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115화 (115/125)

115화

재경은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는 걸 깨닫고 힐끗 화장대 위를 살폈다. 전상국이 다가올 때를 대비해 뭐든 쓸 만한 것이 없나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나 적당한 게 없었다.

한 뼘 길이의 붓이나 아이섀도우, 파운데이션 통 같은 건 여기서 하등 쓸모가 없었다. 그나마 메이크업 박스 정도라면 모를까.

그에 반해 전상국은 품에 숨겨왔던 무기가 있었다. 재경은 전상국의 손에 들린 흉기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너, 그런 거 휘두르면 진짜 끝이야.”

“이미 끝이라고 했잖아. 참고로 이건 널 죽일 용도는 아니고 그냥… 성형 정도라고 생각해.”

다신 무대에 서지 못할 정도로만 손봐줄게.

전상국이 제가 가져온 흉기를 장난스럽게 가지고 놀며 재경에게 점점 더 다가왔다. 그리고는 예고도 없이 재경을 공격했다.

전상국이 휘두르는 흉기에 재경이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흉기가 어디로 날아오든 가장 보고하고 싶은 곳으로 손이 움직인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아 흉기의 궤적을 놓쳤지만 재경은 급한 대로 몸을 숙였다.

머리 위로 스쳐가는 바람에 전상국이 제 배를 노렸음을 알았다. 다시 한 번 전상국이 재경을 공격하려고 할 때였다.

“전상국!”

강한 외침에 재경과 전상국의 시선이 문을 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재경은 전상국에게서 거리를 벌렸고 음료수를 사온 정우가 빠르게 안으로 들어왔다.

“이게 무슨 짓이야.”

“상관하지 말고 가라.”

전상국은 조금도 흥분한 기색없이 정우에게 지금이라도 나갈 것을 요구했다. 그에게는 지금 재경이 아닌 다른 이는 전부 관심이 없다는 투였다. 그러나 정우가 단단히 자리를 잡고 서자 전상국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아니면 너도 같이 망하든가. 그래, 그것도 좋겠다.”

전상국이 그대로 손에 쥔 흉기를 정우를 향해 세웠다. 그리고 정우를 먼저 처리하려는 듯 그에게 몸을 돌려 달려갔다.

“이정우.”

재경은 왜 이렇게 되었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상국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떻게든 그의 허리를 잡아 정우를 공격하지 못하게 막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좁은 대기실에서 재경이 전상국에게 다가가는 것보다 전상국이 정우를 공격할 범위에 들어서는 게 더 빨랐다.

재경이 애타는 마음에 손을 뻗었다. 정우는 안 된다. 이제야 알았다.

‘나 때문에 정우가…….’

정우가 자신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했던 것도 그저 서운하게만 여겨왔었다. 제게 닥친 상황이 버거웠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데 정우마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그렇게 서러울 수 없었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왔을 때 정우에게 반감이 든 마음 그대로 그를 외면했다. 겉으로는 그가 오디션에서 1등을 했으니까, 같이 있다가 카메라에 찍혀봐야 안 좋으니까 같은 핑계따위를 대며.

그러다 깨달았다. 과거로 돌아온 정우는 자신을 밀어내기 전이었고 따라서 그를 미워할 명분이 없음을. 그래서 그와 어울렸고 보지 못했던 정우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가만히 있다가 순위가 올라간 게 아니었다. 매일 가장 늦게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정우는 묵묵히 그 시간을 쌓아왔던 거다. 그렇기에 그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재경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했던 것도 다 당연했다.

자신은 못난 마음으로 그를 대했는데, 오히려 정우는 재경을 향해 올곧은 애정만 보여주었다. 그게 못내 미안하고 고마웠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전상국의 흉기가 정우의 몸에 닿을 때쯤 재경이 손을 뻗은 그대로 멈췄다. 한순간에 일어난 격한 소음이 사라지면서 세상이 멈추고 시간이 멈춰버렸다.

“정우야?”

재경이 너무도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실은 정우가 들을까봐 더욱 소리를 죽인 것도 있었다. 왜냐면, 크게 불렀는데 정우가 반응하지 못할까봐. 그 두려움이 재경을 한껏 옭아맸다.

만약 정우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재경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제가 다시 아이돌이 되고 싶지 않다며 이 오디션에만 들어오지 않았어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재경이 한 걸음 다가갔을 때였다.

“크읏.”

목이 매이는 듯한 신음과 함께 누군가가 쓰러지고 말았다. 그게 정우인 줄 알고 달려가려던 재경이 중간에 멈춰섰다.

무너져 내린 건 의외로 전상국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눈만 깜박이며 바라보았다. 전상국의 등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가 무너지면서 전부 드러났다. 전상국이 휘둘렀던 흉기는 저 멀리 소파에 떨어져 있었고 정우의 손엔 방금 무기로 썼을 게 뻔한 캔 음료수가 들려있었다.

흉기는 소파로 날아가서 소리가 나지 않았나 보다. 재경이 살짝 옆으로 걸어오자 정우가 활짝 열려 있는 문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 외부인 들어왔어요.”

그의 외침을 들은 스태프 두명이 들어와 전상국의 팔을 하나씩 붙들었다.

