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인터뷰를 위해 걸어가던 재경은 막 인터뷰를 끝낸 태연을 발견했다. 어디를 갔나 했더니 인터뷰 때문에 늦어진 모양이었다.
“어? 형.”
태연의 반가운 기색에 재경이 마주 손을 들었다가 멈칫했다. 소운과 비슷한 느낌이면서 조금 달랐다. 아마 태연과 예전에 같이 활동한 게 원인이었다. 정우처럼 과거의 그들에게 미리 일어나지 않을 일로 편견을 지웠다 생각했는데 양채준의 일로 조금 흔들렸다. 자신에게 하듯 양채준에게 굴었던 게 걸렸다.
재경이 저도 모르게 굳어지려는 표정을 가다듬는 동안 태연이 가까이 다가왔다. 태연이 생글생글 웃는 모습에 재경은 마주 웃는 대신 대충 말을 돌렸다.
“인터뷰 다 했어?”
“네, 형 차례죠?”
“응.”
재경이 아까보다 조금 어색한 말투로 받아쳤지만 태연은 알아채지 못하고 주절주절 제 말을 늘여놨다.
“아까 인터뷰하면서 작가 누나가 무슨 말했는지 알아요? 재경이 형이랑 정우 형이랑 누가 좋냐는 거예요. 그런 게 어떻게 질문이 되지?”
그러게. 당연히 한 소속사이면서 더 많이 본 정우를 좋아하겠지.
“생각할 것도 없이 재경이 형이라고 하니까 나중에 방송 보고 정우 형이 서운하지 않겠냐고……. 그럼 방송 탄다는 거겠죠?”
나중에 보고 뭐라할 정우의 반응보다 자신의 인터뷰가 방송에 나갈 게 더 좋은지 태연이 연신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태연의 말을 듣는 재경은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그저 가만히 있었다.
“아, 재경이 형 가야되죠?”
“응.”
“어? 형. 얼굴이 안 좋아요.”
이제야 재경의 표정을 자세히 들여다본 건지 태연이 그에게 가까이 밀착하며 말했다. 재경은 제 턱밑까지 다가온 태연에게서 물러나려 상체를 뒤로 물렸다.
“연습하고 바로 와서 그런가 봐.”
“아… 많이 힘들면 말해요. 제가 바톤터치 할게요.”
재경은 둘러대려고 한 말이었지만 태연이 바로 알아들은 듯 굴었다. 그러나 바톤터치가 왜 나오는지 의아했지만 재경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럼 나 인터뷰 하러 갈게.”
“잘하고 와요. 혹시 누가 제일 좋냐고 물어보면 저도 꼭 생각해주고요.”
태연은 끝까지 재경에게 장난스러운 말을 건네며 시종일관 분위기를 띄웠다. 그럴수록 재경이 더욱 그를 어색하게 생각하는 줄 모르고. 재경이 손을 흔들고는 돌아섰다. 보기엔 다른 사람이 기다리니 빨리 움직이는 듯 하지만 태연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재경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뭐지? 뭔가 평소랑 다른데.”
그런데 연습 때문에 힘들다고 하니 더 물어보지 못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태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안으로 들어온 재경은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다. 보통 인터뷰할 때 작가가 있었던 것에 비해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최PD의 얼굴에 은근한 불안감이 올라왔다.
“오늘 인터뷰는 PD님이랑 하나요?”
“아, 일단 앉아요.”
재경이 엉거주춤 자리에 앉으며 최PD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와 다른 것도 그런데 최PD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그랬다.
“다른 연습생은 진짜 인터뷰를 하고 있고 서재경 연습생을 비롯한 몇몇은 이렇게 가짜 인터뷰를 하고 있지요.”
역시나.
최PD의 말에 재경은 그의 의뭉스러운 미소의 이유를 알았다.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벌써부터 재밌다는 듯한 눈빛이라 저절로 굳어있었던 것이다. 이럴 때마다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지 않은 게 너무 안타까웠다.
“혹시 컨셉을 다 잡으셨나요?”
최PD의 말에 재경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에 맞춰 배경은 사무실로 하고 의상은…….”
“잠깐. 말하지 마세요.”
최PD가 손을 들어 재경의 말을 막았다.
“당연히 맞췄겠죠.”
최PD가 다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말에 재경이 이상하다는 듯 보았다. 지금껏 연습실에 박아둔 카메라로 다 확인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새삼 저렇게 말하는지 의아했다. 그러다 재경이 흠칫 놀란 눈으로 최PD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보았다.
다 알고서도 물어본다는 건…….
“지금부터 히든 미션을 시작하겠습니다. 미션지 봐주세요.”
최PD는 친절한 설명대신 능숙한 진행으로 재경을 이끌었다. 특히나 뭐든 알고 싶다면 어서 미션지를 보면 된다는 식이었다.
히든 미션?
재경은 궁금한 마음과 별개로 미션지를 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뭐가 되었든 이것을 들어 읽는 순간 얽혀들어갈 게 뻔하니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서재경 연습생?”
최PD의 부름에 재경은 소리 없는 한숨을 감췄다. 이러나저러나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니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미션지를 뒤집었다. 미션지를 들여다본느 재경을 향해 카메라가 슬쩍 줌을 당긴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경은 미션지의 내용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난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마피아요?”
