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54명이 모이고 촬영이 시작되는 슬레이트 소리가 들려왔다. 재경은 이제 최PD가 알바하는 곳 사장보다 더 익숙해진 느낌을 받았다. 이게 좋은 게 아닌데. 이래저래 복잡한 마음이었다.
“노래에 따라 팀이 정해지게 될 텐데요. 앞으로 여러분들이 이 험난한 연예계를 잘 헤쳐나갔으면 하는 마음에서!”
최PD의 유난스러운 듯한 목소리에 재경이 저절로 그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미리 맛보는 예능 속 코너가 이번 미션이 되겠습니다.”
“우와아아아!”
재밌을 거 같은 느낌이 팍팍 들면서 연습생들의 환호성이 높아졌다.
“미션을 통해서 통과한 사람 순서대로 곡을 선택하게 됩니다. 같은 곡을 선택한 사람들이 모이면 그대로 한 팀이 되어 무대를 준비하시면 됩니다.”
이젠 팀원을 선택하고 노래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였다. 누가 팀원이 될지 모르는 상황.
재경은 이번에도 정우와 한 팀이 된다면 이젠 인정하기로 했다. 솔직히 이 정도로 붙으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인 거지.
“그 전에 어떤 곡들이 있는지 살펴보면 불끈 의지가 올라오겠죠?”
최PD가 하얀 벽으로 손을 뻗어 잡히는 것을 그대로 내렸다. 그러자 벽이 아닌 하얀 천에 숨겨졌던 곡이 공개되었다.
곡은 종류가 다양했다. 남자아이돌 곡에서도 파워풀한 곡이나 발랄한 곡 등 성질이 다른 노래들로 잘 배정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걸린 노래의 제목을 무심히 훑은 재경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잘못 봤나 싶어서 다시 봤다가 모른 척 눈을 돌렸다. 여자아이돌 곡이 하나 콕 박혀 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선택하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이래서 미리 곡을 보여 주는 거였구나.
진짜 의지가 불끈 솟았다.
적당한 노래를 정해서 서브보컬 2 파트 정도면 될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무조건 우선적으로 곡을 택할 선택권을 쥐어야 했다.
“역시 바로 반응이 오네요. 물론 모든 곡이 다 훌륭합니다. 그런데 요 여자아이돌 곡은 당시에 어떤 콘셉트였는지 기억하죠?”
그 춤이 발랄하다면 그냥 그런데로 출 수 있지만 그런 방향이 아니다 보니 재경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청순보다는 낫네.”
누군가의 무한 긍정적인 반응에 재경이 그쪽을 찌릿 째려봤다가 하준과 눈이 마주쳤다. 재경이 쳐다볼 줄 알고 있었나?
재경은 하준에게 고개를 돌려 최PD의 입을 뚫어지게 보았다.
일단 이번 미션은 싫어도 열심히 해야 한다.
* * *
“어어?”
재경이 이상하다는 듯 제 손에 쥔 긴 막대 과자를 보았다. 방금 한 것은 연습생과의 막대과자 부딪히기. 길게 남은 사람이 이겨서 올라가는 게임이었다. 어떻게보 면 쉽고도 또 운이 따르는 게임에서 재경은 나름 무게중심까지 생각하며 대결했다. 그 결과 자신이 쥔 부분만 남고 전부 날아갔다. 재경이 짧은 막대과자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 번 세 번 확인했다.
그런다고 과자가 길어지는 건 아니지만.
“서재경 연습생, 탈락.”
단호한 외침을 들으며 재경이 힘이 빠진 걸음으로 자리에 들어갔다. 몇 번 재경을 다독여주던 사람들도 이제는 웃기 바빴다.
“아니, 재경이 형. 진짜 겜알못이네.”
“그냥 운이 없었던 거예요.”
그나마 착한 소운이 재경을 다독여 줬지만 그는 애저녁에 게임에서 승리하면서 여유로움이 돋보였다.
