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생방송 리허설을 하루 앞두고 마지막 연습에 매진하는 재경이 노래가 끝나자마자 털썩 주저앉았다. 거친 호흡을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진 재경은 턱에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는 게 고작이었다. 시큰하게 올라오는 땀 냄새에 인상을 찌푸린 재경이 거울에 반사된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자정이 넘었어.”
재경이 마지막 곡을 연습할 때 나갔던 정우가 돌아왔다. 그는 재경의 얼굴에 차가운 음료수를 대주었다. 재경이 눈을 감고 시원함을 느끼다가 천천히 음료수를 받아들었다. 땀을 많이 흘려서인지 계속 목이 말랐는데 마침 이온 음료라니 반색하며 뚜껑을 땄다.
“언제 잘 거야?”
“조금만 더 연습하고.”
“내일 리허설인데 적당히 조절하는 게 낫지 않아?”
음료수를 마시면서 점점 고개가 젖혀지는 재경이 그대로 눈동자만 옆으로 굴려 정우를 보았다. 자신과 별 차이 없는 연습량으로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놓고 적당히 하라는 잔소리가 나오고 있으니 재경의 눈이 저절로 가늘어졌다.
그 눈빛을 그대로 읽은 정우가 재경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제 앞섶을 펄럭였다. 재경과 마찬가지로 땀에 젖은 몸은 한 곡을 쉰다고 해서 나아질 게 아니었다.
“무리하는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나 뛰는 만큼 너도 뛰었어.”
“네가 뛰니까 뛰었지.”
“나랑 팀이니까 맞췄다는 말이야?”
재경이 다 마신 음료의 뚜껑을 닫으며 묻는 말에 정우가 입술을 씰룩였다.
“꼭 한팀이라서가 아닌 거 이제 너도 알지 않아? 네가 계속 연습하니까 나도 하는 거야.”
제 마음을 다 알면서 모르는 척.
정우의 은근한 타박에 재경은 괜히 빈 음료수병만 만지작거렸다. 당연히 정우도 무대를 앞두고 긴장해서 더욱 연습에 매달렸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때문이라고 하니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재경은 팔뚝으로 얼굴의 땀을 닦는 척 은근슬쩍 가렸다.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으면 더 불안할 거 같아서 하는 거야. 적어도 잡생각은 안 떠오르잖아.”
“하긴 내일 리허설하면서 다른 팀은 어떤지 살펴보게 될 거고 나는 잘했나 돌아보고, 또 연습 조금 더 할 걸 싶은 후회도 들겠지?”
정우가 곧바로 재경의 마음을 그대로 꺼내 온 듯 굴었다. 그의 말대로 연습이 부족하다는 후회만큼은 하기 싫어서 더욱 늦게까지 하는 이유도 컸다. 재경이 팔을 내리며 다시 음료수병을 보았다. 500ml를 한 번에 비웠는데도 아직 갈증이 다 풀리지 않았다. 저녁 식사도 먹는 둥 마는 둥 넘기고 연습에 더욱 매진했더니 몸이 뒤늦게 스펀지처럼 물을 빨아들이고도 부족한 모양이다.
그런데도 이대로 가서 씻고 누우면 곧바로 잠이 들 거 같지 않았다. 내일은 리허설이고 모레는 진짜 생방송인데. 이 무대가 지금 제가 쥐고 있는 마지막 티켓일지도 모르는데.
“너는 먼저 들어가. 나는 조금만 더 하고 잘게.”
어차피 잠이 부족한 건 틈틈이 쉬어두면 괜찮다. 그런 요령 정도야 남들보다 더 잘 아니까.
재경은 앞으로 얼마나 더 연습할 수 있을까 가늠하는데 순간 앞이 깜깜하게 번해버렸다. 정우가 재경의 눈을 가려버린 것이다.
“뭐야.”
“시계 그만 봐.”
정우의 커다란 손은 눈을 넘어 이마와 코까지 덮어버렸는데 그만큼 온기가 크게 다가왔다. 재경은 손을 밀어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조금만 더 닿고 싶은 마음에 고민할 때였다.
“네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모습 처음인 거 알아?”
그전에 게으름을 부렸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무대에 올라가서 충분히 잘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연습했다. 대신 남는 시간엔 다른 사람을 도와주곤 했는데 남을 도와준다고 시간을 쓰던 것과 제 연습에만 빠진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남을 가르칠 때도 적당히 엄격하고 타이트하다 싶었는데 자기 자신에게는 더했다. 거기다 오늘 하루만 미친 듯이 연습하는 것도 아니었다. 시어터룸을 나온 순간부터 재경은 하루가 멀다하고 연습에 연습을 더했다.
오죽하면 재경이 드디어 제대로 할 마음이 생겼다며 좋아하던 소운이 나중엔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볼까.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대는 재경을 본 정우가 그의 눈을 꾹꾹 눌러댔다.
“그렇게 매일 한계까지 몰아대다간 나중에 큰일 나.”
“이번에만 그런 건데 뭐.”
“이번에만 추고 말 거야?”
“그래도… 이번 무대에 올라가면 다음은 또 언제 될지 모르니까.”
“다음은 없다는 듯이 말한다?”
