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우리 아이가 또 붙었더라고요.”
재경의 모친, 정하연이 두 손을 꼭 붙잡고 좋아했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대로 들썩이는 게 재경의 합격이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는 실장은 웬일인지 탐탁지 않은 눈빛이었다.
“저도 봤어요. 그런데 이번에 겨우 붙었던데…….”
“에이, 마지막에 붙은 게 뭐 어떤가요. 어차피 최종까지 갈 아인데.”
정하연은 재경이 계속 붙을 걸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거야말로 실장이 원하지 않는 바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우리 직원들한테 모니터링 시켜 보니까 최종까지는 힘들어 보이던데요?”
“그, 그런가요?”
실장이 가망이 없다며 혀를 차자 정하연의 들떴던 감정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제 손을 꼭 잡았던 그대로 점점 미소를 줄여가며 실장의 눈치를 보았다. 이제야 실장이 자신과 다른 기분이라는 걸 눈치챈 정하연이 슬그머니 입꼬리를 내렸다.
그러고는 몸을 축 늘이며 손톱에 반쯤 남은 네일 아트를 깔짝거리며 뜯어냈다. 늘 재경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잘 맞춰 주던 실장이 오늘은 이상하게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정하연이 제 기분을 알아챈 걸 눈치챈 실장이 거만하게 등을 기댔다. 회사의 실장이지만 실질적으로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 그이기 때문에 사장실도 편하게 쓰고 있었다.
실장은 큰돈을 들여 마련한 소파의 표면을 매만지다가 후, 먼지를 불었다. 그가 다른 말 없이 침묵을 끌자 정하연이 이리저리 돌아보다가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그래도 우리 재경이가 가수가 될 운명이에요. 걔가 제 별이거든요. 그러니까 실장님이 재경이를 예쁘게 봐 주셔야 해요.”
“나야 당연히 예쁘게 보기는 하는데 하연 씨는 아들이 최종까지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건…….”
정하연이 아까 자신의 할 말을 떠올리려 부산스레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말한 것 같다. 이번에 턱걸이로 붙었지만, 꼭 9등 안에 들어갈 애라는 티를 냈다. 실장에게 재경의 좋은 점을 강조시키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건데 아무래도 그게 제 잘못이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최종에 들면 좋죠. 그런데 그러면 우리 소속사와의 계약은 물 건너가니까…….”
말 그대로 재경이 데뷔하고 나면 그 오디션을 통해 데뷔를 하게 되니 지금 준비하고 있는 앨범은 못 쓰게 된다는 실장의 설명에 정하연을 구석으로 몰아댔다. 실장은 제 가지런한 손톱을 보다가 또 두툼한 금반지까지 어루만지며 느긋하게 말했다.
“앨범이라는 게 한두 푼도 아니고 데뷔한 애를 기다리는 사이에 유행 다 지나가요. 그러니 아들은 물론 하연 씨의 앨범 작업도 어려워지죠.”
실장이 말을 하면 할수록 정하연의 낯빛이 희게 질려갔다. 지금껏 실장과 재경의 계약을 그렇게 밀고 간 이유가 뭐였던가. 다 재경의 앨범을 성공시켜서 그다음 제 앨범까지 만들어 주기로 약속받지 않았나.
“그래도 이런 이름도 없는 기획사보다는 저 오디션이 낫죠.”
물론 오디션을 통해 재경이 데뷔하게 되면 정하연의 앨범은 완전히 물 건너간다. 정하연은 실장의 말 놀음에 얼굴이 하얘졌다 파래지기를 반복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재경이 데뷔한다고 해서 저 프로그램이 자신의 앨범을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닌데.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이번에 겨우 합격했으니까 다음엔 떨어지겠죠. 그래도 제법 얼굴이 팔려서 실장님한테 절대 나쁘지 않다니까요?”
“그거야 뭐. 인기가 많으면 우리야 좋긴 한데…….”
실장은 점점 제가 원하는 대로 미끼를 물어 온 정하연을 살살 흔들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면 중간에 데리고 나올게요. 그럴 테니까 딱 이번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던가요. 그럼 그렇게 알고 앨범 작업을 계속 이어가도 되겠죠?”
“그, 그럼요.”
정하연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정규 앨범을 만들어 준다면서 16곡을 하나씩 뽑고 있다고, 앞으로도 작업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말이니 나쁠 게 없었다. 아직 재경과 만나서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그거야 나중에 설득하면 될 일이었다.
저번에 화내고 집을 나갔지만 그래도 제 말은 잘 듣는 아들이니까. 지금까지 자기가 하라는 대로 다 해 온 아들이니까.
재경은 제게 있어 별과 같은 아이였다. 자기가 다시 가수가 되는 길을 만들어 주고 밝혀 줄 별이니까 분명 이 앨범이 그 길이 되어 줄 것이다.
만약 싫다고 한다면 자신에게 진짜 마지막 기회라는 걸 말하면 된다. 그러면 재경은 못 이기는 척 제 손에 끌려올 것이다.
“계속하세요. 재경이는 제가 데려올게요.”
“그래요. 그런데 이번 앨범 작업하면서 말인데…….”
실장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싱글이 아니고 정규로 각을 잡고 진행하려니 작곡가 섭외부터 투자가 장난 아니게 들어요.”
