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58화 (58/125)

58화

“와… 진짜 나 죽을 거 같아.”

중하랑이 바닥에 대자로 누워서 앓는 소리를 흘렸다. 푹 젖은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뻗쳐 있지만 정리할 힘도 없는지 바르작거리기만 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보일만도 하련만, 재경은 중하랑의 손에 물병 하나 쥐여 주고는 끝이었다.

“재경아, 나 정말 못하겠어.”

“그럼 노래 연습해요. 준비해 올게요.”

재경의 다음 연습 예고에 중하랑이 그를 향해 애처롭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미 저만치 가 버린 재경에게 닿기엔 너무 멀었다. 중하랑은 털썩 바닥에 손을 떨구며 땀을 훔치고 있는 이승권에게 말했다.

“…승권아, 살려 줘.”

중하랑이 이승권에게 SOS를 청했지만 딱히 사정이 다르지 않은 이승권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이승권… 치사하게. 너 노래는 패스했다 이거지?”

“그러게 진작 잘하지 그랬어.”

“와 사람 뼈 때리는 거 봐.”

이승권은 그를 달래주기는커녕 오히려 재경이 주고 간 물을 뺏어 갔다. 물 딸 힘도 없어서 들고만 있던 중하랑의 앞에서 보란 듯이 물을 마셨고.

“진짜 너무해.”

“누가 너무한데?”

“…서재경.”

물 빼앗아간 승권보다 악독한 서재경이 너무하다.

지금 재경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연습은 적당한 수준을 몰랐다. 숨이 넘어갈 때까지 춤을 추다가 일어날 힘이 없으면 노래 연습을 하고 또 적당히 기운을 차리면 다시 춤으로 넘어갔다.

그 허덕이는 일정 속에서 이승권이 그나마 여유로운 건 노래 연습에서 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래퍼인 중하랑은 말할 것도 없었고 박민호와 현시우, 박주형까지 쉴 새 없이 노래를 해석하고 감정을 넣고 음정을 맞추는 연습을 했다. 그래서 중하랑이 이승권에게 치사하다고 하는 거고.

“그래도 재경이가 왜 무대에서 그렇게 멋있어 보였는지 알았잖아.”

“너는 왜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냐.”

“너도 멋있어지고 싶다며. 그럼 해야지.”

“그건 그러네.”

중하랑이 앓는 소리를 내며 억지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것만으로 힘에 겨운지 한숨을 푹 쉬더니 이승권이 반쯤 마신 물통을 가져갔다.

“얘는 이렇게 연습을 했겠구나. 그렇지?”

“그래.”

“…나 솔직히 재경이가 기본이 있어서 연습량과 상관없이 잘하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연습해 보니까 나보다 더 많이 움직이는 데도 지치지를 않더라.”

“그만큼 해 왔던 거겠지.”

다 똑같이 연습하고 재경은 그들보다 더 바쁘게 움직였는데도 마지막에 보면 가장 멀쩡한 건 재경이었다.

“인정. 재경이 저놈 진짜 독하게 굴 때마다 막 너무하다는 생각도 드는데… 다른 생각도 드네.”

다른 생각이 뭔지 말하려던 중하랑의 말을 끊고 들어온 건 현시우였다.

“쟤는 진짜 데뷔해야 할 놈이라는 거. 아니, 꼭 무대에서 살아야 놈이라는 거지.”

“그렇지.”

독자투표가 데뷔조를 결정하지만 이 오디션 안에서도 응원하는 누군가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이번 라운드를 통해 한 사람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도 같이 무대에 서고 싶다.”

이승권의 나지막한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노래 연습에 필요한 준비물을 챙기러 나온 재경이 지나가다 작은 창문 너머 정우를 발견했다. 카메라가 전부 철수한 늦은 시각이었다. 아직까지 연습하고 있구나. 적당히 해도 잘 할 놈이 뭐 저러고 계속 움직이냐.

“독한 놈.”

재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지나갔다.

*  *  *

“수고하셨습니다.”

재경이 핸드폰을 건드리자 시끄럽게 울리던 음악이 뚝 끊겼다. 연습이 끝났다는 신호였는데 딱히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 일찍 끝내준대서 좋아했더니… 사람을 사정없이 굴리네.”

중하랑이 질린다는 표정에도 재경은 덤덤하게 제 자리를 정리했다. 막내면서 전혀 막내답지 않은 모습에 중하랑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흘겨보던 것도 관뒀다.

“그래도 방송 볼 체력은 남겨줘서 고마워. 어서 씻고 가자.”

“먼저 가세요. 저는 조금만 있다 갈게요.”

“그래. 그래도 너무 늦지는 마라.”

중하랑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간 연습실에 재경만 남았다.

그제야 부산스레 움직이던 재경의 손이 우뚝 멈췄다.

“왜 같이 보자고 그러는지.”

차라리 연습에 집중할 때는 나았다.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연습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미션을 하거나 오늘처럼 방송을 봐야 할 때면 재경이 처한 상황이 새삼 와닿았다.

가기 싫은 마음에 연습실에서 미적거리던 재경은 방송시간이 임박해서야 느지막이 일어났다.

*  *  *

방송을 앞두고 한자리에 모인 연습생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보였다. 방송을 보는 이 순간조차 그들의 반응을 따지 위해 곳곳에 카메라가 자리했다. 일찍이 연습을 마치고 씻고 온 그들 사이로 재경은 시큼한 땀 냄새를 풍기며 나타났다.

