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61화 (61/125)

61화

“35위부터 발표하겠습니다. 이번에 경영지원팀에서 ‘너의 뒤에서’의 메인 댄서였네요. 축하합니다, 전상국 연습생,”

가장 먼저 이름이 불린 전상국이 얼떨떨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정말 자신이 맞나 싶었다. 그는 제 머리와 몸을 쓰다듬는 거친 축하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듯 일어났다.

무대 위로 올라가는 전상국은 여전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멍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얼굴을 쓸어내리며 숨길 수 없는 기쁨을 드러냈다.

“다음 34위 발표하겠습니다. 홍보팀에서 시원한 웃음을 보여주었던…… 최우주 연습생입니다. 축하합니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최우주가 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들었을 때는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재경은 전상국이 호명되었을 때와 다르게 최우주가 올라가는 건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 열심히 했으니까 잘됐다는 생각과 함께.

발표식은 길고도 짧게 진행되었다. 합격자의 이름을 한 명씩 발표하는 것 자체는 답답할 만큼 긴 시간이 걸렸지만, 혹여 자신이 호명될지도 모르기에 두근거리며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1라운드 발표식과 마찬가지로 5명이 단상에 올라가면 한 명씩 짧게 소감을 말했다. 그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재경은 지금껏 불린 합격자의 수와 남은 합격자의 수를 생각했다.

“다음, 18위를 공개합니다.”

벌써 합격자의 반이 찼다. 정우를 비롯한 JT의 연습생은 한 명도 불리지 않았고 실력이 뛰어난 연습생 몇 명도 아직이었다. 그들을 생각한다면 자기 하나 정도는 어떻게든 빠질 수 있을 거 같은데.

점점 불합격에 가까워지자 재경은 호텔을 나선 후를 고민했다. 생각에 빠진 재경의 시선이 무대에 관심이 없어지면서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엄마한테는…….’

결과는 방송이 나올 때까지 입을 다물겠지만 그래 봐야 몇 주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당장 방송에서 자신이 떨어진 걸 알면 엄마가 계약할 수 있으니 무조건 말려야 하는데…….

‘경찰서?’

그러다 문득 경찰이 생각났다. 왜 이제껏 떠올리지 못했을까 싶었다. 가서 원하지 않는 계약을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엄마가 억지로 밀어붙이고 있다고 하거나 아니면 그 소속사가 페이퍼 컴퍼니라는 걸 밝혀 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경찰이 그 페이퍼 컴퍼니를 잡아주지 않더라도 시간만 끌 수 있다면 좋겠는데.

“이제 데뷔조에 속하는 상위 9명이 남았습니다. 지금부터는 한 명씩 소감을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9위 발표합니다.”

최PD의 목소리에 재경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인 모양이었다. 누가 합격했는지 돌아보던 재경은 합격자석에 있는 중하랑을 발견했다. 자신은 아직까지 불리지 않았고 상위 9명에 들 리가 없으니 아무래도 오늘 저녁 연습은 참여하기 어려울 듯했다.

정우의 말대로였다. 첫 번째 발표식에서 합격했다고 슬퍼할 것도 없었다. 몇 명이 떨어지든 결국 남는 건 9명이었다. 그 9명 안에 자신이 들어갈 리가 없었다.

“이정우 연습생에게 억지로 끈을 빼앗겨 홍보팀에 들어갔었죠. 축하합니다, 서재경 연습생.”

“…….”

홀로 마음을 다독이던 재경은 제 이름이 들린 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9위라고 했다. 최종 발표식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데뷔조에 속하는 등수니까 절대 자신이 들어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아니 경찰서부터…….

“서재경.”

제 어깨를 강하게 쥐어오는 손길에 재경이 흐릿한 시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정우였다. 그는 지금 재경이 어떤 기분인지 아는 듯 잔뜩 굳은 표정이었다.

그제야 제 상황을 깨달은 재경이 울컥한 감정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무대에서 제가 원하는 만큼 목소리가 나왔다고 좋아할 게 아니었다. 지금 자신은 절대 아이돌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그런 게 다 뭐라고 열심히 했는지.

“일단 올라가.”

그다음은 나중에 생각해.

정우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재경은 억지로 감정을 삼켰다. 당장 어떤 감정을 내보이는 것보다는 이 자리를 버텨내는 게 중요했다. 재경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른 연습생과 마찬가지로 계단을 밟고 올라가 무대의 중앙에 섰다. 자신을 바라보는 연습생과 카메라, 스태프까지 너무 많은 것이 보이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거기 마이크 집어 주세요. 그리고 9위가 된 소감 부탁드립니다.”

재경이 마이크를 집으려고 손을 뻗었다가 떨고 있는 제 손끝을 발견했다. 몇 번 허공에서 주먹을 쥐었다 펴며 떨림을 멈춰 보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재경은 반쯤 포기한 채 마이크를 쥐었다.

