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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이돌-60화 (60/125)

60화

방으로 돌아온 재경이 힘없이 문에 기댔다. 고개를 푹 숙여 볼품없는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합숙이 시작되면서 받은 운동화였다. 새하얗던 운동화는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원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건 매 라운드마다 재경이 얼마나 연습을 해 왔는지 보여주는 척도였다. 눈에 띄지 않겠다 해놓고 뭐 그렇게 열심히 했던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제가 노력한 만큼 좋은 평가를 받은 게 무조건 절망할 수 없는 복잡한 사정에 한숨이 나왔다. 이래서 방송이 보기 싫었다.

“왔어?”

재경이 고개를 들자 화장실에서 나온 건후가 건성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칫솔을 입에 문 채 방을 돌아다녔는데 무언가를 찾으러 나온 듯했다.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건후를 보자 바로 떠오른 생각은 ‘아, 얘가 있었구나’였다. 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왔던지라 룸메이트가 누군지 잊고 있었다.

더욱이 들어올 때마다 어둑한 방이라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처럼 밝은 불 아래에서 본 방은 처참했다.

재경의 침대와 가방 위주만 정리된 채 방 전체가 건후의 물건으로 난리였다. 방을 둘러보고 있으니 거짓말처럼 복잡했던 사정을 잊어버렸다.

“아… 내가 씻고 치우려고 했어.”

재경이 문에 기댄 체 가만히 있자 건후가 슬쩍슬쩍 밟히는 뭉텅이를 제 침대쪽으로 밀어보냈다. 그런다고 깨끗해지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하면 상대에 대한 나름의 성의를 보인다고 여기는 게 뻔했다.

“땀에 젖은 건 내놔야 냄새가 안나.”

재경이 막 건후가 밀어보내려는 젖은 뭉치를 보고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잘 때마다 이상한 냄새 때문에 침대를 얼굴까지 덮고 잤는데 원인을 알았다.

재경이 무엇을 보는지 눈치챈 건후가 제 발아래를 내려다보더니 슬쩍 들어서 구석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그것을 들었던 엄지와 검지를 대충 제 옷에 닦는 건후가 변명을 중얼거렸다.

“내가 신조가 하나 있어서…….”

“더러움 속에 질서가 있다는 그 신조라면 더 말 안 해도 돼.”

“어? 어떻게 알았어?”

“그런 신조 가진 사람이 너만 있겠냐.”

“나말고 또 있어?”

“어.”

미래의 박건후라고.

재경은 바닥에 있는 정후의 물건을 대충 피해가며 제 침대로 들어갔다. 재경은 건후가 씻고 나올 때까지 잠시 쉴 생각으로 침대 위에 상체를 늘이고 침대 아래로 다리를 늘어뜨렸다. 방송 보기 전까지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연습한 재경이 작게 하품했다. 혹시 잠들수도 있으니 핸드폰을 들어 알람을 맞추는 사이 칫솔을 문 놈이 앞을 알짱거렸다.

“왜.”

“거슬리냐?”

“너 거슬리냐고 묻는거라면 이제 좀 비켜 주면 좋겠네.”

“방 더러운 거. 거슬리냐고.”

“내 자리만 침범하지 마. 아, 냄새도.”

“어 그래. 혹시 거슬리면 말해라. 바로 치울테니까.”

재경의 눈치를 보듯한 건후의 조심스러움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런 말할 시간에 가서 양치나 마무리하지.

재경은 팔을 뻗어 잡히는 이불을 끌어와 덮으며 눈을 감았다. 더는 말걸지 말라는 신호를 읽었는지 건후가 조금 더 머뭇거리다 자리를 떴다.

문의 여닫는 소리에 재경이 감았던 눈을 떴다. 그 사이에도 제법 치우고 갔는지 아까보다 정리된 게 보였다. 대신 그 모든 게 건후의 캐리어 위에 산처럼 올라갔지만.

‘뭐야.’

건후는 재경을 예민한 애로 여겨왔다. 매니저에게 어떤 말을 하든 다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툭툭 내뱉곤 했었다.

“매니저 형이 네 셔틀이야? 존나 까칠하게 구네.”

막 무대를 망치고 먹지 못하는 아메리카노까지 억지로 먹고 싶지 않아 내려놓자 박건후가 질렀던 말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재경을 싫어하는 티를 대놓고 냈었다.

그런데 지금은 재경의 기분을 살피며 그를 배려하고 있었다. 정우와 마찬가지로 건후의 다른 모습에 재경은 어색하고 불편한 기분이었다. 이것도 과거로 돌아와 연습생으로 만난 사이라 그러겠지.

재경이 몇 번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자 건후가 밖으로 나왔다. 잠들지 않았으니 재경이 바로 씻으려고 일어날 때였다.

“그런데 너…….”

재경이 갈아입을 옷을 든 채 자신을 부른 건후를 돌아보았다.

“무슨 고민 있냐?”

건후는 수건을 꼭 쥐었다 놓기를 반복하며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아까 저기서 되게 심각해 보여서.”

재경이 문에 기대 있던 걸 물어보는거였다.

“딱히 말하기 싫은데 물어보는 거면 그냥 무시하고. 내가 똑똑하진 않아도 뭐, 털어놓으면 조금 속이라도 시원할까 싶어서. 아, 아니 아오! 모르겠다.”

건후가 답답한 듯 제 머리를 헝클었다.

“내가 원래 이런 고민 상담 같은 거 절대 안 해 준다고. 어? 룸메이트가 된 기념으로 해 주는 거다.”

