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117화 (117/125)

117화

자리로 돌아온 재경을 따라 연습생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왔다. 재경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자리에 앉으면서도 카메라를 의식해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무대를 보는 척 고개를 돌리고 있자니 이내 옆자리의 정우가 재경의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

재경은 정우를 돌아보지 않고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엄마와 짧은 시간에 나눈 대화치고는 속이 후련했다. 엄마에게 평생 받지 못할 사과를 받기도 했고, 평생 쌓아 두기만 했을 감정도 풀었다.

그 과정에서 엄마에게 따로 살자고 한 것은…….

엄마에게 사과를 받았으니 이제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동안 제게 조금 더 집중하고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기회를 원했다. 원래도 성인이 되면 엄마와 떨어질 생각을 했었지만 그래도 말하고 나니 속 시원했다.

한편으로는 엄마에게 너무했다 싶은 생각도 있었다. 이게 과한 게 아닌게 일단 저질렀다는 게 여러 생각이 들게 했다.

“나 잘한 걸까?”

재경의 낮은 중얼거림에 정우가 힐끗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재경이 정우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나 잘한 거겠지?”

밑도 끝도 없는 재경의 질문에 정우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응. 잘했어. 잘한 거야.”

“정말?”

“응.”

정우의 한마디에 재경은 작게나마 마음에 남았던 미련과 후회를 훌훌 털어냈다. 정말로 엄마를 떠올려도 아무렇지 않아질 때 그때 연락하고 싶었다. 편안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며.

“정우야.”

재경이 정우에게 살짝 몸을 기울이며 그를 불렀다. 그에 정우의 눈이 커지면서 눈동자에 카메라가 담겼다. 지금 방송 중인 걸 알지만 신경은 온통 정우에게 향했다.

“나 홀로서기 할 거야.”

재경은 이번에도 정우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건네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재경의 기분 좋은 웃음에 정우가 잠시 바라보더니 그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재경이 홀로서기 하는데 있어 자신이 옆에 있어도 된다는 간접적인 유혹과 같았다.

“어차피 나랑 같이 있을 건데, 뭐.”

“음?”

잠깐 사이에 목이 말라 음료수를 마시던 재경의 눈동자가 도르르 정우에게 향했다. 그 작은 몸짓에 어딘가 함성이 들려온 거 같았지만 자기 때문인 건 몰랐다. 그저 정우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아 바라보니 정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재경이 잠시 정우를 보다가 물어보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팀이 무대를 끝마치며 곧 단체 무대와 축하 무대만 남는다. 그리고… 대망의 최종 발표식이 시작될 것이다.

*  *  *

모든 무대가 끝나고 축하 무대가 진행될 동안 18인의 연습생은 급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처음에 뽑았던 하얀 셔츠에 남색 카디건, 베이지색 바지와 트윌리였다. 재경이 카디건의 단추를 잠그는 사이 먼저 다 갈아입은 정우가 트윌리를 걸어주었다.

재경은 제 목 아래에서 움직이는 정우의 손길을 느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우는 재경의 트윌리는 물론 흐트러진 옷까지 정리해 주며 말했다.

“긴장하지 마.”

“안 했어.”

재경이 입술을 삐죽였다. 똑같이 연습생이고 발표식을 앞두고 있는데 자기는 아닌 척 여유로운 게 거슬렸다.

“가자.”

정우가 재경의 어깨를 두드리며 뒤를 가리켰다. 재경은 정우의 앞에서 아닌 척했다가 뒤늦게 숨을 몰아쉬었다.

“재경아, 같이 춤추자.”

그때 재경을 지나친 하준이 어깨를 짚어오며 속삭였다. 뒤이어 걸어온 건후는 재경의 등을 툭 쳤다.

“떨어지면 우리 기획사 들어와. 너 잘해서 대표님도 좋아할걸.”

“그건 건후 형이 걱정할 게 아닌데… 재경이 형은 무조건 붙을 거거든.”

바로 뒤에 붙어있던 태연이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건후의 등을 밀어댔다. 그리고는 재경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이따 봐.”

태연의 인사까지 받고 있으니 재경은 괜히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을 외면하던 또 꺼려 하던 예전 멤버들이 지금은 같이 데뷔하자는 응원을 하고 있다. 그 달라진 관계가 새삼 신기하고 좋았다.

“서재경.”

정우가 재경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도록 살짝 팔을 당긴 정우는 잠깐 재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올라가자.”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지만 정우의 표정에 재경이 그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 어딘가 장난기가 담겨 있었다. 왜 그러나 싶다가 정우를 다시 재촉할 새도 없이 올라가라는 신호를 받았다.

“이제 최종 b-nine의 멤버가 될 연습생을 발표합니다!”

MC의 진행에 공간이 떠나갈 듯 함성이 울렸다. 재경은 귀가 먹먹해지는 느낌에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데뷔만을 앞둔 상황. 재경은 합격과 탈락의 기로에 서서 MC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기울이려고 했다.

“잊지 않았지?”

