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80화 (80/125)

80화

재경이 벙쪄 있는 틈을 타 정우가 그의 등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뭐라고 웅얼거리기는 했지만 뒤돌아서 있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어쨌든 허리를 두른 팔을 푸르지 않자 재경은 들었던 고개를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잔 적은 있지만 이렇게 붙어서 잔 기억은 없었다. 거기다 아예 자기를 대형 난로 취급하는 정우를 밀어버릴 의지도 사라졌다. 안 그래도 어제 별일은 없었어도 마음이 쓰여 간밤에 한 번도 깨지 않을 정도로 피곤했다.

정우의 무게에 더 푹 잘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

“비켜.”

할 게 아니지.

재경이 정우의 팔을 야멸차게 던져 버렸다. 덕분에 반쯤 몸을 틀어서 팔이 꺾일 걸 막은 정우가 잠이 확 달아난 듯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치사하게.”

“뭐가 치사해. 네 침대 가서 자.”

“나는 너 외로울까 봐 같이 자 준 건데.”

“바란 적 없다.”

재경이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듯 정우에게 베개를 집어던졌다. 아무리 자기가 외롭게 살아왔다고 하지만 저렇게 무작정 밀어붙이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인지.

정우는 할 말이 많은 얼굴이지만 입술만 삐죽일 뿐 옆의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재경을 안았을 때 따뜻했는데 혼자 누운 침대는 싸늘하기만 했다.

정우가 제몸의 체온을 침대로 보내며 달구고 있을 때 재경이 시간을 확인하고 일어났다. 정우가 더 자자고 해서 새벽인 줄 알았는데 벌써 7시가 넘었다.

“야, 일어나. 아침 먹고 연습 가야지.”

재경은 삐져서 아무 반응도 안하는 정우를 바라보다가 그의 머리까지 뒤집어씌운 이불을 휙 내려주었다.

“조금만 자고 일어나자. 나 어제 제대로 못 잤단 말이야.”

“그건 네 사정. 연습은 단체 연습. 일어나.”

재경이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정우의 어깨와 팔을 흔들었다. 그런데도 안 일어나면 멱살을 잡아서 일으킬 것만 같은 분위기에 정우가 한껏 인상을 쓰며 일어났다.

“나는 어제 누구 때문에…….”

정우가 억울한 듯 중얼거리는 소리를 무시한 재경이 먼저 화장실에 들어갔다. 양치를 하고 세안을 하는데 간밤에 잘 자서 그런지 몸이 가벼웠다.

붕 뜬 머리를 보다 못한 재경이 아예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다른 화장실에서 씻었는지 정우가 말끔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말끔한 것과 별개로 불만이 덕지덕지 붙은 채로.

“아직 다 자잖아.”

다른 화장실을 이용한 김에 다른 사람을 보고 왔는지 정우가 우리만 일어났다고 중얼거렸다. 정작 재경이 그의 불만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지만. 이미 해가 떴는데 아직도 자고 있다는 말에 재경이 수건으로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고민했다. 다 깨울까?

“그럼 우리 둘이 먼저 나가서 밥 먹고 오자.”

재경은 젖은 머리를 대충 털어내고는 수건을 내려놨다. 다들 깨우는 것보다 정우와 밥을 먹고 둘이서 대화할 시간을 따로 빼는 게 좋겠단 판단이었다.

*  *  *

정우는 밥을 먹는 재경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간밤에 끙끙 앓았던 적이 없던 것처럼 얼굴빛이 좋아 보였다. 밥도 잘 먹고 간간이 비치는 미소로 보아 컨디션이 괜찮았다. 정작 재경을 다독이느라 밤에 제대로 못 잔 자신은 이렇게 피곤한데 말이다.

아까는 정우가 조금 더 자고 싶다는 걸 가차 없이 튕겨낸 재경이 야속했다. 누구 때문에 잠을 못잤는데. 너 어제 끙끙 앓았다고 말할까 하던 정우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잘만 잤으면 됐지, 하는 생각에 억지로 불만을 집어넣고 나오니 둘이 마주 보고 식사하는 이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이제 자신을 진짜 친구처럼 받아들이는 재경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고. 정우는 어느 순간 숟가락을 내려놓고 재경이 먹는 걸 구경했다.

‘정하연, 정하연… 별.’

원곡자의 낯선 이름이지만 재경으로부터 어떤 사람인지 들은 후에 그녀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아주 잠깐 나왔던 여가수. 신인에다가 첫 1집의 성적이 괜찮은 데에 반해 너무 짧은 활동 기간과 함께 완전히 사라져버렸던 가수였다.

그녀가 정말 재경의 엄마, 그러니까 저번에 봤던 그 사람이 많다면 아직 가수가 되고픈 열망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다 이루지 못해 재경을 가수로 밀어내고 있었으니까.

무슨 사정이 있었을까.

그리고… 재경은 그렇게 원망하던 사람의 노래를 택할 때 무슨 마음이었을까.

온통 물어보고 싶은 것투성이였지만 그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일단 자신에게는 어느 정도 마음을 열고 있다는 건 알지만 정우가 알고 싶은 건 재경의 내밀한 부분이었다.

‘서두르지 말자.’

지금도 충분히 재경은 자신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더 궁금한 건 많지만 서두른다면 이전보다 더 사이가 나빠질 것 같아서 정우는 초조한 마음을 억눌렀다.

