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11화 (11/125)

11화

최PD는 곧바로 장소를 이동하자며 가장 앞에 섰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뒤로 연습생 99명에 카메라와 스태프가 움직이니 장관이 따로 없었다.

재경도 얼떨결에 따라가지만 좀처럼 이정우와 거리가 벌어지지 않았다. 따로 가고 싶어 걸음을 빨리하면 이정우도 빨리 오고 천천히 가면 이정우도 느리게 따라왔다. 재경은 자기와 속도를 맞추는 게 분명한 이정우의 움직임에 따로 가자고 말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재경이 이정우를 밀어내기 전에 다른 사람이 그를 불렀다.

“야, 이정우. 같이 가.”

윤하준이었다. 그는 이정우의 어깨를 짚으며 치사하게 혼자가냐는 식으로 바라보았다. 윤하준의 뒤로 따라붙은 두 남자를 본 재경은 아까보다 더 상황이 안 좋아질 것 같은 예감에 얼굴을 굳혔다.

‘박건후 민태연.’

윤하준이 혼자 온 것도 아니고 같은 소속사 연습생을 데리고 왔다. 재경이 이정우, 윤하준과 마찬가지로 3년을 함께 무대에 섰던 두 사람이었다.

메인래퍼 박건후와 막내 민태연.

재경에게 까칠하다며 거친 말을 쏟아내던 박건후는 입을 다문 채로 힐끗거리고 있었고 말 걸지 말아 달라던 민태연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눈을 마주쳐왔다. 두 사람이 보이는 호감에 재경은 희게 질리는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최악이야.’

1등 인간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온 신경이 다 거기로 향하는데 최종의 최종까지 가는 데뷔멤버들이라니.

‘정말 싫어.’

요정 옷을 봤을 때와 같은 몸서리가 쳐졌다.

“안녕하세요.”

민태연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재경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

재경은 그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며 흘리듯 대답했다. 다들 이동하는 중간이라 복도가 떠들썩한데 제 목소리가 들릴까 싶었지만 민태연이 밝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저는 민태연이라고 해요. 정우 형이랑만 대화하지 말고 저한테도 종종 말걸어주세요.”

“야야, 처음 본 사이에 불편하게 들이대지 마. 사람들이 다 너처럼 뻔뻔한 줄 알아?”

박건후가 태연의 머리를 밀어냈다. 180이 안되지만 꽤 장신인 박건후의 손에 175가 겨우 넘는 민태연이 밀리며 낑낑거렸다. 박건후는 민태연을 말리면서도 재경을 힐끗대며 괜찮다고 말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웃기시네.’

재경이 삐죽 입술이 나오려는 걸 고개를 돌려 감췄다.

‘그렇게 날 구박할때는 언제고.’

단 한번이라도 자신을 멤버로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던 뻔뻔한 인간이라 코웃음이 나왔다. 재경은 박건후의 바람을 들어줄 생각없이 쌩하니 앞으로 걸어갔다. 저들은 자기가 누군지 모르니 저렇게 살갑게 구는 거지만 재경은 절대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들과 같이 아이돌로 활동하지 않겠지만 이미 한번 살았던 삶에서 받은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태연아, 할 말 있다며.”

어색하게 대화가 끊긴 사이로 윤하준이 들어와 중간다리가 되어 주었다. 민태연이 실망했던 게 무색하게 재빠르게 설레는 표정이 차올라서 재경에게 말했다.

“아까 노래하시는 거 봤어요. 정말 잘하시던데요? 아니, 어떻게 목소리가 그렇게 좋지? 저 바로 고음 내지르는 거 듣는 순간 소름 돋았잖아요.”

민태연의 칭찬에 재경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딴청을 피우거나 아예 자리를 떠버리던 민태연이었다. 그러고는 제가 노래가 끝나고 부스에서 나올 때 피곤해서 잠깐 쉬고 왔다며 핑계를 댔었다. 물론 그나마도 말을 조금 주고받던 데뷔 초에만. 나중엔 아예 자기 목소리가 어떤지 모를 정도로 굴던 민태연이 먼저 제 노래를 들었다고 말했다.

‘나랑 몇십 번이나 같은 무대를 섰을 때도 못 들은 걸 여기서 듣네.’

재경은 태연의 칭찬에 허탈감을 느꼈다. 재경이 아무 말 안하자 박건후가 혀를 찼다.

“그렇게 아양 부리고 싶냐?”

“건후 형은 사람을 뭘로 보고. 내가 틀린 말한 것도 아니고 목소리가 좋아서 좋다고 그런 건데.”

“그렇게 아무한테나 칭찬해 봐야 너 안 좋아해.”

“어어? 형도 목소리 좋다고 그랬잖아. 쟤 누구냐고.”

재경이 박건후를 보았다. 남 칭찬에 인색한 박건후가 잘도 그런 말을 했을라고.

“내가 언제… 쟤랬어.”

했구나.

재경은 기가 막혀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자기를 무시하고 뭐라 하던 사람인데. 재경은 아예 못 들은 척 굴자 윤하준이 예민하게 알아채고 박건후와 민태연에게 그만하라고 눈치를 줬다. 그사이 이정우가 윤하준을 밀어냈다.

“따로 가.”

“왜?”

“불편해 해.”

재경이 순간 이정우를 돌아보고 싶은 걸 참느라 중간에 걸음이 삐끗했다. 불편한 거로 치면 이정우도 만만치 않은데 자기는 아닌 듯 남을 밀어내는 꼴이 기가 찼다.

“내가 개도 아니고 가란다고 가겠어?”

윤하준도 기분이 나쁜지 박건후와 민태연을 말리다 말고 더욱 이정우에게 꼭 붙었다.

“그냥 좀 따로 가.”

“싫은데?”

