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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이돌-44화 (44/125)

44화

제대로 된 연습이 시작되자 개인의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대형에 맞춰 하나하나 안무를 숙지해 나가는데 각자 습득하는 정도가 달랐다.

“여기서 조금 변형을 하려면 웨이브를 빼는 대신 힘있게 뻗어나가는 게 좋겠는데?”

안무를 전부 익힌 태연이 기본 동작을 변형해서 만든 안무를 재경과 정우는 어렵지 않게 따라갔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반복해서 익혀나가는 하준은 태연의 설명을 들으며 연습해나갔지만 양채준과 최우주는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기서 팔을 뻗으라고요.”

태연의 설명에 양채준이 동작을 다시 한번 반복했지만 박자가 안 맞아 팔을 뻗을 타이밍을 자꾸만 놓쳤다.

“이거는 한 박자를 반으로 쪼개서 움직이면 되요.”

태연이 조금 더 빨리 움직여보라고 하자 양채준이 심각한 얼굴로 다시 해보았는데 안 틀리던 다른 동작까지 꼬여서 마지막에 어설프게 팔만 내미는 게 되었다.

“어? 아니, 여기서 이렇게.”

어쩌다보니 태연이 양채준의 옆에서 하나씩 맞춰주고 있으니 최우주는 정우가 맡게 되었다.

“여기부터 다시 해봐.”

최우주가 정우의 앞에서 안무를 보여주고 있으니 재경은 혼자 남게 되었다. 재경이 최우주의 동작을 살피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 거울 속 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정우는 어서 네 개인 연습이나 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다른 사람 도와주라며 열심히 연습하라고 할 땐 언제고.

재경이 정우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눈을 돌렸다.

‘혼자 두면 나야 좋지.’

카메라의 불이 반짝이고 있으니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닌데 잘됐다. 재경은 한두 번 더 맞춰보고는 자리를 벗어날 생각이었다. 오늘 미션은 저녁 식사 전에 있다고 하니 여유시간도 많았다.

오디션에서 가장 치열하게 보내야 할 것 같지만 의외로 재경은 바쁘지 않았다. 제때 식사도 챙겨주면서 연습 시간과 간간이 들어오는 미션만 하면 되니 오히려 몸이 편했다.

바깥으로 나가면 끼니 걱정과 돈 걱정에 엄마까지 잠이 들기 전까지 신경이 곤두서는데 반해 이안에서는 다른 세상에 들어온 듯 걱정이 없었다.

가끔 합숙이 끝나거나 오디션에서 탈락한 후를 떠올리긴 하지만 몸이 편하니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런저런 흘러가는 생각을 하며 몸을 움직이던 재경이 문득 제 옆에 다가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저… 형.”

양채준이었다.

“죄송한데 저 춤 좀 가르쳐주실 수 있어요?”

예전 소운과 비슷한 부탁에 재경은 태연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나갔는지 태연이 보이지 않았다.

“아, 태연이라면 잠깐 나갔어요.”

“그럼 태연이가 올 동안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

“어… 언제 올지 몰라서요.”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양채준이 제 머리를 긁적였다. 어딘가 난감하기도 하고 또 머쓱한 듯 구는 그의 모습에 재경은 태연과 삐걱거렸음을 눈치챘다.

재경이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하자 양채준이 알아서 태연과의 일을 간접적으로 말해왔다.

“제가 못해서 답답했나 봐요. 몇 번 같은 부분을 헷갈리니까 한숨을 쉬더라고요.”

그에 재경이 태연과 함께 보냈던 아이돌 때를 떠올렸다. 친한 사람에게는 애교도 부렸지만 재경에겐 그다지 상냥하진 않았다. 뭐, 그거야 친하지 않으니까 그럴 수 있겠지만. 어쨌든 제 감정을 고스란히 내보이다 보니 서로 불편한 기색을 느꼈나 보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서 태연이만큼 알려주진 못할 거야.”

“괜찮아요.”

양채준이 배시시 웃으며 재경의 옆에 붙었다. 재경은 양채준에게 어디가 어려운지 물어보느라 정우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  *  *

“아니, 여기를 더 부드럽게.”

“이렇게요.”

“그렇긴 한데.”

양채준의 춤을 보던 재경은 잠시 턱을 괴고 고민했다. 단순히 습득의 문제라면 몇 번이고 반복하면 되는데 총체적으로 봐줘야 할 게 많았다.

일단 소운은 병아리 같았다. 연습생으로의 경험이 적어서 하나하나 가르쳐줘야 하는 건 있었지만 조금씩 잘 따라왔다. 그에 비하면 양채준은 언뜻 비슷한 것 같지만 특유의 버릇이 있었다.

안무 중간에 필요없는 몸짓이 들어가 박자를 놓친다거나 괜히 표정에 신경써서 몸이 시원하게 움직이질 못했다.

“여기서 팔을 완전히 뻗어야 해. 그리고 뒤돌때는 다음 안무로 바로 연결되야 하니까 느려지면 안되고.”

“네.”

양채준이 다시 움직이는 걸 보고 있으니 재경이 그의 팔을 뻗어가며 다시 세심하게 잡아주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의문에 양채준의 어깨를 잡아 물었다.

“혹시 이거 기본 안무는 다 익혔어?”

“하긴 했는데 완벽하진 못해요.”

양채준이 쑥쓰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다시 안무를 익히는 걸 보고 있으니 재경이 그의 팔을 더 위로 올렸다.