“이번에도 졌네.”
“다 이길 순 없는거잖아요. 누군가 이기면 누구는 지는거니까.”
소운의 말대로였다. 재경이 지면서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줬으니 나쁜 건 아니었다. 아니지만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계속 지지?
게임을 진 건 이게 처음이 아니었다. 이게 아닌데? 싶은데 영 게임에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박자 맞춰 가며 하는 딸기 게임은 애저녁에 탈락. 인물 맞추기는 입도 뻥긋 못해보고 끝이 났고 점점 선택권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대부분 연습생의 순서가 결정되고 마지막 게임만 남았다.
“알죠? 헤드셋을 끼고 앞 사람의 설명을 맞추면 되는 겁니다.”
재경을 포함 8명만 남았다. 재경은 그 와중에 정우가 끼어 있어서 다행인지 아니면 쟤나 나나 도긴개긴인지 헷갈렸다.
“둘씩 짝을 지어 팀별 대결. 1등한 팀부터 가위바위보로 선후를 정하겠습니다. 그럼 팀을 정해주세요.”
스태프의 외침에 재경은 정우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연습생과 팀을 정하고 싶었다.
“저기 나랑…….”
“승권아! 나랑! 나랑 하자.”
옆에 있던 연습생은 재경의 말을 못 들었는지 다른 사람에게 매달렸다. 곧바로 한 팀이 되자 재경은 아쉬움을 금치 못하고 다른 연습생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재경과 눈이 마주친 그 연습생이 움찔하더니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또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재경이 말을 걸려고 할때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같이 짝이 되자고 했다. 결국 혼자 남은 재경의 옆으로 정우가 다가왔다.
“다들 너 싫어해.”
“내가 그렇게 별로야?”
“다 지는데 어떻게 마음에 들겠어.”
그건 재경도 할 말이 많았다. 지금 남은 팀이 다 끝까지 이기지 못한 패자들인데 여기서 누굴 따지다니.
재경이 억울한 듯 보았지만 정우는 얄짤없이 대답했다.
“너는 초반에 떨어지잖아.”
“와…….”
진짜 너무해.
재경이 입술만 삐죽이고 있다가 문득 정우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너도 게임 못해?”
“관심 없어서.”
“설마 이것마저도…….”
“응, 아니야.”
정우가 재경의 말을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가차 없이 잘랐다.
그사이 간단한 세팅이 끝났다. 서로 의자에 앉아 마주 바라보기만 하면 될 일이니 준비할 게 많지도 않았다.
“이 게임은 특히나 TV에서 많이 보셨죠? 상대방의 입 모양을 보고 단어를 맞춰 주면 됩니다.”
재경은 아예 후드 모자를 쓰고 끈을 당겨서 턱 아래로 묶었다. 정정당당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 위로 헤드셋을 끼니 노래가 안 들려도 벌써 소리의 일부가 차단되는 느낌이었다.
재경과 일정 거리를 두고 의자에 앉은 정우는 그냥 헤드셋만 썼다. 서로 말똥말똥 바라보고 있으니 곧 커다란 노랫소리가 귀를 먹먹할 정도로 흘러나왔다.
네가 없어서 나 혼자 그 거리를 걸었어
아까 선택곡에 있었던 여자아이돌 노래였다. 마치 이걸 하게 될 거라는 불길한 느낌을 애써 무시했다.
정우도 같은 노래가 흘러나오는지 딱히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 사이 스타트 신호가 떨어지고 정우가 재경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입술을 벙긋거리는 걸 보던 재경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고민했다. 정우도 한 단어를 반복하는 거 같은데 귀가 떨어질 것 같은 노래에 정신이 없어서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김? 생김? 잘생김?”
재경이 소리치자 정우가 고개를 젓고 다시 설명했다.
“너 잘생겼다고?”
“다시.”
“대쉬?”
“아니.”
아이?”
정우가 잠깐 입을 다물자 재경도 대답하지 않고 그의 입모양에 집중했다.