“박건후, 민태연 떨어져.”

“웃기고 있네.”

“치사해, 형.”

가라고 밀어내는 놈이나 안 가겠다고 버팅기며 소란피우는 놈들이나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재경은 하나둘 몰려드는 카메라를 보며 제 이마를 짚었다.

‘벌써 피곤해.’

호텔 내 피트니스룸에 가자 미리 세팅한 기기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었다. 연습생들이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히는 동안 재경은 가장 안쪽으로 숨어들어갔다. 단이 없어서 이렇게 연습생을 벽으로 세우면 카메라에 가려질 수 있었다. 뒤로 줄줄이 따라오는 것들은 그냥 무시했다.

간이단상에 올라간 최PD가 마이크를 들었다.

“남자들이 모였으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게 있지 않나요?”

전혀.

재경은 최PD의 공감화법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자기만 모르나 싶어 슬쩍 옆을 보니 이정우의 미간이 일그러져 있었다.

‘얘도 모르는구나.’

그런데… 이정우의 매끈하게 떨어지는 옆얼굴이 자꾸 시야에 턱턱 걸리니 기분도 탁탁 떨어졌다. 높게 솟은 콧대부터 일자로 닫힌 입술까지 잘생긴 윤곽선이 연습생이라는 말이 무색할 완성형의 외모라라는 게 달갑지 않았다. 재경은 그가 데뷔하고 난 후에 봤었다. 솔직히 연습생 시절엔 조금 어설픈 외모였다가 카메라마사지를 받으며 나아가는 그런 앤 줄 알았다.

원래 잘난 애였다는 거잖아. 재경은 뚱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 옆에 이정우와 비슷한 키의(185는 넘어보이는데 얼마지?)의 윤하준이 특유의 미소를 띄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진하지 않은데 피부가 하얗고 입꼬리가 올라가서 그런지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사람들을 대하는데 조금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인상이지만 재경은 저 얼굴로 욕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박건후에 비하면 정말 안하는거지만.’

눈매가 올라가서 까칠한 이미지를 주는 박건후나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민태연까지 아직도 제 옆에 있다는 게 기가 차다. 옛(?) 멤버들을 관찰하고 있으니 분위기가 가라앉았는지 최PD가 말을 이었다.

“이런 거 해보고 싶었습니다. 청팀백팀.”

‘뭐야.’

재경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학교 선생님이 꿈이었었나 최PD의 얼굴에 떠오른 발그레한 홍조에 소름이 돋았다.

“처음은 간단한 룰로 해볼까요? 저기 보이시나요?”

최PD가 가리키는 벽엔 4m 이상 되는 어느 위치에 공이 붙어 있었다.

“3분 안에 저 위에 있는 물건을 쥐는 자가 1등입니다. 간단하죠?”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가져오는 건 아주 단순한 룰의 미션이지만 그 이면을 돌아보면 복잡하게 엉켜있었다. 따는 사람이 곧장 1등이 되는 건데 그러면 누군가 한 명을 올려줘야 한다. 누군가를 올려주거나 다른 이를 설득해야 한다.

그러나 재경을 제외하고 전부 자신이 물건을 가져오길 원할 것이다. 차근히 대화라도 하려면 부드럽게 풀려 보겠겠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최PD의 음흉스러웠던 웃음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준비~ 출발!”

다들 공이 있는 곳까지는 쉽게 갔지만 거기서 망설였다. 서로 눈치를 보는 사이 시간은 자꾸 야속하게 흘러만 가고 있었다.

“민태연 내 등에 타.”

박건후가 민태연의 팔을 잡아당겼다. 민태연은 아직 성장기라 큰 키가 아니었다. 그러니 민태연을 태워 올려보려는 거겠지. 민태연이 바로 알아듣고 박건후의 어깨에 올라왔다. 그리고 손을 뻗어봤지만 공은 너무 멀리 있었다.

박건후와 민태연가 합심한 모습을 보고나서 너도나도 같은 소속사의 사람끼리 협동했다. 재경은 멀뚱히 보다 누군가에게 팔이 잡혔다.

“어어?”

중심을 잃고 몸이 당겨지면서 재경이 뒤늦게 손을 뻗어 균형을 잡으려 했다. 누군가의 가슴을 짚게 되어 미안하다고 해야 하지만 자신의 팔을 우왁스럽게 잡아당긴 사람이란 걸 알게 되자 눈을 치켜떴다.

“왜…….”

이정우에게 왜 팔을 당겼냐고 말하려는데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땡! 시간 초과 되었습니다.”

“아아.”

안타까운 탄식이 흘렀다. 재경은 이정우를 올려다보며 설마 하는 표정을 담았다.

‘지금 나를 올릴 생각이었던 거야?’

설마가 곧 확신이 되었다. 아니, 옆에 앉을 때부터 이상했는데 이정우는 계속 재경의 주변을 맴돌고 하물며 말없이 자신을 위로 올리려는 거였다.

“칫.”

혀를 차는 이정우의 목소리에 낮은 울림이 담겼다. 재경은 순간 떠오른 생각을 지우려 일부러 얼굴을 굳히며 그에게서 팔을 빼냈다.

‘지금 내가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한거야?’

재경은 다시 거리를 벌리는 짧은 틈을 이용해 이정우에게 말을 걸었다.

“뭐하는 거예요.”

“올려 주려고 한 건데요?”

“왜요?”

“올려 주려고요.”

“그러니까 왜 날 올려 주려고 했냐고요.”

“1등 시켜 주려고요.”

재경이 답답한 듯 제 가슴을 쳤다.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 날 올려줘요.”

이정우는 외려 재경이 이상하다는 듯 보았다.

“1등 하기 싫어요?”

그러니까 아무 사이도 아닌 날 왜 1등 시켜 주려 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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