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100화 (100/125)

100화

촬영을 앞두고 모처럼 분장실이 바쁘게 돌아갔다. 오늘 컨셉 촬영이 있는 날이라 한 팀씩 맡은 스타일리스트의 손이 분주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멀뚱히 앉아만 있어도 되는 연습생들은 서로의 달라진 모습을 보며 장난을 치거나 칭찬을 곁들이기도 했다.

재경은 정우의 어색한 표정에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어딘가 이상한지 평소라면 계속 거울을 보는 정우의 시선은 그의 머리에 있었다.

“안 이상하니까 그만 봐.”

“이게 어떻게 안 이상해.”

두 번의 탈색을 거친 후 에쉬그레이로 염색한 정우는 제 머리카락을 신기한 듯 만져봤다. 지금껏 검은 머리칼에서 적당한 스타일을 가미한 정도라면 이번엔 촬영부터 얼마 남지 않은 생방송 무대를 위해 대대적인 변화가 들어갔다. 그중 하나가 염색이었는데 제대로 작정하고 탈색한 덕분인지 색이 제대로 빠졌다.

그레이 색이긴 하지만 우아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정우의 이목구비가 눈에 확 띄는 효과를 가져왔다.

“얼굴이 화사해졌네.”

이걸 뭐라고 하더라? 형광 효과? 염색 하나로 아직 화장도 하지 않은 정우의 얼굴이 조금 더 환하고 또렷하게 비쳐졌다. 나쁘지 않은 색감에 재경이 인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만 믿고 있으라던 헤어스타일리스트의 자신만만한 표정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사이 제 달라진 머리에 적응하기보단 포기에 가까운 듯 손을 내린 정우가 거울에 비친 또다른 투영체를 보았다. 자기처럼 오랜 시간을 거쳐서 탈색을 한 재경은 제 달라진 머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넌 안 어색해?”

“나? 음, 나는…….”

재경이 뒤늦게 제 머리를 매만졌다. 손끝에는 에쉬바이올렛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이 한 줌 잡혔다가 스르르 빠져나갔다.

‘어색할 게 있나? 이제야 내 머리색 같기도 한데.’

실은 회귀하고 처음 제 모습을 거울에 비쳤을 때가 제일 놀랐을 거다. 왜냐면 재경은 항상 흰 피부 때문에 밝은 염색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머리칼이 상할 정도로 탈색과 염색을 반복했던 재경에게 새삼 달라진 머리색이 이상하게 다가오진 않았다.

늘 도망가고 싶었고 완전히 잊고 싶다고 생각하던 아이돌 시절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때의 기억이 이런 면에서 재경을 둔감하게 만들고 있었다.

재경이 대답 없이 제 머리를 만지고 있으니 정우도 더 묻기를 포기했다. 대신 그는 재경의 달라진 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이제 막 염색만 끝낸 재경은 마찬가지로 화장기가 없는 맨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뽀얀 피부가 밝아진 머리색에 힘입어 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단정한 눈썹 아래 순하디순한 눈망울과 귀엽게 느껴지는 콧대. 그리고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는데도 붉은 입술이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뭘 그렇게 봐. 이상해?”

재경은 뒤늦게 자기만 자기 모습에 익숙하지 남들에겐 아닐 수 있단 생각이 미쳤다. 그 증거로 정우가 제 얼굴을 보고 있으니 재경이 민망해서 괜히 툴툴거렸다.

“잘 어울려.”

“그런데 왜 그렇게 보냐.”

“얼굴이 하얘서 그 색이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아. 여기서 그 머리색을 할 수 있는 건 너뿐인 거 같기도 하고.”

정우의 감상에 재경이 다시 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확실히 여기저기 염색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바이올렛은 없었다. 재경도 뭐, 잘 어울리는 색으로 해주겠다며 자의는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결과였지만.

“그만 보고 가자.”

이쪽으로 오라는 스태프의 손짓에 재경이 일어나서 정우를 지나쳤다. 달아오른 얼굴을 어떻게 감춰야 하나 고민했는데 다행히 자리를 벗어날 핑계가 생겨났다.

‘쟤는 뭐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거야.’

괜히 재경만 이상하게 생각하게 말이다.

*  *  *

“오랜만이예요.”

메이크업 아티스트, 소이가 환하게 웃으며 재경을 맞이했다. 아무래도 무대에 설 때만 만나다보니까 자주 만날 순 없었다. 소이는 평소에도 하이톤에 신난 표정으로 재경을 반겼는데 오늘은 그 정도가 유난히 쎈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재경이 자리에 앉자마자 소이가 신난 이유를 줄줄 늘어놓았다.

“컨셉안 봤어요. 아니, 어쩜 그런 선택을 할 수가 있어요. 저 어제 잠도 못 잤잖아요.”

“아…….”

컨셉을 보고 그에 맞춰 메이크업을 구상해야 하니까 고생했다는 걸까? 확실히 이번에 재경은 단단히 마음을 잡고 컨셉을 잡았다. 강한 이미지를 위해서 이것저것 생각나는 이미지를 추가해서 적었었다. 재경이 겸연쩍은 눈으로 소이를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

“음? 이 상황에서 왜 사과를 하죠? 난 설레서 못 잤다는 의미였는데.”

“아.”

