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그는 재경이 옆으로 비켰는데도 탈의실로 들어가지 않았다. 재경이 옷을 갈아입은 걸 놀란듯 바라보더니 이정우를 돌아보았다.
“정우야. 너 진짜 잘 뽑았다.”
재경이 잘 어울린다는 걸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르는 것도 아니라 재경이 민망함에 고개를 돌렸다. 아… 하필 이정우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눈이 마주친 이정우가 살짝 놀란 듯 미간을 찡그렸다.
“나 잘 뽑았네.”
저 자화자찬은 뭐야. 재경은 그들을 무시하고 주변에 스태프가 없나 둘러보았다.
“왜요?”
“아, 혹시 스태프… 못 봤나요?”
“아까 저기 있었던 거 같은데… 혹시 뭐 문제 있어요?”
재경은 직접 가서 말하고 싶은데 두 번이나 물어오는 윤하준의 오지랖에 귀찮아지고 있었다.
“옷이 작은 거 같아서요.”
그래서 빨리 말해주고 말자는 식으로 대답했다.
“옷이 작아요?”
그런데 윤하준은 왜 안 가는 거냐. 그 사이 옷을 갈아입고 나온 이소운이 카디건까지 입고 나타났다. 재경이 저도 모르게 이소운이 갈아입은 옷으로 훑어봤다. 넉넉한 카디건이 엉덩이를 덮고 있었다. 얘도 큰 거 받았네?
“옷이 작다고요?”
안에서 재경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이소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작은데요?”
재경이 고개를 저었다.
“카디건 말고 셔츠랑 바지요.”
“흠…….”
이소운이 보라는 듯 제 카디건의 단추를 풀어서 어깨 부근을 보여줬다. 재경이 이소운의 셔츠를 입은 핏을 보다 제 어깨를 매만졌다. 품이 큰 가디건 아래 셔츠의 어깨선이 만져졌다. 어깨가 크지도 좁지도 않긴 했지만 이게 맞는 사이즈인가 보다.
“불편할 거 같은데.”
“이거보다 한 사이즈 위의 옷은 안 예쁠 거 같은데요?”
윤하준이 친절하게 재경의 지금 사이즈를 봐줬다. 바지도 이게 맞다고 말하지만 재경이 받아들이기에 부담스러웠다.
“일단 갈아입어 보려고요.”
재경이 더는 그들에게 넘어가는 대신 직접 돌아다니며 찾을 생각이었다.
“어?”
예고도 없이 목 뒤로 들어온 손이 들어와 재경이 목을 움츠렸다. 누가 제 목에 손을 넣었는지 돌아보자 높은 콧대와 깎아지른 턱만 보였다.
“이거 맞는 거 같은데…….”
이정우가 라벨에 붙은 사이즈를 확인하더니 중얼거렸다. 재경이 그의 손을 쳐냈다.
어디 허락 없이.
이정우가 두 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였다. 재경이 이정우의 옷을 훑었다. 언제 옷을 갈아입었는지 카디건까지 다 갖춰 입었는데 뭔가 다른 옷을 입은 것 같았다.
‘뭐야.’
이정우의 카디건은 품에 적당히 맞아떨어지는 정 사이즈였다. 자신과 이소운은 커다란 카디건을 주고 이정우는 딱 맞고. 뭐가 이렇게 제멋대로야.
“자, 모여 주세요.”
카메라를 든 남자가 나타나자 재경이 몰래 이정우를 흘겨보았다. 포토그래퍼 같은데 그를 두고 옷 갈아입겠다고 스태프를 찾아다닐 수 없는 요량이었다. 옷을 알아 입은 사람들이 한 남자를 중심으로 반원으로 모여들었다.
“제가 말씀드릴 건 딱 하나입니다.”
포토그래퍼가 제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시험 삼아 사람의 얼굴을 찍어댔다. 여전히 옷이 작고 큰 게 걸리는 재경도 그런 재경을 바라보던 이정우도 모두 카메라에 담겼다.
