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108화 (108/125)

108화

아직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재경을 두고 정우가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이번일로 재경의 불편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싶은 바람이었다.

“아, 나때문에 안되나?”

분명 댓글을 하나씩 읽어보면서 어딘가 감회가 남다른 눈빛이었는데 정우가 중간에 틀어버렸다. 참지 못하고 고백하는 바람에 재경을 한껏 당황시키고 말았다. 거기다 늘 장난처럼 언급하던 내기에 제 진심을 담았다.

“그런 표정은 반칙이잖아.”

화면을 보는 재경의 얼굴에 온갖 파스텔톤의 감정이 떠오르는 걸 보니 갈증이 났던 것 같다. 참을 수 없었고 재경의 감정을 제가 가지고 싶었다. 정우가 슬쩍 재경이 있는 시어터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슬슬 오디션이 끝나가니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할 때였다.

“재경이는?”

하준과 소운, 건후와 태연이었다.

“아직 안에 있어.”

“우리가 보낸 사진들 보고 있는거야?”

“계속 보고 있기에 나 혼자 조용히 나온거야.”

정우의 대답에 네 사람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나눴다.

“그동안 열심히 모은 보람이 있네요.”

소운이 뿌듯한 표정으로 문을 힐끔거렸다. 몰래 안으로 들어가서 재경의 표정을 훔쳐보고만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느라 소운의 손이 꼼지락대고 있었다.

“그러게. 이걸로 재경이가 욕심이 생겼으면 좋겠네.”

하준이 잘 참고 있는 소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실은 모여있는 모두가 서로 경쟁해야 할 사이면서도 말이다. 그러다 문득 태연이가 궁금한 게 떠올랐는지 물었다.

“재경이 형 욕심 생기면 어떻게 나올까요?”

지금까지 욕심이 없는데도 춤노래 뭐 하나 빠지지 않았는데 여기서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태연의 물음에 누구도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직접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  *  *

재경은 직접 사진을 넘기며 하나하나 댓을 읽어보았다. 방송이 나올 때 올라온 반응을 딴 것도 있고 SNS도 있으며 어느 카페에선지 가져온 게시판 글도 있었다. 다양한 루트로 모은 것들을 보다보니 일부러 좋은 내용만 추렸다는 걸 알면서도 그게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참 웃기게도 악플로 받아온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은 외면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여든 말이 재경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고 있었다. 어느 순간 사진을 넘기는 손이 멈추고 재경은 무릎을 끌어모은 채 화면을 바라보았다. 오늘 라이브 방송을 하면서도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는 채팅을 보지 못해 버벅거렸는데 이렇게 고정시켜두고 보니 영화를 보듯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재경은 무릎에 턱을 괸 채로 눈만 위로 떠 화면에 뜬 글을 읽고 또 읽었다.

[저렇게 하얀 사람은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내 23년 인생이 부정당한 느낌이다]

재경이 손등으로 제 볼을 훔쳤다. 아무래도 저 사람은 화장에 속은 거 같다.

“나는 하얗지 않아요.”

[재경이 행복한 김밥말이로 만들어야만……]

김밥말이라니? 엉뚱하게 튀어나온 말 같은데 조금 웃기긴 하다.

“김밥말이면 김밥말이지 행복한 김밥말이는 뭔가요.”

[우리 맬렁콩떡아기백설기고양이깜찍이 데뷔해]

[재경이 귀여워... 입안에 넣어서 우르르하고 싶다..]

[우리 말랑콩떡아기고영이 데뷔해서 사랑받으며 행복하게살자ㅜ]

이상하다. 왜 자꾸 자기를 고양이라고 하는 거지?

“나는 안 귀엽다니까요? 소운이랑 태연이가 있는데 왜 자꾸 나를…….”

재경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말한다고 누가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대답하지 않고는 괜히 간질거리는 속을 긁을 방법을 모르겠다. 거기다 이상한 건 또 있었다. 기껏해야 방송에 조금 나온 자신의 모습을 보고 저렇게 응원해주는 거긴 한데 제 무엇을 보고 저렇게 힘을 주고 싶어할까?

딱히 누구보다 뛰어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재경의 의문을 해결해줄 사람이 여기 아무도 없었다. 그저 애정만 주는 시청자의 메시지뿐이었다. 재경은 작게 고개를 젓다가 눈에 걸리는 문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끝까지 걸어가면 누구보다 빛나는 길이 있을 거야]

“끝까지 걸어가면?”

재경이 소리 없이 입속으로만 말을 중얼거려보았다. 끝까지라는 말이 이 오디션만을 의미하는건지 아니면 그 이상인지 모르겠다. 그런 미래를 알 수 없는 막연한 길이 정말 빛이 날까? 이미 한 번 겪어본 제 미래는 어둡고 암울했는데 다시 걸어간들 빛이 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저들의 응원에도 쉽게 힘을 얻지 못하는 건 이미 겪었던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일 거다. 점점 자기방어적으로 흘러가는 사이에 불쑥 튀어오른 생각은 엉뚱하게도 아까 정우가 불쑥 내밀어왔던 말이었다.

