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시어터룸으로 돌아온 재경은 뒤편에 돌아가는 카메라를 확인하면서 슬며시 안쪽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은 재경이 반사적으로 시간을 먼저 확인했다. 앞으로 십여 분만 남은 방송은 한껏 다음 회를 위한 포석을 깔아두고 있었다. 잠깐 그것을 보는 척하던 재경이 힐끗 옆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온 것도 모르고 연신 핸드폰을 보는 정우의 눈빛이 자뭇 심각했다. 대체 뭘 보고 있어서 뒤에 카메라도 생각 안하고 핸드폰을 보고 있나 재경이 슬쩍 그의 핸드폰을 훔쳐보았다. 무슨 반응을 보고 있는 거 같은데 실시간을 올라가는 것 때문에 훔쳐보는 거로는 뭐 하나 읽혀지는 게 없었다.
정우가 뭘 보는지 알아내는 걸 포기한 재경이 그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핸드폰을 보던 정우가 재경의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언제 왔냐는 듯한 눈빛에 재경은 방금이라고 답하며 화면을 가리켰다.
“방송 안 봐?”
“아... 잠깐 볼 게 있어서.”
핸드폰의 화면이 꺼지는 동시에 정우의 얼굴을 비추던 빛이 사라졌다. 그의 얼굴에 굴곡지던 그림자가 사라졌는데도 여전히 오똑한 코와 입술의 음영이 또렷하다고 생각하며 재경이 고개를 돌렸다.
이제 슬슬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팀이 누가 되는지 보고 있으니 막 팀을 짓기 시작할 때가 나왔다. 배치를 일부러 뒤로 넣어서 누가 누구와 팀을 하는지 궁금하게 하는 듯했다.
재경의 예상대로 성사된 어느 한 팀조차 보여주지 않고 끝나더니 예고로도 보여주는 게 없었다. 지금껏 자신들이야 오디션에 직접 참가하고 있기 때문에 몰랐는데 이렇게 보고 있으니 시청하는 입장에서는 다음이 엄청 궁금할 거 같았다.
“재밌네.”
이제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서 프로그램을 잘 알게 된 재경이 보기에도 처음보다 지금이 더 재밌게 느껴졌다.
“재밌게 보셨나요?”
마침 최PD가 나와서 재경의 감상 그대로의 질문을 건네왔다. 평소라면 보고만 있을 재경도 미비하게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에 동조했다. 그리고 다른 연습생들은 조금 더 격하게 반응하면서 PD의 만족을 이끌어주었다.
“그런 의미로 바로 다음 미션을 발표하겠습니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최PD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드리워졌다.
“보다시피 누가 팀이 되었는지 방송에는 예고조차 나가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라이브 방송을 통해서 공개할 예정인데요. 누가 팀이 되었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여러분들이 직접 생각해낸 아이디어로 각자의 매력을 보여주면 됩니다.”
라이브 방송이 미션으로 나올 줄 몰랐다는 듯 연습생들의 얼굴에 다양한 표정이 떠올랐다.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하고 또 편집을 통해 나가는 방송과는 다른 매력에 벌써 기대하는 연습생도 있었다. 그들의 표정을 살피며 PD가 설명을 이어갔다.
“그때 나오는 으뜸 수를 통해 채널마다 차등으로 생방송 무대 초대권을 나눠줄 예정입니다. 그것을 채널을 본 시청자에게 추첨을 통해 주게 될 것이고요.”
생방송에 초대될 방청객을 어떻게 모을까 싶었는데 의외의 기획에 연습생들이 진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예를 들어볼까요? 100명의 시청자가 있는 채널에서 10장의 초대권이 나간다면 확률은 10분의 1이 되겠죠? 그리고 1000명의 시청자가 들어온 채널에서 100장의 초대권이 나간다면 확률은 마찬가지로 10분의 1이 됩니다. 일단 당첨될 확률은 어느 채널에 들어간다 해도 어디가 꼭 불리하다는 건 아니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겠죠.”
PD는 친절하게 시청자를 그대로 방청객으로 끌어모았을 후의 반응을 알려주었다.
“가장 큰 시청자를 끌어모은 채널에서 온 시청자가 고스란히 방청객이 되어 여러분을 응원할 힘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을 봐주러 들어오는 시청자가 당첨될 확률은 비슷하게 나누겠지만 생방송이 있는 날 아무래도 인기가 많았던 채널에서 온 팬들의 수를 무시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재경이 PD의 설명을 들으면서 정우를 힐끗 바라보았다. 정우 혼자만으로도 팬이 많겠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별 힘이 되지 못할테니 이번 미션에 유리할 거 같지 않았다. 오히려 비슷한 순위를 가져간 상위권의 팀이 유리할 거 같은데 그걸 알고도 그냥 진행할까 궁금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10위 권 밖인 한 연습생이 손을 들며 말했다.
“그러면 순위가 높은 팀에게 유리한 미션이겠네요?”
“그걸 우리가 생각 안 했을리가 없죠. 각 팀별로 평균 순위를 잡아 역순으로 라이브 방송 시간을 배정합니다. 가장 불리한 팀에게 많은 시간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이 정도면 얼추 균형이 맞춰질 거 같은데 어떤가요?”
