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94화 (94/125)

94화

라이벌로 지목한 짝끼리 한 방으로 배정받았다. 재경은 한쪽 침대에 제 짐을 정리하면서 정우의 눈치를 보았다. 아까는 좋게 넘어가긴 했지만 마냥 좋게만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정우의 기분이 안 좋을까 싶어 재경의 눈은 정우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정우가 부담되지 않도록 아주 은밀하게.

짐을 다 정리한 정우가 물을 마시더니 한 번 멈칫하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메이크업을 지우고 나오다가 또 멈칫했다.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옷을 갈아입고자 티를 들어 올린 순간, 정우가 고개만 뒤로 틀어 재경을 보았다.

“계속 볼 거야?”

“…어?”

재경이 뒤늦게 정우의 시선을 피해 보지만 이미 다 들켜버린 것 같았다. 정우가 피식 웃는 소리와 함께 옷이 피부를 스치는 소리가 따라왔다.

“계속 봐도 상관없긴 한데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하게.”

“마음의 준비는 무슨…….”

“티는 부담 없이 벗을 수 있긴 하지만…….”

정우의 시선이 허리 아래로 향하는 걸 본 재경이 욱한 마음에 베개를 집어 던졌다.

“이 변태 새끼가.”

재경이 던진 베개를 가볍게 받아낸 정우가 그것을 제 침대 위에 나란히 올려놨다. 더블 싱글 침대에 베개를 나란히 둔 게 마음에 드는지 정우가 히죽 웃었다.

“같이 잘래?”

“너 진짜 오늘 왜 그래.”

“내가 왜 그러냐면…….”

정우가 침대에 엉덩이를 걸터앉으며 짙은 눈썹의 끝을 올렸다. 재경의 선택을 받아서? 남들은 다 피하는 날 가장 먼저 선택해주는 사람이라서? 전부 아니었다.

분위기로 봐서 재경은 자신을 택한 게 지금이라도 기분이 나빠졌나 보고 있지만 반대로 정우는 자꾸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재경이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정우는 슬쩍 침대에서 일어나 재경의 침대로 다가갔다. 정우의 움직임이 조용하고도 거침없이 벌어지니 재경이 경계심을 띄고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라고 온 거 아니야.”

“…자꾸 장난칠 거면 나가라.”

아까 재경이 남몰래 훔쳐본 걸 걸고넘어지는 정우의 농담에 재경의 입꼬리가 삐딱하게 걸렸다. 이제 더는 못 참아주겠다는 으름장에 정우가 헛기침과 함께 화제를 돌렸다.

"생각한 노래 있어?"

정우는 재경이 먼저 자신을 선택했으니 혹시 염두해 둔 노래가 있는지 물었다. 그에 재경이 제 발을 앞뒤로 살살 흔들며 생각에 빠졌다. 아예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다만 어떤 한 곡을 떠올린 건 아니고 그저 정우와 함께 꾸미고 싶은 무대가 있긴 있었다.

“노래는 잘 모르겠어. 근데…….”

재경이 말끝을 흐리자 정우는 침착하게 기다려주었다. 무엇이든 재경이 생각해둔 걸 듣고 싶어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자 재경이 입이 무겁게 열렸다.

“같이 춤을 추고 싶어.”

“춤?”

재경이 입을 다문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란히 서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좋지만 같이 호흡을 맞춰서 움직이고 싶어.”

재경이 조금 더 설명을 덧붙이자 정우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재경과 함께 춤을 추기도 하고 최근엔 발라드로 서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도 함께하는 무대였지만 연습할 때만큼은 서로를 많이 의식하긴 했었다.

정우가 생각에 빠진 동안 재경은 조금 다른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JT에서 데뷔할 때, 재경은 혼자서 연습을 하다가 멤버를 만나 바로 무대에 올라갔었다. 처음부터 손발이 맞지 않았으니 제대로 된 호흡이 나올 리 만무했고 그렇게 망친 기억이 재경의 발목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었다.

재경은 노래만이 아니라 서로의 눈을 보고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마음껏 움직이고 싶었다. 제 움직임에 정우가 맞춰서 따라준다면 그렇게만 한다면 그때의 아쉬움을 많이 달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다가 정우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재경의 정수리가 보이자 무심코 손을 돌어 비볐다가 재경이 뭐냐는 시선에 멋쩍게 내려놨다.

“네가 하자는 게 뭔지 알겠어. 그럼 적당한 곡은 같이 골라보자.”

정우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서 몇 개의 곡을 순서대로 재생하면서 자연스럽게 재경의 침대에 엎어졌다. 정우의 옆에서 헤드에 등을 기댄 체 다리를 모은 재경이 고개를 까닥이며 노래를 들었다.

“팝 쪽으로 가는 건 어때?”

