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누군가의 외침에 재경이 급히 몸을 숙였다. 거의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동시에 재경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찾았다는 외침과는 다르게 재경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지?’
소란스럽긴 한데 그 소음이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재경은 잠시 더 귀를 기울이다가 파티션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몇몇 남자들이 모여있었다.
‘마케팅팀?’
한 연습생이 마케팅 팀장에게 발각되면서 제 팔에 있는 끈을 풀어줬다. 제 팀원을 늘린 팀장이 손을 들어 인원이 찼음을 알리고 사라지는 것까지 지켜본 재경이 다시 몸을 숙였다.
‘언제 나가야 하지.’
마케팅팀의 인원이 다 찬 걸 보니 이정우가 팀장인 홍보팀도 다 모이지 않았나 싶었다. 이정우라면 같이 하고 싶어 할 사람이 많을 것 같았다. 그러니 홍보팀 6명이 다 차면 재경은 슬슬 나가서 눈에 띄는 아무 팀에나 들어갈 생각이었다.
* * *
전상국은 벽에 기댄 채 계속 힐끔대며 사무실을 훔쳐보았다.
“아직 한 명 남았어요.”
인사팀장이 카메라맨을 향해 끈을 흔들며 하는 말에 전상국은 조용히 벽에 몸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그가 원하는 팀은 따로 있었기에 인사팀장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 거였다.
‘대체 이정우는 어딨는 거야.’
전상국이 원하는 팀은 홍보팀이었다. 당장 순위가 나오지 않았더라고 상위권의 몇 명은 추려 볼 수 있었다. 그 기준은 생방송이었다.
단체곡 무대였던 생방송에서 중앙에 위치했던 전상국은 자신의 얼굴이 더 많이 나올 줄 알았다. 카메라에 더 많이 비쳐서 서재경은 아예 기어올라오지도 못하게 밟아줄 생각이었는데 나중에 돌려보고 아닌 걸 알았다. 음악 PD가 원하는 대로 비춰주는 게 맞다지만 그 자리 선정을 위해 미션에 죽을힘을 다했던 전상국으로서는 기막힐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 생방송의 여파는 제법 많았지만 유독 두 사람을 향해 쏟아졌다.
‘이정우, 서재경.’
서재경을 떠올린 순간 전상국이 이를 갈았다. 서재경이 반응이 좋은 건 불쾌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이정우의 옆에서 버프를 제대로 받은 거다. 이정우와 같이 화면에 잡힌 것도 모자라 완전 다른 이미지니까 먹혀들었음을 알았다.
서재경이 제대로 머리를 썼음을 인정한 전상국이 주먹을 쥐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둘 순 없지.’
전상국은 이정우를 이용해 방송을 탈 거다. 한 번 무대를 하고 난 후면 인지도가 생길 테니 그때 독자적으로 움직여도 좋았다.
조용해진 복도로 나온 전상국은 맞은편에서 오고 있는 상대방을 확인하자마자 절로 표정이 활짝 폈다.
“이정우.”
제 목소리를 들었는지 이정우 역시 자신 쪽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속도를 올려 달려왔다.
“이렇게 만날 줄이야. 나 그럼 홍보팀원이 되는… 거…….”
전상국은 이정우에게 발각되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제 팔을 들었다. 그런데 이정우는 달려오는 속도를 줄이지 않더니 그대로 전상국을 스쳐 갔다. 순식간에 스쳐가 버린 이정우가 일으킨 바람이 전상국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전상국은 이정우에게 말을 걸었던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돌려보는 그때 어디선가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야, 걔 서재경 아니라니까.”
* * *
4번 더 자리를 옮긴 후에야 재경은 복도로 나왔다. 이 정도면 얼추 팀이 다 만들어졌겠지. 이왕이면 JT연습생은 하나도 없는 팀이면 좋겠는데.
여러가지 생각을 하며 재경은 구겨진 와이셔츠를 탁탁 털었다. 정장 바지 역시 잔뜩 구김이 가 있어서 몇번 매만지고 나니 계속 들고 다닌 서류철을 깨달았다.
‘이거는…….’
제자리에 돌려놓는 게 좋을 거 같아 아까 숨었던 비품실의 위치를 떠올렸다. 이 아래충이니 비상계단으로 나가면 되겠지, 생각하며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어갔다. 확실히 소음이 많이 줄었다. 복도에 울리는 제 구둣소리에 재경은 멈췄다 걸어가기를 반복했다.
’나 왠지 혼자 야근하는 기분이야.‘
고요한 복도를 걸어가니 더 그랬다. 촬영 중이라는 것도 잠시 잊은 채 재경은 창문 너머 사무실을 보았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적당한 회사에 면접을 보고 들어갈 수 있을까?
이젠 꿈꿀 수 있는 미래라고 생각하니 재경의 표정이 사르르 풀어지고 있었다.
“경영학과를 가면…….”
작게 중얼거리던 재경이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며 고개를 돌리면서 우뚝 멈춰버렸다. 정우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재경은 본능적으로 옆의 벽에 딱 붙으며 숨을 참았다.
‘쟤가 왜 있는 거지?’
팀을 다 만들면 가서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데… 아직 안 만들었다고?