“안 먹어?”

“…일찍 일어나서 입맛이 없어.”

“와, 너 뒤끝이 장난아니구나.”

벌써 잠에서 깨도 옛날에 깼을 텐데 아직도 삐져 있는 거야? 지금이라도 가서 잘래?

재경이 정우의 가득 남은 밥을 가리키면서 안 잘 거면 어서 먹으라는 협박을 건넸다. 그에 정우가 슬그머니 숟가락을 들면서 다시 재경의 표정을 살폈다.

역시나 컨디션이 괜찮아 보였다.

정우가 억지로 몇 숟가락을 먹고 난 후에야 재경의 날카로웠던 눈빛이 누그러졌다. 그걸 기민하게 알아챈 정우가 미련 없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자. 산책이라도 해야겠어.”

안 그러면 소화가 안 될 것처럼 말하니 재경이 별말 없이 따라 일어났다. 안 그래도 재경 역시 정우에게 잠깐 걷자고 할 생각이었다. 밥을 먹는 동안 정우에게 무슨 말을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할 말을 정했으니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식판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이른 산책을 나섰다. 정우가 카페에 들어가 두 잔의 핫초코를 들고 나와서 하나씩 나눠 가진 둘은 멀지 않은 곳을 천천히 걸어 다녔다.

재경은 손안 가득 채운 따뜻한 차의 존재에 깊이 숨을 내쉬었다. 달콤한 향과 손을 빠듯하게 채워 주는 온기가 저절로 만족스러운 한숨을 자아냈다.

핫초코를 한 입 마신 재경은 정우의 센스에 고마워하다 이러다가 할 말을 못 하고 들어갈까 싶어 서둘러 운을 띄웠다.

“원곡자에 관한 건 다른 사람한테 말 안 했으면 좋겠어.”

재경은 엄마가 정하연이라는 걸 밝힐 생각이 없었다. 그것으로 방송을 탈 마음은 더더욱 없었고 이왕이면 그냥 이번 라운드를 치를 곡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면 했다.

어제는 내내 엄마의 이름에서 충격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것도 하루가 지나니 다른 생각이 물밀듯 들어왔다. 엄마의 노래를 부르면 어때, 그냥 오디션 곡으로 생각하면 별거 아니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건데 굳이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는 가벼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다 보니 정우에게는 말해둘 필요가 있었다. 정우가 쉽게 입을 여는 성격이 아니라 할지라도.

재경의 제안에 정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재경이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 생각해보고 또 자신에게 굳이 그 말을 한 이유도 생각했다. 원곡자와의 관계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하는 마음인데 당연히 말할 생각이 없었던 정우가 불현듯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담았다.

“그럼 넌 뭐해 줄 거야?”

“뭐?”

이런 순간에 장난칠 생각이 드냐는 듯한 재경의 원망의 눈초리에도 정우는 꿈쩍하지 않았다. 절대 아침에 자기를 야멸차게 밀어낸 복수가 떠올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당연히 말할 생각이 없긴 한데, 그거랑 별개로 네가 그렇게 언급하니까 좀 서운해서 말이야.”

“뭐가 서운해. 확실하게 하면 좋은 거지.”

“기본적으로 사람 간의 신뢰가 없단 소리잖아. 나는 너를 재워주고 먹여 주기도 했는데…….”

“와, 너 치사하게.”

정우의 집에서 편하게 쉬었던 재경이 억울함에 주먹을 꼭 쥐었다. 차라리 남의 집이라고 가시방석에 앉은 듯 보냈다면 이러진 않았을 텐데 편히 쉬어서 그런지 더 억울했다.

“뭘 원하는데?”

재경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정우가 요구하는 걸 다 들어주고 완전히 털어낼 생각이었다. 그게 서로 부담되지도 않으니 좋을 수도 있고.

그런 마음으로 정우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설마 나 돈 없는데 돈 달라고 하면 어쩌지?

“한 침대에서 자자.”

“뭐래, 그게 무슨 조건이야.”

“오늘 아침에 혼자 누워보니 춥더라.”

“난방 따뜻하게 틀어 주거든?”

“그래도 어제 너랑 같이 자니까 따뜻해서.”

정우가 원하는 건 그거 하나라는 듯 다른 말 없이 핫초코를 홀짝거렸다. 이번 라운드 내내 재경이 평온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면 자신이 그를 보살피고 싶었다. 그래서 정우는 일단 재경이 잘 쉴 수 있을 만한 조건을 챙겼다.

물론 그동안 재경과 한 침대에서 자는 게 생각보다 괜찮았던 것도 같았고. 그의 숨소리를 듣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잠이 들게 되었으니까. 그럭저럭 괜찮은 조건을 내걸었단 생각이 들어 정우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리려던 찰나였다.

“너 다른 사람이랑도 같이 자냐?”

재경의 물음에 정우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자냐니.

“뭐야, 왜 그렇게 싫어하는데.”

재경은 정우가 너무 정색하자 자기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떠올려봤다. 이상한 질문을 한 건 아니었는데. 그러나 정우는 아닌가 보다.

“상상만 해도 별로야.”

재경과 얼굴을 맞대고 자는 건 정말 좋았는데 그 자리에 하준이 있다고 생각하자 정우의 입술이 희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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