재경의 변명을 물고 늘어지는 정우의 말투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분명 데뷔까지 같이하자고 말했던 정우에게 이번 무대는 앞으로 있을 수많은 무대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더욱 재경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투였다. 정우의 불만을 읽은 재경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확실하게 주어진 무대에 먼저 집중하자.”
미래는 그때 생각해도 좋다는 식에 정우가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참았다. 어쨌든 지금에 집중해야 하는 건 맞으니까.
정우가 작게나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조해오자 재경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조금만 더 하고 자자.”
이제는 생방송만 남았다.
* * *
“밖에 사람들 장난 아니네요. 진짜 많아요.”
미리 메이크업을 끝내고 잠깐 나갔다 온 태연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도 생방송이라고 말만 들었지 막상 닥치고 나니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태연은 아직 메이크업 중인 재경과 정우 사이로 들어왔다. 두 사람에게 메이크업을 해 주던 아티스트들이 태연의 말에 귀엽다는 듯 웃으면서 바라보았다.
“우리 진짜 사람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해요.”
“그래.”
정우는 눈을 감은 채로 간단히 대답했고 입술에 색을 씌우는 재경은 말없이 눈웃음을 그렸다. 평소에도 워낙 귀염성 있게 굴면서 자기가 막내라는 걸 강조하더니 오늘은 정말 막내나 다름없었다.
“형들은 안 떨려요?”
태연은 너무나 태연하게 구는 두 형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는 지금 심장이 너무 떨려서 혹시나 실수하면 어쩌나 싶은데 두 형은 아닌가 보다. 그러자 막 입술에서 붓이 떨어진 재경이 살포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나도 떨려.”
태연처럼 눈앞에 사람들이 있어서 떨리는 건 아니었다. 지금껏 재경은 사람들의 실망과 미움의 눈빛을 받으며 무대에 섰었기에 그때의 잔재와 같은 기억이 남아있는 것이다.
오디션에 참가하고부터는 단 한 차례도 음 이탈이 나지 않았다지만 그렇다고 안심하기엔 일렀다. 오늘까지 잘해야 한다는 약한 부담감이 재경의 어깨를 누르고 있기에 그것이 고스란히 떨림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재경의 손을 잡는 것도 모자라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의 악력으로 휘어 감았다. 재경이 제 손을 잡은 손을 한 번 보고는 그대로 시선을 올리자 언제부터인지 눈을 뜬 정우가 있었다.
“떨지 마. 정 부담되면 나만 보고 해.”
정우의 올곧은 시선은 재경을 흔들리지 않게 꽉 붙잡아주는 힘이 있었다. 거기에 재경의 마음을 녹여주는 온기까지 더해지자 거짓말처럼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재경이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제 리허설 때처럼만 하자는 생각을 되새기는 동안 다른 손 위로 또 다른 온기가 느껴졌다. 재경이 번쩍 눈을 뜨자 태연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마주쳐왔다.
그제야 지금 이 자리가 어딘지 깨달은 재경이 아차 싶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이 이상하게 보진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은 제 할 일에 여념이 없었고, 옆에 있던 태연만 슬쩍 재경의 다른 손을 잡은 모양이었다.
“형, 나도 형 손 잡아 줄게요.”
태연은 재경의 손을 잡다 못해 장난스럽게 조물거렸다. 그 귀여운 행동 덕분인지 아니면 정우의 행동이 유난스럽게 비치지 않은 것 때문인지 재경은 마음 놓고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고마워.”
재경이 손을 뒤집어 태연과 손을 맞잡으며 살짝 힘있게 흔들었다. 그리고는 태연을 찾는 건후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태연의 손을 놔주었다.
“나는?”
이제 정우에게 잡힌 손도 좀 놔줬으면 하는 마음에 돌아본 재경이 대뜸 질문을 받자 당황스러운 듯 굴었다. 정우가 재경을 향해 아예 몸이 반쯤 틀어있는 채로 빤히 보고 있었던 거다.
“나는 왜 고맙다고 안 해?”
태연에게는 손도 맞잡아 주고 고맙다고 인사도 해 주는데 자기한테는 안 해 줘서 서운하다는 투였다. 그런 정우의 불만을 들은 재경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빼냈다.
“너도 고맙다.”
그리고 억지로 인사를 끄집어내자 정우의 눈썹이 씰룩였다. 전혀 마음이 담기지 않은 인사라 그냥 넘어갈까 말까 고민하는 게 얼굴에 여실히 드러났다.
“다 됐어요.”
재경이 정우의 삐딱한 시선에 어떻게 피해야 하나 싶을 때 다행히 자리에서 벗어날 핑계가 생겼다. 아티스트가 옆으로 물러나면서 생긴 빈 공간으로 미끄러지듯 내려온 재경이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자마자 부리나케 사라졌다.
그 빠른 움직임에 다른 아티스트가 웃음을 터트리며 정우의 볼에 퍼프를 두드렸다.
“저 참가자는 진짜 귀엽네요.”
“미워할 수 없을 정도로 귀엽긴 하죠.”
그러니 자기가 이렇게 빠져들었지.
정우는 언제 불만이었냐는 듯 태연한 눈으로 재경의 뒷모습을 보더니 피식 미소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