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미션이 발표되고부터 정확히 3일 후 연습생들 사이에 발표식과 같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들은 서로 어떤 콘텐츠로 방송할지 물어보면서 은근한 경쟁심을 드러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다른 팀과 겹치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바빴다.
그들 사이에서 연습에 매진해온 재경은 뚱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후드티에 달린 넉넉한 주머니에 손까지 넣고 있으니 영락없이 아이와 같아보였다.
“왜 그렇게 귀여운 표정으로 보고 있는거야?”
재경의 어깨에 누군가의 팔이 올려지는가 싶더니 하준의 웃음기 섞인 인사가 흘러나왔다. 하준은 아예 재경의 머리에 모자까지 푹 씌워주면서 장난을 걸었다. 재경은 순순히 하준이 씌워준 대로 모자를 쓴 채 입술만 웅얼거렸다.
“다른 팀 보니까 우리 팀은 너무 준비를 안 한 거 같아서요.”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니 너무 늦었는데? 오늘 방송이잖아.”
오전 11시에 동시에 라이브 방송이 시작되고 차등으로 부여받은 시간에 따라 팀당 다른 시간별로 종료되었다. 그런데 재경이 방송하는 당일에 와서 준비를 안 한 건 같다고 하니 이제라도 뭘 하라고 조언하기엔 너무 늦었다.
“지금 10시 36분이니까 24분 남았네?”
“알아요.”
재경도 후회해봐야 늦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연습에 올인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거기다 틈틈이 정우와 어떤 식으로 방송을 이끌어나갈지 대화했으니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기를 위로하던 재경이 눈만 위로 떠서 하준을 보았다. 이번에 가장 짧은 방송시간을 받은 것치고 표정이 좋아보이는 하준을 보고 있으니 문득 궁금해졌다.
“형은 뭐해요?”
“나? 나는 관찰일기?”
“관찰일기요?”
“보면 알아, 아니다. 우리 같이 하니까 못 보지? 아쉽네.”
하준은 뒤늦게 알아챈 듯 말을 바꾸지만 재경을 놀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제목만 듣고는 뭔지 몰라서 알쏭달쏭하기만 한 재경을 두고 하준이 두어번 머리를 토닥여주고 떨어졌다.
“그럼 나도 준비하러 가야 해서.. 방송 잘 해.”
“형도 잘하세요. 소운이도 잘 챙겨주고요.”
재경이 살랑 손을 흔들어주며 하준을 보내고 나자 얼마 있다가 정우가 나타났다. 후드를 입은 재경과 다르게 깔끔한 면티를 입은 정우는 별다른 메이크업을 하지 않았는데도 이목구비가 돋보이고 있었다. 뭘 입어도 반짝 빛이 나는 정우의 얼굴은 반칙이라고 여기면서 재경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저기는 요리하나 보다.”
요리사 복장을 떡하니 입고 돌아다니는 한찬형을 보고 있으니 그쪽 방송을 하지 않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큰 메이크업박스를 들고 가는 다른 사람도 보던 재경은 점점 제 빈 손이 신경쓰였다.
그때 재경의 앞으로 커다란 다람쥐가 뒤뚱거리며 지나갔다. 자세히 보니 인형옷을 입은 태연이었다. 그의 뒤로 용이 따라가고 있으니 대충 봐도 어떻게 방송할지 보였다. 어쨌든 나름의 준비를 철저히 했다는 게 보이자 재경이 가라앉은 눈썹 그대로 정우를 보았다.
“우리 잘 할 수 있을까?”
정우는 재경의 불안을 단숨에 날려버리려는 듯 가벼운 미소로 화답했다.
* * *
스태프의 신호에 따라 방송이 시작되면서 의자에 앉아있는 재경은 두손을 공손히 모으고 배꼽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서재경입니다.”
재경은 어색한 표정을 짓는 제 얼굴을 보다가 그 옆으로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을 보았다.
[재경 하이~]
[오늘을 기다렸어]
[재경이가 있는 채널이 여기였구나]
[목소리 너무 감미롭다 감미로워]
일일이 읽을 수 없을 정도지만 얼추 인사인 건 알아봤다.
“일단 제가 이렇게 혼자 인사를 하게 된 건…….”
재경의 눈동자가 카메라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정우를 힐끔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직접 선택한 저의 팀원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한사람만 두고 누구와 팀이 되었는지 소개해주기로 하면서 그 역할을 재경이 맡게 되었다. 그건 재경이 직접 정우를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재경은 바로 정우의 이름을 말하기 전에 잠깐 숨을 골랐는데 그사이에 채팅창이 아까보다 더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누군지 빨리 알려줘 숨넘어가겠어]
[솔직히 재경이 짝으로 떠오르는 건 한 사람인데...]
[이번만큼은 같은 팀이 아니었으며 점수 갈리는 거라며ㅠㅠ]
[설마...]
[빨리 나와라]
몇몇 채팅을 읽은 재경이 제 머리를 덮은 모자를 그대로 만지작거렸다. 아까 하준이 씌워 주었을 때는 조금만 쓰고 있다가 벗어야지 생각했는데 이후로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딱히 누구도 재경에게 모자를 벗으라고 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더욱 떠올리지 못했고. 재경은 뒤늦게 모자를 벗으려다 혹여 머리가 눌렸을까봐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마지막 라운드의 주제가 케미 그리고 라이벌이잖아요. 둘이서 한 무대를 꾸밀 수 있다고 생각해서 선택했어요.”
