도움이 안 되고,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아 말하기로 했다.

“재혼… 하자고 했어.”

“아빠가!?”

“아니… 엄마가.”

“휴우….”

순간 흥분했던 유희가 다시 감정을 가라앉혔다. 유희가 또 흥분하지 않게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래서?”

“물론 거절했어. 유희는 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

유희가 조용히 숨을 가다듬으며 내 발치를 쳐다본다. 아마 생각이 많은 거겠지.

만약에 그날 내가 허락을 했었다면, 나와 유희 사이의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전부 없던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럴거라 생각하니 조금 오싹해진다.

유희가 다시 고개를 들고, 나는 유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유희를 버린 사람한테 다시 만나게 해 줄 수 없다고 말했어.”

“아빠….”

“아빠는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그 사람을 만난 건 단순히 그냥 사람으로서, 그래도 유희를 낳아준 엄마니까. 남은 인생 잘 살라는 의미에서 만나 준 거야.”

“응….”

“걱정 마 유희야. 아빠는 유희를 선택할 거니까.”

“…!”

방금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유희는 이해한 것 같았다. 옆구리를 통해 유희의 팔이 감겨지고, 유희가 나를 꽉 안았다.

“…ㅎ….”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가슴팍부근이 점점 따뜻해지고, 유희의 어깨가 흠칫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나도 계속 유희를 끌어안으며, 유희의 체온을 온몸으로 느꼈다.

한참을 흐느끼던 유희가, 빨갛게 부어오른 눈으로 말했다.

“아빠.”

“응?”

“그 사람. 만나 보고 싶어.”

“……괜찮겠어?”

“응.”

유희의 부탁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스마트폰을 들어 약속을 잡았다.

~~~

평소처럼 출근하고 일한다. 바뀐 것이라곤 바깥쪽의 기온과, 나뭇잎이 점점 붉은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다는 것 정도.

그리고 기온이 떨어진다는 징조로,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하고 내리고 있었다.

“상무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응? 뭐가?”

“표정이 안 좋으셔서요.”

“그런가…?”

시연씨가 눈치가 빠른 건지, 금방 내가 고민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 같다. 그렇다고 딱 잘라 말할 수도 없고, 어떻게 말하지….

시연씨의 얼굴을 보니 얼버무릴 수도 없다.

“시연씨. 이거 친구의 이야기인데….”

“네.”

“만약 시연씨가 A라는 사람과 아주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데, 예전에 관계를 맺고, 안 좋게 헤어진 B가 갑자기 나아온다면, 어쩔 거야?”

“음….”

시연씨가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추더니, 턱에 손을 괴고 고민했다.

“음…. 이미 잘 만나고 있는데 굳이 건드는 이유가 있을까요? 너무 추한 거 아닌가요?”

“역시 그렇──”

“그래도.”

“…?”

“그래도… B가 정말로 뉘우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음… 어렵네요…. B는 혼자인 기간이 길었겠죠?”

“그…렇지.”

나영이와 이혼한 지는 10년도 넘었다. 짧았다면 짧았다고, 길었다면 길었다고 할 수 있다.

─역시 난 너밖에 없는 거 같아.

맞선을 봤다곤 하지만… 그때 그 말을 보면 혼자서 지낸 거겠지. 10년 동안.

시연씨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역시 저는 B에게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A의 동의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이지만요.”

“B? 왜?”

“계속 저만을 바라본 거잖아요? A와 사귄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A에겐 아직 무한한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그렇군…….”

“너무 제 말만 듣지 마세요. 어디까지나 한 가지 가능성이니까요. 대부분은 아마 A를 선택하지 않을까요?”

“그래….”

B라, A가 나올 줄 알았더니 의외였다. 사실 어느 것을 선택하든 혹시라도 나영이가 다시 나와 같이 살자는 제안을 한다 해도 나는 거절할 생각이다. 그저 상대를 다시 고를 만큼 나영이가 얼마나 상처받을까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상무님 얘기죠?”

“응!? 에, 그게… 아니….”

“에이 전부 티나요.”

“…….”

연기학원을 다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다….

“A는 상무님께서 지금 만나시는 분이고, B는….”

“전 아내야.”

“…!”

시연씨가 당황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본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그동안 정론으로 받아들여졌던 이론이 틀린이론이고 새로운 이론이 맞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혼… 하신 건가요…?”

“뭐… 말하자면 길어.”

“그렇군요….”

“아무튼 고마워. 고민에 응해 줘서.”

“상무님 때문에 제가 고민에 빠질 거 같아요.”

“그래…?”

“네!”

“도대체 왜….”

“상무님은 모르셔도 돼요.”

그 이후로, 이 고민에 관한 이야기는 1도하지 않았다.

