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오늘 방송을 꼭 보라는 PD의 신신당부에 재경과 정우는 연습도 일찍 마치고 시어터 룸으로 향했다. 예전엔 연습생이 많이 전부를 수용하지 못해서 홀로 모이게 한 후 빔으로 틀었지만 이제 남은 인원은 18명이라 충분히 수용 가능해서 그쪽으로 가게 되었다. 물론 그들의 반응을 딸 카메라가 따라붙었다.
“오늘 저번에 본 그 영상이 나오려나 보다.”
“그거 편집된지 얼마 안되고 또 우리 리액션까지 넣으려면 시간이 부족하셨을텐데.”
그동안 재경은 정우와 연습한다고 잊었지만 자신들을 위한 방송을 PD가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 갈 것도 없이 돌아오는 방송에 맞춰서 나갈 수 있도록 타이트한 일정으로 움직인 듯했다. 그게 미안해서 재경은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냈다. 실은 자신들을 신경 써 주는 그 배려가 너무 감사한데도.
“열심히 보면 되지.”
그런 재경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정우가 가만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결좋은 머리카락을 따라 손빗질을 하기도 하고 아니면 반대로 넘겨버려서 엉뚱한 허공에 띄우기도 하는 등 손을 떼지 않으니 오히려 재경이 당황스러워지고 있었다.
이제 머리는 그만 만지면 좋으련만. 거기다 여기는 자신들말고도 다른 연습생도 있었다. 그런데 정우가 제 마음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니 재경이 슬그머니 그의 손을 잡아내렸다.
“그러지마.”
“귀여워서 만진건데.”
“내가 뭐가 귀엽다고…….”
귀여운 건 태연이나 소운과 같은 애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 재경이 흥분해서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가 뒤늦게 가라앉혔다. 막 광고만 나오는 중이라 저들끼리 떠들어대던 연습생이 재경과 정우를 재밌게 구경하고 있었던 거다.
“아무튼 귀엽니 뭐니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재경이 정우에게만 들리게 말하며 눈을 흘겼다. 물론 재경의 협박조차 귀엽게 들린 정우는 픽 웃기만 했지만. 재경은 전혀 조심성이 없는 정우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아예 제 옆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접근 금지를 시키면 얌전히 있으려나 아니면 적당히 마음 좀 감추라는 조언을 건네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이 채 끝나기 전에 스태프 한 사람이 재경을 불러왔다.
“서재경 연습생. 누가 찾아왔는데요.”
곧 시작할 방송을 앞두고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재경은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제게 끈질기게 시선을 붙여오는 정우에게 잘 보고 있으라고 말한 후 시어터룸을 나왔다.
꽤 늦은 시간에 누가 자신을 불렀을지.
‘엄마가 왔나?’
오디션 하는 동안 엄마가 찾아올 이유가 있나, 싶던 재경은 앞에서 서성이는 한 남자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엄마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남자가 누군지 들여다보려니 모자를 쓰고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언뜻언뜻 비치는 얼굴의 일부를 봐서는 아예 처음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다.
“주도...원?”
재경이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애매한 반응을 취하고 있자 아래를 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깊게 눌러쓴 모자를 살짝 들었다. 재경이 긴가민가해하자 주도원이 직접 제 얼굴을 확인시켜 맞다는 걸 보여주었다.
“잠깐 시간 있어?”
주도원이 할 말이 있다는 듯 재경을 바라보았다.
* * *
아무도 없는 곳을 찾다보니 결국 재경의 방으로 오게 되었다. 지금 정우는 방송을 보고 있을테니 누가 찾아올 걱정 없이 마주보게 된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인삿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재경에게 있어 주도원은 제대로 대화 한 번 섞어본 적이 없는 상대였다. 그건 주도원 역시 마찬가지라 그는 연신 방을 둘러보며 어색하게 침만 삼켜댔다.
서로 서먹한 분위기 속에서 그가 어떻게 하차하게 되었는지 알고 있는 재경은 이 자리가 불편하기까지 했다. 제게 좋은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닐텐데 이렇게 만나자고 온 이유가 뭘까.
“저번의 일은 미안했다.”
대뜸 주도원이 머리를 벗는 동시에 재경에게 고개 숙여 사죄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재경은 입만 벙긋거리다가 결국 어떤 답도 해주지 못했다. 실은 주도원이 제게 사과하려고 찾아올 건 생각하지 못했다.
그만큼 둘은 서로를 잘 알지 못했고 주도원이 전상국과 어울리는 걸 봤기에 재경도 은연중에 그를 전상국과 비슷한 유형으로 여기고 있었다.
