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이 내게 집착한다-90화 (90/96)

〈 90화 〉 유희. (3)

* * *

각오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각오했을 터였다.

“임신했어.”

“…….”

“…정말이야?”

“잠깐만.”

알몸인 유희가 일어나서 나갔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그 손에는 임신 테스트기를 들고 있었다.

“봐 아빠.”

잠시 기다리니, 테스트기의 한쪽에 붉은 선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른 한쪽도, 붉은 선이 스멀스멀 나타났다.

“확실하지?”

“그러……네.”

평소에는 잘만 닿았던 살결이, 이제는 조금만 스쳐도 무서울 정도로 차갑다.

“유희야.”

“응?”

“유희는 어떻게 하고 싶어?”

“당연히 낳아서──”

“유희야.”

“으, 으응….”

표정은 밝지만 목소리는 떨린다. 아까 웃었던 것도 나를 안심시키려 하는 일종의 연기겠지.

유희도 불안한 것이다. 기껏 말하긴 했지만, 아이를 키우기엔 포기해야 되는 것이 너무 많았으니까.

“정말로. 어떻게 하고 싶어?”

내 깔린 목소리에 유희가 약간 움찔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유희는 또 자신을 너무 쉽게 포기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한 유희가 떨리는 손을 내 손등에 얹으며 말했다.

“안 버려.”

“유희야 생각을 좀 하고──”

“안 버릴 거야!”

“유희야!”

유희가 소리치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왜 이런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건지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았다. 난 그저 나영이의 실수를 유희가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인데.

“하아….”

그 이후로, 우리 둘에겐 냉전기가 찾아왔다.

~~~

“…….”

다시 예전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다. 마주쳐도 인사하지 않고, 닿아도 무시하고 지나가버린다. 딸을 실망시켰다는 죄책감에 나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아….”

유희의 인사가 없는 아침은 공허하기만 하다. 하루의 시작이자 끝이었는데, 시작도 끝도 없으니 인생의 일부가 빠져나간 느낌이다. 줬다 뺏는 기분이 이런 기분이구나….

“이거 드세요.”

“고마워.”

시연씨가 아침 커피를 타주며 말했다.

“요즘 기운이 없으시네요. 부부싸움이라도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무슨 일 있으신 거 맞잖아요.”

“아니래도.”

“죄송해요….”

“아, 아니 나야말로 미안해. 예민해서….”

무심코 시연씨에게도 호통을 쳤다. 그래도 다른 사람한테 상담할 일은 아니기에, 시연씨에게 말할 수는 없다.

유희가 없는 생활을 보낸지 며칠, 점점 내게 문제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상무님, 여기 숫자 틀리셨어요.”

“아, 응.”

“여기도요.”

“응.”

“여기도….”

연이어서 시연씨에게 검토를 받을 때마다 계속 숫자가 틀리거나, 메일을 이상한 곳에 보내는 경우도 생겼다. 다행히 사내 메일이라 큰 문제는 없었지만.

시연씨가 내가 걱정되는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연민스러움에 괜히 미안함을 느꼈다.

“상무님, 안색이 많이 안 좋으셔요.”

“그래…?”

“네. 안 하던 실수도 하시고… 몸조리 잘하세요.”

“……그래야겠네.”

정신적으로 쇠약해지니 몸도 쇠약해진 기분이다. 전혀 올 것 같지 않던 갱년기가 이제서야 찾아온 것 같다. 이대로 가다간 회사에는 폐만 끼치고, 옆에서 같이 생활하는 시연씨까지 무기력하게 바뀔지도 모른다.

“시연씨.”

“네 상무님.”

“휴가 좀 쓸게.”

“잘 선택하셨어요.”

“고마워.”

아무래도 시연씨는 내가 쉬길 바란 모양이었다.

~~~

내가 잘못된 걸까.

“ㅇ…….”

“…….”

나는 그저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을 뿐인데. 그 사람처럼 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인데. 아빠는 내 마음을 너무 모른다.

입이 열리지 않는다. 전부 털어내고 평소처럼 지내면 될 텐데, 그러지 못하겠다. 나는 이 아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지우는 것만은 절대로 할 수 없다.

“유희야, 살쪘어?”

“네!? 아… 그런가 봐요.”

내 변화를 눈치챈 언니가 물어 봤다. 괜히 부끄럽고 긴장 돼서 제대로 된 대화도 할 수 없었다.

“그럼 나랑 헬스 다닐래? 요즘 좋은 곳 있대서… 아, 여성 전용이라 괜찮을 거야! 유희 건드리는 사람도 없을 거구. 사실 나도 좀 살쪘거든. 헤헤….”

언니가 없는 뱃살까지 쥐어가며 나를 헬스에 꼬신다. 굳이 운동까진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듣기론는 요즘 남자들은 조금은 살집 있는 여자들을 좋아하는 거 같고….

아빠도 그런 체형을──

“유희야? 얼굴이 빨간데?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음… 헬스 권유해주신 건 감사한데, 요즘 할 일이 있어서 좀 바쁘거든요…. 죄송해요.”

“으응! 아니야 괜찮아! 그래도 무리하지말고 몸관리 잘해. 사람 살찌는 거 한 번이니까.”

“네… 조심할게요.”

괜히 손이 배로 가서 문지르게 된다. 확실히 일반 뱃살과는 다른 느낌이다. 보형물이 가득찬 것 같은 느낌…. 실제로 그런 가슴을 만져 본적은 없지만.

‘보여….’

화장실 거울로 보니 내 스스로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아랫배가 눈에 띄게 부풀어 올랐다. 이제 바지를 입고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원피스를 입어도, 부풀어 오른 게 약간 티가 났다.

이대로면 학교도 못 다니게──

─정말로, 어떻게 하고 싶어?

