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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이돌-92화 (92/125)

92화

엉겁결에 베고 잔 인형을 내려다보는 정우의 부스스한 모습에 재경은 헛웃음을 흘렸다. 볼에 인형 자국이 그대로 찍혔는데 하필 고양이 인형이라 수염 모양이었다.

“너 지금 고양이 같아.”

“왜 이 인형밖에 없어서…….”

정우는 괜히 인형 탓을 하며 제 볼을 문질러보지만 그런다고 붉게 찍힌 수염이 사라질 리가 없었다.

“나 6살 때 할머니가 사 주신 거야.”

재경이 숟가락을 나눠주고 마실 물까지 챙기며 말하니 정우가 다시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낡긴 했지만 어디 하나 터진 곳도 없고 털도 하얀 게 잘 관리가 되어 있었다.

“귀엽네.”

“네 얼굴도 귀여워.”

재경이 정우의 앞에 물컵을 내려주며 받아쳤다. 재경으로는 한쪽 볼만 고양이가 되버린 게 웃겨서 가볍게 던진 말이었다. 그 말에 정우의 다른 볼도 붉어진 걸 모르고.

쑥스러움을 감추려 정우가 숟가락을 든 채 처음으로 밥상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막 한 밥과 김치찌개, 계란말이와 멸치볶음까지 소박하지만 정갈한 한 상이었다.

“이걸 언제 다 했어.”

“뭐 얼마나 걸린다고.”

없는 반찬에 그나마 있는 것으로 만든건데 정우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밥상을 차리고도 신경쓰였던 재경이 마음 놓고 숟가락을 들었다.

정우는 가장 먼저 찌개를 맛보았다. 적당히 칼칼하면서 시원한 게 김치의 맛을 제대로 살렸다. 겉보기엔 들어간 게 많아 보이지 않는데 깊이까지 느껴지면서 입맛을 다셔왔다. 계란말이는 포슬포슬하고 멸치볶음은 달달하면서 짭쪼롬한 게 전체적으로 맛이 좋았다.

“밥 맛있네.”

정우가 정말 맛있다는 듯 찌개를 퍼서 밥에 비벼서 먹는 걸 보고 있으니 재경도 더욱 손을 부지런히 놀리게 되었다. 늘 제가 만들어 먹던 밥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더 잘 된 것 같기도 하고.

한참 밥에 집중하던 둘 사이에서는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러다 어느 정도 배가 찼을 때 정우는 재경의 눈치를 보다가 슬쩍 젓가락을 내려놨다. 밥을 다 먹지 않았지만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낌새를 눈치챈 재경이 왜 그러냐는 듯 눈으로 물었다.

“이제 다 해결됐으니 오디션에 집중할 수 있겠네?”

“아…….”

정우가 왜 제 눈치를 봤는지 알겠다. 이번에 사기꾼을 잡게 되었으니 재경은 더는 오디션에 집중하지 않아도 좋았다. 빚을 지지 않게 되었고 이제 스무 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왜? 하차할까 봐?”

재경이 물어보자 정우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여왔다.

“뭐, 그 생각도 안 한 건 아닌데…….”

경찰서에 다녀온 날 오디션에 관해 당연히 생각해 봤었다. 그리고 줄곧 어떻게 할까 고민했었는데 의외로 답이 잘 나오지 않았다.

재경이 숟가락을 든 채 가만히 있자 정우가 일단 먹으라며 밥그릇을 톡톡 두드렸다. 재경이 다시 밥을 크게 퍼서 먹으며 찌개를 마셨다.

“일단 지켜보려고.”

재경의 무덤덤한 대답에 정우가 한쪽 눈썹만 슬쩍 올렸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자세히 말해달라는 재촉이었다.

“어차피 나 지금 아슬아슬하니까 굳이 하차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내려가겠지.”

실은 자신이 하차한다고 생각했을 때 정우가 어떻게 나올지 생각했었다. 제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좋아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이상하게 하차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 생각은 숨긴 채 대충 말을 덧붙이자 정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거야, 모를 일이지.”

너무 단정 짓지 말라는 듯 이야기했지만, 재경은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다. PD님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이미 투표가 많이 진행되었고 또 재경의 입장이 달라졌다고 해서 관심을 가질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게 재경의 입장이었다.

어쨌든 재경이 굳이 지금 모든 걸 결정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였다. 가만히 있어도 떨어질 수 있다는 것.

*  *  *

주변이 푸르게 물드는 새벽, 정우는 얇은 이불에 의지해 깊이 잠든 재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집에서는 중간에 한 번씩 뒤척였는데 제집이라 그런지 한 번도 깨지 않았다. 고른 숨을 내쉬며 자는 재경의 아기 같은 모습에 정우는 그의 품에 고양이 인형을 살짝 올려놨다.

그러니 잠결에 익숙하게 인형을 끌어안고 얼굴을 비볐다.

“네가 더 고양이 같잖아.”