여전히 숨가쁘게 올라가는 채팅장 스크롤을 보던 재경은 이제 슬슬 소개해줘야 할 타이밍이라 여겼다.
“저와 같이 무대를 꾸밀 제 팀원을 소개합니다. 나와주세요.”
하준이었다면 훨씬 자연스러웠을 진행을 다소 버벅거리며 내뱉은 재경 덕분에 채팅 창에 귀엽다는 말이 뒤덮였다가 정우가 나타난 순간 오류가 난 듯 채팅 창이 잠깐 멈췄다. 그것도 잠시 맹렬한 속도로 올라가는 스크롤에 재경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정우를 가리켰다.
“제가 선택한 팀원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정우입니다.”
정우가 재경의 옆자리에 앉아 묵직한 저음으로 인사했다. 정우의 등장으로 술렁이던 채팅창은 숫제 눈물로 도배되고 있었다.
[대체 왜 그랬어ㅠㅠ]
[둘이 같은 팀이면 둘 중 하나는 떨어지는거야?]
정우가 그들의 불안을 읽었는지 바로 반응해주었다.
“꼭 현장투표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저는 재경이랑 같이 올라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정우가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에 채팅창이 아까보다 한결 밝아지며 이제 둘이 팀이 된 걸 칭찬하고 있었다. 재경은 너무도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에 이제 뭐 하나 읽을 수 없게 되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인터넷을 하지 않으니 채팅 창이 움직이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재경 대신 어느 정도 익숙하게 창을 들여다보던 정우가 매끄러운 진행을 이어갔다.
“저희가 이번에 라이브 방송을 하면서 무엇을 할까 고민했는데요. 실은 자신있게 내보일 게 없었어요.”
[왜 없어. 얼굴 있잖아]
[노래 춤 얼굴]
[목소리만으로도 좋아]
[거기 그대로 숨만 쉬고 계셔 줄래요? 우리가 알아서 즐겁게 지켜볼게요]
“하하, 좋은 말씀들 감사합니다. 그래도 정말 숨만 쉬고 있을 순 없으니까요.”
정우가 채팅을 읽고 꺼낸 말에 재경이 아리송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기한테도 설명을 해달라는 표정이었지만 그게 귀엽기만 한지 정우는 재경의 모자를 쓴 머리를 토닥여줬다.
“별것 없지만, 우리의 일상을 소개해 주려고 합니다.”
[오늘 계속 방송해줄거예요? 그럼 난 찬성이고]
[방송에서 본 케미를 이렇게 확인시켜주려고?]
[오늘 여기 뼈를 묻겠어요]
“편집이 안 되니까 방송보다 재미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갈까요?”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재경이 눈치껏 따라 일어났다. 어떻게 저 불붙은 듯 움직이는 채팅을 보고 말할 수 있는지 정우가 신기한 재경은 한발 늦게 따라가는 게 고작이었다. 이럴 걸 정우가 예상했는지 모르지만 다행히 재경에게 어떤 부담도 주지 않았다.
“우리가 생활하는 방이랑 연습실을 보여주고요.”
먼저 앞장서서 걸어간 정우가 문을 열면서 마저 설명을 이어갔다. 자신을 찍을 카메라를 고려해서 문을 잡고만 있는 것 같았지만 재경이 나가고 나서야 정우가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카메라맨이 급히 문손잡이를 잡으며 둘의 모습을 담았다.
정우는 재경보다 늦게 나온 것치고는 빠르게 움직여 엘리베이터 버튼을 잡았다. 그리고 카메라를 보고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손짓을 보였다. 기계음과 함께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을 잡은 채 정우가 기다리자 이번에도 역시 재경이 먼저 들어갔다. 그리고 열림버튼을 누른 채 정우와 카메라맨을 기다렸다.
둘이 다 타고 나서야 닫힘버튼을 누른 재경은 방을 가는 길이 오늘따라 멀다고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방에서 촬영을 시작할 걸 그랬나, 생각하는 동안 정우가 재경의 삐뚤어진 모자를 매만져 예쁘게 만들어주었다.
재경이 그런 정우의 손길에 괜히 상체를 그에게 기대며 장난쳤다. 지금 방송중이라는 부담감에 괜히 딴짓으로 신경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 재경을 익숙하게 지탱하는 정우는 아예 모자 밖으로 삐져나온 앞머리를 정리해줬다.
“머리 눌렸겠지?”
재경이 작은 소리로 속삭이자 정우가 그것을 들으려고 재경에게 가깝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재경의 걱정을 대신 확인해주려는 듯 그의 모자 안으로 손을 넣어 머리를 가볍게 매만졌다.
“괜찮을 거 같은데.”
정우가 눌리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그 모습이 그대로 카메라에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둘이 잠깐 신경이 멀어진 사이 채팅창은 거센 파도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엄훠?]
[묘한 냄새가 나는데]
[우릴 잊은 거 같은데?]
[쉿!]
[거 조용히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