재경은 설마 하는 마음이지만 울상을 짓고 있었다.
‘일단 피하자.’
“서재경.”
재경이 돌아선 앞으로 정우가 걸어 나왔다.
“너… 왜 여깄어.”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그동안 어디 있던 거야.”
“나는 그냥…….”
재경이 말끝을 흐렸다. 어디를 돌아다닌 게 아니라 숨어 있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같은 팀이 되지 않으려고 일부러 숨어다닌 게 무색하게 될 상황이었다. 재경의 시선이 정우의 손을 보았다.
“왜 아직 끈이 세 개야? 팀 안 만들고 뭐 했어.”
재경이 당황한 눈으로 정우의 손을 가리켰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정우의 얼굴을 보았다.
“지금까지 뭐한 거야. 그리고 그 땀은 다 뭐냐.”
아까 숨어서 지켜봤을 때 별로 힘들이지 않고 팀원 구하는 거 같은데 얘는 왜 세 명 구하는데 이렇게 땀을 흘린 걸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쨌든 잘해 봐.”
재경은 당장 정우의 얼굴에 흐른 땀을 대충 가리킨 후 아무렇지 않은 척 뒤돌았다. 이대로 모른 척 지나가게 두면 좋겠는데 어깨가 잡혔다.
“내 놔.”
재경이 한숨을 감춘 채 주변을 훑어보았다. 카메라맨이 일정 거리를 두고 자신을 찍고 있었다. 얼추 거리를 확인한 재경이 서류철로 입을 가린 후 작게 말했다.
“미안한데 나는 다른 팀 가고 싶어.”
아까 헤어지자고도 했고 지금도 확실히 거절의 뜻을 내비치니 정우도 별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자기가 싫다는데 기분 나빠서라도 그냥 가면 더 좋겠고.
재경의 말에 정우가 반듯한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정우가 물러서는 대신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니 재경이 주춤거리며 벽에 등을 붙였다. 다시 정우가 한 걸음 다가오자 재경이 더욱 벽을 밀 듯이 몸을 뒤로 뺐다.
여기서 정우가 더 다가오면 물러날 데가 없는 재경과는 거리가 매우 가까워졌다. 재경이 정우를 올려다보면서 오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런데 정우는 어떻게 해석한 건지 재경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미 가슴 쪽은 닿을 듯 말 듯 종이 한 장 차이 정도밖에 안 났고 얼굴은 재경이 든 서류철이 유일한 방어 수단이었다.
“정우야, 내가 아까 말했잖아. 우리 헤어지자고. 다 이걸 위해서 한 말인데…….”
“내 놔.”
정우는 재경의 사정을 봐주지 않겠다는 듯 말을 끊어냈다.
“다른 애랑 해.”
재경이 어떻게든 정우를 설득해보려 할 때였다. 별안간 정우에게 팔이 잡히며 재경의 고개가 휙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제 팔에 묶인 끈을 향해 다가서는 손을 보며 재경이 어떻게든 피하려고 버둥거렸다. 그러나 정우와 벽 사이에 껴서 옴짝달싹 못 하게 된 재경이 서류철까지 들고 있는 마당이라 의미 없는 몸부림이었다.
정우가 재경의 팔을 붙잡고는 반강제로 팔에 묶인 끈을 풀어냈다. 그제야 재경을 풀어 주듯 뒤로 물러난 정우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카메라를 향해 대놓고 끈을 흔들어 대자 재경이 발끈했다.
“이런 경우가 어딨어.”
서로 합의하에 팀이 이뤄지는 거지 싶은 재경이 억울해서 한 말이지만 정우가 씩 웃으며 재경의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쳤다.
“잘해 보자.”
재경이 망했다는 표정으로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망했어. 진짜 망했어.
재경이 한숨을 푹 쉬고 있자니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재경이 찾았어?”
하준의 물음에 정우가 재경을 가리켰다. 하준이 고개를 기울여 정우에게 가려졌던 재경을 확인하더니 씨익 웃었다.
“그럼 우리 팀 다 만들어진 거네?”
재경은 자신의 끈까지 합해봐야 정우에게 4개밖에 쥐어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 팀이 되기에 인원이 모자라는데?
그렇게 막 고개를 들었던 재경은 하준의 팔을 보고 놀란 소리를 냈다.
하준이 제 팔에 묶인 끈을 풀어내 정우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끈을 풀면 대기실 가서 기다려야 되잖아. 너 그런데 대체 어디 숨어 있었던 거야? 찾아도 찾아도 안 보이더라.”
그제야 재경은 정우의 얼굴에 맺힌 땀의 이유를 알았다.
“너 설마 나… 찾아다닌 거야?”
“어.”
정우가 턱에 맺힌 땀을 훔치며 대답했다. 재경은 정우의 이마부터 콧등을 천천히 훑어내려 갔다.
“…왜?”
그러니까 너 왜 자꾸 나한테. 처음엔 어린 이정우를 배척하는 것만 같아 받아들였지만 지금 무대를 함께 하겠다고 뛰어다녔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다.
재경은 처음부터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정우를 이상하게 여겼어도 그냥 넘어갔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서 정우에게 어떤 말이든 들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왜겠어.”
하준의 가벼운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발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