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유희. (4)
* * *
KTX를 타고 약 3시간, 남쪽으로 가면 여수에 갈 수 있다. 자동차로 갈까 했지만, 너무 오래 걸리는 데다가 유희가 어지러워할 것 같아서 그나마 빨리 갈 수 있는 KTX를 탔다.
“경치 좋다~”
“그러네.”
유희는 자퇴하는 길을 택했다. 휴학에 제한은 2년이라, 아이 키우는 데에 적어도 5년은 걸릴 거 같다고 했기 때문이다.
배는 아직 겉으로 그렇게 티가 나는 건 아니지만 손을 얹으면 부풀어 오른 것이 확실히 느껴져서 꽤 조심해야 했다.
때문에 유희의 옷차림은 스웨터형 원피스에, 무릎 밑까지 올라오는 니삭스를 신었다. 왜 신은 었나 물어보니 요즘 패션이라나 뭐라나….
거기에 붉은 핸드백 줄이 가슴 사이를 지나가면서 묘하게 볼륨감이 더 강조되어 보여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배고픈데 간식차가 없네….”
“아빠 어렸을 때는 있었는데.”
“나왔다! ‘라떼는 말이야~’ 라고 하는 거.”
“아하하….”
유희의 짓궂은 장난이라는 것을 알지만, 괜히 현실적이라 가슴 한구석이 아리기 시작했다.
“아빠, 이거 먹을래?”
“뭔데?”
“주먹밥.”
고소한 참기름 향이 코를 간질인다. 마침 배고팠던 배가 꼬르륵 거리며 위는 받아들일 준비가 다 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열차 내 취식이 불법은 아닌지라, 그냥 먹었다. 냄새도 그리 안 풍기는 것 같고, 누가 시비를 걸면 역무원 부르면 되지 뭐. 간식차 있었을 때가 참 그립다.
“음, 맛있다.”
“다행이다.”
“유희가 만든 거야?”
“당연하지.”
쿡쿡 웃는 유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다시 한 입 베어먹었다. 안에는 국룰조합인 참치마요가 들어 있어서 거부감 없이 입속에서 참치와 마요의 맛이 어우러지며 꿀떡꿀떡 넘어갔다.
“그렇게 맛있어?”
“응. 유희도 먹어.”
“응.”
점점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창밖으로 농촌이 보인다. 그걸 멍때리며 보는 유희의 표정이 공허해 보인달까, 마냥 귀여워만은 할 수 없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그건 그런데── 읏!?”
“다 잊어버려.”
유희는 큰 결단을 했다. 차선책이 있다지만, 그래도 자기 인생에서는 가장 큰 선택이다.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둘만 세상에 사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사회와 마주하게 된다. 아무리 혼자서 집에 처박혀 있어도, 결국에는 인터넷이란 사회와 접촉하게 되어있고, 아이를 키우려면 역시 사회에 발을 내디뎌야 한다.
“놀러왔잖아? 기분 좋은 것만 생각해야지.”
“아빠….”
“아빠는 항상 유희편이니까.”
“응….”
그렇다고 벌써부터 유희를 그런 불안에 떨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시간은 많고, 또 계속 불안에 떨면 아이한테도 좋지 않기 때문이다.
“쿠울….”
아침 일찍 나온데다가 혼자 주먹밥까지 만들어서 그런지, 유희가 지쳐서 잠들었다. 아직 여수까지는 한참 멀었기에, 나도 눈을 감았다.
‘아이 이름은 역시 그 이름으로 할까….’
~~~
“하아암~”
“허리야….”
눈을 뜨니 곧 여천역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놓치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분명 의자를 최대한 뒤로 젖혔는데도 허리가 아픈 걸보면 최근 무리하긴 했나보다.
열차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이어 도착했다. 은근 내리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쾌적하게 나올 수 있었다.
“날씨 좋다~”
“응.”
벌써부터 진한 해풍의 바다향이 느껴진다. 시골이구나 할 정도로 한산했고, 하늘도 구름 한점 없이 파랗게 펼쳐져 있어 나도 들뜨기 시작했다.
“수고하세요.”
“예~”
근처에 있는 렌터카 업체에 가서 차를 빌린 후, 길을 따라 출발했다. 2박 3일을 계획했지만, 세부적인 계획은 하나도 없어 정처 없이 길을 떠도는 수밖에 없었다.
“저기 바다 보인다!”
“오.”
“아빠는 앞에 봐.”
“넵….”
해안가 도시 답게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금방 바다가 보이고, 해풍이 시원하게 불며 차를 관통한다.
엄청 신나 보이는 유희가 소리를 지르며 제대로 즐기는 것 같았다.
“여기구나.”
30분 정도를 달리고, 전날 예약한 비즈니스 호텔에 왔다. 여타 다른 호텔과 똑같이, 깔끔하고 정갈한 방이었다. 당연하지만 한 방만 예약했다.
“조금 쉬다 갈까?”
“아니, 바로 가자.”
“괜찮겠어?”
“응.”
아무래도 유희는 임산부라 좀 걱정되긴 하지만, 유희는 문제없다는 듯 팔을 들어 보였다.