“발표식 때문에.”

“아… 그렇지.”

지금 오디션 중이라는 걸 잊고 있었는지 건후가 알겠다는 듯 목울음을 흘렸다.

“너도 데뷔하고 싶어서? 하긴 데뷔하기 싫은 사람이 어디있겠냐만…….”

여기 있는데.

재경이 말없이 있자 건후가 어떻게 말해줘야 하나 고민하는 게 보였다. 별로 어울리지도 않았는데 뭐 저렇게까지 고민하나 신기할 지경이었다. 아, 같이 첫 방송을 봤었구나. 그런데 그거 말고 또 뭐가 있었나?

“당장 내일 합격하고 나면 이후로 어떻게든 해보면 되지 않을까? 그런 거 생각한다고 땅 파지 말고 일단 닥치는 대로 생각해. 그게 최고다.”

건후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더니 곧 힘없이 주먹을 풀더니 손사래를 쳤다.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게 최고지.”

“…….”

“아니면 오늘 자지 말아봐. 내일 발표식할 때 졸려서 다른 생각할 수도 있잖아.”

얘가 뭐라는 거야.

“너 내 말 듣고 있는 거지?”

“정신 사나워.”

재경이 다시 눈을 감았다. 박건후가 눈을 뜨고 있으니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구나.

*  *  *

“표정이 안 좋아.”

“말하지 마. 말 걸지 마. 머리 아파.”

정우의 걱정에 재경이 제 눈두덩이를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어제 잠들 때까지 박건후가 떠드는 바람에 재경은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채로 발표식에 왔다.

이번에 합격한다면 데뷔조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진다. 그렇다고 그냥 떨어져 버리자니 엄마가 아직 그 실장과의 계약을 끊지 않았다.

이번에는 붙는다 해도 다음에도 붙을 확률이 없다. 그전에 엄마가 실장과의 계약을 언제까지 물고 늘어질지 모른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하나도 정리하지 못했다. 전부 그 박건후 때문에.

재경은 앞의 정우와 박건후가 같은 소속사라는 걸 떠올리자마자 투덜거렸다.

“박건후가 그렇게 말이 많을 줄 몰랐어. 걔가 계속 말 거는 바람에 나 지금 제정신인지도 모르겠어.”

“말 많은 애는 아닌데 가끔 그럴 때 있지.”

정우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가 참아라, 싶은 투박한 위로에도 재경은 흘려넘길 수 없었다.

“걔 진짜 이상해.”

재경이 이해할 수 없다는 중얼거림에 정우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대신 그는 재경을 응시하며 오묘한 눈빛을 보냈다.

꽤 친해졌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요즘 재경은 자기에게 조금씩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을 재경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거 같았지만.

“혹시 이번 라운드가 끝나면…….”

“어이, 서재경.”

정우가 조심스럽게 재경에게 말을 걸 때였다. 멀리서 서재경을 발견한 중하랑이 성큼 다가왔다. 그는 제 지정된 자리로 가기 전에 재경에게 인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어제까지 같이 연습하다가 이렇게 보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어쨌든 잠깐 쉬다가… 저녁에 보자.”

중하랑이 재경의 어깨를 툭 쳤다. 오늘 발표식이 지나면 일부는 남아서 연습을 이어가고 탈락자는 집에 돌아가게 되었다. 합격해야지만 저녁 연습에 참여할 수 있으니 중하랑이 꼭 만나자고 했다. 어깨에 묵직하게 남은 잔상에 재경이 어깨를 매만지고 있으니 중하랑이 웃으며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중하랑만이 아니었다. 지금 팀을 이룬 다른 멤버가 다 재경을 찾아와서 한마디씩 건넸고 하준, 건후, 태연, 소운. 처음에 같은 방을 했던 룸메이트까지 와서 말을 건네고 갔다.

“서재경, 여기서 사람 많이 사귀었네.”

그걸 지켜본 정우가 한마디 했다. 비꼬는 것으로 해석한 재경이 바로 받아쳤다. 다른 사람은 적당히 사귄 정도지만 이정우 너는 아니잖아.

“그래도 너만큼 진득하게 들러붙는 사람은 없지.”

“그건 그래.”

“그걸 인정하냐?”

“사실이니까.”

정우가 태연하게 받아들이니 더 드잡이할 마음이 사라진 재경이 앞을 바라보았다.

*  *  *

텅 빈 공간 속 최PD만 있는 것처럼 주변이 조용했다. 그러나 카메라는 누구 하나 숨을 수 없게 전부 찍어다 화면에 실어 보내고 있었다. 긴장을 달래보려 손을 흔들어보거나 굳은 얼굴로 앞을 보는 연습생들의 감정이 적나라하게 빨려들어 갔다. MC가 없고 최PD가 진행하는 만큼 화면에는 연습생들의 얼굴만 쉴 새 없이 잡혔다.

“두 번째 발표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현 54명의 연습생에서 단 36명만이 남고 18명은 돌아가게 됩니다.”

처음 99명에서 반 가까이 줄었던 것을 생각하면 탈락자의 수가 꽤 줄어들었다. 그러나 절대적인 수로 비교하면 절대 적은 수가 아니었다.

“이번 발표부터 연습생 개인의 순위가 공개됩니다. 호명된 연습생은 이 앞의 합격자 자리에 앉으시면 됩니다.”

최PD의 안내에 카메라가 일제히 의자를 비추며 남을 자와 떠나갈 자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식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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