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제 차례가 왔다는 신호에 재경은 질끈 눈을 감았다.
‘두 소절만 부르고 바로 다음 연습생으로 넘어가면 좋겠다.’
제발 조금만 나와라. 조금만. 어차피 정우보다 더 말수가 적고 별거 없다가 노래만 부른 게 다였다. 얼굴도 잘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특이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라 흘려가기 괜찮았다.
눈은 감아도 귀에 들려오는 제 노래는 피하지 못했다.
끝없는 절망으로 떨어지는 나를
누가 구해주나
나는 아직도 너를 기다리는데
너와 함께 있다면
차가운 바람에도
나는 버텨낼 수 있을 텐데
내게 와서 날 안아줘
외로워 우는 날 품에 넣어줘
내 곁에 머물러줘
저걸 왜 불렀더라? 아, 옆 부스에 들릴까봐 선택한거지. 그런데 무반주로 부르고 있자니 중얼거리듯 내뱉은 가사가 잘 들렸다.
노래가 끝나고도 재경은 눈을 뜨지 못했다. 보통 반응이 이때 나오니 반응하기 싫었다. 그런데 대화가 사라져 기묘한 침묵이 시작되면서 결국 재경이 한쪽 눈을 살짝 뜨고 이내 다른 눈을 떴다.
아무 말도 안했으면서 모두가 재경을 보고 있었다.
“…형.”
소운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재경의 뒷덜미를 곤두서게 했다.
설마…… 뭐 별거 없겠지?
아, 제발.
재경이 속으로 아무도 믿지 않는 신을 찾으며 소운의 입을 뚫어져라 보았다.
이윽고 소운이 제 핸드폰을 재경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정우 형 때보다 더 반응이 쎈데요?”
“…….”
이게 무슨…….
재경이 입만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이 핸드폰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목소리 매력있대요. 이건 뭐 다들 인정하는 거니까.”
“모자 벗으면 잘생겼을 거 같대요.”
“얼굴이 너무 작아서 잘 안 보인대요.”
“대박. 나도 모자 쓰고 갈걸.”
“포인트는 그게 아니지. 모자를 쓰고 마이크를 들었을 때 얼굴이 다 가려져야 해.”
“칫.”
태연의 팩폭에 건후가 혀를 찼다.
모자를 쓴 게 뭐 어떻다고. 재경이 말도 안된다는 듯 그들을 둘러보았다. 태연은 아예 소운의 핸드폰을 같이 들여다보고 있고 정우 역시 자신의 핸드폰을 보았다. 이미 자신들의 예선은 다 지나가서 그런가 싶은데 정우까지 반응을 보고 있으니 이상했다.
건후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하준이 깔끔하게 정리해줬다.
“신비주의 콘셉트가 먹혔나 봐.”
재경의 이마가 와락 구겨졌다.
…무슨 신비주의?
CHOOSE NINE 공식 홈페이지
TALK
경 [지금 이게 머선129. 연습생들 모아 오디션 연다고 할 때부터 이상하게 두근거리더니 애들 와꾸 미쳤다.]
daskf [혹시나 해서 틀어본 나 자신 칭찬해bb]
그때그자랑 [갑자기 무슨 아이돌을 만든다고 이런 걸 방송해. 어아정이겠지]
그때그자랑 [어차피 아이돌을 정해졌다]
그때그자랑 [차라리 나올 애들 리얼리티를 내보내라]
우이씨 [난 어아정이라길래 어차피 아이돌은 정우라는 줄 힛]
란난지 [밑님 그런거였으면 진즉 괜찮은 애들만 내보냈겠져 하나하나보라는거자나여]
뎅포우 [???????]
아진짜맛있다 [롸?]
와꾸뭐꼬 [ㅡㅇ.ㅡ으으아아아아 픽을 차자써어어어ㅠㅠㅠㅜㅜㅜㅜㅜ[
qwer [어? 혜자스러운 얼굴을 봤는데?]