“이건 특히나 동작이 작은 건 별로라서 완전히 들어야 해.”

재경은 이 와중에도 틈틈이 자세를 봐주면서도 양채준의 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안무를 익힌 것치고는 많이 부족한 거 같지만 속내를 감췄다.

그로부터 2시간은 더 붙어서 하고 있자니 재경이 지친 숨을 내쉬었다.

“형 진짜 잘 가르쳐주시네요.”

“내가?”

“네. 저 진짜 이렇게까지 진도가 나갈 줄 몰랐어요.”

양채준의 수줍은 미소에 재경은 네가 열심히 해서 그런거란 덕담 비슷한 말을 건넸다. 어쨌든 자신이 하라는 대로 따라오려고 노력하긴 했으니까.

“저 혼자였으면 진짜 시간이 오래 걸렸을 거 같아요.”

“네가 왜 혼자야. 나는 둘째치고 태연이가 있잖아.”

메인 댄서를 맡은 후부터 노래도 중요하지만 춤을 무조건 완벽하게 마스터하자는 태연의 각오가 남달랐다. 그러니 양채준도 결국은 잘 해나갔을 것이다.

“아니에요. 전부 형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다행이네.”

계속 띄워주는 듯한 말에 재경은 민망한 듯 손을 저었다. 그사이 양채준이 음원을 틀어 춤을 추면서 재경에게 자신을 보라는 듯 눈짓했다.

“이 정도면 무대에 서기 괜찮겟죠?”

그냥 무대에 올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센터에다가 능숙하게 쳐야 하지만 재경은 대충 긍정하고 넘어갔다. 대신 2분 가량의 안무를 다 익힌 걸 확인했으니 제 역할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잠깐만 숨 좀 돌리자.”

이제는 태연도 돌아올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자 양채준이 진짜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 건네고는 연습실 중앙으로 돌아갔다. 다시 연습 하려는 모습을 본 재경이 밖으로 나왔다. 카메라에서 벗어나니 조금 막힌 숨이 뚫린 것 같았다.

“연습 기간이 긴 줄 알았는데 짧은 거 같기도 하고.”

재경이 완벽하게 무대에 설려면 얼마나 걸릴지 예상하는 동시에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상대를 발견했다.

‘쟤를 왜 여기서 보냐.’

재경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카메라가 없는 데서 쉬려고 나온건데 하필 전상국과 마주쳤다.

그냥 지나치면 좋겠다는 생각이지만 전상국은 재경의 앞을 막듯이 대각선으로 걸어왔다

“이게 누구야. 서재경이네.”

“비켜.”

“1차 통과하니 기고만장해졌네?”

“딱히 그런 생각한 적 없는데 넌 기쁜가보다?”

재경의 심드렁한 대꾸에 전상국이 바로 이죽거리던 표정을 지웠다.

“버스타서 올라온 주제에 꼿꼿하기는.”

“버스?”

“그래, 너 이정우 버스 탔잖아.”

재경은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 요행을 바라고 이번에도 이정우한테 달라붙은 거 모를 줄 아냐?”

“아…….”

재경도 정우가 인기있을 거란 건 의심하지 않았다. 최종 1등이 될 애였으니까 자신도 그렇게 떨어지라고 난리치지 않았나.

그런데 한편으로는 정우 때문에 붙었다는 말이 이상하게 재경의 간지러운 속을 긁어주고 있었다. 마치 정우만 아니면 떨어질 수 있을 거 같은 희망에 그랬다.

“그래봐야 끝이지. 너 이정우 없이는 좆도 아닌 새끼거든.”

“…그래?”

“뭐?”

“나 진짜 아무것도 아니냐?”

재경의 되물음에 전상국이 ‘이 새끼 뭐야’ 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재경은 왜 전상국에게 물어볼 생각을 못했나 싶었다. 이정우보다 전상국이 자신에 대한 걸 훨씬 적나라하게 말해줄 수 있는데 말이다. 전상국을 피하고 싶단 생각은 어느 순간 사라지며 재경이 그의 앞에서 아예 팔짱을 꼈다.

“하나만 물어보자. 나랑 너랑 누가 더 유명하냐?”

“이 미친놈이.”

“왜? 내가 더 유명해?”

“뭐래. 너 지금 허접이거든.”

전상국이 기가 찬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잠시 달아오른 얼굴을 삭히며 재경을 향해 삿대질했다.

“생방송에서 카메라 조금 잡힌 거 가지고 기고만장해서는. 어차피 네 분량 실종이라 별로 화제성도 없어.”

화제성이 없다니 다행이다.

“너튜브는?”

“왜? 그거라도 어떻게 붙잡고 올라가고 싶냐? 그런데 어쩌냐. 너 한정 한 시간이 아니고 나눠먹기라 조회수도 나눠먹을 판인데.”

전상국의 비웃음이 거세질수록 반대로 재경은 점점 속이 편안해져왔다.

“그랬구나. 나 허접이구나.”

재경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리자 전상국이 심술궂은 얼굴로 이죽거렸다.

“왜? 못 버틸 거 같아서 불안해지냐?”

“그 반댄데.”

“근자감 미쳤네. 버틸 수 있다고?”

불안한 게 아니라 편안하다는 의미로 한건데 전상국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뭐, 그렇다고 굳이 오해를 바로잡을 생각은 없었다.

전상국을 바라보는 재경은 아까보다 여유를 찾은 듯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너한테서 위로를 받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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