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77화 (77/125)

77화

재경은 발표식이 끝날 때면 항상 누구보다 일찍 나갔었다. 떨어진 연습생을 달래며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나눌 여유도 없었고 당장 제가 합격했다는 것만으로도 앞이 깜깜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재경도 쉽게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와, 저번 발표식 땐 바로 나간 거 같은데 설마 나 때문에 있는 거야?”

중하랑의 신난 목소리에 재경이 움찔 어깨를 튀었다. 발표식 때마다 조용히 빠져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중하랑이 예리하게 찔러온 것이다.

“꼭 그런 건 아니고…….”

“나 감동했어.”

재경이 아니라고 한 말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중하랑이 재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의 어깨를 흔들다가 팔을 흔들고 있으니 재경이 다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누가 보면 합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한껏 들떠 있었다. 당장 탈락한 다른 연습생들의 얼굴엔 씁쓸한 표정이 감도는데 중하랑만큼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대체 왜 웃고 있는 거야.

“형은 욕심도 없어요?”

오죽하면 재경이 중하랑에게 왜 아쉬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정말 끝까지 올라갈 마음으로 해야지, 자기는 떨어졌는데 뭐가 저렇게…….

“이게 끝이 아니잖아.”

돌아오는 대답이 망치가 되어 재경의 머리를 가볍게 치고 지나갔다. 끝이 아니라는 게 가슴에 박혔다. 중하랑의 말이 맞았다. 이 오디션은 중하랑에게도 재경에게도 대안이 되어 선택한거지 인생을 건 모든 게 아니었다. 재경도 어느새 오디션에 집중하게 된 걸 깨닫고 놀란 상태였다. 자신이 떨어져야 하는데 중하랑이 떨어진 것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오디션 떨어졌다고 아이돌을 못 하는 건 아니잖아. 이건 그냥 내 인생에서 스쳐가는 기회 중 하나뿐이야. 잡지 못했다고 내 인생이 무너지는 건 아니니까…….”

중하랑이 웃음 한쪽으로 탈락한 씁쓸함을 흘려보냈다. 그도 완전히 털어버린 건 아니었나 보다. 그러나 곧 중하랑이 홀가분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실망하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지. 다시 소속사로 돌아가서 연습하면 되는 거잖아. 운이 좋으면 바로 데뷔조에 들어갈 수도 있고.”

“그건 정말 네 운이 하늘에 닿을 때가 아닐까 싶다.”

중하랑의 말을 받아친 건 이승권이었다.

“뭐야?”

“너 솔직히 재경이가 도와줘서 이번에만 괜찮아 보였던 거잖아.”

“이승권, 날 위로해도 모자랄 판에 속을 뒤집냐? 너는 합격했다 이거지?”

중하랑이 이승권에게 헤드록을 걸며 장난을 치는 사이 재경은 어느새 제 옆으로 모여든 사람들의 존재를 깨달았다. 정우부터 하준과 소운, 건후, 태연, 이번에 같이 무대를 했던 한시우까지. 어느새 제법 많은 이가 재경을 둘러싸고 있었다. 정우가 재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귓속말을 건넸다.

“잘했어.”

마음 같아서는 크게 축하해주고 싶었지만 중하랑을 배려해서였다. 그 작은 축하 인사에 재경은 고개를 푹 숙였다.

중하랑이 자기에게 밀려 떨어진 것 같은 죄책감이 정우의 손짓에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니고 그저 순위가 그렇게 나온 것만 같은 따뜻함이었다.

“아 뭐야. 날 위로하러 온 거야, 재경이 데려가려고 온 거야.”

쟁쟁한 순위권의 연습생들이 다가오자 중하랑이 그들의 면면을 돌아보며 장난을 걸었다.

“재경이도 데리고 가고 겸사겸사 수고했다고 인사도 하고.”

하준이 중하랑의 말을 받아쳤다. 이에 중하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하준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정우와 마찬가지로 안정적으로 상위권에 들은 하준이 마음에 안들어서 그러나 싶을 때 대뜸 중하랑이 하준과 자신을 손가락질했다.

“내가 형으로 아는데?”

“저한테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제법이시네요.”

곧바로 말을 올리는 윤하준의 능청스러움이 마음에 드는지 중하랑이 엄지를 추켜세웠다.

“성격이 마음에 드네.”

“저도 형 성격이 괜찮다고 들었어요.”

같은 조가 되지 않아 어색한 사이인데도 재경을 중심으로 어울리자 어제까지 계속 어울렸던 듯 자연스러웠다.

“소감으로 재경이 이야기한 건 좀 놀랐어요.”

탈락해서 속상할텐데, 하준이 다 들리게 혼잣말을 잇자 중하랑이 입술을 삐죽였다. 탈락을 힘있게 발음한 거 분명 나 놀리는 거 같은데?

“그래도 재경이한테 많은 도움이 될 거 같아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중하랑은 하준이 말하는 걸 바로 알아들었다. 역시나 재경을 둘러싼 논란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부러 말해준거죠?”

하준이 중하랑에게만 들리게 물었다. 이승권이 한 걸음 움직여 재경으로부터 두 사람을 가려주었다. 중하랑은 재경 쪽을 힐끗 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잘 됐으면 하거든.”

