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재경은 제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의 폭풍에 휘말린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슬프다거나 절망스럽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엄마가 사기당하기 직전 경찰이 들이닥쳐 큰 빚을 질 위험에서 벗어났고 제 논란을 빚었던 전상국은 하차한다고 들었다.
“정신차려.”
최PD와 통화를 마치고 온 정우가 밝은 화면 그대로 재경의 눈앞에서 흔들어댔다. 그래도 재경의 눈동자는 그 빛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눈 뜬 채로 기절했나?”
정우가 재경의 얼굴을 가까이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PD로부터 한두마디 들은 이후로 잠잠해지더니 아예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정우가 재경의 볼을 콕콕 찍어댔다. 이래도 가만히 있을래?
검지손가락만이긴 하지만 재경의 볼에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정우가 작은 감탄을 흘렸다. 피부가 좋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손가락에 감길 정도로 부드럽고 말랑거렸다. 피부화장도 거의 하지 않는다면서 약간 손만 대고 나오면 늘 얼굴이 하얘졌는데 이래서 재경을 보고 말랑콩떡, 찹쌀떡, 말랑찹쌀떡 같은 말을 붙였구나 싶었다.
정우의 검지가 재경의 말랑한 볼을 움푹 찍어대던 횟수가 5번이 넘어갔을 때 대뜸 재경이 정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예기치 못한 움직임에 정우는 찌르던 걸 중간에 멈추지 못하면서 재경의 볼이 아닌 아랫입술을 푹 누르게 되었다.
재경의 눈동자가 제 입술을 누르는 손가락을 보더니 정우를 향해 올라왔다.
“무슨 짓이야.”
살짝 뭉개지는 발음에도 재경의 언짢음이 물씬 풍겨오자 정우가 어색하게 제 손을 회수했다. “아무 반응도 없어서 장난친거지.”
다른 의미는 없다며 당당하게 굴어야 하는데 양심에 찔린 정우는 괜히 목을 긁어대며 헛기침을 뱉었다.
“너는 왜 전화를 하다 말고 멍하니 있어.”
괜히 재경의 탓을 한 정우가 핸드폰을 톡톡 두드렸다. PD님이 널 얼마나 애타게 찾았는지 아냐는 말에 재경의 표정이 다시 몽롱하게 변해갔다.
“이게 다 꿈인가?”
하루하루 힘들었던 나날 때문에 재경이 저 좋을 대로 꾸고 있는 꿈은 아닐지.
“꿈이 아니고 현실인데.”
“그래, 현실이잖아. 그런데 현실이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지?”
원래 각박하고 차디차게 대해줬었는데 봄날 따뜻한 햇볕을 쬐어주고 있으니 마냥 좋다고 반길 수 없었다. 의심이 몸에 밴 재경은 연신 이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고개 흔드는 인형이야?”
정우가 재경의 머리를 툭툭거리다 쓰다듬었다. 아까는 놀란 감정이 더 커보였지만 조금씩 재경의 표정이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제가 겪은 게 전부 사실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면서 나중에는 아예 눈을 감고 기분좋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버지한테 연락한 게 잘한 것 같기도 하다. 정우는 재경이 조금 더 뒹굴거릴 수 있도록 소파에서 일어났다.
“뭐 마실래?”
정우가 자연스럽게 마실 것을 권하자 재경의 눈동자가 또르르 옆으로 굴러갔다. 제게 닥쳤던 고난이 사라지자 뒤로 미뤄두었던 다른 고민이 슬쩍 자리를 차지해왔다. 정우의 옆모습을 힐끔거리던 재경이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음… 아냐, 이제 일어나야지. 이제 슬슬 집에도 가야 하고.”
재경이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안 줘도 된다는 뜻을 내비쳤다. 호텔에서 나오고 엄마를 보기 힘들어서 정우네 집으로 왔다. 그리고 경찰서도 가고 또 전상국의 일까지 겪다 보니 얼떨결에 집에 갈 타이밍을 놓친 채 정우네 집에서 비비게 되었다. 사람이 염치기 있지,
실은 아침마다 눈을 뜰 때 정우를 보고 편하게 대화를 하면 할수록 재경의 마음도 자꾸 흔들리고 있던 참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유독 정우에게 감정이 많았었는데 그 모든 게 전부 하나의 색으로 뒤덮이는 기분에 살짝 위기감이 들던 참이었다.
재경이 더 신세를 질 수 없다는 듯 일어나자 정우가 그것을 못마땅하게 보았다.
같이 자고 밥 먹고 하던 시간이 만족스러운 건 자신만이었나. 어차피 이틀 뒤면 다시 호텔로 들어갈 텐데.
“그래라.”
그러나 한번 결정하면 쉽게 마음을 바꾸지 않는 재경의 성격을 알기에 정우가 한걸음 물러났다.
“그동안 신세 져서 미안했고 고마웠어.”
“별게 다 미안하다.”
재경이 제 가벼운 짐을 들었다. 그리고 현관문까지 배웅나온 정우에게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서 나가면 혼자서 생각을 좀 해야겠다. 부스스한 정우를 보고도 웃음이 나는 이유를, 그와 친해진 것만으로도 전생에서 서운했던 게 다 녹아버린 이유를, 정우가 서슴없이 다가와 손을 댈 때마다 두근거리는 이유를 되짚어봐야겠다.
“간다.”
