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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이돌-89화 (89/125)

89화

날듯이 경찰서로 달려간 재경이 거친 숨을 다스리기도 전에 내부를 둘러보며 한 사람을 찾아댔다. 다짜고짜 전해 들은 엄마의 소식에 자세한 사정도 모른 채 달려온 참이었다.

“엄마.”

가장 구석진 안쪽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뒷모습을 향해 재경의 애절한 외침이 울렸다. 재경의 목소리를 들은 그 등이 움찔하더니 곧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낯익은 목소리가 정말 제 아들이 맞다는 걸 확인한 정하연은 반쯤은 민망한 듯 또 반쯤은 슬픈 듯한 얼굴로 재경을 바라보았다.

“왜, 경찰서… 엄마가 왜 여기 있어? 응?”

재경은 곧장 엄마에게 다가가면서도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엄마의 앞에 경찰로 보이는 남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혹시나 죄를 지어서 잡혀 왔나 하는 생각이 전부였다. 멀지 않은 곳에 실장이 재경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고 또 엄마의 옆으로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의 남자는 돌아보지 못했다.

“말을 해 봐.”

재경이 엄마의 어깨를 짚으며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그러나 재경의 답답한 마음을 모르는지 정하연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재경아, 일단 진정해.”

보다못한 정우가 재경의 어깨를 잡으며 제게 끌어당겼다. 엄마에게서 좀 떨어지고 나서야 재경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경찰서이고 낯선 배경이지만 실장을 발견한 재경의 얼굴이 왕창 일그러졌다. 실장을 보고 나서야 엄마가 사기 관련해서 경찰서에 온거란느 감이 왔다.

“설마, 벌써 계약했어? 응?”

재경이 엄마를 보며 애달프게 물었다. 방송 보고서도 바로 연락이 없었으니까 어쩌면 계약을 이미 하고 난후가 아닐까 싶은 불안감은 있었다. 재경의 물음에 정하연은 죄를 지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말을 해봐, 말해야 알지.”

답답한 마음에 재경이 다시금 정하연에게 다가가 물어보려고 하는데 이제껏 보고만 있던 중년의 남자가 손을 들어막았다.

“일단 학생부터 진정하는 게 좋겠는데.”

남자의 중저음은 굳이 크게 말하지 않는데도 재경의 귀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재경이 중년의 남자를 바라보자 그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부터 진정해야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려줄 수 있을 거 같은데.”

“…누구세요?”

재경은 너무 자연스럽게 끼어든 남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낯이 익었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누군지 한번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가 말한대로 진정해야 하는 것도 잊은 채 누군지 물었다.

“나는…….”

“우리 아버지야.”

중년의 남자가 막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낼 때 뒤에 있던 정우가 끼어들었다. 재경의 어깨를 눌러 제게 반쯤 몸을 틀게 한 다음 제 얼굴을 가리키면서.

“아버지, …어?”

그제야 남자를 어디서 봤는지 알았다. JT대표이자 이정우의 아버지인 이정태였다. 재경이 바로 알아보는 눈빛을 띄자 이정태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끼며 무심히 명함 한 장만 건넸다.

“궁금한 거 풀렸으면 거기 앉지?”

이정태의 부드러운 제안에 이끌려 재경은 정우가 마련한 빈 의자에 홀린 듯이 앉았다. 강하게 말하지 않는데도 거역할 수 없는 느낌에 그를 다시금 돌아보았다.

실은 예전에도 재경은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엄마가 JT에 재경을 데리고 가면서 곧장 대표실로 올라갔고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저 남자를 만났었다. 엄마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몰라도 재경을 선뜻 연습생으로 받아주고 데뷔조에 넣어주었던 사람.

그런데 이제는 정우의 아버지라는 걸 알자 더욱 이정태에게 눈을 떼기 힘들었다. 그땐 왜 못알아봤을까 싶을 정도로 정우와 닮은 이정태는 시종일관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우선 여기 정하연씨는 운 좋게 사인하기 전이라 사기당하진 않았어.”

“아…….”

이정태가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준 덕분에 재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면 아니라고 하지 왜 말을 못했는지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않는 엄마가 이상했지만 일단 큰 빚을 지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럼 저 사람은 왜 여기 있어요? 엄마가 신고했어요?”

“아니. 신고한 사람은 따로 있어. 이번에 연습생으로 들인 아이가 사기를 당했다고 해서 알아봤지.”

“그럼……?”

“그 아이가 신고했고 경찰이 적잘하게 잡아준 덕분에 정하연 씨는 사기당하지 않았고.”

이정태의 속시원한 정리에 재경이 힘빠진 상체를 아무렇게나 뒤로 기댔다. 딱딱한 의자였고 재경의 무게에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정우가 잡아준 덕분에 넘어지진 않았다. 궁금한 게 다 풀렷는지 재경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에 이제껏 지켜보던 정우가 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직접 나설 줄은 몰랐어요.”