정우가 재경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둘 다 뽑히면 내가 이기는 거야.”

아직 무대 위인데 무슨 소리를. 당황한 재경이 제 옷을 매만졌다. 마지막 발표식을 앞두고 마이크를 차고 올라왔다. 그런데 그사이 벌써 잊어버린 것처럼 굴고 있었다. 정우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들어갈까 잔뜩 긴장했다.

‘조용히 해.’

재경이 조용히 하라고 입술만 달싹였다. 그런데 정우가 반응이 없어 인상을 찡그리다가 그의 손이 다가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정우는 재경의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많은 사람이 보는 앞이었다. 잡힌 손을 빼려고 힘을 줘보지만 그럴수록 손가락이 더욱 깊게 얽혀들어 갈 뿐 빠지지 않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정우는 다른 손으로 재경의 얼굴에 맺힌 땀을 훔쳐주었다.

“꼭 같이 가자.”

단체를 마지막 무대로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몸은 서늘한 손을 반갑게 맞았다. 재경은 그 손길을 피하려 고개를 돌렸다. 적당히 좀 치댔으면.

그러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화면을 보자 자신과 정우가 비치는 걸 발견했다. 정우가 제 손을 잡고 땀을 닦아주는 게 고스란히 찍히고 있었다. 정우도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가 자신의 모습이 나오는 걸 보더니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다른 손으로 재경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마치 제 긴장을 달래주려는 듯 다정한 손길이지만 재경은 더욱 뻣뻣해지고 있었다. 등에 닿은 정우의 손이 단순한 친구의 의미만을 담고 있지만은 않기에.

“미쳤어.”

일부러 이러는 거다. 아까 무대 아래에서 하려던 말이 이거였다. 내기, 그리고 그 결과에 승복하라는 것. 재경이 흘리는 말을 들은 정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재경의 귓가를 간지럽히던 숨이 멀어지자 정우의 얼굴이 똑바로 보였다.

수십 개의 조명이 비치는 무대 위.

정우는 재경을 빤히 바라보며 입술이 휘어지도록 환한 웃음을 자아냈다. 웃음으로 반쯤 가려진 정우의 눈동자에는 재경을 향한 강한 소유욕을 드러냈다.

재경이 정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이 MC의 목소리가 배경음처럼 들려왔다.

“투표는 총 두 번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여기 현장 투표가 1차가 되고 문자로 들어오는 응원 투표가 2차가 됩니다. 먼저 1차 결과를 공개한 후 순위 발표와 함께 총 점수를 발표하겠습니다.”

MC의 진행에 따라 재경은 정우를 힐끗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다. 1차 현장 투표는 같은 팀에 올라간 팀원끼리 가르게 된다. 즉 지금까지 계속 1위를 해오던 정우에게 표가 많이 몰리면 그만큼 제게 불리하게 되었다.

그래도 재경의 마음은 가볍기만 했다. 그는 처음부터 정우의 인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가 이번 결과에서 18위가 되는 건 어쩌면 예상가능한 결과였다.

“1차 투표 결과… 공개합니다! 먼저 8위부터 발표하겠습니다. 한찬형 연습생입니다.”

MC의 발표에 한찬형이 놀란 듯 얼떨떨한 시선으로 뒤의 전광판을 보았다. 정말 1차 투표 결과로 8위에 안착한 제 이름을 보다가 기쁜 듯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순서대로 7위, 6위, 5위의 이름을 호명했다.

이름이 불린 민태연, 헤이스, 권태하가 주변에 있던 연습생의 축하를 받았다. 재경은 점점 순위가 올라오는 것을 들으며 1위가 발표되는 순간, 정우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상했다.

재경은 미래에서 이 오디션의 1등이 정우라는 걸 알기에 남들보단 한결 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2위는 축하합니다, 윤하준 연습생입니다.”

MC의 호명에 하준은 전광판을 뜬 제 얼굴을 봤지만 기뻐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제 옆에서 축하해 주고 있는 소운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표정을 누르고 있었다. 제 점수가 높은 만큼 소운에게 적게 갔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재경은 만약 정우가 하준처럼 자신에게 미안해하면 그러지 말라고 눈치 줄 생각이었다.

“이제 1위를 먼저 발표하고 9위를 발표하겠습니다. 아직은 1차 발표라는 게 중요하니까 절대 잊지 마시고요. 중간평가 1위를 발표합니다.”

MC의 호명에 앞서 전부 숨을 죽인 듯 조용했다.

재경 역시 숨을 누르며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가 재경의 시선을 느끼며 돌아보았다. 둘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게 어떻게 찍힐지 모르지만, 재경은 정우의 표정을 실시간으로 보고 싶었다. 아직 중간평가래도 정우가 다 1위로 올라갈 걸 의심하지 않았다.

이번엔 너야, 재경은 언제든 축하할 준비를 하며 정우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드디어 MC가 길게 끌어왔던 긴장감을 깨며 외쳤다.

“축하합니다. 서재경 연습생!”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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