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나영. (E)
* * *
며칠 뒤, 나영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단순히 유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메시지를 확인하고, 소파에 앉아 무릎담요를 배까지 덮고 TV를 보고 있는 유희 옆에 자연스레 앉았다.
“유희야.”
“응?”
“그 사람이 고맙대.”
“뭐가?”
“글쎄. 뭔지는 안 적혀 있었는데… 유희가 조언해 준 게 도움이 됐나봐.”
“……그런가?”
유희가 괜히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저쪽으로 돌렸다. 아무래도 칭찬을 받으니 기분 좋은가 보다.
“아, 아빠.”
“응.”
“둘은 어떻게 날 낳은 거야?”
“유희를…?”
“보통 학생 때 그럴 생각은 안하잖아.”
“으음….”
가슴이 비수가 꽂히는 것처럼 아팠다. 유희의 말이 백번 맞기 때문이다. 학생 때, 그리고 성인 때도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아니면 피임을 하고 관계하기 마련이니까.
내가 시선을 피하자, 유희가 내 고개를 잡고 자기 쪽으로 돌렸다.
“말해줘.”
“응….”
어쩐지 나영이와 닮은 얼굴과 그 진지한 표정에, 나는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보통 그런 과거사는 묻지 않기 마련이지만, 유희는 어지간히 궁금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유희가 생긴 이유, 그러니까 나와 나영이가 생으로 섹스한 이유를,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
~~~
때는 수학여행 때, 진실게임의 그 이후.
마지막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애들이 밀어줘서 그런지 나와 신나영이 같이 앉게 됐다.
“…….”
“…….”
어제 그 일 때문에 그런지, 서로 어색한 분위기 속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날 좋아한다고는 1도 상상 못했으니까.
그동안 나한테 한 짓이 나를 좋아해서 그랬던 거였다니, 괜히 부끄러워지면서 에어컨을 튼 버스 안이 덥게만 느껴졌다.
“물.”
“물?”
“물 줘.”
“…….”
웬일로 신나영이 먼저 말을 꺼내나 했더니 물 달라는 거라니, 예전 같으면 그냥 한숨을 쉬고 짜증나는 애라고 넘겼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하는 행동처럼 느껴져서 뭔가 싱숭생숭 했다.
“자.”
“땡큐.”
물 마시는 것도 입술을 대고 마신다. 내가 입대고 마셨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완전 간접키스잖아….
물을 마신 신나영이 패트를 다시 내게로 건넸고, 다시 공항까지는 침묵이 이어졌다. 공항에 도착하자애들이 몰려와서 계속 물어 봤지만 엿을 날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뒷공작을 부린 탓일까, 또 나와 신나영이 같이 앉게 됐다.
“야.”
“왜?”
비행기 탑승 시간은 2시간도 안 되지만, 그래도 졸리기는 졸린 시간대라 슬슬 눈이 감길 무렵, 신나영이 나를 불렀다.
“어제 그거….”
“아, 응.”
그 얘기가 나오니 잠이 확 깬다. 부끄러워서 신나영을 쳐다보진 못하겠고, 정면을 응시한 채 대화를 진행했다.
“진짜 같았냐?”
“뭐?”
“나 연기 잘했지?”
“연기…?”
“다, 당연히 연기지. 누가 너 같은 사람을….”
“풉.”
내가 비웃자, 신나영이 이쪽을 쳐다봤다. 나도 저절로 돌려지는 고개에 신나영과 눈을 마주쳐버렸다. 구름 위라 그런가 노란 머리카락이 금발 머리가 된 것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너 연기 되게 못한다.”
“뭣…!?”
“누가 봐도 진심이었거든?”
“으….”
내 말이 맞았는지 엄청 분해하며 얼굴을 붉힌다. 지가 부끄러워서 얼버무릴 셈이었겠지만, 그런 건 내가 용서 못 한다. 만약 진짜로 연기였다면 어제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
“그럼이라니?”
“너는 나… 좋아해?”
“…….”
그동안 부정해 왔다. 나는 어장관리당하는 사람 중에 한 명뿐이라면서,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만히 함께한 이유는 얘가 멋대로 달라붙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런 관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아해서 그랬다고 생각하면, 내가 너무 비참해지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지금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응.”
“거짓말.”
“뭐?”
“나 민망해할까 봐 그런 거 다 알거든? 너 쓸데없이 남 배려 잘하잖아.”
“아니야. 진짜라고.”
“그럼 증거──읍!?”
