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중간보고합니다.”
부감독의 말과 함께 제작진이 앞에 놓인 연습생 미션 결과 현황표를 들었다. 가장 많은 미션을 따간 사람부터 적게 딴 사람까지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이정우 연습생이 총 7분이야?”
최 PD가 감탄사를 흘리며 정우의 프로필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네.”
“눈에 띄던데 분량까지 제법 가져가서 방송 타면 바로 반응 오겠는데?”
듣고 있던 작가들이 그럴 거 같다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부감독이 난감한 듯 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렇긴 한데 의외로 딸 게 별로 없어요.”
“왜?”
“투 샷이 많아요.”
“아….”
단체 샷으로 20명 이상 나오는 것은 신경 쓰지 않지만 투 샷은 상대 연습생도 많이 돋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미션을 통해 공정하게 노출 시간을 편성하겠다고 말했었다. 연습생이 나가는 분량은 철저하게 계산하기로 했으니 얻어가듯 곁다리로 걸리는 것까지 계산에 넣을 생각이었다.
“서재경 연습생?”
“네.”
정우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종종 봤기에 최 PD가 바로 한 사람을 언급했다.
“서재경 연습생은 미션 얼마나 걸렸는데?”
“1분이요.”
“기본밖에 없다는 거잖아.”
부감독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최 PD가 의아한 투로 다른 사람을 돌아보았다.
“적당히 돌아갈 수 있도록 미션 짜지 않았어? 왜 이렇게 서재경 연습생에게만 박하지? 우리 그렇게 이기적이었어?”
처음 이 프로그램을 만들 때부터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건 하나였다. 참가자들을 소모품으로 취급하지 말 것. 아무리 각박한 바닥이고 뜰 것 같은 애들에게만 포커스를 맞춰주는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조금씩 햇살을 비춰주자는 게 취지였다. 그래서 일반인이 아닌 연습생을 모았다. 가장 그늘진 곳에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할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의 시간을 건네주고자.
최 PD의 뜻에 합류한 모두가 그의 뜻을 따랐다. 그런데 이렇게 한 사람의 분량이 적게 나올 수 있을까?
“그렇긴 한데 소극적인 성격인지 잘 나오지 않았어요. 시키면 잘하는데 먼저 나서진 못하더라고요.”
재경을 기억하는 몇몇 제작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엔 재경이 부른 트로트가 매정하게 끊겼던 1분 PR 촬영에 있었던 최 PD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이정우 연습생보다 서재경 연습생이 더 문제네?”
부감독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눈치에 한 여자가 나섰다.
“서재경 연습생 재밌는 컷 많이 땄거든요. 그런데 지금 거의 다 쳐내야 한다는 거예요.”
“아….”
누구보다 김 작가가 잘 아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묻고 안타깝다는 듯 굴었다.
“호텔에 들어왔을 때부터 얼마나 눈에 띄던지. 그런데 정작 미션을 못 따다니….”
그거 다 아까워서 어떡해. 완전 보물창고 같은 아이라며 김 작가가 재경의 프로필 사진을 놓지 못했다. 부감독이 가장 무난한 해결책을 내놨다.
“뿌리기식 미션은 안 되겠죠?”
“이미 그렇게 많이 했잖아요.”
“두 사람이 걸리는 거죠?”
이정우는 서재경과 찍지 않은 컷 위주로 7분을 추려야 하고 서재경은 다 잘라내야 한다. 최 PD가 집게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99명의 연습생이 모두 잘되길 바라지만 이건 엄연한 오디션이었다. 시청자가 누굴 좋아할지 오디션이 진행되며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그 역시 사람인지라 눈에 띄는 연습생이 있었다.
재경은 그중 한 사람이었다. 말이 많은 것도 아니고 잘 웃지도 않지만, 이상하게 눈이 갔다. 무표정한 얼굴에 드리운 사연 있어 보이는 얼굴이 그를 파고들고 싶은 욕구가 꿈틀대곤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정한 규칙은 어길 수 없었다. 마음에 드는 연습생 위주로 촬영해서 올리는 건 다른 연습생에게 못 할 짓이었다. 정당하게 제 몫을 따가도록 줄기를 잡았으니 절대 꺾을 생각은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최 PD가 이윽고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방송에만 편성 안 하면 되잖아.”
“그럼요?”
“홈페이지에 연습생 개별영상 올려주고 유튜브에도 연동시키면?”
TV 방송은 전 국민에게 노출되지만, 홈페이지와 유튜브는 일정 사용자에게 활성화할 수 있다.
“서재경 연습생만이 아니라 지금껏 찍은 다른 연습생도 최대 5분까지 편집해서 올려.”
잘만 터지면 연습생 개인의 팬도 모을 수 있고 문자투표에 참여율도 높일 수 있었다. 기존에 없던 기획이었지만 재경을 노출할 방법을 찾으면서 생겨났다.
“괜찮은 생각이네요.”
김 작가는 재경의 프로필이 적힌 종이에 꼭 넣으면 좋을 컷 장면 몇 개를 빠르게 써 내려갔다.
“이거 다 보여주려면 30분도 부족한데.”
애가 하나부터 열까지 귀여워서 보여줄 것도 많지만 5분이 어디냐 하는 마음으로 정리했다.
“이정우 연습생은 예선이랑 무대에 서는 것 위주로 편집해.”
