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74화 (74/125)

74화

“재경이랑 같이 있으면 같이 있다고 말을 하지.”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이미 건후와 태연까지 데려오면서 정우의 불만은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 하준은 정우의 툴툴거리는 표정을 보고도 태연자약하게 웃으며 재경에게 다가왔다.

“둘이서 심심하지 않았어?”

“심심할 겨를은 없었는데.”

그러니 굳이 여기까지 들이닥치지 않았어도 좋았을 거란 정우의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하준은 시원하게 무시했다. 안 그래도 재경은 정우와 밥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대화만 하긴 했지만 언제든 심심하거나 지루할 틈은 없었다. 그냥 쉬는 느낌이 들어서 좋기만 했다.

“오랜만이다.”

“왜 이렇게 오래간만에 보는 거 같죠?”

박건후도 재경에게 인사하고 태연이도 한마디 건네고 있자니 순식간에 남자 5명의 존재감이 거실을 꽉 채웠다.

재경은 딱 예전 VOB의 멤버라는 걸 떠올리며 실소를 머금었다. 어떻게 이렇게 모였냐.

“뭐하고 있었어?”

하준의 물음에 정우가 컵을 가리켰다. 여유롭게 차를 마시려고 하는데 쳐들어왔다는 무안한 신호에도 하준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나도 줘.”

그냥 제 것을 요구할 뿐.

정우가 아예 무시하고 자리에 앉으니 태연이 대신 가져오려는 듯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 재경은 찾지 못했던 컵이나 차 종류를 한 번에 탁탁 찾아내는 것으로 보아 한두 번 온 게 아니었다.

“저번에도 이렇게 모였었는데 오늘은 재방송이라도 볼까?”

건후가 티비를 켜자 가뜩이나 시끄러운 공간에 소음이 더해지면서 재경은 저도 모르게 구석으로 몰리게 되었다. 세 사람이 들어오니 이렇게 시끄러워질 수 있구나.

재경의 상태를 알아챈 듯 정우가 그의 옆에 자리잡으며 넌지시 속삭였다.

“내쫓을까?”

“괜찮아.”

재경은 제집도 아니고 또 정우를 만나러 온 사람들을 내보낼 것까진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재경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정우가 인상을 찡그렸다. 정우야말로 내보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재방송 말고 너튜브로 들어가 봐.”

하준이 시키는 대로 건후가 순순히 너튜브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자기네들 오디션 이름을 쳐서 어떤 영상이 올라왔나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재경이 영상 모음집이 있네.”

건후가 버튼을 누르던 것을 멈추자 하준이 재경에게 티비 보라는 듯 가리켰다. 재경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게 끌리지 않았지만, 굳이 싫은 티를 내지 않으려 티비를 보았다. 건후가 그 동영상을 재생하면서 재경은 제 의견과 상관없이 제 영상 모음을 봐야만 했다.

“연습 장면이랑 우리 단체 무대 때네.”

레슨을 받는 모습이나 생방송에서 나온 무대가 적절하게 편집되어서 흘러나왔다.

“조회수 장난 아니네.”

건후가 혀를 내두르면서 재경을 힐끔 바라보았다. 자기 영상을 보는 표정이 어떨까 궁금해서 그랬다. 그리고 재경은 제가 지금껏 선 무대를 차례대로 보면서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보기엔 오디션에 참가한 의도 자체가 불손해서 그런지 재경의 눈엔 그저 제가 저렇게 했구나 하는 정도였다. 무덤덤하게 지켜보고 있으니 건후가 슬그머니 영상을 껐다.

“더 보지.”

태연이 아쉬운 투로 말했다가 재경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건후가 곧바로 다른 영상을 틀었다.

“이거 나다. 저 때 진짜 떨려 죽는 줄 알았는데. 무대에 올라갔더니 그동안 연습했던 게 하나도 생각 안 나서 다 망쳐 버리는 줄 알았잖아.”

태연이 제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상체를 기울이며 관심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무대를 섰을 때의 비하인드를 말하고 있으니 하준도 적절하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응, 그랬구나. 그럼 저기서 짓는 저 재간둥이 표정은 뭔데?”

“저건 본능이죠.”

“태연이 거 봤으니 내 거도 볼래.”

“아앗, 잠깐만. 마저 다 보고…….”

건후가 다 보지 않은 태연의 영상을 꺼버리자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곧 티비에서 나오는 소리에 묻혀버렸다. 건후는 리모컨을 들고 있는 게 왕이라는 양 제멋대로 굴었고 하준은 리모컨을 탐내지 않는 대신 건후를 조종했다.

“건후야 다음 영상도 봐 봐.”

며칠 쉬는 날인데도 제 영상들을 돌려보는 게 좋기만 한지 그들은 지루할 틈 없이 계속 대화를 나눴다. 오죽하면 건후가 정우까지 끌어들였는데 정우는 귀찮은 듯하면서도 한 번씩 툭툭 대답을 던져주었다.

각자 편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면서도 다른 사람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마찬가지로 조용히 있는 재경조차 그대로 받아들였다. 말하기 싫으면 말아라.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뭐, 싶은 분위기였다. 오죽하면 재경조차 점점 몸에 힘이 빠질 정도였을까.