신나영의 입을 막았다. 내 입으로 막은지라 나도 말을 할 수 없었다. 서로 엄청 서툴러서 그런가, 혀가 움직이기는커녕 마른 입술이 살짝 닿았다 말았다만을 반복했다.
조용한 기내가 더 조용해진다. 다른 사람들도 지쳤는지 모두 골아 떨어진 상태라, 우리를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로 떨어지자, 신나영이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너 뭐 하는…!”
“옆 사람 자잖아. 조용히 해.”
“우으….”
“증거. 됐지?”
“……웅.”
이렇게 우리는 사귀게 됐다.
~~~
“야.”
“왜.”
서로 부끄러워서 그런지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다. 그래도 데이트나 할 건 다하면서, 커플로서의 인생을 충분히 만끽하고 있었다.
오늘도 명동에서 데이트를 하고 저녁을 먹은 후, 지하철 역사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나 전부터 해 보고 싶었던 거 있어.”
“뭐?”
“우리 이제 100일 되잖아?”
“아, 그렇…지?”
“설마 안 세고 있었어?”
“아니 셌지. 주기적으로 확인한다고.”
휴. 사실 확인 안 하지만,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그래서, 100일 되면 뭐하고 싶은데.”
“저거.”
“저거…?”
나영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역마다 있는 자판기였다. 코감기 걸렸을 때 티슈 뽑는 용도 말고는 쓸 일이 없었는데, 왜 가리켰는지 의문을 표하자 나영이가 내 옆구리를 툭 쳤다.
“눈치 없는 새끼.”
“뭐가.”
“저 얼룩말.”
“얼룩말? 아.”
평소엔 그냥 지나치기만 했던, 아니면 남자애들이랑 있을 때 진 사람이 뽑아오기 벌칙 같은 것을 했던 물건을 보고 단박에 그 의미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걸 100일날 하자고…?”
“왜, 싫어?”
“미안한데 나 혼전순결 주의라….”
“치.”
괜히 학생 때 했다가, 혹은 결혼생각이 없었는데 했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고, 그런 거에 빠져 인생 나락가기는 싫었기 때문에, 거절했다.
하지만 그 이후, 나영이에게 완전히 당했다.
“야 잠깐만…!”
“뭐가.”
100일 기념으로 나영이네 집에서 작은 축하회가 열렸다. 평소에도 나영이 집에는 자주 갔던 터라 의심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덮쳐졌다. 나영이에게 깔려서.
“대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먹어야지. 남자가 말이야.”
“아니 너 후회한다니까?”
“콘돔 끼면 되잖아.”
“그래도….”
“안 하면 헤어질 거야.”
“…….”
그 말에 아무저항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헤어지기는 싫었으니까. 얘가 나를 많이 좋아해준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나영이가 “이제야 얌전해졌네.”라며 바지를 벗기고 콘돔을 껴줬다. 역시 사용법을 몰랐는지, 결국 내가 다시 뺐다가 공기를 빼고 다시 꼈다.
“으읏…!”
나영이가 눕고, 나는 여전히 망설였었지만, 빨리하라는 나영이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넣었다.
따뜻하면서도 콱 잡는 느낌이 생전 처음느껴보는 느낌이다. 울먹거리는 나영이가 내 손을 엄청 세게 잡았다.
“야… 무리하지 말고.”
“무리 아니니까… 빼지마.”
눈에서 눈물까지 또르르 떨어지며 숨을 삼킨다. 뭐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잠자코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픈 나영이와는 다르게, 이쪽은 사방에서 조여서 끝내주게 기분 좋았다.
“키, 키스으…!”
키스를 해 주자 나영이의 경직된 몸이 조금씩 조금씩 풀린다. 이때가 돼서야 섹스하기 전에 전희가 필수라고 말한 욱이의 말이 떠올랐다.
이곳저곳을 만져 주자 나영이의 괴로운 신음이 점점 부드러운 신음으로 바뀌어 간다. 허리도 훨씬 움직이기 편해졌다.
“하, 하아….”
불안했던 감정이 쾌락으로 물들면서 침대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기분 좋은 내 감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고, 움직임이점점 빨라지면서 나도 저절로 신음이 나왔다.
“하읏!”
“윽…!”
생애 첫 번째 관계가 끝나고, 정신을 차리자 침대에 빨간 자국이 눈에 보여 놀랐다.
“너도 처음이었냐…?”
“그럼. 누구랑 했게.”
“……미안.”
정리하려고 몸을 돌리자 나영이가 나한테 봉투 두개를 던졌다. 박스 안에 남아있는 콘돔이었다.
“나머지 안 쓸 거야?”