“너에 대해 잘 모르고 악플을 달았어. 순위권 안에 들어갈 욕심도 나서 널 밀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주도원은 그때 제가 한 잘못을 순순히 털어놨다. 모든 일은 전상국이 벌였지만 주도원은 그걸 다 알고 지켜보았다. 재경을 향한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를 뿐 그저 자신이 올라갈 생각에 재경이 받을 상처를 돌아보지 못했다.
“나한테도 그런 악플 달리면 되게 억울할텐데 너는 오죽하겠냐. 그것도 너랑 같은 연습생으로 참여한 누군가가 그랬으니 더 기분이 안 좋았겠지.”
그 덕분에 오디션에서 하차하게 되었지만 주도원은 그것을 재경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단 악플도 기분이 안 좋을텐데, 라며 주도원이 재경의 입장에서 자기가 얼마나 얄미울지 강조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자신을 몰아대는 통에 재경은 아까보다 더 그가 이러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갑자기 나한테 사과하는 이유가 뭐야? 너, 나에 대해 잘 모르잖아.”
“내가 널 몰라? 아, 그러고보니 내가 앞뒤 설명이 없었네.”
주도원이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박수를 치더니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했다.
“나 이번에 화이트에서 데뷔해. 이번에 전상국이랑 나랑 하차했어서 소속사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거든. 그거 만회하려고 나는 용서해준대. 원래도 데뷔조에 들었다가 오디션에 간건데 다행히 운이 좋았지.”
주도원이 순순히 털어놓는 제 이야기에 재경은 설마 그것 때문에 자기를 찾아온건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 재경의 속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주도원이 크게 손사래를 쳤다.
“그 이유 때문에 널 찾아온 건 아니야. 물론 너도 데뷔할거니까 자주 마주칠텐데 불편한 사이로 지내기도 싫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사과와 별개의 일이지. 그냥 내가 화이트에 몸담고 있다는 걸 말하려고 한거야. 그러니까 널 아예 모르지 않는다고.”
“그래서?”
재경이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미비하게 찌푸렸다. 자신은 화이트에 있는동안 주도원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소속사에서 네 이야기를 종종 들었거든.”
주도원은 아예 털어놓은 김에 모두 말하려는 듯 빠르게 뒷말을 덧붙였다.
“실력이 좋은데 내세우지 않고 가끔 도와달라는 손길에도 거절하지 않고 착실하다는 뭐, 좋은 이야기들뿐이었지.”
주도원이 말하는 그 소문을 재경은 바로 알아듣지 못한 듯 고개만 갸웃거렸다. 화이트에는 워낙 단기간 몸을 담고 있었던터라 누군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다.
“그런데 나는 그게 조금 싫었어. 어쨌든 소속사를 나갔고 내가 들어왔는데 나한테 집중해주지 않는 거 같았거든. 아마 네 소문만 듣고 너한테 질투를 하고 있었나봐.”
어느 순간부터 재경은 주도원에 대한 모든 생각을 버리고 그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실은 주도원의 속을 알아차리기엔 그를 잘 모르고 있었기에 굳이 들여다볼 생각 대신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그러다가 널 여기서 만났으니까 조바심도 났지. 나는 아슬아슬하고 너는 소문대로 다 잘하는 애라서 잘 될 거 같았거든. 정작 너랑 대화를 제대로 해본적도 없으면서 함부로 너를 판단했다. 나 조금 못났지?”
“많이 못났네.”
재경은 대놓고 주도원의 흉을 봤는데도 그는 뭐가 기분좋은지 소리내어 웃으며 재경의 말을 받았다.
“맞아. 그래서 악플을 남겼지. 그것도 확인되지 않는 거짓말을 썼으니 너한테 몹쓸 짓을 했어.”
엄마가 나보고 몹쓸 놈이라며 주도원이 자신을 가리켰다.
“그 몹쓸 짓을 조금이라도 주워담아보고 또 너한테 사죄하려고 온거야. 널 오해해놓고 아무 말도 없이 묻어두기에 찝찝했어. ”
이제야 주도원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재경이 그를 전상국과 어울려다니는 연습생으로 인식하듯 그도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얻어들으면서 제 나름의 이미지를 만들었던 거다.
“나 한 번만 봐주면 나도 꼭 너 한번은 봐줄게.”
“그걸 용서라고 구하는거냐?”
“무릎 꿇고 빌까?”
주도원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려 눈썹 끝을 내렸다. 그는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다소 가벼워 보이는 사과를 건넸지만 말 중간중간 자신을 향한 진심어린 눈빛이 돋보였다. 그는 진심으로 재경에게 사과를 건네고 있었다. 그 방법이 진지하진 않을지라도 주도원은 최대한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사과를 하고 있었다.
주도원이 모든 말을 끝내고도 재경이 아무 말도 꺼내지 않자 분위기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주도원은 괜히 장난스럽게 말했나 하면서도 재경의 표정을 살피기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재경은 그런 주도원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조용히 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주도원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할 때, 재경의 입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