설레서 잠을 못 잤다니, 재경은 딱히 이해가 가지 않지만 어쨌든 나쁜 의미는 아닌 거 같아서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경의 미적지근한 반응에도 소이는 완전히 달아오른 얼굴로 연신 방긋거리며 웃었다.

“내가 오늘을 위해 정말 많은 준비를 해왔어요. 그러니까 우리 잘 해봐요.”

“...네.”

오래 앉아있어야만 할 거 같은 무서운 말이었지만 소이의 기에 눌려 재경은 그저 순순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눈을 뜨면 적당한 수준으로만 화장이 되어 있길 바라며.

그 후부터는 온전히 소이에게 얼굴을 내맡긴게 전부였다. 눈을 뜨라고 하면 눈을 뜨고 고개를 숙여보라고 하면 숙였다. 간혹 얼굴에 차가운 감촉이 닿아왔지만 그게 뭔지 인식할 겨를도 없이 재경은 그녀가 시키는대로 하기 바빴다. 평소보다 배는 길게만 느껴졌던 시간이었다. 거기다 렌즈까지 낀 눈은 오랜만에 이물질을 낀 느낌 때문에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이러나 저러나 정신이 또렷한 상태로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하는 재경은 그녀에게서 다 됐다는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달콤한 행복은 재경이 막 의자에서 흘러내릴 만큼 괴로워한 때에 들려왔다.

“다 됐어요. 눈 떠볼래요?”

제가 만든 결과물을 한눈에 보고 싶은 소이가 재경의 뒤로 오며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재경이 천천히 눈꺼풀을 올리다가 그대로 시선을 위로 들었다. 그리고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본 순간 시간이 멈춘 듯 꼼짝하지 못했다.

염색처럼 메이크업 역시 얼마나 진하게 하든 익숙할거라 생각했다. 그런 재경의 예상을 깨고 생각보다 많은 변화가 일어난 얼굴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헤어에 맞는 컬러렌즈부터 눈가에 은은하게 감도는 연보라색이 어색하지 않게 잘 어울렸다. 그리고 아랫입술에 걸려있는 게 신기해서 보고 있으니 소이가 기다렸다는 듯 설명해줬다.

“원래 입술 피어싱이 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그건 안되니까 페이크피어싱으로 했어요.”

입찌라고 하는데 알아요? 소이의 설명에 재경은 그냥 멍하니 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제 얼굴이 달라보이다니 아까 정우가 어색해하던 마음을 그제야 공감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진짜 힘 많이 썼으니까 촬영 잘 해야 해요? 평생소장용으로 아깝지 않은 작품을 만들어주세요.”

소이가 다 됐다는 듯 재경에게 한 걸음 떨어지며 일어나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제야 재경이  허둥지둥 의자에서 일어났다. 잊지 않고 소이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재경은 정우가 있을 곳으로 향하면서 생각에 빠졌다.

‘아무래도 이번 콘셉트 때문에 과감한 변화가 계속되는 거 같은데 이러다가는 의상도…….’

“재경아.”

재경이 제 앞을 막아선 누군가의 목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만큼이나 과감한 메이크업으로 달라진 정우를 보고 입이 다물지 못했다. 진하게 바뀐 눈매뿐만이 아니었다. 머리를 넘겨서 얼굴을 완전히 드러낸 정우는 마찬가지로 컬러렌즈를 끼고 평소보다 더 혈색이 들어간 입술이 그를 달리 보이게 했다.

“너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정우.”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재경이 너 악세사리도 잘 어울리네.”

입술만이 아니라 귀에도 페이크피어싱과 귀걸이로 주렁주렁한 걸 가리키며 정우가 재경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게 다 우리 컨셉 때문이래.”

재경이 정우에게 제 얼굴을 고스란히 내보여주면서 입술만 달싹였다. 그에 보기 좋은 입술이 움직이는 걸 본 정우가 살짝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살짝 돌렸다.

“내가 컨셉을 너무 강하게 잡았나?”

재경이 뒤늦은 후회의 말을 끄집어왔다. 의상을 검은색으로 하는 만큼 장신구나 다른 쪽으로 힘을 준건데 생각이상으로 화려해지고 있었다.

정우는 이번만큼은 재경의 생각에 동조하지 못한다는 듯 팔짱을 꼈다.

“다 네가 자초한거야. 그리고 나도 좋다고 따랐으니 이건 감수해야지.”

“그래, 그렇긴 한데…….”

“마침 잘 만났네요. 여기 의상 갈아입고 오세요.”

재경도 이제는 물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중얼거리는데 스태프가 그들을 부르더니 이동식 옷걸이에 걸려있던 의상 두 개를 꺼내서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둘의 얼굴을 한 번씩 돌아본 스태프가 감탄을 내뱉었다.

“와, 이번에 진짜 예쁘게 나오겠는데요?”

아직 의상을 갈아입기도 전부터 눈에 확 띄는 얼굴이라 스태프는 몇 번 더 돌아보더니 마저 일을 하러 떠났다. 그의 감탄에 감사하단 인사도 꺼내지 못한 재경은 의상을 내려다보다가 정우를 돌아봤다.

“내가 일을 좀 크게 벌렸나 봐.”

늘 눈에 안 띄려고 아등바등하던 재경이 울상을 지었다. 그냥 노래에 맞춰서 생각한 것뿐인데 뭐가 이렇게 화려해졌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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