결국 짐만 두고 방을 나와 호텔에서 약 20분, 유희가 말해 준 곳으로 가니 웅천에 있는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여긴가?”
“응.”
아직은 안쪽이라 그런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섬과 도시가 보이고, 가족단위로 와서 해수욕을 즐기고들 있었다. 뭐… 성수기가 아니니 그럴 만도 한가. 개인적으로 비키니를 입은 사람들이 있었으면──
“아빠. 이상한 생각 하고 있지.”
“아니? 전혀.”
“의심스러운데….”
“아니래도….”
여자의 감은 역시 무섭다니까….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 전환을 했다.
“일단 물에 들어갈까?”
“응.”
해안가는 나무 발판에, 내려가면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명색이 해수욕장이라고 화장실이나 샤워실 등, 있을 건 다 있었고, 나무 그늘과 벤치도 있어서 잠깐 쉬고 가기엔 제격이었다.
“읏차….”
“잡아줄까?”
“괜찮아.”
유희가 니삭스를 벗으려고 올린 발 사이로 남들이 보면 안 되는 곳이 보인다. 얼핏 봤지만 가리는 부분이 너무 적어보였는데 괜찮으려나….
“으, 차거.”
생각해 보니 유희랑 바다를 오는 건 처음이다. 그래서 그런가, 물가에 들어간 유희의 모습이 더 즐거워 보인다.
무릎까지 잠길만큼의 깊이까지 들어가 나를 불렀다.
“아빠는?”
“아빤 괜찮아.”
“왜에. 들어와~”
“으음….”
이대로 뻐팅기면 유희가 또 기죽을 거 같아 결국 들어가기로 했다. 바지를 걷고 한걸음 내디디니 파도가 들어오며 찬물이 발밑에 닿는다. 오랜만에 이런 곳에 들어가서 그런 걸까, 아니면 유희와 와서 그런 걸까, 감회가 새로웠다.
“차가워….”
“에잇!”
“윽!”
“아빠 차갑지!”
“으… 옷 다 젖었네.”
“아하하!”
유희의 물장구 때문에 옷이 다 젖어버렸다. 나도 유희에게 장난을 치려했지만, 하필 입은 옷이 스웨터라 공격할 수 없었다. 유희를 넘어뜨릴 수도 없고, 너무 불공평하잖아 이거. 갈아입을 옷도 안 가져 왔는데.
“으 추워….”
“추우면 나가 있어. 난 좀 더 있을래.”
“응….”
다행히 좋은 날씨덕에 옷이 햇살에 잘 말랐다. 소금기가 묻은 건 어쩔 수 없다만, 그건 그렇고, 유희가 저렇게 바다를 즐거워할 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데려올 걸.
유희는 자기쪽으로 오는 파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즐기다가, 물 밖으로 나왔다.
“재밌었어?”
“응! 이제──”
꼬르륵.
“응…?”
분명 내 배에서 난 소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읏…!”
“……밥부터 먹을까.”
“응….”
그리고 밥 먹을 데를 찾는데 20분이 더 걸려서, 유희는 엄청 예민한 상태로 밥을 먹었다.
~~~
“쿠울….”
“유희야?”
원래 밥 먹자마자 자면 간이 피곤해지긴 하지만, 운전을 하다 유희가 내 어깨에 기대버리는 바람에 결국 호텔에서 쉬다 가기로 했다.
“일어나 유희야. 방에서 자자.”
“…….”
임산부라 피로도가 누적 되는 건가, 아주 깊게 잠들었나 보다. 아까 열차에서도 그렇게 잤는데, 역시 좀 쉬다가 돌아다닐 걸 그랬다.
유희의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 부축했다. 일어나려는 의지는 있는지, 잠꼬대하는 것처럼 나에게 잘 기댔다.
‘역시 전보다 무거워졌네….’
거의 모든 임산부들이 그렇지만 살이 찌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나영이도 유희를 가졌을 때 꽤 무거워졌으니까. 유희를 낳고 다시 원래 몸매로 돌아간 게 대단하다고 느낄 정도다. 물론 유희한텐 말하지 않을 거지만.
“으응….”
유희를 방까지 옮겨 침대에 눕히자, 그제서야 눈을 끔벅끔벅 껌뻑인다. 그러고는 다시 눈을 감고 이쪽으로 손을 뻗었다.
‘잡아달라는 건가?’
힘없이 펼쳐진 손 위에 손을 얹으니 살포시 손을 쥔다. 손가락을 잡는 아기 같아서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아빠아….”
유희에게 즐거운 것만 생각하자고 했지만, 정작 불안한 건 나 자신이었다. 아이는 어떻게 키울 것이며, 주변에는 어떻게 설명하고, 나중에 아이가 우리의 관계를 알게 되면 어떤 태도를 지을 지,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유전병 검사도 해야 한다. 한 번 정도로는 심각하지 않다고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이를 위해 해야 할 일 중에 하나다. 적어도 아이가 사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
“아, 읏… 거기잇… 안 돼엣…!”
“…….”
꿈에서 뭘하고 있는지 대충 예상한 나도, 유희와 같은 꿈을 꾸길 바라며 옆에 누워서 잠깐 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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