“괜찮아?”

“괜찮아.”

소란스럽긴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재밌네. 아 맞다, 정우야.”

하준이 편집된 영상을 보다가 뒤늦게 생각난 듯 정우를 불렀다. 정우를 돌아본 하준이 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뭔가를 확인하더니 그에게 내밀었다.

“대표님께서 이거 올리셨다고 확인해 보라던데?”

“언제 올렸는데?”

“아까 너한테 전화 걸었을 때?”

하준은 아까 정우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소속사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나 보다. 그러다 재경이 있으니 무작정 찾아와서는 깜박 잊었던 본론을 내밀었다.

정우가 핸드폰을 받아서 확인하고 있으니 재경이 슬쩍 시선을 내려 훔쳐보았다.

‘어?’

정우가 읽고 있는 건 소속사에서 낸 입장문이었다.

[이정우 소속사 JT 입장 전문]

안녕하세요 JT 엔터테인먼트입니다.

현 이정우 연습생을 둘러싼 논란에 대한 공식 입장을 말씀드립니다.

이정우 연습생은 JT 엔터의 대표 이성훈의 아들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정우 연습생은 그 어떤 혜택 없이 정당하게 심사를 통해 JT 소속사와 정식 계약을 맺었습니다. 연습생이 되어서도 다른 연습생과 차별 없이 대했으며 특히나 오디션 프로그램에 있어 당사가 연습생을 띄웠다는 것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당사는 이정우 연습생과의 계약부터 그 어떤 불미스러운 일도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연습할 때 당시의 계약서를 첨부합니다.

지금부터 인터넷 커뮤니티에 근거 없는 논란을 일으키는 글은 전부 민형사상의 법적 대응에 나서겠습니다.

이번 논란을 비롯해 꿈을 향해 나아가는 연습생들에게 많은 논란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연습생들이 가는 길이 가시밭길이 아닌 꽃길이 되도록 많은 응원과 힘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아래는 정우의 계약서가 첨부되어 있었는데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인지 제법 많은 조건이 추가되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겠다는 이정우의 사인까지 본 재경은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오디션이 아니어도 충분히 데뷔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데뷔조에 들어갈 조건이 유독 까다로웠고 특히나 계속 연습생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자필 조항을 보니 괜히 마음이 무거웠다.

지금껏 정우의 밝은 부분만 보면서 어두운 이면 따위는 없을 거라고 오해했다. 그런데 데뷔가 보장되지 않았던 연습생이었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재경아, 네가 그 글 올렸어?”

재경의 가라앉은 표정을 보다 못한 하준이 끼어들었다. 그는 재경에게 어깨동무와 함께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아니요.”

“네가 올린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심각해.”

“이 오디션이 아니었어도 무조건 데뷔하고 잘 될 줄 알았거든요.”

“정우가? 왜? JT 연습생이라서?”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비슷해요.”

“아하.”

하준이 정우의 얼굴을 보면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소속사 가면 당연히 데뷔조에 들 텐데 굳이 여기서 버티겠다고 하는 바람에 그렇지 뭐. 그건 정우 잘못도 있어.”

“형.”

“솔직히 스카우트도 많이 받았으면서 안 간 건 네가 기회를 발로 찬 거지.”

하준은 이렇게 된 김에 정우에 대해 다 말해주겠다는 듯 재경의 옆에 딱 달라붙었다.

“이 오디션도 소속사에서 정우보고 나가서 증명하라고 해서 나온 거야. 그런데 소문은 소속사에서 정우 밀어주기를 했다고 하니 그냥 억측으로 다 밀어붙이는구나 싶었지.”

“적어도 JT에서 정우 모함하려고 나온 소리는 아니다 이거지.”

가만히 있던 건후가 말을 보탰다.

“우리 다 정우가 대표님 아들인 거 알고 있거든. 근데 더 짜면 짜지 잘해주지 않아서 그 글 아예 모르는 애가 올린 티가 나더라.”

“아니, 정우 형을 끌어내리려면 좀 조사를 해와야지 그렇게 어설프게 말을 올려서는…….”

태연마저 말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재경이 형 논란은 어떡하지?”

정우에서 재경으로 화제가 돌아갔다. 재경은 갑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어리둥절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재경이 안타까운 듯 태연이 앉은 자리에서 몸을 비틀었다.

“소속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거짓이라는 걸 밝혀야 하는데 미치겠네. 이러다가 다음에 탈락하면 어떡해.”

“야야, 재수 없는 소리 마라.”

건후가 태연의 입을 막아 버리는 사이 하준이 정우에게서 핸드폰을 가져오며 말했다.

“그건 시간이 필요하겠지.”

정우는 입장문에서 ‘이번 논란을 비롯해’로 시작하는 문구를 읽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재경을 위해서 포함된 문구였다. 정우가 꼭 넣어달라고 했고 그것을 확인하라는 의미로 하준이 연락했던 거니까.

“이번만 어떻게 버텨 봐.”

그러면 수가 생길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