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50화 (50/125)

50화

“진짜 유혹은 아니고 자신을 인식할 수 있도록 매력을 뿜어보자는 거였어요.”

태연이 정우의 눈치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냥 유혹이라고만 했다가 정우에게 잡혀서 잔뜩 당하고 온 모양이었다.

“근데 그게 그거 아닌… 가 봐요.”

별 차이 없다고 말하려던 태연이 정우의 눈치를 보다가 슬쩍 말끝을 돌렸다.

“아니, 그냥 제목을 힌트 삼아 내 이름을 불러주라는 틈을 만들어봤다고요. 어때요?”

“쉬운 거 같으면서도 어렵네.”

외워야 할 게 없어서 쉬운 데 짧은 구간을 충분히 채울 매력어필은 어려웠다. 하준이 턱을 긁으며 정우를 쳐다보았다.

“쟤처럼 생기면 웃어도 이름 불러줄 거 같은데 우리는 막 장기자랑해야 되는 거 아니야?”

“하준이 형은 완전 페이스 오프를 하지 않는 이상, 으아아악.”

“너 16살이 페이스 오프도 알아?”

하준이 웃는 낯으로 태연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태연이 괴로워하면서 놔달라고 하는 동안 재경은 정우를 보았다.

그래서 나를 보고 웃어줬구나, 하면서도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저…….”

할 말이 있는지 조심스럽게 운을 띄우는 양채준이 정우에게 물었다.

“두 명씩 짝지어서 하나요?”

“그게 가장 좋을 거 같은데.”

정우의 다소 딱딱한 대답에 양채준이 작게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처음부터 정우와는 사이가 좁혀지지 않는다는 듯 양채준은 괜히 재경에게 몸을 붙였다.

“그럼 형이랑 제가 짝하면 안 되요?”

양채준은 재경과 짝을 맺고 싶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재경은 잠깐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제비뽑기하자.”

“네.”

양채준이 실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재경이라면 받아줄 줄 알았나 보다. 하지만 재경은 양채준의 기분을 모르는 척 가만히 있었다. 어제 같은 방에서 자면서 더 친해질 줄 알았던 양채준은 재경의 눈치를 보았다. 그런다고 알아내는 것도 없어서 곧 포기하고 옆의 하준에게 말을 걸었다.

그제야 재경은 그동안 양채준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눈에 들어왔다. 생각해보면 양채준은 최우주나 태연에게 먼저 다가간 적이 없었다. 편한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재경은 그 가정을 과감하게 접었다. 왜냐하면 양채준을 어디서 만났었는지 떠올랐기 때문에.

“간신히 들어가 놓고 자랑은…….”

“들어갔으면 된 거야.”

“그래, 너 잘났다. 그런데 어떻게 올라갔냐? 너 연습생 된 지 얼마 안 된 때라 존나 못 했잖아.”

“그냥 화제성 있는 형들한테 붙었어. 그러니까 알아서 카메라에도 잘 잡히고 귀엽다고 끌어올려 주던데?”

“실력은 아니구나.”

“시발, 실력은 개뿔. 그래서 그 몇 년 묵은 형들은 실력 존나 출중한데 왜 아직도 연습생으로만 도냐?”

“왜긴… 네가 그 자리로 들어가서지.”

“아…그렇지. 하여튼 나란 인간은 존나 잘나서 문제예요. 그렇죠?”

“자존감 미쳤죠.”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를 칸막이 안에 있던 재경이 우연히 듣게 되었다. 화장실에서 뒷담화 이뤄지는 게 한두 번도 아니니 재경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리허설이 얼마 안 남아서 그들을 기다렸다가 나갈 수 없었다. 재경이 밖으로 나오자 다른 사람이 있는 줄 몰라 흠칫하던 두 남자가 있었다.

복장을 보니 최근 데뷔한 아이돌이라는 걸 알았다. 아까 대기실에 찾아와서 인사할 때 보았다. 되게 깍듯했던 그들은 화장실이라는 장소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선지 재경을 대놓고 훑어보았다. 재경이 손을 씻는 사이 누군지 알았는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옆구리를 찌르며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귀엽게 생긴 남자애가 비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봅에 낀 꼽사리 형이네. 거기 형들 까칠하죠? 아… 나 그 형들이 다 너무 싫었어. 잘난 척 오지잖아요. 그죠?”

재경이 아이돌로 활동하던 당시 만난 양채준과의 기억이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올라간 사람을 한 사람 더 알게 된 것도 잠시 괜히 씁쓸한 마음이었다. 차라리 떠올리지 않았다면 모를까 별로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더불어 오늘 아침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던 재경은 막 나오던 태연과 마주쳤다.

“형 제 방에서 잤다면서요.”

“어.”

“양채준 좋았겠네.”

태연이 입술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걔가 형한테… 아 아니에요. 저 갈게요.”

태연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제 머리를 헝클며 자리를 벗어났다. 복도를 찍으며 가 버리는 태연은 이후로도 양채준과 가까워지질 못했다. 물론 재경은 두 사람을 두고 누가 더 나은지 생각조차 안 했고.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재경의 앞으로 정우가 다가왔다.

“하나 뽑아.”

다른 사람이 먼저 뽑은 관계로 재경은 남은 두 개를 바라보다가 하나를 집었다. 종이를 펼치니 A가 적혀 있었고 같은 알파벳을 가진 사람을 찾으려고 고개를 들 때였다.

눈앞에 들이운 A가 적힌 종이. 그리고 그것을 쥔 사람.

“지긋지긋하다.”

정우의 얼굴을 본 재경이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  *  *

이후부터 연습은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언제 고민했냐는 듯 정우의 주도 아래 단체 연습이 주를 이뤘다.