“오래 찍히려고 일부러 NG 내면 안 돼요.”
카디건을 매만지던 재경의 손이 우뚝 멈췄다. 오래 찍히려고?
“앞으로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겠단 생각으로 오늘 어설픈 콘셉트를 꾸며도 좋아요. 다만 다른 사람이 촬영할 시간이 줄어드니까 알아서 포즈 잡아주세요. 제대로만 하면 빨리 끝내줄게요. 아, 그러면 촬영 카메라에 적게 잡히려나?”
포토그래퍼의 흘리듯 던지는 말에 재경은 프로필 촬영에 어떤 마음으로 임해야 할지 결정했다.
* * *
정우의 시선은 온통 재경에게 향했다.
“턱 내리고 시선은 위로.”
포토그래머의 디렉션에 맞춰 재경의 고개가 슬쩍 내려갔다.
“좋아요.”
아주 약간 고개를 튼 것만으로도 카메라에 턱선이 제대로 걸렸다. 그 상태로 고개만 내려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으니 그만의 무심한 분위기가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다른 자세를 취해달라는 디렉션에 재경은 능숙하게 자세를 바꿨다. 아까는 똑바로 서 있었다면 이번엔 한쪽 다리에 힘을 실어 몸의 균형을 틀었다.
어제는 오랜 촬영에도 힘들지 않은지 계속 곧은 자세로 있어서 몰랐는데 짝다리로 서 있는 게 저렇게 잘 어울릴 줄 몰랐다. 고개를 비틀어 숙인 후 눈만 치켜떴다.
전체적으로 건방질 수 있는 표정과 자세였지만 슬쩍 휘어진 입술 하나에 여유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뭐 하나 버릴 게 없는 컷이 계속 올라오면서 주변에서 들려오는 감탄사가 끊이지 않았다.
“분위기 미쳤네.”
“어디 아이돌 하다 온 거 아니에요?”
“연습생만 지원하는 거 아니었나?”
“사진 한 장에 데뷔 각 나오네.”
“저 형 노래도 엄청 잘하던데…….”
“저 사기캐를 어쩌죠?”
“어쩌긴 8자리 두고 싸워야지.”
“진짜 뭐야. 미래에서 아이돌 하다 왔냐고…….”
재경의 촬영을 보는 조원들이 저마다 말을 붙였다. 윤하준이 모든 의견을 하나로 정리했다.
“확실히 아마의 느낌이 아니야.”
아마추어로 보기엔 카메라가 원하는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고 작은 동작 하나로 충족시킨다. 카메라에 찍히는 대로 뜨는 사진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겹치는 컷이 하나도 없었다.
“저렇게 눈에 띄면서…….”
정우가 낮게 중얼거렸다. 처음 예선에서부터 그랬다. 부스 앞에서 기다리는 정우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하다 서류를 낸 참이었다. 같은 소속사의 세 사람은 데뷔 조 명단에서 나오면서까지 여길 지원했지만, 정우는 그들과 조건이 달랐다.
그에게 이 오디션은 모 아니면 도였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데뷔할 수 있다면 좋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는 탈락과 동시에 소속사에서도 방출된다. 이 프로에 나가지 않는다면 적어도 연습생으로 몇 년을 더 보낼 수 있는데 싶어서 계속 망설였다. 지금 취소하면 없던 일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그를 계속 따라다녔다.
그때였다. 잔뜩 꼬이고 엉켜 버린 실타래가 가득한 생각이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하얗게 비워졌었다. 누군가가 부르는 한 구절에 지워진 것이다.
그냥 도전해.
남자의 노래를 들으며 생각한 건 그거 하나였다. 잡생각 하지 말고 도전하라고. 그리고 자기와 함께 데뷔하자고. 부스에서 나오는 남자의 얼굴을 비어버린 머릿속에 박으며 정우에게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이 남자와 같이 데뷔하자고.