“좋아요.”
모두가 만족스러운 듯 PD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오디션을 진행하는 내내 느꼈지만 누구 하나를 중심으로 몰아주는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미션까지 세세하게 신경써서 해줄테니 아마 시간적으로 충분히 배려해서 나눴을 게 분명했다.
“다들 표정을 보니 내가 잘하고 있구나. 그럼 마지막 미션이니만큼 잊지 못할 추억 만들길 바랍니다.”
연습생들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본 PD의 인사를 끝으로 공식 일정이 모두 끝났다. 이제 각자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거나 아니면 연습을 이어가도 좋을 자유시간이었다.
* * *
방으로 돌아온 재경은 먼저 씻겠다고 들어간 정우를 기다리며 의자에 앉았다. 아예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재경은 아까 들은 미션을 되짚었다.
“라이브 방송?”
무슨 내용으로 방송을 꾸밀지 전부 재경과 정우의 몫이었다. 지금까지는 PD가 하라는 대로 따라갔는데 갑자기 배의 선장이 되어 방향키를 잡은 기분이었다. 라이브 방송이라는 바다를 만나 순항하게 될지는 전부 자신들이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달렸으니 뒤늦게 부담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재경이 한창 무슨 방송을 해야 하나 생각하는 사이 그의 앞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재경이 고개를 들자 씻고 나와 뽀송뽀송한 정우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긴 속눈썹에 물방울을 달고 온 정우는 그것을 털어낼 생각도 없이 재경에게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까 재경이 정우가 다른 데 집중하고 있어서 물었던 그 말투가 고대로 돌아왔다.
“너 라방해본 적 있어?”
재경은 고민할 것도 없이 방금까지 고민하던 걸 털어놨다. 이 배가 순항하기에 꼭 필요한 공동 선장이니 정우의 생각이 궁금했다. 하지만 재경의 기대와 달리 정우는 그의 앞에 앉으면서 작게 고개를 젓는 게 다였다.
“그럼 뭐로 방송할지 생각해 봤어?”
“아니.”
실은 같이 미션에 대해 들었고 정우도 씻으면서 간간이 생각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재경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상황에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뭘 하면 좋을까. 먹방?”
자기가 말하고도 재경이 엎드린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맛있게 먹질 못하는데 무슨 먹방을 할까.
“아니면 너 뭐 잘하는 거 있어?”
재경이 고개만 들어 정우를 올려다보았다. 정우는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없다는 듯 고개만 저었다. 실은 정우나 재경이나 연습생 생활이 길었기에 춤, 노래 말고는 특별한 취미가 없긴 했었다. 미래에서 온 재경은 더더욱 일정에 쫓기듯 살아와서 제 개인적인 시간을 누리지도 못했고.
“그럼 요리라도 할까? 별로야? 그럼 진짜 할 게 없는데.”
재경이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걸 하나 물어보고 싶은 충동에 그랬다. 그러나 곧 재경은 제 핸드폰과 손을 덮어오는 커다란 손에 모든 걸 멈췄다.
정우가 재경의 손을 덮은 그대로 눈을 마주쳐왔다.
“꼭 뭘 하지 않아도 되지.”
“라방에서 아무것도 안 할 순 없잖아.”
“내 말은 어떤 콘셉을 정하는 것도 좋지만 꼭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거야. 그냥 우리 모습을 보여주면 되잖아.”
“연습하는 거?”
“그것도 좋고 여기서 생활하는 모습도 좋고.”
“그게 재밌을까?”
재경이 약간 회의적인 눈으로 물었다. 그들의 일상이야 이미 카메라가 잔뜩 찍어가서 내보냈다. 편집으로 재밌게 나왔을 그것을 라이브 방송으로 보여줘 봐야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정우는 전혀 그렇지 않은지 재경의 손을 여전히 꼭 잡은 채였다.
“우리가 직접 소개해 주고 설명하는 방송은 나간 적이 없었지.”
“그러네?”
점점 정우의 말에 홀리듯 끌려가는 재경은 몇 가지 상상을 더해 보며 점점 마음이 기우는 걸 느꼈다. 그러다 반쯤 동의와 비슷한 뜻을 내비치자 정우가 대답 대신 재경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이게 괜찮다는 거야?”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그사이에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바꾸고 아니면 이거 그대로 하자.”
재경은 어느 일상을 라이브 방송으로 보낼지 손꼽아 보았다. 연습하는 것도 찍고 밥 먹는 것도 찍고, 시간이 얼마나 주어질지 모르지만 이것저것 하다 보면 금방 지나지 않을까?
“그런데 아까 누가 찾아온 거야?”
한결 고민이 가시면서 표정이 가벼워진 걸 확인한 정우의 물음에 재경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주도원.”
“주도… 원?”
의외의 인물이 나오자 정우가 되물었고 재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말았다. 자기도 정우처럼 주도원이 만나러 올 줄 몰랐기에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사과하러 왔어.”
재경은 정우에게 이 방에서 나눴던 주도원과의 대화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