강남 [얼굴이 잘 안보여. 누가 모자 좀 치워줘]
new [모자 찌……크흠. 살포시 벗겨주고 싶다^^]
정의사회 [얼굴이 너무 작아.]
SKIP [노래 무슨 일이지? 왜 이렇게 슬프지? 나만 이래?]
AKLDJF [내가 보듬어주고싶다아아아아아ㅏㅏㅏ 내가 안아주고 싶어 흐이우]
tt [헐. 목소리.]
롸? [후욱후욱 덕질할 생각에 기부니가 즇아요]
lee [모자 진짜... 없애버리고 싶다.]
미네랑 [잘생겼을 거 같은데? 일단 하관이 잘 빠졌어]
도비 [젭알 모자 좀 벗겨주세요오오오오]
나는파스타 [엄훠?]
28편 [아놔 마이크 들었더니 얼굴이 사라지는 매직이……]
와이라노 [나도 같이 한숨이 나온다]
[익게] 이게 머선일이져?
그냥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면서요 연습생이 나오는 거라면서요 다듬어지지 않은 아이들 중에서 원픽 고르라면서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왜 아이돌을 데려와여? 아우라가 장난아니자나여
왜 가수를 데려왔어여? 목소리 무슨 일이져??
왜 배우를 데려왔져???????? ㅋㅋㅋ비주얼이 연습생이 아니잖어 이거 조사해봐야 함ㅋㅋㅋㅋㅋㅋㅋ아냐 그냥 감사합니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오늘 여기 누울게여
└ㅈㄴㄱㄷ 우연히 봤는데 와.........
└ 말이 안나오죠? 하나하나 지나칠 수 없더라고요 그냥 여기 pd님 찾아가서 그랜절 한 번 하고 와야겠어요
└대박 목소리 듣고 깜짝 놀랐음 아이돌경연인줄
└노래잘하는 사람이 엄청 많았어요 저는 그중에서 ㅅㅈㄱ연생이 진짜..
└제가 놀란 게 바로 그 사람
└└통했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ㅇㅈㅇ 핥는 분은 없나요?
└└그분 역시... 사랑하려고요
└ㅅㅈㄱ 생긴 건 되게 얇은 목소리 낼 거 같은데 와 오졌슴
└└모자 벗으면 잘생긴 얼굴 있을 거 같아
└└레알레알레알에랄ㄹㅇㄹㅇㄹㅇㄹㅇ
└쟤네 둘 뭐임??? 니네는 이미 데뷔다...
└잘생긴애 옆에 예쁘고 잘생긴애 또 잘생긴애.. 심장 폭격맞아서 수술하러 갑니다..^^ 강해져서 돌아올게요 ୧(๑•̀⌄•́๑)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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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게] 혹시 제당슈만이라고 알아요? 맞아요 먹는거에여 엄청 달아여(✯◡✯)
└바다가 보이면 오션뷰 건물이 보이면 시티뷰 당신들이 보이면 알라뷰
└혹시 육회드립 또 필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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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잠깐 광고타임이 나오자 여기저기 앓는 소리를 냈다.
“우와…… 잠깐만 쉬자.”
“예선 하나만로도 숨막혀요.”
소운이 테이블에 엎어지고 태연은 건후에게 기댔다. 180분이라는 시간이라는 게 촬영할 때만 해도 짧게 느껴졌는데 앉아서 보려니 길었다.
“근데 예선 되게 짧게 보여준거죠? 한 사람당 30초는 했나?”
“그것도 안 되는 거 같은데.”
“진짜 빡빡하게 짰다.”
각자 참아왔던 말을 쏟아냈다. 그 사이에서 재경은 말없이 광고를 보았다. 음료수 광고, 핸드폰 광고, 운동화 등 프로그램을 보는 시청자의 연령대를 고려한 광고가 이어졌다.
“이제 개인 무대 섰던 거랑 PR, 또 서비스시간이 남은거지?”