“됐습니다.”
포토그래퍼가 카메라를 내리자 재경의 표정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정면이 아닌 약간 비껴 내려간 시선과 굳게 다문 입술이 그의 감정을 감췄다. 긴 속눈썹도 좋지만, 그의 눈동자가 더 보고 싶은 아쉬움에 정우가 혀를 찼다.
“연습생이 아니라 프로 같네요.”
포토그래퍼의 칭찬에도 재경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수고했단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서 나왔다. 다음 사람으로 지목당한 조원이 떨떠름한 얼굴로 저요? 라고 되물었다가 도살장에 들어가는 소처럼 끌려 나가는 건 재경 때문이겠지.
프로처럼 촬영을 마친 연습생 다음은 누구나 꺼릴 것이다. 촬영만 하는 게 아니라 한쪽에서는 연신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재경은 처음에 섰던 자리에 서서 다시 멍하니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카메라가 아예 재경을 컴퍼스 삼아 빙 돌며 찍어 대는 것도 모르고.
‘귀여워.’
정우는 역시 재경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이 오디션을 지원하는데 동기가 되어 줬으면서 자꾸 하는 짓도 귀여우니까 어쩔 수 없이 옆에 있는 거다.
* * *
프로필 촬영을 마치고 받았던 시선에 담긴 경계심을 느꼈다. 연습생이라면 주기적으로 카메라 테스트를 받는다. 그러나 진짜 무대에 서거나 화보를 찍진 않는다. 재경은 다른 연습생에겐 없는 실전이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잘했다는 건 알았다. 그게 좋은 의미는 아니겠지만 방송에 나가는 시간이 적다면 상관없다고 여겼다.
실제로 재경은 프로필 촬영을 하는데 10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은 원하는 사진이 나올 때까지 계속 카메라 앞에 서 있었다. 슬슬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하자 재경은 남은 사람의 수를 꼽아봤다.
윤하준, 이정우.
두 명만 찍고 나면 쉬는 시간이 되겠구나, 하고 막연히 생각하는데 이정우의 차례가 왔다. 연사를 찍으며 셔터 소리가 끊이지 않자 재경의 흔들림 없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각도를 틀었다.
‘조금만 보자.’
그와 얽히지 않으려는 것과 호기심은 별개니까.
“팔 들어보세요. 고개를 옆으로 돌려볼래요? 아, 차라리 렌즈를 보세요. 네, 좋아요.”
유난히 디렉션이 많은 포토그래퍼의 말에 재경은 그가 못해서 그런 줄 알았다. 눈동자만 굴려 전송된 사진을 본 재경의 잇새로 강한 억양이 새어 나왔다.
“미친.”
재경이 기가 찬 듯 이제껏 유지했던 표정이 무너지고 말았다.
“저게 연습생이야?”
자기가 어떻게 찍었는지 생각도 못한 채 재경이 이정우를 괴물 보듯이 바라보았다.
“지금 표정 좋아요.”
포토그래퍼의 칭찬에도 이정우는 처음의 그 무표정함을 유지했다. 사근하게 웃거나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년미를 보이던 다른 연습생과 다르게 이정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조건 한 표정이었다.
증명사진이라도 찍는 듯 아무 표정도 없이 카메라를 응시할 뿐이지만 포토그래퍼도 그리고 재경도 그가 풍겨내는 분위기를 읽었다.
미세한 찡그림조차 없는 눈은 컴퓨터로 찍어낸 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완벽한 균형을 이뤘다. 그 눈에서 그려지는 낯선 이를 보는 시선. 타인으로부터 조금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굳게 다문 입술과 서늘함이 감도는 분위기.
포토그래퍼는 그의 표정엔 어떤 디렉션도 던지지 않았다. 그저 자세만 언급할 뿐. 재경은 포토그래퍼의 생각을 읽었다. 이 남자가 보여주는 얼굴은 이것뿐이다.
남자의 감정을 엿보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
그를 흔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