“그럼 하나만 더 도와주실래요?”

“와…….”

잘했다고 칭찬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더 요구하고 있는 하준의 뻔뻔함에 중하랑이 잠시 그를 빤히 응시했다. 어디서 이런 애가 나타났지?

“진짜 성격 마음에 드네.”

중하랑이 씩 웃으며 하준과 손을 맞잡았다. 재경의 실력이 좋아서 센터에 메인보컬까지 주고 쪽쪽 빨아먹던 중하랑도 하준과 똑 닮은 인간이었다.

*  *  *

“이번 라운드는 총 4곡으로 이뤄집니다. 다만 선택곡은 8곡이 되겠는데요. 같은 제목을 가진 두 개의 노래를 선택한 연습생끼리 상의하에 하나를 택하면 되겠습니다.”

남은 27명의 연습생 그리고 4개의 곡. 이제 정말 생방송 라운드를 둔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에 곡의 선택이 매우 신중해졌다.

“대결곡 중에 하나를 선택하더라도 일단 인원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의 제목당 우선적으로 인원이 차면 그 곡은 마감입니다. 당연히 먼저 선택할 기회를 가지는 게 좋겠죠.”

최PD의 설명에 연습생들이 눈을 빛냈다. 이번엔 어떻게 곡을 선택할 우선권을 가져갈지 궁금한 얼굴이었다.

“일단 가장 먼저 곡을 선택할 수 있는 건…….”

설마 순위대로 기회를 주는 걸까? 연습생들이 정우를 힐끔거리고 있을 때 최PD는 가만히 있던 재경을 가리켰다.

“지난번 무대에서 1등을 한 팀부터입니다.”

재경과 이승권, 한시우 세 명에게 먼저 우선권이 돌아갔다는 말이었다. 재경은 지금껏 노래를 먼저 선택한 적이 있었나 생각해봤다. 처음은 단체라서 선택할 것도 없었고 두 번째는 정우에게 붙잡히고 세 번째는 꼴등. 그러니까 엄밀히 이번만큼 폭이 넓은 건 처음이라는 소리였다.

그렇게 따져보니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재경은 총 8개의 곡 어느 것이든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옆에서 정우가 좋냐는 눈빛으로 바라보든 말든 좋은 건 좋은 거였다.

자신이 돋보일 수 있는 곡을 선택할 수 있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순수하게 하고 싶은 노래를 택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럼 세 사람이 알아서 순서를 정하고 남은 24명도 차례로 순서를 정해 볼까요.”

최PD가 순서를 정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작은 미션을 준비하는 동안 재경의 옆으로 한시우와 이승권이 다가왔다. 세 번째에 출발해도 좋았다. 그래서 재경이 조용히 제 순서를 가장 뒤로 빼는데 한시우가 재경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네가 먼저 가.”

“…저부터요?”

“그래. 저번 무대에서는 네가 꼴찌로 선택했잖아. 이번엔 처음으로 가 봐.”

“그래도…….”

재경은 두 형이 먼저 나가야 하는 거 아니냐는 듯 망설였다. 어차피 셋 중에서 순서를 정하는 거라면 특별히 욕심낼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승권이 고개를 저었다.

“네 덕분에 1등한 거였잖아. 그러니까 네가 먼저 가야지.”

이승권과 한시우는 아예 재경부터 보낼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한목소리를 내자 재경은 잠시 난처한 듯 굴다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어차피 그들 세 사람 사이에서의 순서는 크게 의미 없으니 재경은 더 버티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다른 24명의 순서까지 정해지고 나자 카메라맨이 재경 쪽으로 다가왔다.

“그럼 출발하세요.”

재경은 가장 먼저 홀을 나간다는 게 괜히 이상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지도 못하고 앞만 보고 걸어갔다. 모두가 빨리 자기 차례가 왔으면 할 테니 서둘러 걸어 나가는 것이었다. 그런 재경의 뒤에서 연습생들이 나누는 대화는 듣지 못한 채.

“저거 저거 신나서 가네.”

“첫 번째 안 줬으면 어쩔 뻔했어.”

“저번에 꼴등한 충격이 컸나 봐요.”

하준과 한시우, 소운까지 떠들어 대는 걸 들었다면 절대 빨리 걸어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복도로 나온 재경은 곡명이 적힌 방으로 들어가면 된다는 안내에 천천히 걸음을 늦췄다. 어떤 곡이 있을지 궁금했다.

“같은 제목…….”

힌트가 그것뿐이라 떠오르는 게 별로 없었다. 혹시 하나의 노래를 두고 다른 가수가 편곡해서 부른 걸 말하나 싶었지만 복도를 두고 왼쪽과 오른쪽에 같은 제목과 다른 원곡자가 적힌 것을 보고 아닌 걸 알았다.

“완전히 다른 곡이네.”

천천히 걸어가며 어떤 노래가 있는지 살펴보던 재경이 마지막 네 번째의 이름을 보고 멈춰 섰다. 지금껏 가벼운 호기심을 담고 보던 것과 달랐다. 제목 아래 익숙한 이름을 발견한 재경은 서둘러 선택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정하연…….”

제 엄마의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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