배경에 맞게 표정 연습을 하는 것도 틈틈이 진행되었고 하준은 아예 제 매력어필에 도구를 끌고 들어와서는 연습했다.

그런데 딱 하나, 재경과 정우가 서로 마주봐야 하는 곳에서만큼은 진도가 나가기 힘들었다.

“웃음이 너무 가식적이야.”

재경의 웃음을 본 정우의 가차없는 지적이었다. 그에 재경이 웃는 그대로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내가 가식적으로 웃든 말든 너는 네 할 일이나 해.”

“그래도 바로 보이는데 어떻게 아무말 안 해.”

재경은 번번이 제 미소에 태클을 거는 정우 때문에 짜증나 돌아가시기 일보직전이었다. 자기가 지금까지 먹은 아이돌 짬밥이 얼만데 이런 웃음 하나 못 지을까.

그런데 정우는 사사건건 재경을 걸고 넘어졌다.

“너 진짜 또라이냐?”

보다못한 재경이 다음 안무를 이어갈 생각도 못한 채 정우에게 말했다. 그에 정우가 태연하게 되받아쳤다.

“지긋지긋하게 봐서 네 웃음이 가식인 거 알아.”

“…그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거야? 미쳤네.”

재경이 정우와 짝이 됐을 때 한 말을 가지고 이렇게 들먹일 줄이야. 재경은 기가 차면서도 제가 뱉은 말이 있어 더 뭐라하지 못했다.

“말을 말자.”

“카메라에 다 잡힐 텐데 제대로 해.”

“…너나 잘하세요.”

재경이 정우에게서 떨어져 처음 시작하는 자리로 돌아왔다. 바쁘게 연습하는 와중에 정우의 시비까지 받으려니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재경은 자기도 정우의 웃음 가지고 한마디 할까 생각하다 마음이 넓은 자신이 참기로 했다.

“하준이 형. 노래요.”

“어? 엉.”

즐겁게 보고 있던 하준이 순순히 대답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이런 적이 또 있었던 거 같은데.”

아무튼 연습은 나름 잘 되어 가고 있었다.

*  *  *

리허설까지 마치고 내려온 재경은 대기실로 가는 와중에 정우에게 손목이 붙잡혔다.

“왜?”

“이리 와 봐.”

정우는 재경의 허락도 듣지 않고 무작정 끌고 비상 계단 쪽으로 들어갔다. 그 탓에 재경은 중간에 억지로 길을 틀어 정우에게 반쯤 끌려갔다.

아무도 없는 비상계단은 재경이 들어오면서 닫힌 문소리로 텅 울렸다. 재경은 왜 이쪽으로 데려왔는지 싶어 정우를 바라보니 그가 팔짱을 끼고 심각한 눈으로 재경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데.”

이번엔 눈화장을 진하게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정우가 인상을 굳히자 눈매가 매서워졌다.

“너 이대로 무대에 올라갈 거야?”

“내가 부족해?”

재경은 연습에 성실히 참여한만큼 부족하지 않게 준비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정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재경의 얼굴을 가리켰다.

“아까 나한테 웃어주던 거 가짜였잖아.”

“너는 끝까지 왜 그러냐.”

“적당히 웃지 말고 제대로 웃어달라고.”

“…내가 왜 너한테 웃어줘야 하냐.”

“나한테 웃는 그대로 카메라에 찍힐 거니까.”

“그냥 안 웃을래.”

재경은 이제껏 연습한 게 무색하게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잘 보여서 좋을 것도 없는데 한껏 째려보지 뭐.

“퍽이나.”

정우가 코웃음쳤다. 그것도 모자라 정우는 재경의 턱에 잡아 자신을 보도록 했다.

“나랑 눈을 마주친 그대로 웃어봐.”

재경은 정우가 하라는 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말고 다시.”

재경이 이번엔 눈웃음까지 넣어서 더 확실하게 웃어주었다.

“감정 없는 거 티난다.”

“그럼 너한테 얼마나 감정을 넣으라고.”

재경이 제 턱을 쥔 손을 쳐냈다.

“이제 그만해.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지금 우리 경쟁자야. 내가 못하면 너한테 좋은 거 아냐?”

이 무대에서 정우가 제대로 눈에 띄면 그의 투표수가 올라가서 좋은 거였다. 거기다 재경이 제대로 못해서 비교할 수 있을 정도면 더 좋고.

그런데 정우는 재경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줬다.

“그래서 너는 다 경쟁자라 여기는 다른 애들이랑 그렇게 손발을 맞췄어?"

“…뭐?”

“너야말로 한팀처럼 움직였잖아.”

“그건…….”

재경은 이런 오디션은 처음이었고 어쨌든 무대라고 하니까 같이 맞춰보는 거였다. 그런 제 속을 꿰뚫듯 들어온 정우의 말에 대답을 찾지 못했다.

“재경아.”

여느 때와 다름 없는 부름이었다. 재경이 자신을 부른 정우를 향해 돌아선 순간 흠칫 놀라고 말았다.

뚱하거나 매서울 줄 알았던 정우는 따스한 미소를 띄고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나 자신을 부드러운 눈빛에 당황한 재경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네가 좋아하던 상대로부터 고백받았다고 생각해. 그때의 감정으로 웃어주는거야.”

정우는 그 고백할 사람이 자신이라도 된다는 듯 상냥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재경을 설득했다. 아니면 내가 고백할 거라고 상상해도 좋고. 어때, 할 수 있지? 등의 눈빛에 재경이 느낀 그대로 대답했다.

“아, 진짜 싫어.”

정우의 부드러웠던 눈빛이 한순간 사납게 돌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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