그게 그나마 혼자서 카메라에 잡힌 것이라 부감독이 바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다음 주 생방송 촬영 전까지 조금만 더 힘내자고.”
오늘로 벌써 3주 차 시작이다.
“심사위원 평은 다 편집했어?”
최 PD가 바로 다음 항목으로 넘어갔다. 지금부터는 편집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때였다.
* * *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그래.”
“나도 아는 노래가 들릴 때마다 달려나갔어.”
“알았어.”
“일부러 틀린 게 아니고.”
“어, 그래.”
정우와 재경의 대화를 듣는 다른 사람들이 입술을 즈려물었다. 늘 조용하던 재경의 낯선 모습이 신기해서 보다가 픽 토라진 게 귀여워서 꼴찌 한 것과 상관없이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재경의 흰 피부가 발긋하게 달아오른 것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물론 누구도 그걸 언급하지 않았다.
“재경아?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알았다니까?”
재경이 정우의 말을 싹둑 잘랐다. 그러다 문득 쟤랑 왜 이런 실랑이를 벌이나 싶은 현타가 왔다. 19살의 정우에게 화풀이하지 말자고 하며 나름 그에게 친근하게 반응하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잘 나와줬는데 왜 지금은 별개로 이정우가 밉지?
왜긴 왜야.
“나는 등 떠밀어 1등으로 춤추게 시키고 너는 나중에 나온 거 상관없다고. 네가 달려갔는데 이미 다른 조원이 자리 차지해서 밀린 것도 알고 기어코 잡은 기회인데 춤을 몰라서 날린 것도 아니까 이제 그만할래? 어쨌든 통과했잖아.”
“…삐졌어?”
“하필 우리 조가 다 통과하지 못해서 나만 혼자 덩그러니 있는 장면이 오래 찍혔지만 괜찮다고.”
“그 정도면 괜찮은 게 아닌데?”
옆에서 듣던 하준이 정리해줬다.
정우만이 아니라 힘을 못 쓴 다른 조원까지 재경의 눈치를 보면서도 꿈틀대는 입가를 누르느라 바빴다. 나름 하준과 정우까지 있어 전체적으로 실력이 좋은 A조였지만 이번에 꼴찌했다.
어쩔 수 없었다. 미션 자체가 전부 통과하는 거였으니까. 정우나 하준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조원이 통과하지 못했다.
“연습생 오래 했다면서.”
재경의 뒤끝 저린 한마디에 정우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 사이에 미션에 통과한 순서대로 자리를 정하려 대표가 나갔다 들어왔다. 각 조원이 충분히 상의해서 그 안에서도 각자의 자리를 정해야 하니 휴식시간이 제법 길었다.
A조는 삐진 재경을 달래기 바빴지만.
“이제 자리 보자. 조금 착잡하지만 우리한테 남은 자리가 저기뿐이네.”
대표로 나갈 윤하준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앞선 조들이 몸통자리의 좋은 곳을 다 가져가고 그들에게 남은 건 날개가 되었다. 하준이 A3용지에 그려진 자리배치도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 구석 자리에 온 것도 실망스러운데 여기서 또 개인 자리를 잡아야 한다니…….”
하준이 탄식을 흘렸다. 옆에서 소운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이미 구석이라 어디에 서든 똑같을 거 같아요.”
카메라가 중간 부분 위주로 비출 테니 날개의 끝에 있는 자신들은 눈에 띄지도 않을 듯했다. 우울해하는 조원들과 다르게 재경은 날개를 만족스러운 듯 보았다. 재경은 카메라에 비치지 않을 구석 자리라 만족스러웠다.
“우선 가장 먼저 통과한 재경이 너한테 선택권을 줄게.”
하준의 말에 조원들이 일제히 재경을 돌아보았다. 이 날개에서 그나마 나은 자리를 고를 수 있단 선택권이 부러운 듯했다. 그러나 그들은 재경이 가리키는 곳을 보며 얼굴이 밝아졌다.
“뒤요.”
“여기는…….”
카메라가 와도 다른 연습생들에게 가려서 보이지 않을 자리였다. 그나마 나은 자리를 찾아도 부족한데 이런 자리라니, 하준이 정말 괜찮냐는 듯 재경을 보았다.
“괜찮으니 저기로 갈게요.”
하준이 다른 조원을 돌아보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우를 보았다.
“너는?”
“옆.”
“그럴 줄 알았다.”
그냥 재경의 옆에만 서면 된다는 듯 구는 정우의 태도에 하준이 포기의 의미로 손을 들었다. 다른 조원들이 하나둘 자리를 정하는 동안 재경이 그들에게 한 걸음 물러났다.
‘얼마 안 남았네.’
무대 하나만을 위해 한 달을 연습하는 건 재경에게 어려울 게 없는 과정이었다. 아이돌을 할 땐 콘서트를 한 달 앞두고 기존의 곡과 신곡, 개인에게 배정받은 곡 연습까지 쉴 틈 없이 몰아쳐서 했기에 이건 그냥 잘 차려진 밥상에 가서 앉는 것만큼 쉬웠다.
자리까지 괜찮아서 재경의 기분이 점점 더 올라가는 데 반해 다른 연습생들의 표정은 점점 가라앉아갔다.
“후우.”
소운이 착잡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카메라가 있어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지 급기야 제 얼굴을 가렸다. 그건 다른 연습생들도 비슷했다. 가장자리를 받은 현실에 연습생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