“네 부탁이 아니었어도 이미 저 사기꾼들의 흔적은 잡아두고 있었어.”

“언제부터요?”

“이번에 사기당한 아이까지 합하면 3명이 되겠구나. 내부 변호사를 통해 증거를 모으고 있었지.”

“고마워요.”

“네가 고마워할 건 없다.”

정우와 이정태의 대화를 듣던 재경은 순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탁? 사기꾼?

재경이 정우를 팔을 치며 무슨 의미냐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자 정우는 별로 감출 것도 없다는 듯 재경에게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네가 우리집에 온 날 아버지한테 연락했어. 회사이름 말하면서 좀 알아봐달라고 했지. 그리고 간간이 아버지랑 통화했는데 네 말대로 사기꾼인 거 알았고.”

처음에 재경에게는 어떻게 사기꾼인지 물어본 것치고는 이후에 별 의심없이 받아들였다 싶었는데 이런 내막이 있을 줄 몰랐다.

“나 때문에 부탁… 한거야?”

“아니. 그냥 알아봐 달라고만 했는데 우리 엔터에서도 당한 애가 있더라고.”

정우는 온전히 재경의 일만이 아니라고 잡아뗐다. 실은 재경이 슬퍼하는 모습에 안타까워서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것을 그대로 말하기가 쑥쓰러웠다.

재경은 정우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걸 인정했다. 이건 정말 정우에게 평생 갚지 못할 빚이 생겼다. 그래서 정우에게 어떻게든 고마움을 표현하려고 하는데 정우가 재경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나중에 이야기하자.”

어차피 자기와는 시간이 많다며 정우가 눈짓으로 아직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정하연을 가리켰다. 재경이 천천히 엄마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으니 그제야 눈물을 흘려대는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엄마…….”

“미안, 널 믿지, 못해서… 미안해.”

엄마의 울먹임이 가득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해왔다. 그녀는 재경을 믿지 못하고 사기꾼에게 그대로 당할뻔한 게 미안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마지막엔 안하겠다고. 재경이가 싫어해서 안하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엄마로써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재경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사기꾼이 얼굴에 나 사기꾼이라고 쓰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엄마가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엄마는… 재경이 네가 잘되고, 엄마도 잘되고 싶어서. 그냥 그것뿐인데… 정말 딱 한 번만 무대에 올라가고 싶었어.”

정하연의 흐느낌과 함께 그동안 마음에 꾹꾹 눌러두었던 한이 구슬프게 흘러나왔다. 재경이 엄마의 꿈을 완전히 외면하지 못한 것도 밤무대에 서는 것조차 행복하다는 듯 받아들였던 미소를 아직 잊지 못해서였다.

“전부 잘 됐으니까 그만 울어도 돼.”

“재경아, 미, 미안해.”

엄마는 아예 대성통곡하며 재경에게 사죄했다. 그녀의 울음엔 이번 일만 들어간 게 아니었다. 무대에 눈이 멀어 재경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 재경이 혼자서도 바르게 잘 컸는데도 그것을 알아봐주지 못했다. 재경이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을 들은 척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게 다 미안해서 정하연은 제 가슴을 쥐어짜며 울었다.

재경은 엄마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울음에 섞인 많은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며 재경도 점점 눈시울이 달아올라 있었다. 엄마가 야속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하나뿐인 아들을 챙겨주지 않는게 그렇게 서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 엄마도 엄마 이전에 정하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의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모든 원망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래 쌓여있던 감정을 차츰차츰 눈물에 흘려보낸 후 재경이 한결 시원해진 얼굴로 이정태를 바라보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다른 것으로 받아야겠는데.”

묵묵히 기다렸던 이정태의 의미심장한 대답에 재경이 잔뜩 붉어지고 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정우가 조용히 웃음을 삼키고 있는 사이 이정태가 말했다.

“정우와 네게 논란을 심었던 아이를 찾았다.”

“…….”

재경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이정태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누구를 찾아? 설마 전상국을 찾았다는 말일까?

재경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바라보며 생각을 애써 정리해보려고 하는 사이 재경을 보는 이정태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우와 다르게 이정태의 매서운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누구냐고 단숨에 물어오지 않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르는 재경의 반응을 바로 알아챘다.

“너는 누군지 알고 있나 보구나.”

“그게… 아니, 그건.”

재경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있자 뒤늦게 정우도 모든 상황을 알아챘다. 정우는 재경에게 왜 알고도 말하지 않았는지 묻는 대신 아버지에게 다른 질문을 건넸다.

“걔는 이제 어떻게 돼요?”

어차피 같은 연습생인 건 알았다. 그중 누구인지가 문제였지. 정우의 물음에 이정태가 적절한 질문이었다는 듯 대답했다.

“나가야겠지.”

자고로 남을 밟고 올라가려면 그만한 대가를 짊어져야만 한다는 듯 이정태의 눈빛이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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