연습생들의 뽀송뽀송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재경은 제 헝클어진 모습이 신경쓰였다. 하랑이 형이 일어나자고 할 때 일어날 걸. 이미 늦었으니 대충 머리를 털어넘기며 안으로 들어갔다.

재경을 발견한 누군가가 빠르게 팔을 흔들었다.

“형.”

소운이 재경을 반갑게 부르며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별생각 없이 소운을 향해 걸어가던 재경이 자신을 보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자 중하랑이 있었다. 중하랑이 서운하다는 듯 제 얼굴에 주먹을 쥐고 우는 흉내를 냈다.

재경이 중하랑을 못 본 척 서둘러 소운의 옆으로 가서 두 개의 빈자리 중 하나에 털썩 앉았다.

“형 왜 이렇게 오랜만이죠?”

소운이 그동안 너무 보고 싶었다며 재경에게 달라붙어 칭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무대를 같이 서지 않으면 이렇게 간간이 만나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방송은 같이 볼 수 있어서 좋네요. 그렇죠. 정우 형?”

재경이 당연하다는 듯 다른 빈자리를 차지한 정우와 눈을 마주쳤다. 어제 밤늦게까지 연습하는 걸 보고 처음이었다. 재경이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정우가 땀으로 젖은 그의 머리를 가볍게 흩트려 줬다.

“열심히 하네.”

“그러는 너야말로 계속 연습실에 있잖아.”

“나한테 관심이 많네.”

정우가 어떻게 알았냐는 듯 굴자 재경은 그게 뭐 관심이라고, 싶은 심드렁한 눈빛을 보냈다.

“너한테서 땀 냄새 나니까 한 말이잖아, 이정우.”

“재경이 네 냄새 때문에 내 건 못 맡을 줄 알았는데.”

안 씻고 온 건 도긴개긴이란 소리였다.

정확히 말하면 재경은 오기 싫어서 뭉그적거린 거라 정우랑 다른데. 굳이 따지고 들 이유가 없어서 말았다.

대신 재경은 정우의 관자놀이에 흐르는 땀을 봤다. 땀이 식어 쌀쌀하기까지 한 자신에 비해 그는 땀이 가득했다.

왠지 열기까지 느껴지는 거 같다고 생각하며 재경이 물었다.

“그렇게 안무가 어려워?”

“쉽진 않아.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지도 않고.”

“잘할 거 같은데?”

“당연히 잘하지. 적당히 잘하는 게 아니라 완전 잘하려고 연습하는 거야.”

“방금 그 말 되게 별로였어. 느끼해.”

정우가 작게 웃는 동안 재경은 그의 등을 보았다. 땀으로 젖은 옷이 질척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어제도 늦게까지 남아서 연습하더니 이번에도 오기 전까지 연습에 매달렸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연습을 하는 그를 볼 때마다 재경은 조금 마음이 이상해지곤 했다.

잘생겨서, 처음에 방송을 잘 타서, 목소리가 좋아서, 그런데 어느 정도 실력이 있어서.

그런 가벼운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워낙 이정우가 가진 게 많으니까 큰 노력 없이 얻었을 줄 알았다.

‘이 독한 새끼.’

쉽게 올라간 게 아니었다.

카메라가 비치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발을 굴려댔다. 옆에서 봐야지만 알 수 있는 그 흔적들이 재경의 마음을 시시때때로 흔들었다.

치열하게 쌓아온 경력에 자신이 이물질처럼 끼어들어 방해해서… 그래서 미웠던 거겠지. 25살의 이정우에게 서운할 때가 많았던 제 아둔한 머리가 조금씩 외면했던 진실을 찾아가고 있었다. 25살이 아닌 19살의 이정우라서 미워하지 말자가 아니라 이정우가 왜 그랬을지 생각해 보자.

‘일단 지금에 집중하자.’

재경이 복잡한 속을 다스리려고 고개를 돌렸다.

“우리 이렇게 사이좋은 모습으로 방송 보고 내일 바로 발표식인 거 너무 잔인하지 않아요?”

소운은 어느새 단짝처럼 다니는 하준에게 하소연했다.

“그렇지. 그래도 지금은 우리 이렇게 같이 있는 거로 만족하자.”

하준이 소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조명이 어두워지며 프로젝터의 우웅 울리는 소리에 연습생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시작하려나 보다.”

이번 화는 2라운드 무대에 올라간 내용이었다.

이미 직캠으로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했음에도 집중할 수 있게끔 많은 장치가 마련되었다. 무대에 올라갈 팀들의 연습 과정이나 일부의 서사를 보여준 후 무대가 나왔다.

누군가 따라오기 힘들었다면 그것을 비추기도 하고 유난히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강조하기도 하고 라운드를 준비하는 동안 있었던 사건과 연습생 개인의 인터뷰가 어울리니 무대만 이어지는 음악방송과는 다른 맛이 있었다.

특히나 2라운드가 시작되면서 방송에 나오는 연습생의 분량은 철저하게 제작진의 영역에 들어섰다. 그들은 수십 대의 카메라에서 나온 영상을 비교하여 어떤 이야기가 들어갈지 선택했고 그것을 편집한 결과가 이것이었다.

1라운드가 끝난 발표식 이후로 재경도 빈번히 화면에 잡혔다. 혼자 있을 때 따로 방송을 챙겨보지 않았지만 소운이나 하준이 말해줘서 알았다. 하긴 알바하는 곳에서 알아보기도 했는데 언제까지 피할 순 없었다. 1라운드와 같이 99명의 연습생일 때와 다르니 이젠 어느 정도 손을 놓은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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