재경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움직여 현관을 나섰다. 문이 닫히면서 정우와 완전히 단절되는 걸 느끼자 재경이 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편해져서 그런 거겠지.”
이제 큰 빚을 지지 않게 되었으니 재경의 인생에서 최악의 상황만은 벗어난 셈이었다. 크진 않았지만 제게 빚어졌던 논란도 방치되지 않고 도움을 받은 게 컸다.
“아, 정말 좋다.”
재경이 기지개를 켜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집에 가면 엄마가 있을까 싶은 기대를 하며.
* * *
“네가 왜 여기 있어?”
오랜만에 걷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길을 나섰다가 사람들이 알아보는 바람에 중간에 버스를 타고 온 재경은 집 앞에 서 있는 낯익은 인물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검지를 올렸다.
“왜 이렇게 늦었냐.”
“나야 걷다가 중간에 버스를 타고… 아니, 너는 어떻게 왔는데?”
“택시 타고.”
“왜?”
재경이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어보지만 정우는 옅은 미소만 띄웠다. 재경이 나가고 얼마 안 있어 곧바로 나와 택시를 탔더니 재경보다 먼저 도착했다.
“이제 내가 신세 질 차례야.”
“…그게 무슨.”
“너 내 집에서 편하게 살았잖아. 나도 좀 얹혀 있자.”
정우의 기막힌 논리에 재경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 넓고 쾌적한 집을 놔두고 왜 여기서 머물겠다는 건지.
“어차피 여기서 며칠 있지도 못해. 곧 들어가야 하잖아.”
“그러니까… 말을 말자. 들어와.”
정우의 예상외 행동에 기가 찼지만, 한편으로는 반가운 마음도 들었던 재경이 못 이기는 척 그를 받아주었다. 정우가 재경의 등 뒤에 딱 달라붙었다.
“들어가면 밥부터 먹자.”
“며칠만에 집에 왔는데 먹을 게 있겠냐?”
“그럼 배달음식?”
재경은 툴툴거리면서도 열쇠를 밀어넣으며 착실히 잠금을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도 느껴지는 냉기가 오래 집을 비운 티가 났다. 재경이 먼저 들어가 급하게 보일러부터 켜고 있으니 정우가 뒤따라 들어왔다. 그는 신발을 벗을 생각도 못한 채 집을 둘러보는 걸 멈추지 않았는데 오죽하면 재경이 정우를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별로 볼 것도 없으니까 거기서 밍기적거리지 말고 들어와.”
재경은 지금껏 찬바람을 막아 주고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제집이 창피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래 쳐다볼 만큼 좋지 않은 건 알았다. 그래서 정우에게 그만 구경하라는 타박을 건네자 그가 집을 둘러본 소감을 꺼냈다.
“할머니 집 같아.”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재경이 툴툴거리면서도 바닥에 바로 물걸레질을 했다. 그것을 본 정우는 재경을 따라 걸레를 찾았지만 도무지 보이지가 않아 아예 이불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정우가 이불을 탈탈 털고 들어오니 재경이 그것을 받아 바로 바닥에 깔았다.
“덮어둬야 온기가 빨리 올라와.”
재경은 아예 재 무게도 이용할겸 이불 위에 앉으며 정우에게 아무데나 앉으라고 눈짓했다. 겸사겸사 아까 말한 할머니 소리가 걸려서 그것도 물어볼겸.
“집이 많이 별로지?”
재경을 따라 엉거주춤 이불 위로 올라온 정우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그 이불위의 문양을 훑었다.
“우리 할머니도 이런 이불 덮었는데.”
“놀리냐?”
진짜로 할머니와 같이 덮었던 낡은 이불이었다. 재경은 괜스레 그 이불을 매만지며 정우를 노려보았다. 재경이 어떻게 바라보든 상관없이 정우는 이불을 매만지더니 슬금슬금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보고 싶다.”
끝까지 할머니 소리를 해대는 정우가 얄미워 재경이 이불을 그의 머리까지 덮어버리고 툭 올라와 있는 몸에 주먹질을 해 댔다. 주먹에 별로 힘을 주진 않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정우가 얄미워서 재경이 먼저 포기했다.
배가 고프다니 뭐를 먹일 수 있을까 슬금슬금 싱크대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으니 정우가 슬쩍 머리에 덮었던 이불을 눈 아래까지 내렸다.
재경의 집에 들어왔을 때 할머니 같다던 감상은 진짜였다. 낡지만 관리가 잘 된 집은 금방 온기가 돌면서 정우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대충 손을 뻗어 잡히는 대로 가져와 머리에 댄 정우는 싱크대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재경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즉 재경의 집에 와서 비비적거릴 걸 싶기도 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되는 게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하는 정우의 눈이 가물거리더니 깊이 감겼다.
“쟤는 바닥이 딱딱하지도 않나?”
뒤에서 정우가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걸 느낀 재경은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자기도 처음에 합숙했다가 돌아왔을 때 바닥에서 자는 게 딱딱하다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어젯밤까지 침대에서 잤던 재경은 오늘 잘 잘 수 있을가 생각하며 열심히 손을 놀렸다.
“집에 별거 없어서 그냥 찌개랑…….”
재경이 정우를 돌아보며 말하다가 뒷끝을 흐리고 말았다. 옆으로 누운 채로 집에 유일하게 하나 있는 인형을 베고 잠든 정우를 발견한 것이다.
“잠이 오냐?”
기가 차서 그런지 웃음밖에 안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