어떻게 마이크를 집긴 했지만 재경은 한참이나 입을 떼지 못했다.

“어… 전혀 생각도 못 했어서.”

재경의 떨리는 목소리가 고스란히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왔다. 그러고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마이크만 만지작거렸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제 억울한 사정이었다. 빚을 지고 싶지 않아서 누군가의 기회를 짓누르면서까지 이 오디션에 참가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건 20살이 되기 전까지의 잠깐의 시간일 뿐, 데뷔가 아니라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재경은 점점 마이크가 무거워지는 듯 조금씩 손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재경은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려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그래,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부터 생각하자.

“감사합니다.”

재경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마이크를 옆에 두었다. 그리고 9라는 숫자가 적힌 자리에 가서 앉았다.

아직도 높은 순위에 불렸다는 게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등을 돌려 번호를 확인했다.

그냥 합격 커트라인에 들어온 게 아니라 데뷔 커트라인이었다. 재경은 다시금 착잡해지는 마음을 다스리려 손톱으로 손바닥을 아프게 찔렀다. 그럴수록 더욱 자신이 9위라는 현실만 더 목까지 물이 차오르는 듯 몸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

“1위 후보를 발표합니다.”

그동안에도 차곡차곡 순위가 발표되면서 어느새 1위 후보가 나왔다.

“같은 팀에서 후보가 나왔습니다. 이정우 연습생, 그리고 윤하준 연습생입니다.”

재경이 뒤늦게 고개를 돌리자 이정우와 윤하준이 무대에 서서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때보다 느릿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지만, 재경은 무심하게 그것을 지켜보았다. 자신의 순위가 놀랄 일이지 다른 건 조금도 놀랄 게 없었다.

1등은 이정우였다.

*  *  *

룸에 들어오자마자 전상국이 신경질적으로 제 겉옷을 벗어 내팽개쳤다.

“서재경 그 새끼가 무슨 9위야, 9위는.”

원래 전상국은 35위라도 합격했다는 것만으로 기뻐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놀라고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하고 나서는 다음 라운드에서는 더 높이 올라갈 거라고 다짐을 했다.

그런데 9위가 서재경이란다. 35위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전상국은 9위로 가는 서재경을 보고 얼마나 질투에 불탔는지 모른다.

전상국이 씩씩거리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을 때 그의 뒤로 따라온 주도원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턱걸이로 붙었으니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

12위를 한 주도원은 여유롭게 물을 마시며 위로를 건넸다. 전혀 위로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다음 라운드까지 가고 싶은 전상국의 욕심을 알기라도 하는 듯 주도원은 전혀 그럴 일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전상국이 주도원을 노려보았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어차피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잖아. 그래도 이번엔 붙었네.”

“주도원!”

“전상국, 지금 네가 되게 못난 거 알고 있는데 진정 좀 하지? 내가 널 왜 찾아왔겠어.”

주도원은 연습에 합류할 시간을 가늠하며 전상국에게 말했다.

“저번에 말했던 거 기억하지? 그거 지금밖에 시간 없다.”

주도원의 두루뭉술한 말에 막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던 전상국이 뭐냐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주도원에게 건넸던 자신의 제안이 떠올랐다.

“너 서재경 잘 안다며. 이번에 발표식 끝나자마자 걔 떨어뜨릴 생각이라던 거. 그거 꼭 하라고.”

주도원이 텅 빈 물통을 쓰레기통에 겨냥했다. 실제로 뚜껑이 있는 쓰레기통이라 물통이 들어갈 리 없는데도 주도원이 신중하게 물통을 던졌다. 뚜껑에 텅 소리가 나며 옆으로 튄 물통을 주울 생각도 없이 주도원이 돌아섰다.

“아무래도 이번에 서재경 떨어뜨리지 못하면 내가 위험할 거 같아서.”

서재경 인기가 많을 걸 알았지만 이번에 9위라는 순위는 주도원에게도 거슬리는 순위였다. 주도원이 바닥에 떨어진 전상국의 옷을 집어 친절하게 건네주었다.

“약속 지켜라. 응? 내가 데뷔해야 화이트에 네 자리 남는다.”

예전에 전상국이 말할 때만 해도 방관자처럼 굴던 주도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12라는 높은 순위에도 전혀 기뻐하지 않는 주도원을 보며 전상국의 부글부글 끓었던 속이 조금 가라앉았다.

생각해보면 서재경이 높이 올라갔다고 질투할 게 아니었다. 어차피 2차였는데 뭐. 앞으로 발표식은 많고 서재경을 건들 기회 역시 많다는 거다.

전상국이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그건 원래도 할 생각이었어. 그 사이에 몇 개 더 모았거든? 잘하면 서재경만이 아니라 다른 놈이 끌어내릴 수 있을 거 같은데…….”

“진짜? 다른 놈 누군데?”

주도원이 호기심에 눈을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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