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107화 (107/125)

107화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건만, 체감시간만은 절대 짧지 않았던 라이브 방송을 마친 재경은 연습실 바닥에 힘없이 누워 있었다.

마지막에 연습실로 잡아 무대를 준비하는 것을 조금 보여 줬는데 노래도 없이 무반주로 춤을 춰서 약간 코믹한 분위기로 끝난 게 조금 아쉬웠다. 물론 춤추는 데에 신경 쓰느라 채팅창에서는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 모르지만.

오디션 프로와 다른 느낌의 라이브 방송이라 아닌 척해도 은근히 긴장했었다. 그 탓에 밥을 먹는데도 잘 먹히지 않았고 연습도 제 마음대로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허술했던 거 같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채팅창이 올라가는 걸 보면 꽤 많은 시청자가 들어와서 뿌듯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온갖 감정이 뒤섞였다. 그저 자신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게 무슨 재미가 있었을까 싶은 마음에 다른 콘텐츠를 준비할 걸 그랬다 싶었지만 이미 라이브 방송은 다 끝났다.

이제 미션은 다 끝났고 무대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PD의 연락을 확인한 재경이 핸드폰을 든 팔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마지막…….”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을 때 제가 정우를 소개하던 그 장면이 자꾸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었다. 확실히 제가 정우를 택했을 때 놀라던 사람이 많았다. 현장 투표로 결과가 갈릴 테지만, 그걸 알면서도 정우를 택했다. 가장 인기가 많으니 보나마나 재경에게 오는 표수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정우를 택했다. 애초에 데뷔하는 게 염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지막을 잊지 못할 무대로 꾸미고 싶었다. 그런데 문득 불쑥 치밀어오르는 생각은 이번 무대에 모든 걸 걸지 말 걸 그랬나 하는 후회였다.

이미 제 등수가 데뷔조에 들어가지 못할 걸 알면서도 그랬다. 어쩌면 정우와 마지막 무대가 아니라 앞으로도 같이 올라갈 수 있는 건데 싶은 미련이 있었다. 하지만 그 미련이 얼마나 쓸데없는지 잘 알기에 재경은 후회도 미련도 금방 지웠다.

“어차피 내가 데뷔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번에 생방송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재경은 충분히 운이 좋았다. 주도원과 전상국이 빠진 자리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집에 있었을 것이다.

돌고 돌아 지금에 만족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자 재경이 억지로 몸에 힘을 줬다.

“으으.”

상체를 일으키며 찌뿌둥한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고 있으니 마침 자리를 비웠던 정우가 돌아왔다.

“바로 연습하게?”

“지금까지 누워있었어. 슬슬 시작해야지.”

정우가 다른 사람을 보러 간 사이 재경은 가만히 누워서 뒹굴거리기밖에 안 했다. 그래서 하는 말에도 정우는 고개를 저으며 재경의 쭉 뻗은 손을 잡아끌었다.

“잠깐 이리와 봐. 보여 줄 게 있어.”

“지금?”

정우가 대답 대신 재경의 다른 손마저 잡으며 그대로 끌어당겼다. 덕분에 아예 자리에서 일어난 재경은 뭐 때문일까 생각하면서도 정우의 단호한 분위기에 못 이겨 그를 따라나섰다.

“어딜 가려고?”

“PD님께 말하고 잠깐 빌렸어.”

“어디를?”

“여기.”

정우가 가리키는 곳은 방송을 보던 시어터룸이었다.

“영화라도 보게?”

재경이 반쯤 장난치듯 말을 건넸지만, 정우는 별로 개의치 않으며 그 룸 안으로 들어갔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둑한 공간에서 정우는 재경이 넘어지지 않게 잘 지탱해 주었다.

“여기 앉아봐.”

무언가를 보여줄 생각으로 재경을 먼저 자리에 앉힌 정우가 가져온 노트북을 제 무릎 위로 올렸다. 그리고는 몇 번 자판을 두드리는가 싶더니 선을 꼽아 화면과 연결시켰다.

파랗던 화면에 노트북에 뜬 창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재경은 지금껏 정우가 보여준다는 게 뭔지 확인하려고 바쁘게 눈동자를 굴렸다.

“이게 다 뭐야?”

메신저를 깔아두었는지 거기에서 한 대화창을 들어간 정우는 사진이 모여있는 곳을 클릭했다.

“너 인터넷 잘 안 하잖아. 당연히 반응도 안 봤을 거 같아서.”

반응이라는 게 오디션 방송에서 나오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는 거라는 걸 바로 알아들었다. 재경은 아이돌로 활동하던 당시 악플에 지켜 인터넷을 멀리하는 습관이 있었고 그건 회귀한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덕분에 정우의 말대로 인터넷을 보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딱히 감출 것도 아니라 재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가 하나의 사진을 선택했다.

“거기다 뭐 보라고 말해도 안 볼 거 같아서 그냥 우리가 캡처했어.”

“우리? 캡처?”

