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62화 (62/125)

62화

연습실로 가는 재경의 걸음에 힘이 없었다. 발표식이 끝나고 인사를 나누는 연습생 사이에서 홀로 앉아있다가 나온 그는 여전히 제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합격했다면? 그래, 나쁘지 않다고 자신을 위로했을 수도 있었다. 제 변덕스러운 상황 때문에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경찰서를 가고 그렇지 않으면 일단 조금만 더 버티자 여기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순위가 재경의 정신을 통째로 흔들었다. 감히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저울질하는 게 거슬렸는지 오디션에 무게추가 기울어 버렸다.

재경이 흐느적거리는 움직임으로 제 방으로 향했다. 일단 저녁 연습까지 시간이 있으니 쉬고 싶었다.

발표식이 있는 내내 계속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펴서 문고리를 잡았다. 몇 번 땀으로 미끄러지는 걸 겨우 잡아 문을 열었다.

“하아.”

하얀 침구가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를 보자 긴장이 풀리면서 참았던 숨을 흘러나왔다. 어지간히 긴장했었는지 온몸이 욱신거렸다. 거기다 열까지 오르는 듯해 재경이 손등으로 볼을 쓸며 침대로 다가갔다. 어제 치운 거 같은데 다시 지저분해진 주변은 보이지도 않는지 비척거리는 걸음은 고집스럽게 침대만을 향했다.

그리고 막 침대에서 엎어지려고 몸을 기울이는 그때 누군가 재경의 팔을 잡았다. 저절로 몸이 침대에 떨어지는 속도가 줄어들면서 재경의 몸이 살포시 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재경은 침대에 엎어진 상체를 들어 누가 자신을 잡았는지 보았다. 상대를 확인한 재경은 상대에게 말을 거는 대신 베개가 있는 곳으로 엉덩이를 밀었다. 자연스럽게 헤드에 기댄 재경은 정우가 귀찮은지 작게 혀를 찼다. 혼자 생각 좀 하면서 쉬려고 했는데.

“너는 네 방 놔두고 왜 자꾸 여기 와.”

“너 보러.”

정우가 건후에게 받은 룸 키를 옆에 내려두며 재경의 침대에 엉덩이를 내렸다. 그냥 나가라고 할까? 재경은 복잡하게 꼬인 속을 알아챈 듯 정우가 미비하게 고개를 저었다.

“계속 기다렸어. 나가라고 하지 마.”

“…언제부터 있었냐.”

“식이 끝나자마자 나왔어.”

눈치도 빠르지. 재경은 정우를 내보내지 못할 걸 알고 허리에 힘을 뺐다. 재경이 가만히 숨을 쉬고 있으니 정우도 베개를 하나 가져왔다. 재경과 같이 침대 헤드에 베개를 놓고 기대고 있자니 한 침대 위로 둘이 나란히 앉게 되었다. 재경은 아까 발표식에서 정우가 없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는 게 신기했다.

그래도 1등 한 놈인데, 어떻게 바로 나왔는지도 궁금해서 그가 옆에 앉은 걸 가만히 뒀다. 생각해보면 자기야 이 오디션에 불손한 마음으로 들어왔으니 높은 순위가 달갑지 않았지만 옆의 놈은 달랐다.

꼭 데뷔했으면 하는 이정우에게는 1위라는 게 얼마나 귀할까. 또 이걸 통해서 금빛 로드가 깔리는 걸 알기에 재경은 정우에게 가벼운 호기심을 드러냈다.

“1등 한 기분이 어때?”

베개에 등을 묻으며 전방의 유리창을 보던 정우가 이상한 질문을 들은 듯 재경을 돌아보았다. 정우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재경은 그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아까 말했는데 안 들었지?”

“들을 정신이 있었겠냐.”

“9등 해서 여유가 있을 거 같았는데.”

“못 들었어.”

9등은 뭐 낮은 등수인 줄 아나. 재경이 유리창에 비친 정우를 흘겨보았다. 정우는 재경에게 더 따져 묻는 대신 아까 했던 소감을 그대로 읊어줬다.

“많은 응원 감사하고 더욱 열심히 하겠다고 했지.”

“별거 없네.”

“너는 더 별거 없었지.”

마이크를 든 시간에 비해 재경의 소감이 제일 짧긴 했다. 그래도 자기랑은 다르지.

정우는 시종일관 태연하게 재경의 말을 받아쳤다. 딱히 사근사근하지 않은 질문과 대답이 오가고 있으니 재경의 고개가 기울여졌다. 얘는 대체 왜 온거야?

“너 왜 왔냐?”

“혼자 있을 거 같아서.”

“그러니까 나 혼자 있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라고 오냐.”

“위로해주려고?”

정우가 이제 생각난 듯 말끝이 올라갔다. 재경은 그를 노려보기도 귀찮아 대충 손을 흔들었다.

“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그러니까 가라.”

“내가 가면?”

“뭐?”

“나 가면 혼자 무슨 생각할 건데?”

이거였구나. 재경이 지금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 걸 정우도 눈치채고 있었다. 하긴 이전부터 알고 있는 거 같았다. 재경은 제 생각 이상으로 정우에게 많은 것을 드러냈다. 그러니 정우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면서도 어떤 기분일지 다 안다는 듯이 굴었다. 그게 틀리지 않아서 더 문제지만.