그리고 나름 정우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해보았다. 정우의 설명을 듣고 맞추는 문제인 걸 잊은 듯.
“시간 끝.”
노래가 멈추는 것과 동시에 최PD의 신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경이 헤드셋을 벗었다. 무슨 대답을 하긴 한 거 같은데 그중에 정답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나도 맞히지 못하면서 두 사람이 꼴찌가 되었습니다. 아니지. 가위바위보가 남았죠?”
재경은 탄식을 금치 못한 채로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정우와 소리없이 가위바위보를 했고…….
재경이 고개를 푹 숙이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진짜 망했어.
“서재경 연습생이 오늘 새로운 모습 많이 보여 주네요. 꼴찌입니다.”
재경은 완벽하게 꼴찌를 했다.
* * *
앞선 연습생들이 하나씩 홀을 나갔다. 어떤 곡을 선택할지는 옆으로 가서 결정하는 것이라 했다. 앉은 자리에서 누가 결정하는지 보지 못한 재경은 반쯤 포기한 채로 기다렸다.
후드를 내릴 생각도 못한 채로 멍하니 있으니 누군가 재경의 턱 아래 묶인 끈을 풀어주 었다. 그리고 살뜰히 모자까지 넘겨 주고 있으니 재경이 천천히 그쪽을 바라보았다.
“재경아, 가끔 심심하면 부를게. 형이랑 게임하자.”
하준의 놀리는 말에 재경이 그에게 잡힌 끈을 거칠게 빼냈다.
남은 속상해 죽겠는데.
“윤하준 연습생, 출발하세요.”
“먼저 가서 기다릴게.”
하준이 손을 흔들자 재경은 그를 얄미운 듯 보다가 시선을 돌려버렸다. 하준을 원망할 것도 없었다. 게임을 못 한 제 탓이지.
하나둘 빠져나가는 연습생들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피구도 못 하고 줄넘기도 못 하고 게임도 못 하고.”
옆에 선 정우의 중얼거림에 재경이 울컥했다. 처음 와서 한 게임도 잘 못 하긴 했었다.
“그래서 네가 막 내 옆에서 충고하고 그랬지.”
“도와준 건데.”
공도 잡아주고 줄넘기 들어가야 할 타이밍도 가르쳐주고. 정우가 도움이 되기는 했다.
그때와 지금까지 제 실력을 탈탈 털어 보인 재경이 헛웃음을 지었다.
“나 오늘부터 특훈이라도 할까?”
“포기해. 평생 게임 못하는 콘셉트도 괜찮네.”
“…너 내 앞이면서 참 뻔뻔하다?”
“어쨌든 너보다는 낫지.”
재경은 말싸움마저도 지면서 완전히 패배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도 같이 하겠지, 우리?”
“그거야 봐야 알지.”
“이정우 연습생, 출발하세요.”
재경을 마지막으로 남겨주고 정우가 성큼성큼 홀을 나갔다. 이제 완전히 카메라에 둘러싸인 재경만 덩그러나 남았다.
“꼭 하고 싶은 노래 있어요?”
재경이 심심할까 말을 걸어주는 작가의 말이 들렸다. 재경은 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꼭 하고 싶은 노래는 없고 꼭 안 했으면 하는 노래는 있어요.”
그게 뭔지 말 안해도 알 거 같아서 작가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정우 연습생의 선택이 끝났다네요. 서재경 연습생 출발하세요.”
재경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걸어갔다. 어디든 좋으니 여자아이돌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아…….”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
복도에 붙여진 하나의 곡명을 본 재경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인원이 전부 차면 곡명이 담긴 종이를 떼어 내니 하나만 남는 게 맞는데, 정말 싫다.
재경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이내 체념한 듯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막 안으로 들어가기 전 재경이 카메라맨에게 물어봤다.
“이정우 연습생도 여기로 들어갔어요?”
이 와중에 이건 또 왜 궁금한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