자신을 좋아한다며 데뷔조에 들어가면 사귀자는 조건을 달았던 그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고백말이다.

"고백 안 한다고 해 놓고. 그렇게 며칠 사이에 말을 바꿔도 되는거야?"

그래놓고는 민망한지 어떤지 잠깐 다른 걸 보는 사이에 홀랑 나가버렸다.

그게 무슨 내기 조건이라고, 순 지 위주로만.

정우가 이겼을 때 사귀자는 조건이었고 재경이 이겼을 때는 아예 듣지도 않았다. 전혀 공평하지도 않았고 또 재경이 한다고 하지 않았는데도 멋대로 결정된 듯 굴었다. 그래서 무시해야 옳지만...

사귀자니, 비밀 연애라도 하자는 거야 뭐야.

보통의 남녀 사이어도 비밀 연애하다 걸리면 큰일인데 정우는 정말 무모한 제안을 해왔다.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제가 만약 불쾌했다면 이런 말을 꺼낸 즉시 정우의 말을 잘라냈을 거다.

내가… 좋아하기 시작한 걸 언제 알아챈 거야.

정우의 집에서부터 다른 사람과 달랐던 묘한 감정의 정체를 재경도 안지 얼마 안 됐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리 당당하게 나오는데도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했지. 아주 솔직히 정우의 고백이 싫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연애도 해본 적이 없어서 어설플텐데.

재경은 심술궂게 툭툭 내뱉었지만 그와 반대로 기분이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우와 함께 끝까지 걸어갈 수 있다면 제 달라진 미래는 빛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막연한 기대가 올라왔다.

*  *  *

“자 순위 집계가 끝났습니다.”

잠들기 전 최PD는 잠깐 할 말이 있다며 모두를 불러냈다. 그때까지도 시어터룸에 있었던 재경은 뒤늦게 나타난 정우를 보고 어색한 미소를 지은 후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떤 표정으로 그를 볼지 모르겠어서 그랬다.

그런 재경의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지 정우가 픽 웃고 말았다. 자신의 고백에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인데 자신을 외면한다고 불쾌할 이유가 없었다. 대신 재경의 동글동글 잘생긴 뒤통수를 보고 있는 사이 연습생 대부분이 모였다.

“이거 발표식과 다름없는 긴장감이 감도네요.”

최PD가 연습생들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돌아보며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가장 많은 초대권을 가져갈 팀을 발표하겠습니다. 바로.... 서재경, 이정우 팀입니다.”

재경은 자신의 이름이 들렸지만 그대로 흘려나간 듯 반응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정우의 팬이 많긴 하지만 컨텐츠도 약하고 또 제 인기가 크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우의 큰 손이 재경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버리는 통에 PD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재경의 얼떨떨한 눈빛을 마주친 정우가 환하게 웃었다. 아까 어색했던 분위기는 순위발표로 다 날아가버렸다. 생각보다 단순한 재경의 성격을 꼬집는 대신 정우는 잘됐다며 그에게만 들리게 달콤한 목소리를 흘렸다. 재경이 괜히 간지러운 귀를 긁고 있으니 최PD는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보충 설명을 이어갔다.

“둘의 케미가 돋보였다 게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 같네요. 지금도 라이브 방송의 일부 짤이 만들어져 돌아다니고 있으니 심심할 때 한번 검색해보세요. 그럼 2등 팀을 발표하겠습니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의 수다라는 거창한 제목까지 달았던 윤하준, 이소운 팀입니다. 연습생들의 비밀을 그렇게 낱낱이 털어놓았다고 하던데요?”

자기네 팀이 2등이라는 걸 알고 좋아하던 하준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연습생들로부터 시선을 피했다. 아마 여기 있는 연습생은 물론 탈락한 연습생까지 다 끌어와서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저런 사람이야. 겉보기엔 친절하고 어떤 고민도 다 들어줄 것처럼 굴어놓더니 아주 음흉한 속을 감추고 있었어.”

태연이 건후에게 귓속말하듯 크게 중얼거렸다. 그에 연습생들의 웃음이 터졌다. 이후로도 최PD는 순위를 발표해나갔지만 재경은 제게 들이닥친 결과에 다른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1등이라는 거지?”

재경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케미는 무슨 케미였지?”

재경이 정우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듯 보았다. 하지만 정우는 자기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실은 채팅의 대부분을 읽었기에 시청자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여기고 어떤 부분을 좋아했는지 알지만 굳이 재경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런건 나중에 재경과 사귀면 천천히 알려줘야지.

어디까지나 데뷔하고 나서 일어날 일을 정우는 곧 다가올 미래처럼 여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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