~~~

나영이를 만나는 당일.

유희는 흰 티에 내 회색 가디건을 어깨가 보일 정도로 걸쳤다, 다리는 슬슬 추웠는지 스키니진을 입었다. 괜히 엉덩이 라인이 강조되는 터라 슬쩍 시선을 돌렸다.

“왜 아빠가 긴장해?”

“그러게….”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유희가 만나러 간다고는 했지만 막상 중재자 역할을 하는 거 같아 조금 무서웠다. 제발 무난무난하게 해결 되기를…. 뭘 하러 가는지도 모르겠지만.

“가자 아빠.”

“응.”

집을 나와 나영이와 약속한 장소로 가자, 딱 봐도 나영이다라고 알아볼 수 있는 화이트 블론드로 염색한 단발머리에, 썬글라스를 쓰고 있는 여성. 나영이가 보였다. 머리 색깔이 색깔이라 그런가 의외로 잘 어울렸다.

어깨를 툭툭쳐 아는 척을 하자, 나영이가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가족이 모였다. 하지만 그 속엔 감동이라던가, 서정적인 감정은 하나도 들지 않고, 어색함과 적대감만이 흐르고 있었다.

밖에서 이러는 것도 그래서 근처 레스토랑에 들어왔다. 유희는 내 옆에, 나영이는 정면에 앉았지만 어색해지는 게 풀리는 것은 없었다.

“주문 뭐 하시겠어요?”

“…뭐 먹을래?”

“적당히 코스메뉴로…. 응….”

“응.”

적당한 가격에 코스를 선정하고, 요리를 기다리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유희의 나영이를 향한 증오의 감정이었다.

“썬글라스 벗지그래?”

“유희야….”

“아, 아니야! 벗을게! 내가 잘못한 거니까….”

나영이가 허둥지둥대며 썬글라스를 벗는다. 유희말을 순순히 듣다니, 어지간히 미안하긴 한가보다.

‘닮았네….’

이렇게 보니 서로의 눈매가 너무 닮았다. 모녀라 그런가.

잠시 기다려 나온 전체요리는 샐러드에 트러플 오일을 얹어 풍미가 엄청났다. 나름 코스 요리라고, 레드와인도 딸려 나왔다.

“……따라줄까?”

“아, 응….”

나영이에게 와인을 따라주고, 내 잔에도 와인을 따르자, 유희도 흥미롭게 쳐다봤다.

“유희도 마실래?”

“……응.”

그러고 보니 유희는 술 마셔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럴 기회도 없었고, 본인도 술에 만취해 꼬장부리는 사람들을 보며 흥미가 없어졌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은 와인의 짙은 붉은색에 매료되었는지, 마셔보고 싶어졌나보다. 유희에게 조금 따라주자, 잔을 돌리면서 향부터 맡았다. 마셔본 적은 없어도 본 적은 많은 것 같다.

그러고는 한잔을 전부 꿀꺽꿀꺽 한 번에 들이켰다.

“캬~”

“그렇게 마시면 금방 취할 텐데….”

“으? 아이야!”

“…….”

벌써 취했잖아…. 다시는 먹이면 안 되겠다.

“아하하… 술이 많이 약한가 보네….”

나영이가 멋쩍은 웃음으로 웃자. 유희가 나영이 쪽을 무섭게 쳐다봤다. 그 아우라에 나도 나영이도 순간 조용해졌다.

“나영씨는… 왜 날 낳은 거야…? 낙태해도 됐었잖아.”

“…….”

갑자기 나오는 돌직구에, 나도 나영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낱 사춘기 청소년들의 끓어오르는 성욕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그 점은 아직도 반성하고 있다.

나영이가 잠시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너희 아빠가 좋아서… 아니, 생명을 포기 할 수 없었어. 유희 같이 예쁜 애가 이 세상에 나오지 못한다는 건 끔찍하잖아.”

“그럼 왜 도망간 거야…?”

“…!”

“…….”

“아빠그아…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혼자서 나 돌봐주고… 용돈 주고… 선물도 주고… 옷도 사주고… 얼마나 많이 해 줬는데…. 당신이란 사람은….”

양심에 찔린 듯 나영이가 고개를 들지 못한다. 직원이 스테이크를 내 왔지만, 이쪽 분위기를 감지하고 설명은 굳이 해 주지 않고 갔다.

보이지 않게 주먹을 쥔 나영이가 유희를 보며 말했다.

“미안해 유희야…. 엄…내가 생각이 짧았던 거 같아.”

“…….”

“아빠한테 사과해.”

“유희야 아빠는 괜찮──”

“빨리!”

아무래도 유희가 많이 취한 것 같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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