태연이 천장에 손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 계산해보던 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각자 마실 음료수를 넉넉히 챙겨온 하준이 소운을 밀어버리고 쟁반을 올려놨다. 일일이 챙겨주는 게 귀찮은 듯하지만 그래도 쉬지 않고 입에 무언갈 넣어주었다.
“이거 먹어봐.”
하준이 재경의 입에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냥 받아서 먹으라는 게 아니라 아예 입에 넣어줬다. 막을 새도 없이 받아먹은 재경은 무의식중으로 씹었다.
‘육포?’
쫄깃하게 씹히는대로 은근한 육향이 올라왔다. 그것을 씹으며 다른 사람을 돌아보니 모두 재경처럼 육포를 먹고 있었다. 덕분에 조용해지자 하준이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소파에 반쯤 기댔다.
“이제야 좀 조용해지네.”
재경이 입에 있는 걸 모두 삼키고 있으니 다시 육포 하나가 아랫입술에 닿았다. 정우였다. 그도 하준처럼 육포를 내밀고 있으니 재경은 뭔가 싶으면서도 일단 받아먹었다.
‘맛있네.’
질기지 않고 짜지 않았다. 은근하게 씹어먹기 좋아서 부담이 없었다.
“심사는 2화에서 보여주겠지?”
“그럼 오늘은 또 뭘 보여주려나요.”
“PR을 하거나 서비스시간을 보여주거나 둘 다 하거나.”
하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적어도 몇 명만 올려주는 건 아니니까 어떻게 방송하든 우리는 상관없지.”
“하긴… 정우형만 7분이지 난… 흑.”
"1분도 잘한거야.”
태연이 얼마를 받았는지 듣고 재경이 속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나보다 두 배 길다. 그 사이 소운이 혀를 내둘렀다.
“예선은 전혀 생각못했어요.”
‘나도.’
재경이 분한 듯 육포를 씹어댔다. 분명 아니라고 했으면서. 카메라 테스트라고 해놓고!
활동할 때도 제작진에게 많이 속았는데 이번에 또 속았다.
재경이 분한 마음을 억누르고 TV를 보았다. 이번엔 뭐가 나오는지 다 봐주겠다는 듯 비장하게.
“큭.”
‘음?’
누가 웃은거지?
재경이 옆을 돌아보니 다들 TV를 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누가 웃은건지 몰라 의아하던 것도 잠시 재경도 화면에 집중했다.
곧 99명의 연습생의 사진이 홈페이지에 올라왔다는 안내와 함께 한 사람씩 PR하는 장면으로 넘어갔다. 하준의 말대로였다. 본선에서 노래를 부른 건 2화로 미루고 PD가 말한대로 넣어졌다.
확실히 최 PD란 사람은 조금 능글맞긴 하지만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예선 넣은 건 빼고!) 각자 PR과 얻은 시간만큼 정확하게 계산해서 내보냈다. 재경은 그들을 보면서 합숙소에서 보던 거랑 다르니 나름 볼만하다고 여겼다.
‘번호 순서대로 보여주는 건 아니네.’
그때 재경이 받은 번호가 30번이었지만 지금 나오고 있는 연습생은 58번이었다.
“저 때 뭐했어?”
언제 나올지 모르니 그냥 보고 있자니 정우가 물어왔다.
“나? 나 그냥 트로… 어?”
- 안녕하세요. 시작하겠습니다.
타이밍 좋게 재경이 나왔다. 재경은 그때 반쯤 충동으로 트로트를 불렀던 게 조금 걸렸지만 날아다니던 다른 연습생에 비하면 무난할거라 예상했다.
“보면 되겠네.”
재경이 TV를 가리키자 정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막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화면 속 재경이 자기소개만 한 채 멈춰 있었다.
“어?”
재경도 이상해서 뭐지? 싶었다. 그때 멈춘 화면이 일렁이는 가 싶더니 재경의 얼굴 위로 자막이 올라왔다.
[잠깐만요. 그냥 PR만 보여주기 아쉬워서 준비했습니다!]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