“…….”
물론 그 쾌락을 잊을 수 없던 나는, 결국 다 써버렸다.
~~~
그 일이 있고, 나영이를 만날 때마다 항상 마무리는 섹스로 끝났다. 처음엔 내가 내빼다가, 나영이의 점점 발전하는 유혹하는 수법에 계속 함락당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배불러. 못 먹겠어.”
“배 나온 거 봐.”
“안 나왔거든!”
오랜만에 집에서 피자를 시켜 먹어 나영이와 나눠먹었다. 오늘은 급식으로 나영이가 싫어하는 스파게티가 나와서 걸렀기 때문에 배고팠는지, 4조각이나 먹었다.
약간 튀어나온 뱃살을 누르며 나영이를 놀렸다.
“봐봐 눌리잖아.”
“누르지 말라고!”
“왜, 재밌는데.”
“말랑말랑해.”
“진짜, 하짓, 말라니까! 꺅!”
나영이가 계속 찔러대는 나를 밀어내다가, 역으로 자기가 밀려 쓰러졌고, 나는 그 위를 덮고 있는 꼴이 됐다.
“…….”
“…….”
“후웁!”
어색한 침묵 끝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키스했고, 그간 경험으로 인해 순식간에 서로 알몸이 됐다.
무의식적으로 넣기 직전에, 콘돔을 끼지 않은 게 생각 나서 미리 서랍에 숨겨둔 콘돔을 꺼내려 일어나자, 나영이가 아쉬운 듯이 내 손을 잡았다.
“생으로 해 볼래?”
“임신하면 어쩔려고.”
“다른 애들은 다 생으로 한대잖아. 임신하면 낳으면 되지!”
“그게 맘대로 되냐.”
“너 나랑 결혼하기 싫어?”
“뭐…?”
“난 너랑 결혼할 생각으로 이러는 건데.”
“…….”
“결혼이고 자시고 우리는 학생이야.”라고 말하려 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미 나영이가 자기 허리를 들며 비비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비벼지고 있는 곳이 내가 조절을 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끅…!”
나는 나영이에게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처음으로 직접 닿아서 그런지 쾌감이 허리부터 물들면서 점점 이성을 잃었다.
‘내가 먼저 하려 했는데….’
나영이와는 조금 더 진지한 관계를 가진 후에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었다. 맨날 멋대로 굴긴 하지만 내가 아팠을 때나 안 좋은 일이 있었을 때 늘 옆에서 나한테 기운을 차리게 해 줬으니까.
그래서 내가 결혼하자고 말하려 했는데, 먼저 선수를 쳐버린 것이다. 괜히 선수를 뺏겨서 쪽팔리면서도 절제 못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읏….”
거기가 따뜻한 상태로 침대에 올라와 계속 허리를 움직이기를 반복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몇 번이나 싼 상태였고, 나영이는 그대로 임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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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떻게 됐어?”
“처음엔 양가에서 반대했는데, 나영이가 낳자고 해서 낳았어.”
“그래…?”
“응.”
그 후로 우리 둘은 자퇴, 유희를 낳고 검정고시로 둘 다 졸업을 하긴 했다. 나는 굳이 자퇴하지 않아도 됐었지만, 나영이를 이렇게 만든 건 나이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책임을 지고 싶었다.
유희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일부러 임신한 거네?”
“뭐가?”
“아빠랑 결혼하려고 기정사실 만든 거 아니야?”
“그런…건가?”
“응. 내 눈에는 어떻게든 결혼하려고 했던 걸로밖에 안 보여.”
“그래….”
유희의 말대로라면, 그동안 해왔던 행위들이 전부 나와 결혼하는 그 순간을 위해서라는 말이 된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지만 결국 바람대로 어찌저찌 결혼은 했으니까.
굳이 결혼하고 싶었으면 말로 해도 됐었을 텐데, 그랬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었던 걸까, 의문은 점점 커져만 갔다.
“난 아무래도 그 사람을 닮은 거 같아.”
“뭐… 엄마니까.”
“아니, 외모말고.”
“그럼?”
“그런 치밀한 점이.”
“유희가 똑똑하긴 하지.”
“……응. 맞아.”
"창문 닫을까?"
"아, 응."
유희가 추웠는지 계속 자기 배를 쓰다듬어서 창문을 닫아주자, 고맙다며 내 볼에 뽀뽀를 해줘서 기분 좋았다.
"아빠."
"응?"
"난 엄마처럼 버리지 않을게."
"응? 응…."
그 말을 하며, 유희는 계속 자기 배를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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