국내곡 위주로 듣던 재경은 머릿속에 그려보는 정우와의 무대가 어딘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한국에는 두 명으로 이뤄진 그룹이 워낙 적다는 걸 알았다. 어떤 무대든 최소 네 사람이 모여 춤을 춰야지만 꽉 채워질 수 있을 것 같기에 재경과 정우 두 사람만으로는 허전함을 메우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건넨 재경의 제안에 정우가 동의하며 다른 플레이리스트를 골라보았다.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어떻게 무대를 꾸미는 게 좋을지 이야기를 해보다가 또 재밌는 노래가 나오면 유쾌하게 나가볼까 싶은 회의를 하며 곡을 정하는 데만 집중했다.

그러다 시간이 제법 흐르고 좀처럼 이거다 싶은 노래가 나오지 않자 재경이 지친 듯 옆으로 누워버렸다. 이미 한쪽에 정우가 누워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잡은 재경이 아예 팔로 머리를 받치며 정우와 눈을 마주쳤다.

“마땅한 게 없다. 그렇지?”

정우의 눈을 바라보는 그대로 재경이 약한 소리를 꺼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런지 적당한 곡에서도 완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재경이 눈만 위로떠서 올려보는 시선에 정우는 숨을 멈춘 채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재경에 대한 마음을 깨달은 지금 생각 외로 가까운 거리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재경의 고양이처럼 유난히 눈동자가 큰 눈이나 매끈한 피부, 그리고 붉은 입술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모든 장면이 감당 못 할 자극이 되어버렸다. 정우가 모른 척 고개를 살짝만 내려도 둘의 입술이 닿을 수 있을 거리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점점 뻐근해지는 심장이 고장나 버릴 것 같았다. 결국 정우가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그것도 모자라 아예 침대에서 내려왔다. 재경은 말도 없이 일어난 정우를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등을 돌렸던 정우가 제 머리를 헝클고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보일 정도로 크게 숨을 쉬는 걸 보고 그를 불렀다.

“이정우, 왜 그래.”

“그…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정우가 여전히 재경을 등진 그대로 손만 뻗어서 휘저었다. 그게 너무 이상해서 재경이 손으로 침대를 지탱해서 반쯤 상체를 일으켰다. 정우는 제 동요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한 거지만 소용없었다. 재경이 정우의 휘젓던 손을 붙잡아 제게 당겼다.

“뭐가 아무것도 아니냐. 너 방금 갑자기…….”

말하던 재경이 정우의 얼굴을 본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온통 붉어진 얼굴은 당황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정우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재경이 멍하니 바라보게 되면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1초, 2초, 분명 초 단위로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데 이상하게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의 끝은 정우가 화장실로 달려가면서 끝이 났다.

“뭐야, 왜 저렇게 얼굴이 붉어진 거야?”

재경이 정우를 떠올리며 중얼거리다가 슬쩍 제 볼을 매만졌다. 은은한 열기가 느껴지는 게 아무래도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것 같았다.

*  *  *

“재경아, 여기야.”

저녁 시간이 되어 좀비처럼 걸어오던 재경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준이 손을 뻗어 재경에게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재경은 별생각 없이 하준이 부르는 대로 걸어가다가 정우를 발견하자 그 자리에 멈췄다.

아까 화장실에 들어간 정우가 나왔을 때 어떻게 얼굴을 볼지 몰라 재경이 방을 나왔었다. 일단 나오긴 나왔는데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 복도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스태프가 한창 카메라를 설치하는 곳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재경이 처음 보인 엉뚱한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지만 정작 재경은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재경의 머릿속은 온통 정우만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계속 정우가 얼굴이 붉어지고 당황한 다른 이유를 떠올려 보려 노력했지만, 생각할수록 한 가지 이유로밖에 수렴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정우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

‘언제부터지?’

아까 갑자기 좋아한다는 마음을 깨달았나 싶지만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결국 어떤 것도 속 시원하게 알아내지 못하고 제 마음처럼 호텔 안을 빙빙 돌다가 밥을 먹으러 내려왔었다.

재경이 정우를 발견했을 때 정우도 재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 얼굴이 붉어졌냐는 듯 평소대로 돌아왔지만 이상하게 재경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나 아까의 일을 의식하는 건 정우도 마찬가지.

그래서 재경은 제가 먹을 메뉴를 받아와서는 어디에 앉을까 하다가 정우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했다. 하준과 소운을 사이에 낀 채로.

“음? 왜 거기 앉아요?”

소운은 맞은편이 아니라 옆에 앉은 게 이상해서 물었지만 재경은 못 들은 척 수저를 들었다. “옆에 앉고 싶었구나.”

소운이 제 마음대로 해석하며 재경에게 물을 건네주는 사이 하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재경과 정우를 번갈아 보았다.

둘 사이가 멀기도 멀단 말이지. 거기다 서로 쳐다도 안 보네?

하준은 둘 사이에 무언가 있음을 짐작했다.

“뭘까? 뭐지?”

너무 궁금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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