누구를 뜻하는지 몰라 재경이 되물었지만 정우는 노트북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그것보단 내용부터 봐 봐.”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건 캡처한 사진의 내용이라는 듯 정우가 은근히 재촉하자 재경도 순순히 그것을 살펴보았다. 얼추 대화로 봐서는 반응을 말하는 것 같았다. 잘 쓰진 않지만 무엇인지 알고 있는 SNS에 올라온 제 이름에 재경은 홀린 듯 글을 읽어내려갔다.

*  *  *

넘사벽@QDF3DSR

나 #서재경 연습생으로 만난 적 있었는데 실력 좋고 성실한 애였오.

이번에 잘됐으면 좋겠다

└나 재경이랑 같은 학굔데 되게 조용해

└학교도 잘 나오다가 갑자기 안 나와서 무슨 일이지 했는데 오디션에 나오고 있더라..

*  *  *

재경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같은 학교라고 올라온 댓글로는 누군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거기다 자신을 잘 아는 듯 말하고 있으니 학교에 제가 대화를 튼 애가 있나 싶기도 했다. 어쨌든 자신의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저게 끝이 아니야 계속 봐.”

정우가 곧바로 다른 캡처를 띄웠고 그건 오디션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동안 올라오는 실시간 채팅창이었다.

재경에 대한 응원과 자꾸 탈락 위기에서 겨우 올라오는 걸 안타까워하는 듯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게… 다 뭐야?”

이젠 정우가 적당히 읽었다 싶을 때마다 말없이 사진을 넘겨주는 동안 재경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중얼거렸다.

“네게 아직 희망이 있다는 자료들이지. 다들 시간이 될 때마다 모아서 한곳에 모아줬 어.”

모은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전부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재경은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어떤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실은 어떤 말을 하려고 해도 막상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번에 너한테 씌운 루머가 벗겨지면서 팬도 많아졌어. 그리고 이전엔 지켜만 보던 팬들이 하나둘 널 응원하기 시작했다는 글도 많이 올라왔고.”

정우의 말을 들으면서도 바로 이해가 되지 않는지 재경은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껏 제게 달린 댓글이라고 해봐야 악플이 대부분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아이돌이 되었지만, 시작이 다르다는 이유로 모두 재경을 제대로 돌아봐 주지 않았다. 거기다 재경이 실수하거나 또는 기가 죽어 있는 모습조차도 전부 좋지 못한 반응을 불러내곤 했다.

당연히 회귀한 지금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박혀 버린 가시 같은 상처들이 재경에게 두려움을 주고 있었다.

이제껏 올라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을 응원한 힘이 있는데. 그걸 분명 저번에도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재경은 계속 모두를 외면하고 있었다.

과거의 아픔이 아직 낫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제는 너를 응원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아졌다는 걸 알아야 해, 서재경.”

정우는 재경의 마음을 어루만지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여왔다. 그는 재경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지금 이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모든 미션이 끝나고 마지막 무대만을 남겨두고 있는 지금 재경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은 이벤트를 만든 것이다.

이제 떨어질 거라는 생각으로 무대를 준비하지 않기를. 어떻게든 자신과 한 팀이 되어서 함께 데뷔하는 꿈을 꿀 수 있기를.

정우의 바람은 그대로 재경에게 흘러 들어갔다. 그의 마음을 느낀 재경이 복잡한 마음을 그대로 내보였다.

“나는 지금까지 아슬아슬하게 올라왔고 또 이번에 현장 투표를 한다면…….”

“당연히 내 팬이 더 많겠지만 그것보단 재경이 네 실력이 우선이야.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낀다면 그 마음을 그대로 전해주겠지. 라이벌인 네게 이런 말을 해야 한다니.”

정우가 약간은 너스레를 떨며 재경의 마음속에 희망을 심어 주려 했다.

“말했지? 나는 너랑 데뷔까지 할 거라고.”

이미 정우는 재경과 끝까지 갈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몇 번이나 느꼈고 들었다. 그러나 재경은 그에게 그러자는 대답을 한 적이 없었는데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재경아.”

정우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재경의 휘감았다. 그는 아예 재경의 손을 잡고 제 얼굴에 가까이 가져왔다.

“나는 네 목소리가 좋고 네 춤이 좋아. 네게 호감이 생긴 이유는 분명히 네 재능이었던 거야. 그렇게 널 바라보다가 네 재능만이 아니라 모든 걸 좋아하게 된 거고.”

갑자기 나오게 된 고백에 재경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런 재경의 반응을 알면서도 정우는 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고백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러면 후회할 거 같아서.”

정우가 재경의 손끝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가 뗐다. 그러면서 눈은 재경을 향한 그대로 말했다.

“널 좋아해. 그러니까 난 무조건 너와 같이 데뷔해야겠어.”

“그거 말하려고 저걸 보여 준 거라면…….”

“나랑 내기하자. 내기 조건은 이긴 사람이 원하는 걸 들어 주기. 네가 데뷔조에 들면 내가 이기는 거야.”

“그 내기 소리는 왜 또…….”

“그리고 내가 진짜로 널 이기면, 그리고 너도 내가 싫지 않다면 나랑 사귀자.”

이건 숫제 재경도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 걸 안다는 자신감이 깔린 말투였다. 재경이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정우에게 흔들리는 마음을 그대로 들켜 버린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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