“그, 그런가요?”
“그렇죠. 앨범 하나 만드는데 드는 돈이 얼만지 하연 씨도 아주 잘 알고 있잖습니까.”
실장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정하연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과거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처음이자 마지막 앨범을 내면서 중간에 회사가 무너지고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으면서 가수로 번 돈을 전부 갖다 바쳐야만 했다.
그렇게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지만 누구도 정하연을 찾아 주지 않았고 한 푼 건지지도 못한 채 무대에서 쫓겨난 그녀는 애 아빠에게까지 버림받았다. 완전히 삶을 끝내려고 할 때 임신인 걸 알았고 그게 정하연이 이날까지 살아온 버팀목이었다.
“잘 알죠.”
그런 사정을 실장에게 했었던 정하연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래서 말인데 하연 씨도 이 앨범에 투자자가 되어보는 건 어때요?”
“제가 투자자요?”
의외의 제안에 정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실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실장은 언제 거만을 떨었냐는 듯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물 투자자가 두 분 있긴 하지만 아들의 앨범을 만드는 데 조금 부족해서 말이죠. 하연 씨가 먼저 투자를 하면 나중에 그 이익도 보고 아들이 성공하는 모습도 보고 이거야말로 일석이조죠. 아니다, 다음 하연 씨 앨범까지 계약되었으니까 일석삼조인가?”
실장의 넉살 좋은 웃음과 매끄럽게 흘러나오는 달변에 정하연이 점점 그쪽으로 마음이 쏠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일부 투자금을 내고 아들이 나올 때 맞춰서 계약서를 쓰는 겁니다. 어때요?”
“하지만 제가 지금 돈이 없어서요.”
“그거야 다 방법이 있죠. 요즘 누가 자기 돈으로 투자를 합니까. 다 빚내서 하는 거지.”
실장이 고개를 저으며 하연 씨 주머니에서 돈 안 가져 간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서 밖에 있는 직원을 호출했다. 아까 커피를 내왔던 몇 번 본 직원이 들어오자 실장이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리 와서 투자에 대해 설명해 드려.”
정하연은 직원이 하나의 파일을 들고 제 맞은편으로 다가오는 걸 보고 실장에게 물었다.
“실장님이 직접 설명해 주는 게 아니고요?”
“당연히 원한다면 제가 하죠. 그런데 이 사람이 저보다 더 잘 설명해 주니까 우리 하연 씨를 위해 바쁜 직원을 부르는 거죠.”
“아…….”
정하연은 재경의 합격 소식을 전하기 위해 왔다가 투자까지 흘러온 대화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중간에 많은 대화를 한 거 같은데 마지막이 재경의 앨범에 제가 투자를 한다는 것만 남았다.
“혹시 대출받으신 적 있으신가요?”
“대출… 빚이라면 있긴 있어요.”
“어디에서 받으셨나요?”
직원의 상세한 질문에 정하연은 얼떨떨한 얼굴로 차분히 답을 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재경이 소리쳤던 일이 떠올랐다. 자기에게 사기 치고 도망가는 사기꾼. 그래서 일부러 오디션으로 갔다고 했었던 그 외침이…….
“그런데 제가 지금 빚이 있는 상태에서 투자할 여유가 없을 거 같은데…….”
정하연이 살짝 난처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시다시피 저도 안정적인 직업이 없어서 빚이 늘어만 가고 재경이는 고작해야 제 알바로 자기 생활비 버는 게 다라서요.”
물론 재경이 알뜰히 벌어온 돈으로 이자를 갚아 주고 있어 정하연은 특별히 빚을 신경 쓰고 있지 않았지만 어쨌든 잊을 만하면 떠오르곤 했다.
“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정 뭐하면 오늘은 설명만 듣고 가세요.”
실장이 정하연에게 괜한 걱정을 한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러고도 정하연이 마음을 놓지 못하니 실장의 입매가 길게 닫히며 방금까지 짓던 미소를 지웠다.
“하연 씨, 나 못 믿어요? 아니면 아들 앨범이 중간에 멈추기라도 하면 좋겠어요?”
“그건 아니지만…….”
“이번에 오디션에 나오면서 얼굴 제대로 알렸으니 딱 시기에 맞춰 앨범을 내야지. 가수는 시간이 생명이죠. 오디션 끝나고 다 잊히고 나오면 누가 기억이나 한답니까?”
실장이 직원에게 그렇지 않냐는 듯 굴자 직원이 조용히 동조했다. 그러면서 정하연이 언제든 괜찮다고 하면 설명을 이어가려는 듯 파일을 뒤적거렸다.
“하연 씨.”
“네, 실장님.”
“일단 오늘은 설명만 들으세요. 그리고 며칠 생각해 보시고 일주일… 아니다, 아들 방송하는 날 결정합시다.”
실장이 재방송 중인 오디션을 가리켰다. 마침 재경의 얼굴이 나오면서 정하연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실장의 말이 맞았다. 자신도 다시 앨범을 내기까지 이리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 오디션에서 충분히 대중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지금 빨리 앨범을 내야 한다. 그래야 재경이 성공하고 자신도 성공할 수 있다.
“어때요?”
실장의 은근한 회유에 정하연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