아빠가 왜 물어 봤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대로가면 학교를 다닐 수 없다. 임신한 사람이 학교를 다니지 말라는 법도 없고, 애엄마가 다니지 말라는 법도 없으며, 실제로 그러는 사람들도 몇몇 있지만, 나처럼 이런 관계에 있는 사람은 없다.

‘혼전임신…으론 끝나지 않겠지.’

애 아빠가 누군가부터 시작해서, 학교에는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결국엔 학교 이미지도 훼손된다. 게다가 언론에 알려졌다간….

‘안 돼.’

아빠와 함께 사는 것, 그리고 그 평화로운 일상이 망가져버리게 놔둘 순 없다. 아빠는 거기까지 보고 날 위해 말한 것이다.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내 고집대로만 했다. 그래도 아이는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우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아….”

나는 정말, 그 사람을 닮은 것 같다.

~~~

간만에 휴가에 눈을 늦게 떴다. 평소 피로가 쌓여서 그런지 나른한 피로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코가 허해지는 이 감각이 나쁘지만은 않으면서도, 괜히 공허함을 느껴져 기분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꼬르륵.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 먹으니 배에서 밥달라고 봉창대신 위장을 두드린다. 스마트폰 시계를 보니 점심먹을 시간이 지난 상태였지만, 기운이 없어 그대로 다시 눈을 감았다.

“하아….”

나는 유희를 위해서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뱃속에 있는 아이보다는 유희의 인생이 내게는 더 중요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뱃속의 아이를 부정하면 유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사실 유희의 의견을 따르면 해결되는 문제지만 유희의 인생을 더 중요시하는 내 마음이 충돌해서 고집을 부리게 되는 것 같다.

‘역시 유희가 원하는 대로 해 줘야겠지.’

아이를 낳는 것은 유희고, 자기 인생을 결정하는 것도 유희다. 따지고 보면 나이 많은 사람도 대학에 들어가는데, 나중에라도 하고 싶은 공부가 가능하고, 그렇게 문제는 없다. 그렇다고 지금 이대로 학교를 다니는 건 위험할 테니, 자퇴를 권유하는 게 좋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대로가면 내가 못 버틴다. 유희가 이대로 떠나버리면, 나는 절대로 버틸 수 없게 된다. 내 삶의 원동력은 유희니까.

“유희야….”

유희에게 사과해야 한다. 괜한 고집을 피워서 미안하다고. 애초부터 나이 많은 아재가 편견을 가진 것부터 잘못됐다. 나도 이제 ‘꼰대’라인에 슬슬 끼려나 보다.

그건 그렇고 이제 유희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아빠?”

“으응…?”

환청이 아니었다. 눈곱을 떼어내며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니, 이쪽을 보고 있는 유희가 있었다.

“아… 으….”

오랜만에 제대로 마주한 유희의 배는 전보다 더 나와 있었고, 머리카락도 더 길렀다. 아무래도 바지를 입기에는 무리가 있었는지, 스타킹도 신지 않고 원피스를 입은 상태였다.

머뭇거리는 유희가 또 떠나버릴까,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하…학교는 끝났어?”

“응….”

말도 안해서 그런지 서로 어색한 분위기 속에 제대로 입도 열지 못했다. 그래도 유희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 왠지 안심이 됐다.

“아, 아빠는?”

“휴가 썼어.”

“왜?”

“요즘 힘들어서. 일도 잘 못하게 됐거든.”

“아하…….”

어색해서 자리를 벗어나려는 유희의 손목을 잡았다.

“아빠가 미안해.”

“…….”

“너무 고지식하게 생각했어. 고생하는 건 유흰데, 아빠만 생각해서….”

“아니.”

유희가 이마를 툭, 기댔다. 떨리는 팔이 나를 감싸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미안해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흘리는 유희의 머리를 아무말없이 쓰다듬어줬다. 진정이 된 유희와 함께 침대에 앉았다.

“아빠가 말한 대로 생각해봤는데.”

“응.”

“역시 포기 못 하겠어.”

“왜 그렇게 생각해?”

“그 사람한테 지고 싶지 않아.”

“지고 싶지 않다니…?”

“그 사람은 나를 버렸는 걸. 내가 이 아이를 버리면 똑같은 사람이 돼버리잖아. 그건 싫어.”

“그랬구나.”

“너, 너무 유치한가….”

“아니.”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반발심리가 적용되는 것은 당연하다. 유희가 나영이를 이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풉.”

“으에?”

그래도 그 점이 왠지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하.”

“왜 웃는 건데!”

“유희가 귀여워서.”

“우으….”

유희가 내 가슴팍을 툭툭 때렸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가 나오면서, 귀엽다고만 느껴졌다.

크흠, 헛기침을 하고, 다시 화제를 되돌렸다.

“유희야.”

“응?”

“각오는 되어있어?”

“……응.”

“그럼 낳을까.”

“정말?”

유희의 목소리가 기쁜 듯 변했다. 정말 진심으로 아이를 낳고 싶었나 보다.

“포기하기 싫다며.”

“그건….”

“지금 하는 공부나 여러 가지 힘들겠지만… 유희가 그럴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니까. 아빠도 도와줄게.”

“아빠….”

유희가 감동한 듯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누가 뭐랄 거 없이, 서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츄웁….”

거의 2주 만에 이루어지는 키스를 통해, 말로는 못한 마음을 전했다. 유희도 내 마음을 이해해 줬는지, 내 옷깃을 꽉 붙잡았다.

“하아….”

“유희야.”

“으응…?”

“우리 여행갈까?”

“여행?”

“응. 유희 이것저것 정리하면. 그때 여행가자.”

“응….”

아마도 이번 여행은, 나와 유희 둘이서만 가는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