전혀 이해못하겠다는 듯 재경이 최PD를 보았다.
“이 미션이 시작된 순간부터 서재경 연습생은 마피아가 되는 겁니다. 다른 팀에게 절대 정체를 들켜서는 안되고요.”
“저 그냥 시민하면 안 되나요?”
아무것도 모른 척 있을게요, 말하는 재경이 약하게 울상을 지으니 최PD를 비롯해 함께 있는 스태프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네, 미션지를 든 순간 무조건 마피아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마피아가 해야 할 일이 있겠죠?”
최PD가 미션지가 있던 자리에 검은색의 물건을 올려놨다. 전자기기 같기도 하고 장난감 같기도 했다. 재경이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는 사이 최PD의 설명이 이어졌다.
“바로 카메라 감독이 되는 겁니다.”
“뭐가 된다고요?”
카메라 감독? 마피아가 왜 감독이 되어야 하는거야. 재경이 아까보다 더욱 눈썹을 내렸지만 최PD는 아랑곳없이 설명을 이어갔다.
“이 소형캠으로 찍어주면 되는데요. 말 그대로 우리 연습생의 모습! 화면보고 안녕하세요 인사하는거 말고 날 것의 모습을 찍어주세요. 아무래도 우리가 가면 긴장하니까 이렇게 주게 되었습니다. 마피아인 걸 들키지 않고 우리 연습생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보여줄수록 점수가 높으니 각 팀원의 모습을 잘 찍어주세요.”
재경은 미션지를 거둬가는 대신 내민 소형캠을 내려다보았다. 대충 몰래 카메라의 형식을 빌린 것 같았다. 그리고 처음 거부감이 들던 것과 다르게 미션을 듣는 내내 재경에게 나쁠 게 없는 조건이었다. 카메라 감독이 카메라 안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어때요? 재밌겠죠?”
“…네.”
재경이 소형 캠을 품에 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PD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저도 기대되네요. 재경 연습생이 찍어올 결과물이 말이죠.”
재경은 인터뷰를 마친 것처럼 자연스럽게 부스를 나왔다. 그리고는 연습실이 아니라 방으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인터뷰를 위해 온 하준과 마주쳤지만 찝찝해서 씻겠다고 하니 의심없이 넘어갔다.
캠을 옷 안에 숨기고 방으로 돌아온 재경은 정우가 있는지 확인했다. 조용하니 느껴지는 인기척이 없자 재경이 곧장 의자에 가서 앉았다. 품에 숨겨놨던 캠을 이리저리 돌아보는 재경이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찍어야 할까. 무대 선택권이라는 게 잘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최PD가 컨셉을 이야기했을 때 연관된다는 걸 알았다. 어쩌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무대를 끌어나갈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적당히 찍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또 재경의 마음이 그렇지 않았다. 아예 안하면 모를까 애매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건 지금껏 함께 연습한 다른 사람에게도 못할 짓이었다.
“다들 나와 다르게 간절하니까.”
자신이 싫다고 적당히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재경은 한숨을 한 번 쉰 채 마피아의 일을 어떻게 완수할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 * *
인터뷰가 끝나고 난 후, 모든 연습생이 한데 모였다. 다음 미션을 위해서라는 말에 그들은 이번에 뭘 할지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무대에 서겠다고 노력하는 틈틈이 벌어지는 미션은 그들의 지루할 수 있는 생활에 활력이 되고 있었다.
“미션을 발표하겠습니다. 바로 ‘마피아 게임’입니다. 각 팀당 한명씩 마피아가 숨어져 있으니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4시간 후에 투표를 통해 밝혀내면 됩니다.”
“오.”
“오오.”
연습생들이 재밌겠다는 듯 눈을 빛냈다.
“점수를 얻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마피아를 찾아내면 300점을 드리고요. 마피아를 찾는데 실패한다면 마피아에게 주어진 개인 미션으로 점수를 얻는 방법이 있습니다.”
최PD의 설명에 연습생들이 한껏 귀를 기울였다. 보통의 마피아 게임에 옵션을 걸었다. 마피아를 찾아내도 점수를 주고 그렇지 않아도 점수를 준다. 그러니 마피아를 밝혀내서 300점을 얻거나 아니면 마피아가 받은 미션으로 점수를 얻는 것이니 어느 쪽이든 점수를 얻을 순 있었다.
그중에서 달라질 수 있는 건 마피아가 개인 미션을 얼마나 하는지였다.
“마피아는 지금 여러분 곳곳에 숨겨 있습니다.”
최PD의 의미심장한 말에 연습생들이 서로 바라보았다. 재경 역시 자신을 향한 정우의 시선을 느꼈지만 모른 척하며 앞을 바라보았다.
“재밌을 거 같지 않아요. 형?”
태연이 재경의 팔을 잡으며 말했고 앞쪽에 앉았던 하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 중에 마피아가 있다는 거지?”
하준의 혼잣말과 함께 양채준과 최우주까지 재경 쪽으로 시선을 모으고 있으니 결국 재경이 한마디 했다.
“나 마피아 아니야.”
…누가 뭐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