“너… 전상국이잖아?”

그중 한 스태프가 전상국임을 알아보더니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일단 나와. 나와서 보자.”

둘은 전상국을 억지로 일으켰다. 덕분에 재경은 전상국의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의 한쪽 눈이 퉁퉁 부은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 흉기도 있어요.”

정우가 친절하게 소파에 떨어진 흉기를 가리켰고 그것을 발견한 스태프의 얼굴이 더욱 흉흉해졌다.

“큰일이 벌어질 뻔했네. 미안하다. 너희 둘은 곧 부를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스태프의 다정한 음성이 전상국이 아닌 정우에게 향했다. 정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 명의 스태프가 전상국을 끌고 나갔다.

“그걸로 눈을 때린거야?”

재경은 눈을 맞은 것치고 힘없이 끌려나가는 게 이상해서 물었다. 그러나 정우는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잘 모르겠어. 눈이 엄청난 아킬레스 아니었을까?”

그렇게 말한 정우는 한쪽에 캔 음료수를 내려놨다. 재경은 정말로 눈이 아파서 그런건가 싶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이 붓기는 했는데 캔에 찍힌 자리로 봐서는 눈알에 직격타를 가하진 않은 거 같았다.

어쨌든 정우가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하아.”

깊은 숨을 내쉰 재경은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팔다리가 후들거리고 몸에 힘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자꾸 웃음이 나왔다. 정우가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방금까지 전상국이 자신을 협박하던 그 모든 게 아무렇지 않아졌다.

이제 재경도 인정해야 했다. 정우가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제 마음이 온전히 혼란스럽기만 한 건 아니었다. 몇 번 정우를 향한 제 마음을 돌아보긴 했지만 그래도 그와 다른 관계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이젠 그게 다 뭐라고, 그저 정우를 좋아하면 되는 거잖아. 싶었다.

항상 피하고 외면하고 도망치고. 제 겁쟁이 같은 행동이 마음마저도 외면하고 있었던 거다. 그것을 인지하자 재경은 홀가분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제껏 피해온 자신을 인정하고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생겼다.

“뭐야, 웃는 거야?”

정우가 상체를 살짝 숙여 재경의 표정을 확인하더니 어이없다는 듯 굴었다. 재경은 그대로 정우에게 몸을 기울였다. 덕분에 재경의 몸을 지탱하게 된 정우가 다시 그를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재경이 반쯤 장난으로 물었다.

“놀랐어?”

“당연히 놀라지.”

“하긴 나도 놀랐어. 전상국이 널 공격하는 걸 본 순간 피가 다 식는 기분이었지.”

정우가 비슷한 경험으로 금세 동감한다는 듯 굴었다. 방금까지 분명 심각했던 상황에 정우는 시종일관 가볍게 반응하며 가라앉은 분위기를 올리려고 노력했다.

그의 노력이 참 기특해서 재경은 웃는 그대로 그에게 말했다.

“내가 널 좋아해, 정우야.”

자신을 안은 몸이 굳은 것을 느끼면서도 재경은 다시 한숨을 쉬며 그에게 더 기댔다.

“그래서 많이 불안했던 거 같아. 네가 다칠까 봐… 나 때문에 다칠까 봐.”

“재경이 너…….”

“네가 잘못된다고 생각하니까 엄청 무서웠어.”

그건 한때 재경 자신이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을 때와 다른 공포였다. 제가 좋아하는 누군가가 자신 때문에 잘못된다는 거. 그건 정말 두 번 겪고 싶지 않은 무섬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니까 나도 널 많이 좋아한다고.”

“와, 이렇게 고백을 받네.”

정우가 재경의 몸을 기댔던 팔을 뒤로 둘러왔다. 그대로 몸을 끌어안으며 기뻐하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재경의 몸을 놔주었다.

“그럼 나랑 사귀는거야?”

정우가 재경의 눈을 마주치며 답을 요구해왔다. 그가 기쁘게 휘어진 눈을 보며 재경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아니지.”

“…….”

방금까지 고백해놓고 사귀는 건 아니라니. 정우의 눈동자가 급정색으로 굳어버렸다.

“우리 내기했잖아.”

재경은 웃으며 잊고 있던 사실을 깨우쳐주었다. 제 마음을 고백한 건 고백한 거고 우리는 아직 오디션 중이었다.

“그래…….”

정우는 과거의 자신에게 왜 그런 내기를 걸었냐는 듯 이를 갈면서도 한발 물러섰다. 어쨌든 재경과 잘 되어보고자 노력한 일 중 하나니 받아들이려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런 순간을 예상하지 못해서 더 어려운 길로 돌아간다며 정우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러니까 계속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인 것이다. 그런 정우를 보던 재경이 무심코 고개를 내젓다가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보았다.

‘저거…….’

저게 뭔지 자세히 살펴보던 재경의 눈동자가 옆으로 움직이며 정우의 다리를 보았다.

‘무릎에 달려 있던 장식용 벨트가 왜 풀려 있지?’

그러고 보니 아까 전상국과 부딪혔을 때 정우의 한쪽 다리가 안 보인 거 같기도 하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