정우가 재경의 콧볼을 살살 두드리며 속삭였다. 한꺼풀 고민이 덜어진 얼굴은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19살의 소년다운 얼굴이었다. 재경에게 짊어진 무게가 덜어지면서 조금씩 제 나이를 찾아가는 것만 같아서 보기 좋았다.

이제 재경의 고민은 오디션 하나였다. 가수가 되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오디션을 치르는 동안 재경은 제법 재미있어 했다. 거기다 개인적인 욕심으로 재경과 함께 데뷔하고 싶은 정우로써는 포기하지 않고 나아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정우는 슬쩍 핸드폰을 들어 아까 확인하지 못한 톡을 읽었다.

사즉필생 소우니 [재경이형은 어때요? 지금 재경이 형 이야기가 점점 올라오고 있는데 시간만 더 있었으면……] 오후 11:29

하준. Yoon [잘될거야. 재경이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아 재경이만 포기하지 않으면 돼.] 오후 11:31

태연 [정우형이 책임지고 손잡고 와여.] 오후 11:31

재경을 빼고 만든 톡방이지만 주제는 항상 재경이었다. 언제나 재경을 걱정하고 이번에 꼭 붙었으면 하고, 누구보다 재경과 함께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재경은 모르겠지만 그 논란을 반박하는 글도 제법 달렸고 또 연습생들이 개인적으로 힘을 실어주는 SNS도 영향이 컸다.

소운의 말대로 시간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정우는 재경이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냥 기분이 그랬다.

그리고 재경과 함께하게 된다면… 아니, 그 전에 재경에게 제 마음을 표현할 날이 온다면.

정우는 날이 새도록 재경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  *

생방송 무대를 할 18명의 발표식이 시작되었다. 확연히 적어진 수에서 재경은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 사이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27명이 있어야 하지만 남은 수는 25명. 두 명의 부재가 은근히 크게 느껴졌다.

주도원과 전상국의 하차. 전상국이야 일을 벌였으니 그렇다 쳐도 일부러 악의적인 댓글을 달며 선동한 주도원까지 하차시킬 줄 몰랐다. 이전의 순위가 꽤 높았기에 더욱 아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도원이 잘한 건 아니었으니 감당해야 할 몫인 건 분명했다.

“두 명의 연습생이 개인 사정으로 하차하게 됨에 따라 기존의 9명의 탈락이 7명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재경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최PD가 탈락 인원의 수를 조정해왔다. 만약 하차한 연습생의 순위가 18위보다 높다면 19, 20위가 올라오게 되는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합격자를 발표하겠습니다.”

인원수는 줄어도 그 7명의 탈락에 자신이 들어있을 수 있으니 홀의 긴장감은 최대한으로 올라와 있었다.

재경은 이 발표식에서 갑자기 순위가 확 올라갈 거라고 여기지 않았다. 논란이 있었고 그 책임을 진 두 사람이 하차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재경의 상황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정확하게 16명을 먼저 발표한 후 남은 2명을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매번 반복되는 발표식이지만 늘 조금씩 다른 룰을 적용하면서 지루할 틈없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재경이 제 운명이 어떻게 될지 가늠하는 눈 깜짝할 사이 16명의 연습생이 호명되었다.

“이제 마지막 생방송에 진출할 두 명의 연습생이 남았죠.”

뒤늦게 재경이 제 주변을 돌아보니 텅텅 비어있었다. 전부 합격자석으로 가서 앉아서는 재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은 인원은 9명. 그중에서는 같은 조를 했던 연습생도 있었고 한번도 대화를 나눠보지 못한 연습생도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재경은 몰랐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제가 눈에 띌 지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4명의 후보를 먼저 부르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 연습생은... 서재경 연습생,”

바로 직전의 발표식에서도 탈락이냐 아니냐에 불려서 올라갔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재경은 여전히 그 턱걸이의 문턱에 선 게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 표정도 드러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불리는 3명의 연습생이 올라왔고 4명의 연습생을 향해 모든 카메라가 집중되었다. 재경은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여기서 떨어지면 재경은 이제 가수와 거리가 먼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재경이 늘 바라던 평범한 삶. 미래를 새롭게 그려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고 어쩌면 지금 있는 빚마저 갚으면 완전히 홀가분하게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다.

그게 재경의 바람이었다. 누구도 제 얼굴을 알지 못하고 그저 사람들 사이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죽는 것.

그런데 마음 한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피어나고 있었다. 재경이 슬쩍 합격자석을 바라보았다.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정우와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정우와 후회없는 무대를 꾸며보고 싶은 아쉬움은 왜 드는 건지. 쟤랑 같이 올라간 적도 있는데 왜 이러는 걸까?

재경이 카디건의 단추를 매만지는 척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번에 큰일이 지나고 나니 온전히 무대에만 집중하는 시간이 가지고 싶었나 보다. 그걸 제 옆에서 든든하게 받쳐주었던 정우와 함께하고 싶은 것 같았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표현해 보자면.

‘이정우가 좋아지기라도 했나 보다.’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고 싶어 하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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