“그것까지 너한테 말할 이유는 없어.”

재경은 정우의 질문을 가차 없이 잘라냈다.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절대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정우는 재경의 거절에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한편으로는 재경의 사정도 알고 싶었지만, 전혀 들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정우는 처음 생각했던 말을 꺼냈다.

“너 지금 아슬아슬해.”

“그래. 그러겠지. 지금이 최종 발표도 아니고…….”

“그러니까 벌써부터 끝난 것처럼 굴지 말라고.”

재경이 베개에서 등을 세우며 정우를 언짢게 보았다.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랬어. 너.”

“야, 이정우.”

“언제든 떨어질 수 있는 순위인데 네가 생각 못 하는 거 같아서. 이제 겨우 두 번째 발표식이야. 9명이 남을 때까지 몇 번의 발표식이 더 남았어. 그러니까 다 된 것처럼 굴지는 마라.”

정우는 더없이 냉정한 눈으로 차가운 말들을 쏟아냈다.

“이거 오디션이야. 네가 아무리 열심히 한 대도 미친 듯이 하는 놈들이 더 많아. 그런 애들을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 거니 네가 만약 떨어지고 싶다면 얌전히 기다려.”

지금껏 네가 열심히 한 건 인정하지만 거기까지다. 다른 애들은 이거 아니면 안 된다는 듯하다. 그건 결국 순위변동을 일으킬 거다, 라면서 정우는 현실을 깨달으라는 듯 재경의 이마를 톡톡 쳤다.

“정신 차려라, 서재경.”

재경이 제 이마를 매만지며 정우의 말을 곱씹었다.

“매번 발표식에서 내가 다 된 것처럼 구는 게 보기 싫었냐?”

“어. 갈 길 멀다. 어떻게 될지 몰라.”

“그러네. 머네.”

그리고 재경이 회귀하기 전 오디션에서 분명히 9명의 연습생이 모여 데뷔했고. 재경은 그들이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아 올라갔다는 걸 생각하면서 비죽 미소가 배어 나왔다.

진짜 웃기게도 발표식을 할 때마다 이정우에게 투정을 부리고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  *  *

저녁 연습에서 재경의 조는 박민호의 탈락으로 5명이 되었다. 그간 6명을 기준으로 연습하던 대형은 물론 노래 파트까지 바꿔야 하지만 다행히 분위기는 그리 무겁지 않았다.

“민호에겐 미안하지만 그래도 나는 이 곡을 끝까지 할 수 있어서 좋다.”

중하랑이 제 솔직한 속내를 내보였다. 연습이 더 빡빡해지더라고 이 곡을 끝까지 맡고 갈 수 있다는 게 좋은 듯했다.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인지 착잡한 마음 위로 안도한 표정이 어렸다.

36명 안에 들었다는 건 그들에게 많은 감정을 떠올리게 했다. 불안했던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안도하다가 다음엔 어떻게 될지 모를 또 다른 걱정을 올라오는 등 만감이 교차했다.

그리고 몇몇은 그들 사이에서 제일 높은 순위를 받은 재경을 부러운 듯 보기도 했다.

“이거 안 해요?”

그들의 시선을 모른 척 재경이 6명이서 연습했던 동영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제야 중하랑도 합격의 여운에서 빠져나와 재경이 가리킨 핸드폰을 보았다.

아직 무대를 디테일하게 잡지도 못한 상황에서 인원이 줄었으니 재정비할 게 많았다.

“그런데 우리 이거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지?”

“한… 5일 정도?”

중하랑의 물음에 이승권이 시간을 따져봤다. 이번 무대는 특히나 시간이 짧았다. 일주일도 안 남은 시간에 어떤 미션이 남았는지 몰랐다. 중하랑이 달력을 보고 고민하다가 재경을 향해 물었다.

“재경아, 우리 바로 연습할 수 있어?”

“일단 대형부터 다시 짜야겠어요. 그리고 민호 형이 했던 파트를 나누고요.”

“그래.”

재경은 빠르게 연습장에 5명에 맞춘 안무를 생각하고 이승권이 옆에서 도와주면서 수월하게 새로운 대형을 만들어 나갔다.

그들 사이로 카메라가 들어왔지만 이제 재경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남은 건 3라운드 무대뿐이었다.

*  *  *

“재경이 형.”

한참 개인 연습 중이던 재경이 다급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소운이 핸드폰을 든 채 재경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듯한 소운의 얼굴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잠깐 시간 있어요?”

소운이 여기서는 할 수 없다는 듯 재경을 보며 아주 살짝 고개를 저었다. 소운의 심각한 분위기가 그대로 재경의 표정에도 옮았다. 재경이 알았다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소운이 먼저 뒤돌아 나갔다. 그의 등에서 느껴지는 다급함에 재경은 불안한 기분을 억지로 누르며 따라나섰다.

아무도 없는 비상계단으로 온 소운이 핸드폰을 보고 있다가 재경이 따라 들어오자 고개를 들었다.

“형도 이거 보셨어요?”

소운이 곧장 핸드폰을 내밀었다. 재경은 소운의 표정을 더 살피다가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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